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Margaret K 2007. 6. 16. 03:20

   2007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합니다. 용서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용서받았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날마다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은총을 받은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 7,36─8,3)

 
“Do you see this woman?
When I entered your house,

you did not give me water for my feet,
but she has bathed them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You did not give me a kiss,
but she has not ceased kissing my feet since the time I entered.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but she anointed my feet with ointment.
So I tell you,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because she has shown great love.


 

 율법주의자 시몬은 죄인을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한다. 그의 상식으로는 죄인일수록 멀리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

 

☆☆☆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만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부자 시몬인데, 그는 열심하고 모범적인 바리사이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죄인으로 표현된 여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적극적인 신앙인들로서, 성경에 명시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쓴 이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갔으니 죄인과 가까이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집주인에게는 영 못마땅하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빚진 사람 둘의 이야기를 하시며 모두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시몬의 대답은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돈 문제에 관한 상식은 잘 알면서 죄인을 용서하는 상식에는 어찌하여 둔감하냐고 지적하십니다.
시몬은 지식과 이론을 중시하였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행동을 앞세웠습니다. 곧,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네 믿음이다.’라는 뜻입니다.

 

 

새벽을 열며

 

 오늘은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미사 6대에 견진교리 4시간. 정말로 장난 아닙니다. 사실 어제도 쉬운 날은 아니었지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5대의 미사를 해야 하는 관계로 무척이나 힘든 하루를 보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바쁜 오늘을 대비해서 어제 저녁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시간 정도 잠들었을까요? 저는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무척 가려웠거든요. 더군다나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윙~~’이라는 소리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모기가 제 침실에 들어와서 저를 물었던 것이지요. 불을 켜고 모기를 잡을 것인지 말지를 궁리했습니다. 문득 불을 켜고 모기를 잡자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달콤한 잠에 빠져서 눈도 잘 떠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기가 정말로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다시 잠에서 깼습니다. 더워서 잘 수가 없더군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모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2마리 잡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으로 한 마리가 휙 지나갑니다. 얼른 잡으려고 했지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못 잡으면 또 물릴 텐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딱 한 마리 남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없으니……. 한 마리 정도야 괜찮겠지. 또 모기도 먹고 살아야지.’

이러한 생각을 하고서 다시 침대에 누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불을 끔과 동시에 들리는 ‘윙~~’ 소리를 이겨내기란 제 신경이 너무나 예민하더군요.

모기를 완전히 다 잡은 뒤에야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 정도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모기가 없어야 편안하게 푹 잘 수가 있네요. 그런데 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과 죄의 관계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쯤이야’ 하면서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남들도 하는데 뭐…….’라면서 쉽게 범하는 죄. 바로 그러한 안일한 마음이 주님과 나의 관계를 더욱 더 멀게 만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더욱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아니 일치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그러한 더러운 죄의 덩어리들이 완전히 사라져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정한 뉘우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표시합니다.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을 발을 닦은 뒤,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모두 붓습니다.

바로 이러한 진정한 뉘우침이 비록 전에는 죄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은 그렇지 못했지요. 그는 오히려 이러한 죄인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똑같은 죄인으로 취급하는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주님 앞에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었을까요? 혹시 바리사이처럼 다른 사람의 죄만 잘 보고, 내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뉘우침만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성체 앞에 앉아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빠다킹신부

 

 

   하느님, 그리고 교회와 이루는 화해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용서의 결과도
보여주십니다. 그 표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 백성의 품으로 돌아오는
복귀를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고유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키는 권한도
주셨습니다.?사도들의 이 임무는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여기서 ‘매고 푼다’는 말은 교회가 친교 안에 다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당신과 이루는 친교 안에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이 임무는 오늘날의 사제단에게 부여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기도와 직무수행을 통하여 죄인과 화해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제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치유되고, 교회와 더불어 친교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양승국신부-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끔찍한 상처에 어찌할 바 몰라 몸부림치던 한 여인, 삶의 밑둥이 싹둑 잘려나가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던 한 여인을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제는 타계한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詩)가 떠올랐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로 가자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오늘 복음 장면은 바리사이들에게 아주 큰 스캔들을 제공한 전대미문의 ‘대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게 취하신 태도를 보고 바리사이들은 깜짝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 사람의 초청을 받아 식탁에 앉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격식이나 체면과는 거리가 먼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산해진미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겠지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영양보충에 전념하시던 예수님 앞에 한 ‘껄끄러운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껄끄러운 존재’는 다름 아닌 ‘죄인인 여자’였습니다. ‘행실이 양호하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아마도 ‘자영업’ 여성 이었던가 봅니다. 정황을 봤을 때 이 여인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히 손가락질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만찬석상에 등장한 것만 해도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그 여인이 하는 행동 좀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었습니다.

