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6. 27. 05:11

  2007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오 7,16)

 

 By their fruits you will know them.

 

  

 뿌리가 건강한 나무는 잘 자랄 수밖에 없다. 좋은 나무일수록 건강한 뿌리를 지녔다. 그런 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는다

 

☆☆☆

 

 나무의 생명력은 뿌리가 좌우하기 때문에 좋은 나무는 건강한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줄기와 잎은 싱싱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나무는 화려한 꽃을 피우고 알찬 열매를 맺습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꽃과 열매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물을 빨아올리는 뿌리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보이면 뿌리가 아닙니다. 뿌리는 햇빛을 보면 더 이상 땅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싹을 틔우며 줄기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면 나무는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나무는 다시 뿌리를 만듭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뿌리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견디어 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때의 삶이 앞날을 결정짓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뿌리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게 충실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알아주십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면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밝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고민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요즘 고민이 생겼어요.”

“왜요? 무슨 고민인데요?”

“신부님, 제가 사실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장사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이러한 약속을 했지요. ‘하느님, 만약 손님이 새 돈을 주면 당신께 봉헌하고, 헌 돈을 주면 제가 취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신권이 생기면서, 손님들이 주는 돈이 거의가 새 돈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새 돈을 모두 봉헌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커서 생활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하느님께 한 약속을 깨뜨려도 될까요? 혹시 약속을 깨서 하느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이러한 고민을 한번쯤은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번 문제만 해결된다면 제가 당신께 이러저러한 것을 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하곤 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그 약속을 과연 지켜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큰 약속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주님이 해주셨다기 보다는 시간이 흘러 저절로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그 약속을 몰래 파기하지요. 그러면서 불안해합니다. 혹시 약속을 어겼다고 벌 받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물론 이렇게 헛된 맹세를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큰 잘못은 하느님을 쫀쫀한 분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분인데,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한계 지으면서, 지금 내 행동에 대해서 보복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큰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될 것을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서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가 되려고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 늘 연관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따로 일상생활 따로의 삶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24시간이라는 시간 전체에 있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뿌리내리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땅에서 자라고, 자라고 있는 나무가 그리스도의 나무가 될 때, 비로소 그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하느님께 헛된 맹세 하지 않기. 그리고 쫀쫀한 분으로 만들지 않기

 빠다킹신부

 

 

   거짓말      

-박영봉 신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입니다. ‘진실을 말하는’(에페 4,25) 그들은,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1베드 2,1)
버려야 합니다. 맹세를 하고서 거짓말을 했다면, 맹세를 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무죄한 이를 단죄하거나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하고,
피고가 받을 벌을 더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정의의 구현과,
재판관들이 내리는 선고의 공정성을 크게 위태롭게 합니다.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태도와 모든 말을
삼가야 합니다. 지나친 찬사나 아부나 아첨으로 타인의 악행과
나쁜 품행을 부추기고 북돋는 모든 말이나 태도는 금지되어야 합니다.
중대한 악습이나 죄를 칭찬하여 돕는 아부 행위는 중죄입니다.
남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악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있을 수 있는 필요에
대비하기 위해, 정당한 이익을 얻기 위해, 지나친 찬사를 했을 때에는
소죄가 됩니다. 자랑이나 허풍은 진실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악의로 어떤 사람의 행동의 일부 측면을 왜곡하여 헐뜯으려는 빈정거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배고픈 사람들

-엄재중(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열매로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가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때로 곡해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때로 열매의 질이 아니라 양을 채우는 것으로 자기가 심은 나무의 건강함을 판정받으려 한다. 지난 산업화 시절에 한국 사회가 이룩한 빛나는 성장 이면에는 바로 이런 양적 성과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우리 사회만의 문제일까? 한국의 종교계 전반에도 이런 경향이 노골화되어 있음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를 자랑하고 한국 사회 최고의 신자 수를 자랑하고 동양 최대의 중창 불사를 자랑하는 것 이면에는 다 이런 사고방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종교마다 대대적인 선교와 포교 열풍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발표한 통계청의 2005년 인구 센서스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개신교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천주교 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통계 결과를 놓고 개신교에서는 대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월 동안 개신교가 선교에 쏟아부은 그 엄청난 노력과 헌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개신교는 자기보다 백년 앞서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보다 훨씬 압도적인 신자 수를 가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이런 성장세는 퍽 감동적인 것이어서 천주교나 불교도 이를 모델로 삼아 노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의 결과는 무엇을 말하는가? 개신교의 성장주의 모델은 이제 끝난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종교는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예측이나 기대는 다양하게 할 수 있지만 현재 상황에서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결국 이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 역시 결국은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본질, 자신들의 원천을 떠난 종교가 아무리 화려한 외피로 이를 포장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얼마 가지 않아 그들한테서 ‘게걸든 이리들’만 보게 될 것이다.


