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 10,38-42)
“Lord,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by myself
to do the serving?
Tell her to help me.”
The Lord said to her in reply,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and it will not be taken from her.”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신다. 제자들도 함께 갔으니 식구가 많았다. 언니 마르타는 음식 준비와 제자들의 심부름으로 분주한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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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언니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습니다. 열 명이 넘는 장정들이 들이닥쳤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태연하게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짜증이 난 언니는 동생을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좋은 몫을 택했으니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어디에 있을까요? 먼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십니다. 마리아는 그분의 뜻을 먼저 헤아렸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있는 것이라면 가만히 있고, 활동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하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교훈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 먼저다. 자기 생각을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업적을 남겨야 보람 있는 삶이라 여깁니다. 끝없이 일을 만들고 움직여야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무언가 남기지 않으면 안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래야 할까요? 물론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동분서주하더라도 그분의 뜻과 상관없으면 좋은 몫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독서 : 창세 18, 1-10ㄴ
독서 : 콜로 1, 24-28
복음 : 루카 19, 38-42
제1독서와 복음은 묘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근동지방에서 손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은 왕이다’는 정신으로 낯선 손님들을 모셨고, 이 신비로운 손님들은 그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 마르타는 조상들의 이러한 환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신의 집에 들르신 예수님의 시중을 드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한편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참다 못한 마르타가 주님께 마리아를 부엌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하시며 이 얄미운 동생의 손을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한 기적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요한 2,1-12). 또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마태 11,19)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것을 마련하느라 바쁜 우리의 일상을 결코 하찮게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해 명확히 짚어 주십니다.
당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마르 10,45)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밥을 짓고 마실 것을 내드리는 일은 분명 보람된 일이며, 칭찬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22,27) 하신 주님의 속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기에 앞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우리를 섬기고 싶어 하십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가장 잘 섬기는 길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는 참된 섬김의 순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하는 권고로 시작하는 구약의 전통을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의 땀과 희생이 담긴 수고와 활동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요소입니다. 사랑의 봉사가 결여된 신앙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한편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하는 복음환호송의 외침처럼 올바른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모든 활동은 주님의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귀 기울여 들은 하느님 말씀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이듯 활동과 관상은 함께 해야 합니다.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신앙 생활에서 일이 우선인가 아니면 기도가 우선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흔히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복음 말씀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전승에 따르면, 마르타의 행동에서 실천적 삶을 보게 되고 마리아의 행동에서 관상의 삶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둘 중에 비중이 있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행위는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마리아가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는 마르타의 동생이며,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베다니아 마을에 사는 나자로의 동생이기도 합니다(요한 11,1-2 참조). 또한 마리아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고 입 맞추며 값진 향유를 발라 드린 죄 많은 여인과 동일 인물이기도 합니다(루가 7,36-50; 요한 12,1-8 참조). 행실이 좋지 않았던 마리아는 이러한 신앙 체험 속에서 주님의 현존과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집에 초대된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았고, 그분 발치에 앉아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진정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어떤 것도 행하거나 말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는 마리아의 내적 침묵은, 그분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속뜻을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가 10,41-42). 사실 마르타는 동생인 마리아가 자기의 일을 거들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타의 부탁과는 달리,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이것에 대해 명확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그렇다면 시중드는 일, 곧 봉사하는 데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의 행동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예수께서도 봉사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0,28 참조).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신 의도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봉사)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적 마음 자세입니다. 마르타는 손님을 위해 기쁘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일의 성취를 위해 그 일에 빠져서 염려하고 불안해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한 일이 오히려 나의 만족과 성취를 위한 일로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숙한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도록”(골로 1,28) 하기 위해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인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발치에 앉아서
-평화신문-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한 산골마을로 피정 겸 소풍을 갔을 때 일입니다.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바빠지는 제 천성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이나 되는 일정이어서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에도 떠나기 전날 오후에야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시장도 봐야 했고, 장거리를 뛰기 위해 차도 점검해야 했습니다. 밤 11시가 돼서야 피정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니 벌써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쳤지요. 소형버스에 아이들을 빼곡히 태우고 시동을 거니 마음이 다 뿌듯해졌습니다. 정체가 심한 시내를 빠져나와 막 속도를 내려는 순간, 미사도구를 챙겨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지요. 차에서 내린 저는 다급한 마음에 수도원 소성당 문을 박차고 제의방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소성당으로 뛰어든 순간, 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성당에는 저희 주방 자매님께서 홀로 앉아계셨습니다. 평화롭게 성체조배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 마음에서는 '쿵' 하는 소리가 다 들려왔습니다.
