2007년 7월 12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7-15)
"As you go, make this proclamation: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drive out demons.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다.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는 곳이다. 사도들은 그 힘을 지녔다. 그러기에 그들은 앓는 이를 고쳐 주고 죽은 이를 일으키며 나병 환자를 낫게 한다. 그들이 평화를 빌면 그 집에 평화가 내린다. 주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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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에게 어느 기자가 “수녀님은 어디서 그런 에너지를 얻습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수녀님의 답변은 참으로 간단하였습니다. “성체 조배에서 힘을 얻습니다. 매일 성체 앞에 나아가 몇 시간씩 기도하면 제 안에 주님의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스승이신 예수님에게서 엄청난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리며, 마귀를 쫓아내고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특히 나병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던 것입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이러한 병까지 치유하는 능력을 지녔으니 사도들의 권위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능력은 예수님께서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지닌 능력이라고 착각했다면 어떠하였겠습니까? 상업주의로 흐르거나 자만에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늘 부족한 채로 살라는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그래야 스승에게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그 순간 제자들의 능력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제 앞으로 뛰어 오시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혹시 빠다킹 신부님 아니세요?”
“맞습니다. 제가 빠다킹 신부에요.”
그러자 가방에서 책을 꺼내시더니만, “제가 신부님 팬이에요. 이 책에 Sign 좀 해주세요.”라고 하시네요. 즉, 제가 쓴 책을 어디선가 구입하셨고, 그 책에 Sign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조금 쑥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거리에서 Sign을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 저는 일반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겉모습을 볼 때에는 신부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저를 알아보는 그 분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 짓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저는 상대방을 몰라도, 상대방은 저를 아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면서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한 공인들은 무척이나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그들은 연예도 제대로 할 수 없더군요. 누구와 조금만 가까워도 “누구 누구 뜨거운 열애 중” 식의 글이 다음 날 아침 신문 지상에 뜨게 되니까요.
요즘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한 공인의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과연 행복할까요?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별하다 함은 유명해질 수도 있고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당사자들은 평범함만큼 위대한 행복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공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시지요. 바로 사도들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공인이 된 것이지요. 따라서 그 만큼의 책임이 주어지며, 자신이 받은 모든 것들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우리 역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받은 능력과 재주를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사명이 없다고 그러한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에 또 한 명의 공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해서 보다 더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재주와 능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신앙인이라는 공인으로서의 생활을 똑바로 하고 있을까요? 반성해봐야겠지요?
신앙인이라는 공인임을 잊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맡기심
-남상근 신부-
예수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맡겨진 일을 알려주십니다.
이 일들은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앓고 있던 이들을 만나셨습니다. 이 일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의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친구였던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일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있던 이들로부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일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감탄할 만한 일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맡아 할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뜻은 이렇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아라, 보상을 바라지 말아라, 인정받기를 바라지 말아라,
행세하려고 하지 말아라, 티내지 말아라, 생색내지 말아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할 때, 그것은 주님의 일이기에, 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욕심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어깨가 으쓱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대단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임금을 모시고 가는 당나귀’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절을 하고 알아보지만,
그것은 당나귀 때문이 아니라 그 등에 타고 있는 임금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인데 가끔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러기에게서 배우다
-노성호 신부-
