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오 10,20 )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슬기롭고 순박하게 살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하신다. 신앙 때문에 잡히더라도 아버지의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므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신다. 이는 순교자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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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입니다.
소년 마리오와 안셀모는 아주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마리오가 수도원에 들어가자 안셀모는 친구에게 말하였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할게.” 그 뒤로 안셀모는 마리오를 위하여 정성을 다해 기도하다가 결국 마리오가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마리오를 보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안셀모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마리오는 사제가 되어 첫 설교를 하였습니다. 안셀모는 떨리는 가슴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마리오 역시 군중 속의 안셀모를 보는 순간 용기가 솟았습니다. 수도원이 생긴 이래 최고의 설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청중은 감동했고, 마리오는 단박에 위대한 설교가로 떠올랐습니다. 여러 곳에서 설교 요청이 들어왔고,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안셀모 수사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리오는 명성이 자자한 주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셀모 수사를 우연히 만났으나 너무 바쁜 나머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오 주교는 안셀모를 조금씩 잊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오 주교는 여느 때처럼 설교를 시작했는데 어쩐 일인지 불안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공허해졌습니다. 지난날의 습관처럼 안셀모 수사를 찾았으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안셀모가 몹쓸 병을 얻어 바로 전날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는 운명하면서도 마리오 주교가 걱정할까 봐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뒤로 마리오 주교의 설교는 번번이 청중에게 별 감동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청중의 실망스러운 눈빛에 마리오 주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예전처럼 영혼을 휘어잡는 강렬한 설교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오 주교는 ‘안셀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주체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임을 깨달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오후에는 가정방문을 다녀왔습니다. 사람들은 가정방문 다니는 저에게 “힘드시죠?”라면서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사실 힘듭니다. 그런데 가정방문 하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고 다른 이유 때문에 무척 힘듭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힘들까요? 바로 제가 방문했다고 주시는 음료수와 각종 간식 때문입니다.
제가 방문하는 가정에서는 신부가 오랜만에 방문을 하니까 음료수 하나라도 대접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방문하는 집이 몇 군데겠습니까? 한 두 집도 아니고 하루에 보통 3~40집을 방문하는데 집집마다 음료수 한 잔씩만 마셔도 그 양이 얼마나 많겠어요? 물론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다른 데에서는 드시지 마시고 여기서만 한 잔 드세요.”
그 집에서만 한 잔 마시고 다른 곳에서는 안마시면 상관이 없겠지요. 그런데 이 집에서는 마시고, 다른 곳에서는 안 마실 수도 없습니다. 서운해 하시니까요. 더군다나 이렇게 음료수를 많이 마시다보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방문하는 집에 가자마자 먼저 화장실부터 들리는 것도 예의에 맞는 것 같지 않아서 음료수 마시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저를 위한다고 하시는 행동들이 사실은 저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행동이지요. 그런데 저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저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실상은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행동과 생각은 불완전한 ‘나’라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즉, 세상에 나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지혜로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뱀을 예로 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뱀은 창세기에도 언급되듯이 가장 간교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은 동시에 땅을 기어 다니면서 자기 갈 곳을 알고 위험을 미리 피한다고 하네요. 이처럼 사태 파악을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한 순수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내 생각과 뜻대로 행동하면서 주님의 길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지혜롭지도 않고, 또한 순수함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은 아닐까요?
자신의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큰 아픔과 상처도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의 말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혜롭고 순수한 마음으로 나의 이웃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세상에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사십시오.
빠다킹신부
나를 싫어하게 하라
-남상근 신부-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꺼리지 않는다면
수상한 것입니다. 마냥 좋기만 한 평가를 받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일치하지만은 않는
법입니다. 독불장군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새겨보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미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내 삶에서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
더러 미움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꽉 막혔어’ 내지는
‘융통성이라곤 도무지 없네’, ‘혼자서만 거룩한 척하네’,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튀게 살아.’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삶이 복음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모두로부터 받는 인정을 구할 것이 아니라, 미움받을 것을
불사하고라도 마냥 좋은 사람이 되려는 환상에서 벗어나
주님 보시기에 충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청합니다.
