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30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마태오 8,8)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의 믿음은 보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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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 늙어 가능성마저 영영 사라졌다며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 소식에 사라는 웃었습니다. 마음을 비웠기에 나온 웃음이었습니다. ‘주시려면 진작 주실 일이지. 포기하고 체념한 지금에서야 주시겠다니…….’ 하는 뜻이 담긴 웃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웃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두려웠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사라에게 늙은 나이에 아이를 주셨을까요? 왜 임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 소식을 알렸을까요? 더 일찍 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더라면 사라는 정말 감사하며 온몸으로 주님을 찬미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사라가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나이에 아이를 주시면 ‘기적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이고 그분의 은총이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원래 자기 식구 자랑하는 사람이 제일 못나 보인다고 하지요. 그런데 제가 그 못난 모습을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당 교우들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당 신부를 해보지 못한 저이지요. 따라서 제가 얼마나 미숙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특출이 잘하는 것도 없는 저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저를 많이 도와주시고,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 주에 견진성사가 있는데, 그 대상자가 181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봉사자들이 걱정을 하세요. 181명이면 이에 따른 대부대모까지 생각할 때, 우리 성당 1층이 꽉 차서 다른 신자들은 앉을 자리가 별로 남지 않거든요. 또한 예비자들을 계속 성당으로 인도해서 교리 받는 분들의 수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특히 앞으로 우리 성당의 교육관 및 피정의 장소로 쓰일 종교미술학부 부지 구입을 위해서도 얼마나 열성을 다하시는지 모릅니다.
다른 본당 신부님들은 이것저것 해야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본당 신자들 잘 만나서 많은 것들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리고 본당에 와서 느낀 한 가지는 서로간의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관계가 있은 뒤에야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관계가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왜 믿음의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먼저 상대방에게 신뢰를 보여줄 때 쌓이게 되는 것인데, 우리들은 나를 먼저 믿어주기야 믿겠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 안에 불신이 더욱 더 강해졌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로마의 백인대장을 보세요.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지배하는 로마의 군인대장으로 외형적으로 볼 때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기에 충분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지요. 오히려 자신이 직접 가서 이야기를 하고, 먼저 예수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문제도 아닌, 자신이 부리는 종을 위해서 자기 나라가 지배하는 민족의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겸손함입니다. 그 겸손함에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그 겸손한 믿음에 자신의 소원이 믿은 대로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내가 믿은 대로 된다는 것. 정말로 신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상상을 종종 하지 않습니까?
돈 좀 많이 벌어보았으면, 좋은 직장에 취직했으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권세를 부려보았으면… 하지만 이렇게 나만을 위한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즉,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마음, 남을 받아들이는 마음만이 바로, 내 믿음대로 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점검해보세요. 혹시 나만을 위한 믿음을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먼저 믿으세요.
빠다킹신부
믿는다는 것
-박영봉 신부-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에 대한 ‘아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내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
그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여 드러내고,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치유받은 자의 사명
-엄재중(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오늘의 세상은 병들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너무나 비관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가끔 몇몇 사건이 우리가 얼마나 병든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려줄 뿐, 우리는 이미 많은 면에서 병들어 있음에도 자각 증세가 없다. 병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생활 습관을 유지한다. 이렇게 되면 병은 더욱더 속절없는 것이 된다.
마태오복음 8장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어떻게 만나셨고 치유해 주셨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병자들을 만나신다. 먼저, 주님은 스스로 다가와 치유해 달라고 호소하는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주신다. 이어서 병든 종을 대신해서 온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신다. 마지막으로 아무 요청도 없었지만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그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신다. 처음에는 병자가 예수께 왔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직접 찾아가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 직접 청하든 그렇지 않든 아픈 우리에게 오신다. 오셔서 우리 몸에 있는 온갖 독을 뽑아내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환자인 우리가 할 일은 위대한 치유자이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뿐이다. 그분에 의해 병이 나은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처럼 그분의 시중을 들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된 의사이신 그분에 의해 치유받도록 알리고, 백인대장처럼 앓는 이들의 아픔을 주님께 말씀드린다. 이것이야말로 그분한테서 무상으로 치유받은 자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사명이다. ●
참된 희망과 믿음과 사랑
-박근범 신부-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나 현대 의학으로 고치지 못하는 희귀병과 난치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은 세계에서 가장 심한 <연소성 피부근염에 의한 범발성 석회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애청자 여러분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온 몸이 굳어 돌처럼 변해가는 ‘돌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진식씨를 TV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아름다운 시간이 새삼 떠오릅니다. 무엇보다 투병생활 거의 30년 가깝게 한결같이 그의 곁에서 지켜주고 돌본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분이심을 보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하루가 생의 마지막인 듯 살아온 박진식씨, 굳어버린 손 때문에 흐르는 눈물도 스스로 닦지 못하던 그가 스물 살까지만 살 거라는 기대를 넘어서서 이제 그의 나이 마흔, 그리고 오직 자식 하나만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으신 환갑이 되신 어머니, 그들의 모습에서 바로 ‘참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아직도 가시지 않습니다.
