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1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Margaret K 2007. 7. 1. 02:16

  2007년 7월 1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51-62)


 “I will follow you, Lord,
but first let me say farewell to my family at home.”
To him Jesus said,

“No one who sets a hand to the plow
and looks to what was left behind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도 부르심의 하나다. 믿음의 길은 주님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다. 그 무엇에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마저 그냥 둔 채 오라고 하신다. 새로운 삶으로 부르는 데에 응답하라는 말씀이다. 소명과 추종 사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더 복음적이다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생활 속의 실천이지 그저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하느님의 뜻이라며 자신을 못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심도 지나치면 맹신이 됩니다. 도를 넘으면 광신으로 바뀝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고 남을 괴롭히는 신심이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신심을 어찌 바른 신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그런 일까지 매듭짓지 못하고 주님을 따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댔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밭을 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고랑은 비뚤어지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맡겼으면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 힘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의 힘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우리 인생도 그만큼 복잡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신뢰하며 사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나중에’는 안 하겠다는 말     

-남상근 신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또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려 왔습니다. 그 역시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루카 9, 61).
불치의 질병 중, ‘나중 병’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음번에, 다음 주부터,
내년부터, 지금은 말고, 조금 후에 등등. 생각해보면,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좋은 일들, 그 많은 하고 싶은 일들이
무산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까지는 이렇게 하고 내일부터 할래, 이번 학기까지는 놀고서
다음 학기부터 공부해야지, 지금은 말고 나중에, 다음번부터.
다음에는 또 다음이 있다고 유혹받을 것입니다. 내일이 오면 또 내일이
있을 거라고 속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원하십니다.
나의 지금은, 나의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그 누군가가
그렇게 누리고 싶었던 내일이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삶

-배광하 신부-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님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교황주일입니다.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황님으로 칭송받는 요한 23세 교황님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교회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과감히 교회의 썩은 환부를 제거하려 하셨고, 가톨릭 교회의 이름처럼 보편된 못브의 교회를 만들려 애쓰셨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창문을 열고 숨통을 트이게 하셨습니다.

짧은 5년간의 임기 중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위대한 공의회로 평가받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자주 과거에 아주하여, 그 영화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들을 향하여 엄한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려는 교회의 으뜸 지도자의 살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썩은 냄새가 나는 교회의 창문을 열게 된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1.12)개막연설에서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만 매달리면서 귀중한 보물을 지키려는 태도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제게되는 과제를 알고 단죄보다는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현 상황을 인식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것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움직이고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고, 이 시대의 정당한 요구를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고 인식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스승 예수님의 삶을 따랐던 바오로 사도는 신분과 남녀의 차이가 분명했던 그 옛날, 놀랍게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그리고 스승님께서 사셨단 자유와 해방을 위한 삶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세례받은 거 무를 수 없나요?

-이기양 신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루는 어느 신자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세례 받은 것을 도로 무를 수는 없겠습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더러는 슬쩍슬쩍 거짓말도 좀 하고, 앞으로 모르는 척 하고 뒤로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있는데, 천주교 신자가 되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세상살이가 너무나도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니 오히려 신자이면서도 세상과 전혀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과 반대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신자들은 이 세상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많은 갈등과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신자의 길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6-17)며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길이 세상과 다름을 강조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장사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작별인사 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당신을 따르는 일에만 진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는 순간 농부로서 가장 중요한 소는 잡아서 제물로 바치고 쟁기는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제는 농사일도 과거지사라는 결심을 드러내며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무섭게 결단을 하여도 쉽지 않은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세례성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지만 세상의 한복판에 살기에 쾌락과 돈과 권력 등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 나도 모르게 흔들리고 유혹에 빠져들게 되지요.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스티븐 지라드'라는 대부호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토요일, 그는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일 정상 출근해서 오늘 도착한 선박의 짐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갑작스러운 업무에 직원들은 투덜거리며 불평들을 늘어놓았습니다. 못마땅해 하며 흩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한 청년이 지라드 앞에 다가와서 정중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저는 나와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을 그만 두게."

이렇게 청년은 그 직장에서 해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고가 된 후 청년은 3주간이나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다녔으나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필라델피아 은행 총재가 지라드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 좀 해 주게나."
순간적으로 지라드의 머리 속에는 몇 주 전에 해고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지라드가 그 청년을 추천하자 은행 총재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 청년은 자네가 해고하지 않았는가?"

"물론일세. 그러나 내가 그 청년을 해고한 것은 사람이 나쁘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네. 주일에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해고한 것일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바꾸지 않던 그 청년은 믿어도 좋은 사람일 걸세."