주님은 언변의 마술사
-노성호 신부-
말주변도 없고,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부터 붉어지는 인물의 전형이 바로 나다. 왜 그리 멋쩍고 창피하던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발표할라치면 원고를 준비하고 충분히 연습한 끝에 시도하는데, 그래도 그 시간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어떻게 이다음에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내심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부제가 된 이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제품을 받고 처음 강론하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를 준비하고 강론대에 섰는데 긴장한 탓에 신자석에 앉은 교우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강론 원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작정 입을 열었다. 시작 부분은 좀 얼버무리고 주제에서 어긋나는가 싶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점점 교우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원고 없이도 강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사제가 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는 강론할 때인 것 같다. 강론 준비를 잘하는 날도 있지만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가 그만 준비도 못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요즘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러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을 빌미로 강론 준비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며 당신 일을 하실 때 나를 당신 도구로 쓰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이 생겼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의기소침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끝까지 견디는 이한테는 구원이 따를 것이고, 주님은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되어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전열 신부 -
1.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에 맞는 처세술이 있습니다. 이 모든 처세술은 결국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이처럼 치열한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몹시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처세술을 가르쳐 주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뱀은 교활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솔직함과 소박함의 상징이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예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데 뱀같이 슬기로와야 합니다. 즉, 슬기로움으로 미움을 사거나 원망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비둘기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함과 소박한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같은 이치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명을 받아 우상 가득한 세상에 파견된 양입니다. 우상은 신앙인을 유혹합니다. 자신을 따르라고, 그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동원하면서 유혹합니다. 돈, 자본, 권력, 지위 등등 온갖 우상들이 날뛰면서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라고 달려듭니다. 자신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댑니다.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상들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은근 슬쩍 우상에게 자기 몸을 맡기면서 적당히 살아갈 것이냐? 우상을 거부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이 판치는 세상의 변두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쫓겨남으로써 참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감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우상에 몸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면서, 한술 더 떠 우상의 선전부대가 되어 '우상'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박해’가 아니겠습니까!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심정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상의 늪에 허우적대고 때때로 우상과 함께 놀아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느님의 성령이 너를 지켜주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간절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이 이리가 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결코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독서> :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앞길을 준비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이스라엘은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이주하던 도중에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재삼 확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야곱의 조상들을 지켜주시고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이심을 밝히시며 이집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큰 위험에 빠질 뻔한 일이 있었고(12,14-20), 아버지 이삭에게는 이집트로 이주하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26,2) 야곱은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를 지켜주실 것이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이리하여 야곱은 두려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가족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130세였다(47,9).
야곱은 고센 땅에 이르러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상봉하게 되고, 야곱은 고센 땅에서 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뽑으시어 그가 살던 도시 하란에서 떠나도록 하시고, 새로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그에게 바로 그 땅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은 사람들이 곧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합당한 자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먼저 하느님의 약속만을 믿고 자신이 발 붙여 살던 땅을 떠나야 한다. 우상숭배로 얼룩진 땅, 죄로 물든 땅, 안락함과 편안함의 땅, 게으름의 땅을 떠나야 한다. 그 땅을 떠나서 오직 하느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계속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리고 순례하는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야만 한다.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자신 안에 뿌리내린 세속적인 요소가 깨끗이 정화되고 오직 하느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당신이 뽑으신 백성을 순례의 길로 인도하시며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며 지켜보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정화시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을 미리 보여주셨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생이란 순례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 안에 뿌리내린 여러 가지 죄와 악이 정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세를 갖출 때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도록 하신 다음 당신 나라로 받아들이신다.
가나안 땅에 내린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야곱 일족은 이집트로 내려가 고센 땅에서 살게 된다. 그들은 이제부터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어 400년 후에 커다란 민족이 되도록 하시어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실 것이고, 미구에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준비해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고난과 역경에 부딪힐 때, 그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이를 극복할 방법을 미리 다 준비해주셨음을 굳게 믿고 헤쳐 나가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그 날까지 계속하여 자신을 정화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양승국신부-
<천국에 이르는 꽃길>
큰 도로에서 저희 수도원까지 올라오는 진입로가 있습니다. 산을 마주보며 걷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언덕길이지요.
