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마태 12,41)
At the judgment,
the men of Nineveh will arise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here.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지금 당장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이미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건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이 계속된다
☆☆☆
한 술꾼은 술만 마시면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심술을 부리는 그를 마을에서는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중에 주일 학교에 열심히 다니는 초등학생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꿈에 예수님을 봤어요.”
이에 아버지는 피곤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이 녀석아, 예수가 어디 있냐? 오늘 밤에 또 나타나면 한번 물어봐라, 네 아비가 지은 죄를 낱낱이 말해 보라고. 그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어.”
날이 새자 아들이 아버지께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 ‘얘야, 아빠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려무나. 나는 네 아빠가 지은 죄를 벌써 다 잊었다고 말이다.’” 아들의 이 말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술을 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따뜻한 눈빛 하나에 원한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의 기적은 흔하디흔한 행위 속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한 행위에는 언제나 능력을 주셨지만, 사랑이 빠지면 침묵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요구하는 기적은 사랑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차디찬 증거를 위한 기적입니다. 그들 마음 어디에도 따뜻함이 없습니다. 기적을 단순히 초능력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전에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제가 어떻게 잠을 자는 지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모기를 워낙 싫어해서 공주방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기장을 침대 위에 쳐 놓고 모기의 방해를 받지 않는 편안한 잠을 잔다고 했지요. 그동안 저는 모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모기장 안에서 잠을 자는 한 저는 늘 안전했습니다.
어제도 저는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서 모기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기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모기장 밖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지요.
‘네가 아무리 울어봐라. 너는 나를 물 수가 없어.’
그리고는 잠이 들었는데, 간지러워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모기한테 물린 것입니다. 모기장이 있는데 왜 물렸을까요?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모기장은 분명히 조금의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약간의 조사를 통해서 저는 한 가지를 알 수가 있었지요. 모기장 안에 모기 2마리가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모기장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모기가 이미 들어와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모기장이 설치된 것 그 차제만으로 저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모기장 안에 모기가 들어 있지 않아야 진실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 하나가 이해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두 눈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바로 이 자리에서 봐야지만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표징이나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을 통한 마음의 변화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 예언자가 보여준 표징이 무엇일까요? 고래 뱃속에 사흘 동안 들어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구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기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성의 없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모두 믿고 회개한 사건이야 말로 가장 큰 표징임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결국 믿음을 통한 마음의 변화야 말로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큰 기적이요 표징인 것입니다.
모기장 자체만으로 안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지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기장 안에 모기가 없어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계시지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없다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내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며, 이로써 우리들을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여 보세요. 내 믿음이 나를 살립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 봅시다.
빠다킹신부
봐서 뭐하려고?
-남상근 신부-
언제부터인가 가톨릭 신앙 공동체도 기적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만연하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 전체 차원의 장엄미사가 있거나 큰 규모의
행사가 벌어지면 공연히 하늘을 쳐다보느라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들이 목격된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늘에 십자가 구름이
나타나지 않나, 이번에는 신기한 햇무리나 무지개가 보이지 않나 하는 기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피눈물을 흘린다는 전라도 어디의 성모상을
‘친견’하기 위해 버스를 대절해서 내려가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것을 목격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은혜받았다고 하는 약하고 어긋난
신앙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의 세력에 묶인 이들, 부자유한 이들,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해방하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그분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구름이 나타난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피가 스며나는 성상을 보고 온들 그것이 우리에게
치유가 될 리 만무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로 결혼한 지 꼭 20년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한테 잉꼬부부라느니, 닭살이라느니 하며 놀립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지나고 보면 별 문제도 아닌데 서로 지지 않으려고 부부싸움을 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 아침 성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마음 정리가 안 되어 분심으로 가득 차서 미사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해의 눈빛을 보내지만 전 원망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영성체도 못하고 미사가 끝나 집으로 오는 길은 슬픔이 가슴까지 차올라 어떤 것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다 보니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학교 가고 싶을 때 보내주지 않은 아버지가 밉고, 다른 아버지처럼 쉬지 않고 일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세월을 보냈을까 원망하고 또 원망합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면 가난했지만 최선을 다해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해 주고 기뻐해 주는 남편이 고맙기만 합니다. 손 안에 보물을 들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남의 탓만 하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돌아보면 내 안에 문제가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원망하듯이 저도 남의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무슨 문제든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으며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 살기가 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해야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는 말씀처럼 다른 사람 탓만 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문제든 해결할 힘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 : 두려움에 떠는 백성을 감싸 안고 격려하는 모세
-경규봉 신부 -
파라오는 전에 모세가 요구했던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3일 동안만 광야에 나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후 다시 돌아와 종노릇하기를 은근히 기대했다(5,3; 12,31). 그런데 3일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도망간다는 보고를 듣고 그의 마음이 급변했다.
