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Margaret K 2007. 6. 23. 02:23

   2007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의 역할은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면서 그리스도의 앞길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일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처럼 반대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과 충직함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열정과 충직함을 본받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루가 1,66)


All who heard these things took them to heart, saying,
"What, then, will this child be?"
For surely the hand of the Lord was with him.

 

 

  

 즈카르야도 엘리사벳도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고집한다. 친척 가운데에 그런 이름이 없다고 해도 부모는 막무가내다. 천사가 그렇게 이름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늘이 보낸 사람이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천사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

 

 세례자 요한은 이름 그대로 세례와 연관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례에서 죄 사함의 의식은 돈이 많이 들고 절차도 무척 까다로웠습니다.
죄를 씻고 정결한 위치로 돌아오려면 먼저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최소한의 예물이 비둘기였고, 사는 게 조금 괜찮은 정도라면 양이나 송아지를 바쳤습니다. 가난한 서민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 앞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죄 사함의 간편한 방식을 선언하였습니다. 어떤 죄라도 요르단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나오면 죄가 사하여진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긴가민가하는 대중 앞에 예수님마저 나타나시어 주저 없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죄의 그늘을 없애 준 영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메시아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은 자라고 힘차게 외칩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요한은 참으로 위대했던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저녁 학생 미사 때 강론을 시작하면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강론을 두 가지 준비했는데 어떠한 것을 할까요? 첫째는 길지만 재미있는 강론이고, 둘째는 재미는 없지만 짧은 강론입니다. 자~~ 어떤 강론을 할까요?”

과연 학생들은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두 번째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미사를 그렇게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두 번째 비록 재미는 없지만 짧은 강론을 선택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없음이었습니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서 ‘떠들어라. 나는 관심 없다.’라는 식이었지요. 저는 그 썰렁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재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는 뜻밖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관심 없는 그 모습이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저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학생들을 좀 더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라고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그 결과에 학생들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을 간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양 어떤 결론을 미리 내리고 그 결론에 다른 것들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 과정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했으며, 그들의 아픔과 상처는 어쩔 수 없는 과정 속의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은 주님의 뜻에 따르는 그의 부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을 낳게 되리라’는 말을 믿지 않아서 귀가 멀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이름을 결정짓는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하지요. 그리고 엘리사벳은 여자의 권위가 그렇게 높지 않던 그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유로 힘 있게 앞으로 나와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이 세례자 요한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종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따르고 싶어 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욱 더 좋아 보이고 관심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 뜻을 따를수록 주님과는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서, 다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즈카르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려 할 때, 우리의 입도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뜻만 옳다고 박박 우기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찬미의 의미    

- 박영봉 신부-


 찬미는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찬미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기리는 것입니다.
또한 찬미는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은, 영광 중에 하느님을 뵙기 전에,
믿음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누리는 참 행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찬미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과 일치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며, 그 외아들을 증언하십니다.
그 외아들 안에서 우리가 양자로 받아들여지고, 그 외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는 기도의 다른 형태들을 통합하여, 만물의 근원이시며
목표이신 그분께 인도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1코린 8,6).
신앙은 청원과 전구를 통하여,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고,
‘모든 완전한 선물을 내려주시는 빛들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순수한 찬미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이회진신부-


오늘 우리가 읽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일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느님의 천사와의 만남 이후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말씀을 주의 깊게 알아듣기 위해서

외적 침묵에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요한의 탄생과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첫 번째로 자신의 입술 위에 올려놓은 말은 하느님의 찬미하는 찬양의 기도였습니다.


즈카리야의 10달 동안의 침묵은

그에게 그 자신의 침묵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그가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었다면

이제 그는 정확히 하느님의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즈카리야가 글 쓰는 판에 썼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의 10달간의 긴 외적 침묵은

그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었던 것이죠.

즉 그는 침묵을 통해 이제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루가 복음 1장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써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며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만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요한”이라는 선언하도록 이끄는

즈카리야의 침묵과 찬미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이끄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침묵과 찬미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에 신뢰를 두고 침묵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전하길 기다릴 때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공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며,

우리 입술 위에 올려지는 소리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엘리사벳과 즈카리야와 세례자 요한에게서만 일어나는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다른 이들의 모습과 말 가운데서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만들며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그분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손길,

즉, 성령과 함께 살아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놀라움은 바로 침묵과 묵상과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세례자 요한이라는 위대한 예언자가 있기 전 그렇게 우리들 가운데는

침묵과 묵상과 기도가 함께 했습니다.


