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21일 목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10)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에서 유혹은 무엇이며 또 악은 무엇이겠는가? 용서하지 않으려는 유혹이다. 오해와 편견으로 고통을 주는 이에게 보복하고 싶은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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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교육은 양쪽을 다 보도록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편견을 심어 주고 떠난 사람들의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대목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편견은 유혹이며, 아집 또한 유혹입니다. 편견은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려는 유혹입니다. 지도자들이 쉽게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이러한 유혹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시선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더 넓은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편견을 벗어 버리면, 세상이 얼마나 밝고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따듯한지 금방 느끼게 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연수중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어떤 신부님 두 분이 계셨는데,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서 두 분의 사이가 아주 안 좋아졌습니다. 심지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도 거부하면서 두 분은 서로에 대한 미움이 가득한 채 살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중의 한 신부님께서 큰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부터 이제 몇 개월 사실 수가 없다는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지요.
주변의 다른 신부님께서는 이제 화해하라고, 그래서 용서하면서 삶의 마지막을 잘 정리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아픈 가운데에서도 “내가 저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면서 용서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다른 신부님께서 어떻게 보면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신부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하찮은 것을 가지고서 신부님과 싸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제는 화해할 때라고 생각했고,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여보게, 나 왔네.”
바로 그 순간, 병으로 이제는 꼼짝도 하지 못했던 신부님이 벌떡 일어나더니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XXX야, 여기는 왜 왔어? 당장 나가지 못해?”
그리고는 아주 어이없이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신부님이 이렇게 했냐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말로 용서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서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내 자신에 대한 용서까지 없어진다고 하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상태에서도 용서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잘 아시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면서 하나의 기도를 즉,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담긴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내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다툼을 조금씩 없앨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든 상황을 우리에게 떠맡기지만 않으시는 사랑가득한 분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서 어떻게든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용서하기 힘들 때,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쳐보세요
빠다킹신부
가장 큰 계명
-박영봉 신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말이나 행실로써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도록 시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의 주 하느님을 시험하지 못한다”(신명 6,16)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론을 펴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데
포함되는 도전은 우리의 창조주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신뢰를 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는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섭리와 권능을 의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도록 인간의 내적성장에 필요한 ‘시련’과,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유혹’을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것과 유혹에 ‘동의한다’는 것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을
이용하면, 우리는 유혹의 거짓된 가면을 벗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유혹의 대상은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럽지만’(창세 3,6),
실제로 그 열매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갈라 5,25).
우리가 성령께 이렇게 동의할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먼저 내 안에 하느님 나라를
-엄재중(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오늘 복음인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개의 탄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모두 기도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할 때 먼저 주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이어서 개인과 공동체의 필요를 청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복적 기도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기도의 최우선적 지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무엇보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시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도록,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런데 우리는 일견 이 청원을 어떤 세계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곧 아버지의 뜻과 나라가 오늘 이 한국 사회와 전세계에서 구현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자리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청원이 일차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주체는 바로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에 맞갖도록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성화시켜야 하며, 그분의 나라와 그 뜻이 오늘 나를 통해서 가정과 직장, 사회 안에서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이름과 나라와 뜻이 일차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자리는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시작에서 이 모든 것이 먼저 내 안에서 실현되도록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다.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박갑조 신부
