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출발하였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각각 그 지파에 소속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부르셨다. 이러한 부르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두신 계획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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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회적인 신분의 출신입니다. 으뜸 제자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어부 출신이요, 제베대오의 아들로 소개되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닮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뛰어난 스승은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전수받을 제자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거부하는 인물까지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싫어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관리들은 제국에 협조하지 않는 유지들을 세리를 내세워 괴롭혔습니다.
시몬은 열혈당원 출신입니다. 그들은 로마 세력에 폭행을 일삼는 무력 집단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에서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들 제자들이 지녔던 가장 큰 장점은 단순함입니다. 단순해야만 진리에 빨리 다가갈 수 있다고 스승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새벽을 열며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요즘 저는 시간이 될 때마다 가정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모든 구역을 다 돌지를 못해서, 일주일에 3번 정도는 꼭 방문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었지요. 어제도 이 약속의 일환으로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지난주에 방문할 구역의 구역장님께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일기예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인해서 전국에 비가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오면 방문하기가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은 물론, 방문을 받는 집에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어제는 우리 성당에 부제님이 부제실습을 나오는 날이어서 부제님을 맞이해야 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했지요. 비 오는 내일은 그만 두고, 비 오지 않는 날에 방문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구역장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비가 많이 온다니까 돌아오는 목요일로 연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어제 아침,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성당의 마당은 빗줄기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도 조금 흐리기는 했지만, 장맛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약간의 이슬비를 보기는 했지만). 심지어 낮에는 햇빛도 볼 수 있었다니까요. 가정방문을 하지 않음이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집에서는 제가 온다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기다렸을 텐데…….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며, 특히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자신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행하지 않았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뽑고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뽑지 않았습니다. 만약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뽑았다면, 주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 위주로 선발했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필요한 계통으로 가려서 뽑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딱 한 가지 원칙만 적용하셨어요. 바로 사랑의 원칙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바로 사랑의 원칙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단지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면서 기쁨의 복음인 사랑의 원칙만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 원칙을 간과합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원칙만을 나의 원칙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사랑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을 닮아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사랑의 원칙을 가장 먼저 생각하세요.
빠다킹신부
부족을 들어 쓰십니다
-남상근 신부 -
열두 명을 불러 세우십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인선 기준은 우리들과 사뭇 다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의 역할,
그들의 생각 혹은 배경을 들여다보십시오. 제자들의 면면만을 볼 때
인간적으로는 ‘별로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신 기적도 목격했건만 제자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그분을 부인하고 심지어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시려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것들과 반대라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오히려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잘난 체하는 것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미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부족함은 하느님께 나가는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 나가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못한다 마십시오. 부족하기에 더 사랑받는다 하십시오.
사랑스런 동생들
-노성호 신부(수원교구 모산골 천주교회)-
누구의 반대나 걱정도 듣지 않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결심했던 나는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문제는 하나뿐인 동생이 대학 진로를 앞두고 선전포고(?)를 하듯이 “형 따라서 신학교 가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한집안에 사제 한 명 만들기도 힘든데 둘씩이나 왜 이러는지 걱정도 많이 되었고, 자식 교육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의 뜻도 있어서 집안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동생과 어울렸던 친한 친구들 셋이 갑자기 무슨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한꺼번에 신학교를 지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한테는 성격도 각양각색이고 재능도 각각 다른 사랑스런 동생들이었는데 갑작스런 진로 결정으로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로는 기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녀석은 누나만 넷 있는 집안의 막내둥이 외아들이었고, 한 명은 독자(獨子), 내 동생과 나머지 한 녀석은 형만 한 명씩 있었는데 둘 다 당시 신학생이었다.
열두 사도를 뽑으셨을 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와 동생들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당신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당시를 회상해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여러 가지 묵상을 하도록 나를 초대하시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나는 사제가 되었고, 내 동생과 누나들만 있는 막둥이 외아들 녀석은 7월에 부제품을 받는다. 다른 형제가 없는 외아들은 사정상 내년 이맘때 부제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형제는 우리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다시 뽑아주셨다. 형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동생은 천국에서 별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면서 우리 모두를 지켜봐 주도록 택하셨다.
예수께서 우리 6명을 뽑으신 시기나 모습, 그리고 선택받은 우리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한테도 이렇게 분부하셨을 것이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그래서 지금 우리 여섯 사람은 그 분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해 나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양승국신부-
<나만의 감실 하나>
베네딕토 성인께서 살아가셨던 시대는 전쟁과 혼란, 그로 인한 민족들의 대이동 시대였습니다. 힘겹게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봐야 허사였습니다. 약탈이 수시로 반복되었습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불안정했습니다.