얼마 전 이어령씨가 쓴 「디지로그」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기러기에게서 배우다’라는 소제목이 딸린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겨울날 경쾌한 울음소리와 함께 V자 대형을 갖추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만날 수 있는데, 그 기러기한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러기는 비행을 할 때 금·은·동의 서열로 날지 않는다. 다른 짐승처럼 보스 하나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사회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생 관계가 이뤄지는 곳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V자 대열로 날아가는 것은 앞에서 나는 새가 날갯짓할 때 뒤에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러기 떼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더 멀리 날 수 있는데, V자 대형으로 날면 길도 잃지 않고 힘도 아낄 수 있어서 기러기들한테는 그야말로 빅토리(Victory) 사인이 아닐 수 없다.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뒤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선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팀장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러기들은 앞장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다. 힘의 법칙으로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협력과 질서에 의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가 함께 내려가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다. 그런 다음에야 두 마리의 기러기는 하늘로 날아올라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잡는다. 또한 기러기들은 서로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낸다. 뒤에서 나는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해서 큰소리를 낸다. 이렇게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었더라면 기러기 떼는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날면서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비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기러기한테서 공생의 모습을 배울 수 있어야겠다. 거저 받았으니 이웃을 위해 기꺼이 거저 내놓을 수 있는 모습 또한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 확실히 알고 모두 올바른 길로 인도해 나갈 수 있어야겠다.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 전열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갈릴래아에 복음을 선포할 때 지켜야 할 지침에 대해서 알려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하신 창세기의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아브라함의 그 신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이 파견되어 가는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기 위한 이 전적인 신뢰는 곧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 없음을 믿는 것이며, 그와 같은 하느님의 권능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견되어 가는 제자들과 세상속에 파견된 우리들에게 다음의 시편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시편121.5-7)
2.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 중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 8)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거저 준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말이죠! 꽃동네란 말만 들어도 우리는 이 말을 떠올립니다. 이 말을 떠올릴 때면 우리는 무척이나 행복하고 많은 것을 가진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실상 이 말을 잊을 때가 더욱더 많습니다. 늘 무엇인가 부족하고 늘 무엇인가 더 가졌으면 하는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고 오히려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거저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지금 자신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아무리 간편한 복장을 한 우리도 자신을 둘려보면 어딘가 치장이 있고 주머니 속에는 몇 가지의 물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타인에게 나누어 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나비효과’입니다. ‘나비효과’는 기상학에서 카오스 이론의 하나로, 기상의 이변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즉, 북경 하늘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한 만큼의 미미한 상황이 일어나도 그게 연쇄반응을 일으켜 뉴욕에서 태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아주 미소한 것도 기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효과는 ‘나비효과’처럼 불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머니의 것을 거저 주어 보십시오. 커다란 은총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움켜쥐면 그것 밖에 얻을 수 없지만, 움켜쥔 손을 펴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저 주는 것은 이익을 남기지 않고, 거저 주는 사람은 이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가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이익을 생각하고 이윤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하나의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봉사는 장사가 되어 버림을 잊지 맙시다.
끝으로 다음에 읽어드리는 ‘그’는 누구일까요?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급한 사람을 위해, 가운데 서지 않고 한쪽 옆을 비워둡니다. 고속도로에서도 추월할 때만 추월선을 잠시 이용하고 바로 주행선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는 많은 차들이 앞에서 끼여들기를 하든, 줄을 새로 만들든 묵묵히 자기 줄을 지키며 순서를 기다립니다. 유턴을 할 때도 순서대로 차를 돌립니다. / 그는 화장실에서 화장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다음 사람을 위해 화장지를 조금이라도 남겨둡니다. / 그는 자기가 마신 일회용 종이컵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제대로 버릴 뿐 아니라, 누군가 무심코 버린 종이컵과 휴지도 함께 주워서 버립니다./ 그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을 배려해주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즐겁게 삽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이 이만큼이나마 돌아갑니다. 아직은 그와 같은 사람을 자주 만나기가 어렵지만, 이 글을 듣는 ‘나’가 동참하면 그런 사람이 또 한 사람 늘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독서 : 죄를 통해서도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요셉이 예언한 바처럼 이집트에는 7년 동안 흉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흉년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인근의 모든 지역에서도 발생했는데 특히 팔레스티나 지역은 그 피해가 더 컸다. 인근 지역의 사람들은 이집트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에 오게 되었다.
