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Margaret K 2007. 6. 15. 03:02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쉽게 망각합니다. 사는 것에 쫓기어 정작 소중한 사랑은 외면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 성심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3-7)


I tell you, in just the same way
there will be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ople
who have no need of repentance."

  


 잃어버린 양은 사랑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만을 생각할 뿐 남은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목자는 그런 양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려고 직접 찾아 나선다

 

☆☆☆

 

 진정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교우들을 위하여 순직한 성직자들이 많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최양업 신부님도 그랬습니다. 조선의 세 번째 사제 그룹이었던 강도영·정규하·강성삼 신부님 역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에서 거행된 이 세 분 신부님들의 서품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가진 성품성사였습니다. 특히 세 분 가운데 막내였던 강성삼 신부님은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입학하여 14년 만에 사제품을 받았는데, 그분의 짧은 일생은 참으로 험난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와중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강성삼 신부님은 16살 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국 땅 페낭 신학교에서 영양실조와 풍토병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신부님의 첫 사목지는 경남 밀양(명례)이었으나, 본당 사목 6년 만에 선종하였습니다. 38세의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은 또한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성화는 예수 성심을 닮는 일입니다. 기도 없이, 은총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이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노력합시다.

 

 

 

   마음의 회개     

-박영봉 신부-


 회개하고 참회하라는 예수님의 호소는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회개 없는 참회 행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된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적 참회는
삶 전체의 근본적 방향 전환이며,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고,
우리가 지은 악행을 혐오하고 악에서 돌아서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적 회개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믿고
생활을 바꾸겠다는 의향과 결심을 포함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디고 완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 나라를 구하라시며 마음의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이 같은 회개는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는 것이며,
또 자녀다운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웁시다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신학교에서 사제의 삶을 준비하는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곤 합니다. 한번은 어느 신학생이 점점 자신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면서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도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고, 슬픈 사건 앞에서도 그 슬픔이 자신의 마음에 깊이 있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울고 싶은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메마름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서를 위해 신학 공부 때문에 뒤로 미뤄두었던 인간의 삶이 배어 있는 소설도 읽고, 인간미에 흠뻑 젖는 영화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촉촉한 마음을 지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충분히 공감하면서 동의와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영상물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 알려고 노력하는데 왜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 마음을 본받고 배울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촉촉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애정이 흘러넘칠 텐데 말입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첫째 독서 말씀처럼 자신의 양떼를 돌보고 그 양떼에게 음식을 먹이며 상처가 있으면 싸매주고 치유해 주며, 지켜주고 좋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마음입니다. 또 둘째 독서에서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과 항상 함께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안전한 우리에 잘 두고 온 힘을 다해 많은 공을 들여 찾는 그런 아름다운, 그렇지만 힘이 무척 드는 일을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끝까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며, 그 한 마리를 찾아 잘잘못을 탓하지 않고 함께 있음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마음을 우리는 세상과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최재현 신부-

 

오늘은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며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고, 주님이 받으신 고통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일치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후 첫 금요일에 거행되는데, 한국에서는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의 유래는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7장 37절에서 38절에 “예수님께서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라는 부분과, 19장 34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부분에서, ‘군사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라고 기록되어진 두 부분입니다. 초기 교회부터 중세의 신비가들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요한복음의 이 내용을 묵상하였고, 특히 예수님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대해 의미를 찾고자 하였는데, 히폴리토, 이레네오, 유스티노 등의 교부들은 예수님의 마음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내리므로, 성령과 함께 예수 성심을 초자연적인 은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심에서 흘러 나온 물과 피에서,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로 보았고,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먹여 기르는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탄생하였듯이,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는 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후 많은 학자들과 신비가들을 통해 그 의미가 깊어지고 여러 회칙을 통하여 예수 성심에 대한 사상이 구체화되면서, 1969년 이후 예수 성심과 성체성사와의 연관성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을 예수 성심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예수 성심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며, 예수 성심은 현 시대의 분열과 불화를 치유하는 가장 중요한 은총의 샘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는 1995년에 사제들이 복음 선포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하고자 이 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오늘날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신적이면서 뜨거운 사랑인 동시에 가시적인 사랑의 상징인 예수 성심을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신자들이 흠숭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다려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밖에 아무 것도 모르시는 주님의 그 마음에 푹 잠기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을 때, 예수님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전통인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하느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하늘나라로 불러 주시며, 그런 사람들이 의인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죄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광야에서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아 집으로 데려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갈 것이며, 찾았을 때 더욱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달리 하느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분이시며, 인간 하나하나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최고의 사랑을 가진 분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무엇을 분리시킨다거나 하느님의 큰 사랑에서 누군가를 제외시킨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인 셈입니다.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시는, 그래서 죄와 잘못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그를 찾아 어루만지시고,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모두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주님이심을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이러하기에 교황 바오로 6세도 ‘예수 성심은 현 시대의 분열과 불화를 치유하는 중요하고 적절한 은총의 샘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사제들도 주님의 크신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며 실천하고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오늘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이기에 약점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을 위해서 많은 분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주님의 넓고 깊은 사랑 속에 살아가고, 그분의 고통을 위로해드리며 크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 사랑과 구원의 상징인 예수성심