“주님, 타인의 마음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저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주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

-조욱현신부-


 구약성서에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사악을 낳은 사래, 야곱과 에사오를 낳은 리브가, 삼손의 어머니, 사무엘을 낳은 한나 이 모두가 엘리사벳과 같이 아이들을 낳지 못하던 여인들이었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도 열심하고 하느님 앞에 흠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슬하에 아이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개입으로 잉태를 하였고 마침내 세례자 요한을 낳았던 것이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평소 하느님을 두려워하던 사람들로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요한을 얻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탄생과 여드레만에 치르는 할례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주변의 사람들은 두려워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

-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예수의 전형(前型)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고 모든 이를 예수께로 인도했다. 참으로 모든 신앙인이 가야 할 모범이시다.


1.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예수 탄생의 전주곡이다


세레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리고 오래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출을 알리는 새벽빛처럼 오신 분이다. 오랜 침묵의 기다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며 참고 기다려 온 밤의 끝자락에서 동트는 해와 같이 오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열강들의 쉴 새 없는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할 그 때에도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며 메시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마태3,4)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3,2)외치자 백성들의 시선은 일제히 요한에게로 쏠렸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그분이 오시는가 보다"하며 긴긴 기다림의 한(恨)이 한꺼번에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요한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2.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눈이 번쩍 뜨일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마태3,5-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마태3,3,13이하) 그만큼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가짜 메시아들은 "나를 따르라"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 나보다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1,7-8)고 선언하였다.

남의 입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 먹으려고 혈안이 된 듯한 세상에서, 자기를 메시아로 여기며 모여드는 백성들을 그대로 예수님께로 돌려보내기란 분명 쉽고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지 않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사목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세례자 요한을 격찬하셨다.

3. 예언자는 죽음으로 말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6,14-29참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그렇게 극찬한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시숙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사는 여자 헤로디아의 욕심과 원한의 희생물로 어이없이 죽고 만다. 딸의 춤사위를 보고 기분이 좋아 딸에게 내 뱉은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마르6,22-23)는 한마디의 허풍 가득한 맹세. 이 기회를 놓칠세라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시켜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다 주십시오."(마르6,23)하고 청한다. 참으로 기쁨을 나누는 생일날에, 초청한 귀빈들 앞에서, 그것도 어린 딸을 시켜 청할 수는 없는 끔찍하고 사악한 발상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그 헌신짝 같은 맹세를 지켜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고 만다. 어찌 하느님의 예언자가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종으로 열심하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을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 대 예언자가 이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가끔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해 봐야 한다.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하며 인간들뿐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극도의 고독 중에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결코 평화와 위로 가득한 가운데 숨을 거두시지 않았다. 링컨도, 마르틴 루터 킹도, 마하트마 간디도 모두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 비명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예언자의 가장 힘있는 외침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서 울려 퍼진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외치다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할 때 진정한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고, 그 정의를 외치다 죽음을 당했기에 참 예언자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못지 않게 '무엇을 위해 죽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축일에 깨닫자.


 


 

 -김명선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축일을 맞으신 모든 분께 사랑과 축하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라고 요한에 대해서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마르, 1,7) 라고 자신을 낮추십니다. 종들이 하는 일, 그것도 주인의 모든 일을 의무로 해야 하는 종들에게 유일하게 의무로 하지 않아도 될 조항의 일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신 세례자 요한의 삶을 닮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세상은 온통 겸손의 미덕으로 가득 차리라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로 아들을 얻게 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집에는 기쁨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의 할례식이 있던 날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즈가리야’로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어주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의 어머니는 “안 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자 사람들은 “당신의 집안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아기의 아버지에게 한번 물어보는 것이 좋겠구려.” 하고서는 아기의 아버지에게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자 작은 서판에 “아기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즈가리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위에 모여 있던 친척들과 사람들은 놀라움과 더불어 주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는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던 부분을 잠시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제였던 즈가리야는 성소에서 분향을 드릴 때 주님의 천사를 만나고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때 “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라고 불신을 합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함으로서 생기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실천하는 순간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섭리 속에서도 이루지 못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무리 추악하고 피폐한 곳에도 당신의 사랑이 머물러 있으며 그 사랑의 힘으로 빛이신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그 빛을 통하여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 환하고 밝은 세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정상천신부-

