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22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07. 6. 22. 03:16

   2007년 6월 22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오 6,19-23)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also will your heart be.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다. 세상의 평가보다 하늘의 판단에 마음을 기울이라는 말씀이다. 곧, 사람들의 소리보다 은총의 이끄심에 더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이다

 

☆☆☆

 

 다이아몬드가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는 땅은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초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이 한탕을 노리며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벼락부자의 꿈을 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결코 만만한 대륙이 아니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장애물 앞에 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몇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린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온 이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가장 큰 다이아몬드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마어마한 돈을 제시하며 그것을 구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여 가지고 온 이들은 팔지 않았습니다. 숱한 동료들의 삶이 서려 있는 보석이었기에 돈과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 다이아몬드를 나라에 기증하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영국의 박물관에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벼락부자의 꿈을 안고 험난한 땅을 찾았던 그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 무엇이겠는지 우리 각자 묵상해 봅시다.

 

 

 

새벽을 열며

 

 오늘 점심식사를 끝으로 4박 5일간의 인천교구 사제연수를 마칩니다. 사실 처음 사제연수에 들어올 때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성당에서의 일이 많아서 성당을 비운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담되었거든요. 또한 제 개인적인 일들도 꽤 많아서 이번 사제연수 기간 동안은 성당에 있으면서 일들을 해야지만 앞으로의 일정에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인천교구의 신부이기에 빠질 수 없어서 지난 월요일에 인천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신부님들을 만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앞선 걱정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안감이 사라지고 하루하루 기분 좋은 날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모두 싸들고 연수에 들어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편안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지요.

이제 다시 성당으로 돌아갈 시간이 바로 오늘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바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싫습니다. 이곳에서 일주일 정도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분명히 신학교 들어오기 싫었는데, 이제는 신학교 나가기가 싫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지금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제 마음이 상당히 간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경우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취하려고 했던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간사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제 경험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관심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제 마음 상태에 따라 신학교 오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또 반대로 신학교를 떠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둘 수도 있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둘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 방법만이 우리들의 최종목표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내 마음을 하늘나라에 집중시켜 봅시다.

 빠다킹신부

 

 

  마음      

-박영봉 신부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하느님의 사랑은 으뜸가는 선물로서 다른 모든 선물들을 포함합니다.
이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로마 5,5)입니다.
마음은 내가 존재하고 내가 머무는 거처입니다. 마음은 우리의 이성이나
타인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우리의 숨겨진 중심입니다.
그러기에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만이 마음을 살피고 감지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의 심리적 성향의 가장 깊은 곳이기에, 결단을 내리는 자리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삶이나 죽음을 선택하는 곳, 바로 진리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은 서로가 만나는 자리이며, 계약이 체결되는 자리입니다.
마음은 가난과 신앙 안에서 주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려드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지금 여기서 `하늘`을 발견할까?

-엄재중(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오늘 예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명확한 대비를 통해 땅을 버리고 하늘을 선택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땅과 하늘이 말 그대로의 땅과 하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땅이란 ‘자신을 위한’ 어떤 의지와 행위 일체를 말하는 것이고, 하늘은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 안에서 하늘과 땅을 명확히 식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 땅을 위한 일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늘을 위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처신하며 때로는 이를 타인 앞에서 내세우기까지 한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면 먼저 그 하늘이 어디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눈을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다. 몸의 등불인 눈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은 많이 피곤하다. 세상사가 그리 명확하고 단순하지 않다. 현대 세계는 예전보다 엄청나게 복잡해지고 불투명해졌다. 이런 세상에서 하늘과 땅을 명확히 식별하기란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이 땅의 논리가 아닌 복음 정신으로 보도록 자신의 눈을 단련시켜야 한다. 복음 정신에 충만하지 않은 눈은 쉽사리 하늘과 땅을 혼동할 수 있고 그리로 가는 길을 자주 놓치기에 늘 경계심을 갖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3)고 하셨다. 이 대전환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박갑조 신부-

 