아이들 먹여 살린다는 핑계로 늘 나돌아만 다녔기에 주님 앞에 차분히 앉아본 적이 벌써 오래 전 일이었습니다. 말만 수도자(修道者)지 수도(修道)를 위해 거의 시간을 내지 않은 제 모습, 세상사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주님께 나아가는 주방 자매님의 영적 삶과 일 중독에 빠져 잠시도 주님 발치에 앉지 못하는 제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 극명하게 교차되면서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 말만 수도자지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공동체 기도를 빼먹지 않는 것만 해도 정말 다행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도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가끔씩 피정 강의라도 하러 갈 때면 눈을 반짝이며 앉아 계시는 신자들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는 지극한 정성으로 온 몸을 바쳐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이었습니다. 마르타는 단순하고 소박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자잘한 일상사 안에서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의복은 대체로 마르타의 손을 거쳐 세탁되었고 다림질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예수님 건강을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소꼬리 곰탕을 끓여다 날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 봉사로 예수님을 섬기던 마르타, 온 몸을 다해 예수님을 추종하던 열렬한 팬 마르타보다는 그저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곤 하던 마리아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십니다. 마리아는 마르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독특한 팬클럽 회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과 행적, 인품에 완전히 매료된 마리아에게 이제 예수님은 삶의 최종적 의미요, 존재 이유가 되었습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 생각이었습니다. 적당히 하면 좋은데 때로 너무 지나치다 보니 언니 마르타에게서 자주 질타와 견제를 받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으셨을 때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타는 즉시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위한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었지요. 예수님과 제자 일행의 수효가 상당했기에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손님접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것만이 지상과제였습니다.
오늘 마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예수님의 발치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지극히 예언적 모습입니다. 그분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좋기에, 그분 말씀이 꿀보다 더 달기에 마리아에게는 그분 발치에 앉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음식 준비나 접대, 갖은 세상살이보다는 그분 앞에 앉는 것, 그분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파악한 마리아였기에 다른 모든 부차적인 것을 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분 발치에 앉습니다.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과 단 일초라도 더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손님으로 오신다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지난주일 주제: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나 자신이 이웃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지난 1주일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손님으로 오신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손님을 우대하는 것이 신성한 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었던 것을 항상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고 사막을 횡단하고 홍해를 마른 발로 건넌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곳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나그네를 잘 대해 주며,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바로 어려운 처지에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박대하지 말고 잘 해 주라는 것이다.
제1독서: 창세 18,1-10r
오늘 제1독서에서 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생각해 보자. 세 남자를 보고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청을 드렸다. 세 남자 중의 한 분은 하느님이요, 둘은 그분의 천사였다. 우리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혀 다른 이방인이시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이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의 곁에 다가오시며,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아브라함과 같이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하느님을 맞이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즉 손님을 잘 후대함으로써, 복음을 또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손님으로 등장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리였던 자캐오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루가 19,5-10), 그들로부터 극진하고도 가식 없는 대우를 받으신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 사랑의 표시요 회개에로의 초대가 된다. 함께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친교의 표시이며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다.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한 가족이다. 가족 사이에는 항상 사랑이 있으며, 서로를 위해서 희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며, 또한 똑 같음을 의미한다. “맘먹어!”하는 표현을 쓴다. 맘먹는다는 것은 “맞먹는다”는 뜻이다. 즉, “마주 앉아 먹는다”는 뜻이다. 상을 가운데 놓고 같은 상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맘먹어?” 할 때는 어리거나 약한 녀석이 까불 때 하는 말이지만 본뜻은 이런 것이다. 어렸을 때 보면, 할아버지 잡숫는 상에 있는 반찬에 젓가락을 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무엇이든지 어른이 먼저 시작을 하셔야 식사도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은 식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죄인들은, 바로 사람들이 큰 예언자로 알고 있었던 그 어른에게 진정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짐을 체험한 그들에게는 더 없는 은총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심판의 표지가 되고 만다. 예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모함의 대상이며, 판단의 대상이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에로 이끌어 가고 만다.