그는 열 가지 재앙을 견딜 수 없어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지만,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60만(부녀와 아이, 노인을 제외한 장정)의 노동력이란 대단한 것이며, 따라서 그 노동력에 대한 애착과 탐욕이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놓아 보낸 것을 후회하게 하였다. 탐욕이 가득한 파라오는 이스라엘이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추격대를 조직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곧바로 따라잡았다.
파라오와 그 군대들이 다가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공포에 떨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이집트 군대와 싸울 수 있는 장정보다 보호받아야 할 아녀자와 노인이 더 많았고, 전투장비나 전력도 이집트 군대와 비교할 수 없었으며, 이집트에 대한 노예근성으로 말미암아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하도록 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극심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하였다. 이에 모세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지켜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싸워주신다고 말한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신 분은 사실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군대가 추격해 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다. 그들이 위급할 때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부르짖기는 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 모세를 원망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모세만을 보았고, 모세를 원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인을 섬기며 종살이를 하며 사는 편이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들 안에 노예근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하느님의 약속과 은총을 믿을 수 없었다. 일시적인 편안함이나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하여 자유를 위한 역경을 헤쳐 나갈 힘이 없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두려움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첫 번째 반응이다. 믿음 깊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지켜보라고 외친다. 현재 상황이 절박할지라도 결코 초조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그 절박한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외친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볼 것이라고 외친다.
모세는 이미 하느님의 구원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백성이 두려움에 떨고 당황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간다. 믿음 약한 백성을 꾸짖거나 탓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믿음 약한 그들을 다독거리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그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팡이로 바다를 가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로 건너가도록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행한다.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는 모세처럼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모세처럼 깊은 신앙을 갖자. 절박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행하는 모세와 같은 믿음이 굳센 신앙인이 되자. 믿음 약한 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그들을 감싸 안으며 그들과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는 또 하나의 모세가 되자..........◆
시대의 징표는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이석희 신부-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제 오늘의 상황은 아니지만 요사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더욱더 실감하는 현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이 변화와 다양함은 더욱더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누구나 한번쯤 겪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적을 베푸시어 나의 미래와 현실에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나의 신앙이 미지근할 때 더욱더 강하게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지난 1984년 신앙전래 200주년 행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하늘에서 십자가 모양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들 기적이 일어났다고 환호를 질렀던 상황이 기억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이상한 일이 조금만 일어나도 찾아가 확인하고 맹신하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치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켜버리고 쉽게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신비는 외적인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과 성체 안에서 더욱더 뚜렷이 드러나고 우리의 신앙을 오랫동안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께 표징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표징이 없으면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청을 받을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를 모르는 이 세대를 한탄하시고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 마을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고 기적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한탄스럽게 고향을 떠나가셨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징이지만 그 자체로는 올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한 기적이 항상 인간의 편에서 이해되고 한정지어져 버리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적을 넘어서 새로운 신앙의 눈을 가지게 함이요, 기적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이미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기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 안에서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 날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생명의 시작이요. 기도할 수 있다면 무딘 나의 마음을 변화시킨 하느님의 기적이며 미사 성제를 통해서 감사와 구원의 은혜를 느낀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입니다.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늘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신앙의 변화가 나의 삶을 이끄는 주님의 은혜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것이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이미 머물러 있는 신앙의 신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조그만 물리적인 변화에 신앙의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머물러 있는 신앙의 신비에 눈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우리는 참으로 심오한 기적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돈독히 만들어 줄 것이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복음을 읽다 보면 모두가 기적인데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복음을 읽다 보면 모두가 기적인데,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 계속 기적을 요구하는 대화를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바라는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읽었던 ‘삼 년 고개’라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노인이 젊어지고 싶어 그 고개에서 세 번 구르면 젊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젊어지려고 계속 구르다 아기로 변하였다는 이야기지요. 욕심이 지나치면 크게 잃는다는 것이 이야기의 주제겠지만 여하튼 늙기 싫은 마음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지요. 그래서 생로병사의 이탈을 염원하여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그 기적을 염원하여 일어나는 기현상이 우리를 얼마나 아연하게 하는지요.
