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Margaret K 2007. 7. 25. 04:38

   2007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6-27)

 

 whoever wishes to be great among you shall be your servant;
whoever wishes to be first among you shall be your slave.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마실 수 있다고 답한다. 그 잔은 죽음의 잔이었다. 그것도 보통 죽음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이다. 그러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훗날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불평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이다

 

☆☆☆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 제자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적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새 세상이 오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단순 소박한 시골 어머니의 청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하시며 반문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모습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세상 종말이 곧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새 세상의 주인이 되고 자기들은 그분 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줄로 믿었습니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런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제자들은 이러한 환상을 접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체험한 뒤 그는 온전히 바뀌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 임금에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스승의 예언을 떠올리며 예루살렘에서 참수의 칼을 받았을 것입니다.

 

 

   줄서기를 잘하자     

-남상근 신부-


 예수님 시대에도 인사 청탁과 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도 치맛바람이
좀 불었던 듯합니다.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 암투도 발견됩니다.
한 명은 오른쪽에 한 명은 왼쪽에 앉아서 세도를 부리고 싶어서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을 만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보면 자리 욕심과 성공의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알게 됩니다. 소위 ‘줄서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축일에 들리는 복음은 이렇게 별로 향기롭지 않은 적나라한
내용입니다. 성공을 위해 ‘ㄲ’으로 시작하는 6가지 요소가 필요하답니다.
꿈(비전), 깡(용기), 꾼(전문성), 꼴(외모), 끼(재능) 그리고 끈(연줄)이랍니다.
끈을 만들려고 양심도 자존심도 다 팔기도 합니다. 실력으로 모자라니
은밀한 뒷거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이가 되려면,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사람, 종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과 인연을 맺으려면
봉투를 준비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몸값으로 목숨바쳐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섬기는 사랑만이 참 권위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쯤 낮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기쁨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건강이 안 좋아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때론 중환자실에 입원할 때도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가족 걱정을 하고, 못다 한 일 걱정에 조바심을 칩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렇게 건강하게 사나.’ 하고 부러움이 저절로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친하게 지내는 스님께 문안전화를 드립니다. 스님은 직장암을 앓고 계시지만 여행도 많이 하고 사람들도 잘 챙기는 분입니다. “스님, 평안하시지요?” “우리 같은 사람은 더 나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요. 병이랑 친구하고 지냅니다.” 목소리를 듣고 나면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남들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렸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집니다. 암까지도 친구하며 지내는 스님은 죽음도 친구처럼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스님을 뵐 때마다 나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때론 단순하게 반복되는 무엇인가를 계속하는 것이 큰 고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이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숨통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고 나면 이 작은 일상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무 일 없이 가족들이 건강한 것도,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것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것까지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에게 축복이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새롭게 살게 되는 이 시간을 힘든 이웃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 바치겠노라고 결심해 봅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묵상하며 죽음도 일상처럼 저에게 편안하게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죽음이 오는 순간에도 평안할 수 있다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 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의 사도 야고보
-
경규봉 신부-


성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의 형이다. 이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로서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부르시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마태 4,21-22).

주님께서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야고보를 특히 사랑하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나(마르 5,37), 타볼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마태 17,1-9),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마태 26,36-46) 등 중요한 순간에 이 세 제자와 함께 하셨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컸던 것이다. 주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야고보 형제는 자신들이 주님을 사랑한 그 만큼 주님께 대한 요구도 컸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에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수 있기를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마르 10,35-41). 이처럼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한 야고보 형제에게 주님께서는 천둥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셨다(마르 3,17).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니아의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다고 한다. 후일 이곳에 야고보 사도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에스파니아의 수호성인이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 가까이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향한 열정이다. 열정 없이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열정은 우리 안에 있는 사념들을 불태워서 오직 한 가지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 역시 열정이다. 주님을 향한 열정은 주님께 가까이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사도 야고보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르시자 배와 그물도 버리고, 삯꾼과 아버지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주님을 따랐다. 그가 중요한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나,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한 것 역시 주님께 대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바로 그러한 열정으로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하였다.