이러한 시대 베네딕토 성인은 정주(定住) 수도회를 설립함으로써 시대의 요구에 응답합니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고 웅장한 수도원을 설립합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이 이곳 저 곳 떠돌아다니지 않고 고요하게 정진(精進)할 수 있는 관상 수도회의 기틀을 닦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수도회를 건립하고, 수많은 수도자들의 참된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기까지는 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때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 한 동굴 안에서 3년간이나 홀로 생활했습니다. 그 외로운 나날을 통해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베네딕토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과 대면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맞붙어 힘겹게 싸워나갑니다. 철저한 고독과도 투쟁합니다.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베네딕토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점차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베네딕토의 삶에 매료된 입회자들이 점점 늘어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리원칙주의자였던 베네딕토를 견디다 못한 수도자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워낙 대쪽 같던 베네딕토였기에 아직 그들의 나약함과 미성숙함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베네딕토의 열성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 수도자들은 독살(毒殺)까지 시도합니다. 이처럼 베네딕토 역시 흔들렸습니다. 난관 앞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런 험난한 여정을 거치면서 베네딕토는 서서히 내공을 쌓아나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자리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영혼의 바탕을 마련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그 누구도 점령할 수 없는 견고한 성채 하나를 건설합니다. 거룩한 감실 하나를 준비합니다.
이제 베네딕토는 그 어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도 동요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평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감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만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참 지도자, 참 스승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안에 참 평화를 확립한 베네딕토에게 있어 주변 환경은 점점 밝고 풍요롭게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평화롭게 되었고, 내적, 외적 사슬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확고하게 마련한 베네딕토에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몰입이 가능해진 베네딕토는 그간 자신을 덮고 있던 막 하나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을 통해 세상과도 하나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존재와 쉽게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니 용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 체험은 산더미처럼 쌓인 우리들의 문제와 고통들을 하느님 자비의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게 합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하느님 체험을 거친 베네딕토였기에 만년에 다가온 죽음조차도 친구로,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쳤습니다. 선채로 열렬히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 품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돌이켜보니 수시로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입니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심각한 상처를 받습니다. 난 데 없이 다가온 돌 하나에 죽느니 사느니 난리입니다. 외부 환경적 요인에 너무나 민감합니다. 삶이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짜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베네딕토처럼 우리 내면 안에 우리만의 자리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 그분만을 모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그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시는 한, 그 어떤 세상 풍파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 전열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먼저 열두 제자를 살펴보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마태10,2-4)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이 우리의 마음에는 전혀 차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개인과 기업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을 뽑습니다. 가장 유능해 보이는 사람을 뽑아 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똑똑한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부분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지만 학식이 깊지도 않았고, 집안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인격이 출중하거나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도 없었지요. 대체적으로 무식한 어부들이 제일 많았고, 항간에 소문이 안 좋았던 세리 마태오도 있었으며 혁명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인물이 없었지요. 그런걸 보면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우리의 선택 기준과 참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볼품없는 사람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기준은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이 무엇이냐 하는 것 보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혜와 능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쓰여질 때 큰 결실을 맺을 수 있고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의 특징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세우는 허풍쟁이도 아니었고, 열등감으로 뒤처져 있는 비굴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그 제자들 중에 낄 수 있다는 용기도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나, 스스로 자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각건대,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 진실된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선택기준이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실현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더 잘사는 세상’이라고 낙담하지 말고 진실하게 살아감으로써 당신의 빛을 전해야겠습니다.
2.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과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을 주십니다.
병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더 나아가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령이 들린 사람은 타인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됩니다. 악령이 그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버려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병이든, 악령이든 그것의 폐해는 사람을 더욱더 자기 중심적으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배려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아내게 하셨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사람다운 모습을 갖고 살도록, 그리고 공동체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사회가 병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병폐들을 고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파견된 자임을 잊지맙시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나를 온전히 살 수 없도록 하는 병의 원인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독서> : 죄를 통해서도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요셉이 예언한 바처럼 이집트에는 7년 동안 흉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흉년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인근의 모든 지역에서도 발생했는데 특히 팔레스티나 지역은 그 피해가 더 컸다.