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하느님께 이런 기적을 주십사고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돈 앞에서는 이웃도 부모도 형제도 없는 몰염치한 이 세상에 주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이기적인 생각을 싹 사라지게 하시고,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존중하고, 풀뿌리라도 서로 나누어 먹는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십사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이 세상에 도래하겠지요.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를 일깨워 주시는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이런 세상을 보여주시는데도 세상살이에 갈등과 미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일까요?
-부산교구 김창대 신부-
천상병이라는 사람이 쓴 '귀천'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더불어
손세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시인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일생동안 이렇다 할 직업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육십 평생을 극심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살았지만, 소풍 나온 것과 같이 즐겁게 이 세상을 살다가 하느님 앞에 가서 '이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말 하겠노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이 다음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느님께서 '저 세상에서 살기가 어떠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다'라고 말하는 입장을 낙관주의라 하고, '괴롭다'고 보는 입장을 비고나주의 또는 염세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200주년 성경에서는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 간음하는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 살펴보면서 몇 가지 교운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첫째, '악한 세대'는 기적을 구하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어느 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기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악하고 절개없는 간음하는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 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했습니다.
기적이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적 기사를 말합니다. 과학의 명제는 언제나 '보아야 믿을 수 있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명제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입니다.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분입니다. 성경 말씀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 11장 25절에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생동안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경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을 '성경을 없애러 온 자'라고 매도했습니다. 성경은 결코 학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론이나 과학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보고 믿어려 한다거나 이론으로 분석한다면 끝내 하느님도, 천국도, 영생도 이해할 수 없을 것 입니다.
둘째로 '간음하는 세대'는 죄악된 세대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 41절을 보면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난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가죽으로 도배를 했고, 사람의 뼈로 식기나 생활도구를 만들어 사용했을 만큼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쪽 나라의 여왕'은 시바의 여왕으로 남달리 사치스럽고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심판 때에 이러한 니느웨 사람들과 남쪽나라의 여왕이 일어나 심판하고 단죄한다는 것은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오늘의 세대를 12시 5분 전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은 마지막 때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우리 세대의 죄악은 소돔과 고모라의 수준을 훨씬 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 못가서 인류는 자연의 이변이나 에이즈와 같은 불치병으로 스스로 자멸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세대의 인간성은 더욱 악랄해지고, 성적 타락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오죽했으면 심판때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쪽나가 시바의 여왕이 나서서 단죄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슬피 울며 통회자복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멸망의 원인은 그 죄악이 크고 음란의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자들은 그날의 심판을 면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이 소원합니다. 아멘.
-장동현 신부-
주변을 둘러보고 제가 걸어온 길을 진지하게 살펴보니 온통 감사할 일입니다.
지나온 나날들을 돌아보니 발자국 하나하나가 다 은총입니다.
오늘 아침 단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고 할 일이 있으며 밥을 먹었습니다.
미사에 약간 늦었는데도 반갑게 맞아줍니다. 미안한 마음에 더 정성껏 미사를
봉헌했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학교행사에 봉사한 학급을 찾아가 칭찬해주었더니
답례로 박수를 쳐줍니다. 자판기 앞에 삼삼오오 모인 선생님들께 인사했더니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잡습니다. 부족하나마 수도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제 삶 안에서 되풀이되는 기적들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체험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디 진짜 기적 없을까’ 하면서 두리번거리고 한눈을 팔기도 합니다.
표징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 더 많습니다.
