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7. 9. 05:24

   200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오 9,22)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차마 그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몹쓸 병이 여인을 움츠리게 했던 것이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해서 여인의 꿈은 이루어졌다. 병이 나은 것이다

 

☆☆☆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게 된다는 뜻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면 하늘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옛부터 우리네 여인들은 치성을 다하였습니다. 남편이 먼 길을 떠나면 아내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습니다.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길라치면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 선뜻 나아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몹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불치병을 죄의 결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에 서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어떠한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시며 은총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 금요일, 강화로 본당 사목회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본당 사목회 임원들과 함께 우리 성당의 현안 문제에 대해서 밤늦게까지 토의를 했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고, 특히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밖으로 MT를 나와서 그럴까요? 사목회 임원들이 잠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일찍 잠을 자는 저만 먼저 방에 들어갔지요.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저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기가 너무나 많은 것이었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화도 섬모기가 특히 세지요. 청바지도 뚫는다는 모기여서, 청바지보다도 여린 피부를 가지고 있는 저는 여지없이 모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기에 물린 부위가 너무나 가려워서 저도 모르게 잠결에 물린 부위를 손으로 박박 긁었나 봅니다. 아침에 보니 그 부위가 통통 부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또 가려운 부위가 하나 있더군요. 바로 등이었습니다. 가려워서 손을 등 뒤로 가지고 가 보았지만, 손이 닿지 않아서 도저히 긁을 수가 없네요. 너무나 가려웠습니다. 하지만 손이 닿지 않으니 어떻게 했겠어요? 그냥 참을 수밖에 없지요.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저의 몸을 보고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모기에게 물린 부위가 가려워서 손으로 긁었던 부위는 통통 부어 있으면서 지금도 몹시 가려운데 반해서, 손이 닿지 않아서 긁을 수 없었던 부위는 붓지 않은 것은 물론 지금은 전혀 가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모기에게 물리면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정 못 참겠으면 벌레 물렸을 때 바르는 약을 바르면서 꾹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어렵고 힘든 시련과 고통에 대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를 문득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속적인 것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마치 모기에게 물린 부위를 긁어서 통통 붓는 것처럼, 나의 고통과 시련은 더욱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알면서도 잘 안 되지요?

오늘 복음에서 한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회당장은 딸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보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혈루증을 앓는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믿음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자신의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도록 해주실 분은 주님뿐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내 자신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혹시 세상의 원칙과 법칙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을 통해 우리들은 주님께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까지도 주님께 맡기세요.

 빠다킹신부

 

 

   오직 믿음만이     

-남상근 신부-


 믿음입니다. 이미 죽은 딸이라도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주시기만 하면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회당장의 마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열두 해 동안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건만 도무지 나을 기미가
없어 보이는 지독한 병일지라도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질 수 있다면
다시 나을 수 있다는 한 여인의 마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다 끝나버렸을지라도,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아직 무엇인가 하실 것이 있다는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주위에 왜 기적이 없을까요?
이천 년 전 예수님 안에서 보여지던 그 많은 기적들이 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을까요? 이제는 예수님의 능력이 없으신 것일까요?
이제는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기적이 없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기적을 볼 수 있을 만한 믿음의 사람들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회당장과 여인의 믿음을 생각해봅니다.

 

 

 여인의 믿음

-김순중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오랜 병마에 시달려 온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인의 생각대로 되었다. 바로 그 순간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는다. “아니, 이렇게 많은 군중이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다고 하시나요?”
이 여인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관상하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이 여인의 마음도 마구 뛰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 또한 감 동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마로 지치고 가난해진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깊은 확신이 들었다. ‘저 어른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으리라.’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어떤 힘이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했구나.”


 

 “딸아, 용기를 내어라.”

-양승국신부-


<주님을 위한 침대>


저희 수도회 선배회원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수사님이 한분 계시는데, 최근에 복자품에 오르신 자티(Artemide Zatti) 수사님이십니다.


한번은 ‘개그맨 저리가라’인 한 후배 형제가 이분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소개를 하더군요.


