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25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6. 24. 10:21

  2007년 6월 25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오 7,3)

 

 Why do you notice the splinter in your brother's eye,
but do not perceive the wooden beam in your own eye?

 

  

 다른 사람 눈 속의 티는 쉽게 발견하면서 자기 눈 속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먼저 알아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의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등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명령대로 그는 먼 길을 떠납니다. 위험도 확률도 결과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순종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람의 결단과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람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응하고 살면 누구에게나 약속의 땅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땅을 자주 청하면서도 정작 주어질 순간에는 망설이고 맙니다. 아브람처럼 떠나야 합니다. 망설이지 말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떠났습니다. 나이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었다고, 고통이 너무 많다고,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우리는 남의 약점은 쉽게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빼내라고 하시는 들보 가운데 가장 흔한 들보는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입니다. 먼저 내 탓으로 보고 내 몫으로 돌리는 것이 자신의 앞날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새벽을 열며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사람이 지혜로운 이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훌륭한데 저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그러자 지혜로운 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자기 집 앞의 뜰로 나갔습니다. 뜰에는 크고 울창한 나무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한동안 나무만 쳐다보고 있던 지혜로운 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지요.

“이 나무들을 잘 보시오. 이 나무는 크고 저 나무는 작지요. 그러나 두 나무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더러 ‘봐라, 난 커서 훌륭해.’라든가 작은 나무가 큰 나무더러 ‘난 키가 작아서 열등감을 느껴.’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아름답습니다. 큰 나무는 구름에 가깝게 있어 좋고, 작은 나무는 땅에 가깝게 있어 좋은 거지요.”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지요.

“오직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생명들은 가치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존엄성을 갖는 것이지요. 따라서 자신에 비해 남들이 화려한 빛깔을 낸다하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나만의 빛깔’도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총총히 빛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살아있다는 사실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우리들의 잘못된 마음이지요. 즉,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외의 것은 비교의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판단함으로써, 때로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으로 또 반대로 나의 이웃을 가장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하느님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함인지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할 필요도,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잊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랑하면서 살면 그만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경솔한 판단      

-박영봉 신부-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태도와
모든 말을 삼가야 합니다. 이웃의 도덕적인 결점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은연중에라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경솔한 판단의 죄를 짓습니다.
타인의 결점이나 과실을,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유 없이
알리는 사람은 비방의 죄를 짓습니다. 허위로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해치고,
그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의 계기가 되는 사람은 중상의 죄를 짓습니다.
경솔한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웃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가능한 대로
좋게 해석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웃의 주장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을 선의로 이해하도록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에 맡김으로써,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받게 될 심판을 앞당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현세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대죄를 지은 채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회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화가 날 때면 산책을 나가십시오 ♣

-양승국신부-


   고령의 노인이 의사에게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아주 건강했습니다. 의사가 노인에게 건강하게 산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결혼 초에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지요. ‘내가 화나면 당신이 부엌으로 비켜주고, 당신이 화가 나면 내가 산책을 나가겠소.’ 라는 거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거지요. 하하.”(‘부부로 산다는 것’, 이즈덤 하우스 참조)


   신혼 초에 내렸던 두 분의 결정,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보통 현실이 아니라 쓰디쓴 현실입니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스파크가 번쩍 번쩍 튀는 꿈같은 나날은 한 순간이지요. 결혼은 매일같이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 년, 이년, 삼년이 지나가면 아무리 외면하려고 기를 써도 배우자의 결함이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 결함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돌아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 크게 먹으면 참아 넘길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한두 번 조용히 말로 이야기할 때 마음에 안 드는 버릇 좀 고쳐주면 좋을 텐데, 죽어도 협조를 안 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속상하게 하니 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속으로 판단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 평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마다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심판하고, 단죄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밖으로 나가보십시오. 근처 공원을 거니십시오. 가까운 야산을 오르십시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과 접하십시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옹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한 일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해온 버릇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인내와 기도로만이 해결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내 판단이 100% 잘못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 단죄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우리는. 자기 코가 석자면서도 늘 상대방에 신경 엄청 씁니다. 자기 정리도 안 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릅니다.


