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1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quench,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꾸민다.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독한 오해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당신의 사명을 펼치신다
☆☆☆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이집트를 떠납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해방이었겠습니까? 그들은 감격 속에 이집트 밖으로 나갔습니다. 행군하던 이들은 아이들을 빼고 장정만도 육십만 명에 달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정말 그렇게 많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나 숫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해방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빵 대신 과자를 구워 먹었습니다. 반죽이 부풀 수 있는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바삐 나온 것은 즉각 움직이라는 모세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에는 즉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누룩 없는 빵이 등장합니다. 즉시 응답하려고 반죽이 부풀 시간도 없이 나왔음을 상기시켜 주는 빵입니다.
주님의 뜻은 지체하지 말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도 곧바로 축복하여 주십니다.
새벽을 열며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에 어떤 형제님께서 자신의 아내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그대로 둔 채, 차를 한참 몬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아내가 승용차에 타지도 않았는데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깊은 공감이 가더군요.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제 동창들과 함께 쉬는 날, 어느 한적한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하기로 했지요. 한 동기의 집에서 모여서 옷을 갈아입고서는 차로 테니스장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마치고서 뒷정리를 하고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차가 없는 것입니다. 저를 이곳에 두고서 떠났습니다. 저는 장난 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아마도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제가 타고 온 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믿었습니다. 내가 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저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10분, 20분……. 하지만 다시 오지 않더군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보편화 되어 있던 시절도 아닌지라, 연락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외진 곳이라 택시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타지 않은 것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가?’
다행히 30분이 넘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을 수가 있었고, 저는 그 택시를 타고서 동기들이 있는 사제관으로 갈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는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같이 제가 그곳에 혼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제가 느꼈던 서운함을 떠올리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남겨진 아내의 서운함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득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서운함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즉,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나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주님께서는 무척이나 서운하실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열차 안에 주님을 태우지 않고, 나만 목적지에 가면 그만이라는 착각을 하고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에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끼시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그에 반해서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인생이라는 열차에 예수님을 태우려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다시금 점검하여 보십시오. 과연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만 가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과 함께 가야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만 바라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남상근 신부-
끝까지 믿어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한 번 더 기다려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내게 실망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포기하시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시는데 내가 먼저
포기한다면, 내가 지레 실망한다면 그것은 너무 앞질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앞질러서야 되겠습니까? 하느님만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 틀렸어, 다 끝났어, 길이 없어, 되는 일이 없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꺾지 않으셨는데 꺾였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끄지 않으셨는데 물을 부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전히 내게
희망을 걸고 계시는 한 아무것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근심하십니까?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부족할 따름입니다.
봉사는 주님이 주신 기쁜 상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제가 다니는 성당은 참 작은 곳입니다. 주일미사에 나오는 신자들은 100명 남짓 되고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어느 형제님이 아픈지, 어느 자매님이 누구랑 친한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폐광촌에 들어선 카지노로 인해 열악한 교육환경에 놓여진 청소년들을 위해 신자들이 기도하며 모은 정성으로 ‘흑빛 청소년 문화센터’를 건립·개관했고 매달 지역주민들과 음악회를 엽니다. 매년 7월이 되면 본당의 날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살다가 외지로 이사 간 교우들을 초청해 본당이 세워진 것을 함께 감사하며 축제를 합니다. 나눔의 잔치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인 분들은 성모회 회원입니다. 60세 이하는 청년이라고 할 정도로 연세 드신 분들이 많지만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봉사해 주십니다.
작년 12월 본당 설정 30주년을 맞아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문집을 보고 기뻐할 사람들을 떠올리면 밤을 새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30주년 기념사업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나 문집이 나오자 난리가 났습니다. 글을 좀더 고치지 않았다거나 문집에 나온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연세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저에게 다가와 “마리아, 정말 고생 많았어. 내가 언제 책에 나오겠어? 정말 고마워.” 하며 손을 꼭 잡아주셨을 때 내 마음속의 잘난 척하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건강이 별로 안 좋은데도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침개를 만들고 홍어회를 무치고 튀김도 맛있게 하는 분입니다. “힘드시죠?” 하면 “이렇게라도 불러주니 감사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봉사를 할 때 이왕이면 폼 나는 것을 좋아하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때론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것이 큰 권력이라도 되는 양 군림하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는 말씀대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봉사하는 사람은 벌써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 그것 자체가 기쁨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상이기 때문입니다.