‘마음이 환하다’ 혹은 ‘밝다’라는 것은 마음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상(想)에 하늘의 선물인 보물이 빛을 발산하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 선물은 무엇인가? 하면 하늘이 땅, 즉 마음에 내려앉음이요 땅이 하늘에 들어 올리려는, 곧 쌓는 행위가 바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선물은 하늘을 구성하는 속성들로서 하느님의 사랑이요 자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하느님의 하나의 속성은 모든 속성과 연결된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생애 가운데 어느 한 켠의 어두운(마태 6, 23)곳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산하는 빛을 발견하는 행위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마태 6,20)봉헌이며 기도인 것 입니다. 이러한 능동적 행위가 가능한 것은 먼저 하늘에서 주어진 선물 때문에 가능한 것 입니다. 이 선물을 발견하면 할수록 그의 눈은 이전 보다 더 건강하게 되고(마태 6,23)나아가 혜안(慧眼)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지혜의 능력으로서 그의 몸과 가족과 이웃을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6,20).


  이 지혜로써 땅에 쌓는 것은 무슨 의미고 (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는 의욕이 무슨 까닭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6,20), 하여 이 보물은 더욱 더 풍요로워져 마침내 땅을 이루는 즉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인격 형성의 요소들의 실체를 알아 좀과 녹은 바로 나의 습성을 악용하고 남용하여 부추기는 도둑의 행위임을 아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또한 하늘에서 주어진 보물임을 아는 깨달음 자체가 되고 환희와 기쁨인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기쁨이 그 영혼의 상태에 따라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의 섭리를 더 밝게 비추는 등불(마태 6,22)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등불로서 좀이 쓸어있는 곳을 밝혀내고 씻어 내어 녹을 닦아내는 의지적 사랑의 실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성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마태6,20).
그러나 만약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잘 보여 보이는 자체가 진리요 근본이며 본질이라면, 그의 눈의 상태는 온전한 것이고 맑으며 환한 것입니다(마태 6,22). 그러나 만약 또다시 허약함에 빠지고 실수의 연속이라면 지금 아는바에 집착되지 않음이 주어진 보물에 초점을 맞추려는 수행인 것입니다. 해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밝고 맑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곧 등잔이 입니다. 이 등에 끊임없이 불을 붙여 주시는 분께 다가 갈려는, 청하려는 성실함이 등불이 꺼지지 않고 전 존재의 구석 구석을 밝혀 하느님의 보물이 아닌 다른 것을 거두어 내고 정갈하게 되어 자신의 세포 하나 하나에 보물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성심성월에 걸맞은 예수님의 마음화(化)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땅을 딛고 살며 땅의 생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이라는 세상의 원래 창조의미를 알게 된다면, 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신 그 분의 의도에 따라 땅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의 땅을 갈무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화의 방식이 바로 나의 상태인 마음을 밝혀 주는 선물이며, 또한 이것이 선물임을 깨닫는 인식이 보물임(마태 6,20.21)을 깨닫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이 복된 눈이 머무는 ‘하늘’ 인 것입니다(마태 6,20). 이 하늘은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초발심인데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하늘의 선물로서 시작한다면 그곳에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훔쳐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마태 6,20). 하여 하늘은 바로 나의 어두운 마음자리에 이미 선물로 와 계신 것입니다.

 