-경규봉 신부-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라고 믿었기에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이 교회 안에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예수성심을 공경하였고, 특히 보나벤뚜라(1220-1274), 메히틸다(1241-1299), 젤뚜르다(1256-1302)와 같은 성인이 예수성심을 공경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 예수성심께 대한 공경이 공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예수성심 공경이 세계적으로 보급된 것은 프랑스의 방문회(The Visitation Order) 수녀인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내리신 예수성심의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2년 반 동안 성녀에게 70회나 발현하시면서 예수성심 축일 제정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당신 성심에 관한 것을 계시해 주셨다.

1856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예수성심 공경을 권장하면서 예수성심 축일을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축일 설정 100주년인 195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예수성심 공경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회칙(Haurietis aquas)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하였다. 비오 12세는 이 회칙에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신앙고백 그 전부이다.”라고 하였다. 예수성심 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우리 죄로 인하여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창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성심은 속 깊이까지 열려, 그 자비의 깊은 현의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드러났다.”고 말하였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예수성심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내렸음을 믿었고, 예수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아담의 늑방에서 하와가 탄생했듯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고 고백하였다.

성 보나벤뚜라는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교회가 생겨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419, 37)라는 성서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聖意)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심장)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 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다”(생명의 나무에서)고 말했다.

예수성심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늑방(심장)에서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보이시고 교회를 구원하셨다. 피와 물이 흐르는 심장은 곧 인간 사랑과 인간 구원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들은 예수성심을 열심히 공경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다지고 많은 냉담자를 회개시켰다.

오늘 예수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를 깨닫고 알기 위해 주의 생애, 수난, 성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의 성심을 사랑하도록 힘쓰자. 성심의 사랑은 특별히 성체성사에 담겨 있으니 성체 앞에서 조배드리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공경하자..........◆

 

새벽을 열며

 

 요즘 저는 가정방문 중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방문이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더군요. 이번 주에는 지난 화요일부터 3일 연속으로 가정방문을 했는데, 특히 어제 같은 경우는 12시 30분부터 저녁 7시까지 방문을 했는데도 겨우 1개 구역을 마쳤을 뿐입니다. 하긴 집에 계시지 않으면 집 밖에서 기도를 한 뒤에 다른 집을 방문했고, 만약 냉담자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고해성사를 보게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가정방문을 할 때, 어떠한 가정을 중심으로 방문해야 할까요? 당연히 열심하지 않은 가정, 지금 쉬고 있는 가정을 중심으로 방문하여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방문을 하다 보면, 열심한 가정을 중심으로 방문하고 싶은 인간적인 마음이 자주 일어납니다.

때로는 문밖에서 마치 싸구려 책 외판원 취급당하듯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거부를 당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답답한 마음이 계속 생기깁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못나가는 이유가 외적인 것에 있다고 하시거든요. 즉, 자기 때문에 성당 못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적 이유 때문에 성당에 못나간다는 핑계만 계속해서 반복하시기에 그 이야기가 그리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냉담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냉담을 푸는 순간, 그 순간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돌아오는 주일날 나오셔서 제게 “신부님, 저 왔습니다.”하면서 환하게 웃으실 때의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약간의 수고로 이들이 성당에 다시 나왔다는 사실, 물론 얼마 뒤 다시 냉담하시는 분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열심한 신앙인으로 바뀐 분들을 만나게 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저는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 두냐는 것이지요. 한 마리를 찾는 동안 광야에 내 팽개쳐진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잘못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가정 방문을 통해서 그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한 분이라도 다시 신앙생활로 이끌었을 때, 그 기쁨이 훨씬 더 크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른 양들을 그냥 광야에 팽개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똘똘 뭉쳐져 있지요.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분들을 찾아뵙고 그들을 다시 아흔아홉 마리의 양 무리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너무나도 많은 냉담자들. 이제는 그들을 하나씩 주님 앞으로 모시고 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때 우리 역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잠시 쉬고 있는 교우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빠다킹신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양승국신부-


<친애하는 신부님들께>


   수도회에 첫발을 들여놓던 시절, 당시 제가 지니고 있었던 각오나 목표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꼭 성인(聖人)이 되자. 성인이 되는 것이 제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셨던지 매일 주님 은총이 단비처럼 제게 내리더군요.


