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26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07. 7. 26. 03:00

 2007년 7월 26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전승에 따르면, 요아킴과 안나 부부는 늦도록 아이가 없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안나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이를 갖게 되리라고 예언한다. 안나는 그 아이를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 아이가 훗날의 성모 마리아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이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마태오 13,15)


Gross is the heart of this people,
they will hardly hear with their ears,
they have closed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be converted
and I heal them.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무엇을 보고 듣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이다. 지금도 우리는 그분의 행적을 직접 듣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비유가 필요 없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열망하다 죽었다

 

☆☆☆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백성은 끈질긴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식민 생활을 하였지만 결국은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을 지배하고 괴롭히던 민족은 사라져도 이스라엘은 굳건히 남아 있습니다.
그 속에는 기다림이라는 힘이 있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민족이 그들이었습니다. 예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메시아가 오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상은 새롭게 엮이고, 이스라엘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로마의 지배가 극성을 부릴수록 이러한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러한 시점에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민중은 그분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보고 환호하지만, 지도자들은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무명의 시골 출신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보기엔 어이없는 발상이지만 당시에는 이해되는 판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지 나자렛은 예언서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은 성모님의 고향, 곧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고향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분을 선택하실 때 이미 예수님의 탄생을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기다림도 합당한 대상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엉뚱한 목적일 때에는 오히려 추한 것이 되어 외골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군대에 갔다가 휴가 나온 신학생이 귀대를 한다고 제게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저는 차비라도 주겠다면서 지갑을 꺼냈지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글쎄 지갑 안에는 천 원짜리 한 장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사무장님도 출근을 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누구에게도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신학생에게 성당 앞 은행의 현금 인출기에서 뽑아서 주겠다면서 함께 그곳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현금 인출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침 8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만 인출이 된답니다. 따라서 그때 시간이 8시쯤 되었으니, 현금을 인출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까를 생각했습니다.

‘현금 인출할 수 있는 8시 30분까지 여기에 함께 앉아서 기다릴까?’

그러나 이 방법도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금 궁상맞아 보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신학생에게 다른 은행에 가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10분쯤 걸어서 다른 은행에 도착했을 때, 저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아침 8시부터 현금인출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고 이 은행에 감사했습니다. 사실 감사할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제가 저금한 돈을 찾는 것뿐이니까요. 그러나 이 절박한 순간에 그리고 망신당할 순간에 구해 준 이 은행이 어떻게 안 고맙겠습니까?

문득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내가 저축한 돈을 찾아가는 데에도 이렇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데,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함의 표시를 하고 있었을까요? 감사함보다는 오히려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던 적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편에 서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조금 더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감사의 인사보다는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으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각자를 특별하게 사랑하시기에 비유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쉽게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오늘은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면 어떨까요? 그때 우리들 역시 하늘나라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빠다킹신부

 

 

 

   듣는다는 것     

-남상근 신부-


 이해하기 쉬우라고 비유를 쓰는 줄 알았더니만 알아듣지 못하라고 비유하신
거랍니다. 짖궂은 예수님이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거듭 말씀하시건만 못 알아듣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귀가 없는 것이지요.
아니, 귀는 있으나 죄다 난청인 까닭이지요. ‘듣는다’함은 단지 음파가�
감청 기관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승복하겠다는 것, 준수하겠다는 것,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 듣겠습니다’라는 우리말은
물리적인 소리를 감지하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단지 ‘청취’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복음에 나의 사고와 행동을 내놓겠노라는 다짐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징벌은 그저 가만히 두는 것이랍니다.
혼자 있는 것, 침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상 온갖 소리에
길들여져 있기에, 세상이 주는 달콤한 소리로 가득차 있는 나머지
고요함을 상실해버린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듣기 위해서
너무 많은 소리를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묻히지 않고
내게 잘 들리려면 가만히 있는 것이 무엇보다 상책입니다.