복음: 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당신의 인격에 주의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즉 그분에게 무엇을 드리는 것 외에 따뜻이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하면 된다. 무엇을 드리는 것에 더욱 급급한 사람은 그분과 대화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보다는 관심이 적다. 본당 신부로서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하러 갔는데 무엇을 먹을 것을 준비하느라 급급해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대화가 중단되고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또 손님으로 그의 민족 가운데 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분은 특히 모든 이로부터 배척받는 손님이시다. 이 손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분에게 손님 대접을 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사랑이 서로 통할 때에야 비로소 알게된다(루가 24,28-32).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손님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임을 느끼며, 그분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우리가 맞이하는 그분을 이제는 바울로 사도와 같이 모든 이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을 맞이하고 그분을 사랑해 드리는 것은 바로 나에게 오는 이웃을 통해서이다. 좁게는 바로 나의 가족들을 통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통하여, 그리고 공동체를 통하여서이다. 주님을 알아 뵙고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선교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갖고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이야기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집에 가셔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손님 시중들기에 분주했습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와서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부산을 떨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예루살렘 근방 베타니아에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복음서들은 그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복음서는 초기 교회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 바를 알리는 문서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주인공들입니다. 오늘의 마르타와 마리아도 순전히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등장한 인물로 보아야 합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주인공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두 자매간에 발생한 갈등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손님 시중드는데 협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만 앉아 있는 동생을 언니가 손님인 예수님에게 와서 비난했다면 자매간의 갈등은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갈등을 해소하고 두 자매를 화해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르타가 많은 일 때문에 부산을 떨고 있고, 마리아는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셔서 자매간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예수님이 소중한 것은 그분이 우리 인생살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층과의 갈등으로 당신 생명을 바치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르타와 같이 여러 가지 세상일에 부산을 떨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문서입니다. 인간이 하는 말은 언제나 그 시대적 여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오늘의 복음은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생활보다는 수도원 안에서 관상(觀想)하는 수도생활이 더 우위에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마르타는 사도직을 하는 수도자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관상 수도자의 모습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더 중요했고, 보이는 노동보다 보이지 않는 생각 혹은 관상이 더 소중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을 위해 사도직 활동을 하는 수도자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관상한다는 수도자들이 더 돋보였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했습니다. 황제와 영주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결정하면, 사람들은 전화(戰禍)에 휘말리고, 세금을 결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는 통신매체를 통해서 중요한 일의 결정 과정을 봅니다.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집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에 분주합니다. 보이는 이웃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이는 노력을 하는(마태 25,31-46)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비인간적이었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수도자들은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하여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관상이 활동보다 우월하고, 선비가 농사짓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세상과 격리되면 사람이 되지를 못합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람답게 삽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격리되어 하느님만 생각하고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옛날에 입던 옷이니까 입고, 옛날에 하던 짓이니까 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과거 사회의 사고방식, 차별, 우월감 등에 마음을 쓰지 말고, 먼저 자기가 사는 시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우월감을 전면 거부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고 우리를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나라와는 다릅니다. 우월함과 차별을 찾고 만드는 우리의 나라입니다.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관상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 우리는 이런 차별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우리의 나라 안에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삶으로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차별을 그 은혜로우심과 사랑의 실천으로 극복하는 나라입니다.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오로지 기도생활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엔 반대로 오로지 활동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것 같다. 기도 없는 활동 그것은 자기과시로 흐르기 마련이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이다.
1. 귀나 좀 빌립시다
신자 가정을 방문하여 함께 기도를 하고 나서는, 대강의 집안 이야기를 듣는다. “큰아들은 지금 군에 가있고 둘째 아들은 객지에서 대학 다니고, 막내는 재수하고 있습니다.” 말씨가 이곳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고향은 어디며, 집안은 언제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지 등등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는 차(茶)나 음식준비에 온통 정신이 팔려 물어보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거나 번번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제발 귀나 좀 빌려주었으면 하는 때가 많은 것이다.
오늘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대조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전념하였다. 혼자 음식준비에 정신없이 동동거리던 언니 마르타는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달라고 예수님께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가 “필요한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반갑고, 그분을 위하는 마음이야 마르타나 마리아나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을 더욱 기쁘게 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였던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 ‘바쁘다, 바빠 병’을 치료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만연된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 바로 ‘알차게 사는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리고 “요즘 바빠서 죽을 지경이다.”라는 푸념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다. 바쁘게 정신없이 사는 사람치고 자신이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며 음미(吟味)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않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라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 하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을 하게 되니 늘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이다. 바쁘게 해치우는 일은 언제나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불량품이 많게 마련이다.