   상대방이란 존재를 잘 견뎌내는 것, 이웃을 잘 참아내는 것은 덕 중에서 큰 덕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생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때로 상대방도 나를 순교자적 인내로 참아가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가족을, 동료를, 형제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존심 강하고 콧대 높은 우리의 스승으로 배우자, 가족, 동료,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꽤 무겁고 큰 나무토막을 말함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아브람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떠나라고 하셨다. 아브람으로서는 아직 볼 수 없지만 미래에 주어질 땅,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시고, 복을 주시며, 나아가 아브람을 유명하게 하여 그 이름을 길이 떨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사실 하느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의 이름은 위대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17,4-5), 예언자(20,7), 하느님의 종(시편 105,5-6), 하느님의 친구(야고 2,23)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성조요,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며 전달자가 되도록 하시어 누구든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하느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종 아브람에게 복을 빌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저주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아브람은 하느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은 곧 행동기준이었다. 그가 가나안 땅을 지나 세겜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훗날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50,24; 출애 3,15-20) 또한 민족의 일치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이 되기도 하였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아 주님께 바쳤다. 그는 다시 그곳을 떠나 베델과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치고 주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며, 예배드렸다. 그리고 아브람은 계속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은 하란이란 도시에서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게 살았다. 넉넉한 재산과 많은 종들을 거느리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시란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이 살기 편하도록 정비되어 있고, 문화시설이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고, 그래서 사람이 모여서 도시가 된다.

더욱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람이 175세까지 살았으니(창세 25,7) 이때는 중년기라고 할 수 있다.

중년기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하고, 변화를 기피한다. 시력도 감퇴하고 근력도 약화되어 의욕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의욕이 있어도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시기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편안히 안주하고 싶어 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체 없이 짐을 꾸려 식솔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난다. 정들었고 살기 편한 고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머물 곳이 어디이며 언제 안주할 지도 전혀 모른 체, 오직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난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무작정 길을 떠나는 아브람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을 보게 된다(마태 4,18-22).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처럼 떠남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죄악이 가득한 곳을 떠나 하느님의 정의와 거룩함이 충만한 곳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역시 아브람처럼 현실과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한다.

아브람처럼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야 한다. 순례하는 가운데에서도 기도와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아브람처럼 하느님과 끊임없이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신앙인이 되자............◆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
이상영 신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알 수 없게 하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 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주 특별한 인간이며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이미지들, 거짓된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자신을 대단히 중히 여기는 등등의 생각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인 역시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허구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꿰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그것은 부풀려집니다. 잘못되어 있거나 이상한 것은 언제나 상대방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편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사람 속에서 모든 잘못을 들추어 내는 것입니다. 선해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선하게 존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선한 것, 두가지 입니다.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잘못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현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이 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토록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함을 과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과장시킨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과장되고 투영된 다른 사람의 악함 앞에서 우리는 마치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비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하면 우리는 입에 힘을 주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방식으로 많든 적든 소위 선한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누구나 타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세계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 변화는 우리가 허구를 떨쳐 버릴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알게 되면, 우리가 만일 자신의 진실성 없는 삶을 알아차린다면 그런 허구들은 곧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허구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뚜렷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부터 그 들보를 들어내면 우리는 비로소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가슴은 따뜻하다

 -이봉하수사-


 한국 천주교회는 1970-80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두 번에 걸친 교황님의 내한과 성체대회를 통해서 신자수 또한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숫자에 비해 교회는 신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회는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전개하여 큰 효과를 얻었고,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도 ‘먼저 너 자신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한 가운데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보다 남을 탓하고 단죄하는 행위는 창조 이래 변함없이 이어온 사람들의
단적인 모습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죄의 한 조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우리는 스스로 소홀히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상 자신의 치부는 감추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허구로 드러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네 탓을 하기 전에 내 탓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사회는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고 또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아 있는 자신이 성전임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는 우리가
오히려 이방인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기정만신부-


 우리 성당 안에는 ‘사랑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노인복지를 위해서 지어진 것인데, 매일 어르신들이 오셔서 점심을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합니다. 이곳에 가면 ‘사랑마을’이란 이름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기쁘게 봉사하고,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담소도 나누며 기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사랑마을’에서는 비교나 질투 그리고 투정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 자리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마을’을 이루어 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마음으로 행하기에 그렇습니다. 웃으며 찾아오는 어르신들, 반갑게 맞이하는 봉사자들, 기쁨으로 음식과 재료를 내어놓는 이들로 이루어졌기에 이곳엔 늘 평화가 있습니다.

