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7. 16. 00:43

   200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7-38)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사이는 깊이 단절된다. 또한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나 가족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예전에는 종말이나 박해 시대를 염두에 둔 해석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이 듭니다.
두 사람이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라이벌 관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그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 들어주겠다. 대신 길 건너 상대방에겐 그 배를 주겠다. 말해 보라.”
한참을 생각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제 눈을 하나 뽑아 주십시오.” 자기 눈 하나를 뽑으면 상대방은 두 눈을 뽑히게 된다는 계산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식으로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거나 형제간에 원수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삶의 중심으로 여겼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탐욕을 먼저 정화시켜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는 데 방해되는 일이라면 그 무슨 일도 한 발자국 물러나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복원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가끔 이러한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미남이세요. 신부님, 목소리가 성우 같아요. 신부님, 너무나 멋져요.”

그렇다면 제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눈이 이상하게 아래로 쳐졌어요. 신부님은 말이 너무 빨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리라 할지라도 듣기 싫은 말 그리고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말이 있는 반면에,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 그리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직접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결국은 당사자의 귀로도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과 당사자의 관계가 좋을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좋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입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도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바로 세상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원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보다도 하늘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세상의 원칙을 내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실이라는 단어를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함부로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원칙이 이 세상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오늘은 ‘예뻐요. 멋져요. 사랑해요.’ 등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세요.

 빠다킹신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로렌 헨리 뒤킨 저)란 글을 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야 정상인데,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정상인데, 와 닿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교회로부터 크나큰 상처가 입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몰라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의 원인 발생은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의 때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란 말을 자주 씁니다.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지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겨워질수록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계신 예수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르면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끝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나란히 서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을 기억하십시오.

 

 

 

   받아들임     

-남상근 신부-


 어릴 적 그리도 좋던 친구들,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나한테 한 그 친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친구이기 때문에 웃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라도
불러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쉬운 듯 어렵습니다. 친구임에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에 끼어든 그 많은
‘친구’답지 못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를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상을 주시겠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주십시오. 나도 받아들여집니다.
내게도 주어집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손해나는 일이기에 마다한 일이 혹시
있지 않은지요? 억울해하며 억지로 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한 잔에도 댓가가 있을 것이며, 환한 미소 한 모금에도 반드시
상이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여 그 어떤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신다니 모든 착한 일은 그냥 흩어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노성호 신부-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주몽’이 그 중 하나였다. 여러 명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몽과 비류의 군장 송양이 만나는 부분이다.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도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몽이 송양을 찾아갔다. 송양은 주몽에게 독배와 술잔을 내놓으며, 이 둘을 가려내야만 졸본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주몽은 자신의 안위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두 잔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만일 주몽이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든지 다른 이유를 대면서 주저했더라면 결코 송양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졸본의 통합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천하대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수고나 노력,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얻으려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모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역설적인 등식이 성립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집·집착·욕심·시기·질투·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자신을 버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야 한다. ‘과거의 나’가 가지고 있던 목숨을 버리면 ‘새로운 나’는 새 생명을 간직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무모해 보이면서도 과감했던 행동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버림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세상 사람한테는 의미 없는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우리한테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풀면서 쉬어야 한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 부산교구 김만수 요한보스코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자기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 상식으로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같이 생각됩니다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마저, 즉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103위 성인 가운데 겨우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 베드로 성인은 배교를 강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계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어머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 유대철(베드로)을 배교시키기 위해 14세의 어린나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은 신앙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이 어린 성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잃었으며 또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 부모가 주신 육신 생명은 잃었으나 대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 우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세상의 그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부모와 아내나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잃어야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주전 우리 중앙 본당 800여명의 교우님들이 배론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성지이지만, 그곳은 1801년 황사영과 그 동료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교우 촌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해 오던 곳이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이 그 해 2월에 서울을 떠나 이곳 배론으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도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이 이들에게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9월 29일에 황사영과 김한빈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됨으로써 결국 배론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황사영이 쓴 <백서>의 몇 줄만 읽어봐도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말하기를: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황사영이 쓴 이 <백서>는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당시 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데로 자신들의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나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를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모름지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모와 자녀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잃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어떠한 욕망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고 비우고 버리는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러한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산교구 이석희 신부-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서을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1,10-17 (너희 자신을 씻고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복 음 : 마태 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우리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㰡’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㰡“(마태10,34-36)

처음으로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그리 마음 편한 말씀이 아니지요. 오랜 신앙 생활을 해 왔던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㰡평화㰡‘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㰡화목㰡‘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의 예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 역시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망하게 되는데 이때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㰡’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㰡“(미카7,5-6)

모든 관계에 정의와 질서가 다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미카 예언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악은 끝까지 승리하지 않으며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아의 승리를 미카 예언서는 예고하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 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시지요.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온다는 말이 있듯이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듯이 거기에서도 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안에 부활의 희망과 승리의 시점이 내재해 있다는 말씀이지요. 미카 예언자는 말합니다.