   첫 서원을 하던 무렵, 목표치가 눈에 ‘확’ 띄게 하향조정이 되었습니다. 첫 마음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수도생활의 연륜이 좀 더 쌓이면 나아지겠지?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제서품을 받던 무렵, 부끄럽지만, 목표치는 더욱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聖人)은 힘들겠구나. 그렇지만 아이들과 신자들에게 내 삶을 나눠주는 착한 목자는 되어야지”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나이를 좀 더 먹으면...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년,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욱 부끄럽지요. 요즘 각오는 “적어도 후배들에게,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어떻게 해서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존재해야 할텐데...너무 비참하고 초라해지면 안 될텐데...”하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거품이 제거된 제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기만 합니다. 결국 의지할 곳은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도, 찬란하지도 않습니다. 뭔가 신비롭고, 뭔가 특별한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제서품을 통해서 한 사제의 삶이 예수님의 목자로 거듭나지만,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나약함, 갖은 인간적 결함, 그간 받아온 상처, 앞으로 지고가게 될 십자가는 그대로 안고 사제생활을 시작합니다.


   교우들은 사제들을 향해 초인(超人)을 기대하지만 우리 사제들은 교우들과 다름없는 똑 같은 인간입니다. 때로 휘황찬란한 세상의 유혹 앞에 맥없이 무너지기도 하고, 때로 너무도 부담스런 직무에서 훨훨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위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사제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자들의 열렬한 기도입니다.


   사제들의 인간적 부족함 앞에 실망할 때도 많겠지요. 사제들의 나약한 모습 앞에 슬픔도 크겠지요? 그럴 때 일수록 더 열심히 기도해주십시오.


   차별대우 받고 미움 받고 자란 아이의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만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그 아이에게서 남을 생각할 줄 알고, 이웃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신앙인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매일 손가락질 받고, 밥 먹듯이 비난만 당하는 사제는 점점 하느님과 멀어져갈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받은 사제일수록 기도를 더 잘하는 사제,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한 평신도의 권고를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저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안내해주기 위하여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왜 여러분이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분노에 차 있어야 합니까? 왜 다른 목장으로 눈길을 돌리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어야 할 바로 그것, 곧 우리의 친구이며 스승, 치유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 곧 또 한분의 예수님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신원에 대한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족할 것이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닌 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을 더 이상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길잡이를 찾고 있는 혼란에 빠진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캐서린, ‘친애하는 신부님들께’,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참조)

 

 
"예수 성심의 사랑"

 -이수철신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랑의 거룩함이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사랑의 전능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예수 성심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난 날입니다.

 

말 그대로 오늘은 하느님의 날이자 예수님의 날입니다.

 

온 누리에 가득한 6월의 짙어가는 초록 잎들,

바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예수 성심을 상징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에 만물들입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 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하느님이요,

의인에게나 죄인에게나 똑같이

단비 같은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판단하지 말라.....

산상설교의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두를 낱낱이 알려주신 예수님입니다.


겸손, 온유, 연민, 인내....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땅 낮은 곳으로

사람들을 몸소 찾아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찾아 주셨기에

우리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리라.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리라.”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결연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소외되어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라면,

사람이 하는 일들이란 고

작 형제들을 왕따 시키는 일이요,

천재 교육을 위해 무수한 평범한 이들을 소외시키는 일입니다.

 

복음에서 보다시피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은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 나서는

목자의 사랑,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자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사실 죄가 없어 성인이 아니라

회개하여 하느님 사랑에 열렬히 불탈 때 성인입니다.

 

초점은 죄가 아니라 회개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예수 성심을 열렬히 사랑할 때

우리 마음 하느님 마음이, 예수 성심이 됩니다.

 

예수성심은 사랑의 샘, 은총의 샘, 생명의 샘이니

우리 마음 역시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생명의 샘, 은총의 샘이 됩니다.