 

 두려움 중에 있는 아브람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방패가 되어 그를 보호해주시고 그에게 약속하신 복(12,2.7 ;13,15-17)을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고 여쭙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친아들로 대를 잇게 할 것이며, 하늘의 별들과 같이 수많은 후손을 약속하신다.

사실 역사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섬기는(로마 4,11) 영적자손들의 수효는 하늘의 별수처럼 많다. 아브람은 후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니 하느님께서는 그를 의롭고 갸륵하게 여기시어 그에게 더 좋은 것 -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더 큰 믿음을 갖기 위하여 하느님께 징표를 주시기를 청한다. 하느님께서는 그와 맺으신 계약이 영원하며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그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명하신다.

3년 된 희생제물은 충분히 성숙되고 아름다운 것들로서 짐승 가운데 가장 귀한 것들을 뜻한다. 제물을 반으로 쪼개어 짝을 맞추어 놓고 그 사이를 계약자들이 지나가던 관습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계약이나 동맹을 체결한 후 이를 보증하기 위하여 시행하던 보편적인 관습이다.

후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도 이러한 관습을 지켰다(예레 34,18-19), 이는 피와 고통과 죽음 앞에서 자신이 맺은 조약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키겠다는 맹세의식이며, 화해와 일치를 나타내는 한 몸을 상징하는 의식으로서, 둘로 쪼개진 희생제물은 곧 계약을 맺은 당사자를 뜻한다. 새는 작기 때문에 쪼개지 않고 쌍을 이루어 각기 한 마리씩 마주 놓는다.

해질 무렵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신비경에 빠져들게 하신 후, 어둠 속에서 횃불의 형상으로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집트 개울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은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안락하고 편한 도시 하란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피해갔다가 하마터면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했고(12,10-20),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불어난 재산을 관리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으며(13,6), 사랑하는 조카 롯과도 헤어져야 했다(13,8-12). 또한 인근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하여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14장).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은 가나안 땅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계속 침묵하고 계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는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그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와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를 안심시키시고, 그의 믿음을 더욱더 확고하게 해주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가 두려움과 걱정,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이사 41,8) 하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이사 43,1)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처녀 때의 수치를 잊을 것이요 과부 때의 창피를 결코 되씹지 아니하리니”(이사 54,4)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루가 12,7). 주님께서 평화를 주셨으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요한 14,27).

비록 내가 많은 허물과 죄가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시는 주님이시다. 비록 내가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을 지라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이사 41,11).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거짓 예언자의 시대에 살면서...
-
정 호 신부-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세상에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할 때마다 그 사랑의 근본이신 하느님에 대해 여기서 저기서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사랑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도 엄청나게 들려 옵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 그것이 예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예언자, 그래서 하느님 말씀이 신자라면 누구나 대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우리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예언자 천지 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음은 분명 축복된 일이며 기쁜 일입니다. 관심만 있다면 언제든 성경을 읽을 수도 거기에 자신의 확신이 없으면 엄청난 공부를 한 사람의 도움을 빌려 성경의 깊은 뜻에 다가갈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세상은 이제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는 저마다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선교다, 전교다하며 운동을 열심히 벌입니다. 저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 속에서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누군가 특정 위치에 있는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지금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 자신들에게 던지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곧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우리는 과연 진짜 예언자들인가? 하고 말입니다.