 
주님과 교우들을 위하여 빈곤을 선택한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 -

고린토 교우들이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10,7) 바른 것을 보여주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바울로는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짓을 행한다며, 이를 참아 달라고 거듭 부탁한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혼인관계로 비유한다. 그는 순결한 처녀와 같은 고린토 교우들을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와 정혼하게 하였다(에페 5,27; 1요한 3,2-3). 그리스도와 정혼한 고린토 교우들은 순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속여 하느님을 배반하도록 했던 것처럼(창세 3,13) 거짓 사도들이 고린토 교우들을 속여 바울로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바울로는 교우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12,14; 1고린 4,15)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교우들이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저버릴까 염려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영적 또는 신적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우리에게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는 성령(로마 8,15; 2디모 1,7)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를 구원하셨음을 전하는 복음과 전혀 다른 것을 전한다. 그런데도 고린토 교우들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바울로는 그렇게 자신들이 특출하다는 사도들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으며, 사도로서의 권위가 확실하다고 자부한다. 비록 능숙한 말솜씨를 지니지는 못했지만(1고린 1,17; 2,4) 사도로서 중요한 점인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다운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때문에 거짓 사도들의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 교회로부터 생활을 위한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다(사도 18,1-3; 1테살 2,9; 2테살 3,8).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 생활을 위한 보조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1고린 9,4-18). 이는 고린토 교우들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바울로의 이런 자세를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사도라면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로 생활비를 받아야 하며, 자신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데 바울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그가 참다운 권리를 지닌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비방했던 것이다. 이러한 거짓 사도들의 비방으로 인하여 고린토 교우들이 바울로를 오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겠다고 결연히 말한다.

사도로서의 권리인 생활비 보조(루가 10,7)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복음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그는 물질의 풍요가 복음 전파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약화시키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멀어지도록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는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을 통하여 드러나기를 바랐던 것이다(12,9).

바울로는 결코 풍요롭게 생활한 것이 아니라 빈곤하게 살았다. 그는 다른 교회들이 보내온 적은 후원금과 자신의 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을 따름이다(사도 18,3). 바울로가 복음을 전하며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은 까닭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누렸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고 대신 고린토 교우들을 높이고자 했다. 자신은 비록 육신적으로 빈곤하게 살더라도 고린토 교우들은 영적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바울로의 마음이었다(4,12).

이처럼 주님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바울로의 마음, 교우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교우들의 영적 이익을 위하여 육신의 빈곤함을 선택한 바울로의 마음을 본받는 하루가 되자............◆


 

지금 주어진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한다면

-기정만신부-

 

1999년에 신학생인 내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견문을 넓힐 기회가 주워졌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첫 1년을 보내고, 저는 역량 부족으로 2과목 시험을 방학 후에 치러야 했습니다. 유럽은 대개 10월에 학기가 시작되어 6월에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7월부터 9월까지 방학입니다. 9월 말부터 저는 2과목 시험 준비를 위하여 로마 근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라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교황님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옆으로는 호수가 있고 저 멀리로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1주일. 아침이 되어 전날 무엇을 공부했나 되돌아보면 기억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내용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므로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순간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시절에, 이 아름다운 곳에서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하고 있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성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20여 분쯤 지났을까, 제 마음에 평화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이렇게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분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이 모습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저는 방으로 돌아와 먼저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하는 이 일이 보잘것없는 공부이지만 당신께 드리니 받아주세요.’ 그 이후 걱정하며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점수가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나 점수에 얽매이지 않고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주어진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한다면 주님께선 그 일을 하는 사람 마음에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걱정과 근심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우리는 해나갑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와 순간순간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우리 마음은 주님의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진정한 보화

-김웅태신부-


우리는 누구나 적든지 크게든지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살림을 하자면(더우기 요즘같은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는 더더욱 그러하겠지만) 같은 돈을 내고 물건을 사더라도 아무 것이나 사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면서도 견고하고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사고자 하는 것이 생활의 지혜입니다. 즉, 우리들의 살림살이에서 이렇게 알 수 있는바와 같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구성이 있는 것에 생각과 생활을 기울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부자다" 할 때는 부의 척도를 세 가지로 보고 있었는데, 1)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2) 곡간에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것, 3) 집안에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세 가지를 하나 하나 들어,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하십니다.

즉, 첫째로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은 좀 먹게 되고 변질되어 못쓰게 되는 그런 것들을 소유하는 것은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녹이 쓴다는 말은 그들의 말에 "먹어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했고 창고에 쌓아 둔 그러한 부도 녹슬거나, 벌레나 쥐가들어 먹어버리기에 영구히 소유할 수 없음을 지적하시면서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세째로 도둑이 많고 들어와 훔쳐간다는 말은 그들의 집이나 담은 대개가 진흙으로 만들었기에 도둑이 그 담의 흙만을 파내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집안에 숨겨둔 보물을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적의 손에 좌우되는 그런 보물을 지키기에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세상에서 그렇게 귀하다! 자신이 애지중지 하는 그 무엇도 자신이 끝내 지킬수는 없으며, 그것을 지키느라고 그것을 가지느라고, 그것을 모으느라 하다보면, 마음이 재물과 보화로 사로잡혀 어두어 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노바즈 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이 모든 재물 보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조라 흩어 버렸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습니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두었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습니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과연 좀먹거나 녹슬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아멘.

