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07. 6. 14. 04:09

   2007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오 5,22)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그러니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맡겨야 한다. 율법은 바로 하느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고 형제들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율법 준수의 첫걸음이라고 하신다

 

☆☆☆

 

 우리가 성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형제라 하더라도 말입니다.오늘 복음 말씀에는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면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 하면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글자 그대로는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형제와 이웃에게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율법 때문에 단식한다 한들 은총이 함께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자신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과 이루는 관계를 먼저 평화스럽게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이웃과 서로 사이가 좋으면 신앙생활도 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도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랑은 새로운 생명력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모으고자 자신의 욕망을 참으며 희생하며 살아온 날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또한 출세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며 기다린 시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더 가까이 모실 때가 되지 않았는지 차분히 돌아봅시다.

 

 

   의로움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로움’과 이방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의로운’ 사람은
사고의 올바름이 몸에 배고 이웃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비방과 중상은 이웃의 명성과 명예를 해칩니다. 명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적 증거이며,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명성에 대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방과 중상은 정의와 사랑의 덕을 모두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거짓말의 경중은 거짓말로 왜곡되는 진실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상황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과 거짓말의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따라
평가됩니다.?거짓말 자체는 소죄에 지나지 않지만, 정의와 사랑의 덕을 심각하게 해칠
때에는 큰 죄가 됩니다. 많은 죄들이 이웃에게 해를 끼칩니다.
죄는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게 됩니다. 용서는 죄를 없애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주지는 못합니다.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보속’(補贖)해야 합니다.?

 

 

 화해의 모범을 사는 루치아노씨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오늘 복음은 화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해는 타(他)에 대한 용서와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서로서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화해의 모범을 세간에 깊이 있게 보여준 분이 있습니다. “죄는 밉지만 사형만은 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유영철이나 세상을 떠난 내 아들이나 똑같은 소중한 생명을 지닌 사람입니다.”라고 사형제도 폐지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 고정원 루치아노씨가 그분입니다.
루치아노씨는 그 유명한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의 엄청난 피해자입니다. 그는 유영철의 손에 노모와 부인, 4대 독자인 아들까지 모두 잃었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아내의 회갑 선물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족이 무참히 살해된 현장을 목격하고 분노에 떨어야 했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단란한 가정을 파탄시킨 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범인도 죽이고 저 또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그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유씨의 ‘사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며 탄원서를 보냈고, 현재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형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제 가족을 죽였다고 해서 또 다른 생명이 인위적으로 꺾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어야지요.” 그는 진정한 화해를 삶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루치아노씨가 세례를 받은 후 이러한 화해를 살게 되었다니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서서히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답니다. 이후 ‘유영철도 또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뒤론 사형폐지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답니다.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내 가족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로 인해 또 젊은 생명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형만은 막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는 신앙을 가지지 않았으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를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구현한 분입니다. 우리도 이런 삶의 태도를 본받고 이에 동참해 화해를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 최재현 신부 -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는 산상설교에 나오는 한 부분의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요, 그 내용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면, 첫째는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율법의 참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5장 맨 앞에 나오는 참행복 선언(5,3-12)과, 중간에 자리한 주님의 기도(6,9-13), 맨 끝에 나오는 7장 21절에서 27절의 큰물에 관한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율법의 참뜻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특히 5장에서 참행복 선언과 여섯 가지의 명제 사이에 소금과 빛에 관한 비유,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삽입합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과 세상을 두루 비추는 등불 구실을 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해서 더 큰 의로움을 지녀야 한다는 것으로써, 교회는 바깥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고 유대교인들보다 더 의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마태오 복음 사가는 산상설교의 교훈대로 살면 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좁혀서 말한다면 참행복 선언에 이어 나오는 여섯 가지 명제에 따라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섯 가지 명제는 ‘화해하여라, 극기하여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정직하여라, 폭력을 포기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입니다.