국제 기능 올림픽에서 늘 제패하면서도 불량품을 많이 내는 기업풍토는 바로 바쁘게 대충 해치우는 행동관습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를 닦으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빠른 시일 안에 완공을 했다. 그러나 그 고속도로를 보수하는 데 처음 시공비의 몇 배가 더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3.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사는 길은 없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단순히 기도와 활동의 양자택일로 대비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알아듣고자 침묵 중에 묵상하는 시간 없이는 그 말씀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가끔 신자들이 와서 “신부님, 다시는 그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을 겁니다. 무조건 명령만 하고, 얼마나 기분 나쁘게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하고 말하며 함께 일한 간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을 때가 있다.
함께 본당활동을 하면서 그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명령만 하는 신심단체 간부들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이 없이 지내는 ‘잘난 사람들’일 때가 많다.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성령의 은총이 스며든다. 성령의 은총은 그 마음을 부서지고 낮춰진 마음이 되게 해주신다. 은총으로 부서지고 낮춰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명령하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데 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그 마음에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세속적으로 스스로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봉사를 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는 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군림하는 자세로 활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정말 필요한 것’을 행하는 용기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몇 주 전 부산에 있는 어느 자매님이 제게 보낸 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계 마귀회의에서 인간을 유혹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되는데 채택된 안이 「시간을 뺏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삶의 하찮은 일에 바쁘게 만들어 하느님과 가정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귀들이 논의한 구체적인 예는 이렇습니다. 돈을 마구 쓰게 하자는 안, 부인들과 남편들을 과도하게 일하도록 유혹하여 삶이 공허해지게 하자는 안, 운전할 때 라디오나 카세트를 틀도록 꾀고, 집에서는 늘 TV와 PC를 틀게 하자는 안, 그리고 각종 잡지와 신문을 통해 하루 24시간 뉴스를 보게 하고, 운전할 때마다 광고판이 눈에 들어오게 하자는 안, 우편함을 시시한 우편물과 카탈로그와 광고물, 각종 뉴스레터와 헛된 꿈을 꿀 우편물로 넘치게 하자는 안, 잡지와 TV에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델들을 등장시켜 아내가 싫증나게 하자는 안, 과도하게 휴가나 오락, 스포츠, 연극과 영화를 즐기게 만들자는 안, 삶을 수많은 좋은 일들로 북적이게 하여 그들이 예수의 능력을 구할 시간을 주지 말자는 안 등등이 논의되고 마귀들은 각자의 임무를 위해 의기양양하게 회의장을 나가고 이러한 악마들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바쁘다(busy)」라는 영어단어를 다음과 같이 풀이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B」-Being:존재하다.
「U」-Under:아래에.
「S」-Satan:사탄.
「Y」-Yoke:지배(멍에).
그러기에 바쁘다고 말하는 분은 사탄의 지배 아래 존재하고 있는 분으로 해석하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의 특징 중 하나가 바쁨입니다. 현대가 바쁜 이유는 풍족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에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 중 「정말로 필요한 것」을 구별할 수 없다면 우리 인생은 헛된 바쁨에 빠져 공허와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모습이 나옵니다. 먼저 마르타 자매의 시중드는 모습. 이는 음식 접대와 같은 봉사를 뜻합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가정주부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일이요, 사회 통념적으로 주어진 여성의 역할일 뿐 아니라 종교적 선행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인간관계라는 면에서 판단한다면 그분의 의도를 헤아리고자 하는 들음이 어쩌면 더 우선적인 일이요, 시중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으로 필요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르타 자매가 의미하는 바는 부차적인 일에 얽매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뜻 할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르타는 나의 자화상입니다. 상식적으로 주어지는 일들, 단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 일들에 얽매여 진정한 삶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 마리아의 모습.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행위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들의 자세입니다. 어느 랍비의 기도에서 자신을 여자로 만들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기 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그녀에게 방종하라고 가르치는 셈이요, 여자에게 율법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그 율법을 불태워 버리는 편이 낫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여성교육을 백안시하던 시대가 예수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리아의 이런 자세는 시대의 관념을 넘어서는 놀라운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모습은 시대의 상식과 관념을 뛰어 넘는 자의 행위요 조롱과 멸시를 각오해야 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 그리고 대인관계의 본질에서 생각한다면 이 같은 행위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우선되는 가치를 가진 본질적인 정말로 필요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발치에 앉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시대의 통념과 상식의 허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정말로 필요한 것」을 위해 시대의 상식과 통념을 뒤로 미룰 수 있는 용기의 행위요, 거기에 따르는 조롱과 멸시를 이겨나가는 의지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모습을 보고 실상 필요한 한 가지가 마리아가 택한 몫이었다고 말씀한다는 것은 신앙의 길이란 쉽지는 않지만 바로 이러한 마리아의 삶을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일들 안에서 삶의 목적에 합당한 「정말로 필요한 것」을 「필요한 것」들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을 위해 부차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뒤로 미룰 수 있는 용기가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임을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복 받는 길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힘들고 외로우며 고달플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동행자가 친절하면 그 가는 길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우리 민족도 길손들에 대해 상당히 친절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백성 자체가 나그네였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잘 보살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 성서에 보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두 가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보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하느님을 영접한 것이 되어 두 가정에 큰 축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 접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최후심판에 대한 말씀(마태25,31~46)에서 그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우선 1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더운 대낮에 문득 낯선 사람 셋을 보고는 자기 집에 정중히 모시는 내용입니다. 