 

 

 -권순호신부-


제가 신학생 때나, 사제가 되고 나서, 죽음을 맞이 하는 적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한 미국인 할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병자 성사를 주기 위해 본당 신부님하고 그 할머니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이미 암 말기로 죽음을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야 할 할머니의 얼굴에는 어떤 어두운 구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할머니께서 미소를 머금고 본당 신부님과 저를 웃기려고 노력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본당 신부님께서는 할머니의 모습에 놀란 저에게 그 할머니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평생 동안 성당에서 봉사의 삶을 사셨고,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2주 후에 결국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장례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례미사는 처음이었습니다. 슬프지만, 왠지 모를 기쁨이 함께 있는 장례식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평생의 바람이 이루졌음을 기뻐하였습니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장례미사 계획과 준비를 본인 직접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직접 선택한 그 날 복음인 루가 복음의 성모찬송은 하느님을 찬송하며 산 그 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듯 했습니다.

그 미국인 할머니처럼 죽음을 맞이 하는 사람들이 항상 아름다워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죽음 앞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정말 제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좋은 직장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며 사회에서 떵떵거리고 사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며 병원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앞에서 친척과 자녀들이 그 재산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를 염려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재산과 가족이 그렇게 많은 대도 그 할아버지는 정말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어떤 이들은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이들은 고통스러운죽음을 맞이 할까요? 그 해답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살아 있을 때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별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흔히 제 주위에도 신앙을 가지 않았지만, 신안을 가진 사람 못지 않게 가정과 직장에서 모범적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올 때 신앙을 가지고 재물을 하늘에 쌓은 사람과 재물을 땅에 쌓은 사람들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재물을 땅에 쌓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절망을 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두고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함께 자신의 마음도 좀먹고, 녹이 슬고, 썩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 결국 자신의 하늘에 쌓았던 보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사람에게는 죽음이 곧 새로운 시작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당신은 보물을 어디에 쌓고 있습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과 여러분은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강영구신부-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그대에게

오늘은 돈과 재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와 소나무와 장미꽃은 돈이 없어도 푸르고 늠름하고 여유 있고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늘에 나는 새도, 갖가지 짐승들도 돈과 재물이 없어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보살펴주시고, 그것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맡기기 때문입니다.
유독 사람들만 돈에 집착하고 돈과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로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돈과 재물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저 느티나무와 장미꽃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손길에 내어맡기는 곳에 있습니다.
무소유의 자유인이 되어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꽃을 피우는 수도자들은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자신을 죽이고 이웃과 형제들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 있는 돈은 자신의 목과 이웃과 형제들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됩니다. 돈과 재물을 쥐고 있는 손이 썩어문드러진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마저 거름더미처럼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돈과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몰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서 돈과 재물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이 됩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온 돈과 재물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약이 되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이 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는 옷이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보십시오.(一明)


 

 † 재물에 마음을 두는 자 : 영적 어두움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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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 재물과 눈의 상징어를 어록에서 비교적 충실히 옮겨 적습니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가르치시는데, 땅위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녹과 도둑의 대상이 되지만 하늘에 쌓아둔 재물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19-20절)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들은 "나는 내 재산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물이 있는 곳에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있다는 것입니다.(21절)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곧 재물에 눈이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듯이 마음은 영혼의 등불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까지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영혼을 밝혀야 할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23절)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부자다" 할 때는 부의 척도를 세 가지로 보고 있는데, 1)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2) 곡간에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것, 3) 집안에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세 가지를 하나 하나 들어,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하십니다.