이처럼 병자성사에서 자주 선포되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신·망·애에 대해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유다인도 아닌 이방인, 그것도 군인인 백인대장이 어떠한 처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보여준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결코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기쁜 소식 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고치고 살리시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늘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랑하면서 감사하게 살아갑시다. 사람이 희망을 버리고 믿음이 사라지며 사랑이 있지 않은 곳에서 산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삶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 대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절대로 저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사람은 우리를 다 외면해도 하느님만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고 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하느님은 가장 가까이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십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선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2007년도를 시작한지가 어그제께 같은데 벌써 반이 지나고 내일이면 7월입니다. 새해 첫날 다짐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얼마만큼 실행하고 이루어 나갔는지 살펴보시고 남은 날들은 보다 알차고 보람되게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은 내게 늘 바람막이가 되고 나는 늘 당신의 모진 바람만 되는 것을…”(시인 박진식의 시 ‘사모곡’ 중에서)
독서 : 깨어 기다림으로써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아브라함
- 경규봉 신부-
주님께서 마므레(예루살렘 남방의 헤브론 근교)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진 후 이 지역에 정착했다. 하느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형상으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시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은 생면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진실한 사랑으로 맞이한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관례이다(출애 22,21; 욥 31,32; 마태 25,35; 1디모 5,10).
그렇지만 그들을 보자마자 뛰어나가 따뜻하게 맞이한 것은 그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항상 나그네를 대접하는데 소홀함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는 땅에 엎드려 겸손하게 맞이한다. 그들에게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며, 나무그늘 아래에서 편안히 쉬며 음식을 들도록 권한다. 그는 고급스런 빵과 연한 송아지 고기, 우유를 곁들여 그들을 대접하며 음식 시중을 드는 등, 극진하게 그들을 예우한다.
주님께서는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다시 찾으실 터인데, 그 때 사라는 아들을 낳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들은 사라는 이미 생식의 능력을 잃어버린 늙은 상태였고,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에 주님께서는 사라 심중의 생각을 꾸짖으시며 분명 아들을 낳을 것임을 말씀하신다. 상대가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리라는 생각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 드러난 데 따른 두려움 때문에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그러한 사라에게 주님께서는 더 이상의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엄하게 꾸짖으신다. 자신의 불신앙을 거짓말로 은폐하려고 했던 사라의 경솔하고 어리석은 죄를 꾸짖으신다.
한창 뜨거운 대낮,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는 시간에 아브라함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천막 문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그네 세 사람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자,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시 뛰어나가 그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나그네 앞에 엎드려 자신을 지극히 낮추어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들고 쉬었다가 떠나기를 청한다.
자신들이 먹기에도 아까운 고급스러운 빵과 송아지를 잡아 그들을 대접하며, 자신은 마치 종처럼 그들 곁에 서서 음식 시중을 든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브라함은 일개 부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13,6), 318명의 사병을 동원할 정도로 거느리는 사람도 많았다(14,14). 그는 휘하에 많은 군사까지 거느린 한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한갓 나그네에게 송아지를 잡아 대접하고, 그 옆에서 음식 시중까지 들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이 천성적으로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만 그랬을까?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브라함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족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막 문어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생면부지의 나그네에게 귀한 음식을 직접 대접했으며 시중까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만났다.
주님께서도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3)를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마태 24,42)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13) 하고 가르치셨다.
신앙인, 그는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남들이 다 낮잠에 빠지고, 세상 즐거움에 빠질지라도 언제나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처럼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 참고 인내하는 신앙인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한다.........◆
신앙 안에서는 모두가 기적이다.