그렇습니다. 결국 청년의 굳은 믿음은 그를 보증하는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신자들은 신앙과 세상의 요구에 갈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에 걸맞게 살 것을 결심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따르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더욱 정진하여 주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며, 특히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고 주님만을 따르는 교황님께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

-서공석 신부 -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려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불러내려 불살라 버리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수님을 따르겠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식구들과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보도하는 문서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구약성서를 잘 아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그들이 한 새로운 체험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향해 가셨고 그것은 하늘에 올라가시는 일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구약성서(2열왕 2,1)는 예언자 엘리야의 죽음을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분노하여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구약성서 열왕기 하권(1,10. 12)에서 빌려 왔습니다. 사마리아의 왕이 엘리야를 잡으러 군사를 보내었더니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언자들은 복수하고 벌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꾸짖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자를 고쳐 주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생활 조건이 개선되는 것도, 경제적, 사회적 수준이 격상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외면하는 패륜아가 되라는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이는 하느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같은 루가복음서에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가 폐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15,24).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식구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과거의 자기 공적에서 보람을 찾지도 않고, 과거에 남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다보는 어리석은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새로운 내일이 펼쳐집니다.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무서운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 덕분으로 재물이나 지위를 얻어서 이 세상에서 행세하고 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행세하는 일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따라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소박하게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이나 지위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분의 은혜로우심이 자기를 통하여 주변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죽음 후의 일을 걱정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새롭게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기에 우리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의 공로에 자만자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과거에 대해 통회(痛悔)의 눈물만 흘리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봅니다. 그분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실천하면서, 그 자비가 흘러 넘쳐 이웃에게 흘러들어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우리 안에 고여만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의 뜻을 성취한다.”(55,10-11).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흠뻑 적시면, 그 자비와 용서는 주변을 위한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열리는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도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디에?

-조욱현 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참된 자유란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이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에, 자신의 성소에 충실할 때, 자유로운 자 될 수 있다. 자기의 성소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여 나가면서 자기실현이 가능하며, 이 때에만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9,51-62]

예수님의 사명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고 사랑을 드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또한 인간으로서 갈등이 있었다(겟세마니).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죽음을 통하여서까지 이루시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분이 되셨다. 바로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구원이었다. 여기서는 한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하려는 의지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실현하시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 맡기자. 제자들의 말에 그들을 꾸짖으시는 주님이시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조건이 없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라”,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데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른다. 이것이 유혹일 것이다. 예를 들면,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에, “돈을 좀 더 벌면...”,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죽을 때 대세나 받지” 등등 여러 가지로 핑계를 댄다.

은혜의 때가 있다. 그 때는 아무렇게나 다가오는 때가 아니다. 그 때는 지금 바로 복음을 듣는 그 순간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이웃 사랑에 대한 자세도 중요하다.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례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순간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하느님의 뜻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제2독서: 갈라 5,1.13-18]

이에 대해서 바울로 사도께서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란 법 없이도 살 사람일 때이다. 그가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의 지배를 받으며, 법을 의식한다는 것은 법을 잘 지키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때문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법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을 때, 율법을 의식하지 않는데도 율법을 완성하는 자들이다. 예: 신학교의 종소리-타성에 젖는 삶이 될 수 있고, 수도원의 삶이나, 매 일상도. 우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하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주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자들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자이다. 주님의 뜻을 어겼을 때, 즉시 그 잘못을 아는, 그리하여 즉시 자유롭기 위해 애쓰는 매 순간 회개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며 평화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러한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는 끊어버림에서 온다

-유영봉신부-


 묵상 길잡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시며,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제자 됨의 길은 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름에 있다.

1. 철저히 버려야 완전히 얻을 수 있다.

“버림으로 얻고, 미워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극복하기 힘든 대표적인 욕심이 물욕, 성욕, 권세욕이라고 한다. 물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사심이 없기에 많은 돈을 관리하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성적(性的)인 욕구를 철저히 끊고 뛰어넘은 사람만이 모든 이성(異性)을 참으로 자유롭게 대할 수 있고, 소유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권위와 권력이 지배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만이 참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해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는 한,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소유하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없을 때 참으로 사심 없이 대하고 위할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2. 깨달음을 얻는 첫걸음은 끊어버림이다.

불교에서 특별한 전통과 맥(脈)을 이어온 종파는 선종(禪宗)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전부터 중국에는 이미 불교의 교리를 꽃피울 충분한 정신적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선(禪)불교가 중국에 소개되기 이전에 장자(莊子)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본질을 꿰뚫어 봄(본질직관:本質直觀)’에 대하여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본질을 꿰뚫어 봄’이란 바로 ‘깨달음’ 즉 ‘득도(得道)’를 말하는 것인데, 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하면서, 심재(心齋), 좌망(坐忘), 조철(朝徹)을 이야기하였다.