늘 손을 잡아주는 하느님께서 혼자 걸어보라며 손을 놓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이때, 단순하게 믿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진짜 기적’만 찾는 사이 믿음의 눈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양승국신부-
< 기쁜 얼굴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
제가 수사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교육시키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아이들 사이에서 숨 가쁘게 움직여야 하는 활동수도자들입니다. 영성생활에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짜릿한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매일 주어지는 일상적인 전례나 미사, 성무활동 안에 들어있는 보화를 찾으십시오. 미사 때 제발 졸지 마십시오. 금쪽같은 묵상시간 제발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깨어있으십시오. 집중하십시오. 몰입하십시오. 몸과 마음, 눈과 귀, 외적인 태도 등 모든 기능을 총동원해서 미사에 푹 잠겨 드십시오. 미사의 동작 하나 하나, 전례의 표지 하나 하나, 경문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미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시오.
매일의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요,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아침, 저녁기도는 우리를 순간순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가장 은혜로운 도구 중의 도구입니다.
매일의 미사, 그것보다 더 큰 은총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되풀이되는 홍해의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를 온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부디 타성에 젖은 얼굴로, 귀찮은 얼굴로, 짜증나는 얼굴로, 그저 주어진 의무이니 온다는 얼굴로 미사에 오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이니만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감사와 감동의 마음으로, 깨어있는 자세로 미사에 오십시오.”(R)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보여 달라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요나 예언자의 표징에 대해서는 수백, 수천 번도 더 들어온 바이므로 스토리를 너무나 잘 꿰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빤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요나 이야기(하느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결국 고래 뱃속까지 들어가 보고 나서야 회개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멸망한 니네베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십니다.
하늘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태도 역시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영원한 상급을 선물로 주십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이승에서도 고달프지만, 다른 세상에서 겪게 될 고초가 클 것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조상들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베푸셨던 자비와 사랑, 진노와 벌을 생각하면 답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입니다. 굳이 ‘이거다’하는 징표를 요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니네베 사건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영적생활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어둠과 슬픔, 나약함, 방종한 습관 등으로 인해 괴로울 때도 그 모든 감정들을 감추지 말고 솔직히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우리가 믿는 바대로 우리를 짐스럽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인다 하더라도, 또 어떤 좋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 할지라도, 오늘은 우리가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께 더 잘 봉사하도록 배려된 하루임을 잊지 마십시오.
부산교구 구경국 신부-
앤소니 드 맬로라는 신부님께서 적은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이 이슥할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웃 사람 하나가 가로등 아래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열쇠를 잃어 버려 그것을 찾고 있다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 대답을 듣고 집으로 가던 그 사람도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같이 찾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쭈그리고 앉아서 잃은 열쇠를 한참을 찾았지만 열쇠를 찾지 못하자 그 사람이 이웃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열쇠를 어디서 잃어 버리셨는데요?"
이웃 사람이 "가로등 저 쪽 어두운 데서 잃어버렸습니다"하고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서 찾고 있습니까?"하고 재차 물으니 이웃 사람이 대답하길: "여기가 더 밝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밝은 곳에서와는 무엇이든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 무엇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찾는 것도 역시 어두움 속에서 무엇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을 선호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혼돈하여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어려운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나에게 쉽고 다가오고 좋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진리인양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의 권능을 통하여 당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여주심으로써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 믿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어지러운 오늘의 세태를 반영이나 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현상들이나 환상들을 찾아다니는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치 그러한 행위 없이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그러한 현상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손길을 직접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자신의 신앙을 키워나가고 스스로의 생활태도를 조용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하느님께로부터 더욱 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직접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도 맞지 않는 것일 뿐더러, 그 사람 개인의 신앙을 위해서 실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으로 불릴 수 있는 현상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한 현상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우리의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결코 내가 초자연적인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제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믿음에 근거를 두고 행한 나의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곤경에서 벗어나 주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은 믿음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될 수 있으며, 어쩌면 오늘날 더 많이 요구되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기적은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수단이며, 믿음이 굳건한 사람은 또 다시 이 믿음은 초인간적인 힘을 우리에게 주어 정상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신앙으로 인하여 나의 삶의 근본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신앙과 사랑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를 참으로 그리스도로,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사람
-박상대 신부-
오늘복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전에 ‘닐 기유메트’ 신부님께서 쓰신 ≪나와 함께 낙원에≫라는 책에 들어있는 “기적병”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릴까 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메나헴은 항상 기적에 굶주려 있었다. 그가 어느 날부터 광야에 살면서 자기에게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하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위대한 고행자 요한 세례자를 따라다닌 이유는 놀라운 기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요한 세례자가 설교와 세례를 베푸는 것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메나헴은 그를 떠나 당시 한참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던 나자렛 출신인 예수의 문하로 들어갔다.