식사 중이시던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대뜸 울기 시작합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만찬 파티에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 참 안 어울리는 장면이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더 괴로운 일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무리로 향유까지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여인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왜 하필 밥 먹는데 까지 와서 이 난리입니까? 제발 날 좀 가만히 놔주십시오. 그리고 찝찝하게 왜 남의 발에 눈물을 떨어트려요? 남사스럽게 남의 발에 입은 왜 맞춰요? 당장 그만 안 둬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조금도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십니다. 여인의 눈물에 담긴 지난 세월의 상처와 아픔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십니다. 여인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마침내 여인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달콤한 사랑은 갈 데 까지 간 여인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은 지난 세월 여인이 받아왔던 갖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여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그 옛날 여인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똑같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새살을 돋게 하십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좌절은 없습니다. 영원한 눈물도 없습니다. 끝도 없는 슬픔이란 더욱 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하더라도 언젠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위기가 호기’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인간적 한계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은총의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시기 위한 배려가 고통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기회입니다.

고통과 설움의 땅을 넘어 드넓은 벌판에 당당히 서십시오. 세상의 한 복판에 용감히 서십시오. 질기고도 질긴 고통의 세월 앞에 당당히 직면하십시오. 상처에 살이 쓰라려도 흔들리면서 세상의 고통 그 한가운데로 기쁘게 나아가십시오........◆


 

 죄의 용서와 구원

-서공석신부-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비유 이야기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의 이야기, ‘은전 한 푼을 잃어버린 여인’의 이야기,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간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등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사용하신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야기들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인 공동체가 그분을 회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들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그분에 대해 제자들이 회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은 이야기들을 비롯해서,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한 이야기,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갈아 앉힌 이야기, 유대인들의 버림을 받아 로마 총독에게 고발되고 단죄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으며 어떻게 믿고 사셨는지를 말해 줍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 복음서들은 그 이야기들을 담아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일어난 일 한 가지를 우리에게 알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식사초대를 받아 식탁에 앉아계십니다. 그 고을에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 한 사람이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접근합니다.

복음서는 그 여인이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고 말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집주인은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예언자라면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사회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집 주인도 바리사이이고, 그는 하느님이 그 여인을 죄인으로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집주인 시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각각 빚진 두 사람을 예화로 말씀하시면서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곧 사랑이고 사랑하면 용서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그 바리사이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서로 다릅니다. 유대교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립니다. 그 하느님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대결 관계 안에 있습니다. 단죄하며 버리고 벌을 주는 대결 관계입니다. 인간은 그 하느님 앞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물을 정성들여 바치면서 비로소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 당하고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인간은 항상 긴장하여 있어야 합니다. 지킬 것을 제대로 다 지켰는지, 또 바칠 것을 다 바쳤는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느님 앞의 인간은 엄하게 감시하는 주인 밑에 있는 노예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그 죄 많다는 여인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성찰은 제대로 하였는지, 또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물론 보속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믿음이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인간 세상이 존중하는 원리는 인과응보입니다. 잘 한 만큼 보상을 받고 잘못한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우리 사회의 형법이나 민법의 기본 원리입니다. 인간 사회의 질서도 그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는 하느님도 이 원리를 기본 질서로 삼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등장한 여인도 그런 이유로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인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하여 대결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베풂이 있어서 자녀의 생명이 있고,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어 자녀가 자랍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실천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삽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며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그 장애에서 벗어나게 하여 충만한 생명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자녀 되는 우리도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과 대결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합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적활동에 동참한 여인들

-조욱현신부-


연중 제11주일 복음은 주님을 헌신적으로 따라 다닌 여인네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중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에 대해서는 앞에서 많이 묵상했기에 생략하고, 여기서는 루카 8,1-3절에 언급된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 여인'들에 대해서 묵상하겠습니다. 오늘복음의 배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대 땅 전역에 거룩한 새바람이 불고 있는 갈릴래아 제2차 전도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1차 전도기간 동안은 예수님께서 홀로 활동을 하셨다면, 이제부터는 12제자들과 소수의 여인들이 함께 활동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정활동은 더욱더 활성화되어 유다의 온 고을과 마을들이 주님의 승리의 깃발인 하느님의 나라가 나부끼게 될 것입니다.

I, 복음 전도활동

1. 마을에서 마을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에서, '두루 다니다'는 헬라어로 (디오듀오)로 단순히 거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고 중심부를 통과하는 것을 말하여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마을에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활동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직접 찾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능성이 있는 마을부터 우선 공략하고 보자 하는 것도 아니고, 빠짐없이 온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찾아가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 전도활동의 치밀함과 계획성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복음전도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니다가 마을을 발견하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온 마을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지며 찾아가십니다(마르 6,6). 즉, 복음 전도활동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실천도 예사롭지 않게 나타납니다. 이미 우리 주님의 심중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다 들어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의미를 추구한다면 복음전도에는 예외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사는 마을이라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그렇다고 달동네라고 우습게 여기지도 않으시고 똑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가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문턱은 누구에게나 낮습니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가지는 중요성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편견을 두고 계셨더라면 우선 찾아야 할 마을과 그렇지 않을 마을로 구분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마을을 염두에 두고 찾아야 할 필요성이 존재합니다.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 단지라 하여 황금어장이고 단층 가옥으로 구성된 달동네는 그물질이 영 시원치 않을 어장으로 여긴다면 자칫 복음의 편견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사람 사는 마을이면 복음의 황금 어장입니다.