이 모습대로라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린다면 판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느님께 봉헌하지 못할 때 우리 삶에 여러 부정적인 아픔과 상처를 만드는 판단이 자리하게 됩니다. 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판단으로 인한 시기·질투·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을 통한 사랑과 평화가 우리 삶의 자리에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나쁘게 판단하지 마라

-이홍기 세례자 요한 몬시뇰-


 . 마태오 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주요 설교 모음집인 산상설교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들어 있는 7장부터는 설교의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그 대상도 주로 제자들, 곧 지역 교회의 공동체 내부 사람들, 나아가서 모든 시대의 공동체 구성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본당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도 됩니다. 오늘 복음은 남을 단죄하거나 나쁘게 보는 태도를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판단하다’는 단순하게 옭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자기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쁘게 비판하거나 죄인으로 단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대인 관계에서 흔히 저질르는 잘못을 잘 아시고 훈계하십니다. 우리는 입을 열었다 하면 남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그것도 남을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남을 욕하거나 결점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때로는 남의 숨은 약점까지도 보태거나 과장해서 꾸며댑니다. 그러한 심리 이면에는 남을 깍아내리면서 자신을 치켜 세우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표현하자면 ‘너는 못나고 나는 잘났지’ 생각하는 이른바 엘리트 의식이라 할까요. 특히 그런 현상은 우리 한국 사람들과 한국 교회 안에서 심한 편입니다. 모두 ‘내 탓’은 없고 ‘너의 탓’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판단하는 그대로 판단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저울질을 당할 것’이라는 원칙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원문의 내용대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되어주는 되만큼 되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종말 심판 때에는 남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동태보상률이라고들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판 때에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기준은 최소한 두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 한가지는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의 기준이고, 다른 한가지는 당사자들이 이웃에게 적용한 엄격하고도 다소 왜곡된 판단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이웃을 나쁘게 판단하지 맙시다. 이웃을 좋게 보아서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남을 비판할 때에는 열 번 백번 신중하게 생각하고, 나의 비판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를 살펴보고 하여야 합니다.

2. 또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든 티를 빼내주려는 태도를 책망하시면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눈에 보일가 말가 한 작은 먼지같은 남의 결점은 용케도 잘 보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마도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격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도 앞의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경고의 연장선상의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을 비판할 때에는 그 사람의 결점은 크게 부풀어서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숨기거나 너그럽게 대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주로 일반 백성을 ‘땅의 백성’(암하아레츠)이라 하여 무시하고 그들의 결점을 부각시키고 단죄하곤 하였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사들을 꾸짖으실 때에 흔히 쓰시던 말씀입니다. 지금은 비록 예수님 시대와 다르지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언제나 남을 헐뜯고 욕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속하지나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험을 안고 사니깐요. 따라서 사랑이 넘치는 건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다음 몇가지 사항을 기억하고 실천합시다.

1)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 맡깁시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껴안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겉 모양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르치기 쉽고, 흔히 색안경을 끼고 낮춰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2)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부족을 잊어버리고 혼자 완전한 사람인듯 착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남에 대해 불평 불만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우리의 비판이 때로는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남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함부로 남의 결점을 그렇게 선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못난 우리들을 잘 아시면서도 어여삐 보아 주시고 용서를 베푸시며, 벌을 주시면서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고자 애를 쓰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도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이기양신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우리는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말 한 마디로 원수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과 싸움이 ?말?에서 시작이 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싸움으로 치닫기도 하고 또 화해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사람과의 관계 대부분이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하며,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쓰러뜨리기도 하지요.