인근 지역의 사람들은 이집트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에 오게 되었다. 이는 야곱의 가족이 요셉과 극적으로 재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흉년 중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시고자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가도록 섭리하셨으며(45,7-8),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당신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15,13,16).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서 모든 곡물의 매매를 관장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와서 요셉에게 절함으로써 일찍이 요셉이 꾸었던 꿈이 이루어졌다(37,5-9). 형들은 20여 년 전에 헤어져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요셉은 형들을 보자 이내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형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형들의 마음 상태와 더불어 연로하신 아버지 그리고 동생에 대한 태도를 먼저 알아보기 위하여 그처럼 행동한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3일후에 요셉은 형들을 불러 한 사람을 인질로 남겨두고 그 외의 형들은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되, 막둥이 동생을 반드시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베냐민은 유일한 동복(同腹) 형제로서 어머니 라헬의 죽음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에(35,18) 요셉은 16살 정도 어린 동생 베냐민을 각별히 사랑했던 것이다(43,34; 45,22).
형들은 자신들이 지금 당하는 뜻 모를 고난을 과거 요셉에게 행했던 범죄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이고 이를 뉘우친다. 맏형 르우벤은 요셉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형제들에게 충고한 것(37,21-30)을 회상하면서 형제들에게 피에 대한 대가(9,5)를 상기시킨다. 당시 야곱의 아들들도 노아 시대부터 내려오는 피 흘린 자는 반드시 그 피 값을 받게 된다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느님의 안배하심은 실로 오묘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미래에 당할 기근을 미리 아시고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어 모든 것을 담당하는 총리가 되도록 안배하셨다. 비록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들의 죄를 통하여서도 당신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구하실 준비를 하셨다.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아픔을 겪음으로써 사람을 믿기보다 오직 하느님을 믿도록 단련시키셨다. 또한 남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하며, 감옥에 갇히도록 하면서까지 단련시키시어 요셉으로 하여금 고난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와 인내심을 갖으며, 총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자가 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때가 이르자 요셉으로 하여금 이집트의 총리가 되도록 하심으로써 이집트와 당신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구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고통과 고난은 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기워 갚는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다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결코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의로운 고난이다.
그의 고난은 하느님 백성을 살리기 위한 고난이다. 때문에 그가 당한 고난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한다(골로 1,2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신다(욥기 2장).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이는 곧 세상의 죄와 내가 지은 죄의 대가이며, 이러한 죄를 정화하는 수단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정화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킴을 굳게 믿자...........◆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당신과 똑같은 권능을
-강신숙 수녀(성가소비녀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당신과 똑같은 권능을 주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파견이란 ‘어떤 임무를 맡겨 어느 곳에 보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라는 임무를 받아 파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철저히 예수님의 뜻을 이해해야만 파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파견받기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마치 미국이 이라크 침공 이후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많은 국민들이 파병을 반대한 것처럼 말입니다. 실로 명분 없는 전쟁을 위한 파병 과정에서 죄 없는 사람이 살해되기도 하는 등 위험을 겪으면서 한국은 결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의 뜻을 이해하는 파병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악에서 구하시고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자유로움을 되찾아 주시는 예수님의 행위가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함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길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바로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주위, 내 이웃을 먼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내 가족을 돌아보고, 내 주변을 살펴봅시다. 혹시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는지, 마음 상한 부분이 있는지,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사랑으로 내 가족과 주변을 건강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오늘 나를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뜻일 것입니다.
사랑스런 동생들
-노성호신부-
누구의 반대나 걱정도 듣지 않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결심했던 나는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문제는 하나뿐인 동생이 대학 진로를 앞두고 선전포고(?)를 하듯이 “형 따라서 신학교 가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한집안에 사제 한 명 만들기도 힘든데 둘씩이나 왜 이러는지 걱정도 많이 되었고, 자식 교육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의 뜻도 있어서 집안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동생과 어울렸던 친한 친구들 셋이 갑자기 무슨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한꺼번에 신학교를 지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한테는 성격도 각양각색이고 재능도 각각 다른 사랑스런 동생들이었는데 갑작스런 진로 결정으로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로는 기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녀석은 누나만 넷 있는 집안의 막내둥이 외아들이었고, 한 명은 독자(獨子), 내 동생과 나머지 한 녀석은 형만 한 명씩 있었는데 둘 다 당시 신학생이었다.