2. 복음 전도의 내용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여기서 말하는 '그 복음'이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되고 거기에 믿음으로 화답한 자가 누리는 특권인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인 확장을 의미합니다. 즉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 아래 침탈당한 세상 왕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느님의 왕국에 의해 쫓겨 물러갑니다. 마을마다 복음이 전파됨과 동시에 거룩한 하느님의 나라의 깃발이 세워집니다. '각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그 세력을 크게 더하여 영적으로 크게 정복해 나아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거침없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복음 전도활동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입니다. 한 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일은 온 나라가 힘을 모아야 하는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활동은 특정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지 않고 온 교회가 힘과 뜻을 집중하여 성취하여야 거룩한 과업입니다. 또한 복음이 크게 확장되어 소위 부흥을 이루었다면 그 결과로 하느님의 나라가 더욱 크게 드러나야 하지 어떤 개인의 인기가 높아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한 복음 할동이고 누구를 위한 복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까? 방향과 목적이 분명합니까? 혹 편견과 야망으로 인해 왜곡되지는 않았습니까? 이 천년 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점검하도록 합시다.

II. 예수님의 동업자들

이 땅에 구원 활동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곁에서 힘껏 도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동업자(협력자, 동역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1코린 3,9). 특히 오늘 묵상할 복음을 통해 우리는 혹 가질지 모르는 우리 주님과 제자들이 일정한 수입도 어떻게 먹고 지내셨을까?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1. 열 두 제자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제자는 훈련의 과정 중에 있는 자들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교실에 앉아 듣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 현장을 누비며 배웁니다. 아울러 주님의 복음 활동을 곁에서 돕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복음을 가슴에 담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힘써 증거합니다.

2. 봉사하는 여인들

열 두 제자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우리 주님을 섬기며 도와드린 자라면, 오늘복음 2-3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물질로 봉사하며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3년 동안 공생활을 보내실 때 어떻게 먹고 지내셨을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여 주는 부분입니다.

사실 뚜렷한 수입이 없으신 우리 주님이시고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우리 주님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돌로 빵을 만들어 드시면서 끼니를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끼니는 다른 사람들의 공급하는 음식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럼 누가 우리 주님과 제자들의 필요를 공급하였는가? 바로 오늘 소개되는 여인들입니다. 주로 여인들이 나서서 우리 주님과 열 두 제자들의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였습니다. 먹을 양식을 대로 입을 옷을 대고 또한 생활 필수품들을 공급합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가진 재산으로 아낌없이 내어 봉사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3절ㄴ).