 

오늘은 대림 시기 때, 복음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어제 예수성심대축일을 기념했고, 오늘 또 다른 하나의 큰 축일을 지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그 어떤 예언자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세례자 요한은 겸손과 구원계획에 대한 순명을 겸비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요한은 해로데 임금에게 그 동생 아내와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 강직함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례자 요한의 성품 외에도 요한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가 떠올려집니다. 그중 오늘 묵상한 주제는 ‘주님의 마음으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6월을 예수성심성월로 보내고 있으며, 어제 예수성심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마음으로 움직인 분이십니다. 구원 계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말하것도 없이,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이 오실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반성과 아울러 다짐을 하게 합니다.

저는 지체, 맹인, 농아인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혹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주님께서 지체장애인이 되셔서 재림 때 휠체어를 타고 소문도 없이 불시에 각 성당을 방문하신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성당은 모두다 휠체어가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에까지 잘 올 수 있도록 길을 닦는데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시각장애인이라면 길을 헤매고 있는 그들을 나 몰라라 하지도 않을 것이며,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다면 대화가 힘든 주님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대화를 시도해볼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속에서 그분의 모습을 한 두 번 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좌판대를 통해 물품을 판매하는 상인의 모습, 점심 때 한창 바빠 끼니 제 때 챙겨먹지 못하고 손님이 오면 먹다가도 중간에 나가 손님을 맞이하는 식당 종사자의 모습, 사고가 나 보험사 직원이나 경찰을 기다리면서 안절부절하고 있을 모습 등, 각자 자신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모습을 반영시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 속에서 과연 주님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정답은 없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실지에 대해서 궁금해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저런 타인의 행위를 통해 이것이 주님의 뜻일까? 주님의 모습일까? 라고 단정 지을 노력이 허무하리라 봅니다.

주님께서 하자는 대로 그저 할 뿐,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순명과 겸손 때로는 강직함을 가진 그런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듣지는 않았지만 1독서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주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주님께서 요한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 그런 분”입니다. 복음에 요한을 보고서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도 보살피고 계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각자 몫에 맞는 그러한 공간과 시간에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함께 나눌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무엇인가 나눌 수 있게 작은 것이든지 큰 것이든지 나를 보내신 분이 곧 나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양승국신부-


돌아보면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수도회 연례피정이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당연히 공동침실을 사용했었고, 또 식사시간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어르신들이 계시는 메인테이블에 안 앉으려고 하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어디 모임에만 갔다하면 늘 독방신세이고, 초기 양성자들은 어떻게 하면 제 옆자리에 안 앉으려고 기를 씁니다.

