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07. 7. 17. 03:21

   2007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1-22)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의 호반 도시로 예수님의 선교 무대였다. 예수님께서는 숱한 기적을 통하여 당신의 열정을 이곳에 쏟으셨다. 그러나 결과는 이방인 도시보다 못했다. 사람들의 완고함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회개가 절실했다

 

☆☆☆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모세의 출현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그가 태어날 무렵 히브리의 사내아이는 출생 즉시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모는 모세를 버릴 수 없어 강에 띄워 놓았는데, 어느 날 궁중의 공주가 이를 발견하고는 곧장 데려갑니다.
극적인 장면입니다. 주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히 궁중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미리 한 셈입니다. 하느님의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고, 이로 말미암아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는 등 엄청난 시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축복만 계속되어서는 결코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없는가 봅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주에 우리 성당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하나의 약속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시험 공부하느라 고생했으니, 내가 영화 보여줄게.”

그래서 시험 끝나는 날에 성당을 나오면 함께 극장에 가자고 했지요. 그런데 영화 보러 가는 날, 가정 방문으로 인해서 제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약속을 어길 수도 없어서, 지금 부제실습을 하러 온 부제님께 아이들을 데리고서 극장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제님께서는 요즘 어떤 영화가 유행인데, 그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말했지요.

“우리 성당 아이들, 시험 공부한다고 성당 미사도 나오지 않았어. 그런데 무슨 영화를 봤겠니? 네가 보고 싶은 영화 보러 가. 아무도 본 사람 없을 거야.”

저녁에 부제님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 봤냐고요. 부제님께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영화를 이미 봤다고 해서 다른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조금 속이 상했습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학생들이 자기 놀 것은 다 놀면서도 시험 때문에 성당 나오지 못한다고 아주 떳떳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에 대한 배신감까지도 드네요. 마치 자신들이 커다란 감투라도 쓴 듯이,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공부’ 때문에 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얄미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각종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는 모습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들, 그러면서도 나는 올바르다고 착각하는 모습들…….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는 과연 좋아하실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와는 달리, 아주 격한 어조로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지요. 사실 그곳은 갈릴래아 호숫가 근처의 도시로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곳이었고, 예수님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감동적인 말씀으로 힘 있게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놀라운 기적으로 사람들의 변화를 유도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크게 변화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두고 있고, 그 기적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은 외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전혀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핑계만 대고 있을 뿐이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우리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하고,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꾸중을 지금 이 순간 듣게 될 것입니다. 꾸중을 듣기 전에 보다 더 주님의 뜻을 깨달아 열심히 생활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핑계는 이제 그만입니다.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핑계를 대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신앙의 노블레스     

-남상근 신부-


 많이 받았기 때문에 축복이지만, 많이 받았기 때문에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혼쭐날 날이 온다고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을, 하느님의 계명에서
어긋나 있던 소돔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까지 하십니다.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많은 은총을 얻어내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갚음을 알아야지요.
뻔뻔하게 ‘받긴 했으나 돌려드릴 것은 없는 삶’이라면, 받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될 것입니다. 먹기는 하였으나 도무지 제 몫을 못하는 이들에게
‘밥값도 못한다’고 지적하지 않습니까? 돌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려드릴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주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키우시고 거룩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전부를 받은
이들이 아닙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게 기대하십니다.
크게 돌려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용서를 체험한 이들이 아닙니까?
이유 불문, 조건 불문으로 거듭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크게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돌려드려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배은망덕

-노성호 신부-


 어느 특정 인물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처럼 구성원 전체가 올바로 살지 못하여 그 고을 이름 자체가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코라진’과 베드로·안드레아·필립보의 고향이며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있는 ‘벳사이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수 북쪽 어촌으로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던 ‘카파르나움’은 호수 주변이다 보니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세 곳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전도의 활동 무대로 사용하셨던 예수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에 그만큼 하느님의 말씀이 많이 선포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께서 공생활 중에 주로 거처하시면서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를 순회하신 곳이기도 하다. 정리해 보면 이 세 곳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하느님의 축복도 많이 받은 고장이었다. 그런데 늘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종말 심판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티로’와 ‘시돈’ 지방은 현재 레바논 공화국 지중해변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도시이며 퇴폐로 소문난 곳이고, ‘소돔’은 사해 남쪽에 있었던 전설적인 고을로, 남색을 일삼다가 유황불로 타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고모라’도 이 고을들과 별 차이 없이 ‘죄’라는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죄악이 만연한 곳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이 티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불행하다는 평을 받았으니 그들의 행실이 어떠했을지 짐작하려는 것조차 두렵고 떨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 있으면 그에 대해 감사하며 선행에 힘쓰고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배은망덕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한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듣는 신앙인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낫지 않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축복을 받는 자답게 늘 주님께 마음을 돌리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독서> :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신 하느님
-
경규봉 신부 -