“자티 수사님이 누구냐? 밤에 자다가도 티어나간(튀어나간) 수사님입니다. 긴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심야건 새벽녘이건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가신 분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한 병원의 직원으로, 나중에는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한 평생 가장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닌 분이 자티 수사님입니다.


한번은 한 위중한 환자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병실은 이미 환자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담당 간호사는 방법이 없는데 어쩌겠냐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습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자티 수사님은 그 환자를 자신의 침실로 모셨습니다. 자신이 쓰던 침대 위에 환자를 눕혔습니다.


일과가 끝난 늦은 밤, 침실로 돌아온 자티 수사님은 침대 밑 마룻바닥에 깔개 하나를 펴더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얼굴로 드러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침대에 누운 환자는 밤새 큰 소리로 코를 골았고, 자티 수사님은 온몸이 솜처럼 피곤했지만 잠시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부석부석하고 초췌한 얼굴로 병원에 출근한 자티 수사님을 향해 직원들이 잔소리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수사님, 아무리 봉사도 좋고, 희생도 좋지만, 그게 뭡니까? 수사님 몸이 수사님 것입니까? 우리 전부의 것이 아닙니까? 제발 수사님 몸도 좀 돌봐가며 일하세요.”


그러나 자티 수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환자의 코고는 소리는 제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코를 골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가 살아있다는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그가 코를 골고 있던 밤 시간 내내 저는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 수녀님이 한 환자의 침대보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 자티 수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 주님께서 저 침대에 누우실 것입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한 소년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남루해 더 이상 걸칠 수가 없게 되자 자티 수사님은 병원 자재과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 열 살 정도 된 소년 예수님을 위한 적당한 옷이 없을까요?”


자티 수사님의 생애를 묵상할 때 마다 치유자 예수님의 분신을 뵙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가운데 특징적인 모습 하나가 치유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련하고 비참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병명은 혈루증이었습니다. 혈루증이란 자궁으로부터의 출혈이 그치지 않는 병입니다.


이 여인의 경우는 열두 해 동안 고생했다고 하니, 병은 이미 갈 데 까지 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여인의 혈루증은 자궁암으로 까지 진전되어 거의 절망적인 상태까지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 여기 저기 다 다녀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치료되기는커녕 재산만 다 탕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혈루병 환자는 회당에서 거행되던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는가 하면 보통 사람들이 앉는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인생이었습니다. 병이 길어지다 보니 심신이 피폐해졌고, 몰골도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영적생활도 힘겹게 되었습니다. 오랜 혈루병으로 인해 이웃들과의 관계도 거의 단절되었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여인은 생의 가장 막다른 골목, 삶의 최저점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막다른 골목을 만납니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단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그 순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막다른 골목, 최저점은 인생이 끝나는 절대로 지점이 아니라 완만하게 그려질 상승곡선의 첫 출발점입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지나간다 할지라도 낙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치유 받은 여인처럼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자비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주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분, 주님은 결코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 주님은 부르짖는 사람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머지않아, 오늘 아니라면 내일,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반드시 손내밀어주실 것입니다. 충만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독서> :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한 도망자 야곱

-경규봉 신부-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채자, 형 에사오는 대단히 분개하여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었다.

이에 이사악과 리브가는 야곱을 바딴 아람에 사는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 보낸다. 야곱은 형으로부터 피신하고, 친족 중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던 중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하늘까지 닿는 층계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함께 계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백성들의 간구를 하느님께 올려가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사람들에게 내려주는 천사들의 역할을 표현한 것이다(시편 34:7; 91,11; 마태 18,10; 히브 1,14).

그리고 주님께서 그 옆에 나타나시어 일찍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13:15), 이삭에게(26:3)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그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주실 것이며, 그의 후손이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 널리 퍼질 것을 약속하셨다.