기도를 할 때의 준비 자세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허나 이러한 다양한 것의 가장 근원적인 자세는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한자를 제 나름대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용(容)은 얼굴이라는 뜻이고 서(恕)는 용서하다’ 는 뜻과 또 ‘어질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과 어진 마음에 남의 허물을 갖지 않고 놓아 흘려 보냄으로써 어짐이 있다라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얼굴은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외적 표지인데, 이 마음자리가 소란함에서 고요함으로 옮겨져 무애, 즉 애착됨이 없으니, 자연히 말하는데 어짐이 있고 보는데 분별하고 따지려는 번잡함이 없는 청정함이 있으니, 말하는 것 보다 들음이 먼저일 것이고, 자신의 생각을 좇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알고 계신다 (마태 6,8)는 그 먼저의 주인의 의도로 살고자 함이 기도의 준비라 하겠습니다. 하여 남의 허물이라는 의식이 오히려 자신의 상(想)에 허물 됨을 알고 그 욕됨을 걷어치워 맑음에 있으니, 그 맑은 가난함의 상태에 생각하기도 전에 알고 계시는 분의 의도가 물들여지고 새겨지며 하늘에서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마태 6,10). 그리하여 이러한 영혼의 기도는 바로 하느님의 의도가 잘못인 허물에서 바름의 잘됨으로 그 성질이 변화됨이 바로 하늘에서 용서하고자 함(마태 6,14)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허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사람을 당신 나라에 참여시켜 사랑을 나누게 하시려고 사람들의 마음자리에 당신의 참됨이 깃들게 하고 당신의 얼굴을 갖게 하기 위해 허물을 흘려 보내는 뜻으로 용서의 방식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은 죄로 더럽혀진 것을 씻어시는 십자가상의 사랑인 것 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마태 6,9-10)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남의 잘못이 내 마음자리에 여지를 두게 된다면 남아 있는 부분이 나에게는 상처가 되어 허물을 짓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허물이 불편함을 주어서 나름대로의 대처방식으로 미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먼저 의도하는 분별심이 ‘일용할’ (마태 6,11)이라는 하루만, 순간만, 찰나에 사는 깨어있음의 청정함을 무디게 하고 제 나름의 방식을 갖게 되는, 즉 소유욕을 갖게 되어 어린이와 같은 내어맡김의 단순성을 잃게 만듭니다. 이 상실함의 허물자리가 바로 유혹(마태6,13)을 받게 되는 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문이 바로 타인이라는 구별지음이 생겨 용서를 하고 싶지 않는 떠벌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떠벌림이 바로 말 많고 생각 많은, 추리가 많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 6,7)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빈말을 되풀이 하는 것은 너와 나를 헤아리는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자리에 있는 남의 잘못을 용서 하려는 그 눈물겨운 노력은 바로 청하기도 전에 나의 잘못을, 죄과를 말없음의 방식으로 알고 계시고 들어주고 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가는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점차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살아감의 한걸음, 한걸음이 닦아가는 행함이요, 요청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게 하시며,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6,10) 하는 청원의 기도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는 방금 말씀 드린 이러한 예수님의 청원의 기도를 하는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기도가 참으로 용서를 입은 자비의 기도이며 허물을 씻음받은 치유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누구를 닮는가? (마태 6,8), 누구를 닮고 싶은가? 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으셨습니다. 허물 많은 나를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을 닮으라고 나의 허물 안에서 내가 청하기도 전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허물이 당신을 닮는데 오히려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쓸모있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상의 사랑에 의해 이미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의 편안함을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얼굴과 마음을 그리스도의 자리로 닦읍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비추어지는 청정함의 거울이 됩시다.
주님과 교우들을 위하여 빈곤을 선택한 사도 바울로
-경규봉 신부-
고린토 교우들이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10,7) 바른 것을 보여주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바울로는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짓을 행한다며, 이를 참아 달라고 거듭 부탁한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혼인관계로 비유한다. 그는 순결한 처녀와 같은 고린토 교우들을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와 정혼하게 하였다(에페 5,27; 1요한 3,2-3). 그리스도와 정혼한 고린토 교우들은 순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속여 하느님을 배반하도록 했던 것처럼(창세 3,13) 거짓 사도들이 고린토 교우들을 속여 바울로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바울로는 교우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12,14; 1고린 4,15)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교우들이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저버릴까 염려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영적 또는 신적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우리에게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는 성령(로마 8,15; 2디모 1,7)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를 구원하셨음을 전하는 복음과 전혀 다른 것을 전한다. 그런데도 고린토 교우들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바울로는 그렇게 자신들이 특출하다는 사도들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으며, 사도로서의 권위가 확실하다고 자부한다. 비록 능숙한 말솜씨를 지니지는 못했지만(1고린 1,17; 2,4) 사도로서 중요한 점인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다운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때문에 거짓 사도들의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 교회로부터 생활을 위한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다(사도 18,1-3; 1테살 2,9; 2테살 3,8).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 생활을 위한 보조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1고린 9,4-18). 이는 고린토 교우들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바울로의 이런 자세를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사도라면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로 생활비를 받아야 하며, 자신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데 바울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그가 참다운 권리를 지닌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비방했던 것이다. 이러한 거짓 사도들의 비방으로 인하여 고린토 교우들이 바울로를 오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겠다고 결연히 말한다.
사도로서의 권리인 생활비 보조(루가 10,7)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복음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그는 물질의 풍요가 복음 전파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약화시키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멀어지도록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는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을 통하여 드러나기를 바랐던 것이다(12,9).