이 말은 저도 슬슬 한 물가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이제 슬슬 노년에 대해서 신경을 쓸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도 해봅니다. 어떻게 죽어야 잘 죽나? 자주 생각합니다.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직면해야할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입니다. 사회인들에게 있어 그 정답은 너무나 확연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나름대로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의 영속성은 행복한가? 불행한가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노인들의 뇌리 속에는 경제력 있고 효심 지극한 자녀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과 독립성은 노년기 행복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건강 여부 역시 노인들에게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행, 불행의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심신이 모두 건강한 노인,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삶의 기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기초월의 길을 걷고 계시는 분들이지요. 비록 늦었지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달은 분들, 그래서 그 깨달음에 투신하는 분들의 모습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지나온 인생을 조용히 되짚어보면서 비록 늦었지만 자기 정화의 길을 시작하는 분들, 비록 험난한 여정이지만 영적 쇄신의 길을 시작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노년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가 비록 노년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무대 뒤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이미 충만한 영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무대 뒤로 사라짐이 결코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란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이 점점 커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기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는 일, 영적인 눈을 뜨는 일,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입니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이 세상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철저하게도 육적으로만 사는 분들, 철저하게도 세속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을 초탈하려는 분들 앞에는 새 세상이 펼쳐집니다. 주어지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목숨 걸고 싸울 일도 없습니다. 편안해집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 안에서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해서 주님을 향해 영적 여행을 시작하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인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생이며 의미 있고 새로운 인생이며, 영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한때 빗나갔던 우리 자신의 인생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떤 원인으로 인해 방향이 틀어졌는지 철저하게도 자신의 인생을 분석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확실하게 영적인 삶에로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길 기원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년을 위하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
젊었을 때의 그 순수함과 다감한 마음씨를 간직했으면...
점점 더 심해지는 아집과 집착, 그리고 편견 같은 것을 버렸으면...
아흔아홉 가지의 만족함을 팽개치고,
한 가지의 부족함에 목매는 어리석음도 놓아버렸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는 당신에 대한 그리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속에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고
사람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고 싶다.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이기양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모든 성인의 축일을 탄생한 날이 아니라 돌아가신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돌아가신 날이 천상에서 다시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지상에서의 탄생 날을 축일로 기념합니다. 이렇게 탄생일을 대축일로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 세례자 요한 세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축일은 12월 25일이고, 성모 마리아님은 9월 8일이지요. 이 축일만 봐서도 교회 안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와 같은 비중으로 존경을 받고 있을까요?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세례자 요한은 잉태되고 태어나 자라서 죽을 때까지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지요. 성모 마리아를 찾아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던 천사 가브리엘은 주님의 탄생 예고 6개월 전에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14)

즈카리야는 믿을 수가 없었지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1,19-20)

하느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던 날 아기의 할례식을 하던 성전에서 사람들이 아기 이름을 묻자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63)이라고 하느님의 섭리를 그대로 고백하고 나서야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자체가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으며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알아들을 수가 있지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준비했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난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구세주 예수님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었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사람들은 하느님의 손길이 세례자 요한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루카1,80)습니다. 그 후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언행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요.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루카3,21-22)

그런데 아직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이전이라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로 확신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많은 예언자들과는 달리 요한에게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써의 표징이 곳곳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묻고 따르자 세례자 요한은 증언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3,16)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지요. 과연 놀라운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인기가 올라가면 부화뇌동하듯이 주변의 상황에 휩쓸려 자기가 뭐라도 된 듯이 경거망동하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지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대중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당신이 구세주가 아니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기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큰 분인지를 미리 준비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하는 모든 시선을 단호하게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지요. 이러한 세례자 요한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7,28)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고백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예수가 누구이시고 또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깨달음이지요.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원만한 관계도 있지만 많은 경우 크고 작은 불화를 겪게 되지요.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과 정반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더 커지셔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나를 강요하기 때문에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도 세례자 요한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는 말씀에서 보이듯 나를 낮추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가정이 상처를 입고 안타까운 파경을 맞고 있지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만을 크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소리를 높이고 엄마가 높이며 심지어는 아이들까지도 자기 주장만을 앞세우지요. 그 결과는 관계의 단절과 그칠 줄 모르는 파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강요하면 원만해질 수 없을 뿐더러 어떤 단체도 불화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데 다 바친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그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가정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싸움이 있을 수가 없지요. 주님이 들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서면 아무리 조용한 곳에서도 평지풍파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이렇게 한번 살아볼 것을 여러분께 권합니다.

?나는 당신의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세로 한번 살아보지 않겠습니까? 구두에 신발끈이 없다고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말고 내가 커지기보다는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서로가 제공한다면 참으로 원만하고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7,12)하신 예수님 말씀과 맥을 같이 하지요. 우리 시대가 시끄러운 이유는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닮은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이 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뜻 깊은 하루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아이의 탄생의 비밀

-김지영신부-


한 생명의 탄생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한 생명이 자라서 어떤 인물이 되며,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아기가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준비할 뿐입니다. 전에 제가 혼인 주례를 했던 부부가 예쁜 아이를 낳아서 돌잔치에 초대를 했습니다. 한 아이의 돌잔치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으로 참 많은 사람의 위상이 바뀌는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 신랑은 아빠가 되었고, 신부는 엄마가 되었고. 장인·장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고, 누구는 삼촌이, 누구는 이모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거저 얻어진 위상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아이의 탄생은 이 아이와 관련된 주변의 모든 사람의 위상을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을 가졌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한 아이의 탄생은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아이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됩니다. 또한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이 생기며,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는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탄생을 두고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이 사람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습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요한’으로 그 뜻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의미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고 하듯,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이름 ‘요한’의 탄생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 구원의 서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모두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불림을 받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세례자 요한의 신앙 고백처럼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삶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커지실 수 있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성인들의 축일은 대개 돌아가신 날로 지내는데, 세 분은 탄생일도 축일로 지냅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분들의 탄생이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성무일도 독서기도 찬미가는 그의 역할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세상의 죄 없애는 거룩한 분을`
`성 요한은 손으로 가리키셨네.”