오늘 사도 야고보의 축일을 지내면서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도록 하자.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자.........◆

 

 

 주님처럼 죽을 수 있는 열정으로 살아간 성인
-
채홍락 신부-

오늘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성서에 언급된 야고보 사도의 모습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항상 앞부분에 제시 되어 있습니다.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치유 현장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성전이 무너지는 종말이 언제 올는지에 대해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묻기도 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는 기적을 지켜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순간을 목격했으며, 게쎄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기도할 때에도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 있는 등 예수님의 활동에서 중요한 순간을 늘 함께 지낸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제베대오는 삯꾼들을 부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소까지 따라다닌 행적으로 보아, 예수님 일행이 복음을 전하며 팔레스티나 일대를 다니실 때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까닭에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보아네르게스 곧 천둥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이는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의 기질이 ‘다혈질’이라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두 형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건의할 만큼 과격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반면 이런 다혈질은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승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선뜻 그러겠노라고 답변합니다. 이때 장담한 대로, 야고보는 신약성서가 12사도 중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그 순교 사실을 기록한 첫 번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인인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신비를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논리로 신앙을 바라봅니다. 신앙은 십자가의 논리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나의 논리로 하느님의 논리를 꿰맞출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것은 마치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더러 우리를 섬겨달라고 때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든 못하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방법으로 경직됨 없이 부드럽게 나를 개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신앙을 이룰 수 있는 모습이지요.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개방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단점까지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길 바라십니다. 마치 야고보 사도의 다혈질을 받아들여 주님처럼 죽을 수 있는 열망으로 승화시켜 주신 것처럼............◆


  

 성 야고보 사도

-춘천교구 하화식 신부-


 우리는 모두 욕망과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바람과 나자신의 인간적인 성취와 건강과 행복…. 인간이 얻고자 하는 많은 바람이 있기 마련인데 오늘 이야기는 두 아들에 관한 어머니의 마음이 특히 돋보인다.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청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한 청원인가?

우리의 기도는 어느 선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도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실 때 나 자신을 위한 것에 집착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참된 믿음은 자신을 위한 청원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더 값지고 소중하며 참 기쁨을 얻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에 오늘 어머니의 청원은 참으로 진솔하고 솔직한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주님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더한층 높은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으뜸과 종의 삶이 서로 교차하는 그 선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의지가 작동되어야 하는지 매순간 부딪치게 된다.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참 삶의 맛을 얻어 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럼 오늘 하루 중 어느 순간에 이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이 가장 소중한 날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장동현 신부-

  

 우리 학교 학생 전체와 함께 미사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관구장 신부님이 주례를 하고 저와 다른 신부님들이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부탁을 받고 제가 복음낭독을 하였습니다. 복음낭독 후 저는 자리로 돌아오고
관구장 신부님이 강론대로 가셨습니다. 신부님 강론을 듣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주례석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늘 윗자리에, 그리고 가운데에만 앉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주례석에 떡하니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 앉는데 앞줄에 앉은
선생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막 웃어 조금 겸연쩍었습니다.
윗자리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윗자리는 책임의 자리입니다. 윗자리는 고난과
희생의 첫째 자리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리이고 종의 자리입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생긴 병치레를 했습니다.
자리의 본질을 잊은 값을 톡톡히 치른 에피소드였습니다.
‘아차!’ 하며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정원순 신부(구속주회)-

 

 ◆오늘 복음에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들이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마태 20,24)는 보도가 나온다. 이것은 제자들 사이에도 자리다툼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올라가는 과정에 다른 사람에게 비인간적인 처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정상 자리는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다. 그러기에 올라가면 얼마 못 가서 내려와야 한다. 정상의 자리는 좁기 때문이다. 혼자 있어야 하기에 고독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이에 비하여 낮은 자리로 가면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앉을 자리도 많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공존한다. 골짜기의 물, 크고 작은 지류의 강물, 하천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바다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때문이다. 자기를 낮추면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겸손하셨기 때문이다.
낮아졌다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 누구와도 만날 수 있고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 을 품기 위해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찾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하고만 자리를 함께하고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과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고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구경국 신부 -

