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14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07. 7. 14. 04:05

   2007년 7월 14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10,24-25)

 

 "No disciple is above his teacher,
no slave above his master.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hat he become like his teacher,
for the slave that he become like his master.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다. 참새 한 마리도 그분 허락 없이는 어찌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그만큼 세상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러니 진정 두려워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

 

 사람이 두려운 세상입니다. 생명을 위협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이나 자연재해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의 죽음을 너무 쉽게 다루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마저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의 목숨은 주님께서 좌우하십니다. 그분께 생명의 비밀과 열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그분의 뜻을 인간적 판단 기준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헤아려 두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생각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라도 하느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내년이면 우리 본당이 설립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꽤 오래된 성당이지요? 그런데 오래된 성당이다 보니 연세 드신 분들도 많고, 따라서 환자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환자 봉성체는 보통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사실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이 정도의 시간을 수녀님과 봉사자들이 함께 다니고 난 뒤에는 모두 피곤함으로 힘들어하지요. 또한 봉성체 대상자인 환자와 그 환자가 있는 구역과 반원들도 언제 올지 모르는 저를 기다리느라 힘들어 하십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신부가 저 혼자밖에 없으니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기다릴 수밖에요.

그런데 어제는 봉성체 하는 시간이 1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봉성체를 신청하신 환자가 줄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2명 더 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성의 없이 속성으로 했을까요? 아닙니다. 전과 똑같이 아니 전보다도 더 천천히 정성을 다해서 봉성체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왜 줄었을까요?

바로 우리 본당에 사목실습을 나온 부제님과 함께 봉성체를 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이 하는 봉성체를 두 명이 나눠서 하다 보니 천천히 해도 시간이 절약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우선 봉성체를 함께 다니는 수녀님과 봉사자들이 빨리 끝나니 좋아하지요. 그리고 봉성체 대상자인 환자와 그 환자의 구역반원들도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서 좋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빨리 끝나서 너무나도 좋습니다. 단지 부제님 한 분이 우리 성당에 오셨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편함과 혜택을 줄 수 있네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나’라는 인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편함과 혜택을 주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전하는 일꾼들이 많아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복음 선포의 사명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걱정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 모습이 과연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맞아 떨어질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거꾸로 영혼을 죽이고 심판할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라는 그래서 이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데 큰 힘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며,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열심히 생활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세심함     

- 남상근 신부-


 모든 것을 다 세어두셨답니다. 심지어 내 머리카락까지도. 아침이면 세수하고
머리를 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 여러 가닥이 뽑혀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내 머리카락은 빠지고 저절로 자라납니다.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라 재촉해봐도 그럴 리 없고, 하도 이마에 땀이 흘러 좀
성글어져라 해도 그럴 리 없습니다. 그냥 알아서 자라나고 빠지고 새로 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몸의 털 하나 하나가 쓰임새에 따라서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은 꽤 길게 자라납니다. 두어 달 손질하지
않으면 더벅머리가 됩니다. 그런데 정수리에서 한뼘 내려온 눈썹은 어떻습니까? 눈썹은 그렇게까지 길게 자라지 않습니다. 똑같은 털이지만 어떤 것은
길게 자라고, 어떤 것은 적당하게 자라나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다 세어두시고
보살피시기에 그런 것 아닐까요? 그냥 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주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저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 값진 것 아닌지요. 거저 주어지는 값진 것들,
주님께서 준비하신 것들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나를 위해 망보시는 하느님

-노성호 신부-


 신학생 때 복음 묵상을 하면서 적어놓은 노트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런 묵상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대견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묵상이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유치 뽕짝’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만큼 순수하고 열정 가득했던 신학생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 초심을 잃지 않고 나를 다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때도 오늘 복음과 동일한 부분을 읽고 묵상했다. 내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도 모두 다 세어놓으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무척 두렵고 겁나서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소심해지기도 했고,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면 세면대 위에 빠져 있는 머리카락을 세어보면서 ‘오늘은 몇 가닥이 빠졌는데 주님도 잘 헤아리고 계시려나.’ 하면서 혼자 거울을 보며 히죽거렸던 기억도 새롭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 말씀 때문에 소심해지거나 그분께서 두려운 분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세어두실 정도로 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분이 또한 하느님이심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제 수품을 앞두고 피정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망을 보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고 있다고 증언할 수 있다. 주님은 무섭거나 두려운 분이 아니라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라고 말이다. 예수님도 이러한 내 모습을 보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알고 계신다고 증언해 주시길 겸손하게 청해 본다.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전열 신부 -

 