바울로는 결코 풍요롭게 생활한 것이 아니라 빈곤하게 살았다. 그는 다른 교회들이 보내온 적은 후원금과 자신의 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을 따름이다(사도 18,3). 바울로가 복음을 전하며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은 까닭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누렸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고 대신 고린토 교우들을 높이고자 했다. 자신은 비록 육신적으로 빈곤하게 살더라도 고린토 교우들은 영적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바울로의 마음이었다(4,12).
이처럼 주님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바울로의 마음, 교우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교우들의 영적 이익을 위하여 육신의 빈곤함을 선택한 바울로의 마음을 본받는 하루가 되자............◆
성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살았던 것처럼
-이봉하수사-
평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입만 열면 ‘다 하느님 뜻이지요’라고 하던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한 후 병문안 오는 사람들에게 ‘죽을 뻔 했다’ 는 말을 하고는 ‘이것은 하느님 뜻이 아닌데요!’라면서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씁쓸한 마음이 들어 그냥 웃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몽땅 바칩니다’라든가 ‘오늘 하루도 하느님 뜻대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일신상에 큰 변화가 찾아오면 ‘평소에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잘못한 것도 없이 바르게 살아 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하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게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 일상 안에서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수도자로 살고 있는 저도 가끔은 어떤 상황 앞에서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뜻 사이에서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잠시 모든 것을 접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뜻인지 아니면 사람의 뜻인지….’ 숨쉬는 것부터 손가락을 움직이고 길을 걷고 잠을 자고 사고를 당하여 뼈가 부러져도 모든 일들을 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느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있고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좀 늦게 알 뿐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이 아니라
-기정만신부-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20대 초에 저는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성당 사무장님이 친구의 아버지이며, 제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늘 봉사자가 필요한 성당에 저는 친구와 자주 올라가서 사무장님의 일을 도와드리곤 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난로를 꺼내 손보는 일이라든가, 성당과 교리실에 형광등 교체하기 등등. 사무장님은 자주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늘 편한 맘으로 성당에 갔습니다. 저녁이면 사무장님과 함께 순대국집에 가서 순대와 막걸리를 마셨는데, 사실 사무장님은 술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저희와 함께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건 부족한 것이건 모든 걸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던 사무장님은 제가 신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큰 사고였고, 그 이후로 사무장님은 누워만 계시다가 2년 전에 하느님께 가셨습니다. 언젠가 병문안을 갔을 때 사무장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런 나의 모습조차 하느님께 필요하다면 드려야지!” 제 첫 미사에 참례하고 싶어하셨지만 사제품을 얼마 안 남기고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신, 그것이 기쁜 순간이건 고통스러운 순간이건 모두를 하느님의 뜻에 봉헌하신 사무장님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당신 안에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한다면 우리 삶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보인다
-양승국신부-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아픔이지만 창조를 위한 기회입니다. 고난은 언제나 설명서 없이 불쑥 찾아옵니다. 하지만 설명서는 언제나 나중에 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고난이 끝인 줄 알고 쉽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인내하고 참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기쁨과 감사로, 그 고난이 무슨 이미였는지를 말해주는 설명서를 받아 읽을 날이 올 것입니다.”
최근 자전 에세이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라는 자전 에세이를 펴낸 시각장애인인 이재서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15세 때 다가온 실명(失明)을 축복으로 여기는 교수님의 인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실명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억울해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으시는 교수님은 이렇게 외칩니다.
“실명!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실명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교수님이 실명 직후 다가온 좌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듣게 된 ‘네 가지 눈’이라는 제목의 강의였답니다.
“사람은 사물을 보는 육안(肉眼), 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智眼),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 종교의 힘으로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靈眼) 등 네 개의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비록 육안은 잃었지만 나머지 세 개의 눈은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겪어야만 했던 모진 난관들을 극복해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의 눈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그런대로 견딜 만하셨답니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다가오는 절벽 앞에 설 때 마다 이교수님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노력을 다하는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람, 그 사람이 또 온 몸을 바쳐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란 듯이 역경을 극복한 이교수님은 오늘날 모든 시각장애인들의 귀감이자 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강단에서 서신 교수님은 현재 북한 장애인 지원 사업에 열정적으로 투신하고 계신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방식을 답습하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다운 기도를 바칠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방인들의 기도습관은 참으로 볼만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있어 기도를 잘 하는 측정기준은 얼마나 많은 잡신들을 동원시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사천리로 그 잡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불러들인 그 잡신들과 함께 장황한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한바탕 요란스런 쇼를 벌이는 것이 잘 하는 기도였습니다. 마치 한국 무속인들이 펼치는 굿과도 유사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의 기도습관은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의 기도생활 안에도 묻어들어 왔습니다.
