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7. 3. 08:54

 2007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마태 8,28-34 )


“What have you to do with us, Son of God?
Have you come here to torment us

before the appointed time?”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시어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신다. 그러자 마귀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호수에 빠져 죽고 만다. 돼지와 마귀는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방인 역시 친교를 맺어서는 안 될 부정한 사람들이다. 유다인들은 정통성에서 벗어나면 하찮은 것으로 여겨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유다인들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천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습니다. 유다인들 가운데에는 돼지고기 먹지 않는 규정을 어겨 순교한 이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율법에 대한 복종심이 그 정답입니다.
그러기에 마귀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 죽어도 결코 애석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기록된 복음입니다. 부정한 돼지 떼 속으로 부정한 마귀들이 들어갔으니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님께 떠나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머무르시면 더 많은 돼지들이 죽을까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전체에는 이방인을 낮추어 보는 시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방인보다 이스라엘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언제든지 예수님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마귀들의 종말

-김순중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어떤 힘센 사람이 내가 가는 길을 날마다 막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에서처럼 ‘그들이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라고 할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사나워지는 경험을 해보았는가, 아니면 어떤 행위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 몸에서 돌출되는 경험이 있었는가?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한 근본적인 악의 체험이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안에 선이 자리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0)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나운 자와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한테서 오신 거룩하신 분, 한 분뿐이시다. 그 사나운 자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가라.” 하시자 그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악을 추방하시는 예수님을 반기기보다는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한다. 그들은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당히 악과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정희 수녀(성심수녀회)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마귀 들린 사람과 마주치는데, 그 당시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볼 때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경우도 없었거니와 이방인들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시고 마귀가 들려 사나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유다인들이 보기에 가다라는 이방인 지역이라 불결한 곳이고 무덤 역시 불결한 곳이다. 거기다 마귀가 들린 그 사람은 너무나 사나워 어느 누구도 그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지난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교우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나서 생활의 기쁨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게 무슨 말인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분은 “예수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러 오셨다는데, 나는 세례를 받고 나서 생활에 걸림돌이 더 많아졌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마음 편히 살았는데 예수님을 따르려니 생활 속에서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분은 돼지떼 속에 묻혀버리고 싶은 심정이 드는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음 안에 ‘사나운 것들’, ‘마귀’, ‘돼지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삶을 더욱 책임있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에 비친 내 얼굴

-양승국신부-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물에 비친 내 얼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마귀 들린 사람들 한 무리를 만나십니다. 마귀, 악령, 사탄!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존재들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의 몰골이 어떤지 상상이 가십니까?

언젠가 아마도 악령에 들리지 않았겠나 추측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정말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서 머리칼이 저절로 일어섰습니다.

악령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느님을 모욕하고 거스르는 영적인 존재이겠지요.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 인간을 파괴시키고 타락시키는 존재일 것입니다.

인간을 위험이나 악에서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성인들이나 천사들과 대립되는 개념이겠습니다. 결국 한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존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악의 세력이 악령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악령 들린 사람들의 처지는 참으로 측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밤낮으로 지독한 악령에 시달리다보니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겠지요.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쉴새없이 악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다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은 핏빛으로 충혈 되었겠지요.

악령으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던 이 사람들 역시 예수님은 당신 자비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가련한 인간의 처절한 아픔에 진심으로 가슴아파하시며 당신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악령에 걸린 탓에 인간 사회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 물에 비친 자신들의 몰골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무덤 근처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슬픔이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건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악령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오늘 내게 있어 악령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적어도 제게 있어서 가장 센 악령은 "활동주의"입니다. 자주 저는 이런 유혹에 빠집니다.

"열심히 사는 게 기도지", "당장 내 앞에 던져진 이 시급한 일들, 그걸 제쳐놓고 어떻게 여유부리면서 묵상에만 전념할 수 있겠어?", "우리 같이 바쁜 사람들에게 때로 기도는 사치스러운 일이지", "나중에 연례피정 가서 집중적으로 기도해야지", "내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 빼먹지 않고 꼬박 꼬박 바쳐야지" 등등.

제게 있어 가장 대적하기 힘든 이 힘센 악령들과 잘 맞서기 위해 한 가지 결심을 해봅니다.

내일부터는 적어도 가장 기본적인 기도만큼은 시간 맞춰서 빼먹지 않고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세 번, 사목 하는 가운데서도 그 날 복음을 되새겨서 묵상하고, 가능하면 삶 가운데 열매맺도록 노력하기를 결심합니다.