<독서> : 오직 은총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느님
-경규봉 신부 -
하느님께서 이집트인의 맏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시자 파라오는 눈물을 머금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나일 강 동쪽 삼각주에 있는 도시 라므세스(이스라엘의 강제노동으로 건축된 도시 : 1,11)를 떠나 에담으로 가는 길목인 수꼿으로 갔다.
장정만 60만 가량(민수 1,46-47)이었으니 여자와 어린이들, 그 밖의 많은 잡식구들까지 계산한다면 대단한 수효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났다. 야곱이 가나안에서 이주한 때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창세 15,13)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압제를 받다가 떠난 것이다.
그날 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시려고 밤새워 지켜주셨다. 이 밤은 오랜 고통과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기쁨의 밤이다. 이스라엘의 후손은 모두 다 이 밤을 대대로 지켜야 한다(12,14).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이들을 모조리 쳐 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 죽이셨다. 그러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한밤중에 모두 일어났다. 이집트에서는 곡성이 터졌다. 초상나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던 것이다.”(출애 12,29-30)
하느님께 대항하고 거부하며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는 파라오로 인하여 이집트에는 전에 없던 대재앙이 일어났다. 파라오는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한다고 하여 그 대가를 치를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있어서 당신 백성은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며, 당신 백성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것은 곧 당신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때문에 이집트에는 모든 맏이들이 죽는 대재앙이 그날 밤에 일어난 것이다.
그 밤은 곧 과월절 밤이다. 이 밤에 이집트인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고, 이스라엘인에게는 하느님의 보호가 있었다. 과월절은 이스라엘 모든 절기 중 밤에 지키는 유일한 절기로서 이 밤은 아빕월 14일 저녁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어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신 이 날을 기념하여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 사건을 들려주었으며, 7일 동안 이 날을 기념하며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13,6). 또한 사람의 맏이와 짐승의 맏배를 하느님의 몫으로 돌렸다(13,12).
동시에 이 밤은 구세사 안에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미리 보여주는 밤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3-5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한 잔을 드시고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1고린 11,23-25).
주님께서는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던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풀려나와 자유를 얻고 새로운 삶을 얻었듯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어린양의 고기마저도 가족끼리 나누어 먹었다. 하느님께 바친 것도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랐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선조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오직 아버지의 은총으로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상한 갈대에 대한 연민
오늘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하셨습니다. 무수한 갈대를 바라보시며 저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심판의 그 날까지 아무리 상한 영혼일지라도 우리를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갈대는 아주 연약하며 쉽게 변합니다. 우리 인생 역시 갈대처럼 변하기만 할 뿐 아니라 매우 연약하여 쉽게 쓰러집니다. 그러한 우리일지라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 주님은 상한 갈대에 대한 큰 기대를 갖고 계신다.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보고도 부모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인 우리지만, 그런 우리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대나무 갈대는 속은 비었으나 곧게 자랍니다. 이 곧게 자란 갈대는 잡초와는 달리 약하지만 쓸모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같은 상한 갈대를 인정하시어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대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듯 우리 역시 상한 갈대지만 주님께 시와 노래로 찬미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소생시키셔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을 높이며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갈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가만히 갈대를 바라보면 매듭이 있습니다. 이 매듭이 있음으로 해서 옛날부터 길이를 재는 자로써 사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경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바로 잣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써 모든 것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것의 표준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상한 갈대는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쓰임받을 수 있다.
