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9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멍에는 말이나 소의 목에 거는 막대기다. 멍에에 줄을 달아 끌기에 말이나 소는 저항 없이 따라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멍에에 비유하신다. 따라야 할 의무감이 있다는 암시다. 그렇지만 편하고 가벼운 멍에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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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교훈입니다. 현대식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화장품 가게를 자주 가면 향수 냄새가 배이고, 생선 가게를 자주 드나들면 비린내가 난다.’ 성당에 자주 가면 어떠한 향기를 내겠습니까? 바로 겸손의 향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병들고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반대하며 시비를 걸어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대처하지 않으시고 여유와 인내로 받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더욱 존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승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기에 승복하였습니다. 그 첫자리에 겸손한 모습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겸손의 향기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과 겸손의 자세가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꾸지람과 회초리가 아이들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따뜻한 격려와 애정이 그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 앞에 서면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약함도 인정하려 합니다. 겸손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덕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새벽을 열며
빠다킹신부
바빠 죽지는 마세요
-남상근 신부-
바쁜 날들입니다. 모두가 바쁘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죽을 만큼 바쁠까요? ‘바빠 죽겠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힘든 날들입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죽을 만큼 힘들까요?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쁘십니까?
무엇 때문에 힘드십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을 얻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롭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빠 죽을 것 같고,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도 멍에를 얹어주시고, 짐도 지워주신답니다.
그냥 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편하긴 하지만 멍에를,
가볍긴 하지만 짐을 얹어주시고 지워주신답니다.
세상이 주는 멍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우리를 기도하게 하는 멍에입니다. 세상이 지워주는 짐은 나를 힘겹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은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짐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사랑은 움직이는 것
-노성호 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율법 준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365개 금령과 248개 명령으로 구성된 총 613개의 율법을 빠짐없이 지키면서 살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만 의인으로 인정받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율법 준수에는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만들고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서, 심지어 율법 조문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결국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수많은 율법 조문을 두 가지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불편하고 무거웠던 율법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당신의 편안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짊어짐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보면서 지시하거나 강요하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눈높이를 맞추시며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쪽으로 움직여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다. 그분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어렵고 두렵고 저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면서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곁에 찾아오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 주기 위해 어디론가 움직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따라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마땅한 사랑을 드릴 수 있어야겠다.
<독서> :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구하는 모세
-경규봉 신부 -
하느님으로부터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여쭌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답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파견하신 분은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이스라엘 선조들의 하느님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느님이시라고 말하도록 하신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와 억압에서 해방시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기로 하셨다고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장로들과 함께 이집트 왕을 찾아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이집트를 떠나야 하겠다고 말하도록 한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름은 그 사람의 기질과 성품, 지위와 생애를 반영한다. 특히 고대 세계에서 권력자들은 사신을 보낼 때 자신의 권위를 위임하는 뜻으로 자신의 이름이 담긴 도장이나 편지를 보내거나, 사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름 속에는 그의 권위와 힘이 담겨져 있다. 신약 시대의 사도들도 복음을 전파할 때,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4,7-12). 따라서 모세는 자신을 이집트에 파견하시는 절대자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이름이 무엇인지를 여쭌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답하신다. 이는 스스로 있는 분,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언제나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창조된 존재들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영원 이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묵시 1,4.8). 절대적으로 완전하시고, 독립적이시며 모든 인과법칙을 초월하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더욱이 이 말씀 속에는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꼭 이루신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이 곧 ‘야훼’이다. 히브리인들은 ‘야훼’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출애 20,7; 신명 5,11) 그 이름 대신 ‘아도나이’(주님)라고 불렀다. 그 까닭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가서 조그마한 소리로 하느님의 이름을 한 번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백성은 대사제가 살아나올까를 염려하여 대사제가 성소 밖으로 나오기를 숨죽여 기다렸다고 한다.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바로 그처럼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 영원하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데려오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신 하느님, 그에게 약속의 땅과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 이삭과 야곱과도 함께 계시며 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 바로 그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으로 이집트에 가서 이스라엘을 구해오도록 하신다. 모세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도록 하신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4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모세를 천한 목자로 살도록 하셨다. 모세의 힘과 지혜, 능력 모두가 쇠하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모세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여 당신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일은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쇠할 때까지, 오직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하여 모세와 함께 하시고 그에게 힘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신다...◆
어떻게 이 짐들을 지고 갈 것인가?