 

 

 여성과 남성, 하나의 길을 위하여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태초에 하느님이 하와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비뼈를 빼어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여성과 남성으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남성들 중에는 여성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며, 이것이 처음부터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이유라며 열변을 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하와를 아담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갈비뼈로 만든 이유는 그만큼 아담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서로 뗄 수 없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어떤 것이 소중하고 어떤 것이 버려야 할 악습인지 모른다면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세기에는 여성적 감성인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살아남는 때입니다. 직장에서도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평등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인간관계도 잘 맺고 창의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전처럼 남녀차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는 때가 된 것입니다. 한쪽이 불행한데 한쪽이 행복할 순 없습니다.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 3,13 참조)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중에서)라고 노래한 정희성님 시처럼 우리는 끝없이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성과 남성, 이제 서로 바라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동지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
이영창 신부-


저는 성서를 보면서 가끔씩 궁금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마이크도 없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성서에 사람들이 모이면 수많은 군중, 혹은 5천명 이상이 모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많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다고 해도 5천명이 다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은 중간 중간 사람들의 입을 빌려서 뒷사람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금방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쉬운 토막말이나 그 당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비유란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소재를 통하여 어떤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를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며, 말하는 이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익혀 들어왔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홀히 지나칠 수 있고, 짤막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딴전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말마디에 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들려주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깊은 의미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단지 짤막한 이야기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말입니다. 왜 그들은 보고 듣고 체험했으면서도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기쁜 소식을 전해도 그들의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기에 그 참뜻을 알 수가 없었지요.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보고 듣고 체험하지 않았기에 그 깊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았느냐 닫지 않았느냐, 서로 간에 깊이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진정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야만, 어려운 나의 모습, 부끄러운 나의 모습, 심지어 나무라는 말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는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가지 않고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믿어주느냐 믿어주는 않는냐의 차이는 큰 결과를 낳습니다.

사실 처음 제가 시장 사목에 발령받고 왔을 때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시장 상인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욕만 앞섰다고 해야 할까요?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시장 상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집 한 집 상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아는 신자분도 있었고, 새로운 신자분도 있었고, 냉담하시는 신자분도 많았습니다. 반겨주는 신자분도 있었고, 냉냉한 신자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불신의 눈으로, 무엇인가 요구하러 온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전박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답답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얼굴을 익히고 신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1번,2번,3번,4번,5번... 10번,20번30번 40번,50번... 그 분들을 계속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문전박대 하던 상인들이 차츰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찾아오는 사제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불신은 볼 것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을 것도 듣지 못하게 막습니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는 숨어 있는 것도 그대로 보게 하고, 어려운 내용도 들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신뢰와 믿음을 먼저 선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서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안 들리던 것들도 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독서> : 당신 백성이 되도록 이끄시고 준비시키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날에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는 시나이 산(해발 2291m) 앞에 진을 쳤다. 하느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서 나타나시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직접 보고 들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을 확실히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을 맞을 준비를 위하여 정결례를 지키도록 명하신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를 위하여 옷을 빨고 주님을 맞이하도록 준비시키신다.

