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07. 7. 24. 02:56

   2007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데에 가족들이 찾아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방문을 언짢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연을 하느님 안의 만남으로 보셨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만나면 모든 이가 형제요 자매라는 점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

 

 인연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애정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사랑하고 있는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의 앞날을 위하여 종교를 바꿔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인의 마음을 잡으려고 범죄에 뛰어드는 것도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더 많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눈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방법대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찰이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분의 뜻 안에 있어야 인생의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벗어나면 맹목적인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스러운 자식이 고통의 원인으로 바뀌고, 남편과 아내가 인생의 멍에가 된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단란했으나 살아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인은 단순합니다. 서로가 자기 방법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공통분모인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부모다울 때 힘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역시 조화를 이룰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제대로 지키는 것도 덕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신부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신부가 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게 되는데, 그때의 사유 대부분이 바로 ‘판단력 부족’입니다. 제가 얼마 전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판단력이 부족한 신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신학생이 그 교수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래요.

“신부님, 제가 이번에 재시험 통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 기간 동안 **단체에서 봉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따라서 재시험을 미리 좀 보면 안 될까요?”

신부님께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봉사는 땀 흘리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청년들의 모임 연수의 도우미 정도의 역할로 굳이 신학생이 봉사할 필요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신학교의 성적은 자신의 성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도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없어도 될 봉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그럼 너 신학교 그만두고 평생 그 봉사나 해.”

사실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많은 판단의 기로에 서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말씀드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그렇게 야박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즉, 세속적인 인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보다 세상의 법칙에 선택의 기준을 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 내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금 반성해 보세요. 판단력 부족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실행합시다

 빠다킹신부

 

 

   아버지의 뜻     

-남상근 신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과 가족이 된다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상관없다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뜻이 모든 것에
우선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하늘 아버지의 뜻은 이렇듯 모든 것에 앞서는 절대적인 목적이고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도한다면서도 우기곤 합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도 이것을 원하시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강요합니다. 너무 자주 하느님이 내게
종속된 분이시듯 그렇게 기도합니다.
포콜라레의 금언은 나의 기도가 온전해지려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까? 저도 그것을 원해요.’
내가 하느님께 순명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여 분별없는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은혜로운 당신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미사, 아름다운 기도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저는 세례를 받을 무렵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근무를 하고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도서관을 그만두고 가장 기뻤던 일은 주일마다 가족과 함께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저에게 소중하게 다가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신부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라며 응답할 때는 친구처럼 다정한 신부님을 매일매일 뵐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요! 칠레는 신자 칠만 명당 신부님이 한 분이어서 신부님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평화를 빕니다, 사랑합니다.’라며 서로 얼싸안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 어떤 어려움도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입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이 생깁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영성체를 하기 전, 매번 이 기도를 저는 생생한 느낌으로 바칩니다. 제가 성화의 길로 부름 받았음을 느끼는 동시에 함께 있는 모든 교우들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져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이렇듯 미사를 드리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모든 말씀이 기도이며, 기도 안에서 우리도 함께 거룩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절두산에서 많은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바치며 지키려 했던 정신과 긴 세월 동안 교우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온 사랑의 정신이 이 미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든 교우들이 저의 형제이고 어머니입니다. 때론 서로 힘들 때도 있고 분란이 생길 때도 있지만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운 교우이니까요.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샛별을 두려워 말고/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는 정호승님의 시처럼 함께 희망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서랍을 활짝 열고
-
양승국 신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복음이어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오늘 복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기껏 걱정 되서 찾아온 어머님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성모님을 비롯한 예수님의 친척들,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처음에는 이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해 한동안 난감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한’ 예수님 말씀의 이면에는 작은 시냇가에서의 평화로움을 떨치고 거센 파도가 요동치는 넓은 바다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비장함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한 곳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 나자렛은 너무나 좁은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양에 차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분은 만왕의 왕, 온 세상의 주인,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이시셨기에 언젠가 한번 세속적 인연의 끈을 끊는 아픔이 필요했습니다. 탈바꿈이 필요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때문에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아쉽고, 정말 송구스럽고, 정말 안타깝지만,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을 뛰어넘으실 때가 온 것입니다. 세상만물, 인류 전체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서서히 혈육의 정을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배경의 표현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인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습, 둘 다 ‘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꽤 슬픈 복음을 묵상하면서, 혈육의 정을 단호히 끊고 먼 길 떠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인생도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의 인생길, 신앙생활, 어찌 보면 나그네길입니다. 늘 떠나야 합니다. 보다 향상된 삶을 향해, 보다 본질적인 삶을 향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해 부단히 떠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물이 한 곳에 오래도록 머물러있으면 썩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한번 실천하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보다 자주 떠나는 것입니다.