 

사실 모든 신심들 예수 성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으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아드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하는

우리 안에 주입된 예수 성심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수용하는 예수 성심의 사랑,

바로 우리의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기도 독서 시 바오로의 말씀은

언제나 들어도 감격이요 백절불굴의 사랑임을 깨닫게 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예수 성심을 평생 열렬히 사랑할 때

이런 하느님 사랑, 예수 성심의 사랑은

그대로 우리 사랑이 됩니다.

 

이런 사랑, 말 그대로 생명의 샘이요 활력의 샘입니다.


얼마 전 읽은 성자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벨기에 국왕 보두앵(Baudouin1951-1993)에 대한

몇 사람의 고백이 감동 깊었습니다.


“국왕을 만나면 자신을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며,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이끌어 줍니다.”


“국왕께서 당신을 바라보신다면

  아마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대로 예수 성심의 마음과 눈길을 지녔던 국왕임이 분명합니다.

마치 지금 여기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인 것처럼

예수 성심의 사랑을 쏟아 부었던 벨기에의 국왕 보두앵이었습니다.

 

사실 성인들의 대부분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마냥 우리를 비참하고 썰렁하게 눈길이 아니라

우리를 충만한 존재,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예수 성심의 눈길이요 성인들의 눈길입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성인들이었습니다.

 

민족의 스승이라 일컬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한 얼마 전 타계한

금아 피천득 선생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도산은 누굴 만나든지 정성으로 대해 주었지요.

  그분은 제자도 많았는데,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선생님이 자기만 위해준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예수 성심의 사랑이

매일 미사 중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혈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됩니다.


저는 미사 중, 성체를 나눠줄 때 늘 감동합니다.

 

남녀노소,

잘났던 못났던,

누구나 똑같은 그리스도의 몸 성체 하나를 받아 모십니다.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 성심의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예수 성심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박성태 신부 -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 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로,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에 지내게 됩니다.

이 축일은 중세에 이르러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1856년 교황 비오 9세는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권장하면서 예수 성심 축일을 라틴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사제들이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헌 성덕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부산 교구 사제들은 오전에 최재선 주교님의 영성강화와 점심이후에는 교구장과 사제단의 공동미사를 신학교 성전에서 봉헌하는 행사를 가지게 됩니다. 주님앞에 부족한 저희 사제들을 위해 기도중에 많이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이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뜨거운 표시임을 느끼게 합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예수 성심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함을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숲 한가운데 크고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렇게 멋있는 나무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나무의 뿌리들이 나무에게 인사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아름다움과 꿋꿋함을 존경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잎과 꽃과 열매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많큼 훌륭합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이 산에서는 당신이 가장 훌륭한 나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뿌리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비록 아무도 우리를 봐 주지 않고 생각해 주지 않지만, 당신이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듯이 우리가 필요합니다. 당신에게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들이니까요. 아무리 우리의 모양이 볼품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향기도 없지만, 당신이 꽃들을 피우고 향기를 내뿜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도 바로 우리들이랍니다. 우리는 비록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이 달콤하고 멋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급해 주는 영양분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의 모든 것은 우리들의 것이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나무란 결국 뿌리니까요." 이런 대화로 각자가 중요하다고 신경전을 보낸 뒤 한참 후에 조용히 흙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나무와 뿌리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공급해 준 것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우리들 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없으면 나무도 뿌리도 있을 수 없지요.

나는 여러분을 내 다정한 품에 껴안은 채 언제까지고 보살펴 줍니다. 여러분에게 영양분과 견고한 안전을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흙이니까요. 나는 또  수분과 활력을 공급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요, 사실 뿌리와 밑둥과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는 모두 나에게서 비롯된 것들이에요. 나무와 뿌리를 말하자면 절대로 흙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그 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요한복음 4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고, 마태오복음 26장 28절에는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 나온 피와 물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튼튼한 뿌리도, 많은 가지도, 아름다운 잎과 꽃, 탐스러운 열매도 각각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한결같이 흙으로부터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사랑의 예수 성심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을... 아멘.........◆


 


 