1. 오늘 복음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박해받을 때에 대비하여 당신의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하느님의 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겪은 고통과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위협과 반대는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육신을 잃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하고 마카베오기 하권 7장 14절은 전해주고 있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우리 삶을 계획하시고 보살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분명히 우리를 지켜주시고, 당신 메시지를 전하는 데 필요한 은총과 용기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리며, 주님의 메시지를 기꺼이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2. 특히,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됨을 좀 더 자세히 살퍼보자면, 교황청 매스콤 위원회 위원이었던 맥루한(M. McLuhan)은 [미디어 이해]라는 책을 통해 유명해졌는데, 그 원리가 어렵지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쓰는 모든 도구들은 인간의 ‘확장’입니다. 자동차는 인간의 다리가 확장된 것이고, 포크레인은 인간의 팔이, 컴퓨터는 인간의 두뇌가, 마이크는 인간의 입이 확장된 것입니다. 그와 함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미디어이고, 예수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우리는 밝고 넓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그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 입은 예수님의 손과 발, 입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앞서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삶으로 옮겼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 실천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나의 손과 발, 그리고 입이 하루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성찰해 봄도 하루를 사는데 유익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시대에 주님의 메시지를 두려움 없이 전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는 시 한편 들려 드립니다.


  러시아 시인 , 푸슈킨(1799-1837)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독서> : 보복과 복수대신 용서와 자비가 가득한 요셉
-
경규봉 신부-


야곱은 전에 요셉에게 부탁하였듯이(47,29-30) 자녀들에게 조상들이 묻혀있는 막벨라 동굴에 매장해 줄 것을 공적으로 분부한다. 그가 매장에 대하여 그처럼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12,1-3; 26,2-3; 28,13)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47,30).

야곱은 조상의 매장지에 얽힌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다시 전한 후 세상을 떠났다.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형들은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로 인하여 혹시라도 요셉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염려하여 요셉을 찾아가 빌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근거로 하여 용서를 빈다.

유언은 대부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야곱의 유언은 그들에게 커다란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 그들 역시 요셉처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므로 요셉의 신앙에 호소하여 용서를 청한다.

요셉은 자신이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였음에도 불구하고(45,4-8) 형들이 자신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을 안타까이 여겨 요셉은 슬피 울었다. 그는 “내가 하느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라고 형들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주권대로 되며 인간이 이 주권을 대신 행사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형들이 과거에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뭇 백성을 살리셨으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양육하겠다며 자비를 베푼다. 이는 요셉이 형제들을 이집트에 초청할 때 했던 약속의 반복이기도 하다(45,11.18.19).

요셉은 110세까지 살았다. 그는 생전에 많은 후손을 가짐으로써 야곱의 축복을 성취하였다(49,22-26).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거쳐 주어진 자손의 축복(22,17.18; 26.4; 28.14)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백성이 됨으로써 온전히 성취되고 있다(로마 10,11-13).

요셉은, 자신은 비록 죽어도 하느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마치 자신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일일이 형제들을 찾아보시며 보살펴 주실 것임을 확신한다(47,11-12). 요셉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훗날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 그곳을 유산으로 차지할 것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15,13-21) 훗날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이장하도록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다음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였다. 죄에 대한 기억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여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요셉은 조금도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형들과 그들의 자녀까지 돌보려고 하는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참 신앙인은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며, 하느님께서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실 것임을 믿는다.

복수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신명 32,35)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로마 12,19)라고 말했다.

또한 요셉은 하느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형들의 죄로 인하여 종으로 팔리고 고통을 겪었지만, 이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 그러므로 참 신앙인 요셉의 믿음을 본받아 복수와 보복의 마음을 품지 않는 신앙인이 되자. 용서와 자비의 마음을 담은 신앙인이 되자.

내가 비록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고, 고난과 역경에 처해 있다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국 좋은 결과를 이루실 것임을 굳게 믿자. 그리하여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임을 믿으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격려와 함께 의무감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위험이 있을 때 슬기와 여유롭게 대처하면서, 박해가 너무 심할때 때를 기다리면서 잠깐 옆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육신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정작 두려워 할 분은 '육신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것, 머리카락의 수도 알고 계시는 분께서 멸망시키실 리가 없기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청취자 여러분, 복음을 증거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까? 좀더 물질적으로 잘 살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까? 귀찮아서 입니까? 시간과 경제적인 제약 때문입니까? 내 것을 포기하고 희생•봉사하는 것이 힘들어서 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한•구원에 대한 관심이 아직은 없어서 입니까?

사실 이 모두가 장애가 되겠지요. 그러나 더 큰 장애물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너무나 민감한 나머지 눈치를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든 식사나 음식을 섭취할 때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형제님들 같은 경우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실 때,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그 외 어느 술자리에서든 술을 마실 때 항상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한다면 더욱 좋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기도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나 부끄럽고, 창피스러우십니까?