레위 지파에 속하는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은 고모인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6,20). 요게벳은 잘생긴 모세를 3달 동안이나 숨겨서 기르다가 왕골상자 속에 모세를 뉘어 강가 갈대숲 속에 놓아두고,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멀리서 지켜보도록 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에 왔다가 모세를 발견하였다. 이집트의 유일한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나일 강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풍요와 건강을 제공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이 강 유역에는 여인들을 위한 특별 구역을 마련하여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서, 또는 다산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목욕하도록 했다고 한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이 사실을 알고 모세를 강가에 띄워놓았던 것이다. 공주는 상자 속에 든 모세를 불쌍히 여겨 그를 구해내어 히브리인 유모를 구했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모세를 길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린 나머지 자녀를 양육할 시간조차 얻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양육비까지 받아가면서 모세를 기르게 되었으니,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요게벳의 지혜가 두드러진다. 아기가 꽤 자란 후 어머니는 아이를 공주에게 데려다주었고, 공주는 모세를 아들로 삼고 물에서 건져냈다고 하여 이름을 모세(히브리어로 건져내는 자라는 뜻)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철자법, 문법, 역사, 산술, 의학, 기하학, 천문학 등의 이집트 학문을 모두 배우며 훌륭하게 장성했다(사도 7,22-23). 장성한 모세는 늘 동족들이 당하는 고통스러운 강제노역을 염두에 두었으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를 살해하였다. 이튿날 이번에는 히브리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나무라다가 자신이 이집트인을 죽인 사실이 탄로되었음을 알고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다.

‘모우세스’란 이집트 식 이름은 ‘물에서 건져내어진 사람’이란 뜻으로 이집트 공주가 나일 강에서 건져낸 것을 기념하여 붙여준 이름이었다. 이러한 이집트 이름은 히브리 이름인 ‘모세’로 고쳐졌는데, 히브리어로는 ‘건져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의 변화 속에는 하느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서 부과하신 민족적 대사명이 모세란 이름 속에 한마디로 함축되어 있다. 즉 히브리 사내아이들에게 죽음의 강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일 강에서 건져져서 살아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와 우상의 땅인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죽음의 강 홍해에서 건져내야할 사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공주로 하여금 모세를 살려내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어린 시절에는 히브리인으로서의 교육을 충분히 받고,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는 이집트인의 모든 교육을 받도록 하셨다. 모세가 말과 행동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는 훌륭한 지도적 자질을 지니도록 하셨다. 또한 동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동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써 동족을 구하고자 했다. 자신의 생각으로, 인간적인 방법과 계획으로 구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그가 사람만을 의식하였을 뿐 공의로우신 심판관이신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집트를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40년 동안 단련시키신다. 그로 하여금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방법에 따라 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도구로 삼으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이끄시고 단련시키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단련의 강도와 기간이 크고 길수록 더 큰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구원이란 당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처럼 준비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때때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불의와 죄악이 넘쳐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 언젠가 하느님의 계획대로 행하는 도구가 되도록 훈련을 하고 단련을 받으며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기다리자. 조바심을 내고 안달하지 말고, 주님께서 쓰실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자..........◆


 

 
배은망덕이 초래할 심판
-
김주현 신부-

절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예의를 지키고 더욱 더 서로를 존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너무 막역하게 대하다 보면 서로 실수를 하게 되고 서로 간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이상하게도 서로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간에 또한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금전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말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시며 질타의 말씀을 하십니다.

팔레스티나 북부 지방에 있는 띠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인의 도시는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으로 예언서에서 자주 경고를 받은 도시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신앙의 성조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이미 타락하여 저주받은 도시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지구상에서 지워져 버린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이렇게 타락하여 멸망한 도시나 자주 예언자들의 목표물이 되었던 이방인의 도시들에서 기적을 행하였다면 틀림없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고도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는다고 삐쭉대던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앙을 가지고 한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을 고칠 수 있음을 고백했던 저 백인대장은 다름 아닌 바로 로마의 군인, 곧 유다인들이 멸시하던 이방인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지방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면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만큼 그 쪽 지방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지방보다도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지방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건만 진작 당신께서 사랑을 쏟아 부은 곳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 더 예를 갖추어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할 그들이건만,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기적들을 별것 아닌 정도로 넘겨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더욱 더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셨던 지방들이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므로 주님은 더욱 더 화가 나셨던 것입니다.