-이상영 신부-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빵을 많게 하고, 병자를 낫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기까지 하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 자신을 자랑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문에 그분은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곳에서 기적은 그 의미와 기능을 상실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이 기적의 전제조건이라는것은 오늘 복음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한 백인대장이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자기 종(하인)을 치유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허락을 받은 그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한말씀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큰 믿음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하고 감탄하시며 "가 보아라. 네가 믿는대로 될 것이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기적을 바라며 이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십자가의 처형장면에서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강력하게 거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안에 다시 짓는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보아라"하며 모욕하였고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죽은 이들은 살리면서 자기는 살리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는지 보자. 그렇게만 한다며 우린들 안믿을 수 있겠느냐" 하며 기적을 요구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의 이런 모욕을 침묵으로 참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소위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토마에게 나타나 "나를 보지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시며 신앙을 또다시 강조하셨습니다. 또 종말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고 큰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마라"하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적을 바라는 인간의 호기심을 거부하고 참된 신앙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온 우주를 대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일상의 일들이, 만물의 소생이 우리가 태어나고, 늙고, 죽는것이 모두 다 기적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리고 뭇 인간들에게 짓밟히는 길가의 한포기 풀이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모두가 기적인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에 달려있다는 것이 비신앙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신앙인에게는 크나큰 은총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 대신 예수님께서 원치 않는 기적을 원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기만을 바라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의 신앙의 근본을 부정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위에 세워졌음을 다시한번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물질 만능으로 치닫고 있는 이 사회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것은 기적이 아니라 신앙인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을 잃고 기적만을 구할때 교회 역시 다른 사회 단체와 마찬가지로 제 일과 최고만을 추구하는 속된 단체로, 현실을 외면하고 요행만을 바라는 집단으로, 그래서 부패하고 타락한 영리단체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요구한다
-서철신부-
행복선언은 근본적인 마음가짐, 곧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취할 수 있는,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요구한다. 열린 마음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 말씀은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제로 사는 내 마음이 점점 더 넓어지고, 열리고 있는지 가끔 되묻곤 한다. 더 옹졸해지고 욕심과 질투로 채워지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때가 많다. 그러기에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마음을 열어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 것이다. 내 비록 세파에 시달리고 찌들어 가나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고자 하는 것이다. 또 미사 중에 큰소리로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이수철신부-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새벽 성무일도 중 마음에 와 닿은 성경 구절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리라.”
어디에서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내적 평화에 도달한다는
초대 송 후렴이었습니다.
더불어 생각난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너희는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오늘 지금 여기서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를 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
“너 나를 부르는 곤궁한 날에,
나는 너를 구하고 너는 내게 영광을 돌리리라.”
어디서든 간절히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면
주님은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는 하느님 구원을 보여주리라.”
어디서든 잘 살면
주님 친히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독서기도 시 다윗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야훼께서는 누구든지 참되게 살기만 하면
그대로 갚아 주리라.”
결국, 장소 탓, 남 탓, 하느님 탓이 아닌
내 탓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정주의 삶에 충실하면
주님은 언제나 적절한 때에 찾아오셔서 도와주십니다.
여기서 하느님 만나지 못하면 저기서도 하느님 못 만납니다.
여기서 잘사는 이가 저기서도 잘 삽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내 환상의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닌 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거의 상식을 초월하여 비상하게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말도 있듯이,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아 이 장소, 저 장소 기웃거리는 것,
헛된 노고이기 십중팔구입니다.
사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어디에서나 만나는 하느님이요,
‘마음의 귀’만 열리면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그리고 잘 준비되어 있어 기다리기만 하면
하느님은 적절하다 싶을 때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사람을 찾아오시는 겸손하시고 고마우신 우리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앞서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마음 깊이 새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늘 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주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던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극진한 환대를 통해
그가 얼마나 잘 준비된 믿음인지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주님의 축복선언입니다.
“내년 이 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노부부에게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라는 웃었지만 아브라함은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사람을 찾아오신 하느님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이 준비되었을 때 예수님은 나타나셨고
백인대장은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영성체 전,
백인대장의 이런 간절한 심정으로 성체를 모셔야
주님의 큰 축복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은
한 말씀으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십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는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고자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고마우신 주님이십니다.
“주 하느님, 제 영혼이 주님을 이토록 그리워하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시편42,2-3참조).
아멘.
참된 믿음의 조건은 순명
-여성국 신부-
평온으로 가득한 한 손이 노고와 바람 잡는 일로 가득한 두 손보다 낫다”(코헬 4,6). 사제품을 앞둔 부제반 끝 무렵, 그때 눈에 띈 성경 구절이 코헬렛의 이 말씀이었습니다. 그 뒤 서품 성구에 대해서는 별 고민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평온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조금 망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학교 성모의 밤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성모님의 신앙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한손 안에 꽉 잡아야 하는 것은 바로 성모님과 같은 순명이고, 이 순명을 붙잡아야 비로소 평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순명을 주제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속에서 참된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는 이들은 어김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덕목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사제품 받은 지 3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가 만만치 않음을 고백해봅니다.
