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7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07. 7. 3. 09:01

 2007년 7월 7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17)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the wine spills out,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새 포도주는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고 했다. 새 포도주는 강력한 가스를 발생하기에 낡은 부대로는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새롭다. 그분의 가르침을 낡은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

 

 오늘 제1독서에서는 동생 야곱이 형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어머니 레베카는 야곱을 도와 결정적인 약점을 보완해 줍니다. 목과 손목에 염소 가죽을 둘러 털이 많았던 에사우의 몸으로 위장시킨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야곱의 축복을 받아 주십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맏아들인 에사우가 이사악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작은아들이었던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가로챈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적 판단 기준으로만 평가하지 말라는 암시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단식과 혼인 잔치도 서로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슬퍼하는 것은 헌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어 꿰매는 것만큼 어색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자 준비하는 회개의 표현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관계가 새로워졌으니 단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식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중요하건만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혼인 잔치의 신랑이십니다. 혼인 잔치와 단식이 어울리지 않듯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단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14­-15절)과 두 가지 비유 말씀(16-­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중심에 두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는 분이심을 알려준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을 경축하는 기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새 천 조각’, ‘새 포도주’, ‘헌 옷, 헌 가죽부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혁신적이고 위력적이므로 이에 맞갖은 ‘회개’ 역시 새롭고 힘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생활 습성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 하겠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무마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도전장을 한겨레신문(2006년 5월 6일)에서 읽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는데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왜 이렇게 속이 후련할까 생각해 보니 이란 대통령의 앞뒤 안 가리는 ‘모험심’이 부러웠던 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도 이런 모험심과 단순함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삶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주님의 초대에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는가?

-이정희 수녀(성심수녀회)-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천년 전,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래서 수없는 제사와 단식을 반복하며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바라보며 하느님을 믿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도 달라보였습니다.
 
같은 하느님이시나 예수님의 하느님은 말에만 머물던 사랑이 눈 앞에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넓게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던 부족해보이기만 하는 제자들에게도 자유로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쁜 삶에서 삶을 멈추고 단식으로 하느님께 정성을 드릴 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삶을 계속하며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쉬지 않는 이들, 특히 자격없는 듯 보이는 단식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과연 저 사람들이 하느님께 마음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과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으로 화살을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새술은 새부대에로 통하는 유명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 제자들은 그 때가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십니다.
 
단식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깊은 표현이고 그 단식을 통해 생긴 정성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을 제자들과 함께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들 속에 단식에 깃들여 있는 의미를 보여주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결론은 둘 다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한결같이 부족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하느님의 사랑의 가르침은 하느님과 이웃 모두에 대한 한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도 손상됨 없이 지켜져야 하고 그래야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이천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 곧 성령 안에 사는 교회의 모습은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고스란히 지켜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어져 내려온 교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정성을 다하는 묵은 술의 전통도 지켜왔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사랑의 실천이라는 새 술의 전통 또한 지켜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은 둘 다 훌륭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보다는 우리의 믿음에 부족했던 부분을 신랑이신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채워주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묵은 술과 새 술 모두를 잘 보존하십시오.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보물입니다.

 -정호신부-


 


 

 “혼인 잔치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주신 휴가>


얼마 전 혼배성사를 집전하면서 정말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간소하고 소박했습니다. 양가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증인들, 모두 합해봐야 스무 명도 채 안 되었습니다. 멋들어진 결혼식을 준비할 형편이 안 되서 그렇게 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차분한 가운데, 보다 결혼식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답니다.


적어도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알려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그러더군요. 결혼식 끝난 후에 사진과 함께 결혼했노라고, 기도해달라는 내용이 적힌 안내장을 보낼 것이라고.


또 다른 결혼식에 갔었는데, 축의금을 받지 않더군요. 한 편에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죽어도 내야겠다고 떼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죽어도 받지 않더군요. 대신 결혼식이 끝난 후 인도된 곳은 뷔페식당이 아니라 국물 맛이 ‘죽이는’ 잔치국수 한 그릇만 차려진 교실이었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 한 목소리로 맛있다고, 정말 좋았다고, 말들을 했습니다.


결혼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두 당사자의 마음, 결국 그들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결혼식 너무 복잡해졌더군요. 결혼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의 부담(과중한 혼수 준비)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허리가 휘청할 정도의, 격에 맞지 않는 지나친 결혼식 참으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사자나 가족, 하객들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결혼 문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인데, 뭔가 진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결혼식에 이어지는 혼인잔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잘 차려진 5만 원 짜리 뷔페일까요? 수많은 하객들일까요? 좋은 주례사일까요?


