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오 11,25)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하느님의 뜻은 지식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슬기와 지혜로도 얻어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아버지의 뜻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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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을 수 있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철부지라고 하셨을까요? 미루어 보건대, 당신 제자들을 지칭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의 단순함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단순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까! 최후 만찬 때 스승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려 했을 때 베드로는 한사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는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불과 몇 분 만에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만큼 단순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단순하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 소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일정한 직업이나 거처도 없이 삼 년이나 스승을 따라다녔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성품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제자들은 스승의 참모습을 깨닫습니다.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제자들처럼 단순함을 지니도록 노력합시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달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빠다킹신부
주님이 사람 뽑는 법
-남상근 신부-
예수님과 우리의 인선 조건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똑똑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족해도 겸손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유능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유능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을 빛내주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이 더디더라도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노라고 감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의 돌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감사하십니다.
무릇 비어 있어야 생명이 자라고, 빈틈없이 빽빽하면 숨쉴 수 없는데,
가득 차서 너무 똑똑하기만 한 나는 세상이 선호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철부지일까요?
아버지를 통하여
-노성호 신부-
예수께서는 하느님아버지를 찾고 간절히 원했던 많은 사람에게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자신들 앞에 계신 하느님을 두고도 저 멀리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했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마음을 열면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을 마주 뵐 수 있을 텐데,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열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봤다. 이곳저곳 펼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찾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찾았던 아버지 얼굴은 없고 그 안에 내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똑같은 아버지의 중학교 때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긴 아버지가 나를 닮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옛 어른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나 보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계속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그 아들이 또다시 태어날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이렇게 아버지는 세상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예수께 전하신 모든 것이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은 경험과 사회 통념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사고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사물 그대로, 본 그대로 마치 해면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야가 언제나 신선하지요.
주님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25)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배웠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부와 권세를 모두 가졌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 자신의 주장을 선뜻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여 가장 바른 것을 압니다. 그리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압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 세상에 펼치실 때 겉으로는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마음이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택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의 오만이 없고 담담히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무궁무진한 주님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나댄 일은 없었는지, 이 세상에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러 오신 주님을 내 세속적인 사고와 아집 안에 품고 주님을 모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를 낳고 그곳에서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어 살았다.
-경규봉 신부-
어느 날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주님의 천사가 가시덤불에서 불꽃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가 그곳에 가까이 가자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신 후, 그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와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어 당신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며 사는 식객이며, 일꾼으로 살았다. 당대 최고의 학문을 연마하고, 화려한 궁궐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며, 이집트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그가 도망자가 되었고, 이드로의 식객이 되어 광야에서 양을 치는 천한 삶을 산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는 끝없는 추락이다. 더구나 그 기간이 약 40년이다(사도 7,30). 40년 동안 그가 겪은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젊음의 치기로 인하여 저지른 단 한 번의 살인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으니, 후회와 통한의 감정이 얼마나 넘쳤겠는가!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삶도 망쳤다고 생각할 때 후회막급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만 참고 때를 기다려 왕이 되었더라면, 그래서 이스라엘을 강제노역에서 해방시켰더라면 그들을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을 터인데, 자신으로 인하여 그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나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자신 안에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그러한 감정들을 삭히며 살아가는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궁궐에서의 호사스러움도 모두 잊었으며, 양을 치는 천한 목자로서 꿈도 야망도 모두 잊어버리고 그럭저럭 살았다. 비록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아내 시뽀라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 40년이란 기간은 그의 젊음이 모두 소진되기에 충분한 기간이며, 인생을 깨닫고 통달할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이므로 그는 늙고 힘도 떨어졌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간의 꾀와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꾀하는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점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 속에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40년이란 기간을 통해 모세로 하여금 하느님을 제외시킨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당신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40년 동안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마치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시기 전에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집안일을 돌보게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그처럼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방법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자신을 삭히며 살았지만, 그 안에는 동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고, 동족을 해방시키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는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시덤불에 붙은 불꽃을 보았고, 그곳 가까이 갔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계신 하느님, 자신의 힘이 되어주시는 하느님,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모세를 철저히 준비시키시어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서 살지 않도록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따르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도록 준비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긴 기간 동안 허송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 기간을 통해 당신 계획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준비시키시고, 때가 이르면 당신의 계획을 따르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거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안달하지 말자. 모세가 40년의 기간을 허송생활 한 것처럼 느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기간이 필요하셨기에 그 기간을 주셨던 것임을 믿자.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대구대교구 배상희(마르첼리노)신부-
말 안 듣는 아이들 야단치면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벌써 머리 좀 굵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네"
일단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 굳어지고 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좀처럼 고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은 흰색 종이에 무슨 색을 칠하든 원래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바탕색이 칠해져 있는 종이는 제 색깔을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좀 안다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뭔가 새로운 진리가 밝혀져도 자기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걸 놓기 아깝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다시 찾아 나간다는 게 싫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집니다.
내 머리 속에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
딱 정해 놓고 내 마음대로 하느님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런 하느님은 나 혼자 만의 하느님에 불과합니다.
진짜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은 흰색종이 같은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 고집에 매여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터져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그려나갑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하느님을 전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으로 내 마음을 채웁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 내 일상에서 잠시 떠나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내 안에 나만의 하느님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뒤돌아 봅시다.