이는 야곱의 가족이 요셉과 극적으로 재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흉년 중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시고자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가도록 섭리하셨으며(45,7-8),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당신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15,13,16).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서 모든 곡물의 매매를 관장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와서 요셉에게 절함으로써 일찍이 요셉이 꾸었던 꿈이 이루어졌다(37,5-9). 형들은 20여 년 전에 헤어져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요셉은 형들을 보자 이내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형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형들의 마음 상태와 더불어 연로하신 아버지 그리고 동생에 대한 태도를 먼저 알아보기 위하여 그처럼 행동한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3일후에 요셉은 형들을 불러 한 사람을 인질로 남겨두고 그 외의 형들은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되, 막둥이 동생(베냐민)을 반드시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베냐민은 유일한 동복(同腹) 형제로서 어머니 라헬의 죽음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에(35,18) 요셉은 16살 정도 어린 동생 베냐민을 각별히 사랑했던 것이다(43,34; 45,22).
형들은 자신들이 지금 당하는 뜻 모를 고난을 과거 요셉에게 행했던 범죄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이고 이를 뉘우친다. 맏형 르우벤은 요셉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형제들에게 충고한 것(37,21-30)을 회상하면서 형제들에게 피에 대한 대가(9,5)를 상기시킨다. 당시 야곱의 아들들도 노아 시대부터 내려오는 피 흘린 자는 반드시 그 피 값을 받게 된다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느님의 안배하심은 실로 오묘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미래에 당할 기근을 미리 아시고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어 모든 것을 담당하는 총리가 되도록 안배하셨다. 비록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들의 죄를 통하여서도 당신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구하실 준비를 하셨다.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아픔을 겪음으로써 사람을 믿기보다 오직 하느님을 믿도록 단련시키셨다.
또한 남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하며, 감옥에 갇히도록 하면서까지 단련시키시어 요셉으로 하여금 고난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와 인내심을 갖으며, 총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자가 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때가 이르자 요셉으로 하여금 이집트의 총리가 되도록 하심으로써 이집트와 당신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구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고통과 고난은 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기워 갚는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다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결코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의로운 고난이다.
그의 고난은 하느님 백성을 살리기 위한 고난이다. 때문에 그가 당한 고난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한다(골로 1,2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신다(욥기 2장).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이는 곧 세상의 죄와 내가 지은 죄의 대가이며, 이러한 죄를 정화하는 수단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정화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킴을 굳게 믿자............◆
우리의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히 임하자.
-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본 양식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는 단지 사도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역시도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자신을 복음화 하고 또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꿈,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이루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옳든 그르든지 판단할 여유 없이 바라는 것만 얻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누가 조언을 해주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후회하고 실망하곤 합니다. 반대로 결과가 좋게 나오면 자신의 방법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평생 살아가겠지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일반사람들처럼 똑같은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확연히 다른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두 가지가 복합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이 세상을 뛰어 넘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어야 하고 더 노력해서 분명히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많은 교우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지만 소수는 아직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교육, 결혼, 가족진로문제에 있어 뭔가 심상치 않고 자신이 없어 답답할 때, 대나무 있는 집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치는 않지만 가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 갔다와서 잘 해결되어 만족스럽다면 다음에 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반성을 하겠죠.
농담입니다만 교우들이 점보고 와서 모두가 원하는 대로 잘 되었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미신에 빠지지 않고 금전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하고 착실 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게 하기 위한 면에서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점보러 간다는 말은 농담입니다. '농담'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쓴다는 것은 그 속에 뼈가 있다는 것도 아시겠죠. 우리는 세례 때 했던 약속 '모든 미신과 허례허식을 끊어 버리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탁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의 지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너무나 무리한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금전'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말 그대로 '무일푼'으로 활동을 해야 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금전'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욕심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있어서 나쁜 것이 아니라 옳게 쓰지 않는 데서 오는 문제인 것입니다.