셋째 날 아침,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시나이 산에 짙은 구름이 덮이는데, 이는 하느님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다(시편 77,18; 104,7; 마태 4,16; 1디모 6,16). 이러한 하느님의 영광과 위엄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비로소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 신정 국가의 초석이 되는 율법을 수여받는다(5-8절; 22장 이하).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계약을 맺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되어 당신을 믿고 따르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비록 짙은 구름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고 나타나시지만, 천둥소리와 번개를 통하여, 천사의 나팔 소리를 통하여 불과 연기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께서 짙은 구름 속에서 나타나시는 까닭은 인간이 상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다.”(1디모 6,16; 시편 104,2) 그 빛은 너무 강렬한 빛이기에 만약 사람이 그 빛에 가까이 가면 그 빛을 견디지 못하고 상할 수밖에 없다(사도 9,3-9).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상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짙은 구름 속에서 나타나신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티 없이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에 물든 인간은 죄를 벗기 전에 하느님께 갈 수 없다. 죄로 물든 인간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온전히 정결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틀 동안이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적 정결의 상징으로 옷을 빨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구약시대에 행한 이러한 외적 정결례(레위 11,25; 15,5)는 내적 정결을 의미하는 의식적인 행위로서, 장차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마음의 옷을 빨아야만(묵시 7,14) 하느님과 친교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행위였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이틀 동안 준비하게 하신 것은 그들과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으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정결례가 갖는 의미와 중대성을 깨우치고, 그들 스스로가 준비할 시간을 갖도록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당신 백성을 준비시키신 후에 짙은 구름 속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염려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허물과 죄가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뽑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죄와 종살이의 땅에서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들이 갈증과 배고픔으로 불평과 원망을 서슴지 않을 때,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보시기보다 그들의 갈증과 배고픔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당신의 영광과 위엄으로 인하여 그들이 혹시라도 상할까를 염려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그처럼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안배하신 후에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 백성의 옳은 길을 걷도록 하시는 그러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이끄시어 약속하신 땅, 하느님 나라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으면서 살아간다.

-춘천교구 하화식 신부-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으면서 살아간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에 밀려 언제 어디서나 보고 들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풀 한 포기도 언젠가는 새롭게 보게 되고, 자연의 숨소리도 새롭게 듣게 되면 그런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살았던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되는데, 그게 바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 시대 사람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크게 다가온다. 잠시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무슨 일이 나는 듯 마음의 동요를 느껴 성당에서 기도할 때도, 식사를 할 때도 놓지를 못한다. 편리함이라는 족쇄를 차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오늘 말씀의 복사판이 아닐까?

오늘도 이런 현대 과학의 이기 속에서만 머물지 말고 생명의 말씀을 거듭 새롭게 보고 하느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성령께 간구하자.

  

 -부산교구 한 건 도미니코 신부-


어제 복음의 묵상에서 여러분에게 뿌려진 고귀한 복음의 씨앗에 대해 자신의 생활과 연관시켜 묵상을 하셨는지요? 오늘 복음은 어제와 연결되는데, 우리 자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하는 그 장면에 함께 있다는 생각을 가져 봅시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박학한 학자들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둘러 앉아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당신의 말씀을 털어놓으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는 당신의 속 마음을 털어 놓으시면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유란 말은 ‘병립하다’ ‘비교하다’라는 희랍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항상 두 가지가 비교되어 나옵니다. 즉 일상생활이나 자연 안에 있는 어떤 사실이 신비나 종교적인 가르침과 비교되어 나옵니다. 이런 비교되어 나오는 말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알아듣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이 종교적인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자세가 없으면, 그에게는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많이 들려주더라도 그에게는 종교적인 가르침에 대한 깨우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던지는 조그만 지식밖에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지, 어떤 배움이든지, 스스로 하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당신의 복음 선포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최고의 학자라고 자처했던 율법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 또는 유대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한탄 시골 목수의 아들로 취급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거나,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회 혼란자로 규정했기에 예수님의 어떤 좋은 가르침도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실제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알아듣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그 가르침이 자신들에게 무례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때까지 자신들이 하느님 때문에 누리고 있던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권력을 부인하는 예수님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다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득권을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하느님의 상을 바탕으로 불의한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를 이용하여 이익을 챙겨왔는데, 그것을 근본부터 바꾸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도 못 들은 척, 예수님의 기적 사실을 보고도 못 본 척 하였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아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는 십자가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들과 달리 유식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그 가르침이 자신들이 생활했던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그들에게는 참 진리였기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행복합니까? 행복이란 말을 생각하니 석 달여 전에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이 떠오릅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임종을 지켜주던 주위 분들에게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일생을 오로지 주님의 복음 선포를 온 세상에 전해주려고 노력하면서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에 하신 행복하다라는 그 한 마디는 바로 우리들이 가는 길이 올바르다는 현대의 표징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몫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되어 좋은 눈과 귀를 가진 우리들은 눈과 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가진 것만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들은 예수님의 참 진리를 자신의 마음 안에 담고 깨우칠려고 노력할 때, 그에게 마침내 깨우침이 일어나고 교황님처럼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입에서 흘러나온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좋은 세상일까 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양승국신부-