거짓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양의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속은 게걸 든 이리라는 무지막지한 표현이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이야기하지만 그 뜻이 결국은 스스로의 배고픔이나 욕심을 채우려는 데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를 보며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십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분명 하느님을 이야기하며 좋고 깊은 뜻을 담고 있을 수 있지만 열매는 그들 스스로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삶의 모습이기에 사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데 사람들은 점점 더 사랑이 메마름을 느끼고 서도 많이 더 치명적인 방법들로 싸워댑니다. 하느님을 입에 올리면서도 사랑에 수도 없는 장벽을 치고 배격하고 목숨까지도 의로움을 빌미로 빼앗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댑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많다지만 그분의 열매는 찾아보기가 힘이듭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만들어낸 욕심의 결과들이 열매로 제시되고 그것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차지하는 것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열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들이 얼마나 달콤하고 감동적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입니다. 스스로가 부족해 그 열매가 부실함을 고백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아닌 그들의 잘못을 열매로 둔갑시키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오히려 덮어버리려 하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 예언자가 아닌 나쁜 예언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다는 말들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것의 완성은 주님이 해 주실 일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열리는 열매는 분명 그 완전함의 바탕이 됩니다.

이제 하느님에 대해 누가 말을 잘하나의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합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이 말들로 하느님을 입에 올렸습니다. 이제 진짜 예언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매가 그 결과를 드러내 줄 것입니다. 그러니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온 몸으로 사랑합시다. 하느님의 자녀가 거짓 예언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나무 중에 가장 좋은 나무인 하느님께 우리는 접붙여진 것이다

-서철신부-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매번 같은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지만 또 그 죄에 걸려 넘어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자신을 단죄하고 만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다. 나쁜 열매밖에 맺을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세례성사를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좋은 나무에 접붙여졌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접붙여진 나는 하느님의 생명을, 하느님의 영양분을 받아 자라게 되는 것이다. 내 힘이 아니라, 내 영양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받아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꽃을 피우고, 하느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나쁜 나무가 아니다. 나무 중에 가장 좋은 나무인 하느님께 우리는 접붙여진 것이다. 이 사실을 매순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이, 영양분이 우리에게 들어와 열매 맺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욕심이나 내 힘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다만 그분의 힘이 나를 온통 차지하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두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슬픈 나무

-양승국신부-


저희 수도원 뒷마당에는 꽤 여러 종류의 유실수들이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제대로 보살펴주지도 않는데도, 자신들의 때만 되면 보란 듯이 주렁주렁 빛깔 좋고 그런대로 먹을 만한 열매들을 생산해내니 얼마나 기특한지 모릅니다.

모과나무 같은 경우 그리 크지도 않은데도 얼마나 야무지게 결실을 맺는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크고 단단할 뿐만 아니라, 향기가 보통이 아닌 모과들을 설탕에 재어 겨울 내내 향긋한 모과차를 끓입니다.

모든 나무들이 다 기특한 것은 아닙니다. 눈에 거슬리는 나무도 있습니다. 복숭아나무가 그렇습니다. 초가을이 되면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엄청 많은 복숭아를 주렁주렁 달고 서있지만, 그 맛이 별로입니다. 달지도 않을뿐더러 크기도 그저 그렇습니다.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한바구니 따서 간식시간에 올려놓아도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식욕이 왕성한 까치들마저도 외면합니다. 그저 땅에 떨어져 썩습니다. 날 파리들만 수도 없이 날아와 윙윙거립니다.

작년 가울,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열매들을 힘겹게 달고 서있는 복숭아나무가 너무 불쌍했던 저는 인정사정없이 가지치기를 해버렸습니다. 원뿌리만 남겨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강경한 어조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

과수원 주인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많은 열매를 맺는다하더라도 맛이 없을뿐더러, 별 의미도 없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열매들만 주렁주렁 맺는 과일나무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빨리 베어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와서 따가고 싶을 정도로 향기롭고 달콤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는 좋은 과일나무는 너무나 사랑스런 나머지 늘 손길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곰곰이 반성해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과연 어떤 나무일까요?