그 나그네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자기 집이 아니고는 쉴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모십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길손들에게 송아지까지 잡아 주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막말로 먹다 남은 밥을 줘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자기들도 쉽게 못 먹는 귀한 음식으로 접대를 합니다. 재산상으로도 손해요 시간상으로도 바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친절 때문에 뜻하지 않은 상을 받게 됩니다.
그때 음식 대접을 받는 분들이 그랬습니다. 내년 봄 새싹이 돋을 무렵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집에 아들을 점지해 줍니다. 그런데 사라의 나이는 아흔이 다 된 할머니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망측해서 사라가 웃었지만 그러나 사라는 정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 살 때의 일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고 안 얻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는 결코 아들을 얻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피곤한 나그네에 대한 어떤 연민의 정 때문에 그랬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받을 사람은 꼭 복받을 일을 합니다.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내용입니다. 그들 자매가 살던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길목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음식도 드시고 또 쉬셨던 곳입니다. 주님은 그들 자매를 특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보나 안 보나 굉장히 가난했던 자매였습니다. 라자로가 거지로 비유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루가 16,19~31참조).
그런데, 오늘 두 자매가 주님을 모시는 태도가 아주 대조적입니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고 마리아는 주님이 편하게 쉬실 수 있는 분위기에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피곤하셨지만 그러나 또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선 먹는 것보 다는 마음의 편안함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신이 복잡하면 밥알이 모래일 수 있습니다.
아마 짐작컨대 이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떼지어 주님께로 몰려들었고 그들 중에는 병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파와 그리고 치유 안수에 주님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아주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이때 그 피곤한 말씀을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 해도 그 피로가 풀리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실을 자주 경험합니다.
여자들이 바가지를 자주 긁으면 남자들이 밖에서 돌게 됩니다. 집에 들어가 봤자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말 많은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사 준다 해도 입이 껄끄럽습니다. 그러나 내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사 주면 보리밥이라도 꿀맛이 됩니다. 마음이 편하면 세상이 따뜻하고 음식도 맛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잘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집에서 편히 쉬시고 내 가정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웃 나그네를 그렇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며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따뜻하고 편하게 모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복받는 길이요 또 잘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그네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채워야 할 것
예전에 보았던 신문에 아주 감동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충남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에 불교에서 마련한 ‘정토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말기 암환자들을 마지막으로 돌보는 ‘호스피스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 최근 일주일 사이에 다섯 명의 환자들이 죽어 갔다고 합니다. 이곳 ‘정토마을’ 원장이신 능행스님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잘 준비하지 못하는 가엾은 이들을 위해 이 같은 마을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기자와의 인터뷰 끝에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돈만 보고 인생을 달려왔던 모든 이들, 특히 젊은이들… 돈이면 사랑도 안락도 올 줄 알았는데, 몸부림치며 달려온 세월에 잃어버린 것은 삶과 가족과 사랑과 건강… 징해, 징해, 이 세상이, 사람들이 다 돈에만 미쳐가고 있어요. 그 돈이 결국 우리를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세월의 빠른 속도만큼이나 우리네 인생들 역시 무엇이 그토록 바쁜지 정신없이 살고들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바빠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분명 기계의 발달과 문명 이기들의 발전으로 세상은 훨씬 편리하고 간편하며, 이동의 속도라든지 일처리의 신속함이 빨라졌음에도 시간은 남아야 할 텐데 날이 갈수록 모두가 바쁘게만 삽니다.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와 봉사가 점점 야박하거나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확연히 들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봉사할 일꾼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기도 역시 시간이 없어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르타의 활동 영성이든, 마리아의 관상 영성이든 꼭 있어야 할 두 영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같은 세상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야하는지 진정 깊이 있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브라질의 인권운동가이신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 시대에는 ‘마르타의 손’과 ‘마리아의 마음’이 모두 요청되는 시대이기에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마르타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 사이에서 고민하여 왔습니다. 어느 시대에는 마르타의 활동적인 영성에 빠져 있었고, 어느 때에는 마리아의 고요한 관상 영성에만 힘을 쏟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1~42)