지혜로운 말과 어리석은 말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남을 감싸주고 칭찬하는 말들은 지혜로운 말이지요.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들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을 막은 한 줄의 글을 소개합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지요.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 있는 기사였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글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담은 지혜로운 말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불에 기름을 끼얹듯 성난 국민을 선동하는 모난 기사가 실렸다면 아마도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7,1)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나쁘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쁘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 또한 그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쁜 말과 행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워서 침 뱉는 사람?이지요. 누워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이 어디로 떨어집니까? 바로 내 얼굴로 떨어지지요. 남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나에게는 더 고약한 말이 돌아오는 법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남을 판단하고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태도입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7,2)

그렇습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웃을 욕하고 저울질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저울질하시기 전에 벌써 이 세상에서 그와 똑같이, 어쩌면 그 이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말을 조심하고 지혜로운 말로써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7,3-4)

오늘도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공격적인 말들과 사건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나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휩쓸리면 같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 와중에서도 이웃을 살리고 희망을 주는 긍정적인 말들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 이것이 복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내 말 한 마디가 깨어지고 상처가 나서 보복하고 싶은 감정들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언어만을 세상에 심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강영구신부-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대에게

저는 언제부터인가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눈을 쳐다보면 그 눈 속에 대체로 그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사람,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푸른 눈을 가진 사람,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사람,
풍덩 빠지고 싶은 호수처럼 그윽한 눈을 가진 사람,
별처럼 빛나는 보석 같은 눈을 가진 사람,  
입으로 말하기보다 눈으로 말을 하는 사람,
입으로 웃지 않고 눈으로 웃는 사람,
언제나 글썽한 눈물을 가득 담고 말하기 전에 눈물부터 주르르 흘리는 사람,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눈을 가진 사람,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기대고 싶을 만큼 듬직한 눈을 가진 사람,
저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사람,
거짓과 교활함을 감춘 간사한 눈을 가진 사람,
미움과 증오를 담고 적개심으로 붉게 충혈 된 눈을 가진 사람,
죽은 동태눈처럼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사람,
무엇엔가 정신을 빼앗기고 초점 잃은 눈을 가진 사람,
저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마태6,22)
당신은 어떤 눈을 가졌는지 보고 싶군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판단은 하느님의 몫 †  

-박상대신부-

마태오는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받지 않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과 되어 주는 되많큼 되어 받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 그리고 티와 들보의 상징어를 모두 어록에서 옮겨 썼습니다. "판단하지 말라"에서의 '판단'은 단죄를 뜻합니다. 이는 이웃을 단죄하면 하느님에게서 단죄를 받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의 반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꼭 필요한 경우에는 잠정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되 최종 판단만은 하느님께 맡기면 될까요? 대부분의 현대인이 이와같이 이웃의 잘못을 단죄합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인 힐렐은, "이웃의 상황에 있기 전에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오늘 산상설교의 테마는 판단과 교정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옳고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남의 잘못을 타일러 고쳐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내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굳이 남을 판단해야 한다면 자신도 판단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남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려면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부터 먼저 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다보면 비판과 판단의 말도 섞여 나오기 마련이고,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것이 필히 자기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2절)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다른 사람의 전체적인 사람됨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한 행동을 두고 보더라도, 그 원인과 경과를 알지 못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만약 원인과 경과를 안다 하더라도 판단의 기준이 보편적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며, 자신만의 다양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그런 판단의 권한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판단이나 심판은 하느님의 일이요, 그분만의 몫입니다.

남의 잘못을 교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을 교정하자면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온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가 들어 있는데, 무슨 재주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라도 볼 수 있겠습니까?(5절) 이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것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남보다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여겨야 하는 미덕을 말합니다.

즉 남의 죄는 티끌이요, 자신의 죄는 들보로 자각하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교정하려면 할 수는 있으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용기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빼내주기 위해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먼저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탓하는 일에 나설 리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랍비는 그 사람을 창문가로 데려 가서는 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하자, 랍비는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모습만 보인다고 대답하자, 랍비가 다시 묻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창유리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에는 그대의 모습만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거울은, 거울의 유리 뒤에 칠한 수은 때문에 남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볼뿐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 뒤에 칠해진 이기심과 욕심과 아집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험담하고, 비방하며, 단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도록 요구하고 종용하며, 때로는 강요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네가 남을 단죄하는 일이 없다면 용서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