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6. 20. 05:44

 2007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3)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is doing,
so that your almsgiving may be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단식할 때에도 주님만을 생각하라고 강조하신다. 그 모든 것을 남에게 잘 보이려는 수단으로 행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자선은 무엇보다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다

 

☆☆☆

 

 자선은 보이지 않는 도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광고하는 자선을 자주 봅니다. 장학금이랍시고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려운 학생에게 직접 봉투를 내미는 모습을 봅니다.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선이 아니기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선은 적선입니다. 곧 선을 쌓는 행위입니다. 하늘만이 알게 적선한다면 필요한 때 하늘이 도와줄 것은 당연한 일이나, 차분히 기다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선과 적선을 이야기하면 금방 돈과 재물을 연상합니다. 풍족해야 베풀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을 베푸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정한 말 한마디나 따듯한 눈빛 하나도 훌륭한 자선이 될 수 있습니다. 성당에 일찍 와서 흐트러진 의자를 정돈하는 것도 자선입니다. 마당에 떨어진 휴지 하나를 줍는 것도 자선입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다정한 미소를 띠는 것도 어찌 적선이라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지난 월요일, 드디어 저의 다섯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에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 즉 제가 책을 낸다는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다섯 번째의 책을 출판했으니 스스로도 하느님의 섭리에 깜짝 놀랄 뿐입니다.

아무튼 책이 나왔으니, 지금 현재 연수에 참석하고 계신 신부님께 한 권씩 돌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신부님들께서 하시는 말씀,

“책에 오타가 몇 군데 있더라.”

얼른 오타가 있다는 곳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오탈자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출판사는 이제까지 출판했던 곳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전의 출판사와 이번에 새롭게 선택한 출판사가 비교가 됩니다. 심지어 책의 표지조차도 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무척 속상했습니다. 이번의 책은 판매를 많이 해서, 우리 성당 옆의 종교미술학부 건물 구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오탈자가 많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네요. 또한 다섯 권씩이나 출판한 저에 대한 이미지에도 손상을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화가 조금씩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당하시는 분에게 전화를 해서 조금 안 좋은 이야기도 했습니다.

저녁 기도를 하면서 묵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만한 내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로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감사하지는 못하고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양 교만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 뿐인데, 그것을 놓치고 있었던 제 자신이 마냥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의 눈으로만 인정받고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눈으로 인정받고 평가받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종종 교만함 속에 빠집니다. 그 교만함은 세상의 눈으로만 인정받고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교만입니다. 대신 하느님의 눈으로 인정받고 평가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나의 교만함들을 이 새벽 하나씩 떠올려 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하찮은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서 교만을 떨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나의 교만 덩어리들을 깊이 생각해봅시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실까요?

 빠다킹신부

 

 

   자선사업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고
하시며,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자선사업은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궁핍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용서해주고 참을성 있게 견디어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충고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행위는 영적인 자선사업입니다.
육체적인 자선사업은 특히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잃은 사람을 묵게 해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자와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고,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행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은 형제애의 주요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갖가지 자선사업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려 노력해왔으며, 그것을 지금도 여전히
어느 곳에서나 필수적인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천상의 보상을 누립시다.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세계인에게 자선의 ‘큰손’으로 불리는 빌 게이츠는 최근 소아마비 퇴치기금으로 6백억 원을 세계보건기구에 쾌척했고, 테드 터너는 유엔에 해마다 1조 2천억 원씩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원래 자선에 관심이 없던 게이츠에게 자선의 기쁨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터너였다고 합니다. 3년 전 터너는 사업에만 몰입하던 게이츠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지. 그 돈으로 남을 돕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울 텐데….” 게이츠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삶의 방향을 바꾸었답니다.
그렇습니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부를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된 계기는 터너의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그 이면을 깊이 보면 자선을 베풀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자선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일을 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자선을 베풀 때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숨어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하느님 사랑, 곧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고, 이 이웃 사랑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게 하며 이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게 하는 것이기에 기뻐하고 만족해하고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그 자선의 이유와 의미 추구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면 꼭 갚아주시겠다고.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베푼 자선은 하느님한테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단지 도구 역할을 한 것일 뿐인데, 이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 것에 천상의 보상을 약속하시니 말입니다. 우리의 나눔이 천상의 보상을 불러온다는 사실은 우리를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더욱더 나누게 할 것입니다.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 박갑조 신부 