즉, 첫째로 값지고 정교한 좋은 옷은 좀 먹게 되고 변질되어 못쓰게 되는 그런 것들을 소유하는 것은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녹이 쓴다는 말은 그들의 말에 "먹어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했고 창고에 쌓아 둔 그러한 부도 녹슬거나, 벌레나 쥐가들어 먹어버리기에 영구히 소유할 수 없음을 지적하시면서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세째로 도둑이 많고 들어와 훔쳐간다는 말은 그들의 집이나 담은 대개가 진흙으로 만들었기에 도둑이 그 담의 흙만을 파내면 얼마든지 들어가서 집안에 숨겨둔 보물을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적의 손에 좌우되는 그런 보물을 지키기에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그렇게 귀하다는 이 모든 것이, 그 무엇도 자신이 끝내 지킬수는 없으며,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모으고 하다보면, 마음이 재물과 보화로 사로잡혀 어두어 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노바즈 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모든 재물 보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조리 흩어 버렸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습니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두었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습니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빛을 영혼에 비추며 사는 방법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왜 재물을 주시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일입니다. 재물은 "쌓아두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재물은 "쓰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만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출애 16,4)고 분부하였지만, 모세의 당부를 어기고 내일 양식을 걱정한 "그들이 남겨 둔 것에서는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다"(출애 16,20)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재물은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은 개인의 정당한 권리 속에 공동선을 위해 사용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요즘은 개인의 소유만 지나치게 강조되고 공동선을 위한 사용은 약화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창고나 금고나 은행에 모아둔 재물에도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마태6,19-23)

유 광수신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그것을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흠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그것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모하며 흠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나 자신을 위하여 쌓아 둘 보물은 어떤 보물일까? 과연 나에게 보물이 있는가?
하늘에 쌓아둘 보물이란 어떤 보물인가?  내가 보물을 쌓아 두어야할 하늘이란 어디인가?

보물이란 가장 귀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가지고 있으면 넉넉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요,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한다.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나 자신이 부유해진다. 즉 나를 부유하게 만든다. 과연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이 보물이란 어떤 것일까?" 에서부터 우리의 묵상을 시작하자.
   
예수님은 5장을 시작하시면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이들! 그들이 위로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이 흡족해지리니.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이들! 그들이 자비를 입으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이들! 그들이 하느님을 뵈오리니.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이들!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니.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이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더 할 수 없는 값진 보물들이다. 가장 귀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닌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보물은 이 세상에 있는 금, 은 다이몬드가 아닌 바로 진복팔단이다.  여덟가지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 하나 모두 진주보다 더 갚진 보물이다. 따라서 이 보물들은 우리가 보고 그냥 지나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야할 보물들이다.

 

그럼 보물을 쌓아야 할 하늘이란 어디인가?
하늘이란 우리 마음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보물인 참된 행복은 땅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 쌓아야 한다.
"쌓다."라는 말은 그 보물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참된 행복의 가르침은 분명히 값진 보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내 손에 직접 쥐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듯이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냥 흘려 버린다면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냥 땅에 버려져있는 보물과 같다.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하나 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내가 가난한 마음이라는 보물을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살아가면 가난이라는 등불에서 비추어져 나가는 빛이 내 눈에서 발산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가난이라는 보물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 마음속에 자비라는 보물을 쌓아두고 있다면 내 눈에서 자비라는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 눈을 보고 자비의 눈이 어떤 눈인가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내 마음속에 평화라는 보물을 품고 있다면 내 눈에서 평화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평화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의로움이라는 보물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고 있다면 내 눈에서 의로움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의로움의 빛을 받고 의로워지려고 할 것이다. 내 마음에 온유의 보물을 쌓아두고 있다면 내 눈에서 온유함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러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온유해 질 것이다. 과연 나는 내 마음속에 어떤 보물을 쌓아두고 있는가? 내 눈에는 어떤 등불이 켜져 있는가?