 

 

-김화석신부-

 

 전교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삶의 전교라고 한다. 신앙인으로써 모범적인 생활이야말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보여주고 그들을 신앙에로 이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데 종교를 가진 사람이 인구보다 많은 나라에서 거짓과 모함이 판을 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인이 신앙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믿는 놈이 더하다는 말까지 하겠는가! 남을 탓하거나 타인을 구설수에 올리기에 앞서 먼저 나를 돌아다볼 일이다. 내 삶은 과연 남을 나무랄 만큼 반듯한가? 남을 비추어 자신을 보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먼저 행할 일이다. 가령 우리 공동체에 말이 많다면 누구를 떠올리기 이전에 내 말을 줄일 일이다. 미운 이가 많다면 먼저 내 행동을 돌아다볼 일이다. 내 행위에 대한 반성이 비난에 앞서야 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내 행위는 나만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느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신앙인,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가 사는 공동체는 건실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가을이 되면 과실수들의 성실함이 드러나듯이 

-이봉하수사-

 

 지난 봄, 공동체 조그마한 쉼터에 과실수 몇 그루를 심었습니다.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이었기에 어떤 나무가 좋을까 생각하다 정원수와 과실수를 함께
심기로 하고 묘목장엘 갔습니다. 봄의 문턱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나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무에 대해 많은 정보가 없었기에 필요한 정원수와
과실수를 묘목장 주인에게 골라달라고 하였더니 제법 큰 나무를 골라주면서
‘올해부터 과일이 열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무를 정성스럽게 심고 물과 거름을
주자 얼마 후 제법 잎사귀들이 돋아났습니다. 하지만 과일이 열릴지 여부는
좀 더 기다려보아야겠지요.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 거짓 스승, 거짓 정치인,
거짓 성직자, 거짓 경영인 등과 같은 사람들을 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라는
자연을 통해 비유로 말씀을 하셨을까요?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만
좋은 나무의 열매는 우리에게 살과 피가 되지만, 나쁜 나무의 열매는 오히려
독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매는 먹어보아야 안다는 행위를 유발시킵니다.
사람 또한 행실 등이 바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 사귀거나 어떤 일
안에서 불법 행위나 위법이 드러날 경우에만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신문 방송 매체를 통해 우리 주위에 나쁜 나무들이 많음을 볼 때 복음의 비유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신앙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안에서
일관성을 가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좋은 나무로 바로볼 것입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

-강영구신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을 아시지요. “닮았지만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하편(下篇)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공자(孔子)는 향원(鄕原)이라는 사람을 싫어했는데, 그가 사이비(似而非)학자였기 때문입니다.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유(가라지) 恐其亂苗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사이비를 싫어하는데, 가라지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벼이삭과 닮아서 혼란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향원(鄕原)을 싫어하는 것은 그가 덕(德)을 혼란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가라지를 싫어했을 뿐(마태13,24-30) 아니라, 사이비 예언자도 싫어합니다.
사이비(似而非)가 무서운 이유는 진짜에 가깝기 때문에 누구나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사이비(似而非)는 자신도 거짓 속에 살지만, 속아 따라오는 사람들도 거짓의 수렁에 빠뜨립니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 아무도 속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가짜가 아닙니다. 가까이면서 진짜인 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세대는 사이비(似而非)를 짝퉁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늘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짝퉁 사제가 아닌가 하고 반성합니다.
당신도 짝퉁 그리스도인, 짝퉁 예수의 제자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워낙 짝퉁들이 많고 힘이 커서, 진짜마저도 짝퉁으로 대접받는 현실이 두렵고 안타깝습니다.(一明)

 

 
† 먼저 자신의 열매를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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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에서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이 선포되었다. 사실 황금률은 행동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규범이다. 사실상 요구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의인(義人)의 길은 외롭다고 했던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옳게 산다는 것, 나아가 남보다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좁고 외롭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동의 지침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란 경우에 따라 많은 변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행동지침에 대한 늘 새로운 해석과 응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참 예언자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속에는 사나운 이리를 품은 거짓 예언자가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겉포장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내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양처럼 부드럽고 고울수록 그 마음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만약에 그러한 겉과 속이 다르다면 실망 또한 클 것인즉, 그것이 거짓 예언자라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참 예언자가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거짓 예언자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거짓 예언자에 대한 구별은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하여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원리를 구별의 기준으로 내세우신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보다 행위의 과정과 결과가 구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함께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고,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예언자도 일생 동안 전문적인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보여주시는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구별을 통하여 자신을 참 예언자(예레 26,1-24)로 거짓 예언자(예레 23,9-40; 특히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28,1-17)와 구별하였고, 거짓 예언자와 섞은 사제들이 한 통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그릇 인도하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참 예언자는 백성을 일깨워 회개하도록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권력에 아부하느라 정신을 빼앗긴다고 하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참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하였다.(아모 1,3-2,16)