 예수 성심 대축일에 대해서

-나기정신부-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자연의 어떤 사물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쉽게 헤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속내를 잘 모르기에 서로 오해도 하고,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여 편협한 생각을 갖기도 한다. 이처럼 누구의 마음을 알고 헤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배워 닮을 수 있다면, 주님과 더 가까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들은 자기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도 특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봉사자, 곧 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르침과 당신의 삶을 배우고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온유와 겸손, 소외되고 작은 이들에 대한 봉사, 자기를 희생하는 생활, 잃어버린 양을 되찾으려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배우고 그렇게 사는 이들이다.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는 사제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날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감사드리고 예수님의 상처받으신 마음을 묵상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의미를 되살려 사제들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닮으며,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려고 여러 행사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 성심 대축일은 어떻게 지내게 되었을까? 중세 때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체께 대한 신심은 널리 퍼졌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성심)에 대한 공경은 늦은 13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17세기에 와서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이 보편화된다. 결정적으로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축일 미사를 이때부터 봉헌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에 와서는 성령강림 다음 셋째 주 금요일로 축일이 지정되었으며, 20세기에 와서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또 1995년부터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이날에 말해주는 예수 성심의 신심은, 첫째 한없이 풍요로우신 성심께 감사드리는 일이다. "가장 작은 나에게 사도의 은총을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에페 3,9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 그대로이다. 둘째는 우리의 잘못으로 상처받은 성심을 통회의 마음으로 묵상하는 일이다.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골고타로 올라가 처형되신 것"(요한 19,17-18 참조)을 통회의 심정으로 묵상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래서 복음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멍에를 가볍게 해주시는 당신께 초대하시는 말씀(가해, 마태 11장), 아울러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심장이 창에 찔리어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믿는 이들(교회)이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말씀(나해, 요한 19장),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 목자의 사랑 깊으신 마음을 일깨워주는 말씀(다해, 루가 15장)을 들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인간의 속죄를 기억하고(본기도),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와 성사와 구원이 나온 것을 선포한다(감사송).

이날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다. 그 거룩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백 분의 일이라도 헤아린다면 효자 소리를 듣게 되듯이, 미약하지만 주님의 깊으신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리도록 노력해 보자. 사랑의 마음에 대해 감사드리고, 충실하게 기억하고 넉넉하게 보답해 드리지 못하여 불편을 끼친 것을 기억해 보자.

또한 사제 성화의 날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덕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마음으로 돕도록 하자. 그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오늘 이 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열절한 사랑의 샘

-김기웅신부-

 

어느 청년이 아름다운 한 아가씨를 너무나 사랑했다지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얼굴과는 다르게 독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였다지요. 아가씨는 청년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야겠다며 자기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하였다는군요. 아아,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그 말대로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두 손에 들고는 아가씨의 사랑을 얻게 된 기쁨에 달음질쳐서 아가씨에게로 향하였답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니의 심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지요. “얘야,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자기를 죽인 못난 아들에게조차도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마음은 결코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을 바라보며 “아버지,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군사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셨을 때 그 피와 물로 온 세상의 죄를 다 씻어 없애고 싶으셨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애타 하셨던 분, 그래서 밤이 새도록 밀려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손을 대어 고쳐주셨던 분. 그분은 열절한 사랑의 샘이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나누는 삶으로

-이기양신부-


교회는 6월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聖心)을 특별히 공경하는 달로 정하여 성대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인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바라는 뜻에서 우리 천주 교회에서는 이 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한 것 같습니다.

사제들의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에서 살고, 또 사목을 하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지요.

저는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참으로 좋은 공동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목자와 양이 평화롭게 살수 있는 공동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오랜 시간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갈릴래아 호수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 나라 이스라엘에는 우리가 잘 아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 강이 있으며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가 함께 있습니다. 그 작은 나라에 어떻게 전혀 다른 성질의 호수와 바다가 공존하는지 신비롭기만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이스라엘을 찾아가다 보면 누구나 깜짝 놀랄 일을 목격하게됩니다. 이집트에서 죽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오아시스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끝도 없는 사막에서 어느 순간 오아시스로 바뀌는 장면이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갈릴래아는 바다라고도 불리지만 민물로써 분명 바다가 아닌 호수입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골란고원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두 받아서 호수를 이룹니다.

그래서 갈릴래아 호수는 고기들이 아주 풍부합니다. 그곳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은 제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물고기가 많고 새들이 많으며 땅이 비옥한 이곳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명이 넘치는 휴양지로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사해는 많이 떨어져 있지 않지만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지요. 염분이 많아서 수영을 못해도 가라 않지 않으며 그 주변에는 풀도 거의 자라지 못합니다. 대단히 삭막한 그곳에서는 주변도 같이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금방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왜 그렇게 작은 나라에서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서 누구나 사랑하는 생명의 호수가 되고, 사해처럼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골란고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다시 요르단 강으로 흘려 보냅니다. 넘치는 경우가 없지요. 계속해서 받아서 다시 내려보내고, 받아서 보내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에 반해서 사해는 요르단 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만 합니다.