㰡’내 원수야,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신다.㰡“(미카7,8)

오늘 복음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간이나 형제지간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지요.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싸워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것은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하고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㰡칼을 주러㰡‘왔으며 㰡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㰡‘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어서 도저히 악이 끼어 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말씀같이 들려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라는 승리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작은 이익 때문에 연연해 하거나 불의와 거짓을 알면서도 작은 유혹 앞에 묵인하고 덮어버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타협하지 말고, 문제는 지혜롭게 밝혀서 정의롭게 해결하는 용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될 일과 해서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㰡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㰡‘하며 덮어둔 채로 슬금슬금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정의와 하느님의 일이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어려워도 타협하지 말고 꿋꿋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칼을 주러 오신 예수

-강영구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그대에게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결단(決斷)과 선택(選擇)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복(福)과 화(禍),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하느님 앞에 중립지대(中立地帶)나 회색지대(灰色地帶)는 없습니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저주를 받겠느냐?”(신명11,26-28)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어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
우리 삶은 언제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정쩡한 양다리 걸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
하느님과 악마, 성령과 악령,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하늘의 소리(天命)와 욕망의 소리 등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단과 선택에 따라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시퍼렇게 날 선 예리한 칼(劍)을 주십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당신은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劍)을 사용하십시오.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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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 하느님 말씀의 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하면 평화와 사랑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와 사랑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을 통한 평화의 복이란 복음의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아픔은 무시하고 복음의 결과만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이는 농부가 봄에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씨를 뿌렸던 과정은 무시하고 오직 추수 때 알곡의 기쁨만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지 말라

사람들의 세상에사에는 평화와 분쟁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쟁보다는 평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평화가 아닌 분쟁이란 말입니까? 이 말씀에 앞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적대하게 만든 사탄의 권세를 무찌르고 인간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에게 참 평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참 평화는 전쟁에서 이겨야만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조폭집단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만을 제안한다면 과연 이 땅에 폭력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의 대화와 타협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악질적 속성을 지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땅에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의 내용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칼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말씀합니다.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 또한 히브리서 4,12에도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잘라내는 수술하는 살아있는 수술 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들이 의롭게 소생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즉 미사나 기도시간에 우리의 심령은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조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에 나와서 좋은 말씀 한 구절을 듣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거나, 일단 교회 문밖을 나가고 가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칼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재창조의 원리

제철공장에 가면 용광로에서 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불물 위에 다시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그 불물은 엄청난 강도를 지닌 강철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찌들고 병든 인간의 이기심과 야욕을 녹여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의 피조물로 재창조해 내는 불구덩이(용광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비유하면, 하느님은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크고 단단한 바위덩어리를 수십만번 쪼개고 다듬어 자기가 원하는 조작작품으로 만들어 내듯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쪼개고 다듬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쪼개고 다듬는 책무에 소홀합니다. 특히 신앙에 관련한 믿음, 마음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하고 쉽고 편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당장에 하늘이 갈라지고 복이 쏟아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얻어맞을 때는 얻어맞고 회개할 때는 회개하는 것이 복 받을 자가 되면 복을 받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형상이 되기까지는 수천, 수만 번을 끊임없이 말씀의 칼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2장 34-35절에는 시므온이 갓난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자들이 누구이고, 일으킬 자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즉 여기에서 넘어질 자, 즉 패할 자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으킬 자, 즉 흥하는 자들이란 비록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죄의 드러남을 받고 회개한 겸손한 마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질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버릴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지 좀처럼 버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과 고집만 주장하지 하느님의 큰 뜻을 받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말씀을 깨닫는 자마다 예수님의 말씀의 칼 앞에 겸손히 엎드려 과연 내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큰 뜻을 반역하고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끄집어 내어 회개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