 

우리가 마음에 보물을 쌓기 위해서 먼저 해야하는 것은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하는 그 귀한 보물이 바로 진복팔단이라는 것을 알아 보는 것이다. 즉 무엇이 보물인지를 알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참된 행복이야 말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고 알아 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다이몬드나 진주도 아니고 명예나 권력도 아닌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발견한 이 보물을 마음에 쌓아야 한다. 아무리 값진 보물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듯이 우리가 발견한 이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쌓아야 한다. 내 마음에 쌓는다는 것은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즉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또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진복팔단의 보물이 내 마음 안에 가득 쌓일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물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보물이면서도 알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불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지 않고 좀과 녹이 쓰는 땅의 보물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땅에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진복팔단이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기에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땅에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즉 예수님이 "너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완덕을 추구하는 삶이다.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진복팔단의 보물이 눈에 보이고 그 보물의 진가를 알아 본다.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보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보물을 마음에 쌓는 사람은 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그 보물의 빛을 발산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온 몸이 행복의 빛으로 환해질 것이다. 
하루 하루 그냥 살아가는 삶이 아니다.  하느님이 주신 하루 하루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주신 시간이요,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모습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여정이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그리스도인의 재물관 †

오늘복음은 산설교에서편에서 그리스도인의 재산관리와 두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두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고 하셨으며 그리고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자녀답게 누구보다도 부지런하므로 일하여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모은 재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자기 일신의 호화나 사치를 위해 사용하지 말고, 부지런히 하느님의 나라에 쌓아 두는 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보물을 간수해야 할 곳을 잘 알고 '항상 가난한 마음으로 나눔의 생활'을 하는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하늘의 놀라운 상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두 주제를 기본으로 하여 오늘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재산 관리(마태 6,19-21)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생애에 어떤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잘못함으로 인하여 인생의 결정적인 실패를 초래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아보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던 한 청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이므로 인해 그 재물 때문에 천국의 문턱에서 지옥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밭에 소출이 많아 주체를 못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었지만 그 날 밤, 하느님이 그의 영혼을 부르실 때에(죽을 때) 그 쌓아 둔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주님은 물어보셨습니다.

(1) 그리스도인과 물질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제 생활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느 것 하나 경제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경제 생활이란 간단히 표현해서 재화, 즉 돈이 필요한 생활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돈을 천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생활 태도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돈의 가치나 그 활용 면에서 무시하거나 배격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면 이 땅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재물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서의 교훈입니다. 잠언 22,4에서는 "사람이 겸손하여 야훼를 경외하면 재산과 영예와 건강을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나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는 일에 대하여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를 향하여 개미의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하신 말씀은 장래를 위한 저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바오로는 고린토2서 12,14에서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지 여러분의 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돈을 모아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고 말하는 애용으로 보아도, 재물을 모으는 일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3,13에서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i)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재물이 자신의 욕정적인 삶의 도구로 사용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먼저 하느님를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부유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유해지셔야 합니다.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두는 일은 그 재물이 나중에(영혼이 거두어지는 날)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같은 목적을 이루려면 그 재물을 제대로 쌓아 두는 장소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땅에 쌓아 두는 재물은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기 때문에 불안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쌓다"라는 말은 헬라어 데사우리조( )로 저장한다, 남겨 둔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이 세상일에만 쓰지 말고 하늘에 남겨 두어야 하며 이 세상에만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ii) 다음에 재물을 하느님과 동시에 두주인으로 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두울류오( )란 헬라말로 종이 된다,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그 쓰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재물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재물을 섬겨 재물의 종이 되던가 하느님을 섬겨 하느님의 종이 되던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의 종이 된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미워하십니다.

(iii)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는 '돈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돈에 너무 집착하고 돈만을 좋아하는 행태를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하느님께 드릴 것을 마땅히 드리며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투자한다면 그런 재물이야말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열매가 될 것입니다.