교우들이 내는 기본적인 교무금, 주일헌금 외에 회비나 후원금 내는 것도 아깝고 더구나 어려운 이웃에게 쓰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성직자?수도자, 서로 잘 아는 사람들끼리의 친분을 위해 쓰지 말고 예수님께서 아끼고 위하는 병약자,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쓴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의 실천이며, 우리의 사명인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은총을 거저 받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에서 조금 더 내어놓는 것이 뭐 그리 아까운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지침으로 두 번째는 가정이나 도시를 방문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도시는 차치하고 가정방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방문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에 쉽진 않습니다. 한 번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두 번 다시 하기를 꺼려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문전박대 당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본당신부로서 가정방문을 했을 때, 쉬고 있는 교우에게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를 권했으나 그 때 하는 말이 "당신이 뭔데 나오라 마라 그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말에 말문이 막히고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뒤돌아 나오면서 '쉬면 자기만 손해지' 생각하면서 푹쉬어라고 했지만 웬지 씁쓸했었습니다. 이왕이면 주님 말씀대로 '평화를 빌어주고 올 것인데….' 사실 평화를 빌어준다고 해도 손해 볼 것 하나 없는데 말입니다.
그 순간에는 이런 생각은 못하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박대하고 내 말은 듣지 않는 데서 더 기분이 나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복음을 전한답시고 내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 내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면 다 좋은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빌어 주는 평화가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에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에서 탈피해서 우리의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히 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충실히 이어가려는 저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 안에서 창조를 계속하고 계심을
-강신숙 수녀(성가소비녀회) -
신자들의 집을 방문할 때 현관에 ‘이 집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라는 글이 적혀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어떤 집에 들어갈 때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 듯합니다.
한 세기를 사는 동안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전쟁을 겪고, 갑작스런 재앙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오해와 다툼 등의 점철된 상처로 인해 선한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을 직시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식량과 여벌 옷도 없이 가난한 상태로 마을로 보내심으로써 겉모습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사람들을 진실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만나는 사람의 집에 머물면서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평화를 되찾아 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일러주시지만 끝내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고 부정적인 상태로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묻은 먼지를 털고 떠나라고 하십니다. 진정 평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열쇠는 우리 스스로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 중에도 과거의 상처나 아픔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품고 되새기면서 평화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고통을 스스로 떨쳐버릴 수 있음에도 가슴에 한을 품듯이 오래된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듯 내 안에서 창조를 계속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면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매순간 성령의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불안하고 어지러운 현대 사회이지만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불안과 선입관으로 성장을 멈추지 않고, 모든 과거와 고통을 디딤돌 삼아 더욱 성장하여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장재봉신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 있을 자리를 명하시며
그 할 일을 정해주신 하느님의 크신 지혜 앞에
과연 어떠한 찬미가 걸맞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된 우리에게 참 좋은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하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뽑아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1절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현존은 끊임없이 나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나 자캐오의 얘기에서 혹은 바오로사도의 경우처럼
주님은 전혀 주님을 알지 못하는 ‘나’를 먼저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분명한 하느님의 선택을 밝혀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야곱의 아들 요셉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농도 짙은
섭리의 손길은 오늘 나에게도 분명하게 다가와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그분의 섭리로 선택된 당신의 제자인 것을 깨닫는다면
결코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게으를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신 그 분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탁받은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실행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분의 평화로 가득할 수 있다는 정말 좋은 약속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 베풀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그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위해
당신 몸을 사리지 않고 고쳐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선을 베푸시기 전에 그 무엇보다 앞서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칫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이 약자를 돌보고, 앓는 이를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에 더해서 성당에 나오는 이유가 나쁜 짓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니까
혹은 좋은 강론 듣고 착한 일 하면서 마음에 평화나 얻으려는 것 뿐이라고 아주 겸손하게 말하는 신자분도 만날 수 있는데
정말 그것이 전부라면 굳이 성당에 나오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해야 할 바’를 알아야 합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저 받은 평화를 거저 주며 함께 누리는 일이
가장 우선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건네준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발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상대를 위해 빌어 준 평화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나에게 되돌아오는 하느님의 방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나발은 자기 재산을 지켜주면서 호의를 보였던 다윗을
무시하고 그가 빌어 준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서운하고 분한 마음을 하느님은 먼저 헤아리십니다.
다윗에게 죄를 피해가도록 마음 쓰시고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의 배려로
다윗은 완전한 평화를 맛보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아주 구체적인 평화를 느끼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믿고 택함을 받은 우리들이
그 명령에 따른다면
가장 안전하고 기쁜 평화가 내 앞에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강한 하느님의 용사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평화
-여성국 신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면 나누는 인사말이 바로 평화, 곧 ‘샬롬’입니다.