좋은 몫
이탈리아의 ‘마르티니’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도 마리아와 같은 것을 구하고는 있으나, 그것을 분주한 접대를 함으로써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종종 위험이 따릅니다. 그것과 달리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서 필요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기울인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로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투신해야 할 일은 정말 한 가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좋은 몫을 선택하였을 때는 다른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콜로 1, 24~25)
소화 데레사(1873-1897) 성녀께서도 당신의 삶을 오롯이 예수님께만 드리는 좋은 몫으로 세상을 마칩니다. 때문에 짧은 생을 마치며 이 같은 글을 씁니다.
“그래요. 생명은 하나의 보화예요…. 각 순간은 하나의 ‘영원’이고 천국을 위한 기쁨의 영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하나가 되는 영원!…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뿐이고 다른 모든 것은 없는 것이예요. 이 세상 생명은 짧고 영원은 끝이 없어요. 밤 동안에, 한 번밖에 오지 않을 유일한 생명의 밤 동안에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추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과 주님뿐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한동안 저는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마르타인 것처럼, 예수님이 왜 마르타의 입장을 배려해 주시지 않는지 섭섭했습니다. 마르타는 집에 오신 귀한 손님 시중을 드느라 혼자 경황이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눈치껏 나와 도와주면 좋으련만 얌체같이 꼼짝도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마르타가 예수께 도움을 청하는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편을 드시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누구는 공주처럼 가만히 앉아 예수님 말씀 듣고 싶지 않은가?’ 일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마르타의 항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의 역할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을 텐데 복음사가가 일부러 이 일화를 넣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곧 이 일화를 통해 우리 삶에서 주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요? 내 인생의 시작과 마감이 내 의지와 무관하고 또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주도권을 그분께 넘겨야 합니다. 마르타와 예수님의 관계에서 마르타는 자신이 예수님을 접대하는 주인으로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반면 마리아와 예수님을 보면 주도권이 예수께 있고 마리아는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다는 듯 발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수동적이지요.
‘자녀는 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선사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가 성장하여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무능하여 모든 것을 부모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게리 베커의 말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효용 수준은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아닌,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이 얼마나 행복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곧 자녀와 부모의 관계입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편 131,2ㄷ)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의 상황이라 생각되지 않는지요? 성녀 소화 데레사는 바로 이것을 터득했습니다. 하느님께 작은 자가 될수록 더 충만히 누리는 사랑! 그렇게 볼 때 마르타는 자신의 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도록 해드리는 것, 그로 인해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예수께서는 달래듯, 설득하듯 두 번씩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10,41)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1-33) 하느님 앞에 무능한 자가 된다 함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음이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께 귀를 기울일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고, 그 뜻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일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일이 됩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일이 다 이루어지는, 노자가 말한 ‘무위의 도’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바쁜 정도가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운전하면서 빵을 먹고, 휴대전화를 받으면서 일합니다. 잠시라도 옆을 보면 그만큼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기에 옆을 볼 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질주하다가 숨 좀 돌리게 되면 그만 쓰러져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많이 필요해서 갯벌과 농경지를 없애는지, 무엇을 더 배워야 하기에 학생들은 집에서 잠만 자고 학교와 학원으로 내달리는지? 왜 빨리빨리 일하는 만큼, 정보가 빠른 만큼, 밥을 빠르게 먹는 만큼, 그만큼 여유가 생기지 않는지? 그 모든 것이 실상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면 왜 포기하지 못하는지 예수님의 발치 앞에 앉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남과 똑같이…
-의정부교구 장광민 요셉 신부-
몇 년 전 들은 어떤 강의 중에, 한국인의 심성에 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에서 유별난 것 중 하나는, 바로 유달리 강한 ‘평등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평등의식은 흔히 ‘똑같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유독 우리나라에 아파트 문화가 발달한 이유 중 하나도 ‘남들과 똑같아야 한다’는 평등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똑같이’라는 평등의식이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과 비교하기’와 ‘시기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무척 강하고, 타인을 칭찬하는데 인색하고 남을 깎아내리는 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학원을 7-8개씩 보내는 초등학생 엄마에게 ‘왜 그렇게 아이가 많은 학원을 다니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학부모 대답도 한 가지였습니다.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보내면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해서….’ 따지고 보면 아이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마음 안에는 ‘남들 다하는데’와 ‘불안해서’라는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일들은 흔히 가정 안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옆집 남편은 안 그렇던데…’, ‘친구 아내는 이렇던데…’로 시작해서 특히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엄마친구 아들’과 비교를 당합니까. 