먼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떳떳이 드러내야 합니다. 당연히 언행이 따라 주어야만 가능하겠지만요. 그런 다음에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데 이에도 문제가 따릅니다. 교회 안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일을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눈총이 너무나 따갑고, 그들의 시기, 질투로 다시는 맡은 일을,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별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는 자신의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하고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신앙심이 없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 이나 방해요소로 인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짜증나기도 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 뒤에는 주님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후원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러나 혹시 '나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두렵게 하고는 있지 않는가? 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옛부터 상식 이하나 인간답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의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라고 하시며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희망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한정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 때문에 꿈과 희망을 포기하거나 의무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의 전부를 육신과 영혼까지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꿈과 희망을 키워갑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양승국신부-


<우리는 모두 아름답고 거룩한 이콘(eikon)>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로 미물 같은, 때로 하루살이 같은, 때로 하찮기 그지없는 인간이 대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챙기실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다음의 복음 구절을 통해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도 비참하지만, 너무도 나약하지만, 마치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강건해집니다. 든든해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가슴 찔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만일 연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켜야 할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우리 내면의 보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투박한 질그릇 안에 깃들어계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부족해도 힘과 용기를 내어 끝없는 정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이토록 철저하게도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심으로 인해 존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인해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주님께서 오른편에 서서 인도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강건합니다.


이 세상에 사람처럼 존귀한 존재는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모상, 이콘(eikon)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그 어떤 대상보다도 더 아름답고 거룩한 이콘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리스도의 이콘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 줘야할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세상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야합니다. 세속에 찌든 세상의 악취가 아니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긋한 냄새를 발산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을 보다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단 한번 뿐인 너무나 소중한 인생인데, 함부로 살아갈 일이 절대로 아닌 듯합니다.


‘될 대로 되라’가 절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도 결코 아닙니다. ‘아니다’ 싶을 때는 적절한 순간, 우리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필요도 있겠습니다. 단 하느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막 살기에는, 그냥 되는대로 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그냥 포기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 삶 전체를 걸고 추구해야할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존귀합니다. 사람이 하늘입니다. 사람이 최고입니다. 목숨 붙어있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은 존중받아야하고 그 생애는 숭고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인생, 나 자신의 삶, 때로 하찮아 보이겠지만, 시시하게 보이겠지만,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내 삶의 가치를 내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누가 인정해주겠습니다.


나부터 먼저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 나부터 먼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것, 나부터 나를 먼저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내 어깨에 먼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

-강신숙수녀(성가 소비녀회)-


 몇 해 전 서유럽 가톨릭 국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일이 있었는데 응답자의 8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응답했답니다. 그들이 응답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대체로 양심의 가책이나 사후심판과 관련되어 있었다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두려움과는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신앙인의 뇌리 속에 자리잡은 ‘하느님’ 이미지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상’보다 내 생전의 잘못을 낱낱이 셈해서 벌하시는 엄격한, 혹은 무정한 아버지의 상이 더 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혼과 육신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더 두려워하라”고 하신 문장만 떼어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간 오랜 세월 가톨릭 공식 교리의 영향으로 대물림되어 온 하느님상에도 무시 못할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조차 내어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친근한 기억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최근 교회 안의 여성신학자들은 잘못된 하느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하느님의 ‘여성성’을 되찾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잘못된 신관을 바꾸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잘못된 신관은 그 자체가 우리 존재와 삶의 여정을 근원적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이 으뜸으로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느님을 고백하면서도 잘못된 하느님상 때문에 이교도들처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잘못된 하느님 아버지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린 어떤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장재봉신부-


 그 동안 복음과 함께 했던 1독서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였습니다.
요셉은 두 아내를 거느렸던 야곱에게 늦동이로 태어나서 귀염을 받았지만
그 어머니 라헬은 야곱의 귀향길 도중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 어린 것이 가여워서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합니다.
그것이 형들의 눈에는 당연히 곱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서의 창세기는 세상의 어떤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그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오늘 1독서를 통해서
참된 의인의 모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요셉의 용서의 말마디는
참으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형들의 시샘으로 인해서 이집트 땅에 팔려가 노예 신세로 전락하여
살아가야 했던 요셉이 지난날 형제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을 배려하여
거듭 용서하며 위로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성서는 그 장면을 “그 형제들의 가슴이 터질듯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선처는 그에게 닥쳤던 재난이나
지금 누리는 최고의 호사까지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신 하느님...
그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러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오늘 이 시간도 애 간장을 끓이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우리의 가슴도 터질듯이 저려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느 누구든 미워하거나 따지거나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내가 무엇이기에...
차라리 혼을 내시지...
차라리 화를 내시지...
차라리 외면을 하시지...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오직 한 가지를 부탁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귀하고
귀한 자녀인 것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모든 것에 당당하고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끝없는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우리들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요셉처럼 먼저 용서함으로
상대방의 “가슴이 터질 듯 하게 하는”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처럼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선입견을 버리고
오로지 평화이신 그분, 용서이신 그분,
희생이신 그분으로 거듭나는 사랑의 삶일 때에 우리는 하느님처럼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부여받은 우리는
내 작은 오만으로 인하여
타산적인 계산이나 변덕 때문에
하느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크신 하느님의 흔적을 내가 지울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의 뜻을 내가 눌러버릴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이 가진 자아의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크신 사랑과 용서를 살아내시는 지혜의 편을 선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송제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과 주어진 사명에 투신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마음의 각오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인간 관계에서도 갈등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순과 불 합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선한 질서를 희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간혹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끔씩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당 다닌다면서, 신자라면서 그게 뭐냐?, 이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등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억지를 부리는 이들도 만나게 됩니다.