또한 도망치는 그와 함께 계시며 지켜주실 것이며, 다시 데려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그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며, 그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신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음을 깨닫고 두려워하여 석상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은 다음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평생 하느님으로 모시고 섬기겠으며, 자신이 세운 석상을 하느님의 집으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훗날 야곱은 고향에 돌아간 후 그 약속을 지켰다(35,7).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긴 했지만 형을 피해 도망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집안에서 지내며 어머니의 품에서 고이 자란 야곱으로서 집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먼 길을 떠나는 것은 그에게 대단히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택하신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에게 내리신 축복을 거두어가지 않으신다. 야곱이 바딴 아람으로 가는 것이 비록 도피 행각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후손을 보존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하여 배려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꿈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힘과 용기를 주신다.

꿈은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한 수단이었다(민수 12,6; 1사무 28,6; 1열왕 3,5; 마태 2,22). 하느님께서는 꿈에 친히 나타나시기도 하고(20,3-7; 28,10-19), 때로는 상징적인 물건이나 인물, 행위를 통해 계시하기도 하셨다(40장; 다니 2,3). 하느님께서는 땅과 후손, 그 후손을 통한 복을 그에게 약속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계시며 보호하시고 데려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도망자의 외로운 길을 걷다가 지쳐 낯선 곳에서 잠에 떨어진 야곱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인가! 야곱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두려움을 이겨내며 기쁘게 살아간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아버지이시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잔꾀를 부릴지라도,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지을지라도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함께 계시는 아버지이시다. 멀리서 돌아오는 잃었던 아들을 먼저 보고, 그를 측은히 여기며 먼저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루가 15,20)이시다.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구원사업을 행하시는 아버지이시다(필립 1,6).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며, 이끌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이 세상을 기쁘고도 복되게 살아가자............◆


 

 
사랑과 용서로 치유된 여인들

- 박재구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이 죽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는 간청과 12년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많은 기적 사화가 나오는데,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로 치유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치유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모습을 잠시 묵상해 볼까 합니다.

먼저 회당장입니다. 그 당시 회당장이라고 하면 유대교의 정통주의의 우두머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라'고 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경멸하고 미워하며,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딸이 병들어 있을 때 모르긴 해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병을 고쳐 보려고 약이란 약은 다 써보고 치료라는 치료는 다 받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헛수고였습니다. 더 이상 손써볼 방법이 없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이제 남은 방법은 한가지 뿐 이었습니다. 회당장 자기 자신이 경멸하고 미워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던 예수님을 찾아가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부끄러운 치욕의 순간이었겠지만 자기 딸을 살리고 싶은 사랑의 마음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낸 것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한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동기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온 회당장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내치시지 않으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두 번째로 하혈병에 걸려 고생하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도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해서 멀리하는 자신의 병을 고쳐 보려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쏟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보면서 즉시 나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회당장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증오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문으로 듣던 그분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어하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때는 회당장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다가도 급하면 예수님을 찾을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섣불리 그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마지막 희망을 당신에게 가지고 온다면 잘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옛 속담에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 그 분은 지금 우리 옆에 와 계십니다. 그 분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과거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가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더 이상 체면치레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보이고 또 하나의 치유의 기적을 몸소 느끼며 그분과 함께 새롭게 태어납시다. 아멘............◆


 

 하느님께 향함

-강신숙 수녀(성가소비녀회) -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믿음이란 안간힘을 다해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어떤 성과물(사업·학업·기술 획득·과학 등등)처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더이상 손쓸 수 없는 곳, 모든 가능한 시도가 고갈되고 바닥난 상황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 같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자비가 이루어진다는 건 어찌 보면 믿음이란 하느님 현존과의 양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비스럽게도 믿음도 구원적 만남도 늘 거기서 시작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간절히 그리고 전념하여 ‘예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두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을 상상해 봅니다. 두 사람은 종교적으로나 정치 사회적으로나 양극점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별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어쩌면 이 지상의 모든 다양한 사람들이 다 치유(구원)의 은총을 받았다는 상징으로도 읽혀집니다. 두 사람의 처지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이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섬, 하느님께 향함’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지닌 ‘회개’의 모습이고, 두 사람의 믿음은 모두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내 믿음이 빈곤했던 이유도 경건한 기도나 전례 참석, 성실한 영적 독서의 부족이라기보다 회당장의 집 앞에서 곡을 하던 사람들처럼 합리적인 지성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성취에 대한 열정적 신념 때문에 하느님을 향해 셈 바치는 가짜 신심에서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 믿음의 위기는 하느님을 열렬히 찾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전히 내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숨은 오만 때문입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마태 9,18-26)