보다 중요한 것이 분위기이겠지요. 새롭게 출발하는 두 사람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축하해주는 ‘축제 분위기’일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그 가시적인 표현으로 술잔도 기울이고 음식도 함께 나누는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일 것입니다.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축하연에서 큰 소리를 지른다면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불편한 일이 있다고 화를 낸다든지 갖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마치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차려진 음식이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다고 잔뜩 인상 구기고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면 그것도 할 짓이 아닐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손님으로 왔다면 다른 것 없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할 일입니다. 경사에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차려진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길 일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또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흔적 하나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혼인관계로 자주 묘사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인간 세상 도래는 하느님과 인간이 혼인한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연인이자 신부(新婦)인 우리 각자와 혼인한 것이 메시아의 강생인 것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부족하고 덜 떨어진 인간과 한 몸 한 마음이 되셨다는 것, 생각만 해도 과분하고 송구스럽고 기쁘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꿈같이 행복해서 펄쩍 펄쩍 뛸 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은총을 베푸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소풍을 나온 천사들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꿀맛 같은 첫 휴가를 나온 주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우울하게 지낸다거나, 시무룩하게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너무나 과분한 선물로 주어진 지상이 축복의 시간, 좋아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이토록 과분한 은총과 축복을 주님과 함께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 하느님의 연인이 됨, 하느님의 신부(新婦)가 됨을 일생일대의 큰 기쁨으로 여기고, 평생토록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승국신부-

 

 


사랑은 같아지는 것

+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그대에게

창밖에 장대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기껏 사나흘 장맛비가 내렸는데도 벌써 지겹습니다.
눅눅한 습기가 몸과 마음까지도 눅눅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로마12,15-16)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같아지기 위해서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면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는 계명은 ‘너’와 ‘나’의 구별을 없애고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를 ‘나’라고 생각하면 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므로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므로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너의 기쁨을 시기(猜忌)하고 너의 고통을 고소해하며 즐긴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세계가 지옥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낡은 옷을 더 못쓰게 만듭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로 다가가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대를 터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낡은 옷에 낡은 천 조각이 어울리고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가 어울립니다.
그러나 같아져서 동체일신(同體一身)이 되려면 스스로 죽어야 합니다.
나를 고집하고 나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단식’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차례 월요일 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디다케 8.1).
식사를 멀리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도 자주 단 식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평소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단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시하는 신심행위입니다. 유대교에서도 단식은 초기부터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 40일 동안 단식했고(출애 34,28),
예언자 엘 리야도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였습니다(1열왕 19,8).
예수님도 세례 받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셨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마스커스에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할 때 사흘 동안을 단식했습니다(사도 9,9).
단식은 유대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자주 ‘단식’중에 하느님 께 ‘기도’하였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나옵니다(참조: 출애굽기 34,28;
이사야 58,3-7; 다니엘 9,3; 에스델 4,1-3; 토비트 12,8; 바룩 1,5 등등).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보면, 자선, 기도, 단식이 가장 중요한 유대인의 신심행위로 요약됩니다.
예수님 은 그 신심행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 는 오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은 다 음"(6,6),
단식할 때는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6,18) 하라는 말씀입니 다.
신심행위가 자기 과시용으로 전락하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남보 다 조금 나은 일을 하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 과시합니다.
신심행위도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경건하게 보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아가 정치적 독립을 잃은 다음부터 유대 민족을 실제 로 통치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이 그 사회의 실세가 되면서, 그들이 사람들에 게 강요한 것은 종교 계명이었습니다.
종교 계명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 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계명을 잘 지킨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수단으로 행해졌던 기도와 단식이,
이제는 자기 과 시와 형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이 형식에 젖어버린 유대인들을 향해 오 늘 새로운 의미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 야 한다(17절).”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 다.
늘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었던 처음을 생각하고, 형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서 살아가야 함
뜻하기도 합니다.
처음 내가 간직했던 하느님과 나와의 만 남을 생각하고,
단식과 기도로 더 깊은 만남의 경지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형식과 위선에 빠져 버렸다면, 지금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버린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건하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오늘의 우리 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용기, 처음 내가 시작했던 원천으로 돌아가는 일
사형 선고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혹시 지금 우리 자신에게서
유대인들처럼 위선과 자기 과시, 형식에 치우진 것이 있다면, 벗어버려야 합니다.
새것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 님께서 주시는 참된 정의와 평화,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부대만이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 [부산교구청 성소국 주영 돈 토마스 신부] ◆

 

 


 

 † 단식이란 회개위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 †  

지난 복음에서 침상의 중병병자와 세리 마태오와 관련한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이,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죄인까지도 불러 제자로 삼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단식'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적 수행이나 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인데,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는데,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는데,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입니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며,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합니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새 옷 - 낡은 옷, 새 포도주 - 묵은 포도주, 새 부대 -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말하는데,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 새 술은 새 부대에...우리의 가치관 변화를 요구 †

우리는 지난번 묵상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주제를 크게 3갸로 구분하여 학습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기억하고 계시지요.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의 복음에서 죄인에게 자선을 베푸시는 주님의 묵상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의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낫을 정도의 가벼운 환자가 아니고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중한 병자를 죄사함으로 치료하시는 주님, 그리고 평생 죄인의 올가미를 써야 하는 세리 등와 같은 중한 죄인 취급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자선....을 통해서 주님은 당시 율법사회의 자선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주님의 행위는 폐기하는 파괴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창조적 파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든지 그렇듯이 기존의 수구세력, 즉 보수집단들은 그런 창조적 개혁에 대해 반기를 들고 거친 투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 수구세력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럽학자들이 계속 주님 곁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한판의 격론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시하며 지키는 단식문제입니다.