아침기도 찬미가에서는
“한 개의 화관으로 장식된 성인`
`또 다른 성인들은 두 개의 화관`
`요한은 더욱 많은 꽃이 꽂혀진`
`세 개의 화관으로 장식되도다.”

세 개의 화관이란 ‘눈처럼 깨끗하게 죄 없으시며’에서 동정의 화관, ‘사막의 개척자요, 크신 예언자’의 화관 그리고 ‘훌륭히 믿음 지킨 순교’의 화관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구조를 살펴보면, A 57절 엘리사벳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음은 A`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심(66ㄴ)과 맥을 이룹니다. B 58절과 B` 65-66ㄱ절의 이웃의 반응이 한 조를 이룹니다. C 59절과 C` 64절이 아버지 즈카르야와 연관이 됩니다. D 60절과 D` 62-63절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61절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란 구절이 한가운데에 남습니다.
왜 이 구절이 중심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웃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지만 실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란 뜻으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주님 친히 이것을 증명하십니다. ‘요한까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미약한 이해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하느님이 주신 아기이기에 ‘에드워드 1세, 2세’ 하듯 혈육에 의한 이름이 아니라,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ㄷ)고 하듯 하느님 뜻에 의한 이름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바야흐로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리는 전주곡 같습니다.

첫 서원을 하면서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나쁘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을 찬미로 풀어내야 하는 삶이라고. 수도자들은 밤 대침묵 후 아침 시간경을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입을 여는 이유는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 기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 즈카르야가 맨 먼저 한 말도 하느님 찬미였습니다(1,64). 그런데 그가 하느님의 일을 찬미하기까지는 열 달이라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야곱의 우물」 3월호 ‘장자 읽기’에 의하면 ‘심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으라.’고 하였지요. ‘귀는 소리를 듣는 데서 멈추고 심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머무를 뿐. 기는 비어 있어서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이는’ 그런 들음이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들을 줄 알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과 달리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의심하고 벙어리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운명처럼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구약의 첫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도 세 번째 부르심에서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합니다. 그 사무엘은 자라서 자기 뜻대로 한 사울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1사무 15,22)라고 질책합니다. 다윗은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습니다.”(시편 40,7)라고 노래합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어라!”에서부터 집회서(3,1)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듣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셨지만 제자들과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 듣지 않는 사람들인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공자님도 나이 육십에 이순(耳順)이라 하셨으니 제대로 듣는 일이 분명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이사 50,4)는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잘 들을 때 잘 말할 수 있게 되며, 잘 들음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좋은 터전입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는 데서 일치를 이룹니다.

아버지를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이 축복받은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지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기 위하여.

 

 

 

 “안 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돌아보면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수도회 연례피정이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당연히 공동침실을 사용했었고, 또 식사시간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어르신들이 계시는 메인테이블에 안 앉으려고 하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어디 모임에만 갔다하면 늘 독방신세이고, 초기 양성자들은 어떻게 하면 제 옆자리에 안 앉으려고 기를 씁니다.