저지대에 있는 사해는 물이 새어나갈 틈이 없습니다. 받는 대로 모두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물은 계속 증발하기만 할 뿐 흘러 내려가는 것은 없습니다. 계속 고여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삶과 죽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누면 살고 움켜쥐면 죽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명확하지요. 생명의 공동체를 만드는 열쇠는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끊임없이 나눌 때 그때 나는 더욱 생명력 있게 살아 움직이며 넘치는 은총을 받는 것이지요. 나누면 나눌수록 생명은 넘쳐납니다.

우리 시대가 갈수록 죽음의 문화에 휩싸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이 되며, 모두가 외로움 속에 헤매는 이유는 너나 없이 움켜쥐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녀간에도, 형제간에도 나눌 줄 모르고 움켜쥐기만 하여서 모든 관계는 생명을 나눌 줄 모르는 무덤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지요.

옛날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또 부모와 형제를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던 그 시절은 상생의 문화와 생명이 흘러 넘치는 정겨운 시대였지요.

이것은 사회와 가정에서의 만이 아니라 성당에서도 똑같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참으로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 서로 사이좋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애 있는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누면 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나누면 되는 것이지요. 칭찬과 격려의 말을 나누고 배려와 인내심을 나누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제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신자들이 함께 따라 할 때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저는 여러분께 갈릴래아 호수처럼 나누며 살아가자고 다시 한 번 제안합니다. 누구나 가고 싶고 누구나 머무르고 싶어하며, 편안하고 생명이 넘치는 공동체를 우리는 이룰 수가 있습니다. 나누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한 공동체를 위해서 목자는 헌신하고 또 헌신하는 목자를 위해서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우리 모두의 기도 속에 이러한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욱 성장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례적 개관

-최창덕신부-

 

성령 강림 후 세 번째 금요일인 이 날, 전형적인 신심 축일인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은 인간에게 향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심장으로 표상하는 특별한 관점 아래 인간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축일이다. 이러한 공경의 발단은 요한복음의 기록에서 특별히 증거로 끌어내는 교부들에 의해 발견되고(예를 들면 7,37:19,34), 여기에 중세 신학자들의 언급이 있었다.

12세기의 캔터베리의 안셀모,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hard) 그리고 13세기의 대 알베르토, 보나벤뚜라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는데, 특히 13,14세기의 신비가들이 예수 성심 공경에 강한 자극을 불러 일으켰다. 대표적 인물로는 막데부르그의 메히틸드(Mechtild), 헬프타의 겔트루드(Geltrud), 하인리히 소이제( Heinrich Seuse) 등이다. 그후 “근대 신심운동(Devotio moderna)”과 16세기의 예수회는 예수 성심 공경을 중히 여겨 받아들이게 되었고, 17세기에 와서 프랑스 구속주회의 베륄 신부(P. Berulle, +1629)와 요한 오이데스(Eudes +1680)에 의해서 그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요한 오이데스는 자기 주교의 허락을 받아 예수 성심 공경 축일을 교회에서 첫 번째로 거행하였다.(1672년 10월 22일).

1673년과 1675년 사이에 수녀 마리아 알라콕(Maria Alacoque)은 여러 차례 환시를 보았는데, 그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성녀에게 성체 축일 후 팔부 내 금요일에 예수 성심 축일을 도입하고 예수 성심 금요일을 위해 성시간을 만들라는 임무를 주셨다는 내용이다.

로마교회는 거의 10년 동안이나 축일 제정을 거부하다가, 교황 끌레멘스 13세께서 비로소 1765년에 폴란드 주교들과 로마의 예수 성심 형제회에 이 축일을 지내도록 허락했다. 비오 9세 교황은 1896년 이 축일을 전 세계 교회에로 확장시켰으며, 레오 13세 교황은 1899년 이 축일의 격을 한층 들어 높임으로써 다가오는 새로운 백년 대(1900)를 위하여 거룩한 예수 성심께 세계를 봉헌하도록 명했다. 특히 얀세니즘과 계몽시대의 신학자들은 예수 성심 공경의 문제로 격하게 논쟁했다. 오해에 근거한 대부분의 사고방식은 마음 혹은 심장이라는 원 단어나 그 근본개념 뜻을 20세기 거장 신학자인 라너(Karl Rahner)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사실 근거가 희박해진다. : “왜냐하면 예수 마음에 관해 언급하는 교회의 문헌이나 가르침 그리고 그 실행은 마음 혹은 심장은 영육을 지닌 한 인간의 중심으로서 인간 전체를 나타내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마음을 고려하면 예수성심 공경의 대상은 바로 주님인 것이다.”