열두 사도를 뽑으셨을 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와 동생들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당신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당시를 회상해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여러 가지 묵상을 하도록 나를 초대하시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나는 사제가 되었고, 내 동생과 누나들만 있는 막둥이 외아들 녀석은 7월에 부제품을 받는다. 다른 형제가 없는 외아들은 사정상 내년 이맘때 부제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형제는 우리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다시 뽑아주셨다. 형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동생은 천국에서 별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면서 우리 모두를 지켜봐 주도록 택하셨다.
예수께서 우리 6명을 뽑으신 시기나 모습, 그리고 선택받은 우리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한테도 이렇게 분부하셨을 것이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그래서 지금 우리 여섯 사람은 그 분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해 나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장재봉신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신화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내려주신 마지막 처방이십니다. 우리는 이 처방으로 죽음을 택할 수 있고,
영생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는 반면
전혀 그를 믿지 않고 핍박하는 부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일에는 ‘중간쯤’, ‘적당히’
또는 ‘그저 그렇게’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구세주이시고 구속자이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강한 힘을 믿고 의탁하는 쪽에 서지 않는다면
그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박해하는 쪽에 설 수밖에 없는,
단호하고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전해 듣고 예수를 향해 “몰려 들며”
앞 다투어 예수님을 만지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모한다할지라도
그 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하느님을 귀찮게 하고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내 욕심을 위한 도구로 그분을 사용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빵을 받고 말씀을 듣고 탄복하며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걸려 넘어진 사람도 많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오심은
큰 축복이기도 하지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버리고 따라 나서는” 단호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필요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은 바로 “나를 따라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홀로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는
우리들을 불러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 두 사도를 이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구원사업을 이어가도록 명령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위해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과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는 일은 하늘의 천사에게 맡겨지지 않고
바로 ‘나’,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의 임무는 이렇게 막중합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이 세계를 정복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내려져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아니라
나 하나의 완전함이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하느님은 믿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이렇게 넓고 큰 안목을 지니는 일입니다.
좁고 근시안적인 내 시야를 넓혀서
하느님의 왕국에 든든한 반석이 되는 것이
우리의 할 바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기죽지 맙시다
- 이 찬홍 신부-
여러분의 자녀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다닌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자녀를 때리는 사람에 대한 분노보다, 맞고 다니는 자녀에게 더 화가 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기고, 똑똑하게 태어났습니다. 실제, 자녀들 역시 똑똑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녀가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의기소침하고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생활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냐?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생활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 12사도를 부르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우리가 자녀들에게 격려하고 용기를 주듯이, 하느님 역시 우리에게 그러하시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는”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불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사도로 불림 받은 것보다 더 큰 특권을 부여 받은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느니, 더 이상 의기소침하거나 기죽은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으로 근심, 걱정,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당당히 물리치며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실제, 주위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고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인 악마를 �아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너무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그렇게 숨을 죽인채로 고개 숙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인이 아니라,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너 죄인이야, 나에게 잘 보여, 그래야 구원받아!’ 라고 말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사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것에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기쁘게 살아가거라. 너 스스로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단다. 너 스스로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단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
-이기양 신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㰡우리 성당이 앞으로도 백 년, 이백 년… 계속해서 시대를 살아갈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은 성당으로써 전통 있는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까?㰡‘
누구나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런 교회의 기초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목자로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어떠한 성당이 가장 좋은 성당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올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을 자랑하고 예술의 극치를 모아 놓은 그런 성당일까요? 아니면 좋은 나무들로 꽉 차있어서 들어가면 편안하고 나름대로 기품이 넘치는 그런 성당이 좋은 곳일까요? 저는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성당은 복음을 담고 실천하는 신자들이 많이 모인 성당일 것입니다. 그런 성당이 좋은 성당이고 그러한 모습을 담고 있는 성당이 사람이 보기에도, 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은 성당이지요.
결론은 역시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좋은 성당을 이루는 관건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요즈음 많은 기업인들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합니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상의하고 연구하고 있지요. 지금까지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등의 분야가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왔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을 차세대 원동력으로 삼아야 되느냐를 오랜 시간 진지하게 논의했고 그 결론은 㰡사람㰡‘으로 귀착이 되었습니다. 결론이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이치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그렇게 힘들여 얻는 모습이 어리숙해 보일 정도이지요.