 

 꽤나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제가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유학을 할 당시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터 케른이라는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매우 온화한 인품을 지니고 계셨을 뿐 아니라, 박사 학위를 두 개나 소지하신 재원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청소를 자진해서 담당할 정도로 겸손하셨던 분으로, 한국 신부, 신학생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보여주셨던 분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신부님의 인품에 호감을 가졌던 탓인지, 아니면 기초신학의 중요성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온 십 삼사 명 정도의 신부 신학생들 중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의 수가 동시에 무려 여섯 명이나 될 때가 있었습니다.
  
기초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케른 신부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을 '케른 학파'라고 불렀고,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약간의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런데 기초신학이 아닌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어떤 신학생이 하루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그 말을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학파라는 것은 지향하는 것과 방법이 같아야 하는 것이지, 단지 한 교수님 밑에서 같은 시기에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속담을 굳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처해진 외적 상황이 비슷하다는 사실 하나에 의존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변한다거나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킬 경우 그 공동체는 해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단지 외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이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이익공동체'일 따름이지 결코 '운명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날 심통을 부렸던 그 신학생은 이러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적인 일치감에 의한 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운명공동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를 궁극적으로 일치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지향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상황에 달려있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공동체는 우리가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그것에 따른 우리들 삶의 형태가 닮을 경우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다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야 하는 운명공동체에 속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 하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은 결코 예수께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마리아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도 우리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헌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어쩌다 한번쯤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의 생애를 걸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된 사람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코린 4,7-15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복 음 : 마태 20,20-28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열두 명의 사도를 뽑으셨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야고보 사도이지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사도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 중에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 사도이지요.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형제지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실 때에도 㰡’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㰡“(마태17,1)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실 때에도 㰡’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㰡“(마태26,37)습니다

알다시피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똑같이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었지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들은 똑똑하거나 판단력이 냉철하거나 인망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무식하고 절개도 없었으며 욕심에 가득 찬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는 똑똑하지도 못했고 절개도 없었던 제자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도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그 모든 인간적인 약점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인간적으로 전혀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고 복음서를 쓰며,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키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야고보 사도와 제자들의 삶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얼마나 속된 욕심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간청하지요.

㰡’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㰡“(마태20,21)

욕심이 가득 차 있지요. 다른 제자들도 같았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고 화를 내며 먼저 선수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요.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출세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다른 제자들도 술렁거리는 이 와중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전혀 나무라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㰡’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㰡“(마태20,26-28)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지요. 그 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실천으로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㰡’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㰡“(요한13,3-5)

바로 이러한 실천적인 모습이 제자들을 변화시킨 핵심 요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결코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㰡’나를 사랑하느냐?㰡“(요한21,17)고 세 번씩이나 애정 어린 질문을 각별하게 던지심으로써 배반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주셨지요. 바로 이러한 실천적이고 사랑을 담아 인내하는 교육 방법이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서투르고 정리되지 않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담은 인내와 실천적인 교육 방법에 기인한 것이지요.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지요.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다그치고 따지고 혼을 냅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속시원하고 그 결과가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지요. 참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인내에서 비롯됩니다.

아마도 교육자들은 매번 경험할 이러한 교육의 방법을 사목자인 저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도 초등학생들이 여기 앉아있습니다만 유치부 어린이들이 처음 어린이 미사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오합지졸 그 자체입니다. 부모 밑에서 갖은 응석을 다 부리다가 성당에 와서 앉아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학년초에 보면 자는 놈, 옆 아이와 떠드는 놈, 우는 놈 등 갖거지 모습을 다 볼 수 있지요. 어린이들은 몸을 뒤틀고 움직이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㰡’조용히 해. 자세가 그게 뭐야!㰡“하고 야단을 치면 깜짝 놀라서 정지한 채 쳐다보는데 그 시간이 딱 3초갑니다. 3초만 지나면 또 난리가 나지요. 그런데 방법을 달리 쓰면 영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유치부 어린이들을 향해 칭찬을 해 주는 것입니다.