사실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 어떤 그리스도교 신자들보다도 더 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먼저 다른 종파들에서는 없는 거룩한 화해의 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또한 당신의 살을 내어놓으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기념하는 미사성제 안에서 주님의 몸을 우리 몸에 모실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 기쁨과 평화와 축복을 가득히 받고 있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더욱 더 우리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 역사를 통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의 이 질타의 말씀에 더욱 더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중세기의 가톨릭교회 내에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표양들이 가끔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더욱 더 엄중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코라진과 베싸이다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시다.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주님의 가득한 사랑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살아가면서 생활고에 쪼달리고 인간관계에 고통 받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호강에 겨운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주님의 넘치는 기쁨과 평화와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문득 '주님 사랑 온 누리에'라는 개신교 복음성가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지치고 어려워도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고통이 내게 닥쳐와도 주님만을 사랑하리라. 주님의 축복이 이곳에 넘쳐 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득히 받은 우리 모두는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다짐하면서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급변하는 현실을 보면서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오늘날 육체의 편안함과 장수를 갈구하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배아복제·줄기세포·유전자 변형식품 등 생물의 이변이 신기하고 놀라우면서도 때로는 미래 인간 존재에 대해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 읽은 ‘겨울철 딸기 구하기’와 같은 동화는 정말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과일은 계절에 상관없이 원하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고, 그 크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한입에 들어갈 딸기 크기가 칼로 잘라 먹어야 입 안에 넣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변형된 유전자로 생산된 음식물을 먹었을 때 우리 인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요?

급변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는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혹여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휴머니티를 표방한 첨단 과학기술의 비윤리적 향방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일까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행한 모세에 대한 불만, 하느님을 향한 원망 등으로 빚어진 일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시대에 나타난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마태 11,24)라고 하신 성서 말씀을 묵상하며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하느님 뜻에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부산교구 김만수 요한보스코 신부-


오늘 강론의 주제는 모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회개하지 않은 세 도시가 등장합니다. 코라진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고을이고 베싸이다는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파르나움은 호수 어촌으로서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중 주로 이 집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의 순회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도시는 예수께서 기적도 많이 행한 사랑받은 도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이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차라리)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이들 도시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전도 여행의 거점이었던 가파르나움마저 저주하십니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기 소돔은 사해 남쪽에 있던 전설적인 고을인데, 남색을 일삼다가 그만 유황불로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셨습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특히 가파르나움에 보내는 예수님의 위협은 불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토록 강조하시는 회개가 왜 이처럼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나 성자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이유도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위한 첫쩨 조건이 바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신앙의 관문이며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회개한 무엇입니까? 회개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본연의 자기 자신을 깨닫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있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자기중심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이러한 방향에 맞추어 우리의 생활 전체를 끊임없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라고 말한 세례자 요한의 호소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의 삶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 개의 도시처럼 회개하지 아니하여 결국 주님의 저주의 삶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들고 갖가지 어려운 삶 속에서도 언제나 끊임없이 회개의 생활로 주님을 향하는 기도의 열매,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의 열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열매, 선행과 봉사의 열매, 희생과 절제의 열매,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부산교구 이석희 신부-


 어느날 아침 창밖을 보면서 "모든것들이 오늘 아침에는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군!풀밭은 그전보다 더 푸르고, 나무도 그전보다 더욱 청아하고, 꽃도 그전보다 더욱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서 새날을 맞이 한다면 그사람의 하루는 유쾌하고 즐거운 날이 될것입니다. 사실은 풀밭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나무와 꽃이 변한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 온세상이 달라지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을 보면서 좋다고 말 할 수 없고 선한 것을 보면서 선하다고 말 할 수 없으며 주위에 펼쳐진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에 조금의 변화를 갖도록 노력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것입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합시다.