신약성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결성된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 자료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은 단연 100년 이후에 집필된 ‘디다케’로 손꼽힌다. 《12사도의 교훈》으로 통용되는 디다케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초대교회 규율에 관한 지도서로서 신약외경(新約外經)에 속한다. 예언과 복음의 수용자세를 다루고 있는 11장에 다음과 같은 거짓 사도와 예언자의 식별 기준이 들어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더 가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영(靈)으로 말한다고 모두가 다 예언자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이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태도로써 밝혀진다. 진리를 가르치는 예언자라도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누구든지 영으로 말한다면서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해서 달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디다케 11)

예언서와 디다케를 근거로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요약한다면, 참 예언자는 주님의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바치지만 거짓 예언자는 생명은커녕 자신에게 손해 될 일은 하지 않는다. 참 예언자는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끊임없는 쇄신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필요하다면 쓰레기로 여기지만(필립 3,8), 거짓 예언자는 되도록 남의 잘못을 꾸짖고 남의 불행을 축복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명성을 도모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학식과 견해에 더 의존한다. 이러한 기준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행실을 보고 아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공존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하여 얻은 식별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쉽게 깨뜨릴 수 있다. 따라서 남보다는 우선 내가 스스로 맺는 열매에 따라 주님의 ‘참 제자요, 참 목자’인지를 물어보고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깨어 있는 믿음의 생활로 영적 구분을 †

오늘 성독한 복음을 중심으로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싶은 주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도의 하나인 곧 '영의 분별력과 좋은 영적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짓예언자를 따르지 말 것이며, 참 예언자를 통해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을 잘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냥 대충대충 신앙생활해서는 거짓이고 참이고 구별할 것 없이 같이 있으면서 시간만 떼우면 됩니다. 그러나 머리털 숫자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이 '주여 주여' 하고 부른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성서에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나라 백성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참 예언자를 따라서 좋은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깨어 있는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바른 믿음생활이란 곧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땅에서 농사한 과실수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귀한 열매맺는 삶을 사시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상식적인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잘 알아듣도록 유치원 선생님같이 잘 하십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물론 요즘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접을 붙여서 희한한 과일과 채소들이 나오고 심지어 유전자를 조작하여 이상한 열매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원래 자연의 순리대로 하자면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주님의 말씀이 맞는 거지요.

그 진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여는 도입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시오.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보시오." 뒤이어 나오는 나머지 말씀은 유대인의 언어습관을 빌어서 반복적으로 비유를 들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와 열매 얘기를 한참 묵상하다 보면 조금 혼돈에 빠집니다. '좋은 나무 따로 있고 나쁜 나무 따로 있으면 나는 무슨 나무에 속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별로 좋은 나무에 속하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면 조금 더 심각해집니다. '그럼, 나쁜 나무는 그 뭐냐 회개하고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는건가? 영영??? 조금 불안하고 찜찜합니다. '나쁜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데?' 이거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너무 미리 앞질러 걱정하지 맙시다. 도입부 안에 열쇠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아는 체 四字成語로 하면) 말 그대로 羊頭狗肉과 같은 '거짓 예언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물론 우리처럼 이렇게 강론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면서 폼잡는 사람들에게는 찔리는 게 많은 말씀이지만 여러분은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깨인 안목이고, 거짓을 경계하는 지혜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초대교회 시절에는 여러가지로 혼란스럽고 정리가 안돼 있어서 개중에는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면서도 턱도 없이 존경을 바라고 높이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예언자로 자처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며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겉으로는 위해주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챙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그런 거짓말쟁이들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거야 눈별력 있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고요..........