㰡’오늘 유치부 어린이들이 제일 조용하고, 미사 태도도 정말 좋았어요.㰡“

자기들이 떠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아이들이 깜짝 놀라 서로 쳐다봅니다. 㰡’그래요, 안 그래요? 유치부가 제일 조용했지요?㰡“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두 세 번 물으면 서너 명이 모기 만한 소리로 㰡’예.㰡“하고 대답하고 세 번 네 번 물어보아야 㰡’네!㰡“하고 큰 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는 떠들지 않습니다. 역시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칭찬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속 시원히 크게 야단 한 번 치고 싹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야고보 사도와 많은 제자들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사랑과 인내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드러냈던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와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원의를 이해하시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시어 섬기는 자의 모습을 찾기까지 승화시켜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많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오는 크고 작은 고통과 부담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몸소 실천하고 사랑을 담고 기다리는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공동체 쇄신과 성장의 비결>


오늘 복음은 그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며,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을 주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공동체 역시 완벽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았음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공동체 역시 너무나도 부족했고, 구성원 상호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들 괴로워했었고, 때로 심각한 균열이 있었음이 확연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숱한 공동체 가운데,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여겨지는 제자공동체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정화되지 않은 신앙,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로 인해 자주 티격태격했습니다.


서로간의 이권, 알력, 시기심, 질투심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서로간의 경쟁심, 권력욕으로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야고보 사도 같은 경우도 보십시오.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강요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거든 ‘물 좋은’ 자리 하나를 미리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제 얼굴까지 다 후끈거립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이 또 가만있지 못하고 따집니다.


우리가 그리도 염원하고 꿈꾸는 완벽한 공동체는 이 세상 어디 가도 없습니다. 완벽한 상호일치, 완벽한 평화, 완벽한 친교, 완벽한 나눔과 섬김이 이루어지는 성화된 공동체는 ‘꿈’, 혹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본성상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 부족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도 부족했던 제자 공동체였지만, 머지않아 철저하게도 쇄신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날로 거듭납니다. 끝도 없이 성장합니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제자공동체는 비록 부족했지만, 그 중심에 늘 스승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비록 형편없었지만, 매일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불안하고 늘 흔들렸지만 그럴 때 마다 스승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영웅적인 공동체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 사도의 신앙 여정 역시 예수님과 줄곧 함께였기에 비약적인 도약과 상승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상처도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보다 부유한 가문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제자들에 대한 우월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물 좋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도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이것저것 사들고 자주 예수님과 제자공동체를 찾았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인사 청탁까지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제자공동체를 떠나지 않았기에, 늘 스승 예수님 가까이 머물렀기에, 그분 가르침에 자신의 전 생애를 맡겼기에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예수님 승천 이후 복음 선포를 위해 스페인까지 건너갔습니다. 백성들을 현혹시키던 헤르모게네스란 유명한 마술사와 용감하게도 정면 대결을 펼쳐서 승리하고 그를 회개시킵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요시아스란 율법학자를 개종시키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AD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 당함으로써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뛰어난 지도력과 복음 선포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깊은 신앙, 유다와 사마리아 전역에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에 위기감을 느낀 헤로데 아그리파는 야고보를 처형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부산교구 이석희 신부-


 오늘은 성야보고사도 축일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성야보고사도는 베싸이다 출신으로서 제배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사도의 형입니다. 또한 야고보사도도 베드로사도와 같이 갈릴레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중의 한분이시며 훗날 열 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야보고 사도의 어머니는 훗날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때 두 아들인 야보고사도와 요한사도를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자리 잡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가 갖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함께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함은 물론이고, 높은 이가 되고자 한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함을 설명하시면서 몸소 그 뜻을 실천하려고 오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자식을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이라고 이해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광만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야보고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통 없는 영광을 기대하고, 단순히 축복과 기쁨만을 바라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따랐는지 반성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우화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는데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습니다. 이 가게에서 무엇을 파느냐고 여인이 묻자 하느님이 대답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팝니다.” 이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여인은 한참 생각 끝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을 먹고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으로 부터의 자유를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으신 거 같군요. 이 가계에선 열매를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 팔지요.”