이 여인들의 봉사는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발적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좋은 것을 함께 하려는 순수한 마음입니다(갈라 6,6).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자 그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주님과 제자들을 공양하며 섬깁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을 보여 준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우리 주님의 권능으로 치유받은 막달레나 마리아도 있었고, 헤로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의 재정을 담당하는 쿠자스라는 고급 관리의 부인인 요안나도 있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다양한 여인들이 우리 주님을 섬기는 데 앞장섰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여인들의 물질 봉사는 일시적인 행사로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오늘복음에서 '시중을 들다'라는 말은,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아마 우리 주님의 공생활 내내 이들 여인들의 봉사가 계속 되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특별히 이름이 거론 된 세 여인(막달레나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 무명의 수많은 여인들이 복음 활동을 효과적으로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귀한 협력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과 제자들이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실 수 있도록 제반 다른 사항은 자신들이 나서서 담당한 여인들의 자세는 참으로 아름답고 귀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함께 힘을 모아 공동으로 담당할 때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자신들의 소유 재산을 털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것을 포기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여인들을 불러모아 놓고 물질 봉사하라고 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주님을 통해 들어온 복음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적시자, 그 은혜에 몸을 떨며 자원하는 마음 그리고 즐거이 내는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섬기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사치레로 한 두 번 생색낸 것도 아닙니다. 끝까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봉헌하였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려고 내 것을 내놓는 물질 봉사의 협력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III. 예수님과 여인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공적 활동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님의 활동에는 상당수의 여자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복음에 대한 반응도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이었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자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매우 관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은 여자를 차별하거나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제 부터 오늘복음에 등장한 여인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막달레나 마리아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우선 이 여인은 흉악한 마귀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일곱 마귀에 의해 사로잡혀 살았으니 그 비참함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더러운 영 마귀에 의해 인격이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에 삶이 온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거의 포기하고 지냈을 것입니다. 일가 친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이웃 사람들도 괴롭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 마귀에 의해 영혼이 피폐되고 삶은 정상을 벗어나 심하게 뒤틀려 갑니다. 심령에서 평안은 이미 사라졌고 어두운 그림자에 질식될 지경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기쁘지 않고 웃어도 즐겁지 않고 그저 메마른 공허에 슬퍼집니다. 하루 하루가 지겹고 우울합니다.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어집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이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의 권능을 통하여 온전함을 얻습니다. 오랜 세월 자신의 삶과 영혼을 짓눌러 왔던 더러운 일곱 마귀들이 빠져나가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비로소 참 자유와 평안이 그녀의 영혼을 감쌉니다. 한 순간에 삶이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놀라운 경험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꿈에라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뀌어 새로워지고 제자리를 찾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였을까요?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새사람 새 삶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복음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이루 헤아리기 힘든 감격과 감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주님을 위해 그녀의 모든 인생을 봉헌하기로 결정하고 실천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물질을 아낌없이 우리 주님을 위해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이미 우리 주님에게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높이고자 하는 믿음의 심정이 고스란히 바친 물질에 담겨져 있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의 은총 안에 변화된 삶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만나 뵈옵는 자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요한 20,11-18). 복음의 결정적인 장소에 바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막달레나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뗄 수 없는 중요한 여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자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합니다. 주로 집안에 국한 된 여자들의 활동을 공개적인 장소로 확산시켜줍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름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논 자는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여인의 이름 2명이 오늘복음에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2. 요안나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 여인은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안나는 귀부인입니다. 그녀의 남편 쿠자스는 당시 헤로데왕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집사)였습니다. 혹자는 오늘날 재무부 장관에 해당되는 직급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고위 관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안나는 평범한 아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요안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활동을 돕는 삶을 삽니다. 그녀가 우리 주님을 만난 계기는 자신의 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2절 중반절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들" 가운데 그녀도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무슨 병에 그녀가 걸려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우리 주님께 나아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한 나라의 지체 높은 집안의 안주인으로 행세하던 그녀가 우리 주님께 나아왔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복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으로 기꺼이 나아와 스스로 자신의 무릎을 꿇리며 굴복하는 자는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진 부류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통해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는 우리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그녀의 인생은 사실 불행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지위와 명성이 그녀를 후광처럼 덮고 있어서 보는 이의 선망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깊어 가는 병색이 그녀를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돈 있고 명성 있으면 무엇합니까? 건강하지 못해 골골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크게 결단하고 찾아 온 그녀를 받아 주시고 그녀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녀가 우리 주님에게 나아 온 것은 그녀의 중심에 믿음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안나, 그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날은 그녀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돌아서는 매우 의미 깊고 소중한 날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과 구원의 은총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만끽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맡깁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우리는 요안나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녀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우리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데 가로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지도층에 있는 자들은 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있다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요안나가 공개적으로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을 도왔다는 것을 보아 그녀의 남편 쿠자스 역시 복음에 대하여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추정됩니다. 요안나의 봉헌(헌신과 봉사)는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훗날 그녀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우리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뒷받침하여 줍니다(루카 24,10).

요안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그 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며 콧대가 높던 여자를 내가 어떻게 하면 더욱 주님을 사랑할꼬 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요안나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여자입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 전도를 위하여 열렬히 봉헌했던 요안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의 권능을 다시 한번 체험합니다.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 몸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충성 봉사한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신앙을 발견합니다.

3. 수산나와 그 외 많은 여자들

오늘복음에서 보면, '수산나'는 달랑 이름만 밝혀졌지 그녀에 대한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실명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추정됩니다. 그녀 역시 막달레나 마리아와 요안나처럼 우리 주님을 만나 병 치유를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2절). 아마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고 곧바로 우리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른 여러 여자들'..., 복수 형태로 꽤 많은 숫자를 나타냅니다. 구체적인 이름이 거론된 세 사람의 여자들(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말고도 적지 않은 수의 여인들이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섬김과 봉사의 길을 걸었던 여성도들의 자취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남성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복음 활동을 도왔다는 자체가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조용한 여인들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과 봉헌의 삶을 심어주었습니다.

III. 복음 활동에서 여인들의 역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생필품을 생산하여 살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직장을 가지거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기에 그 누군가가 우리 주님의 필요를 공급해야 했습니다.

이 일에 주로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나섰고 그들은 우리 주님과 제자들의 쓸 것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세우는 나라입니다.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붙이는 나라가 아니고 협력의 기쁨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오늘복음에서 보면, 이미 선택 받은 12 제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였고 또한 그 자리엔 수많은 여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함께'(with), 동업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과 함께 하였던 여인들 가운데는 가정이 있고 돌보아야 가족들이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잇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정을 팽개치고 주님을 따라 다녔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그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을 도왔다고 보여집니다.