오늘 마태오 복음 6장 18절에서 말하듯이 왜 하느님께서는 숨어계시는가? 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언가 부족해서 드러나 보이는 것(마태 6, 1.6.16.18)을 외면하시고 숨은 일 (마태6, 4.6.18)만 챙겨 갚아 주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행동의 결과가 드러나야, 그것을 가지고 근거를 삼고 더 나은 발전을 모색할 수 있지 않게 습니까? 그리고 진위를 따져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방식이 인간 역사의 점철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방식으로 접근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보상방식이 우리 인간에게는 숨은 모습이며,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인 것이요 인간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방식인 것입니다. 허면 인간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의 교류를 알고자 하는 물음이 제기 되어야 하는데,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익숙한 자신의 습성에서 인간 본인이 식상되든지 또 다른 것을 추구하는 초월적 물음에 제기되어야만 지금까지 해 왔든 습성에서 벗어나 처음의 의문을 가지는 걸음을 내 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만 만족하고 안위를 가지는것에 목적을 두어버린다면, 앞에서 말하는 현재의 습성에서 벗어나 비어있음으로써 채우려는 욕구가 생길 수도 없거니와, 그 물음 자체도 생각지 못하게 되어 보고야만 믿는 제한적 幸福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매스컴에서 사람의 눈의 한계시간은 13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제한적이며 불완전한 인식의 기능으로 무한하며,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을 소유하고 파악하며 분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어떤 물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물음이 왜? 하느님은 굳이 남에게 보이고 싶고 보여지기를 원하는 인간의 습성을 내면의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기를 원하는지를 궁금해지기 시작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문을 닫아라’(마태 6.6)라는 의미는 나의 의식이든 무의식의 상태적 능력이든 일체 타협하지 않고,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총애에 의해 그분과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실체적 행복이며 이 행복이 바로 하느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주시고자 하는 보상의 방식입니다. 이 보상은 바로 하느님 자신의 현존인 영원한 생명 안에 참여시켜 일치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조금 더 말씀 드리자면 보이는 것에 대한 보상은 이미 받았다(마태 6, 2.5.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무슨 연유로 주셨고 또, 주신 그분이 누구신가를 물어가야 하는, 바로 이 의문이 하느님의 숨은 방식 속에 있는 부르심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바로 자신의 방식을 ‘항상 모름’에 두는 작은 자의 길이요 낮은 자의 자세이며 자신 조차도 모르게 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16,3)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의 일부분이며 이미 주어진 것은 주시려고 하시는 분의 의도를 알아듣게 하기 위한, 즉 자격의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여 이미 받은 것에 집착하기보다 부단히 보이는 것의 원인을 찾아 매 순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찰나 찰나마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이 바로 골방으로 들어가는 역동성이며 문을 닫아거는 처연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좁은 길의 행동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작은 자의 실천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본능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습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끝없이 끄달려온 방식에서 매순간 벗어남이 바로 기도(마태 6,5)요, 인간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진정한 자선(마태6,3)인 것입니다. 이 벗어버리려는 목적은 바로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보이고자(마태6,18)하는 원의에 의한 것입니다. 자신만의 안심입명이 아니라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의 사랑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잠 깨우는 방식인 것입니다. 해서 정화되지 않는 본능적 사랑의 방식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식을 알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추어진 사랑이라고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을 통해서만이 왜?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이 앎으로서 보이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여주시는 분의 의도로 보여지는 세상을 창조주 본래의 의도로 풍요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행하자.
-
경규봉 신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말씀처럼...많이 희사하는 사람은 그 만큼 많은 축복을 받고, 적게 희사하면 그만큼 적게 받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기쁜 마음으로 희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희사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은총을 풍성히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고린토 교우들은 넉넉하게 가질 수 있었고, 온갖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가난한 교우들을 돕는 선행은 하느님께 영원히 기억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희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느님께서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필요한 뿌릴 씨를 주시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신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요하게 해주시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교우들이 넉넉하게 희사한다면 자신들에게는 의롭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는 유익이 되며, 더 나아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된다. 왜냐하면 희사 받은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희사할 것을 권고한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하느님께서 지금이라도 주신 것을 거두어가시면 사람은 이내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부자가 많은 재산과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었지만 그날 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면 그 재산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루가 12,15-21).

하느님께서 맡겨두신 기간 동안 그 재물을 잘 관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까닭은 곧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곧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므로 그렇게 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은 하늘에 쌓아둔 보화가 없으므로 받을 상이 없을 것이다(마태 6,19-21; 루가 12,33-34; 갈라 6,7).