예언자라는 단어를 성직자라는 단어로 대체하면, '열매로 그들을 알아 보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오늘의 성직자들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경고로 들립니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삶의 모양을 조심스레 눈여겨보며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교우들의 눈길이 있기에, 아무리 겉으로 꾸미면서 얼마간 아닌 척해도 마침내 열매를 알아보는 눈길이 있기에 결국은 알아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성직자들도 내면으로부터 옳게 살고 반듯하게 살지 않으면 불에 던져지는 나무가 되리라는 주님의 충고로 들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좋은 예언자가 좋은 말씀을 전해주는데도 신자들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참으로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사목자들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사목자들을 떡 주무르듯 비판하는 여러분들의 오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잘되고 이기고 복많이 받는 것을 원하십니까? 잘되는 것만이,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복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범림받아 복을 받지 않은 것일까요? 그런 복을 못 만들어주는 교회나 사목자들은 전부 잘 못된 사람들입니까? 다시말하면 내가가 느끼는 복의 기준에 의해 교회와 사목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나왔다고 심보가 바뀌면 냉담하고 배교하고 그러는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에서 오늘의 교회나 신자들은 하루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오늘 묵상은 신자 여러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예언자를 중심으로만 하겠습니다. 우리 시대를 보면 사목자, 신자 그리고 교회가 비윤리적이고 비신앙적인 흐름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서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자정 역할을 잃어 버린 것같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앞에 정직히 설 때만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공의, 사랑과 공평을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와 아니오를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성서의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앞에서 제 소리를 내었던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함께 선포했고, 하느님의 공의와 진리에 근거하여 바른 소리를 역사앞에 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3장에는 예레미야가 거짓예언자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다섯 개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23, 9-12. 13-15. 16-22. 23-32 그리고 33-4-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복음은은 이 다섯 개의 말씀중 세 번째와 네 번째부분에 해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아는대로 눈물의 예언자입니다.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목전에 바라본 사람이며, 또한 당대의 수많은 거짓예언자들과 논쟁을 했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만 했었던 고난의 예언자였습니다. 본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예언자라하면 글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하는 예언자입니다. 반면에 거짓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 그리고 그 예언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좋게드는 말 즉 그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을 전하는 자입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적대자였던 거짓예언자들은 궁정에서 왕과 가까이 있어 당시 소위 왕의 구미에 맞는 예언 아닌 헛된 예언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축복과 평화만을 예언했고 빌므로서 권력에 아첨하며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아 전체를 보면 곳곳에 이들 거짓예언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3장에만 보더라도 저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3,10절을 보면 "이 나라에는 들끓느니 간음하는 것들뿐, 이런 자들 때문에 땅은 마르고 광야에 있는 목장은 타버린다. 못된 짓이나 하러 쫓아다니며 있는 힘을 모두 버리는구나."
또 13절에서는 "나는 보았다. 사마리아 예언자들의 어리석은 짓을! 바알을 불러 예언하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 인도하였다."고 말합니다.