심재(心齋)란 마음의 재(齋)를 말함인데, 마음이 제 멋대로 오락가락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뜻한다. 즉 심지(心志)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세상만사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깨달음을 얻는데 온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좌망(坐忘)이란, ‘모든 것에서 마음을 거두어 잊어버림’을 말한다. 이는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심지어 살겠다는 욕심이나,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끊어버리는 ‘완전한 자기 비움’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朝徹)이란, 이는 문자 그대로 ‘아침의 맑음’을 말함인데, 새벽 여명(黎明)이 밝아 올 때 어둠이 걷히면서 온 천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모든 애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완전히 비움으로, 어떤 것에도 얽매임이 없는 고요와 평화와 맑음’을 말함이다.

이런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본질직관(本質直觀)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장자(莊子)의 가르침은 이미 선(禪)불교가 말하는 선(禪)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보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

‘하늘나라를 얻음’은 바로 ‘하느님을 뵈옴’이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추종의 자세를 역설하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모세와 많은 예언자들과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세기 12,1)야 했고,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겨야 했다. 성모마리아도 일생동안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는 자세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며 사셨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갈림 없는 마음’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너희는 다른 신(神)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34,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마태18,8) 하셨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림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마저도 포기 할 수 있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추종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성생활의 첫 단계는 ‘정화의 시기’이다.(이어서 조명과 일치의 시기가 이어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세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나를 비울 때 하느님은 당신으로 나를 채워주신다. 나를 비우는 만큼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더 많이 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 따르기

-김영국신부-


신앙생활도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여름이 되면 몸이 지치기 마련이고 자칫 영적인 생활도 느슨해질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들고 해이해진 마음을 다시 추스르게 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올라가신다’는 것은 승천을 의미하지만,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사명만을 생각하며 예수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마음을 굳히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원문은 ‘자신의 얼굴을 그 방향으로 고정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감하고 길을 떠나는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와 비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하고 여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운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사람들의 배척은 예수님의 운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기도 합니다(루카 9,51-56).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부터 예수님은 고향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고(루카 4,16-30),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의 마지막 시점에서 예루살렘 시민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루카 19,28-40).

주님의 운명이 그러하듯, 주님 따르기는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닙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예수님은 편히 쉴 곳조차 없이 동물들보다도 못한 처지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친척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마르 3,21).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뿐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먼저 지내고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하시며,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로마 14,9)이신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하라고 단호히 대답하십니다.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루카 9,60).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요구하십니다. 엘리야는 쟁기질을 하던 엘리사가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도록 허락했지만, 주님은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고정하시고(루카 9,51)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시는 주님을 따르는 일은 한가한 소풍길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숭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원하는 사람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홍승모신부-


 우리가 예수님의 여정을 따를 때, 내면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한 저항들 중에 오늘 복음에서는 3가지 내면적 장벽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물질적 안정에 대한 장벽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루가 9,57).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 사람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확고한 의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여정을 따르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물질적 안정을 통해 세상에 안주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보금자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변화하기를 꺼려합니다. 우리는 예전의 안정된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새로운 차원으로 한 걸음 내딛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는 내면적인 바람이나 애착에 대한 장벽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루가 9,59). 이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바람입니다. 예수의 답변은 확고합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루가 9,60). 이 말씀 속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인간적 희생이나 일의 선후(先後)에 대한 차원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여정을 바라보는 영적 식별에 대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여정에는 두 가지 상반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움직임이란 '예수님의 부재(不在)' - 예수께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삶의 여정에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 숨 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멀리 떨어져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은 반대가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세상적인 바람이나 애착으로 인해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완고히 닫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사랑 안에서 확신을 가질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개인적인 '나(ego)'에 관한 장벽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루가 9,61).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신의 것에 대한 내면적 저항을 말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62). 예수님의 답변은 일의 추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나만의 것'이 죽어 없어져야 비로소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외부나 내부에서 오는 어떤 저항이나 장벽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떠남의 아름다움