언젠가 사목활동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밤늦은 시간, 기온도 뚝 떨어져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산도 없이 그 길을 걸어 올라오자니, 얼마나 멀던지, 얼마나 짜증나던지, 얼마나 또 무섭던지…
반면에 꽃 잔치가 계속되던 4월 말경, 그 길을 올라오는데, 정말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진입로 왼쪽 언덕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했습니다. 오른쪽에는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꽃잎들이 흩날렸습니다. 그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뒷산은 온통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습니다. 황홀경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 길을 올라오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같은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똑같은 길인데, 어찌 그리 느낌이 달랐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네 인생길 마찬가지겠지요. 나 혼자 걷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외로울 뿐입니다. 두렵습니다. 지루합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내 바로 옆에 동행하신다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 내 앞길을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날이면 날마다 천국으로 향하는 꽃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아무리 악천후의 날씨라 할지라도 찬미의 노래가 우리의 입술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위해 길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특별 정신 교육을 실시하십니다. 걱정이 많이 되셨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특별 당부를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힘을 주시는 한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을 용기를 얻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여정을 걸어가면서 절대로 두려워할 일 없습니다. 아버지의 영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손을 꽉 잡고 계십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그분께서 대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강신숙수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은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회당에서 매질을 당할 것을 조심하라고 하시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기존의 종교적·정치적 세력으로부터 받게 되는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 형제끼리 서로 넘겨 죽게 하고, 아비와 자식끼리 고발하여 죽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하기에 정치·종교·가족 모두와 갈라서게 되더라도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피해 다니며 끝까지 참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사회와 가정 안에서 박해나 소외를 당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불의한 사회 체제를 폭로하고, 거짓에 가담하지 않고, 진리와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규현 신부님의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 천성산을 지키기 위한 지율 스님의 단식투쟁 등은 생명 경시 현상이 팽배한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박해를 각오하며 살아가는 사명 수행의 한 예일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공존 의식, 사랑의 계명과 자비심,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인식에 명료하게 깨어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목숨을 내놓고 투쟁해야 할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감증과 무식으로 온갖 불의가 사회에 만연해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적당히 이웃을 속이고 거짓말을 꾸며대고 살아가며, 생명에 대한 경외심도 무디어져 낙태나 폭력, 인간성 상실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어려움을 각오하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지, 아니면 안일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지 성찰해 보며 예수님의 당부를 새겨봐야 하겠습니다.
-송재호신부-
중국의 한 나라시대에 주 매신 이란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글읽기를 아주 좋아해서 밤낮으로 책만 읽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아내가 일하러 밭에 나가면서 이웃에게 꾸어 온 조를 멍석에 깔아 뜰 안에 널어놓고는 남편에게 닭을 쫓아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그 날 따라 한 낮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밭에 일나갔던 아내가 물에 빠진 생쥐모양으로 돌아 왔습니다. 와서 보니 남편은 아침에 있던 그 모습그대로 독서 삼매경에 빠져 글을 읽고 있는데, 아 글쎄 조를 널어놓았던 멍석까지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남편 얼굴에다 침을 탁 뱉고 하는 말이 "너 같은 바보는 글이나 읽다가 굶어 죽어라"하고 악담을 퍼붓고는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새 살림을 차렸지요. 그러나 주매신은 그 후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큰 도시의 관리가 되어 부임지로 가는 중에 아내 생각이 나서 이리 저리로 수소문해서 아내를 찾아 가마를 가지고 데리러 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결국 성공해서 관리가 되어 오는 남편을 도저히 볼 면목이 없어서 타고 가던 가마 안에서 옷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염려하시면서도, 박해를 잘 견디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우리 선조들의 순교의 피로서 신앙을 지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이 목을 겨누고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수호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상님들을 두고 있는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참으로 크심을 말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박해의 시대가 아닌 참으로 자유롭게 주님을 찬미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히려 박해시대보다도 더 나약하게 신앙을 스스로 저버리는 모습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생활이 어렵다고, 또는 편안한 생활을 즐기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쉽게쉽게 냉담하는 모습을 볼 때 더욱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주 매신의 아내는 결국 남편에 대한 믿음을 져버렸기 때문에 어리석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신앙이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굳건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믿는 마음으로 용기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파견된 제자의 덕목 - 슬기롭고 순박하게
-여성국 신부-
얼마 전 미사 때 성체를 분배하다가 성체 가격(?)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체 값을 낸 그 자매는 약간의 정신 지체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러 나오는 그 자세가 너무 불량했습니다. 어느 날 미사 시작 전에 시간이 남아서 이 자매에게 영성체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미사 때 성체 값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주는 겁니다. 성체를 분배하는 도중이라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내심 사제품을 받은 후 받았던 선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였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슬기로움’과 ‘순박함’의 덕목을 갖출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미사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파견받은 제자로서 우리 또한 슬기롭고, 순박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순박함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악스러울 정도로 슬기롭지(?) 않습니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강영구신부-
그대에게
세상은 살벌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의 장(場)입니다.