배고픈 시절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일상적인 인사였던 우리들처럼
수백 년간 나라 없이 떠돌아다닌 그들에게는 평화가 가장 절실하기 때문에
그런 인사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이라는 단어를 평화의
인사말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본다면 ‘샬롬’은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그들을 약탈해서 얻은 평화를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에게 ‘샬롬’은 억압을 요구하는 인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사용하는 ‘평화’라는
단어에 이중성이 있음을 진즉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저 편하게 대충대충 사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치열한 영적인 싸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평화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조건을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를 원합니까? 시련과 어려움이 뒤따르더라도
참된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원해야겠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도 돈도 지니지 마라.”
-양승국신부-
<우리가 가장 예수님을 닮을 때>
한 피정 강의를 가서 느낀 것입니다. 오신 분들 얼굴을 쭉 한번 훑어보니 금방 필이 오더군요. 많은 분들께서 나름대로 ‘한 사연’씩, ‘한 십자가’씩 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음 터놓고 하소연할 곳은 하느님뿐이라고, 최종적인 해결책은 그분만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안 분들이었기에 다들 편안해보였습니다.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리는 모습들, 간곡히 부탁드리는 모습들, 간절히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모습들 앞에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분들 앞에 어쩔 수 없더군요. 원칙만을 되풀이해서 강조할 수밖에.
“여러분들, 부디 힘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가장 예수님을 빼닮은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록 힘겹지만 지금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가장 큰 은총의 도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닮습니까? 매일 같은 음식을 먹어서? 같은 비누를 써서?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닮는 가장 큰 이유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고통당하고, 같이 십자가를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 불평불만하지 말고 꿋꿋이 견뎌나갈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얼굴은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로 변모되어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당신과 꼭 빼닮은 우리의 얼굴을 보신 예수님께서 엄청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목실습의 현장으로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중요한 지침과 행동강령을 전달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하면서 절대로 민폐 끼치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가 하면, 복음 선포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과 싸우거나 다투어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도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해서 전달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아내어라.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취해야할 노선이 무엇인지 아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은 사람들, 너무도 큰 십자가 앞에 어쩔 줄 몰라 서성이는 사람들, 환자들과 임종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 및 위로, 봉사, 이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가난하고 불행한 백성들을 위한 투신을 위해 교회는 늘 자신의 발밑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몸집이 비대해지면 비대해질수록, 소유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청빈생활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기 한 몸 챙기기에 바빠집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봉사, 복음 선포와도 같은 본질적인 사명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도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10,7-12)
-유 광수신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 내어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이시다. 즉 사도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들의 사명을 알려주신 말씀이다.
과연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 그 소식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일까? 가끔 전철에서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 믿고 천당에 가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이 지나쳐 가거나 아니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을 주면서 지나간다. 사실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도 바쁜데 무슨 하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어디 있느냐는 반응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하늘 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하루 24시간을 지내면서 하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거의 이 세상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를 생각하며 살지 하늘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늘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처럼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이처럼 하늘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다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라는 회의를 갖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실 우리 자신들도 하늘 나라에 대해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좀 착하게 사는 이야기 이외에 새로운 것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대해 사람들이 호감을 갖을 수 있도록 재미있고 기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들도 아직까지 하늘 나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그리고 가까이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눈으로 확인되고 기뻐하고 놀랄 수 있는 일들을 하라고 분부하셨는지 모른다. 즉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로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 내고 불치의 병이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 내도록 하셨는지 모른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해 기뻐할 것이고 놀라워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 두더라도 아마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 자신부터도 놀랄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내며 나병환자들을 고쳐 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것이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오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얼마나 신이 나고 보람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고 예수님이 음식을 먹을 겨룰 조차 없었다고 할만큼 성직자 수도자들은 교회를 찾아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눈코 뜰새없이 바쁠 것이다. 교회를 짓는 일도 쉬울 것이며 시노드 같은 번잡스러운 일도 필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오늘 날 교회가 또 복음을 선포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지만 앓는 이들을 고쳐주지도 못하고 죽은 이들을 살려내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 할터인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도 힘 빠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아무런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또 놀라지도 않는다.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니 하느님한테 받은 은혜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가 맥빠지고 조금 교회에 나오다가 이런 저런 핑계를 되고 떠나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이다. 아니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포해야하는 하늘 나라란 무엇인가? 무엇을 선포한다는 것인가? 과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내고 나병환자들을 깨끗이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늘 나라란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고 그 하느님의 법은 복음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하늘 나라란 이 세상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법인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의 가치관, 행복관에 의한 삶에서 복음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선포하신 복음에 의해 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깨닫는 삶이다. 복음을 모르는 것이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이며, 복음에 의한 새로운 삶을 살지 않고 세상 것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이 죽은 이들이며 나병 환자들인 것이다. 반대로 이 세상 것에 의한 삶이 아니라 복음에 의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 받는 것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이며 나병에서 깨끗이 치유 받는 것이다.