 

마귀와 돼지떼의 죽음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은 마귀와 돼지떼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태초부터 마귀가 있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이미 죽은 사악한 사람들의 악령이 악한 것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드러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죄를 진 천사들에 이야기와 함께 악한 자들의 악령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귀들은 공기 중에 가득차 있으며, 무덤과 같이 음침한 곳에서 살며, 흐린 물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다고 했고, 사람들에게 붙어서 병을 주고 괴롭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막에서 살면서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가 들린다고 유대인들은 당시에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어제 복음에 이어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건너 오셨습니다. 거기에서 무덤 가운데 사는 포악한 마귀들린 사람 둘과 만나십니다. 마귀 들린 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아직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오셨습니까? .. 합니다.  그 "때"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야훼께서 약속해 주신 "메시아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마귀들은 정복당하고, 전멸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었기 때문에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회피하는 무덤에 사는 마귀들린 이들에게도 가까이 다가 가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쫓아내시려거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돼지떼는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리 주민들은 예수께 달려와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즉, 마귀들려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험악한 마귀의 행패 속에 갇혀 있는 그 두 사람의 해방을 위하여서도 예수님은 마음을 쓰시고 보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시지만, 동네 사람들은 물질적인 손해를 봤다해서, 타인의 구원에 따른 자신들의 재산상의 손해가 두려워, 예수께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는 사실에 문제성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동네 주민들은 자기들의 돼지떼가 죽어 재산의 손해를 봤다는 것만을 문제 삼고, 마귀들렸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기쁜 일이 이룩되었는가를 생각 못하는 주민들!  타인의 구령에 자기 재산에 손해가 된다해서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죄악성임을 오늘 복음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 할 때, 그들의 태도에서 나타난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예수께 "떠나 달라!" ... 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손해를 보기 싫어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달라!"고 한 오늘 복음의 주민들처럼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멘.

 

 

차라리 예수를 볼모로 잡아라.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거친 풍랑을 잠재우자 배는 어느덧 호수 건너편에 다다랐다. 풍랑을 잠재운 기적은 마태오복음의 이적사화 집성문(마태 8-9장) 가운데 네 번째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먼저 배에서 내리셨을 것이고, 제자들도 따라 내렸을 것인데,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배경에 머무르면서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스승의 구마기적사화를 지켜볼 것이다. 이는 다섯 번째 기적에 해당한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마귀 들린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다고 하지만(마르 6,13)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도는 두 편에 달한다. 이는 “마귀와 돼지 떼”에 관한 구마사화(마르 5,1-20; 마태 8,28-34; 루가 8,26-39)와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에 관한 구마사화(마르 9,14-29; 마태 17,14-20; 루가 9,37-43)이다. 원전(原典)에 가까운 마르코복음은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의 성질, 습관, 태도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귀의 고백, 예수님과의 대화, 구마 수행방법, 구마결과 및 반응에 관한 서술을 잊지 않고 있으며, 대략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마태오와 루가는 상당부분 수정을 가하였고, 특히 마태오는 내용도 대폭 축소시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을 인용한 부분으로서, 마르코의 “구마와 마귀에 의해 익사한 돼지 떼” 대목(마르 5,1-20)을 대폭 축소시켜 보도하고 있으며, 내용도 많은 부분 변질시켰다. 마태오에 의하면 배가 도달한 호수 건너편은 “가다라” 지방이었다.(28절) 마르코는 “게라사” 지방이라고 하는데,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동남쪽으로 무려 55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귀 들린 돼지들이 달리기에 너무 먼 곳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호수에서 약 10Km 떨어진 “가다라”와 그 주변, 즉 가다라 지방이라고 고쳤다. 마르코에 의하면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곧바로 무덤 사이에서 나온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를 만났다고 하는 반면, 마태오는 복수형인 “마귀 들린 사람들”로 고쳤다. 이는 예수께서 대적하는 상대가 쉬운 상대가 아님을 암시하면서, 역으로 예수님의 권능이 우세함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들의 성질은 “사납다”는 말로 아주 짧게 묘사된다. 마귀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가진다. 쫓겨난 마귀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물 속에 빠져 죽는 사건(32절)이 가다라 마을에 알려지자(33절) 온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떠나 달라고 청한다(34절).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마을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이신 듯 배를 타고 떠나려 하시는데, 마귀로부터 치유된 사람이 제자 되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탁은 거절당하고 은혜 입은 일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예수의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은 데카폴리스 지방(요르단 강 유역을 일컫는 10개 도시의 총칭)을 두루 다니며 예수와 그 하신 일을 선포한다.(마르 5,18-20) 마태오는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떠나 달라고 청한 대목을 그냥 넘기기 않는다. 그냥 넘기지 않았다는 말은 여기서 끝난다는 말이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곧 불신(不信)으로 인정된다. 그들의 불신은 수많은 돼지들을 손해(損害) 본 것에 기인한다. 마르코는 호수에 빠져 죽은 돼지 떼가 약 2,000마리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르 5,13)


  마태오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의 원전(原典)을 대폭 축소하면서 자신의 편집의도를 가미(加味)하였다. 마태오는 의도는 결국 앞서간 대목, 즉 호수 반대편에서 가르치신 예수추종의 대목(8,18-22)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자들이 추종하게 될 예수님은 세상의 마귀들을 깡그리 소탕하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며, 이 분을 추종한다는 것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마태오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의 “마귀 하나”를 복수로 수정함으로써, 수많은 마귀 떼를 쫓아내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능을 한층 과시하는 동시에 예수추종의 진정한 의미를 재삼 강조하는 이중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그들 곁에 예수를 머물게 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도래한 하느님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과 가르침을 듣고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는 곧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놓친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장 다시 배를 타고 가파르나움으로 건너가실 것이기 때문이다.(9,1) 예수 때문에 손실을 입었다면 예수를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 옛날 이집트의 재상 요셉이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식량을 사러왔던 10명의 형들 중에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창세 4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