내 지식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나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입니다.오늘 하루 내 생각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부산교구 강호성 바오로 신부-
주일학교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물어보고, 재잘대고, 쫄랑대고.....철부지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놈들도 점점 학교교육에 익숙해지고 사회에 익숙해지면서 어른들처럼 복잡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서 아이들이 그렇게 사회에 익숙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단순하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더불어 이 강론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똑똑하고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예수님의 기도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아마, 하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가끔씩 스승 그리스도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외쳐대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꾀죄죄하고 핏발이 선 눈과 힘줄이 붉어져 나왔을 목! 그렇게 열성을 다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고 알렸건만 그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려던 그 똑똑한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 율사들이 가진 그 똑똑함과 그 오만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눈과 귀를 막아버려서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 아프게 하신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안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예수님을 통하여 현존하여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가지고 누리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동안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니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그 영특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운 것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가진 것도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얻고 너무 많이 받으면 넉넉하고 차고 넘쳐흘러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 보다 앞에 서게 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 할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등 그 기득권들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 어린이는 받들 일 수 있는 맘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해도 자신이 작고 미약하기에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겸손 되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복잡다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그 겸손하고 단순한 맘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되든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께 어떻게 다가서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살아온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똑똑함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얻은 그것들을 가지고 과연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구원과 하늘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볼 때 어떠한 사람을 좋아하시면서, 누구를 위해서 성부께 감사기도를 올리셨는지 우리는 생활 속에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이석희 신부-
우리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 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 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어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 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양승국신부-
<헤헤거리며 다시 아버지께로>
많은 아이들을 접해오면서 제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되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철부지’들이더군요. 철부지들의 특징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틈만 나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엄청 사람 힘들게 만듭니다. 때로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듭니다.
남의 집 초대형 수족관을 깨트려 집 전체를 물바다로 만드는가 하면, 고가의 식기 건조기를 넘어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치 않다보니 형들한테 늘 구박받습니다. 가만있으면 좋을 텐데 또 대들다가 신나게 얻어터져 달려옵니다. 결국 철부지와 살아가기란 엄청 피곤합니다. 늘 손길이 많이 갑니다. 신경도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철부지들은 행복을 줍니다. 기쁨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합니다. 큰 욕심도 없습니다. 이중적이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정도 많습니다. 애정표현도 쉽게 합니다. 늘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찾아옵니다.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찰거머리처럼 꼭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사람 엄청 괴롭힙니다. 그래서 엄청 혼도 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즉시 헤헤거리며 다시 다가옵니다. 결국 철부지로 인해 자식 키우는 재미가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전혀 개념 없는’ ‘정신없이 사는’ ‘막 되먹은’ ‘예의도 뭣도 없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그런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엄마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엄마를 찾아갑니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 까지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둡니다. 엄마만이 자신의 인생 전권을 지닌 절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엄마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바로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고상한척, 유식한 척,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척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버지 없이도 아무런 아쉬움 없이 잘 살아 갈수 있다고 여기는 ‘꽉 찬’ 사람, 잔뜩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게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나는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하니 아버지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능력을 알기에 수시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사람, 그분께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가 지은 죄가 진홍빛같이 붉다 할지라도, 오늘 비록 우리가 큰 죄 속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절대로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울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철부지처럼 언제 그랬냐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주님께로 다시 나아가십시오. 활짝 웃으며 그분의 품으로 안기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런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10,5-7.13-16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복 음 : 마태 11,25-27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하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살던 한 양봉업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필리핀을 가게 된 양봉업자는 이 나라가 여름이 길고 겨울이라고 해도 한국의 초여름 같은 날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한국에서보다 최소한 세 배는 벌겠다고 계산을 한 그는 한국의 벌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예상대로 따뜻한 날씨에 꽃이 피는 기간이 길었으므로 그는 갖가지 종류의 꿀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 해에 많은 이득을 보게 된 그는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대규모로 양봉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에는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을 지낸 그의 벌들이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굳이 애써 꿀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지혜로운 삶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허황되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을 빗대어 나무라는 이야기지요. 말 그대로 잔머리를 굴리는 삶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사목자로 사목을 하다 보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빨리 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있으면 구제불능입니다. 그것처럼 변화되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고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구세주가 언제 어디에서 나실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만 알았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자기들을 비판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신 하느님을 ??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달아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불법으로 백성을 선동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단을 했지요. 많이 안다는 자체가 오히려 무서운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잘 모르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고 믿음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그랬고 병자들이 그랬으며 심지어 회당장과 로마의 백인대장까지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체험을 얻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 과거의 자기 경험과 지식의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지요. 저는 사람이 참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새삼 숙고할 때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며 수십 년을 살아가지요.
그런데 인고의 세월이 흐르고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를 알려면 다시 내가 쌓은 그것을 깨부수는 일부터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깨부수지 않으면 옆에 계신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렇게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쌓아왔는데 그것을 다시 깨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깨우친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이만큼 배웠으니 이제 다 되었다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일일신(日日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미래의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를 해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니 한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신약성경을 열두 번이나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신앙 생활을 해 왔어도 한 번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태반인데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하며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열심히 따라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바보여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은 열망에 어린아이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과 함께 한 지난 5년 동안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언제나 심사숙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신앙 생활이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 <사회복지시설 돕기>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하자는 대로 따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대로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하지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내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집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유를 얻게 되지요.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바탕은 역시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26)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지요. 저 역시 여러분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복된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은 완고한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처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매일 매일 새롭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박상대 신부 -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살 때 이미 소곡(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말하면 어제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선언을 맞은 대상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 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哲學)을 통하여 신(神)의 존재(存在)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神)은 한낱 절대자(絶對者, Absolutum)일뿐, 이 분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육화(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肉化)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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