 

<우연히 발견한 성서구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추종함으로 인해서 얻게 된 특권은 두둑한 월급이나 상여금, 물 좋은 자리나 안정된 기반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얻게 된 가장 큰 특권은 지복직관(至福直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지니게 된 특권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침식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한 사건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그 크신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일, 구세주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일, 참으로 놀랍고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은 존재 그 자체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진정 꿈결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었기에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을 뵙는 일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도시대도 아니고, 여간해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거나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매일의 살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찾는 일입니다. 특히 함께 이 세상을 동행하는 이웃들 안에 천(千)개의 얼굴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일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적들이 성서란 보물상자 안에 고스란히 잘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성서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얼굴을 명료하게 찾아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교과서입니다. 성서야말로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매일 어찌 그리도 성서말씀은 달고도 단지요. 매번 어찌 그리도 성서말씀은 새롭고도 새로운지요.

 

성서를 펼 때마다 모든 페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힘을 내고 새 출발하라고 성서의 모든 페이지는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연히 발견한 성서 구절은 제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펼치는 성서 구절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를 위한 선물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고린토 전서 6장 19-20절-


 

-장동현 신부-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 오랫동안 깁스를 했다가 끌러보면 바짝 야위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휠체어를 타는 분들을 보면 어깨가 떡 벌어져 있습니다. 팔과 어깨를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여 근육이 발달한 까닭입니다.
활용하면 더 발달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쇠퇴하는 것이 근육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경제 정의를 이야기할 때는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선택하라 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정해야 합니다.
받아들이기가 당장은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더 많은 기회와 은총을 보장받습니다.
성장할 수 있습니다. 거부하는 이는 조금 가진 그 기회마저 잃게 됩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이에게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줄 수 없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에 초대된 우리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예레 2,1-3.7-8.12-13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복 음 : 마태 13,10-17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행색이 수수한 어느 노부부가 미국의 하버드 대학 총장 찰스 엘리엇을 찾아갔습니다.

?’전장에서 죽은 아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 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싶습니다.?“

노부부는 이렇게 찾아온 뜻을 전했지요. 그런데 부유함이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노부부의 수수한 행색을 본 총장은 ??내봐야 얼마나 내겠는가?‘생각하고 일부러 바쁜 척을 하는가 하면 빨리 갔으면 하는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총장의 무례함을 본 이 노부부는 이런 대학에는 재산을 기부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노부부는 철도사업으로 아주 큰돈을 번 부자로 남편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릴랜드 스탠포드였습니다. 이들은 아들에 대한 추억을 가슴에 품고 캘리포니아 남부로 가서 그곳에 전 재산을 투자해서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바로 서부의 하버드로 널리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볼 줄 아는 눈이 중요하지요. 볼 줄 아는 눈이 없으면 말 그대로 굴러 들어오는 복도 걷어차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13,13)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고 말씀하십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원인을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라고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13,14-15)