한 나라가 크게 발전하려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 덕망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회사가 발전하려면 그 회사의 사장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요즈음 더러 뜻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재평가하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독재자였다는 설과 함께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으로 이룩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요. 물론 그 말도 맞지만 무엇보다도 숨은 공은 국민들의 㰡교육열㰡‘일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고자 했던 교육열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고 특별한 자원과 축적된 기술이 없는 우리나라가 지금의 모습과 미래를 만들어갈 바탕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역시 결론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또 공감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삼십 년을 준비하셨고 이제 삼 년의 공생활을 하시는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당신이 떠나간 이후에도 하느님의 일을 지속할 사람들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일을 물려줄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열두 명의 제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면 우리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 안에 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해야 하는지를 견주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면모를 보면서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㰡’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㰡“(마태10,2-4)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이 우리의 마음에는 전혀 차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개인과 기업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을 뽑습니다. 가장 유능해 보이는 사람을 뽑아 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똑똑한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부분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지만 학식이 깊지도 않았고, 집안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인격이 출중하거나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도 없었지요. 대체적으로 무식한 어부들이 제일 많았고, 항간에 소문이 안 좋았던 세리 마태오도 있었으며 혁명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인물이 없었지요.
특히 그 중에 수제자로 뽑아 놓은 인물이 베드로 사도인데 그는 제자단의 대표가 될 만큼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꺼번에 망치기 십상인 다혈질의 사람에게는 리더십을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람에게 지도자의 자질이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하셨습니다. 학식과 지식과 재산도 없는 다혈질의 베드로 사도를 뽑으셨지요. 그에게 무슨 장점이 있어서 인정하신 것일까요? 우직하게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충동적이었지만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는 베드로의 충성심 하나는 남들과 달랐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눈여겨 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왜 똑똑한 사람을 제자로 뽑지 않으셨을까요? 신앙의 눈으로 돌아다보면 재산과 학식, 건강과 지혜 이 모든 원천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걷어 가시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하느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제일 필요하지 않으셨을까요? 지식과 부가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스승의 뒤를 이은 이 무식한 제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열매를 맺고, 인류 역사 속에서 이천 년이 넘는 지속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장본인들은 이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만든 기업도 100년, 200년을 넘기기가 어렵지요. 세월이 흐르면 망하고 망하지 않으면 주인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고 지속되는 공동체가 있으니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만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만약에 우리 기준대로 제자들을 뽑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권력과 재산을 쌓아놓은 사람들을 뽑아 놓았다면 아마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모두 도망가거나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빈털터리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다녀봐야 노숙자처럼 변두리 인생이 될 것이 뻔하다는 것을 똑똑한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지요. 또 학식과 지혜가 출중했다면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모면하기 위한 변론을 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도 놓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물론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은 다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을 때 그 길이 지속된다는 것을 이천 년 그리스도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본당 공동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똑똑하다거나,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하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반장, 구역장, 단체장, 사목위원 등 교회 봉사자를 새로 임명하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㰡’저는 신심도 부족하고, 지식도 없고, 리더십도 없어서…㰡“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그렇게 쉽게 대답하는 것은 신자로서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미사에는 특히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또 본받으려고 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가장 복된 여인이 되게 만든 바탕은 단 하나였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지요.
㰡’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㰡“(루카1,38)
하느님의 뜻이라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접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거룩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초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르고 받아들이겠다는 성모님의 그 정신을 배우겠다고 지금 우리가 레지오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서 정작 어떤 일이 맡겨질 때는 㰡’바빠서요, 능력이 부족해서요, 하기가 싫은데요…㰡“ 이런저런 핑계가 다 나오지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㰡’예㰡“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자가 많은 공동체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이고 그것이 가장 복음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바탕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천 년 그리스도 교회의 초석을 만드셨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어가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㰡’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㰡“(마태28,20)
제자들은 지식도 지혜도 재산도 권력도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㰡’예㰡“하고 응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고 이 믿음이 바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바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적인 공동체에 요구되는 기본 요소이지요. 우리 성당이 백 년, 오백 년, 천 년의 전통을 지니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성모 마리아처럼 㰡’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㰡“(루카1,38)하면서 받아들이고 항구하게 믿는 그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본당 신부에 대한 순명도, 수도자에 대한 순명도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을 도구로 맡겼을 때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역사를 이루시고 결실을 맺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열두 제자의 부르심을 통해서, 또 그들의 일생을 통해서, 그리고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과 욕망을 접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뽑힌 열두 제자들이 이천 년 그리스도교 초석을 다졌듯이 바로 여러분들이 우리 성당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주인공이 되시리라고 믿습니다.