-김형태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스런 고백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매번 가집니다. 고백성사를 드리거나 면담을 하다 보면 참으로 세상의 아픔과 어려움의 짐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는 체험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삶에는 두 종류의 아픔과 어려움 짐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생스러운 짐. 즉 사람이 스스로 사서 얻은 짐입니다. 자신의 실수, 게으름, 과욕 때문에 얻어진 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거운 짐. 즉 이 세상에 살면서 원하지 않더라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들입니다.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사회와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그 입장과 상황이 다를지 모르지만 성서에서 말씀하시듯이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을뿐더러 당장이라도 벗어 던져버리고 싶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힘들어짐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짐들을 지고 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간혹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께서 '편히 쉬게 하신다'는 말씀 때문에 그 짐이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여기서 멍에는 무엇입니까? 두 마리 소가 보조를 맞추며, 함께 짐을 끌도록 고안된 도구이면서 동시에 소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즉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처지면 서로가 힘들게 되어 있는 도구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많은 어려움들과 아픔들을 겪으시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실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함께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 그 짐들은 가벼울 것이라는 뜻이며 또한 이러한 가르침과 삶을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한 어린이가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다가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한 어린이가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다가 문득 교회 앞에 써붙인 글에 눈이 번쩍 뜨였답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공부도 하기 싫고, 성적표를 받았는데 부모님께 말씀드릴 면목도 없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던 차에 그 말씀을 읽고는 “좋아, 그럼 내 책가방과 성적표를 여기 놓고 가요” 하곤 막 뛰어가더라는 겁니다.
저는 그 어린이의 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저도 나이 들어 그런 경험을 하였답니다. 저는 삶의 뒤안길에 들어선 나이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직도 갓난아이랍니다.
이번 사순절 시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함께하는 시간을 꼭 가져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토요일 밤부터 위경련이 일어나 통증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정말 이를 악물고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저는 이것이 마치 좋지 않은 유혹(?)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꼭 참례하려는 의지를 가졌지요. 미사가 끝난 후 주님의 부르심과 나의 의지가 함께 승리하였다는 느낌,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밝은 천지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증도 사라져 갔습니다.
그날 저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고 하신 말씀에서 주님의 품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부산교구 강호성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살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근본정신인 사랑과 자비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율법은 힘겨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 23,4를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세이들에 대하여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이나 아론의 제사법이 당시에 그만한 이유와 그 의의가 따로 있었겠지만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크나큰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거운 짐 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 하시며,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당신이 우리에게서 치워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미로운 말입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같이 점점 힘들어져 가는 세상살이 속에서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희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삶의 무게들을 당신께서 함께 나누어지고 편하게 해 줄테니 당신께 와서 머물고 함께 하자는 초대이지 않습니까? 당신과 함께 하면 그 무거운 짐,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과 힘든 생활도 가벼워진다는 초대이지 않습니까?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억지로 지워주던 죄의 무게를 덜어주듯이 우리들의 죄의 무게도, 삶의 무게도 덜어 주신다는 말씀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면 현실의 이 어려움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날들만 계속됩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성당에 가서 기도하거나 수도자나 성직자와 면담을 하면 다 해결이 됩니까? 기도를 해도 응답이 바로바로 오던가요? 혹시 참고 기도하자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기다려보자는 답까지는 나오되 현실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복채를 좀 내어놓으면 현실적인 예와 아니오가 나오기는 합니다. 때로는 부적까지도 나옵니다. 물론 그런 대답과 부적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마지막까지 옳은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쟁이, 철학관의 점괘들 또한 우리의 현실을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간의 안정을 줄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는 그 말씀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냥 이상에 불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하나의 최면에 불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 없이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기 전에는 오늘 이 말씀들이 하나의 이상이나 최면에 불과할 수 도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잼이 집에서 나오는 말들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권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상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이의 죄의 짐을 한 몸에 지니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 또한 당신과 당신을 닮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예수님의 멍에가 무엇인지를 알고, 느끼고, 배우고,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어디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일 때, 그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하여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들에 기대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다른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느님을 두고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그 어떠한 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체득하고, 하느님을 따라 산다면 말입니다. 하느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저 손만 비비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현실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넘지 못할 산은 없다 했습니다. 하물며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시는 그분이 계신데 이겨내지 못할 십자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스승 그리스도 예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아멘.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부산교구 김대성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애는 편하니 내 멍애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멍에라는 표현이 영 귀에 거슬립니다. 멍애가 무엇입니까?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얹는 나무....라고 국어사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멍애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멍애는 부자유스럽게 하여 짐을 잘 지고가도록 강제로 얽어 매는 장치인데, 누가 그것을 스스로 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멍애를 풀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멍애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어주는 멍애가 편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멍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멍애를 싫어하지만 멍애 없는 삶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어떤 형태로든 멍애를 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지워준 것일 수도 있으며,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우리 모두는 멍애를 메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멍애를 메고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편해 보이고 수월해 보이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는... 이내 사라지고 말 그런 것들에 매달리는 멍애를 맬 것인가, 아니면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런 멍애를 맬 것인가....우리들은 매일매일 성찰해야 하고 또 선택해야 합니다.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이 주신 멍애를 기쁘게 매고 가겠다고 결단했으면서도, 어느새 저는 다른 멍애를 매고 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때 저는 제자신이 소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멍애를 팽개쳐버렸을 때,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멍에에 갇히고 마는 제자신을 봅니다. 멍애에서 벗어나는 길은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멍애 속에서 평안하게 머무르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 멍애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묵상할수록 깊고 넓은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주님이 주신 멍애를 기쁘게 매고 갈 수 있는 은총을 다시 한번 간청해봅니다. 그 멍애 안에서 평안하게 머무르고,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마음모아 기도드립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양승국신부-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안식(安息)이란 무엇입니까? 말마디 그대로 ‘편히 쉼’을 의미합니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거의 몸을 파묻다시피 깊숙이 앉아 좋아하는 비디오 한편 보는 것도 좋은 안식이 될 것입니다.