희사하는데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적인 결심에 의해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또는 비난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많이 바친다면, 이는 참다운 희사가 아니다. 또한 주기 싫은 것을 아까워하면서 희사하거나, 대의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희사하는 것도 하느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한 희사는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다. 좋은 평판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 불과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3-4)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행을 기뻐하신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처럼 복을 주시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신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자선을 행할 때에는 오직 하느님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거나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하느님께서는 원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

-기정만신부-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떻게 사제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느님께선 저에게 많은 것을 체험해 볼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일반 대학생으로서 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것,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주유소 아르바이트, 막노동, 성당 청년회와 교사 활동, 거리에서 호두과자 판매 등등. 물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운 시간은 성당에서 보낼 때였습니다. 경쟁도 남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성당에선 모든 것이 기쁘고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 아버지께 드릴 만한 것이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선 저를 고등학교 졸업 후 5년이 지나서야 당신 부르심에 응답할 용기를 주셨습니다. 전 그저 ‘하느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조그만 희망을 가졌을 뿐인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제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전엔 후회를 많이 하는 삶이었지만 하느님께서 희망을 주신 이후로는 후회도 미련도 없이 늘 기쁘게, 자유롭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 삶을 통해 저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작은 희망을 항상 우리에게 주고 계시며, 우리가 그 작은 희망을 깨닫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시는 작은 희망을 저희가 깨닫게 해주소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작은 희망을 깨닫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임을 깊이 온몸으로 온 삶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늘 이루어지고 있는 기도의 응답

-이봉하수사-


수도원 입회 전, 1년 가까이 성당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낡고 오래 된
옛 사제관 회의실 안쪽에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전깃불도 희미하고
연탄보일러도 작동이 잘 안 되는 그야말로 골방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본당 단체들이 사용하였으나 모임이 끝난 이후는 늘 조용해서 기도와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면
어둠으로 가득한 성당에서 성체등을 바라보며 기도했고, 밤이면 혼자 마당을
오가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방으로 들어와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직 예수님과 수도원 입회만이 내 생의 전부인양 생각하였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여도
그때는 참으로 은총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살고 있는 오늘, 공동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홀로 있는 시간과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높고 깊이 갖도록 순간순간
마음 안에 골방을 만들어 끝까지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니다.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그분을 위해 사용하고 또 그런 공간이
주어지는 수도자로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임을 고백하며
인류의 평화와 공동체를 위해 감사와 청원의 기도를 바칩니다.


 

-윤용선 신부 -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 안에서 세 가지 단어를 접하게 됩니다.


즉, '자선', '기도', '단식'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에 의하면, 자선을 베풀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자는 율법의 위반을 속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특별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율법 이 요구하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경건한 유대인을 나타 내는 특별한 표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 가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로 합시 다.
유대교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을 특별하게 돌보는 '자선'은 매 주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필요한 금전과 물품을 제공함 으로써 실천되었고, 금전과 물품이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외에도 개별적 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높이 평가하며,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 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구약의 시편뿐 만 아니라 후대에 저술된 유대교의 문헌들 역시 기도를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전심전력을 다해 실천하 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찬미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있어서 '단식'은 속죄의 힘을 지 닌 것으로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단식 혹은 개인적인 단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 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막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불행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선업, 즉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 당시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에 와서도 좋은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실천되어야 할 내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필요하고 실천되어야 할 선업들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까 ?
그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선업의 소개가 아니라, 이들을 어떠한 자세로 행해야 하는지,
즉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을 전하려 하십니다.
올바른 자세로써의 실천이란,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오늘 예수 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 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자들에게 해당되는 잘못된 자세들이 오늘의 말씀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 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의 행동',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스스로 나팔을 부는 자세',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들은 바로 위선자들의 자세로서, '하느님 때문'이 아 닌 '나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자세 때문에, 비록 그것 이 선업의 실천일지라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실천해야 할 선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선업들입니다.
그러나 실천에 앞서 더욱 중요히 생각해야 할 면은 그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로써 내가 이 선업들을 실천하려는 지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오늘의 복음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느님 때문에 행하는 선업들을 통해 받게 되는 보상이 있길 바랍니다.
그 보상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을 찾 아 얻게 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

 

 

보상에 대하여

-김웅태신부-

 