일꾼은 적다(마태 9,35-1`0,1.6-8)
-유 광수신부-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신다. 수확할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이미 모든 곡식은 영글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찾으시는 일꾼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다 해 놓으셨고 다만 수확할 것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수확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일꾼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일꾼은 처음부터 자기가 무엇을 시작해서 어떤 결실을 맺게 하고 그 결실을 거둬서 주인님께 갖다 바치는 일꾼이 아니다. 씨를 뿌려서 수확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일은 이미 예수님이 다 해놓으셨다. 일꾼이 해야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것을 거두어 들이는 일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항상 예수님이 시작하신다. 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아버지는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그 일을 할 일꾼으로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명하시면서 인류 구원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이라는 구원사업을 완수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누군가가 예수님이 완성해 놓은 구원 사업을 계승해서 일 할 일꾼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의 일을 계속할 열 두 사도들을 뽑으셨고, 교육시키셨고, 파견하셨다. 제자들은 인류 구원을 위해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의해 완성시켜 놓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워 들이는 일만 하면 된다. 열두 제자들에 의해 이 일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어져야 하고 또 열 두 사도들에 이어서 계속해서 그 일을 할 일꾼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는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방법에 의해 수확을 거두워 드려야 한다.
그 일에 불리움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예수님이 하신 방법대로 수확을 거두워 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꾼은 많지만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워 드리려고만 하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워 드리는 일꾼은 많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예수님의 일꾼들이지만 정말 믿을만할 일꾼은 많지 않다. 수확할 것을 거두워 드리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것만 챙기기 위해 일을 하려는 경향이 많다.
수확할 일꾼이란 어떤 일꾼인가?
첫째, 무엇보다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가엾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모성애를 느끼는 마음이다. 마치 자식이 병들어 아파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마음에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다. 목자 없이 헤메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목자를 찾아 주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다.
둘째,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고을과 마을들을 두루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수확을 거둘 일꾼은 자기 말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려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을 먼저 읽고 묵상한 사람만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셋째, 모든 아픔과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늘 나라의 복음만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 내어라."고 하셨다. 어떻게 하면 모든 질병을 고쳐 줄 수 있는가? 목자 없는 양들이기 때문에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서 병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고쳐 주려면 무엇보다 양들이 먹고 마실 것을 주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면서 먹고 마실 것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제 수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해야할 사람들이고 그 일을 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꾼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으로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 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3, 14-15) 즉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게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엾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수확할 힘을 길러내고, 수확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는 것이요,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성무 일도서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이 내 눈은 밤새도록 떠 있나이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이시며, 나의 구원이 되셨나이다. 그분은 나의 하느님이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겠으며, 나의 선조의 하느님이시니 어찌 우러러 영광 드리지 않으랴."(시편 118 과 출애굽 15,2)고 찬양하고 있다.
† 12사도 선발의 기준은 무엇인가?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사도로 명하고, 이들에게 권능을 주어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갈릴래아를 무대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시던 예수께서는 곧바로 사람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이 인류, 즉 사람이라는 점이 그리스도 강생(降生)의 핵심이다. 인간의 구원협조는 하느님의 소명(召命)아래 천지창조 때부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수행되어왔다. 하느님 소명의 절정(絶頂)은 두말할 것 없이 성모 마리아의 소명이다.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교회(敎會)의 소명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배를 손질하던 어부출신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마태 4,18-22)으로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예수님의 복음과 수많은 병자치유의 기적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람들이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몰려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태 4,25)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그 많은 무리의 제자들 중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셨다. 제자(弟子)들은 많았지만 사도(使徒)로 뽑힌 사람은 열둘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많은 제자들 중에 오늘 복음에 거명(擧名)된 사람들만 사도로 선발되었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지만 마태오복음사가의 의도 또한 수긍해 볼만하다.
사도선발의 기준은 어떤 특별한 조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복음에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 집성문(8-9장)에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놀라움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적어도 이 믿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전파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使徒)로 선발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배반자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왜 사도로 선발하셨을까? 이렇게 따지자면 베드로도 멀리 못 간다. 베드로도 유다에 못지않게 스승을 배반하였다.(26,69-75)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27,3-5),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러는 이상의 가치를 지닌 순교(殉敎)로 스승을 따라갔다. 결국 선발은 예수께서 하시지만 사도로서의 실존(實存)은 스스로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며, 사도로서의 진가(眞價)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 밝혀 줄 것임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바탕으로 제각기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사도로서의 진정한 태도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병자와 노약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등 세상의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베풀며, 길 잃은 양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도는 그에게서 이름만 있을 뿐 아무 의미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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