나를 묶어놓는 악습, 과거의 틀,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거듭 성찰해봐야 할 것이며, 거듭 새롭게 시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 죽음보다 싫은 것이 떠남이겠지만, 한번 마음 크게 먹고 떠나보십시오. 기적 같은 일이 거기서 생깁니다.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시야 앞에 활짝 열립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혜안이 열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하느님을 만나 뵙기도 합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새롭게 영적 여행을 떠나보시기를 권고합니다. 떠나기에 앞서 약간의 노력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서랍을 활짝 열고 깔끔하게 한번 청소도 하십시오. 천국을 위한 여행 가방에 들어가지 못할 짐들은 과감하게 정리도 해보십시오. 무절제, 과도한 욕심, 지나친 자만심, 끝도 없는 자기중심주의...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근원은 소유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번뇌의 출발점입니다. 인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슬픔의 근원입니다.

철저하게도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 그토록 정겨웠던 인연마저도 훌훌 털어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묶인 대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하느님입니다. 비록 모순투성이고, 갖은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은 높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는 비결의 첫 단계는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모든 것이 OK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리도 놓기 힘들었던 명예나 직책, 재산이나 학벌도 그저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 되고 맙니다. 그토록 놓기 힘들었던 인연도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되고 맙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느님 그분뿐입니다..........◆

 

 

 <독서> :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
경규봉 신부-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지팡이를 들고 팔을 바다로 뻗치자 하느님께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바다로 들어서자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거 바퀴들을 얽어 놓아 꼼짝도 못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뻗자 물이 도로 덮여 이집트인들을 삼켜버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당신 팔을 펴시어 이집트인들을 치시는 것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과 모세를 믿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약속과 명령에 따르는 믿음으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집트 생활이 그리워서 제자리에 멈춰 서있기도 했을 것이고, 믿음 약한 이들은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들어났지만 넘실거리는 파도가 무서워서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바다를 건너가다가 주저앉거나 뒤로 도망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은 믿음으로 바다 속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 역시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갈라진 바다에서 넘실거리는 파도가 언제 덮쳐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냈던 것이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인간적인 걱정을 떨쳐낼 수 있는 신앙인만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마태 10,29-31)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모든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낸다. 뿐만 아니라 믿음 없이 행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잘 볼 수 있다.

이집트인들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바다를 건너려고 했지만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히브 11,29).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이나 믿음 없이 무모하게 바다 속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믿음의 백성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따라서 행했을 따름이다. 이런 무모한 행동은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며, 그 결과 그들에게는 죽음이 따랐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바다를 건넌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느님의 위대한 힘을 깊이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게 되었다. 기적은 단순히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기적은 일종의 표징으로서 믿는 이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전하는 이들의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들을 뒤쫓아 온 이집트 군대를 보고 겁에 질려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홍해 사건을 체험한 후 모세를 하느님의 종으로 굳게 믿게 된다. 홍해의 기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은 한 차원 더 성숙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를 부른다.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 어찌할 수 없는 위험,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좌절하고 절망하기 쉽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은 오직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이 없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머리카락 하나도 손댈 수 없음을 믿고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삶도 죽음도 하느님의 몫임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 그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심을 체험하며, 그 체험을 통해 더 깊은 신앙의 길을 걷는다. 오늘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자...........◆


  

 우리 속담에 피를 나눈 형제라도 멀리 살면

-남을우(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우리 속담에 피를 나눈 형제라도 멀리 살면 이웃 사촌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의 의미를 젊은 시절에는 이해하지도, 그 의미를 헤아려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부모, 내 형제만이 최고고 영원히 함께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은 그냥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나오는 구절이 절로 생각나는 세상에 요즈음 살고 있습니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정이 듬뿍 담긴 시이지요.

같은 성당에 다니는 반모임의 교우들은 친형제처럼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삶의 방향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텃밭에 심은 고추·상추·쑥갓 등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 호미로 길게 자란 잡풀을 뽑을 때 행복감에 충만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주님께서 웃으시는 것 같습니다. 참 대견하구나 하시면서….

자신의 잘못과 아픔을 서로 나누며 참회와 격려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이웃, 이들이 나의 친형제 친자매임을 느낍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행복감에 취해봅니다.

  

 하늘나라 시민

-장동현 신부 -


수도사제로 살아가는 저는 부모님께 큰 자랑거리입니다.
아들 가운데 하나가 사제인 것을 하느님께 늘 고마워하십니다.
누가 저에 대해 말하면 참 기뻐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다며
묻지 않은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부모님은 삶의 매순간에 특별한 연결고리로
저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뵙기도 어렵고
손자도 안겨드리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가장 가까운 아들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자랑스러워하는 까닭이 제가 잘나고 똑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을 하고 있어서, 교회의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온 인류가 한가족이 되는 꿈이 실현됩니다.
모두가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특별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주님을 찬양하는 나라,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 [부산교구 당감성당 김창대 엠마누엘 신부] ◆ -

 