예수의 추종자가 된 메나헴의 첫 주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련의 기적들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병환자가 단번에 깨끗하여지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누워있던 요를 걷어 통째로 매고 가며, 절름발이가 걷게 되고, 반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고 들으며, 수천의 군중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가 터질 만큼 먹고, 악령 들린 사람들이 말짱해지는 그런 기적을 자기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했고 예수께 박수를 보냈다. 메나헴도 신이 나서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 주간에 예수는 더 놀랄 기적들을 보여주었다. 배를 삼키려드는 거센 풍랑을 호통 쳐 가라앉히는가 하면, 보이지도 않는 데서 병자를 원격치유하고, 급기야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것이었다. 메나헴의 하루하루는 너무 행복했다. 기적들 가운데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아랑곳없이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한편의 영화가 되어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나헴은 예수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예수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그 때 메나헴은 이제야 기적의 최고절정을 보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 달리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예수의 기적이 그의 눈에 시시하게 여겨졌고, 더 이상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보따리를 싸들고 더욱 더 짜릿하고 스펙터클한 기적을 찾아 떠나가는 메나헴을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라훔이었다. 라훔은 메나헴이 왜 예수를 떠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어떤 기적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일세.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자네의 마음일세. 자네 마음을 한번 변화시켜보게나!”하고 말이다. 라훔은 메나헴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보내고 말았다.
우리는 지난 주간 금요일과 토요일 복음을 통하여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구약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강조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비단 마태오뿐 아니라 다른 복음사가들도 예수님의 “메시아-신학”을 단번에 보도하지 않고 복음전체를 통하여 점층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주의 깊게 고찰되어야 한다.
① 첫째는 예수님 스스로의 메시아에 대한 자의식(自意識)이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말씀이신 성자는 육화(肉化) 사건으로 말미암아 즉시 이 세상의 메시아로 계시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메시아성은 인간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성숙, 즉 ‘되어 가는 것’이다.
② 둘째는 복음사가들의 편집사적 노력이다. 예수님을 더 이상 물리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신약성서 시대에 예수의 목격자인 사도들과 그들의 증언을 기록한 복음서는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은 저마다 고유한 편집의도를 가지고 “메시아-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구상은 대략 “나자렛 출신 예수 -> 선생, 랍비 -> 위대한 선생 -> 예언자 -> 대예언자 -> 메시아 -> 그리스도” 라는 도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결국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를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피력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③ 셋째는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이는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인지에 대한 인간의 수용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심 가득 찬 메시아적 자의식으로 군중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메시아적인 업적을 보이며, 또 복음사가들이 위에서 말한 편집의도를 가지고 청자(聽者)와 독자(讀者)들을 유인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결정은 인간 스스로가 내린다. 이 결정에는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 고유의 메시아 관(觀), 또는 메시아 상(象)도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께 대한 인간의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태도는 마지막에 가서 수용(accept)과 거부(reject), 나아가 신앙(belief)과 불신(unbelief)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세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면 오늘 복음은 쉽게 이해된다. 사람들이 예수께 ‘자신을 메시아로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요구한 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수용(受容)하고 신앙(信仰)하기 이전에 그에 합당한 자료를 요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구약성서 시절에 있었던 요나의 기적(요나 3장)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기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있던 니느웨 사람들 모두가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즉 기적이 아니라 오직 설교만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고 자신들을 내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외적인 기적은 결코 믿음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누구도 종용할 수 없는 나 자신 스스로의 변화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전정 예수님을 주님이요 메시아로 믿고 고백할 수 있으며, 이 믿음이 가져오는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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