교회에 순명하고,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 참된 평온을 얻는 길임을 알면서도 언제나 꿈틀대는 욕망에 사로잡혀 아버지의 뜻은 뒷전으로 슬며시 접어놓고 사는 게 아닌지 새삼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반성해 봅니다.
이방인이었으면서도 순명할 수 있는 겸손함을 지닌 백인대장의 믿음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이정희 수녀(성심수녀회)-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며 또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이 세 이적사화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점은 예수께 대한 단순하고 순수한 신뢰다.
광산촌에서 활동할 때 있었던 일이다. 세계 관구장 회의가 일본에서 있어 다른 몇 나라 관구장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가 광산촌에 들렀다. 그분들을 모시고 시장 구경(시장이라야 손바닥만하지만)을 하는데 교우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교우는 우리를 보자마자 반가이 맞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당시 그 교우 집 며느리가 임신중이었는데 아주 위험한 상태라 거의 누워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수녀님들이 당신 며느리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해주면, 게다가 언어가 다른 수녀님들이 똑같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하면 예수님이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교우의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가정을 위해 함께 기도를 드렸고, 그 교우도 수녀님들 한 분 한 분을 축복해 주시며 기도를 해주셨다.
우리 모두는 그 교우의 단순한 마음과 예수께 대한 순수한 믿음에 감탄을 하였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고 도움을 청하는 모습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간절한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고 하신다.
우리 역시 백인대장이 예수께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한 것처럼 단순한 믿음으로 다가갈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게”(히브 11,3) 된다.
†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고백 †
-박상대 신부 -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8절) 이 기도문은 온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 영성체 예식 직전에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는 외침에 응답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서 유래된다. 마태오가 모아놓은 10가지 이적사화집성문(8-9장)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적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보도된다. 두 번째 기적은 백인대장의 하인을 원격(遠隔) 치유한 기적이고, 세 번째의 기적은 베드로 제자의 장모를 열병에서 치유한 기적이다. 물론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있는 집단 치유와 구마기적은 구체적인 기적사화의 범주에 들기보다는 예수님의 치유활동에 대한 서술적인 보도에 속한다고 하겠다.
우선 열병을 앓고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기적을 보자. 이는 마르코복음(1,29-31)과 루가복음(4,38-39)에도 똑같이 보도되는데 사건의 맥락을 살펴보면 차이점이 많이 발견된다. 우선 치유의 장소는 다 같은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다. 그런데 마르코와 루가는 마태오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분에 이 기적을 배치하고 있다.
마르코는 첫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에 배치하여 이미 제자가 된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루가는 베드로가 제자의 소명을 받기 전의 시점으로 당겨 놓았다. 마태오는 이적사화 집성문을 따로 편집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기 위해 가파르나움에 오신 김에 베드로 장모의 치유도 함께 엮어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태오는 자신의 고유한 편집방법을 따라 기적들을 보도하고, 마르코는 베드로 장모의 치유를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으며, 루가는 이 치유사건이 예수께서 첫 제자 4명을 얻는 동기(動機)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한 기적은 루가복음(7,1-10)과 요한복음(4,46-54)에도 똑같이 보도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태오와 요한은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자비를 청한다는 점이다. 반면 루가는 백인대장이 먼저 유다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간청하게 한다. 유대인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회당까지 지어 줄만큼 유다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소개한다.
이에 도와 줄 마음을 먹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시켜 예수님의 직접 왕림(枉臨)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고 그저 한 말씀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루가가 늘 강조하는 기도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다. 즉, 기도란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 또는 성인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전구(轉求)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우리 또한 고통받고, 역경에 처해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인대장이라 함은 통상 로마제국의 군사편제에 따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행사하는 백부장을 뜻한다. 원문에는 서민출신이 아닌 "왕궁의 관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는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 들어서도 안 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격을 서술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게다가 자기 종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 백인대장을 로마군대의 고위 관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이방인 백부장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 기적사화를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장소가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방인으로서 백인대장의 자기 종에 대한 자비심과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과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은 우리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야 믿으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와는 절대적인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다른 곳에서 더 아름답고 위대한 믿음을 보았어야 되겠는가?............◆
아름다운 참 신앙
-강지원 -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참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확고하고 신실한 믿음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파르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에 만나게 된 한 이방인 백인 대장
그가 바로 참 신앙인이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미사 때마다 성체 를 영하기 직전에 바치는 기도인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하는
이 기도의 원형이 바로 이방인 백인 대장이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방인 백인 대장의 입을 통해 온 세상에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자신이 하인이 곧 낫게 될 것이라 는 굳은 믿음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 다.