 마르코 복음의 순서에 따르면, 예수 님은 3장 1절에 기파르나움 회당에서 오그라든 손을 펴주십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할 기회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3장 6절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직내 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투메와 오르단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라면 식사도 잠도 거를 만큼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를 질시하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자라고 군중들에게 매도했습니다.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있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의 건강도 염려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밥이 나오나, 돈이 생기나, 그보다도 그들이 마음 쓴 것은 가문의 명예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와 그리스는 물론 팔레스티나에서는 가문의 명예를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가문에서 사회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으러 온 친척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었고, 그 밖에 가문을 이루는 친척들 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여기 낀 것은 아들 예수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고,
아버지 요셉이 빠진 것은 요셉이 이미 작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찌기 혼자된 성모 마리아는 친척집에 몸을 의지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홀어머니를 혼자 버려두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랑 전도를 하던
예수님의 마음도 아팠을 것입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친척들은 늦게 도착하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 틈을 헤집고 한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어머님과 형제들이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라는 전갈이 들어갔습니 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 그러고는 제자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십니다.
그때나 지금 이나 일생을 가족에서 시작하고 가족 안에서 가족을 위해 사는 세속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민족 전체를 한 가족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범죄에 해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혈육 관계'를 무시하셨습니까 ?
아닙니다. 아주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르게 보셨습니 다.
누가 진정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들입니까 ?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 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내 자매라 했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하나의 신념이지 믿음이 될 수 없고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신념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어떤 일이나 사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무너지고 또 그대로 뵌다는 보장이나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천지가 변해도 변함이 없는 약속과 보장이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이고 예수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머니를 모시듯이 사랑하며 형제, 자매처럼 대하십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몸으로 복음을 사는 사람입니다.
입술로는 섬기면서 몸으로는 거역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몸으로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이들
이 주님의 가족입니 다.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들 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좋은 강론을 들으려 주일마다 성당을 배회하는 이들이 아니라 들은 강론대로 살려고
몸부림하는 이들
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말씀이 좋다'고 몰려드는 이들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 입니다.

모두 주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모친이요, 주님 의 형제요, 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남처럼 사는 이들이 아니라 가족처럼 사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다 주님의 가족이 됩니다.


 

 †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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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 가정에 속하게 된다.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터전이며, 가정 없이는 국가도 인류도 없다. 가정이 중요하고 소중한 이유는 그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즉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소중하면 너도 소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나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가정도 소중한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이 오늘날 소홀히 여겨지고, 사소한 이유로 쪼개지며, 서로 반목하고 불목하며, 경제적 파탄이나 병고나 사고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모든 가정이 오직 나의 가정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하고 있으며, 거치적거리고 빤하다거나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가정 만들기”를 기피하는 개인주의나 독신주의가 증가일로에 있다는 현실 또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가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성가정이 더욱 그리워지는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가정에 소속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일찍 부모를 잃거나 피를 나눈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고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위에 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그 속에서 노인이 되어 간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인 가족에게도 그럴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사람의 기원을 따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한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지구가족공동체’, 또는 ‘글로벌가족공동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건전한 재벌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뜻있는 곳에 기부금을 내며, 재력이 없는 사람은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이루는 가정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가족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기를 키워준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 것은 아니다.

그분은 더 큰 인류가족공동체를 원하셨으며,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가족공동체를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위에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사방에 전하면서 그 나라의 가족이 될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분은 특히 가난하고 아파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셨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문 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와 보자고 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즉 공관복음 모두가 미소한 차이로 보도하고 있는 대목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루가 8,19-21) 마르코는 예수가 악령에 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예수를 붙잡기 위해서 왔다(마르 3,20-30)고 이유를 대고 있지만, 마태오와 루가는 그 이유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찾아온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태오와 루가는 이 대목을 두고 다른 목적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둘러 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본의(本意)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도 하느님을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뜻을 좇아 행하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허물어버리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하셨다. 그 소속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입니다......◆


 

-부산교구 구경국 신부-

 

 꽤나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제가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유학을 할 당시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터 케른이라는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매우 온화한 인품을 지니고 계셨을 뿐 아니라, 박사 학위를 두 개나 소지하신 재원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청소를 자진해서 담당할 정도로 겸손하셨던 분으로, 한국 신부, 신학생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보여주셨던 분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신부님의 인품에 호감을 가졌던 탓인지, 아니면 기초신학의 중요성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온 십 삼사 명 정도의 신부 신학생들 중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의 수가 동시에 무려 여섯 명이나 될 때가 있었습니다.

기초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케른 신부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을 '케른 학파'라고 불렀고,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약간의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런데 기초신학이 아닌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어떤 신학생이 하루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그 말을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학파라는 것은 지향하는 것과 방법이 같아야 하는 것이지, 단지 한 교수님 밑에서 같은 시기에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속담을 굳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처해진 외적 상황이 비슷하다는 사실 하나에 의존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변한다거나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킬 경우 그 공동체는 해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단지 외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이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이익공동체'일 따름이지 결코 '운명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날 심통을 부렸던 그 신학생은 이러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적인 일치감에 의한 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운명공동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를 궁극적으로 일치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지향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상황에 달려있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공동체는 우리가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그것에 따른 우리들 삶의 형태가 닮을 경우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다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야 하는 운명공동체에 속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 하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은 결코 예수께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마리아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도 우리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헌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어쩌다 한번쯤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의 생애를 걸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