오늘 복음을 얼핏 보기에는 예수의 말씀과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사람들에게 화가 나시어 저주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전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상은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슬픔이 베여있는 탄식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활동이 펼쳐진 주 무대는 갈릴레아였고, 그중에서 유명한 도시 셋 즉 코라진,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이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 도시 였기에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열려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빛을 보지 않았고, 귀는 틀어 막고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 도시들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고, 그 기적을 보고서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코라진은 후에 상처만 남았고, 베싸이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이름조차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선입견과 편견, 물질적 이익 때문에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마음의 눈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은혜를 제대로 볼 줄 모르고 마음을 꼬집은 우화를 전할까 합니다.

어느날 여러 동물들이 창조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몸에 맞는 것들을 선물로 붙여 주셨습니다. 새에게는 빨리 날 수 있는 날개를, 어떤 짐승에게는 뿔을, 추위에 견디도록 털을 각각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털도, 뿔도, 날개도 어떤 선물도 받지 못하자 선물을 기다리던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준것에 대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있구나, 나는 너에게 다른 동물들 보다 몇 배나 좋은 걸 주었단다.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들어 있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랑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말을 들은 인간은 그제야 받은 선물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닫혀진 마음을 열고 주위를 바라본다면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감사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돌아섬이요, 회개이며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향해서 탄식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지금까지 길들여진 삶의 방식과, 은혜로움을 잃어버린 마음으로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름다우면 세상과 이웃이 새롭게 보입니다.  

 

-장동현 신부-

 성서에 나오는 고장 가운데 순례객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교통이 불편해서,
또는 주요 성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온통 폐허뿐이기에, 볼 것도 없고 느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풀고 설교하실 당시에 번창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에 귀를 닫고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인적이 끊기고 쓰레기가 뒹구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폐허를 보면 예수님의 음성이 귓전을 때릴 것입니다.
‘너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음성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값진 물건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것으로 두른 이 몸, 이 인생의 끝은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먼지를 털어내면 어렵긴 하지만 간단한 질문만 남는다고 합니다.
착하게 살았느냐, 악했느냐. 그리고 잘살았느냐, 못살았느냐.
회개해야 합니다.


 

-대구대교구 배상희(마르첼리노)신부-

 

 오늘 강론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제목의 유명한 인물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조각상에 이런 이름이 붙은 데는 이런 내력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 작품을 제작하던 조각가가 불행하게도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작업이 미완성인 채 끝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조각 작품이 한 손만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각가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왼손 하나만으로 끈질기게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마침 내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본래 작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습니다.
이 조각상의 본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때로 험한 세상의 여정 가운데 넘어지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길을 찾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코라진아, 베싸이다야, 가파르나움아 화를 입으리라.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포의 말씀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시선이 우리의 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되어 힘차게 생활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많은 죄를 지으며 동시에 많은 허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죄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양승국신부-


<회개, 그 멀고도 험난한 여정>


이번 수해로 생명을 잃고, 가족을 잃고, 삶의 바탕을 잃고 망연자실해있는 이웃들을 떠올리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권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한때 군인이었다가 수도자가 되고 투르의 주교가 된 마르티노 성인을 생각합니다. 아미앵 성문 앞에서 마르티노는 자기 외투의 절반을 잘라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마르티노의 꿈에 나타나시어 복음 말씀의 영원한 유효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의 주제가 회개인데, 회개는 결실을 수반해야 제대로 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회개의 결실로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있는 수재민들에게 작은 나눔이나마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그래서 멸망이 예견되는 코라진과 베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시는데, 안타까움, 속상함, 간절함이 긷든 말씀입니다.


사실 코라진과 베시아다, 가파르나움 사람들, 문제성이 많았던 도시들이었던 만큼 예수님께서 기울이셨던 정성도 각별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기에, 자주 그곳을 들르셨고, 사람들을 만나셨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복음 선포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과는 늘 초라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메시아로서의 놀라운 행적을 접한 그 도시 사람들, 말씀을 들어보니, 자신들 눈앞에 벌어지는 기적과 치유활동을 바라보니, 확신도 섰습니다. 저분이야말로 메시아구나, 저분을 하느님으로 고백해야겠다, 삶을 바꿔봐야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속의 재미’ ‘쾌락의 맛’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그들이었기에 그 발을 빼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개를 향한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우상숭배, 하느님과 세상의 쾌락, 하느님과 극단적 이기주의적 삶의 방식 그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목이 터져라 외쳐대셨지만, 최종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말았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회개란 마음만으로, 계획만으로, 생각만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호함, 결연함, 확고부동함을 바탕으로 목숨 걸고 밀고 나가는 구체성이 요구됩니다.