  오늘 들었던 복음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여섯 가지의 명제 중, 첫 번째 부분으로써 ‘화해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첫째는 분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셋째는 서둘러 고소한 자와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탈출기 20장 13절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탈출 20,13; 신명 5,17)을 더 심화하여 동족, 형제, 또는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십니다. 이어서 분노하면 쉽게 내뱉는 바보, 멍청이라는 욕설도 금하십니다. ‘분노-바보-멍청이’라는 말로 점점 관계가 악화된다면, ‘재판-최고 의회-불붙는 지옥’에서처럼 점점 처벌이 무거워짐을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으로 형제를 용서해야만 하느님에게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마르코 복음 11장 25절과 동일한 주제를 가집니다. 마지막은 고소한 자와 빨리 화해해야만 투옥을 면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루카 12,57-59)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서둘러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에게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기록된 몇 가지 규정을 문자 그대로만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규정을 지켰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에 반해서 주님은 문자 그대로의 행동보다 그 마음을 보고자 하시며, 하느님의 사랑과 뜻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됨을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마음에서부터 증오심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살인행위는 적대감이나 경쟁의식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감정을 처음부터 자르지 않으면 큰 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증오심, 적대감, 경쟁의식 등을 처음부터 마음 안에서 자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서둘러 회개하는 것도, 마음 안에서부터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실천을 할 때,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의 뜻을 더 심회시키시는 주님의 뜻을 알고 쉽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으로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실천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서> : 주님을 통해 자유와 영광을 얻은 신앙인
-
경규봉 신부 -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로 하여금 율법을 고집하는 적대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전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너울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여전히 옛 것만 보고 새 것은 보지 못하고 있으며,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유를 얻고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한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마음의 너울이 벗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은 끝이 났고(로마 10,4), 새로운 계약의 시대 즉 복음의 시대가 열려졌다. 주님께서는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너울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새 계약인 복음을 통한 자유가 있다(갈라 4,24-31).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계약이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새 계약 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마음이 너울로 가려진 유대인들과는 달리 너울을 벗었기에, 복음이라는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된다. 동시에 주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내면이 변화되어 더 높은 단계의 영광스런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몸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완전히 영광스러운 상태가 될 것이다(필립 3,21). 이는 성도들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며,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에 의한 것이다(로마 8,29-30).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너울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고 이는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1고린 1,18; 2,14). 이 세상의 악신인 사탄이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하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만든다(요한 3,19; 1베드 5,8).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이시며 하느님과 동일한 인격과 성품을 지니신 분이시다(필립 2,6).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복음을 통하여 자유로워진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종이 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12,15). 하느님께서는 첫 번째 빛을 창조하심으로서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셨으며, 두 번째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인간의 마음에 구원의 빛을 비추임으로써 인간의 영적 무지를 몰아내셨다.

첫 번째 창조의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바울로의 영혼에 비친 구원의 빛(사도 9,3.8; 22,6.9.11; 26,13)은 그를 덮었던 영적 무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도록 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복음에 대한 지식이며, 이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느님의 영광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고 그리스도가 곧 하느님이심을 아는 사람이다. 바울로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통해 자유를 얻었고, 영광을 받은 사람이며,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신 분이 곧 하느님이심을 전한다.

그리스도인, 그는 진정 세상의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며, 주님의 영광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영광으로 항상 기뻐하자.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신 주님께서 자유와 영광을 주셨으니, 늘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자. 나아가 그 영광을 이웃에게 드러내 보이고 전파하자.............◆


 

김효성 수녀 (성심수녀회, 통합사목연구소)


 운 좋게도 나는 비교적 일찌감치 노트북 컴퓨터 하나를 얻어 사용할 수 있었다. 수도생활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이기에 개인용 노트북을 갖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데도 내가 하는 일이 주로 글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여기저기 다니면서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으로 한동안 꽤 많은 일을 했다. 책 몇 권이 나왔으니까.

그런데 전자기술 발전이 워낙 빨라 다른 신제품들이 나날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앞서 일해 나간다고 자부하던 내 속마음에 거미줄이 쳐지는 것 같았다. 또 실제로도 그 노트북의 기능이 점점 떨어져 느림보 걸음을 시작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재무담당에게 기계를 가져가서 “이제는 못쓰게 되었으니 새 것을 다시 사주세요”라며 온갖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분은 즉시 그것을 자기에게 맡겨놓으면 빠른 시일내에 전문가에게 맡겨 업그레이드시켜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당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시킨다는 것을 몰랐고 생각지도 못했다. 며칠 후 내 정든 노트북은 나를 다시 찾아왔는데, 겉모습은 같았지만 속은 새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창의성은 참 대단하시다. 그분은 어디에서 그런 기발한 생각과 착상이 나오는지 궁금할 때가 가끔 있다. 아니면 그분은 재해석의 능력이 뛰어나신 것일까? 예수님은 오늘 “살인하지 말라”는 옛 말씀을 두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시며 ‘형제에게 성내지 말라.바보로 욕하지 말라. 미친놈이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재풀이하신다. 그러니 내 일상에 걸리는 해당 영역이 많아지는 것이다. 죄라면 아예 옴짝달싹 못하도록 초반부터 경고하시는가, 아니면 예수님은 뿌리 캐기 작전을 펴시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들은 국내 뉴스만을 보더라도 살인·방화·거액 탈취 등 정신이 아찔해질 때가 많아 아무도 그 해결책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다. 예수님은 오늘 KBS나 MBC, SBS 저녁 뉴스를 들으시고도 그런 큰 사건들의 뿌리가 내가 일상생활에서 대수롭지 않게 성내고 욕하는 것들과 동일하다고 보실까? 나도 자주 성내고 또 쉽게 남 흉도 보는 마당에 스스로 답하려니 좀 무색해진다. 그럼에도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마지막까지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풀려나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시니 정말 에누리가 없을 것만 같다.

주님은 무슨 취미로 율법을 고도로 확대 해석하여 우리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실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마치 두 팔을 걷어붙이기라도 할 듯한 기세다. 뿌리부터 새롭게, 전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치시는 주님의 속을 내가 짐작하건대 그분은 우리 마음을 최고의 성능으로 업그레이드시키려는 계획인가 보다.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당신 마음의 성능으로 완전히 쇄신시키려는 작정임에 틀림없을 게다.