어떤 기도가 좋은 기도인가, 어떻게 기도를 바쳐야 하는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제시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곱씹을수록 심오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묵상거리들을 우리에게 제공하는지 모릅니다. 한 피정강사는 14번이나 되는 일주일간의 피정강의의 주제를 주님의 기도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나게 할 것이며,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실행할 수 없는 장황하고 많은 말보다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노력을 계속하라고 요청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이웃들과 나누고, 이웃의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하며,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늘 기도하고, 실제 생활 안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바친 사람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합니다. 오늘 비록 괴로워도, 오늘 내 처지가 고통스러워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찾아나갑니다. 결국 현실의 암담함에 굴하지 않고 늘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 결과 다가오는 결실들을 겸손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선물로 내어놓습니다.
-권순호신부-
티베트 망명정부 요원 중 18년 동안 중국에서 온갖 고문과 살해 위협을 받으며 옥살이하다 나온 이가 있었습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그에게 감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감옥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 고문이나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증오심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곳 보다 더 무서운 감옥은 미움이라는 감옥입니다. 우리가 미움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우리의 육체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게 되고 우리는 미움의 사슬에 꽁꽁 묶이게 됩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 미움의 감옥에 나오는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신을 가두는 미움의 감옥에서 나오는 유일한 방법을 용서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용서를 베푸는 것은 용서를 받는 것과 분리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만큼 용서를 받게 됩니다. 용서하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그 용서의 자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수인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유대인 군중들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넘겨준 빌라도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 예수님을 저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도 예수님을 미움의 사슬로 미움의 감옥에 가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배반하고 상처 준 이들, 그리고 그들의 죄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육체마저도 자유롭게 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미리 조건 없이 용서 하�으로써 마음 속에 항상 하느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그 평화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미사 때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 들이기 전에 함께 바치게 됩니다. “아버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결국 예수님의 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우리를 가르는 미움의 벽을 헐도록 서로 용서를 베풀 것을 다짐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의 미움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자유로운 하느님의 한 자녀들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 속엔 이런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배풂이 곧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저희를 자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
-김웅태신부-
이 기도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기도 중에 간구하는 내용 순서를 보면 : 1)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2) 다음 세 가지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상의 위치에 놓은 다음에 자신의 필요와 소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생활 속에서 나보다 먼저 하느님의 원의를 찾고 그 다음에 자신의 소원을 찾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내가 바라는 것 속에다 하느님의 뜻을 끌어 들이려고 해서는 안되며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원의가 내 원의보다 우선적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 둘째 부분에 나오는 우리의 요구와 필요에 관한 부분에서 보면 놀라운 통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와 세 가지 시간적인 구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일용할 양식을 구함 : 이것은 나의 현재 생활을 하느님께 청하여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2) 죄의 용서를 구함 : 이것은 나의 과거 생활을 하느님께 고백하여 죄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3) 유혹이 올 때에 도움을 구함 : 자연스럽게 살아가기에 방해가 되는 나의 미래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상의 짤막한 기도 속에서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보여드리며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전 생활을 하느님 앞에 놓는 것이며, 동시에 삼위이신 하느님 전체를 우리 생활 안에 받아들이려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육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간구할 때, 바로 그것은 창조자이시고 생명의 유지자이시며, 아버지되시는 성부께로 우리의 생각을 갖게하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가 죄의 용서를 간구할 때, 우리 구세주이시요, 구원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생각을 향하게 하는 것이며,
세째로, 우리가 미래에 당할 유혹에서 보호하여 주실 것을 기도할 때 바로 위로자이시며, 강하게 하시는 이요, 보호자이신 성령께 우리의 생각을 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짧은 주님의 기도 속에서 또 그 후반 부분은 현재, 과거, 미래를 포함한 나의 온 생애를 성 삼위이신 하느님 앞에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전 존재를 나의 생활 모든 영역 안에 받아들이는 것임을 명심하여 정성껏 기도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이기양 신부
제1독서 : 집회 48,1-14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복 음 : 마태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오늘 들으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이 기도 하나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바로 그 곳에 성당이 있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각 벽면에 여러 나라말로 주님의 기도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도 쓰여 있는데 기도문 옆에 한복을 곱게 입으신 성모님이 계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
이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 벌써 다 알고 계신다는데 우리가 굳이 청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많은 기도를 하느님께 청하며 올리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가 의구심이 드는 것이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 주님의 기도만 하라는 그러한 의도도 아니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기도할 때 우리는 나의 뜻과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내가 지금 드리고 있는 대부분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녀 대학 붙게 해달라, 내 자식 군대에서 안전하게 해달라, 남편과 자식이 건강하게 해달라 또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달라…?