1) 자선을 베풀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2)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3)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래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이상은 당시 유대인들의 선행에 대해 으례히 그만한 보상이 있만??믿던 생각을 바꿔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선행을 하고도 남에게 보였다고 해서 무슨 대가를 못 바란다면 그게 무엇이냐? 잘 하려는 의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이 선행을 하는데 하느님께 대한 보상 뿐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한 오만이 곁들여 있는 그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기 위한 선행, 타인에게 인정 받은 그 선행의 보상은 사람들의 인정으로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 흔히 어떤 보상, 보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어떤 선을 행할 때, 행한 일에 보상을 바라보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선행을 행할 때 적게나마 또는 막연하게도 어떤 보상을 생각하고 행한다면, 그는 하느님을 회계원이나 재판관으로 생각하는 결과가 됩니다. 계산서를 제출하고서는 "나는 이 만큼 많이, 이런 좋은 일을 하였으니 이제 거기에 상당하는 보수를 청합니다!"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이 지적해 주고 있는 바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일러 주시는 방식대로 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누가 존경하며, 사랑하는 어느 누구를 마음깊이, 또 예의있고 열렬하게 사심없이 사랑한다면, 무엇을 해 주고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부족하게 생각할 것이며, 그에게 해와 달과 별을 다 주어도 오히려 빚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능력껏 다해 주고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상대방에게 당연히 자신이 받을 것이 있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이와같이 신앙을 가진 우리가 하느님 앞에 회계나 보상의 결산을 바라며 선행을 하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건없이 하고도 항상 더 못해서 부족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 행위에 있어서 마음 자세에 있어서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이렇게 사랑이 깃든 겸손한 자의 선행만을 은밀히 모두 갚아 주십니다. 아멘.

 

-이상화신부-


 여러분들 텔레비전 많이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텔레비전 잘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거기 드라마에 신부도 나오고 수녀님도 나오고, 신자들도 나오고 하더군요. 그런데 거기 나오는 신부님, 수녀님, 신자분들은 얼마나 열심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늘 아무대서나 미사포를 뒤집어쓰고 꼭 성모상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고, 수녀님은 뭐 잘못 먹어서 채한 듯한 근엄한 얼굴로 신자걱정, 세상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신부는 언제나 이상한 수단을 입고 옆구리에는 성경책을 하나 꼽고 또 얼마나 자상한지 요한님, 마리아님 이렇게 말하면서 저의 닭살을 돋웁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게 정말 기도하는 것이고, 걱정하는 것이고, 복을 빌어주는 겁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지요. 주님께서는 그런 연극을 싫어하십니다. 주님은 누가 보던, 보지 않던 진실된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 중에 주님의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살짝 들여다보면서 참 안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런 보이는 것만 보시는 분이라면 세상 사는게 너무나 힘 빠지지 싶습니다. 늘 진실이 아닌 연극같은 삶을 산다면 그건 참 비참한 일이지요. 내 보이지 않는 진실한 선행을 지금도 주님께서 다 기억해 주시니, 이름 없이 이 세상을 사는 나는 힘을 얻습니다. 언젠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니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힘을 내서 선을 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모든 것을 보아주시는 주님께 진실한 사랑을 봉헌 하도록 노력합시다.

 

 


익명의 천사

-양승국신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노인시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소규모에다가 시골에 위치한 시설이었기에 후원자 찾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월말마다 운영자는 머리를 싸매야했습니다.

어느 월말이었습니다. 납부해야할 고지서, 지출해야 할 곳은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쥐꼬리만한 정부보조금은 금방 바닥이 나고, 빚이라도 내야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시설 통장에 당시로서는 ‘거금’에 해당되는 돈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익명으로 보냈기에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누가 보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급했던 시설 운영자는 답지한 익명의 후원금으로 우선 급한 불을 모두 껐습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는데, 운영의 어려움은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다시 월말이 다가와 이곳저곳에서 독촉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운영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통장을 확인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액수의 후원금이 도착해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5년,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 익명의 천사는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렇게 생명의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왔습니다.

10년이 흐르자, 그 오랜 세월 동안 한결 같이 도와주신 그분이 어떤 분일까 사람들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고마웠기에, 어떻게 해서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완벽하게 추적을 따돌리는 익명의 천사 앞에 다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편법을 써서 그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답니다.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후원금을 꼬박꼬박 보내주신 걸 봐서 재벌이나 큰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이리라 생각했었는데, 큰 오산이었습니다. 구조가 건강하지만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분이었기에, 그리고 성장하기까지 고마운 분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익명의 자선으로 갚기로 결심하고 평생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기에 시설운영자는 이런 사실을 세상에 좀 알려야겠다, 이런 분 같으면 상을 받아도 큰 상을 한번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매스컴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익명의 천사는 완고했습니다. 죽어도 취재는 안 된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부지기수로 기자들이 찾아갔었지만, 그 때마다 딱지를 맞았습니다.