사실 심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은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전체로서의 한 인간을 나타낸다. 새 미사경본의 축일미사는 많은 부분에 있어 비오 9세 교황이 1928년 종합한 본문을 이어 받았으며, 여기에는 과거보다 훨씬 더 속죄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하는 마음을 지니신 분이시다.

묵상


잊을 만하면 가끔씩 우리에게 들려오는 어린이 실종 사건이 있습니다. 종국에는 기어이 폭행과 살해로 이어지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범죄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성추행과 연결된다면 정신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집니다. 언론과 방송은 다투듯이 전문가를 내세워 이러한 범죄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예방조치들을 요란하게 제시하곤 합니다만 일회성일 뿐입니다.

정작 참담하게 말 못하는 고통을 겪는 피해자는 바로 아이들의 부모입니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자기 자녀를 비참하게 잃고는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아이도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 올 거야.”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자녀들의 귀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뿐입니다. 이런 부모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아이들이 성추행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는 비참한 소식입니다. 범죄행위가 자세히 보도되고 범인은 체포됩니다.

그후 오랜 시간에 걸친 재판이 진행되고, 그러는 가운데 아픈 상처는 다시금 찢겨져 나갑니다. 처음으로 부모는 자기 자녀를 살해한 범인을 만납니다. 부모의 눈길은 범인의 눈길을 찾으려 애를 쓰지만 그는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고 얼굴을 가립니다. 재판정에서 최후선고가 내려지고 사건은 종결됩니다. 범인은 감방으로 사라지고 부모는 점점 말을 잃어갑니다. 그들은 자녀를 빼앗김과 동시에 철저하게 홀로 되고 맙니다.

1928년 성탄절 밤 한 남자가 사제관 문을 두드리고는 주방에서 일하는 봉사자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합니다. 주방 봉사자가 문 앞에 나와 자기를 찾아온 남자를 보고는 흠칫 놀랍니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다름 아닌 12살 된 자기 딸을 성폭행하고 죽인 살인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벌써 26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그는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것입니다. 출감하자마자 그 첫 걸음이 바로 자기가 죽인 어린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는 소녀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 순간에 소녀의 어머니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녀는 범죄가 생기기 전에 벌써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놀라운 대답을 그에게 해줍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성탄 밤 미사를 보러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머니와 살인범은 후에 다시 한번 더 만납니다. 1950년 바로 희생자인 마리아 고레띠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선포되는 시성식에서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소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을 오직 하느님이 벌써 용서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용서합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용서는 새로운 시작을 선사합니다. 마리아 고레띠의 살해범인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도 고레띠 어머니의 용서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레띠의 어머니 역시 오랜 세월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에서 마침내 자유로운 해방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면….”이라는 어머니의 대답은 용서의 열쇠가 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가장 추한 범죄자를 용서하시고자 하십니다. 누구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허물이나 잘못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죄나 잘못을 그렇게 간단하게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죄나 잘못을 사랑으로 극복하기를 시도합니다. 미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미움은 잘못을 고정시켜버립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중한 범죄자는 오직 용서에만 의존합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버립니다.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어떠한 기회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묶여버린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뉘우치고 후회할 뿐입니다. 죄로 인한 묶임은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풀려집니다. 이렇게 용서는 언제나 하느님과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잘못이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단순한 부인, 26년이란 긴 세월동안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지지 못하고 고통스런 시간에 시달렸던 이 여인이 바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의 그림은 바로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 성심은 역사 안에서 큰 공경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 성심 형제회와 예수 성심 금요일, 예수 성심 호칭기도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예수 성심 대축일 등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성심 공경에서 예수 성심을 위한 증거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는 증거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이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 자신은 용서를 청하고 용서할 수 있는 준비를 어떻게 갖추고 있는지요? 우리는 작은 것을 용서하는 데에도 주저하거나 힘들어합니다. 오히려 용서의 반대인 미움과 무관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움은 새로운 시작을 막는 걸림돌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증명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용서할 은혜를 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할 수 있도록 당신의 힘을 선사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성심 호칭기도에서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같은 물을 마셔 뱀은 독을, 벌을 꿀을 만든다