이 말은 저도 슬슬 한 물가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이제 슬슬 노년에 대해서 신경을 쓸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도 해봅니다. 어떻게 죽어야 잘 죽나? 자주 생각합니다.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직면해야할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입니다. 사회인들에게 있어 그 정답은 너무나 확연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나름대로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의 영속성은 행복한가? 불행한가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노인들의 뇌리 속에는 경제력 있고 효심 지극한 자녀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과 독립성은 노년기 행복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건강 여부 역시 노인들에게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행, 불행의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심신이 모두 건강한 노인,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삶의 기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기초월의 길을 걷고 계시는 분들이지요. 비록 늦었지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달은 분들, 그래서 그 깨달음에 투신하는 분들의 모습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지나온 인생을 조용히 되짚어보면서 비록 늦었지만 자기 정화의 길을 시작하는 분들, 비록 험난한 여정이지만 영적 쇄신의 길을 시작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노년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가 비록 노년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무대 뒤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이미 충만한 영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무대 뒤로 사라짐이 결코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란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이 점점 커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기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는 일, 영적인 눈을 뜨는 일,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입니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이 세상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철저하게도 육적으로만 사는 분들, 철저하게도 세속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을 초탈하려는 분들 앞에는 새 세상이 펼쳐집니다. 주어지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목숨 걸고 싸울 일도 없습니다. 편안해집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 안에서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해서 주님을 향해 영적 여행을 시작하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인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생이며 의미 있고 새로운 인생이며, 영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한때 빗나갔던 우리 자신의 인생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떤 원인으로 인해 방향이 틀어졌는지 철저하게도 자신의 인생을 분석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확실하게 영적인 삶에로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길 기원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년을 위하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

젊었을 때의 그 순수함과 다감한 마음씨를 간직했으면...

점점 더 심해지는 아집과 집착, 그리고 편견 같은 것을 버렸으면...

아흔아홉 가지의 만족함을 팽개치고,

한 가지의 부족함에 목매는 어리석음도 놓아버렸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는 당신에 대한 그리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속에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고

사람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고 싶다.

 

 

  † 세례자 요한 :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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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간다. 부모를 잃고 피를 나눈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거 노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또 살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아무도 홀로 살지 않는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며, 노인이 된다.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모르는 사람이라도 길가를 서로 스쳐가며,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며 살아간다.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기도 하며, 속이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사람의 마지막은 모두 다 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덕을 발휘해야 한다.

세상의 사람이 모두 다 같다고 했지만 유독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를 두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고 말씀하셨다.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큰 인물이라는 말이다.

왜 세례자 요한만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홀로 가장 위대한 사람인가? 오늘 그의 축일을 맞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12월 25일 예수님의 성탄대축일을 정확히 6개월 앞두고 교회는 오늘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대축일로 기념한다. 교회의 공식 전례에서 성모 마리아(9월 8일)를 제외하고 지상 탄생을 경축하는 성인은 세례자 요한뿐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러한 대우는 방금 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합당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탄생예고 또한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 자리 잡은 요한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요한은 탄생이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잉태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인사를 통하여 거룩함을 영접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구원사적 역할은 우리가 그의 탄생을 경축할 만큼 중요하다. 첫째로 요한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연결역할을 담당한다. 요한의 출현으로 구약(舊約)은 중지되고 신약(新約)이 시작된다. 둘째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자(使者)로 파견되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그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하였으나, 요한은 자신을 이미 도래한 메시아에 비하여 그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존재로 소개하였으며, 말씀이신 성자에 비하여 자신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단식과 참회, 금욕과 기도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달리 살았던 것이다. 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으며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사람들을 예수께 넘겨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수께서는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 훌륭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왜 세례자 요한만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홀로 가장 위대한 사람인지가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도 그 한 부분을 말해준다.

루가복음사가는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 범주 안에서 요한의 탄생예고, 탄생, 할례식(루가 1장),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전도(루가 3장)를 독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두고 기뻐하는 부모와 그 이웃과 친척들의 모습과 율법에 따른(창세 17,9-27) 아기의 할례식을 들려준다. 아기의 탄생과 할례(割禮)는 이름을 짓는 명명(命名)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 순간 10달 동안 벙어리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즈가리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양하게 된다.(루가 1,67-79)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통하여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들은 무엇인가 대단한 것의 서곡(序曲)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것은 무언가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오늘 이 작은아이의 탄생 안에서 경이로운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음이다.

오늘 태어난 이 작은아이가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사람이 하느님의 오실 길을 고르고 닦으며 준비하고 있는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만이 홀로 위대한 이유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유독 요한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세례자 요한의 의로운 삶 †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오늘복음 묵상은 대부분 강론들이 루가복음을 중심으로 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그 내용을 중복하여 묵상하는 것 보다는, 탄생부분은 앞의 강론들을 참조하시고,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사명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예수보다 한 걸음 앞서서 등장합니다. 거의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활동에 앞서 요한의 출생과 그의 활약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그를 뒤따라 올 메시아 예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서 보냄을 받은 메시아의 선구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을 말할 때 요한부터 말하기 마련입니다.