어떤 여인은 빠듯한 살림이지만 근검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먹을 양식을 사서 우리 주님과 제자들에게 공급했을 것이고, 어떤 여인은 손수 짜서 만든 옷을 드렸을 것이고, 어떤 여인은 자신의 집에서 기른 양과 소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생필품을 사서 공급하였을 것이고, 어떤 여인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저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는 데 전심 전력하실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왔을 여인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열 두 제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고 또한 봉헌한 믿음의 여인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공생활 동안 이 땅에서 이루신 복음 활동을 떠올리면 주님과 동고동락하였던 열 두 제자들의 얼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다니는 데, 주님의 활동 중심에는 또 다른 중요한 사람들 바로 수많은 여성 봉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봉헌하였던 여인들의 봉사활동은 우리 주님의 구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 여인들을 통해서 복음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협력이 무엇인지를 잘 아루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봉사활동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복음 봉사활동은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협력입니다.

 

 

간절한 통회의 마음

-배광하신부-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모든 생명체가 암수 짝이 있었으나, 남자인 아담(사람)만이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 옆에 아리따운 여자가 서있게 됩니다. 하와가 탄생된 것이지요. 그때 아담이 기쁜 나머지 목청껏 부르짖은 탄성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 23)

아마도 아담의 탄성 뒤에 또 다른 말을 덧붙이라면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구나!”가 제격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뻐하였던 아담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사랑하는 하와가 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함께 먹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느님께서 아시고는 분명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창세 3, 11)

이쯤 되면 사내대장부가 나무숲 사이에서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제가 따 먹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를 고발합니다. 방금 전 사랑과 기쁨의 탄성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곰곰이 묵상하면 인간이 지은 첫 번째 죄인 원죄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따먹은 뒤의 잘못된 처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았던 죄, 자신의 죄를 남에게 덮으려 하였던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 같은 죄를 끊임없이 짓고 있습니다. 자신은 깨끗한 척, 아무런 죄가 없다는 듯이 살면서 남을 단죄하는 성향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이 같은 사실에 부끄러움 없이 그대로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은 단연코 다윗 왕입니다. 그 위대한 임금의 더러운 치부도 그들은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었던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한 사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다윗이 위대한 까닭은 아담과 같은 치사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회개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 13)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참회하는 기도를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 3~5)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거라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성인 성녀나 위인들까지도 용서받지 않고 생을 살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용서 받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도 용서하며 살았기에 그 위대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의 단점을 살펴보면 내 자신 안에는 더 추악한 같은 단점과 잘못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신학은 눈물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가 예전에 지었던 수많은 잘못에서 용서받은 기쁨과 회개의 끊임없는 눈물에서 비로소 신학이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성 바오로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25)

내 안에 있는 죄를 내 자신 스스로 볼 수 없으므로 이웃을 통하여 볼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탓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간절한 통회가 있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감격의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50)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김지영신부-


 두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 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는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떼니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한 사람’(요한 7,37)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죄 많은 이 여인이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기억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여인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이 오직 행위로써 자신의 진심을 예수님께 보여 줍니다.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이 모습에서 여인은 자기 자신의 잘못과 죄를 ‘용서’ 청하는 가장 겸허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할 때 주님은 우리의 잘못을 모래 위에 기록하시고,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였을 때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며 당신의 자비와 은총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겸허히 고백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성덕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제의 죄인이 진심어린 참회로써 오늘의 의인이 되는 교회입니다. 과거 행실이 좋지 못했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오늘 성녀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진심으로 뉘우침으로 천국으로 초대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을 받은 우리가 이제, 그 사랑과 자비를 가족과 이웃 안에서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용서와 사랑

-이기양신부-


 오늘 복음은 신약성경 중 가장 스캔들이 될 만한 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점잖은 식사 자리에 갑자기 죄 많은 여인이 나타나 흐느껴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더니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까지 발라 드립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사람들이 당황한 것은 물론 집주인 시몬은 왜 예수님께서 더러운 여인을 가까이 하시는지, 더구나 그녀를 용서하고 따뜻한 사랑의 말까지 건네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시몬의 속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빚진 두 사람의 예를 들어 그녀의 마음을 전하며 시몬에게도 더 큰 사랑의 삶을 제안하십니다.
 
그러나 자기는 의롭고 깨끗하다고 생각한 바리사이 시몬은 부정한 여인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큰 사랑을 이해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처사를 못마땅해 하며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속 좁은 사내 시몬은 식사에 초대하고도 참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신뢰와 용기를 드러낸 죄 많은 여인은 과거를 깨끗이 씻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합니다.
 
도대체 이렇게 용감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한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루카복음 저자는 이어서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줄곧 따라다녔던 여인들을 소개하는데 그들 중에는 막달레나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들켜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을 때 예수님의 개입으로 극적으로 살아난 여인으로 알려져 있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 복음의 죄인이 동일 인물인지는 학자들 간의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큰 사랑을 입고 죄의 구렁텅이를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여인이었음은 사실입니다.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는 용서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이렇게 큰 사랑은 예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며 바로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년은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마음의 문까지 닫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그의 어머니는 말 못할 큰 슬픔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청년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청년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습니다. 한쪽 눈만으로 살아가는 것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고 간곡히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원을 하고 간청하며 매달렸지요. 마침내 마지못해 수술을 하게 된 아들은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때가 되어 눈에 감긴 붕대를 풀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붕대를 푼 순간 아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바로 눈앞에 한 쪽 눈이 없는 어머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장님이 된 내가 네게 짐이 될 것 같아 한쪽 눈만 줄 수밖에 없었단다."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보입니다.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서 제한이 없는 유일한 임무는 사랑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어가던 여인을 살려 주시고 용서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큰 은총을 입은 여인들은 완전히 새로 태어났으며 예수님의 적극적인 추종자로 변화됐습니다.
 