이 상한 갈대는 주님의 손에 붙잡힐 때 비로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홍포를 입고 머리에는 가시 월계관을 손에는 갈대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말해줍니다. 홍포는 왕이 입는 것이며 갈대는 왕이 쥐고 있는 포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임금으로써 임금의 권세를 쥐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상한 갈대지만 주님께서 왕이심을 증거하는 권세의 갈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갈대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할 것입니다.
묵상종합입니다.
모두가 상하고 죄로 인해 얼룩진 갈대입니다. 비통과 파탄으로 우리는 모두 상한 갈대처럼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붙잡아주시는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임을 아는 신자는 그렇기에 겸손하며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연약하고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하느님 손에 붙잡힌 갈대로서 겸손의 머리띠를 두르고 하느님께 쓰임받는 잣대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우리는 늘 많은 잘못을 합니다.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제가 사는 곳은 어떤 도회지보다도 자연과 가깝습니다. 봄이 되면 텃밭에 밭을 일구고, 쑥도 뜯고, 나물도 캐고 그리고 만든 음식을 다정한 이웃들과 나누며 정겹게 살아갑니다.
주일 미사가 끝나면 교우들끼리 모여 하느님을 향한 이야기도 나누지요. 지난주에는 연령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염하면서 느낀 감동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생전에 술만 먹고 나쁜 짓은 다 했을 거라던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고 평화로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죽을 때 통회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보시는 기준과 우리가 보는 기준은 다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많은 잘못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성과 용서를 청하며 사는 삶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타당성만을 찾는 삶은 아무리 하느님을 믿는 자녀라 하더라도 건조한 삶의 연속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12,21)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전통적인 의미로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말하지만 오늘날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 하느님을 알아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닐는지요? 생전에 술만 먹고 나쁜 짓을 하던 그 사람은 한때 ‘이방인’이었지만 하느님의 품에 안겨 용서를 청한 그 순간부터 이방인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거는 사람이 하느님의 귀염둥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러나시는 예수
-부산교구 강호성 바오로 신부-
우리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고픔과 어려움보다 문자만 남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보다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호세아 6:6)이라고 하시면서, 율법에 매여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하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에서 무안을 당하고 물러나서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합니다. 이는 단지 무안을 당해서 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자신 있어 하며, 평생을 살며 연구하고 가르치던 율법의 근간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참 지식이며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흔들고 참된 의미를 이야기했을 때 이들은 위기의식까지 느꼈을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대를 이어오며 율법을 연구하던 사람도 아니고 힘이 있거나 재물이 많은 존재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들보다 더 의미 있고 권위 있는 이야기들 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고 이는 곧 자신들이 밥그릇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으면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기득권을 잃을 수는 없으니 대안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없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이 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 받았을 때 있는 그대로 솔직히 인정하며, 더 나은 진실을 따르려고 하면 한 때는 어렵지만 크나큰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은폐하려고 하면 더 큰 잘못을 꾸미게 되고 그것으로 안될 때, 또 다른 흉악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되고, 더욱이 하느님 앞에 감추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 무죄한 자의 고통과 억울함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드러내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밀고 당기기의 명수이신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채시고 그 자리를 물러나십니다. 아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으시기에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기와 무모함을 혼동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충동할 십자가의 죽음 전에 해야 할 일을 위해 그곳을 떠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모이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어떻게 처신했었고, 군중들은 얼마나 흥분을 잘 하는 가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메시아는 힘으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사랑의 봉사자요, 왕위에 올라앉아 있는 이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자 임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야 만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널리 세상에 퍼져야 했던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굳이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흔히 겪을 수 있는 그런 충돌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고, 형제 자매들 사이에도, 교회 단체 모임 속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와 국가 안에서도 그 모습을 종종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바라보도록 합시다. 혹시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느 곳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지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율사들처럼 그렇게 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부분은 과감하게 떨쳐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전통은 지키기보다는 깨트리는 데 맛이 있다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만이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 올바른 것들을 겸허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살아야겠습니다.
아이들아, 너희 잘못이 아니란다
-살레시오회 장동현 신부-
학교폭력관련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대충 사실이었습니다.