사람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잘 보고 더 잘 듣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길을 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내가 만나기로 한 그 한 사람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하느님께 관심이 있으면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요. 그러나 세상과 재물이나 건강에만 관심이 있으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고 있는데도 왜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신자들이 있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관심이 하느님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점점 하느님께 나아가지요. 그러나 세상에 관심이 있고 나의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참으로 맞는 말씀이지요.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13,12)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들의 관심이 결코 행복을 줄 수 없는 것들에 쏠려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돈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지요. 부모 자녀 간에도 사랑과 효보다는 돈이 우선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면 그 관계는 반드시 의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지간이나 부부 간에도 우애나 사랑보다 돈이 중심이 되면 그 관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쫓지요. 그런데 그렇게 돈을 추구해서 행복해졌는가 하면 답은 부정적입니다. 우리의 삶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불행해지기만 하였고 일상의 조그마한 행복마저도 빼앗기게 되었지요. 부모 자녀 간에 사랑과 효가 있고 형제지간에 우애가 있는 행복한 가정은 근본적으로 돈보다도 가족 간의 사랑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얼마든지 서로 편하게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이 다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사람들이 외롭고 힘들게 사는 이유는 정작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데 있어서 그렇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 현대인들은 풍요 속의 빈곤, 또 대중 속의 고독한 삶을 더욱 더 깊게 체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야 모든 것이 다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은 더 갖게 되어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의 어려움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볼 줄 알아야 하고 또 볼 줄 알면 실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답답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보여주려고 애쓰셨지만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놀라운 체험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상에서 외면당한 사람들, 과부, 고아, 병자들은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하여 많은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신앙 생활을 하는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다른데 중심을 두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 선택은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13,11-12)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 그런데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 열매를 맺었다.  왜 그럴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와 열매를 맺는 씨의 차이는 무엇일까?

 

씨는 같은 씨이다. 즉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다 같은 씨이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고 못 맺고 하는 것은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떨어진 장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아무리 좋은 씨이라도 즉 열매를 낼 수 있는 씨이라도 그 씨가 뿌려진 장소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이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그 씨란 무엇인가? 그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요 길, 돌밭, 가시덤불 속, 좋은 땅이라고 표현된 장소는 바로 우리 마음 즉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는 이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가 길,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은 자세로 들었기 때문이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사람은 좋은 땅처럼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을 때에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영적으로 성숙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지성, 활동이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늘 나라에 고나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뿌리가 없으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면 결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직 좋은 땅 즉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지름길이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결코 활동에, 아니면 막연한 신심에. 미사 참례나 겨우 왔다 갔다는 하는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에 대해 눈이 뜨인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의 소리가 들린다. 깨달아야 죽었던 내 영혼이 다시 부활한다. 깨달아야 병들었던 내 영혼이 치유 된다. 깨달음이 있어야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깨달아야 영적인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깨어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우리가 매일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고 웃으면서 봉사할 수 있다.

 

깨달아야 이 세상의 것에 얽메이지 않고 어떤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 초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초연할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고 가슴 벅찬 충만함이 밖으로 베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르게 도와 줄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입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나오고 하느님의 글이 나오고 하느님의 말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무디어진 나의 마음이 깨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 사람들은 내 안에 맺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 깨달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장 취약점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달음이 없이 듣는다는 것이다.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식 없이 듣는다. 아니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봉사한다고 나서고, 기도한다고 앉아있고, 바쁘다고 여기 저기 다닌다.

 

내가 시골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때 한 형제가 아침 식사 때에 와서 "신부님, 밭이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였다. "무슨 밭이 없어져?"라고 물으니까 "봄에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 밭이 없어졌어요."라는 것이다. "그럼 그 밭이 어디갔느냐?" 라고 물으니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는 하나도 자라지 않고 풀만 무성하게 자랐어요."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어 놓고 공부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 고구마 싹이 나오기도 전에 풀이 자라서 고구마 밭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밭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씨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 신비를 보고 듣는 눈과 귀
-
박상대 신부-

 
마태오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비유설교 집성문(13장)은 총 7개의 비유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3-9절), ② 가라지의 비유(24-30절), ③ 겨자씨의 비유(31-32절),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44절), ⑥ 진주의 비유(45-46절), ⑦ 그물의 비유(47-50절)이다. 비유말씀의 대상은 보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13장(정확히 13,1-53) 전체를 분석하여 보면 비유말씀 사이에 비유에 대한 설명과 주변말씀이 들어있다.

이 부분은 모두 예수께서 군중이 아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으로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절),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설명"(18-23절),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4-35절), "가라지 비유의 설명"(36-43절), 그리고 "비유의 결론"(52-53절)에 관한 내용들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이 서있는 자세로 배에 앉아 가르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오직 전반부 4개의 비유말씀(파종, 가라지, 겨자씨, 누룩비유)뿐이다.