요즘 정치현실로 말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하기 전에 현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정권인수위원장에 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선포이고 둘째는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뒤에 올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적 선포 또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임박한 메시아 심판의 경고, 윤리적 혁신,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사명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말하지 않고는 요한의 정체를 규정하기 불가능하고 그 반대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I.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사명

우선 루가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할 때 다음의 이사야서 구절을 인용하여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가 3,4-5)

이 귀절은 이사야 40장 3-5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례자 요한 자신이 밝힌 그의 정체(요한 1,23)와 관련된 말이기도 합니다.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우리 말 공동번역성서, 요한 1,23)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목소리"라는 것이 바른 번역입니다.

요한이 목소리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라는 목소리였다는 말인데 메시아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메시아를 보내신 하느님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목소리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 목소리가 전파한 것은 길을 고르게 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리고, 굽은 길을 곧게 하며, 험한 길을 고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 왕이 행차할 때 그 선발대가 앞서 가서 백성들에게 길을 보수하고 청소하게 하는 동양의 군주정치 하에서의 관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대통령이 행차할 때 경찰 기동대가 요란하게 출동하는 것과 같고 대통령이나 판사가 들어 올 때 외치는 소리이고 이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는 것과 비슷합니다. 메시아가 그의 선구자를 앞서 보내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권유하는 역할을 위해 세례자 요한이 보냄을 받아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준비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라고 요구했습니다. 토목공사와 관련된 말이기는 합니다만, 이사야서의 인용인 이 말씀은 물론 단순한 도로공사나 도로 청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제반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평등하게 바꾸라는 사회정의의 수립과 평화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오심을 준비하는 길은 개인의 내면적, 종교적인 사적(私的) 차원에서의 "마음"의 준비는 물론 사회적 삶의 실천적 차원에서의 준비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요한의 말을 뒤집으면 "주의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메시아가 오시지 않고 하느님의 구원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한 것은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교활동 중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례였습니다. 그는 예언자였지만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례는 그에게 아주 중요했습니다. 세례란 말은 "씻는다," "깨끗이 한다"는 희랍 말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루가는 세례란 말로 죽음의 경험(루가 12,50)과 성령을 받은 경험(3,16)을 말하고는 있으나 요한이 베푼 세례의 성격은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종교적인 세례와는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18절까지 다 읽어야 합니다만, 오늘 본문의 길이 관계로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6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 사실이나 예수님이 과연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고 신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문제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번역한 것은 희랍어의 '바람'과 같은 말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바람과 불을 동반하는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사막의 종파로 탈세계적이었던 엣세네 파도 세례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엣세네 파에서 전수한 것이 아닌가 라고 보는 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고아로서 아주 어릴 때부터 엣세네 파에 의해 입양되고 양육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엣세네 파의 세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 있다고 나는 봅니다. 즉 엣세네 파의 세례는 탈 정치적이지만, 요한의 세례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종교적 의미보다도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하고 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의 세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하는 교회 내에만 국한하고 있는 종교적 의식(儀式)의 차원보다도 더 광범하게 사회적-정치적 운동의 차원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거짓말을 한다거나 도덕적-종교적 계율을 어기는 것이나 좁은 의미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죄를 의미함은 물론이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예수만이 개인과 민족을 해방하는 힘이 있다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의 삶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을 죄로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요구, 이렇게 죄에 대한 광범한 이해는 유대사회, 특히 상류계층인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요한은 굉장한 카리스마적 설교자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증거를 보이고 그 징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루가복음은 이러한 요구로 도전한 세례자 요한에게 수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한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각각 그 직업에 따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사회 윤리적인 질문하였고 또 요한의 요구에 따라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요한은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적 삶에서의 신의와 정의를 세우라는 것, 평화를 도모하라는 것, 민족자주를 세우라는 것 등이었음이 주목스럽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이해입니다만, 하느님에게 돌아서는 것, 그리고 잘못된 일에 대하여 통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던 일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회개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직업은 세리들, 군인들로 되어 있고 일반 군중들도 요한에게 나와서 무엇을 개혁하고 회개할 것인가를 물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청중들은 군중들인데 이들은 한결 같이 그 사회에서 억압을 당하던 민중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군중들이 무엇을 가진 게 있다고 그들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가? 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다수의 군중들이 헐벗었고 굶주렸다면 그래도 입을 것이 있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이거나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분명히 부자하고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나은 사람을 의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라고 하였고, 군인들에게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2-14)고 말하였습니다. 외세의 억압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사회에서 로마식민당국에 의해 고용된 세리는 경제적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군인은 권력으로 민중을 위협하고 억압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등 권력남용을 자행하였고 이에 민중들이 얼마나 고생을 당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고 예수님은 이렇게 고난 당하는 민중들의 삶과 고달픔을 옹호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군인과 세리를 거명하여 고치라고 요구한 것은 권력자들에게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와 착취와 억압을 중단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곧 민중 해방적인 성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물론 인간 사회의 직업의 전부를 말하는 것도 모든 부류의 인간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그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주목을 받았고 지탄을 받고 있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데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세례를 통한 메세지는 구태의연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 그리고 사회적 현실로는 새로 동터오는 메시아 시대를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하늘나라의 정의는 당시 세상의 권력자에 의해 좌절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II. 세례자 요한의 순교(마태 14,1-12)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증거 했듯이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죽음도 가장 위대한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순교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점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를 질책하다가 헤로데왕에게 순교를 당한 것은 선각자다운 순교이며 사명자로서의 훌륭한 죽음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1. 헤로데왕의 인간성