어떤 형태의 힘이든 힘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 곳입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지위, 명예와 지식,
하다못해 완력(腕力)이나 폭력이라도 지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뛰어다는 이유도 이런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마태10,9-10)고 명령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재력이나 권력이나 학력 따위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세상 한가운데 보냄 받은 비무장(非武裝) 무소유(無所有)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내어줌이거나 잡아먹힘입니다.
사실 하늘나라(天國)는 내어줌과 잡아먹힘으로 도래(到來)합니다.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겠다고 서로 덤벼들면 그때부터 지옥(地獄)이 시작됩니다.
이리 떼 가운데 보냄 받은 양이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이리 떼에게 자신을 비둘기처럼 양순한 모습으로 내어주는 것이 슬기이자 지혜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빵(요한 6,48)으로 이 땅에 오신 스승 예수님을 닮아서 이리들의 밥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오늘은 송두리째 자신을 내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행복할 것이며, 당신을 잡아먹는 사람도 행복할 것입니다.(一明)
-장재봉 신부-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예수님 께서 손수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갖고 오신 그 능력을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우리들이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예수님께 아주 요긴하고 필요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모인 우리 교회는 즐기기 위한 사교모 임일 수 없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해관계로 모인 단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삶 의 공동체란 그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이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의 집단이며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잠겨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 연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바는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어리석다 하면 틀림없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잘나지 않았다 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더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겁먹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뽑으실 때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것 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넓히시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힘 을 쏟아 주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힘을 믿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불러 주시 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 드리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영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기에”, “예수님이기에”, “내 이웃이기에” 비록 나에 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랑하는 것. 참 자유입니다.
예수 님이 누렸던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이 용서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그 수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얼마 만큼의 잔 꽃송이를 드렸는지 계산해 보도록 합시다.
못난 내 마 음을 꺾어 그분의 부드러움을 접목시킨 그 자리마다 고운 꽃 한 송이 피어 있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그 분 앞에 그 꽃다발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로운 복된 자입니다. ♡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마태 10,17-22)
-유 광수신부-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나 때문에" 즉 예수님 때문에 받는 축복도 많고 기쁨도 크지만 또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많고 또 해야할 일도 많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삶의 방법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반드시 증언할 것이 있고 해야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말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성령 즉 아버지의 영이 일러 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 앞에 끌려 나가 모욕을 받는다든지 어떤 손해를 입는다든지 아니면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무슨 말을 하게 되는가?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될까? 아니면 기쁘다는 말을 하게 될까? 대개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거나 피해를 입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쉽게 나오는 말은 결코 고운 말이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욕이나 맞고소 또는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악랄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까를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험담을 늘어 놓게 되기 쉽다. 우선 분노로 상대방에게 결코 복음 적인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좋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할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게 되고 갈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누군가가 자기 비위를 거스리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게 되면 즉시 말 다툼을 하거나 원수까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로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이 아니다. 그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16,13-14)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할 때 그 때에 할 말은 내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면 된다. 그런데 평소에 이것이 잘 안된다. 왜 그럴까? 평소에 복음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생활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저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요,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쉽게 내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 쉽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욕도 하게 되고 심하면 싸움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잘 판단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에 더욱 기도를 해야한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할려고 하던 것을 절제하고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는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해답을 찾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복음을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이다. 어떤 특별한 때에만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생활하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에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더라도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러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데 어떻게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을 듣겠는가?
성인들이 또는 순교자들이 박해 때에도 꿋꿋하게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늘 기도하면서 말씀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비슷하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가 자신도 모르게 그 때 그 때마다 꼭 필요한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법이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박상대 신부-
엄격한 선교수행지침(10,5-15)을 하달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암시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당장에 이와 같은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받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형태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 모양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성령에 의한 변호보장 약속이며(20절), 둘째는 가족의 고발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미움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빛나는 승리나 커다란 효과가 보장되기 보다는 처절한 박해가 준비되어 있음은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제자들도 스승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 가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시며,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천상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무관심과 적대심을 만나게 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심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적대심은 박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는 복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때 복음이 취하는 태도는 박해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이리의 다른 점이다.
복음의 강점(强點)은 오히려 어린양과 같은 약함이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이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는 약하지만 청빈과 사랑과 봉사에는 강하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세상과의 법적 조약이나 협정을 통하여 확고한 지위와 특혜를 영위하고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타부’ 등의 방패를 세상에 내걸고 온갖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신부(神父)인 나 자신도 그 맛에 젖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복음선포자로서 복음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는 자신이 인간적인 인정과 보호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적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별다른 의미 없는 그 무엇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 복음이 지향하는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종국(終局)에 가서는 교회와 복음의 결별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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