왜 4개의 비유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군중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주신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1-13절)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오복음사가의 편집의도와 함께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오복음공동체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복음공동체는 왜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 다수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냐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분명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외면은 하느님의 계획과 예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때마다 이사야 예언서(6,9-10)를 인용하곤 하였던 것이다.(마르 4,12; 마태 13,14-15; 요한 12,39-40; 사도 28,26-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자들은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되고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점점 더 못 알아듣게 됨으로써 가지고 있는 지식까지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는 소명과 선택의 신비도 포함된다. 소명과 선택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신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잘못과 고의로 이 선물을 거부한다면 하느님께로 되돌아 가 버린다.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하느님 존재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직접 보는 눈과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우리도 일상(日常)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고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복된 눈과 귀

사람은 누구나 눈과 귀가 있습니다. 눈과 귀는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중요한 지체로서 시각과 청각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눈으로는 모든 사물을 보고 분별하며 귀로는 모든 소리를 듣고 판단합니다. 눈이 사물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귀가 소리를 잘 분별할 수 없다면 살아가는데 많은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눈이나 귀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 없을 것입니다. 마태 6,22-23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시각 장애인들이 많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서 말씀하는 장애는 지체장애가 어니라 영적인 장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한 6,26절과 36절에서 "너희는 영적인 일들 곧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보고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으니 복이 있지만... 저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있었으나 이를 분별할 총명도 없고, 그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분간해서 들을 줄도 또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잘 볼 수 있는 눈과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눈과 귀를 소유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육의 눈과 귀로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영의 눈과 귀를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눈과 귀에는
첫째, 육신의 눈과 귀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신의 눈과 귀를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고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과 귀도 어두우면 눈먼 장님과 귀먹은 벙어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의 눈과 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과 귀를 밝게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지성적인 눈과 귀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귀는 밝지만 지성적인 눈과 귀가 어두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뉴턴은 과일 나무에서 과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에디슨은 하늘에서 번개 치는 것을 보고 전기를 발명했으며, 스티븐슨은 주전자의 끓는 물을 보고 증기기관을 냈습니다. 지성적인 눈이 밝으려면 지식을 많이 함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인 눈과 귀가 있습니다.
에페 1,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영화로운 그 옥좌를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영의 귀가 밝아야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 볼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2. 신자들의 눈은 어떤 눈이여야 하겠습니까?

눈은 몸의 등불(마태 6,22)이라 했습니다. 마태 6,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첫째, 깨끗한 눈이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자의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비둘기의 눈에는 늘 눈물이 고여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한 눈물이 고여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로 조국을 사랑하는 눈물이 늘 고여 있었습니다. 이사 33,15절에 "악한 일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과 같이 악을 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창세 9,21-27절에 에서는 노아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누웠을 때에 그의 둘째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보도록 소문을 내고 흉을 보았으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남도 보지 못하도록 가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지만 허물을 보고서 흉보았던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감아 악을 보지 말아야 하고 악한 일을 생각지도 말아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마태 5,29절에서 예수님은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들의 눈은 깨끗한 눈으로 주님을 뵙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자들의 눈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라야 합니다.
골로 3,1절에서는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고 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항상 그늘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이사 40,31절의 말씀과 같이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시편 121,1-2절에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믿음의 눈과 영적인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에 눈이 가리워진 사람은 물질만이 보이고,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돈으로 눈이 가리워져 있는 사람은 돈만 보일 뿐, 형제도, 부모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끔 돈이 눈과 귀를 막게 됩니다. 여자에게 눈이 먼 사람은 여자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사람에게 눈을 주시든지 돈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이제는 우리의 눈에 우리의 귀에 영역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영안으로만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음성도 영적인 귀로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헬렌켈러는 육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육의 귀로 듣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영의 눈과 귀가 열려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승리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영안이 활짝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신자들의 눈은 자비를 베푸는 눈이라야 합니다.
예리고로 가는 도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사제나 레위인은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구출해 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눈이었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대가 점점 악해지고 포악해 질 때일수록 신자들의 마음은 자비를 여기는 마음의 눈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의 눈은 교만한 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미워서 흘기는 눈도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기와 질투의 눈도 아닙니다. 사랑의 눈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자들의 눈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2-10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어떤 사람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가버렸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라고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스런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우리들의 따뜻한 손길의 눈을 기다리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 신자들의 눈이 자비를 베풀 여유와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여 줄 때 우리들의 정은 두 배로 커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앙드레 지드라는 분은 말하기를 "돈 가진 자들의 멸시의 눈초리는 견디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불행한 눈초리는 나의 마음 속을 깊이 찌른다"고 했습니다.