피해학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가해학생이 미웠습니다.
그가 미웠던 이유는, 고백하건대, ‘어찌 우리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다른 학교도 아니고 우리 학교에서,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데 말입니다.
엄벌에 처하리라 다짐하면서 가해학생을 불렀습니다.
그가 쓴 진술서를 보았습니다. 자기가 한 행동을 기술하며 팔꿈치로 때린 것을
요즘 유행하는 격투기 용어를 써가며 설명합니다. 일상화된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물들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대목이 군데군데 발견됩니다.
그도 역시 피해자였습니다.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부정적 시각에 젖은 교사와 부모로부터
꿈을 박탈당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업주의에 의해 영혼과 육체가
산산이 부서진 젊은이들이 산을 이룹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우리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배상희(마르첼리노)신부-
언젠가 투병중인 한 젊은 환자를 방문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환자는 안타깝게도 이제 한창 꽃피어야 할 스물다섯 먹은 처녀였습니다.
동행했던 자매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게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게 단란했던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갓 스물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의 교통사고로 온 가족들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우울 증세에 빠진 가족들은 모두 넋 나간 사람들처럼 몇 년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의식불명 상태가 길어지면서 식물인간이 된 딸을 두고 동네 사람들도 말들이 많았습니다.
"딸도 딸이지만 이러다 식구들 다 죽겠으니, 이쯤에서 그만 포기해라."
"이만큼 노력했으니 저도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교리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쉽지만 생각을 바꾸자."
그러나 딸을 향한 어머니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호전기미만 보이면 뛸 듯이 기뻐하며
"저것 보세요. 이제 점점 좋아지고 있다구요. 반드시 의식이 돌아올 겁니다"
어머니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간병에 매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극진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기억해 봅니다.
물론 그 뒤로 딸의 병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딸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지금쯤 그 딸은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은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예수님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이 아무리 당신 마음에 안 들고 비참해 보일지라도 그저 참아주십니다.
늘 속으면서도 "이번 한번만 딱!"하면서 인내하십니다.
제 인생도 뒤돌아보니 마치도 살얼음판 위를 걸어온 아슬아슬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측량할 길 없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가
제 삶의 구비 구비에 깃들여져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
-강영구신부-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 없으리라.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그대에게
새소리에 눈을 뜨니 창밖은 여명으로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렇게 열립니다.
온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이 솟아오르지만 고요하기만 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사위(四圍)가 밝아오면 살아있는 것들은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새 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빌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태양이라 합니다.
환한 밝음으로 어둠을 물러가게 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예수는 태양입니다. 새 날은 밝음과 따뜻함으로 시작됩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와 품어줌은 병든 것을 낫게 하고 죽어가던 것을 살려냅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이렇게 치유와 거듭남, 용서와 화해로 시작됩니다.
때 묻고 병들고 시들어가는 것들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새 날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 묻은 것은 씻어주고, 병든 사람은 낫게 하고, 시들어가는 것들은 다시 살려내어 새 날을 시작합니다. 그분은 태양이기 때문입니다.
소리 없이 온 세상을 밝히는 태양처럼,
당신도 한 자루의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서 주위의 어둠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따뜻한 미소가 이웃과 형제들에게 힘이 되고,
당신의 사랑담긴 손길이 작고 가난한 형제들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 없으리라.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양승국신부-
<저는 오직 부족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의 스승이자 아버지이신 돈보스코 성인(1815-1888)의 영성을 주제로 한 문헌을 영적독서로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돈보스코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돈보스코의 삶은 한 마디로 순교의 삶이었습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막중한 일에 둘러싸인 순교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의심이 갑니다. 그 많은 일을 동시에 해냈다는 것은 정말 믿기가 힘듭니다.”
카빌리아 신부님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돈보스코 안에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돈보스코가 맡았던 직책이나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습니다.