타인과 비교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받았던 그 비교의 괴로움을 내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낳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데, 자기 동생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속에서 부아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리아더러 자신을 좀 도와주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르타를 타이르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내가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너도 마리아처럼 여기 와서 내 얘기를 들으라’고 하지 않으셨고, 마리아에게 ‘네 언니가 지금 바쁘니 네가 가서 도와주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각자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오는 것이라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비교하는 마음 속에는 감사함이 자리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남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학대한다면 마음의 평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이 온실 속의 화초를 부러워하지 않듯,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예쁜 꽃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몫
-군종교구 김용한(세례자 요한) 신부-
2002년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태극전사들이 월드컵 첫승을 넘어 4강 신화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월드컵 신부’입니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6월 24일 사제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002년 여름. 뜨거운 마음으로 대구, 안동, 왜관 베네딕도회의 27명이 하느님 제단 앞에 엎드려 제단의 봉사자로서 자신을 봉헌하여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지금껏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것들을 충실히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년 서품을 받는 각 동기들마다 특색이 있기 마련인데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되어 뜨겁게 타올랐던 때라 그런지 우리 동기들은 동기애가 좋기로 교구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처음 사제서품을 받고 모두 본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본당뿐 아니라 여러 사목 현장에서 사제로서 하느님께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지만, 그리고 만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 다름을 어색해 하기 보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 바라보고 격려해 주면서 말썽(?) 없이 그렇게 아주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동기들이 각자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총임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 두 자매 역시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두 자매가 함께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자매가 가지고 있던 차이점은 바로 마르타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시중드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두 자매의 이런 차이점은 ‘어느 것이 맞다, 어느 것이 틀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은총의 모습은 우리 각자에게 맞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 자신도 분명히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에 대해 부러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를 인정해 주십니다. 마르타가 자기의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부분도 인정해 주시고 또한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인정해 주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맞게 주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받은 은총은 무엇입니까? 우리들도 분명히 모두 각기 다른 자신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것, 너의 것 할 것 없이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것이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총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께서 주신 좋은 몫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가길 바라십니다. 그 좋은 몫들을 통해 우리가 구원의 길을 더욱 힘차게 걸어갈 수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좋은 몫을 받았습니다. 아멘.
좋은 몫을 선택 하는 것...
-원주교구 성 현 신부 -
사람은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평생을 후회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행하였을 것이고 또한 자신이 그 결정에 대하여 어떠한 평가를 내리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학생들이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푸념을 자주 접한다.
작년에 조금만 더 공부할 걸? 조금만 더 친구들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할 걸? 조금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할 걸? 조금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걸? 등등 많은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을 한다.
물론 이러한 고민과 후회는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와 있듯이 마리아와 마르타는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하였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점은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몫을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몫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삶 안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더욱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산다는 것은 선택의 것이며 이 선택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어떠한 선택을 하던지 무어라 말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섭리는 자유의 섭리이다. 하느님은 그저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삶이다. 그래서 세부적인 선택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자유의 하느님이시다.
자유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삶의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가치를 살고 나의 삶의 기초를 위대한 계명에 두며, 내가 예수님의 성령에 인도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최상의 창조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의 기준은 율법, 권위, 점도 아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내려주신 위대한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라는 계명이 바로 전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침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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