사람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용서이며, 회개의 길로 돌아서는 순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사랑을 체험했을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 같이 자기는 깨끗하니 부정한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고 죄가 많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살리는 자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처럼 자신의 잣대에 맞춰 이웃을 판단하고 처벌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처럼 회개하고, 죄녀 같이 고백하며 살아가자

-조순창신부-


인생이 연극이라면, 희극인가 비극인가? 각박하고 메마른 인생보다는, 부드럽고 따사롭고 정 있는 삶이 좋고, 죽고 사는 아귀다툼보다는 여유 있고 아량 있고 양보하는 삶이 좋고, 무관심과 이기적인 사회보다는 보은하고(은혜 갚고) 협동하는 삶이 좋은데, 이상과 현실은 왜 다른가요? 누구의 탓입니까? 마귀의 피가 흘러서일까요?

오늘의 제 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왕조의 전성 시대에 다윗 왕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죄를 지었습니다. 요합 장군 휘하의 장병들이 한창 전쟁 중에 있을 때에, 다윗 왕은 일선에 나가 싸우는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탐하여 정을 통하고, 끝내는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어 죽게 하고 나서는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때에 예언자 나단이, 비유를 들어 다윗 왕을 몹시 꾸짖습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가 품삯으로 얻은 암새끼양 한 마리를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는데, 그 부자는 자기가 기르는 소나 양도 많건마는 잡기가 아까워서 가난한 집에서 기르는 한 마리뿐인 새끼 양을 빼앗아다가 잡아, 손님 대접을 했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난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나단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이 다윗에게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왕으로 갖출 것을 모두 넉넉하게 주셨으나, 욕심이 한이 없어, 남의 아내를 탐하여 죄를 지었으니, 집안에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을 것입니다.”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하며, 죄를 고백하고, 깊이 참회하여 용서받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것이 옛날의 남의 얘기입니까?

자기는 넉넉한데도 불만하고, 자기 것은 털끝 하나 꼼짝 못하게 하면서도 남의 것은 무시하여 마구 짓밟아 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있다’면, 남의 얘기일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중하면 남의 것도 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죄많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뭇사람에게 짓밟히고, 웃고 울다 버림받아, 상처투성이가 된 여인! 그것이 그 여인만의 죄입니까? 돈과 쾌락과 폭력의 사회 풍토가 문제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믿었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도 남을 넓으신 아량과 폭넓은 사랑을 믿었으며, 새인생의 길을 열어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기 죄를 시인하고 깊이 참회하였으며,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다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새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횡포를 뉘우쳐 봉사 생활을 시작했고, 죄지은 여인은 죄를 뉘우쳐 열심히 예수를 돕는 봉헌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 메시아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이사42,1d-3c)고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단의 꾸지람을 듣고 회개한 다윗처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참회하여 구원 얻은 죄인처럼, 내 죄를 인정하고 참회 고백하여 용서받고,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를 낫게 해 주시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여 화합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멋있게 삽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한 행복한 인생입니다.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김현신부-


교우분들의 친교를 더할 방법을 찾다가 산악회를 만들었습니다. 본당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라서 “바오로 산악회”라 이름 붙였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 본당이라 험한 산을 피해 한 달에 한 번씩 산행을 합니다. 그냥 산행이 좋아서 참가한 미신자 이웃들도 생겨나고 있어 예감이 좋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엔 길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중간 중간 봉우리를 넘어가는 길목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기도 하고, 미끄러질까봐 발이 닿는 바닥에 타이어 조각을 잘라 촘촘히 엮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푹신하기도 하고 잘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계단의 손잡이도 부드럽게 마감을 잘 해 놓아서 어쩌다 몸을 의지하게 되 면, 거칠지 않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연이은 바위 사이를 올라갈 때에는 굵직한 밧줄을 묶어 놓아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위험하지 않게 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늘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위한 수고와 애씀입니 다. ‘나는 이 길이 생겨날 때에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나는 이 계단을 놓기 위해 나무를 나르고 밧줄을 엮은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하는 생각에 더 많이 더 자주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 그동안 감사하지 못했던 자신을 알아채는 것’, 이것이 회개요, 신앙생활의 출발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길’이십니다. 나의 삶이 바로 그분의 수고와 애씀 위에 놓여 있음을 알아채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또, 그분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고 만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번 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용서의 체험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오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일러줍니다.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다른 이의 발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위에 분명 나를 위한 애씀과 수고로 먼지 묻고 더러워진 이웃들의 발걸음이 녹아있습니다. 그들의 발에 시선을 두는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는 사람’, 곧 신앙인입니다.