시원한 계곡 흐르는 물 위에 차양을 친 다음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어도 엄청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쉬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계속 그러고 있다 보면 슬슬 무료해집니다. 지루하고 심심해집니다.
더 의미 있는 휴식이 되려면 그 ‘누군가’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휴식, 그간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안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휴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경치나, 분위기, 주변 상황은 더 이상 그리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다른 것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의 옆에 있는 그 자체로, 그의 존재 자체로 가장 감미로운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안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결코 변치 않는 영원한 연인,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변하고, 다 떠나가는 반면 우리가 백발이 되더라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는 순간, 미사에 몰입하는 순간, 하느님을 찬미하는 순간, 영적독서에 깊이 심취하는 순간, 깊은 묵상에 잠기는 순간, 이 세상 모든 대상이 내 앞에서 사라지고 그분과 나 둘만이 남아있는 감미로운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참된 안식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지친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26,7-9.12.16-19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복 음 : 마태 11,28-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디가 아프냐에 따라서 병원도 여러 과목들로 나뉘어지지요. 이가 아프면 치과에, 눈이 아프면 안과에 가고 배가 아프면 내과를 찾는 등 신체 부위에 따라 다양한 진찰과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영혼이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갑니까? 마음이 아플 때 어디를 찾아가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게 되어 있지요. 간혹 이 병원 저 병원 아무리 쫓아 다녀보아도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본인은 아파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난 것이지요.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과 영혼이 있지요. 그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수시로 병원에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지만 마음의 병은 치료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미아리로 점을 보러 갑니다. 불안하고 어찌해야 될지 모른다며 길을 묻지요. 그런데 대부분 점쟁이들은 나쁜 것을 하나씩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어 다시 찾게 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남녀 두 사람이 소위 말해서 궁합을 보러오면 안 맞는 것이 있어서 어느 한 쪽이 크게 다치니 결혼은 안 되겠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당사자나 부모들은 쉽게 그 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가서 그 불운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고 의탁하게 되지요. 결국 점치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행위가 지금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점쟁이를 만나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갈 수 있지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이라고 불안한 마음을 다 치료해 주고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온전히 치유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8.29)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께로 오라고, 당신이 편히 쉬게 하겠다고,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와서 안식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곳으로 가서 헤매고 다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이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다 나에게로 오너라.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갈 터이니 ??죽음이여, 어서 오라.?‘ 이런 뜻일까요? 아니지요.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잘 나와 있지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성현, 성인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2열왕19,15)
유다 왕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의 공격 앞에서 하느님께 올린 기도입니다. 이런 고백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확인하고 실행하실 때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1,35)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쉬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제일 미개한 것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 참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너라.?“고 하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힘은 지난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발휘되었고 지금도 한결같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의 모습은 다릅니다. 편히 지내서 살이 붙고 성형으로 가꾼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에서 오는 편안하고 넉넉한 모습은 따로 있지요.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여유가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지요.