-박상대 신부-


고대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행위(行爲)는 본성(本性)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는 명제에 의견을 같이 했다.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독일철학자들도 하나같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Was man nicht hat, das kann man nicht geben!)는 생각에 일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내면(內面)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후자(後者)를 굳이 유물론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던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에 따라 사람은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생각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식(圖式)으로 설명하자면, 마음(heart) -> 생각(thinking) -> 태도(attitude) -> 행위(act) -> 습관(habit) -> 운명(destiny)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인간행동의 많은 부분은 거의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데 습관은 곧 반복된 행위를 말한다. 행동하기 위해 이왕에 마음을 먹을 것이라면 좋은 마음을 먹는 편이 바람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이 나에게 좋은 마음을 먹도록 강제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의 문(門)에는 손잡이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것도 밖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문이란 손잡이가 안팎으로 나 있어 어느 쪽에서나 쉽게 열 수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을 가진 자의 편에서만 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만이 열어 보일 수 있는 마음의 좋음과 나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마음이 좋고 나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밖에서는 손잡이가 없으니 열고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남의 마음을 투시(透視)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결국 내 마음은 나만이 안다는 결론이다. 나 혼자 아는 마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자기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양심(良心)에 비추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이 올바르고 보편적이라면 문제는 없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하여 세인(世人)들에게 "너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에 맞게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자기 마음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는 보통 양심이 혼탁(混濁)하여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땐 낭패를 본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행위는 마음의 본성을 따르고, 자기 마음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들 하니, 수행된 행동의 결과와 타인에게 주어진 것을 보고 그 원인이 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행동의 결과, 타인의 반응, 자신의 후감(後感) 등을 검증함으로써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행동에는 착오가, 반응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고민하다 수행한 최선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좋은 결과를 목적으로 나쁜 수단을 쓸 수는 없다는 말이다. 행위의 좋고 옳은 결과를 위해서는 늘 좋고 옳은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되지만, 마음은 스스로가 가꾸어야 하며, 전적으로 자신이 열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주거공간인 아파트나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차가 상당히 나는 법이다. 똑같은 설계, 재료, 인테리어라 할지라도 방이 난 방향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농장"으로 잘 알려진 인도태생 영국인 조지 오웰(1903-1950)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식민역사의 죄책감과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반면에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진취적인 인생관으로 20세에 루스벨트와 결혼하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그뿐이랴. 생후 19개월만에 눈, 귀, 입의 기능을 모두 잃고도 사물에 대한 진지한 마음과 밝은 생각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꾸려나간 "3중고(三重苦)의 성녀(聖女)" 헬렌 켈러(1880 1968)도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살리에즈(Sali ge)는 "이성을 가진 인간의 생각은 감동(感動), 아니면 독선(獨善)의 싹을 피운다"고 했다.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순간이다. 감동과 독선,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양면성이다. 이는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문체이다. 감동은 사랑과 관심, 희생과 배려의 글씨체를, 독선은 미움과 무관심, 욕심과 배타의 글씨체를 구사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기억하며 본받고자 하는 "예수성심 대축일"이다. 일찍이 어느 인간도 겪어보지 못했을 그런 무지막지한 고통을 이겨내며,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으로 아버지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그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성심을 자기 마음속 깊이 새겼고, 또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복음서가 집필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복음서의 말씀은 그분의 자신의 말씀과 행동이며, 그것은 그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교회는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해 왔다. 이를 축일로 공경하기 시작한 것은 방문회의 수녀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였다. 10살 때 전신마비의 병을 얻은 마리아는 14살 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와 예수님의 성심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받았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성심을 죽을 때까지 외쳤던 성녀 마리아 덕분에 "예수성심축일"이 수도회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축일미사를 거행하였고,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이를 대축일로 제정하여 전체교회에 공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5년부터 오늘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여 누구보다 사제들이 먼저 스승의 성심을 공경하고 닮아서 복음선포와 성사거행의 직무에 더욱 매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한없이 풍요로우신 예수성심께 감사를 드리고, 나의 잘못과 죄로 상처받은 예수성심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묵상해야 할 것이다.

루가복음 15,3-7은 바로 이러한 예수성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애당초 그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는 비난의 빌미가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루가복음사가가 하느님의 크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집약한 15장으로서,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말씀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세상이 주는 고통으로 아파하며 죄를 짓고 길을 잃고 헤매는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성심이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넣어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시는"(호세 11,3-4) 예수 성심이여, 온 세상에서 찬미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