신자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만을 강조하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땐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그런 억지가 다행스럽게 하느님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이라면 참을만한데, 그렇지 않을 땐 답답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따라오는 반대와 박해를 각오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결단의 순간에서 오는 갈등의 상황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서 가까이는 가족들에게서 받는 어려움부터도 참으라고 하시고, 그러한 어려움들을 당신께서는 책임지고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단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길에는 사람들의 배척과 반대와 박해가 있게 마련입니다. 성공과 승리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뜻은 역설적으로 실패와 좌절, 고통과 죽음 안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현세적인 욕심과 이익 그리고 편안함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용기는 선하신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써 꽃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진정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결심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용기와 확신을 주십니다.

" 두려워 하지 마라, 누구든지 사람들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이재혁신부-

 

 어린 시절 저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미사 시간에 복사를 설 때 실수하고 나면 야단을 치시는 수녀님도 두려웠고, 성당 마당에서 야구할 때 야구공으로 유리창 깨먹고 나서 벌주시는 신부님도 두려웠고,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걸려서 손바닥을 때리시는 선생님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분들 손에 든 회초리가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해 오신 분들 중에는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을 때,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벌을 주실 분이기에 그 하느님을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들에게는 하느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벌이 두려운 것인데도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벌을 주시는 그분들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참새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를 이처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전해야 할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벌주시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하느님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사랑 가득한 분이십니다.

내가 전하는 하느님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입니다.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하느님을 우리가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복음 선포가 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박해를 견뎌내야 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런 사랑의 하느님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내가 하는 복음 선포도, 내가 하는 증언도, 내가 하는 순교도 기쁜 마음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 8)

사랑의 하느님을 이웃들에게 전하는데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사랑의 대상인 하느님을 전하는 일에 우리 다 함께 외쳐봅시다.

“저를 보내십시오.”


 

 † 동일한 운명과 생명의 공동체

-박상대신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반대를 받은 이유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더 좋아하는 세상이 진리와 봉사와 사랑을 피력하는 복음의 근본정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 또는 세속의 본성이 그렇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에 무관심과 적대심을 표하게 되고, 무관심은 독선(獨善)을 조장하고 적대심은 박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박해를 피하는 길은 복음을 등지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흥정을 벌이고 급기야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복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면 예수의 운명을 복음선포자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선포자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각오해야 하며, 실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에는 성령께서 선포자를 동반하실 것이고, 그 길 끝에는 천상의 월계관이 선포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실제적 박해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끝까지 항구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루가복음에서와는(6,40) 약간 다른 맥락으로 기록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24-25절)는 말씀은 복음선포자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팔자(八字)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베엘제불(마귀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9,34) 모함을 받았으니, 복음선포자도 같은 모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25b절) 결국 예수님과 복음선포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같은 팔자며 운명이다. 이는 사도 바울로가 그토록 강조하는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자의 운명공동체(運命共同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시는 성삼(聖三) 하느님의 생명공동체(生命共同體)에로 질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복음선포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박해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28절)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집회 1,14) 따라서 복음선포자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은밀히 배운 모든 것을 아무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상황이 요구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목숨도 아무 값없이 그저 바쳐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어떤 순교도 순교자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중을 날고 있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9절) 하느님께서는 복음선포자를 이런 참새보다도 훨씬 귀하게 여기시며, 각각의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두실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30-31절)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당해야 하는 박해 앞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사실상 없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극한 박해에 직면하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미소한 손해에서부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취한 태도만큼 그분으로부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복음선포자와 예수님 사이에 종말론적인 ‘동태(同態)보상률’이 적용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복음선포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32-33절; 마르 8,38; 루가 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