(2)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i) 이 말씀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창고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것으로 규정한 십일조를 하느님께 드라는 삶이 바람직합니다. 약속된 십일조는 우리가 적어도 하느님의 것을 내 개인의 욕심으로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이런 증거를 하느님께 보일 수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재물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로는 약속을 잘 합니다. 무엇을 만들어 주겠다느니, 무엇을 사서 주겠다느니...그런데 그들은 그 약속이 하느님에게 하는 약속이라 생각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에게 한 약속으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바꿉니다. 그런 행태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ii)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금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금에 대하여 정성을 다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헌금궤에 두 렙톤의 동전을 넣은 어느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이 과부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으로 하느님께 헌금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생활 중에서 자기가 낼 수 있는 것,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사참례 때 봉헌금을 내는 모습을 보면 조금 성스럽지 못합니다. 주머니에서 꾸개진 돈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일상의 지갑에서 한두장을 빼서 넣는 모습도 봅니다. 한편 어떤 분은 비록 작은 액수이지만 새돈으로 은행에서 바꾸어 성스럽게 봉헌하는 분도 있습니다. 봉헌금은 내는 봉투가 준비되지 못한 경우에는 성서에나 매일미사책에 가지런히 펴서 넣어두었다가 헌금을 하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습니다.

2.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마태 6,22-24)

우리에게 있어서 돈의 위치가 얼마나 큰지를... 물질중심의 배금사조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돈이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는 모습도 종종 봅니다. 주인이란 종을 마음대로 부리며 지배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성서에는 인간이 섬겨야 할 주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6,16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전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섬겨야 할 주인이 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고, 다른 한 주인은 인간의 탐심을 지배하는 재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이 두 주인 중 어느 한 주인을 택하여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김으로 하느님의 종이 되느냐? 아니면 물질을 섬김으로 재물(돈)의 종이 되느냐? 자신이 섬길 주인을 명백히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우리 몸에 있어 마치 등불과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을 때 우리의 온 몸은 거저 답답하고 캄캄할 뿐입니다. 여기서 눈이 성하지 못하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밝다는 말은 포티조( )로 비췬다, 조명한다의 뜻이고, 성하지 못하다, 즉 나쁘다는 말은 포네로스( )로 악한, 타락한, 허약한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눈은 우리의 마음을 비취는 눈, 즉 빛을 말합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요한 1,4). 빛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 생명이 우리의 마음을 비췰 때 우리의 몸은 밝아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의 인생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빛이 어두워 악한 상태,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육신의 눈이 어두워도 캄캄하여 답답한 생애를 보내거늘 하물며 그 마음에 생명의 빛을 잃으면 그의 영혼과 그의 삶이 그 어두움 속에서 타락하지 않겠느냐'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눈, 생명의 빛을 어둡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재물입니다. 하느님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어두움을 가져옵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탐심을 품으면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빛을 어둡게 하여 그의 인생을 캄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재물이 하늘에 싸였다면 그 곳으로부터 더욱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어 우리의 생애는 더욱 밝은 빛 가운데 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탐심이 없고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은 그 마음이 빛으로 언제나 밝게 비취임으로 청결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이란 하느님과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이버란 사람은 '돈은 군주의 군주'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10,19에서는 "사람은 즐거우려고 잔치를 벌인다. 술이 있어야 살맛이 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인은 돈이여서는 안 됩니다. 돈은 이차적인 존재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돈이 없이도 포도주를 가득 만들어서 잔치를 풀요롭게 해주신 주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제데로 섬기기만 하면 항상 원하는 잔치가 마련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향심하는 자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태 22,37)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이번 일만 도와주시면 그 수입에서 얼마를 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재물로 조건을 걸고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란 언제나 한곳에 집약, 칩착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미워하거나 무관심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느님을 너무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아가파오( )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랑이란 말은 하느님이 죄인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신 절대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느님이 아닌 재물에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묵상했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에 있어서 어느 편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물질을 섬기던가 하느님을 섬기던가 하느님 앞에 거짓 없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재물이 있던지, 없던지, 잘살던지, 못살던지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에 심어주신 당신의 기쁨, 곡식이다, 포도주다, 풍년에 흥겨운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시편 4,7)라고 노래한 다윗의 이같은 기쁨을 마음에 간직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에게만 전적으로 마음을 두고 의탁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아멘).........◆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