감사의 물을 머금고 우리의 영혼이 자라납니다. 감사가 문을 열어줘야 기다리고 있던 은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이웃의 머리, 얼굴, 옷차림이 아니라, 상처 나고 더럽혀진 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이현민신부-


우리는 왜 하루하루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일까? 뉴스를 보면 날마다 사건사고가 엄청나는데 이 험악한 세상에서 왜 살려고 노력하는가? 살면살수록 자꾸 죄만 지어서 우리의 영혼은 더러워지는데 왜 왜 왜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백소에서 저는 이런 훈화를 하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깨끗해졌으니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죄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이 모습을 못마땅해 하자 예수님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사랑이 크다는 얘기를 들려주십니다.

바리사이는 죄많은 여인이 잘못을 뉘우친 것에 관심이 없고 죄인이라는 것만을 보지만 예수님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러고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누구는 어떤 흠이 있다고, 죄가 있다고, 잘못만을 생각합니다. 그가 뉘우치고 열심히 살아가도 의심의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만큼 용서,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용서와 큰사랑이 내가 맨날 잘못을 하여도 나에게 주어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만회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도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늘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들은 삶의 의미를 주님에게서 찾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잘 모실 수 있도록 내 안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용서와 사랑

-이성억신부-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다 죄라고 고백하고 어떤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해성사를 볼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사람들 이 복음에서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을 때 그 동네에서 행실이 나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울며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발에 입 맞추며 향 유를 부어 드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사이 사람의 태도는 얼마나 편협하고 옹졸합니 까? 그는 예수님께 드려야 할 존경이나 예의의 표시 를 보여드리지 않았습니다. 발도 씻겨 드리지 않았고 우정의 입맞춤도 없었으며 향유를 드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죄 지은 여인을 초대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여인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청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믿고 죄의 사함이 거의 필요치 않다거나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잘못이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죄지은 여자를 경멸합니다.

죄 많은 여인은 자기 죄를 알며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미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친구이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으며 그분을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지 않았지만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기를 용서해 주셨음을 알았고 예수님께 온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기 죄를 용서받았다고 느낀다면 사랑의 행위를 표시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위대한 다윗도 죄를 범하였고, 나단의 고발에 묵묵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그 어떠한 벌도 감수하겠다고 하느님 앞에 다짐하였습니다. 그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뉘우칠 줄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를 나단에게 고백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제시하고 죄 사함의 권한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려야합니다. 고해성사를 게을리 하면 할수록 다시 성사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게 되고 마음이 자연히 멀어지며 성사를 안보는 기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냉담자가 됩니다. 죄 사함을 받는 고해성사를 보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표시합시다.

 

 

 이런 저런 생각

-주영돈신부-


 바른 생활의 사나이 시몬


난 늘 정의가 아닌 일은 가까이 하지 않았고, 율법과 규정을 충실히 지키며 바른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고 행한다.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아가는 것일까? 예수님은 알까? 저 여자가 얼마나 아부와 아첨에 능한 사람인지? 세상의 온갖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인지?

천부적인 아부꾼이며, 교태부리는 여인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 앞에서, 온갖 교태와 아부를 떨면 모두다 나에게 넘어온다. 난 이런 인간들이 싫다. 스스로 죄악에서 벗어난 사람인 듯,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인 듯 자신을 뽐내는 인간들을 나와 함께 온갖 죄악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너무나 숭고하시다. 도덕적인 인간인 체하지 않는다. 율법의 규정에 메이지 않고, 안식에도 인간을 살리시고, 고통과 죄악에 빠진 이들의 벗이 되어 주신다. 난 그분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의 모든 삶을 고백하고 싶다. 그분이 나를 안아 주시고, 일으켜 주신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분 곁에 단 일분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

예수


시몬아,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난 어떤 명예나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의 아첨과 아부를 받아도 그에게 줄 선물(명예, 돈, 권력)이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것뿐이다.
시몬아! 너는 내가 율법의 규정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너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너의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으면 더 좋겠구나! 진짜 신앙인의 길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여인아! 죄 많은 자가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은 더 두려운 법이다. 이미 죄에 물든 사람은 죄의 무게에 감각이 둔해져서, 자신이 죄인인지 깨닫는 일 자체가 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일보다 회개하는 일이 어렵고, 이 회개는 더 큰 용기와 변화를 위한 고통의 시간의 시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용기를 가진 자와 변화를 추구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회개하는 자는 이제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를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김규한신부-


이번 주 복음말씀은 그 유명한 "예수님발에 향유를 붓는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드라마틱한 이 장면을 통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고 싶으면 하느님이 만들어준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러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다가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후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이때 모든이들은 그여인을 자기가 만든 눈으로 바라보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만들어준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자기눈으로 바라본이들은 "저 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구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나"등으로 생각하였고 하느님 눈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저 여인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주어야지"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천당에 간다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손님이 되는것이 아니고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어 하느님의 생명,존재,사랑을 몽땅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만이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릴수 있습니다. 이런이유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기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릴수 있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되는 비결은 바로 "모든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내육체, 내직위, 내명예, 내재산, 내지식등이 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이들이 존재로 더나아가 이세상 전체가 환영,그림자, 물거품, 지나가는 바람, 말라버리는 아침이슬 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하느님만이 모든것의  모든 것으로 생생히 보입니다.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또 생각을 전환시키고 끊임없이 하느님 생각으로 전환시킬수있습니다. 기쁨을 하느님의 미소로 보고 감사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고 고생을 '조금 있으면 휴식'으로, 슬픔을 '조금있으면 기쁨'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가난한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봅니다.