아마도 이런 기도가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바램이 채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 지향이지요. 더 극단적인 경우는 ?저 원수 같은 놈, 벼락이라도 내려서 혼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까지 이기적인 기도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 이런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이지요.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알고 기도의 방법을 안다면 하느님께 합당한 기도,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하느님에 대한 부분과 사람에 대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부분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6,9-10)
하느님에 대한 부분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 대한 부분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6,11-13)
즉 우리의 지난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과거의 기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사는 현재의 기도, 앞으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미래의 기도로 나뉘어집니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주님께 맡기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즉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뜻 안에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는 것, 이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정말 내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또 하느님 안에서 살기를 청하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글이 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 벽에 써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 자기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안에서 살기를 노력하지 않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뜻과 내 방식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기도는 나의 욕망과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고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나의 온 생애를 하느님 앞에 내어드리며 정성껏 주님의 기도를 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정상천 신부-
잠시 어제 복음이 무엇입니까?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인데, 오늘 들은 주님의 기도와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와 상관관계가 무엇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어제 들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지 마라는 금지형의 가르침이라면 이제 뭐가 나와야 하나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나와야겠지요. 마태오 복음은 그러한 순서를 통해 아름답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루에 이 기도를 미사 때 한 번, 아침과 저녁기도에 한 번씩 해서 공동체 기도로 세 번씩을 오랫동안 바쳐왔고, 이 기도는 그 어떤 기도보다도 으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다른 기도보다도 으뜸인 이유는 금방 들은 마태오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가 복음 11, 1절 이하를 보면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대목이 있는데, 으뜸인 이유가 바로 제자들이 직접 가르쳐 주십사고 청원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상관관계를 단순하면서도 친밀하게 보여줍니다. 성부 아버지와 성자 그리스도의 관계처럼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부자관계가 형성되니,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 깊은 기도입니까! 주님의 기도 첫 구절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네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 기도구절만 보더라도 모든 기도의 으뜸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어느 정도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찰고라는 게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세례를 받으려고 열심히 교리에 나갔지만 할머니에게는 걱정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찰고를 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더욱이 본당 신부님께서는 주요 기도문을 세례 받기 전까지 꼭 외워야 하며,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을 수가 없다고 단언하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였습니다. 분명히 찰고 때, 신부님께서 ‘주님의 기도문을 외워보세요’라고 물으실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할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 며느리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러자 며느리는 어머님, 연세가 있으시니 외우시기가 어려우실텐데 한 번만 봐달라고 해보세요. 그리고 교리도 안 빠지고 열심히 다녔다는 것을 강조하세요. 라고 귀띔을 해 드렸습니다. 용기를 갖고 할머니는 본당 신부님과 찰고를 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한 대로 신부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외워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자 갖가지 미소를 총동원하면서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 도저히 외워지지 않고 교리시간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으니 그냥 세례를 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본당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할머니 제가 언제 주님의 기도문을 암송하라고 했습니까. 저는 그저 할머니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만 드렸을 뿐인걸요. 할머니는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신부님의 얘기가 무엇인지 잘 듣지 않고 다짜고짜 외우기 시작하였던 거였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으뜸인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아울러 이 기도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기도인데, 그 기도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아들이 아버지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바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라.
-강영구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대에게
당신은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어떤 기도를 바쳤습니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새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도록 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행복한 하루가 되도록 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는 입이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말이나 입으로 설득해야 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의 삶을 기도하듯 보여드려야 할 분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도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삶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거짓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며 기도하는 사람이 이웃과 형제의 잘 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도 거짓입니다.
거짓된 기도는 하늘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는 일입니다.
빈 수레가 시끄럽듯이 삶으로 기도하지 않고 입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조용하지만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온 가지를 하늘 향해 펼쳐들고 푸르름으로 기도하는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는 우람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워 기도하는 장미는 향기롭습니다.
말없이 삶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一明)
† 기도의 심화과정 : 주님의 기도 †
-박상대 신부-
율법의 참 뜻을 바탕으로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제10계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응용한 덕행의 목록과 함께 이를 고양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하신다. 자선(慈善, charity)과 기도(祈禱, prayer)와 단식(斷食, abstinence) 등의 선행은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행들이다.