회개는 평생 한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먼 곳에 가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구체적인 일상 한 가운데서, 매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흐트러졌던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로 집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일이 회개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산란해진 우리 삶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회개입니다.


오늘 이 아침,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회개의 구체적인 표현은 무엇일까요?


너무나도 명료합니다.


수재민들을 향한 진심어린 나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 그리고 열렬한 기도겠지요.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7,1-9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복 음 : 마태 11,20-24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도루묵?‘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생선 중에 도루묵이라는 생선이 있지요. 생선이름이 도루묵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중엽 인조 때의 일입니다. 오랑캐가 한양 근처까지 쳐내려오자 왕 일행은 궁궐을 벗어나서 몽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몽진 생활이 깊어지면서 준비한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나고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 때 인조가 머무르던 마을의 한 어부가 생선을 잡아서 진상을 했습니다. 요리해온 생선을 한 점 떼어 입에 넣어 본 임금은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맛있는 생선을 보고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본 적이 없구나.?“ 감탄을 하며 어부를 데려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지요.

?’이 생선 이름이 무엇이냐??“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묵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묵이라고 불러서 되겠느냐? 앞으로는 은어라고 부르도록 해라.?“

임금님의 지시로 그 날부터 묵이라는 생선은 은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전란이 끝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온 임금은 옛날 생활로 돌아갔으나 식욕이 떨어져 기운을 통 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산해진미를 가져다 바쳐도 왕의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런 어느 날 불현듯 왕은 몽진 때 먹어본 은어가 생각이 나서 은어 요리를 청했습니다. 은어가 상에 올려지고 왕은 옛날 그 맛을 생각하면서 생선살을 떼어 입에 넣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맛이 형편없었습니다.

?’이 생선이 정말 옛날 그 은어가 맞느냐??“

화가 난 왕의 물음에 신하들이 쩔쩔매며 대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은어는 무슨 은어, 도루묵이라고 해라!?“

이렇게 해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좀 어렵고 부족해야 감사할 줄 압니다. 풍부하게 넘치기만 하면 감사할 줄 모른 채 불행해지지요.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배은망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무척 화를 내시지요.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11,21.23)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퍼부으시는데 이렇게 저주를 받은 세 도시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도시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11,20)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가장 많이 보고 들었던 사람들이 이들 동네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코라진, 또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위치한 벳사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웠다가 치유를 받았던 어촌 마을 카파르나움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살기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머무시면서 가장 많은 말씀과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세 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외면했지요. 많은 정성과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회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도시에 예수님께서 저주를 퍼부으셨고 실제로 이 도시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받은 은혜에 걸맞게 감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 보면 받은 은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딴 짓을 하고 교만해지기 일쑤였지요.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앞 부분 몇 장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채워주셨는데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으로 교만해져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힘들게 일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3,19)

또한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지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아는데 사용하지 않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데 사용했습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11,4)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풍요로운 도시였으나 타락의 극치를 이루었지요.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스스로가 잘 나서 풍요로운 줄 알았던 교만한 도시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창세19,24-25)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저주에 가까운 화를 퍼부으신 이유는 그토록 많은 사랑과 가르침과 기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 사람들이 그에 걸맞은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어떤 시대보다도 불만이 많은 시대가 우리 시대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면 효도도 할 줄 모르고 부모 자식 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감사하는 마음은 효도의 출발이자 신앙의 기초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받은 은총이 지속되지요.

우리 주위에는 은혜를 많이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어려운 사람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특히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 드릴 일이지요.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은총이 지속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회개?‘와 ??감사?‘입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
박상대 신부 -


마태오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후, 그들에게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담은 파견설교를 길게 하신 다음 실제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마르코와 루가는 12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비교적 간단한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내려받고 곧바로 나갔으며,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마르 6,12.30; 루가 9,6.10) 마르코와 루가가 이렇게 똑같이 12제자의 파견과 활동보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일 것인데, 마태오가 이를 빠뜨렸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마태오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속해서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으로 보도한다.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예수께서 진정 메시아인지를 물어보게 한 질문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진정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다.’는 사실을 한층 강조하기 위한 마태오의 편집으로 볼 수 있다.(마태 11,2-1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말씀을 어제 복음에서 떼 내어 오늘 복음과 연결해서 본다면, 예수께서 주시려는 ‘칼’은 분명 경고와 심판을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주변의 도시들, 즉 예수께서 지금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신 코라진(호수 북쪽 3Km), 베싸이다(호수 동편어촌), 가파르나움(호수 북편어촌)에 불행을 선언하신다.