하느님 눈을 가지면 하느님처럼 됩니다. 다같이 하느님의 눈을 가져 지금 여기서부터 "대자유인, 구원받은이" 로 살아 갑시다.


 

 용서, 영광과 사랑의 지름길

-나춘성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이다. 초등학교시절 옆자리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화해하지 못하고 책상을 칼로 반으로 표시를 해놓고 조금이라도 넘어오는 것이 있으면 사정없이 찢어버리는 아이들을 본적이 있다. 조금만 양보하고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면 될 일인데 그렇지 못하고 오랫동안 원수처럼 지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도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왜 그렇게 용서에 인색한 것일까?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부하의 아내를 탐내어 부하를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다윗 왕의 잘못을 고발하는 나탄 예언자의 말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서 가문의 벌과 자신이 받을 벌을 면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여 죽을 벌도 면하게 된 것이다.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따르며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이다.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로마 군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용서를 통해 얻게 될 당신의 영광을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어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르는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 시몬에게 빚진 돈을 탕감 받는 액수가 크면 클수록 고마운 마음이 커지는 것처럼 용서하는 마음도 키우라고 가르치신다. 용서하면 용서하는 그 이상 용서를 받는데 왜 사람들은 용서에 인색한 것일까? 형제자매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청할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는 미움과 복수의 고리에서 벗어나 사랑과 용서의 삶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구원의 길로 나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하나’(7,37)가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맡게 해주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입니다.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요? ‘죄와 벌’이 아닌 ‘죄와 용서’, ‘믿음과 구원’, ‘예수와 여인’.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죄가 아닌가 싶은데 경건한 바리사이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멸망할 이들과 상종하면 자신들도 불결해져서 하느님과도 멀어진다고 규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여자들과 드러내 놓고 가까이 지내는 것은 남의 이목 때문에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도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편이 되십니다.
이름도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하고 발치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자 손수건도 옷자락도 아닌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말 대신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예수님은 말없는 선의의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반면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은 환영인사도 손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음식만 제공한다.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하듯이 말입니다. 순간 ‘아마 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닌 모양이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저런 대접을 받으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초대한 것은 아닐까?’ 하며 후회했는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아이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고독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 복수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것이다.” 연민이 없는 그를 보며 야누쉬 코르착의 말이 생각납니다. 동시에 지난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사상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분노보다 슬픔이 앞서는 교포 학생이 생각납니다.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그녀의 마음과 행동을 받는 예수님은 의도적인지 잊어버렸는지(정작 그들이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면서: 루카 14,7) 몰라도 당신을 대우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도 차별 없이 손님으로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들이 돌아서서 ‘그는 손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율법을 어기는 자’(마르 7,5)라고 헐뜯고, 그는 ‘먹보요 술꾼’(7,34)이라고 소문을 낼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도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7,40)며 상대가 질문에 대답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는 “더 많이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채무자를 더 사랑합니다.”고 당연한 이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몬은 ‘죄와 벌’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죄 지은 그가 이제부터는 사랑하고 감사하며 새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의롭다고 여기는 시몬은 적게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적게 사랑하고,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큰 사랑을 드러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루카 18,9-14).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며 뉘우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한 이야기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해 줍니다. 나탄의 슬기와 용기도 그렇지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깨달은 즉시 잘못을 인정한 다윗의 훌륭한 점도 여기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왕의 자존심으로 합리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탕한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9) 하듯 다윗도 자신의 죄가 단지 한 인간, 우리야한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저지른 잘못이라고까지 뉘우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이 탄생됩니다.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51,18-19)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7,50)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라 2,16)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왕에게 몰약을 섞은 기름을 부어 성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메시아란 ‘기름부음받은자’란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도유로 충만한 메시아였지만 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의 선한 뜻이 마치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름부어 드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도 머리도 몸도 아닌 발에. 스승이 발을 씻기는 것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하신 예수님은 여인이 눈물로 발을 씻자 여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고 하셨듯, 발에 기름부음 당하심으로 여인에게 메시아로서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해방과 사랑을 체험한 여인이 어찌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아래까지도 따라갔을 것이고, 날이 밝기만 하면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향유와 향료를 준비했을 것입니다(루카 23,56; 24,1).

오늘날도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며 향유 바르는 삶을 사는 예수님의 여인들이 많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