-평화신문-


일터를 바꿀 때마다 후임자의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몸만 떠나는 사목자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후임자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물건들도 있겠지만, 후임자가 또 다시 목돈을 들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세심한 배려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지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목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은 '칼같은' 처신으로 유명합니다. 후임자에게 털끝만큼의 누도 끼치기 않기 위한 그분의 모습은 '칼' 그 자체입니다. 떠나온 임지의 신자들이나 후원자들, 열성 팬들이 그리도 집요하게 '많이도 말고 딱 한번만 얼굴을 보자'고 애원해도 후임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완강히 거절하십니다. 후임자가 새로운 분위기에 최대한 빨리 적응하도록 칼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같이 지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떠나고 나면 그야말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 되고 맙니다. 신부님의 그런 칼같은 모습, 그 이면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후임자에 대한 배려, 신자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신자분이 제게 본당 수녀님들 인사이동 방식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2-3년간 동고동락하던 수녀님, 잔정이 유달리 많아 마치 친정언니같던 수녀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온다간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사발령이 난 것입니다. 완전히 뒤통수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답니다. 정들었던 수녀님을 위해 조촐하게나마 송별식이라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저는 내심 기뻤습니다. 그 수녀회가 어떤 수녀회인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수도자다운 수도자를 양성하려고 각별히 노력하는 수녀회가 틀림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참 수도자는 매일 매순간 주어진 처지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모든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상황 안에서 최대한 노력합니다. 그러나 떠나야하는 순간이 오면 지체 없이, 아무런 미련도 없이 가방 두 개만 달랑 양손에 들고 기쁘게 떠나갑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인연도, 열정을 불살랐던 직책도, 정들었던 공간도 뒤로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계, 하느님께서 열어주시는 미지의 땅을 향해 홀연히 길 떠나는 사람, 그가 참 수도자입니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 시급하니 장례도 가족들과의 작별인사 마저도 신경끄고 빨리 따라나설 것을 재촉하십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저울질하다가 한없이 늘어지던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입으로, 마음으로는 수백 번도 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던 사람들, 결국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결단을 번복하던 많은 사람들을 봐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앞뒤 재지말고 즉시 따라올 것을 강하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순례성'입니다. 순례한다는 것은 어느 한곳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떠나는 자유로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이방인들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 순례를 끝내고 나서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이 세상의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길 떠난다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는 일, 서글픈 일이지만 결국 떠남으로 인해 삶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떠남으로 인해 인연은 더욱 가치를 발합니다. 떠남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다 단순하게, 보다 소박하게, 보다 홀가분하게 살기 위해서 버리고 또 버리는 이번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이란 참으로 큰 것이어서 모으면 모을수록,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더 갖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면 청빈한 생활,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는 담을 쌓게 되고 말지요. 결국 그 모든 것들은 복음 선포나 자기 이탈의 가장 큰 장해물이 되고 맙니다.

묵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지닌 것이 많으면 그 지닌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되어 복음전파나 영혼구원은 뒷전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나무가 봄에 꽃피우고 여름에 애쓴 이유는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떨어져 내릴 그 낙화의 순간을 위해서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루카 복음사가는 ‘구원의 길’을 묘사하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길을,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의 도착점으로 수난·부활·승천을 통한 당신의 사명을 마친 곳입니다. 동시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길’의 시작점이요, ‘구원의 길’을 이루는 중심지입니다.
전반부 갈릴래아 활동기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만(9,20)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할 때를 감지하십니다. 비록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마음을 굳힙니다. 겪어내야만 하는 수난이지만 그 뒤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예루살렘 여정을 시작하며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9,51)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여러 일이 일어납니다. 이 일들은 곧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이 되기도 하지요. 먼저 오늘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반목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또 예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대응을 보면 아직도 스승님을 이해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마치 그럴 힘이 자신들에게 있기라도 하듯 묻습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8)는 말씀을 체화하지 못하고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는 옛 삶의 범주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라티아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5,13)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격분`…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5,20)
힘의 과시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책이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고 굳건히 서 있는 자는 오히려 온유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땅을 차지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힘의 무기를 이용하고자 하나, 스승은 ‘온유한 사랑’의 무기를 쓰십니다. 그러나 이 무기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교회 역사 안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 곳곳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라크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우리 마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보복의 불, 이 불은 하늘에서 불러와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꺼야 할 불입니다. 미운 너 대신 내가 죽는, 힘없는 무기를 사용하는 그 어려운 방법으로만 꺼지는 불입니다. 예수께서는 ‘불을 지르러’(루카 12,49)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보복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꽃’(사도 2,3)은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도 알아듣는 일치의 불이요, 화해와 사랑의 불임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가르치신 대로 발에 먼지를 털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고을을 떠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만은 알아두라고 이르셨겠지요(루카 10,10-­11). 그 사마리아가 이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복음을 전파할 때 제일 먼저 복음화의 대상이 될 것(사도 1,8; 8,25)임을 사도들도 그때는 미처 몰랐겠지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정은 이렇듯 보금자리는커녕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나그네 여정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민감하게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전하는 것이 그토록 급하고 중요하기에 아버지의 장례도, 가족들에게 하는 작별 인사도 뒤로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가 결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부리던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워먹고는 엘리야를 따라나섰듯 단호한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루카 18,29-­30)이며, 이제 그들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1)로 구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버려야 할 힘든 고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버리는’(루카 9,23) 일입니다. 그러니 이 철저한 추종의 삶을 어찌 쉽게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탑을 세울 때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고 일을 시작하듯(루카 14,28)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무게,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잘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안이한 마음으로 선택하여 현세의 안전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사실은 죽은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불교 조주선사는 제자의 장례 행렬에 참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쫓아가는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나는 죽은 자입니까, 살아 있는 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