우리는 성인 성녀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얻은 사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모르는데요.?“
기도 얘기만 나오면 주눅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기도학교>를 통해 계속해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배우는 것은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 연습하고 실행해야 하지요. 제일 좋은 방법은 성체 조배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면 금방 나올 수도 없고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가 편치 않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금방 나와도 괜찮습니다. 차츰차츰 익혀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다보면 자리잡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배실에서 기도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과 노트, 펜을 가지고 들어가 천천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나 구절이나 상황에서 뭔가 다른 느낌이 올 때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사람마다 느낌이 오는 부분은 다 다릅니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가 와닿고,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용서가 와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무르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때의 느낌을 적을 수 있으면 그대로 솔직히 적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10, 20분 시간이 금방 지나가지요. 그 말씀이 좋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큰 분심 없이 들어온다면 계속 머무십시오. 이런 식으로 기도 생활을 서서히 준비해 가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면 이제 밤이 늦어도 조배실을 떠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머지 않아 그는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좋은 성당이란 잘 지어진 건물이나 세상의 명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쉬고 지혜를 찾는 개인과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몇 년 전 폴란드에 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서 깊은 성당들을 둘러보는데 가는 곳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 신자들은 지나가는 길에 성당이 있으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래서 ??공산 국가인 폴란드에서 교황님이 나셨구나.?‘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지요. 반면에 이태리에 들어서니 로마의 성당들은 화려한 예술품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웅장함과 규모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며 찾고 있지요. 그러나 그 곳에는 신자는 없고 관광객들만 가득했습니다. 왜 그곳이 공동화되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하시며 지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고 찾아낼 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순식간에 어루만져 치료해 주십니다. 이는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시고 버림받은 과부와 고아를 치료해 주신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매번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천 년 전 옛날 이야기 속의 예수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참 쉼은 시골을 찾아가는 것도, 찜질방을 가는 것도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인지요?
예수님의 멍에는.....
-[부산교구 정 호 빈첸시오 신부]-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식의 찬미가 어울릴지 몰라 지극 정성을 기울이지만 사실 예수님의 세상살이는 그렇게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지극히 높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오셔서 그 사람의 모습으로 사신 분,
사람답다는 표현의 중심에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셨고, 항상 놀림감이나 표적이 되곤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은총이나 축복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이가 항상 죄인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과 말하는 것을 즐기고 생활도 항상 구차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모습이었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이라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당신은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 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가난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겹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운명지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에서 제외된듯 여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면 왜 편히 쉬게 되는지 말씀은 이어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과 함께 해서 얻게 되는 두 가지 선물. 그것은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무엇인가를 두고 마음에 품어 생각하고 참을 수 있는 온유함과 모든 것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라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참 사랑의 조건들입니다.
그러니 그 일이 멍에와 같다 하더라도 억울하거나 싫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시는 동안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한 순간이라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 그 누구와 함께 하시더라도 그들을 품어 생각해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려주시고, 당신의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더 없이 어리석게만 보여 함께 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사실은 가장 하느님의 사랑에 충 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난한 죄인들과의 삶은 사실 그분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렇게 대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좋아합니까 ? 그래서 그분의 멍에를 맬려고 합니까 ?
이 질문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과의 거리, 그리고 사람답다는 말과 우리 자신의 거리를 재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
박상대 마르코 신부 -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정감(情感)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차등(差等)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遵法精神)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의지(意志)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선진(先進)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水)이 가는(去)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막히면 머물고,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이치(理致)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갔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법(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蹂躪)당하고, 경제적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 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마태 7,12)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계명: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유광수 신부 -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인간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을 구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구원하다." 라는 말은 라틴어로 Salv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생명을 구하다, 구제하다, 위험으로부터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을 구조한다, 구출한다, 해방시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를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는데 누가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구해 줄 수 있는가? 대통령이 할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이 구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구출해 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내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짐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고 고통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이 초대에 응해야 한다. 이 초대는 바로 나를 위한 초대요, 나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이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원의는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원의가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간절한 원의는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거기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요, 무기력함이요, 절망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는 복음이다.
조용히 이 말씀을 음미해보자. 누가 우리에게 이런 초대를 하겠는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면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구원은 그동안 나를 얽메어 놓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한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은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벗어버리고 해방되어야 한다.
정녕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은혜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즉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먼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대로 배워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께 가기는 하면서 그 다음에 배우는 일을 소홀히 한다. 그냥 에수님께 가서 청하기만하면 되는 줄 안다. 물론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 방법을 모른다.
~ 집회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라. 어찌하여 지혜를 갖지 못한 채 불평만 하고 너희 영혼의 갈증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느냐! 나 이제 결론삼아 말한다. 지혜를 돈으로 살 생각은 말아라. 네 목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라. 내가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큰 평화를 얻었는가를!"(집회 51, 23-27)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떤 강의를 하든 어떻게 알고 나타나시는지 그 자리에 반드시 와 계신다. 이 할머니와의 인연은 99년도 마르코 복음 강의를 사당동에서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강의를 하든 줄기차게 쫓아다니신다. 지난번 논현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남보다 항상 일찍 오시는데 하루는 저에게 다가 오셔서 "신부님, 저는 요즈음 생기가 납니다. 이 노인네가 생기가 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다 신부님 덕분이예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에 눈을 뜨니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편안하게 지낼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는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할아버지 병 간호를 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생활하신다. 그런 형편이지만 그것을 고생이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하고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님한테 그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음미해보자. 감사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된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알고 우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갖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거지가 되어 온갖 고생과 굶주림을 겪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할만큼 아버지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여 마치 돼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항상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오늘도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애타게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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