중풍에 걸려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하인에 대한 백인 대장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과
그 하인을 낫게 할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백인 대장의 확고한 믿음이
바로 병든 하인을 깨끗이 낫게 한 기적의 원동력이였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수 많은 종류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들 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공통되는 점을 몇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치유 기적 사화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선 살펴보면, 병자들이 직접 자신의 발로 걸어서 예수께 치유 받으로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경우 이웃의 사람들이 그 병자를 옆에서 부축한다든지, 들것에 들고 온다든지,
아니면 업고서 예수께 데리고 와서 낫게 해 주십사 하고 청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백인 대장이 병든 하인을 대신하여 예수께 왔고
병든 자신 의 하인을 낫게 해주시길 청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
그건 병자들의 고통 을 더불어 함께 느끼고 조금이나마 병자를 돕고자 하는 이웃들의 측은지심,
즉 사랑 의 고운 마음씨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실질적 으로 돕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야말로 바로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놀라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주님을 감 동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통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 는 것은 바로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이들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당신만이 진정 주님이시 고 당신만이 진정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의심없이 믿는 그 확고한 믿음 그 자체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 나서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고 말입니다.
단 한번도 "나의 신적 능력을 보이려고 너를 낫게 해주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역시나 백인 대장의 믿음 에 감탄하시며 "가 보아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과 믿음은 놀랍고도 위대한 힘 을 발휘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웃에 대해 가지는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사랑 의 행위와 자신의 신앙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나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나아가 온 세상을 바꿉니다.
참 신앙인은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복을 주님께 빌지 않습니 다.
참 신앙인은 자신을 벗어나 이웃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복음이 보여주는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 고 온 사람들처럼 실천적인 사랑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 다.
참 신앙인은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사랑만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로
이끌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신앙인은 우리가 죄중에 있고 늘 주님께 죄를 짓지만 그래도 주님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늘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신앙인은 이러한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참신앙 인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없이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믿음,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겸손한 믿음과 행복선언 †
예수님을 흠모한 제자나 추종자 중에서 백인대장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인대장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세는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신망애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왜 이 세 가지가 중요한 것인가?
여러분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고 기대를 걸어준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때의 기분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어드리고 사랑해 드리고 하느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당신의 뜻을 따라드려야 기분이 좋으실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바로 이러한 좋은 자세를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 회사일이 남의 일이라고 열심히 일하지 않고 노상 다른 일자리를 보려고 밖을 기웃거리거나, 주인에 대하여 긴가민가 하는 자세로 대한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열 받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행복선언을 하고 싶으면, 하느님께 사랑받는 삶을 위해서 백인대장의 어떻게 고백하고 행동하는지를 잘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 분께 나의 삶을 봉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요, 하느님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깊은 묵상을 제공합니다. 우선 백인대장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주님께서 그동안 길고긴 신상수훈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그 뜻을 따르는 하느님 나라 사람에 대한 교훈을 모두 마치신 후, 처음으로 소개되는 인물입니다. 주님은 백인대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주님을 기다리며, 이상적인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적인 신앙인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인대장은 당시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한다고 자처하는 바리세이나 율법학자도 아니요,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다른 유다인도 아니며, 외교도인, 즉 이방인이면서 그것도 주님을 감시하는 로마군인, 백인대장입니다.
이 백인대장이 왜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소개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한 그의 말속에 예수님께 대한 깊은 믿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확고한 신뢰심과 자기 하인의 어려움을 돌 볼 줄 아는 백인대장의 인자한 마음과 사랑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신뢰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9장 14절에서 29절에 나오는 악령들인 아이의 아버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치유를 청하면서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말에서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누구 신지? 당신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백인대장이 자기의 집까지 오시지 않더라도 한 말씀으로 충분히 하인이 치유될 것을 믿은 그에게 예수님은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칭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서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구하면 얻지 못한다고 야고보서 4장 3절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이 백인대장의 믿음 찬 말씀을 오늘날 미사 중에 영성체를 모시기 전에 신앙고백으로 외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정말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자기 하인에 대한 백부장의 생각은 참 아름답습니다.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그 하인이 평소에 얼마나 주인, 백부장에게 충성을 잘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종을 위한 주인의 배려, 걱정과 보살핌은 정말 아름답다고 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푸는지요? 한국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감기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도 내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하수인에게 대한 관심과 배려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장)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남이 나와 이해 관계가 있을 때는 잘 합니다. 만일 이해 관계가 없으면 거들다 보지도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겠느냐?"(마태 5.46)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호세아 6,5)이다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하면서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을 우리신앙의 거울로 삼읍시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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