     -유광수 신부-


 "그 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이르셨다. 바로 그 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씀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혈루증(하혈)을 앓고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인데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오늘 날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복음에서 열두 이라는 숫자는 충만한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일정한 기간만이 아니라 평생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여자의 일생은 혈루증으로 시작해서 혈루증으로 인생을 끝내야하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럼 도대체 혈루증이란 무슨 병인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사의 손에 숱한 고생을 하며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 25-26)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안해 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혈루증이란 어떤 병인가? 복음은 이 혈루증이라는 병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혈루증이란 피가 밖으로 흘러 나오는 병이다.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생명인 피가 밖으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올 피가 없으면 죽는다. 피를 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따라서 혈루증이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병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말은 평생 죽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하혈한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 누구도 이 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고 또 그 누구도 이 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기 위해 좋은 음식, 좋은 약, 좋은 의사, 좋은 공기, 좋은 운동 등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해보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상황이다. 나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혈하는 피를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능한 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르코 복음을 보면 이 여자가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여자는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만졌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 병이 낳겠지."하지 않고 "구원을 받겠지"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히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치유시켜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병에 걸려있지만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는 것이 곧 구원이다. 따라서 구원은 죽음에서 건져내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는 것이다. 구원은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행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치유시켜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살려내기 위해 오신 것이다. 즉 죽음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주러 오신 것이다.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요, 예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생명수를 마실 수 있는 파이프를 댄 것이다. 이 여자는 파이프를 통해 생명수를 마심으로써 살아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돌아보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을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위이다. 믿음이란 예수님 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믿음이란 죽어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그분께 자신의 병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여러 가지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 맡기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질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지 못한다.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죄 사함을 받는 고해 성사를 보면서도 전혀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만지는 믿음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생활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수동적이요, 형식적이다. 가라니까 가고 오라니까 오고 참례하라니까 참례한다. 그렇지만 아무 느낌도 없고 감격도 없다.

 

예수님을 만지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나를 구원하는 믿음일까?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추상적인 믿음에서 만지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한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만져져야 하는 믿음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내 맡길 수 있고 죽음에서 나를 살릴 수 있다. 

 
 

 

 †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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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의 5,21-43에 보도된 복합기적사화를 옮겨 쓰면서 흥미거리 일화는 모두 삭제하고 그리스도론적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습니다. 즉, 총 23절을 단 9절로 줄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내용을 간단히 줄이는 데는 요약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수정하는 방법을 쓰는데, 물론 무턱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르게됩니다.

오늘 복음을 마르코복음과 비교해보면, 마태오는 마르코가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5,22)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냥 한 사람의 회당장으로, 회당장의 딸이 다 죽게되었다(5,23)는 부분을 "방금 죽었다"고 바꾸었고, 하혈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5,29)는 대목을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난 뒤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대뜸 여인의 병이 나았다고 바꾸는 등 여러 부분을 자신의 편집의도에 맞게 축소 수정시켰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사가는 기적사화의 주체인 예수님과 대상인물을 동시에 부각시키면서 기적을 유발시키는 "믿음"을 촉매제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기적의 주체인 예수님만 부각시키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기적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움직여 주는 동기를 대상인물과 관계없이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회당장의 경우에는, 아이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는 "간청"(기도)이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으며,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는 "생각"(믿음)이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코는 회당장의 간청과 여인의 생각 자체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나, 마태오는 간청과 생각 자체가 기적을 유발하는 중요한 동기는 되지만 기적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오는 결국 기도나 믿음 자체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더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의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 기도와 믿음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 하고 말씀을 내리시자 여인은 즉시 치유되었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24절) 하신 예수께서 소녀를 잡아 깨우시니 소녀는 다시 삶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행위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저 강렬한 기도와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와 믿음의 방향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회당장 야이로는 가파르나움의 회당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마르 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마르 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죽은 딸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