넷째, 영적인 추수의 밭을 바라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 4,35절에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자연계의 법칙에도 봄을 지나 가을에 와서 추수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도 추수가 있다는 것을 영의 눈을 떠서 바라 볼 줄 아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이 교만하고 거만한 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음란한 눈을 갖지 맙시다. 조롱하는 눈짓을 하지 맙시다. 분노의 눈을 갖지 맙시다. 질투의 눈꼬리를 갖지 맙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눈은 깨끗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눈을 가집시다.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십시다. 인심 좋은 눈을 가지십시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십시다. 영적인 일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십시다. 생명을 주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복된 눈을 가집시다.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사람들의 마음은 대개는 눈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마음도, 반면에 미움과 질투의 마음도, 먼저 눈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예레 5,21)이 있고, 보기는 보아도 겉만 보는 눈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눈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요, 겉만 보는 눈이란 하와가 선악과의 겉만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워 보여 속은 못보고 껍데기만 보는 눈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눈이 다 이러합니다. 사람을 보아도 겉만 보고 속은 못 보며, 만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지나쳐버립니다. 예수님이 갈바리아 산상에서 십자가를 질 때 좌편우편에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한편의 강도는 말하기를 네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소경도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며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면서 네 신세는 어찌해서 강도의 신세와 똑같으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에서 내려와 보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하고 그 강도는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바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눈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일까?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 중 열 사람은 부정적인 눈으로 판단하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긍정적이고 확신있는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불신의 눈을 가졌던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긍정적인 복된 눈의 소유자는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 속에 승리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겉만 보지 않고 사건과 사람과 역사의 속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으며 삼손은 데릴라가 자기 눈을 빼내어 갈 여인임을 보지 못했으며 아간은 물질이 자기와 가족을 멸망시키는 것인줄 볼 줄 모르는 눈을 가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속을 바라보며 사건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택한 자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의 소유자들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눈, 노아처럼 120년이나 참으며 멀리 바라보는 눈, 요셉처럼 꿈을 믿고 장래는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는 눈, 성서상의 위대한 인물들은 참으로 멀리 바라보는 복된 눈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눈은 가능성을 찾는 눈이며,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전능자 하느님을 찾는 눈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지금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들에 눈을 너무 굴리면서 혹사를 하여, 눈이 너무 피로합니다. 영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헛된 욕심에 혈안이 되어 눈이 아파 올 땐 어찌해야 합니까? 그럴 때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해야합니다.

웬만한 것쯤은 다 용서하고 다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소서
너무 가까이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근시안도 아닌
너무 멀리만 보고 가까이는 못 보는 원시안도 아닌
사물의 중심을 바로 못 보는 난시안도 아닌
밝고 맑은 시력을 주소서,

주여!
편견과 독선의 색안경을 끼기보다 기도의 투명한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기 전에 나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먼저 보게 하여 주소서
결점투성이의 나를 보고 절망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당신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소서
다시 한번 당신께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하소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과 분별력을 주소서.
살아서 눈을 뜨고 사는 고마움으로 언제나 당신 안에 보게 하소서
오늘도 샅샅이 나를 살피시는 눈이 크신 주님....!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