그렇다고 이들 선행을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은 요구가 아니라 초대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세금으로 정한 이외의 부분을 강제로 징수할 수 없는 원리와 같다. 국민이 가지는 납세의 의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이웃에 대한 봉사나 후원이나 기부금 등과 같은 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에 속한다.
과거 행복, 안녕, 복리, 복지라는 뜻을 가진 웰빙(well-being)이라는 개념이 현대사회에서는 바쁜 일상과 인스턴트 식품, 스트레스로부터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life-style)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십계명만 잘 지켰다고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더불어 빛낼 수 있는 덕(德, virtue)을 수행해야 한다. 기왕에 덕을 수행하자면 예수께서 제시하는 수행지침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초대받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祈禱)에 대한 심화과정이 주어진다. 아우구스티노(354-430) 성인께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고 했듯이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기도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혼의 숨쉬기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에는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기도가 왠지 어렵게 느껴지며, 기도에 대단한 문장(文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로지 기도로서만 학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이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8절)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아니다. 전지(全知)하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필요함을 다 알고 계심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과 우리가 청하는 기도는 엄연히 구별된다. 알고 계신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시면서 "주님의 기도"(9-13절)를 들려주신다.
"주님의 기도"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다.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① 아버지의 이름, ② 아버지의 나라, ③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다.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④ 우리의 일용할 양식, ⑤ 우리 잘못의 용서, ⑥ 유혹으로부터 보호, ⑦ 악에서의 구원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인간 자신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기도이며, 이 땅위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종말론적 구원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기도인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물려주신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기도를 바치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다음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작자미상의 "주님의 기도"에 관한 글이다.
내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만일 나의 관심과 취미가 세상 것들에만 있다면,
나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우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삶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영광과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마음 안에, 우리 집에, 우리 학교에, 우리 성당에, 우리나라에,
그리고 전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마지못해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삶에서 아버지의 뜻을 마지못해 따르거나 화를 내며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내어놓을 진정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정직한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가족과 친구, 이웃의 분명한 요구를 무시한 채, 나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계속해서 원한을 품거나 비방한다면, 나는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유혹 받을 상황에 고의적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무기를 가지고 영적 세계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나는 "영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여기 내 삶 안에 계신 하느님보다 매일 발생하는 일들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 나는 "영원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정직하게 "어떠한 값도 치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는 한, 나는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7-15)
-유광수 신부-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듯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주의 기도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우리가 아버지께 청해야할 내용들이고 후반부는 전반부의 기도의 내용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내용이다.그럼 전반부에서 우리가 아버지께 청해야하는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왜그러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누구에게 기도하는지조차 모르고 기도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 지를 안다면 나의 기도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고 내가 청하는 기도의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가끔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잘 모르고 기도하기 때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도의 자세와 기도의 내용을 바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버지의 이름을 제일먼저 부르라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성녀 대 데레사는 "아버지"라는 말을 한 후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고 한다. 아버지라는 말 이외에 더 이상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버지의 넉넉함이, 아버지의 포근함이, 아버지의 버팀돌이 아버지의 굵은 손이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시는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시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가룩하시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야훼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 또한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한 삶을 통해서 빛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할려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두 번째 우리가 청해야하는 내용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이 실현되어지는 나라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가치관이 실현되어지는 나라이며 복음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복음에 따른 삶을 살아갈 때 내 안에서부터 아버지의 나라가 실현되어질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청하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아버지의 뜻은 모든 이를 구원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의 원수까지 포함된다. 나를 못살게 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 누구도 제외된 사람이 없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식별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이 나와 모든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 아니면 나 개인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금방알 수 있다. 그 어떤 중요한 일이라도 하더라도 나와 모든 이들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바치면서 나와 내 이웃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고 그 일을 해야한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찾는 사람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시간, 능력, 나의 재산, 나의 지식, 나의 일은 모두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아버지의 자녀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우리 주위에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아버지께로 인도해서 그들도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무근 일을 하더라도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그 사람을 구원에로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땅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내용들이다. 어떻게 보면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내용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나의 건강을 돌봐주소서, 무슨 병을 치유시켜 주십시오, 학교에 합격하게 해주소서, 사업이 잘되게 해주소서 등 개인적인 그 어떤 것을 청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면 이런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기도란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개인적인 소원성취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오늘 우리가 주의 기도를 하면서 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또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지는 하루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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