이 불행선언은 곧 멸망의 경고요 심판이다. 이유는 당신께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곳인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기적들을 차라리 죄악의 온상지였던 시돈과 띠로(당시 페니키아, 현재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도시: 이사 23장; 예레 25,22; 에제 26-28장; 즈가 9,2-4; 요엘 4,4 참조)에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자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며, 소돔에(창세 19장; 에제 16,48-50) 베풀었더라면 소돔이 유황불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넋두리를 하신다. 그리고는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들이 시돈, 띠로, 소돔의 도시들보다 훨씬 무거운 벌을 받을 것임을 예고하신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예언이다. 만약에 내가 직접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시고(19,1), 거기서 예리고를 거쳐(20,29) 예루살렘으로 상경할 때까지(21,1)는 줄곧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선교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년시절을 포함한 30년이라는 공생활 준비기간을 나자렛과 이곳 도시들에서 보냈다. 즉 예수님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도시들이 오늘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아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도시와 마을도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을 남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나 밤의 어둠이 죄악을 가리고 있으며, 그 속에는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쩌면 이미 뿌리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

“방배동아, 명동아, 남포동아 남천동아, 너희들이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웃기지 마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불행선언을 맞았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이 띠로와 시돈보다 악한 죄악의 도시들이어서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직접 보았으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기적의 은혜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도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순간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믿음을 가진다면 오늘의 불행선언은 곧 행복선언이 될 것이다.

흔히들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 자기식대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여라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세 지방 즉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을 불행하다고 말씀하셨고 한편 띠로와 시돈 지방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신 것을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은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나움을 불행하다고 하셨을까?

 

도대체 그 지방에 무슨 기적을 행하셨길래  띠로와 시돈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셨을까? 왜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만 기적을 행하셨고 띠로와 시돈 지방에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예수님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 지방에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또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코라진은 갈리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고을이며 베싸이다는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리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있는 어촌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파르나움은 호수 북변 어촌으로서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중 주로 그 집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의 순회전도를 하셨다.

 

어쨌든 마태오는 가파르나움을 예수님의 고을이라고 했다. 위에 언급된 세 지방은 모두 예수님이 전도 여행을 하셨던 곳이고 띠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인의 도시로서 예수님의 전도 여행이 미치지 못한 곳이다. 다시 말해서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한 곳이며 띠로와 시돈 지방은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한 곳이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주력해서 직접 복음을 전한 세 지방에서의 복음 선포가 실패로 끝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불행하다"라는 말은 "주의해라, 슬프구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우려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해서 슬프다,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토록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말을 듣지 않고 사고가 났을 때 부모가 안타까워 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불행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는 데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말을 해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마시면 결국 그 사람은 알콜 중독자가 되고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병이 들어 불행하게 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 많은 지방이 있지만 특별히 가파르나움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 즉 하느님의 기쁨 소식을 전하셨으니 그 지방은 얼마나 축복을 받은 지방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인가? 오히려 이방인의 지방인 띠로와 시돈 지방에 그토록 열심히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다면 "그들은 아마도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이 불행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복음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적들도 행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구세주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않았고 조금도 복음을 듣고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회개의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또는 은총을 받지 못했으니 불행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는 것이다.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특히 복음은 하느님의 크나큰 선물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인간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병든 인간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 그 치유의 방법을 말씀하시고 또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치유시켜 주시고자 하신다.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장 큰 선물이며 축복이고 또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약이다. 그러나 평양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듯이 예수님게서 아무리 큰 선물과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더라고 그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축복이 축복이 될 수 없고 가장 큰 선물이 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그리고 많은 축복과 은총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복음을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자유 의지에 맡겨진 것이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축복이고 선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축복인데 그것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행일뿐 아니라 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원의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진지하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죄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가 잘 모르는 데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큰 선물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길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활동하셨을 때에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복음을 전하셨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오늘 날에도 복음이 선포되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거나 복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복음의 내용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축복을 받아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귀중한 선물을 하나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이고 가난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신자라고 해서 다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비신자들보다 더 많이 복음을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지만 이 큰 축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 날에 오히려 비신자들보다도 더 깊고 깊은 저승에 떨어질 것이다. 비신자들이 우리처럼 복음을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도 우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 올바르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 45) 오늘도 예수님은 카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선포하신다. 신자라는 신원만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듣고 회개하여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