사제, 교육자, 교육학자, 자선사업가, 초대형 보육원 원장, 수도회 창립자, 수녀회 창립자, 협력자회 창립자, 도움이신 마리아 신심의 전파자, 평신도 협회 창립자, 선교사업 창립자, 베스트셀러 작가, 저술가, 가톨릭 출판사 사장, 공장장,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아버지...
이 모든 것이 돈보스코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돈보스코는 이 모든 일을 충실히 해나가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는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요란스럽게 떠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야단스런 몸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스스로에 대해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끌여 들여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한 어조로 그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은 모두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직 부족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참된 복음 선포자는 많은 말을 떠벌이지 않습니다.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시끄럽고 말 많은 사람일수록 실속이 없습니다. 이런 저런 많은 말들로 상대방을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만들지만 요란스럽기만 하지 전혀 도움도 안 됩니다. 내용도 부실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도 않습니다.
반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내면이 안정되어 있고 평화롭습니다. 진중합니다. 겸손합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깊이 있는 숙고의 결과이기에 통찰력이 있으며, 또한 말한 바를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다투지도 아니하고 큰소리치지도 않습니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듣기가 힘듭니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나지막합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결국 그가 선포하는 말은 정의의 말, 승리의 말, 구원의 말입니다.
갈 곳 까지 간 사람들,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 완전히 ‘맛이 간’ 사람들, 별의 별 말을 다 써도 제대로 표현 못할 사람들을 어쩌다 만납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착하디 착한 사람은 저리 빨리 데려가시고, 저런 인간들은 어찌 저리 두시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강조를 하시는군요.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아무리 부족한 인생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심을 오늘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판단이나 단죄, 선고는 하느님의 몫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이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신다는 표시로 그들을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니’ 우리도 열심히 그들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표시로 새 삶을 주셨으니, 우리도 부지런히 그들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 메시아적 예언자인 이사야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제 복음과의 중간 부분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보다 더 나은 분, 예루살렘 성전(聖殿)보다 더 높은 분, 안식일의 주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께서는 곧이어 어느 한 회당에서 오그라든 손을 가진 불쌍한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마태 12,9-13) 물론 그날 또한 안식일이었다. 예수님의 상대자들이 먼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10절) 하고 묻는다.
이 대목의 원전(原典)인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먼저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시자 모두들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3,4)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닫고 있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 탄식하시고 노기에 찬 얼굴로 둘러보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시면서 그를 고쳐주셨다.(3,5)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서 예수를 제거할 방도를 모색한다.(3,6)
마태오복음서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보인다. 마태오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1-12절) 이어서 예수께서는 병자의 손을 고쳐주신다.(13절) 치유를 목격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는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를 제거할 모의로 치닫는다.(14절)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 법을 또 다시 어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줄곧 병으로 고생한 병자 측에서 관찰한다면, 그가 오늘(안식일) 치유되는 것과 내일 치유되는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을 해야 할 경우를 만나서 그 일을 회피하면 곧 악한 일이라고 보고 있으며,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경우를 만나서 그 일을 회피하면 곧 사람을 죽이는 일로 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반면 마태오복음은 이 내용을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12절)는 말로 고쳤다. 이는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한 대로 마르코와 마태오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마르코는 착한 일을 위해서 안식일 법은 폐기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마태오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으로 보는 미소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마태오의 의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 예수의 지상사명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40,1-4)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사랑하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 성령을 부어 이방들에게 정의를 선포하는 사람,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사람, 정의를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 이방인들이 희망을 거는 이름을 가진 분, 바로 메시아이신 것이다.(18-21절)
마태오에게 있어서 이사야는 메시아적 예언자이다. 마태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시기적절하게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실존(實存)을 점층적으로 제고(提高)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마태오복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곳에서(1,23), 세례자 요한의 광야선포에서(3,3), 예수의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함에서(4,15-16),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대목에서(8,17), 그리고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고쳐주신 예수를 따르는 모든 병자들을 또한 고쳐 주시는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12,18-21)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제 마태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메시아는 거리에서 그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19절) 조용한 가운데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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