작은 성취 하나라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까 기를 쓰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익명의 천사, 그분은 진정 하느님의 천사이십니다.

그분은 복음의 정수를 실천하고 계시는 분, 참 신앙인이십니다.

그분은 열심히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고 계시는 분, 그래서 언젠가 영광스럽게 불멸의 상급을 받으실 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분이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저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강영구신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대에게

레위기 19,18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레위기의 가르침은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나의 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우리’의 세계가 하늘나라(天國)입니다.
‘너’와 ‘나’가 따로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에서
자선(慈善)이란 타인(他人)에게 무엇을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나에게 베푸는 행위입니다.
배고픈 ‘너’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추위에 떠는 ‘너’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나의 몸을 따뜻하게 입히는 것입니다.
병든 ‘너’를 치료해주는 것은 아픈 나의 몸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인 ‘너’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나팔을 불거나 보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누리는 것들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베풀어주신 것들입니다. ‘나’의 것이 아닌, 잠시 동안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너’에게 베풀었다고
하느님께서 보상을 해주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기억하고 따지는 것은 참된 자선(慈善)이 아닙니다.
대가나 보상을 바라고 자선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은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나’나 ‘너’도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거나 단식을 할 때에도 거래하듯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를 조건 없이 당신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불이(不二)의 세계에 머무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 1-6)

  -유광수 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나팔을 불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표정을 짓지 마라." 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즉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런 구분을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부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아니면 긍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우리는 비교적 "... 하지 마라"는 것은 하고, 반대로 "..하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각자 "..하지 마라."는 것 중에 내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 하라"고 한 것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내가 하는 선행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예뻐 보이려고 화장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은 늘 경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려고 하니까 늘 다른 사람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질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급기야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도 말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금식할 때에는 애처로운 표정을 짓지도 말고 오히려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고 까지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원칙은 분명하다.

 

즉 아버지를 닮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할 것이고 아버지를 닮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할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것은 취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자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남들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관심은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 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그래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한테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바쁘다. 그리고 여기 저기 쫓아다녀야 하고 좋은 것을 입어야 하고 항상 최고의 것을 지향한다. 그래야 남한테 칭찬받고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이 분산되고 산만하다. 안정되지 못하고 늘 쫓기며 불안해 한다.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은다. 따라서 시간 낭비가 없고 힘이 분산되지 않으며 한 곳에 투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는 소원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고, 그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한다.   

 

사람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 져야 다른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어 지고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하고 해야할 것은 최선을 다할 할 때 완덕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한발작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 십계명의 응용 : 자선, 기도, 단식 †  
-박상대 신부


십계명의 응용: 자선·기도·단식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의 의로움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함으로써 예수로부터 위선자로 책망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 "의(義)"를 인정받았다. 이는 구약의 율법 자체가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모든 율법과 규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十誡命, Decalogue)이 건재(健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위해 선포하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나은 의로움이 십계명의 기본 정신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이라는 단어가 모세오경에 들어 있지는 않다. 이 단어는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경(五經)에는 "증거판"(출애 31,18; 32,15; 신명 4,15), "훈계와 계명의 돌판"(출애 24,12; 25,16), 또는 "두 돌판"(신명 5,22)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로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약에 주어진 십계명(출애 20,2-17; 신명 5,6-21)의 참 뜻을 하나하나 새겨들어야 한다.

십계명은 유일(唯一)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 그분이 선택하시는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을 의미하며, 인간의 응답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며, 이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품위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다. 십계명의 참된 의미에 대한 해설은 도서출판 "일과 놀이"가 펴낸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를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116-119 페이지 참조)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십계명 전부를 열거하여 각각의 계명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해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은 십계명에 대한 충분한 풀이로 간주된다. 마태오복음 5장의 여섯 개 대당명제는 우선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새로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4일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는 산상설교의 둘째 부분(마태 6장)이 봉독된다. 마태오복음 6장은 대당명제와 같은 비중의 율법(律法)에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지녀야할 성덕(聖德)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는 "십계명의 응용"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신앙인의 성덕으로 자선(慈善)과 기도(祈禱)와 단식(斷食)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신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덕목(德目)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행(善行)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善行)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償)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償)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엄수(嚴守)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조그만 선행을 하고도 크게 불려서 나팔을 불며 떠벌리고, 남이 몰라주면 오히려 섭섭해하는 우리들이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과 신뢰심과 겸손의 마음이다. 신앙인은 이웃에 대한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게 되고,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얻게 되며, 음식과 육정(肉情)을 절제하는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