바라시아파 사람들은 단식의 프로선수들입니다. 그들은 회개와 속죄의 표시로서 단식을 최소한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은 했습니다. 그것도 '나 이렇게 단식하오'...라는 외관적 모습을 처참하고 슬프게 보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속 마음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그런 단식자를 매우 성스러운 사람으로 특별히 봐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서 존경을 보이기도 했답니다. 외식주의자들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모른체.........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신데도 예수님만은 역시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외석적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면서 꾸짖습니다. 왜요?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은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이웃을 위한 희생, 그리고 나눔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지 않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진정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희생과 나눔이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낡아버린 가죽 부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낡아빠진 가죽 부대에 새롭게 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새 가죽 부대를 장만해서 매 순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때,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빨리 새옷으로 갈아 입읍시다. 주님께서 미워하기 전에....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형식적인 단식으로 하느님 앞에 우리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면 안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엄격한 종교 전통에만 매달린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참된 회개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오늘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잔치집에서 단식이라는 행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아파 사람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엄격한 종교�옹에 매달려 단식을 하지 않는다고 닥달을 합니다. 그들은 사회가 프루쿠스테스 침대의 논리와 같이 똑같은 붕어빵 사회를 만들려는 형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형식보다는 마음을 중시하는 아메바성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아메바는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유연하게 변형시켜 이물질들을 전부 흡수합니다. 그러나 그 아메바가 모든 것을 다 수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베바가 가지는 고유한 세포막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선(경계지대, 또는 안전지대)라고 말합니다. 그 안전지대를 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치 단식 자체를 금지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주님도, 초대 교회도 금식을 선하게 사용했습니다. 주님이 금하신 것은 메마른 형식주의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신자들의 삶을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은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새 포도주란,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와 기쁨이며, 새 부대란 주님을 믿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낡은 부대란, 바라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과거 전통에 얽매인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메마른 형식주의적인 삶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낡은 부대'를 버리고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담을만한 '새 부대'입니까? 믿음이 있으면서도 메마른 율법주의에 매여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새부대의 새삶을 위한 방법을 묵상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첫째로, 낡은 부대를 버리라

예수님께서는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9:16-1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천년기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갈 우리들에게 '새 천조각의 비유'를 통해서 잘못된 과거의 것을 청산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새 천조각은 한번도 세탁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말리면 줄어듭니다. 따라서 이것을 가져다가 올이 낡은 옷에다 대고 함께 기을 경우, 새로운 천은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트더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깁밤 옆구리 터지듯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옷, 즉 낡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습관, 관습, 생활 등을 다 청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신사고'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낸 후에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 액체를 담아 놓는데 사용된 용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가죽부대가 낡아 튼튼 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는 생겨나는 발효력을 생성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지고 맙니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 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부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잘못된 옛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3,39)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일삼았던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적인 행동들이 공동체의 심리적 공황을 야기시겼습니다. 또한 우리는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것인가만을 기대했으며,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또 많은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복지부동의 자세로 자기의 편익만을 추구했으며, 소수의 부유층과 권력가들이 대부분의 국가 외화를 제멋대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기업인들과 결탁하여 엄청난 액수의 정치 자금을 만드는 일에 관여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소수를 제외한 많은 신자들이 아무런 봉사도 없이 그저 교회의 마당만 밝고 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과감히 청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잘못된 습관과 사고가 담긴 낡은 부대를 멀리 던져 버려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새부대를 준비하라.

낡은 부대를 과감하게 단져 버렸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새 부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 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 부대는 우리 마음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새로운 사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라는 자아로 채워넣을 때, 우리는 많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요즈음 군사정부시절의 비사를 드라마화한 것을 보니, '나 중심의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지 잘 그려져 있더군요...마태 15,19에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드라마의 주역들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사랑하게 되고, 내 것만 주장하는 사람이 남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인본주의의 사람이 신본주의의 사람으로, 내 사업만 생각하고 자신의 권력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소비자를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어 예배 중심의 삶, 말씀 중심의 삶,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습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의 습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새로운 결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나누어주는 습관 등을 점차 길러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습관을 길러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잠언 3,3).

셋째로, 새 포도주를 가득 채우라 우리가 새 부대를 준비했다면 이제 그것을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돈, 명예, 향락 등 마음 속의 거짓된 우상을 과감히 제거하여 버리고, 성령의 총만함과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마음의 그릇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에제 36,25~27). 성령 안에서 최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유를 나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우리 모두가 잘 살게 되는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복음에 나오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동족의 세금을 강탈하여 로마에 바쳤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마태오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낡은 것을 과감하게 청산하여 새로은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와 개혁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잘못된 삶의 습성, 민족의 잘못된 근성,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잘못된 관행, 기업인들의 부정직한 행동, 신자들의 소극적인 신앙자세, 나만 아는 이기심 등... 이 모든 것을 개혁하고 청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만들어서 거기서 새 포도주를 가득 채우면,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경건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촉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