신약에는 헤로데라는 이름이 여려명 있습니다. 마태 2장에서 베들레헴 지역의 어린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헤로데왕 혈통의 제1인자로 그의 이름을 대 헤로데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래로 아들들과 손자들로 6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유대 지역에 있는 여러 지방의 분봉왕직을 나누어 누리며 권세를 잡았던 자들입니다. 그 중에도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대 헤로데라는 자는 뇌물을 주고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왕으로 임명받은 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동안 퇴락한 즈루빠벨의 성전을 재건하기로 하여 이 대공사를 주전 19년에 시작하여 주후 64년경에 마무리졌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헤로데왕이 건설 중에 있는 성전에 출입하셨으며 완공을 보지 못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대 헤로데는 난폭한 성격과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으로 그가 사랑하던 아내 마리암메와 그의 아내의 조부인 힐키너느, 부인의 동생 아리스토불러스 그리고 자기의 아들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이 헤로대의 아들로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 사이에서 태어나 갈릴래아, 티베리아의 분봉왕으로 헤로데 안티파스란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를 일컬어 여우라고 부르신 일도 있으며 헤로데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으십니다. 이 헤로데왕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이 유다에 퍼지자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착각하리만치 정신적으로 혼미한 착란상태에 있었습니다.

2. 헤로데 안티파스 죄악

헤로데 안티파스는 혈통적으로 부전자전의 유전을 받아서인지 그의 생활면이 도덕적으로 패륜했습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질책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를 목을 베어 죽임으로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의 패륜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질책 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부끄러운 곳을 벗겨도 안 된다. 그것은 곧 네 형제의 부끄러운 곳이다."고 하셨습니다(레위 18,16).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2)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무시했습니다. 헤로데의 인물됨은 다윗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이유로 질책을 들었을 때에, 담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에 가둔 것입니다.

(3) 헤로데는 경솔한 맹세를 하므로 인생 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맹세는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헤로데는 맹세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함부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그 마음이 흥겨운데다가 헤로디아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는 약속을 맹세로 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의인의 목을 베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4)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정신적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세례자 요한이 살아나 다시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더욱 그의 생애는 정신적으로 극한의 불안과 두려움 상태로 살게 됩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순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에게 찾아가 그 앞에서 그의 패륜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한 후, 그의 사명을 마치면 순교로서 하느님께 갈 줄로 아셨습니다. 순교는 요한에게 합당한 죽음이며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순교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은 그 인도하심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의뢰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은 한낱 부도덕한 폭군에 의해 비록 ?은 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전부다 끝내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거룩한 임무를 완수하고, 주님을 위해서 이 세상을 물러간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세상 권세의 죽음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었으니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한 말씀을 그대로 이루고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