사도들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가까이 온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가 해야할 일이다. 소를 강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하늘 나라를 가까이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그 가까이 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가까이 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선포된 복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때부터 서서히 그 동안 내가 앓고 있던 병들이 치유되고 죽었던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할 것이며 나병이 깨끗이 낫고 마귀가 나가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 우리 안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도록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보자. 그러면 반드시 하늘 나라란 어떤 나라인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박상대 신부 -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이 특별히 선발되어 사도로 임명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리옷 사람 유다가 뽑혔다. 사도행전은 추가로 유다를 대체한 마티아(사도 1,16-26), 그리고 바울로와 바르나바(사도 13,2)를 사도로 소개한다. 그들은 학생의 신분과도 같은 제자(弟子)였다가 이제는 전권대사의 의미를 가진 사도(使徒)로 임명되어 파견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이 파견되는 장소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도 아닌, 오직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로 국한되었다. 그들에게 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오복음의 독자(讀者)가 우선적으로 유다인, 또는 유다인 계통의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 끝까지를 대상으로 한 복음선포를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주실 것이다.(마태 28,19)
사도들에게 대한 예수의 파견설교(10장)가 계속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인 예수께서 해오시던 일과 같다. 우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표지로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행하게 될 기적의 능력은 예수께서 거저 주신 것이므로 그들도 거저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성과도 얻겠지만 실패도 맛보아야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주 엄한 여장규칙(旅裝規則)을 제시하신다. 이 규칙에 의하면 어떠한 여벌의 것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철저한 청빈(淸貧)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의무도 암시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격은 철저히 복음선포에 메여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비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시기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교에도 똑같은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전성기를 맞이한 중세시기 이후 교회 안에서는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선교규칙(宣敎規則)을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 있다. 교회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는커녕 거저 받은 것을 미끼로 부(富)를 축적하였다.
가난하고 길 잃은 양들을 찾기보다는 있는 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정치와 경제에 크게 관여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신약성서 시대까지 있었던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능력도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일만큼은 잘했다는 것이다. 단죄하고 파문하는 일이 교회의 일상(日常)이 된 셈이다.
현대의 교회 모습도 중세기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선포자들에게 구마의 능력도 치유의 능력도 없어 보인다.
둘째, 선교상의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원칙이 자기 합리적인 이유로 거세(去勢)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틀어 이 원칙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은 몇 안 된다.
셋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릴 정도까지의 단죄(斷罪)’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선교방법은 선교대상의 문화적 수용과 더불어 타협적으로 이루어지며, 오히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신자(信者)들과 ‘냉담자(冷淡者)’들에 대한 내부지향적 사목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회이며, 누구로부터 파견된 교회인지?” 교회는 오늘 복음의 선교규칙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지 않도록 다시금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오늘 복음에 자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야 하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기적보다는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가진 바를 서로 나누면서 세상에 정의와 사랑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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