실상 우리는 나의 삶에 좋은 것만을 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바라면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바람이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멀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과 이 우화는 그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바라는 것을 주시고 계십니다. 다만 그 바람의 시간과 장소가 우리의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주시는 분께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시는 것이지 받는 사람이 그것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따라 그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면 우리가 마셔야 할 잔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도 필요하지만 어려움과 십자가 고통을 받을 잔도 필요합니다. 축복의 그릇과 고난의 잔은 서로 상반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없는 영광은 빛이 나지 않고 영광없는 고통은 우리에게 삶의 무게만 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높은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삶 전체를 통해서 섬기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고 마침내 자신을 바쳐 우리를 높은 위치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도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용기를 내어서 "예,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힘든 삶의 여정도 헤쳐 나갈 수 있으며, 그 분이 원하신 시간에 주시는 축복에도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으며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평화롭고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아멘.

 

 

 † 참된 제자의 도 : 겸손과 섬김의 삶 

-박상대 신부-

오늘은 12사도 중의 하나이며 성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는데,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입니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성인과 5월 3일이 축일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성인을 구별하기 위하여 전자를 성 야고보(대), 후자를 성 야고보(소)로 구별합니다. 그는 베싸이다 태생으로 어부였던 아버지 제베대오와 어머니 살로메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삼으신 직후, 아버지 제베대오와 더불어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마태 4,18-22)

야고보는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됨으로써 12사도 중 첫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며, 전승에 의하면 성인의 시신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안장되었고, 오늘날 여기에 대성전이 서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제자로 통하는 자기 동생 요한과 수제자인 베드로와 함께 셋이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께서 이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생각이 각별했던 모양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럽게 변한 모습을 이들에게만 보여주셨고(마태 17,1-8; 마르 9,2-8; 루가 9,28-3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예수께서는 이 세 사람과 그의 부모만 따로 데리고 방에 들어가 아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마르 5,21-43; 마태 9,18-26; 루가 8,40-56)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려가시어 게쎄마니 동산에서 고통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며 보내신 마지막 시간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가 22,39-46)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마르3,17), 그 이유는 루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날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묵어가기 위하여 선발대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묻습니다.(루가9,51-54) 물론 두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는데(루가9,55), 그 꾸지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 복음에도 거듭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의 원전(마르 10,35-45)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딱 한 군데만 고쳤습니다. 즉, 마르코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와서 도래할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각각 주시기를 청했다고 하지만, 마태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는 어머니가 예수께 청을 드리는 것으로 고쳤습니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예수님 수난사를 종합하면 이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인데(마르 15,40; 마태 27,56), 왜 마태오는 느닷없이 죄 없는 어머니를 이 장면에 끌어넣었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마태오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야고보와 요한의 체면을 생각하였고, 사도단 가운데서 그들이 차지하는 명예를 지켜주려 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타 섞인 말씀은 어머니를 건너 뛰어 두 제자에게 향합니다.(22-23절) 또한 다른 열 제자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화를 냅니다.(24절) 그렇다면 나머지 열 제자들이 화를 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사실상 앞서 간 복음에 있는데, 우선 "부자청년과 낙타와 바늘귀"(마태 19,16-26)의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를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하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9,27-28)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백 배의 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 있었고 뿌듯했겠습니까? 열 두 제자들은 제각기 속으로 주님의 좌우자리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20,17-19)도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모두를 불러놓고 참된 제자상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제자란 봉사하는 자이며,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옥좌의 자리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로 목숨을 내어놓은 후에 받게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참된 제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저 종으로서 봉사해야 하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