바알이 어떠한 신입니까? 그것은 풍요의 신이요,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신이요 복만을 가르치는 신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를 이끄는 신 그리고 세상과 이 땅의 교회가 미혹되어 오늘도 좇아가는 신이 곧 바알신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바알을 좇고 있는지 아니면 참 신인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볼 때입니다. 14절에서도 "나는 보았다.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망측한 짓을! 간음하며 헛소리를 따라가고 못된 것들 편이 되어주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 하나 없어, 내 눈에는 모두 소돔같이만 보인다. 그 시민이 모두 고모라 주민같이만 보인다." 고 했습니다. 이제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하느님의 탄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15-16절에서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이 예언자들을 어찌 할 것인지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예루살렘 예언자들이 썩어, 온 나라도 따라서 다 썩었다. 이제 그것들에게 소태를 먹이고 독약을 마시게 하리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내 말이라 하고 전하는 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다. 제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면서 너희를 속이는 것들이다."...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서 하느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심판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저들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은 21절을 보면 하느님이 보내지 않은 자들이고 그들에게 말씀하지도 않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26절 후절을 보시면 저들은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했던 자들이고 27절을 보면 바알에 근거하여 거짓을 예언했던 자들입니다. 30절을 보면 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도적질한자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32절을 보면 저들의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예언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판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누가 거짓예언자이고 참 예언자입니까? 그 판단 기준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예언자이기에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1차적으로 저와 같은 사목자이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과 같은 신자들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기에 여러분 모두가 또한 에언자적 책무가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의 예언자들과 대사제(제사장)들은 타락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바르게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유다의 여호사밧왕이 이스라엘왕 아합을 찾아가 아람을 쳐서 라못길르앗을 도로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의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유다의 여호사밧왕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이 일에 대한 야훼의 뜻이 어떠한지를 물어 볼 것을 요청하고 이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왕 아합은 예언자 400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물었고, 이들 400명의 예언자들은 "공격하십시오. 야훼께서 라못길르앗을 임금님 손에 부치실 것입니다." 라는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 때 여호사밧이 "이들 외에 우리가 물어볼 만한 다른 야훼의 예언자는 없습니까?" 라고 하자, 이스라엘왕 아합은 미가야라는 한 예언자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왕상 22장 8절입니다. "야훼께 뜻을 여쭈어줄 자가 하나 더 있기는 합니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는 자인데,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내가 하겠다는 일이면 사사건건 잘되지 않으리라고 하는 자입니다. 한번도 잘되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결국 왕은 그를 불렀고, 미가야는 천상회의의 비젼을 보면서 왕에 대한 부정적인 예언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왕주위의 많은 예언자들과 다사제들은 왕의 귀에 듣기 좋은 구원과 위장평화만을 말했지, 정작 하느님의 뜻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는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당시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하게하는 주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못했기 때문이요, 제대로 선포되지 못했고 시대의 흐름에 타협했기에 당시 예언자들과 성전 대사제들이 타락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깨어 있을 때만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판적으로 돌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고 말씀이 교회와 신자들의 삶속에서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왜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성전을 더럽히는 타락된 일들이 이 시대의 성전에서 만연하고 있어 교회가 병을 앓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들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목자로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리는 것은 평신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같은 사목자들이 바르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신자가 말씀에 바르게 깨어 있을 때만이 하느님의 교회를 성직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뿐더러 그러한 깨어 있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교회를 바르게사목자와 함께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마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좋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야지만 좋은 마무가 다시 만들어집니다. 훌륭한 사목자가 훌륭한 신자를 들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훌륭한 신자가 훌륭한 사목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훌륭함이란 인물이나 학벌이나 배경이 아니고, 오로지 말씀이 토양이 되어 있는 그런 교회를 말합니다. 사목자와 신자 이 두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시대에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해야 될 이 땅의 교회마져도 이 세상의 풍습을 좇아간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르시도의 지체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또 우리 신자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만약에 교회나 신자들이 세상적인 권세와 명예에 탐닉한 자랑, 물질적 풍요, 거짓평화로 하느님의 성전을 오염시킨다면, 다시말해서 더 이상 하느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그렇게되면 결국 말씀은 제대로 선포되어지지 못하고 있고, 신자들 곧 교회는 이 세상에 아첨하고 빌붙어 살므로서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른채 그져 둥둥 떠가는 나침판 잃은 배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명예를 얻어 출세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얻는 것이고, 또한 교인수가 늘어 거대한 교회를 짓는 일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축복인양 되어 버린 풍조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교회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평신자와 사목자들이 정말 하느님의 말씀에 바르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그나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서 23,29절의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불과 방망이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이중적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과 방망이가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세련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일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다시 한번 정직히 불과 방망이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앞에 서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사라지고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모습으로 빚어져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복음의 마무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 예언을 분별할려면 항상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깨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인 불과 방망이로 우리를 단련시켜야 합니다. 즉, 하느님 말씀으로 늘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것에서부터 과감히 돌아 서십시오. 거짓예언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자신을 예배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그러므로 이 시대와 교회와 사람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잘 살 수 있는지를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름으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사랑의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구하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을 통하여 우리 시대가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아멘)........◆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