 

 

 분노와 업신여기는 일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출애 20,13, 신명 5, 17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 ..."는 계명을 들어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예수님은 살인 뿐 아니라 이웃 사람에게 대해 분노하는 것까지도 금지하십니다. 다시 말해 살인은 하지 않거나 남을 때리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타인을 적대시하여 마음 속으로 분노를 품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강조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1) 밀짚에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빨리 타오르고, 빨리 꺼져 버리는 것 (분노의 불길, 분노의 포도(존 번연)). 2)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정착된 분노, 이것은 화해를 거절하는 분노, 복수하려고 마음에 품고 있는 분노입니다.(꽁하고 있는 것)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이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분노를 거절하라는 것이며, 화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버 1,20 에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옳은 일을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이 분노는 말마디로 변해서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분노는 말로 변해서 사람을 압박하였습니다. 또 "모욕의 죄"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또, "게헨나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할 세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자기 이웃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사람 ..." 여기서 "바보"(Raca) - 라는 말은 어리석은 천치, 우둔한 자, 몰지각해서 실수를 범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바보라는 말은 오만한 자가 상대를 무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랍비에 대한 설화)가 있습니다 : "어느 인상이 좋지 못한 동행인이 지나가면서 랍비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는 인사도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바보다, 추한 놈같으니라구! 너희 마을 놈들은 너처럼 모두 징그러운 놈들이냐?!".... 통행인은 대답했다. ".... 나는 모릅니다. 나를 만드신 조물주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그 분이 만든 내가 왜? 이렇게 징그러운지를! ..."했습니다. 결국 랍비는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고 그를 만드신 조물주를 욕한 셈이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이웃을 욕하는 것은 똑같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해서 보면, 살인은 안됩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것까지도 크리스찬은 안됩니다. 그러나 더 안되는 것은 타인을 멸시하는 것은 더 나쁘다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 보다 천국을 얻고자 하는 우리들은 그들보다 이런 행실에 있어 더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머리와 입이 아닌 가슴으로

-이봉하수사-


세상 사람들은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일상 안에서 서로 싸우는 일도 없을
뿐더러 마음에 상처 같은 것도 주지 않고 매일 매일 천국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생활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때로는 큰소리도 나고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매일 거행되는 미사와 기도생활 덕분에 미움의
시간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어떠한 잘못 앞에서도 용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인생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니 가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웃과 자신에게 잘못하고 실수하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도 용서를 청하고
또 용서를 할 수 있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와는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도와 함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화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체면 때문에 혹은 마지못해 대충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용서하고 화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오늘 밤, 이 세상에서 지내는 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자기 죄를 뉘우치지는 않습니다.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로 용서하십니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김지영 신부-


◆아끼는 차에 흠이 나면 정말 속이 상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자동차엔 어느 틈엔가 흠집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흠집은 대부분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작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는 엄청 신경을 쓰지만 다른 사람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 흠집을 10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크게 보이는 것이다. 앞으로 혹시 자동차에서 흠집을 발견하게 되면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한번 보면 좋겠다. 그러면 거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이지 않는 흠이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처도 같다. 우리는 자신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탓하는 경우가 얼마나 잦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약을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복음적인 시각을 제시하시면서 인간관계의 내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자기 형제를 ‘바보’·‘멍청이’라고 하는 사람은 크게 벌받을 것임을 강조하시는데, 죄에 대한 벌의 개념보다는 근본적인 인간관계의 쇄신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미움과 분노로 채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사랑하기보다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며 동시에 용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흠없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 "화->바보->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박상대 신부-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매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매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 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 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화(肉化)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到來)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憲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후자(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資格)이란 상태(狀態)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상황(狀況)적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 아니라 "바보"라는 욕하는 자는 중앙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열왕 18,41-46 (엘리야가 기도하지 하늘이 비를 내렸다.)
복 음 : 마태 5,20-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알고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으며, 또 그렇게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누구나 한 번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맞을 수밖에 없지요.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은 참으로 엄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 같은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잘 살아야 하는지를 섬뜩하리만치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못마땅해 하시고 늘 야단치셨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는데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지요. 물론 잘못되고 편협한 율법의 해석으로 예수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 지은 잘못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6)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엄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5,21)는 말씀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놓고 가르치고 계시지요. 살인이라면 우리는 단지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정법도 그 정도에서 죄 값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단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마음에 관한 것까지도 그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적인 언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까지도 갚아야할 죄라는 것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 욕 안 해보신 분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또 지금도 가끔 감정이 격할 때는 마음이나 언어로써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정도는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특히 언어적인 폭력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복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나, 함부로 내뱉는 언어적인 폭력들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정신적인 폭력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험한 말을 하며 치고 받고 싸웠다고 합시다. 심하게 싸워서 한 사람이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5주 동안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한두 달이면 육신의 상처는 없어지지만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말들은 50년이 지나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증오하는 마음이며 또 언어로써 내뱉는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주 단호하게 이것까지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감정과 정서는 언어로써 표출이 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책임질 생각도 안 할 뿐더러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함부로 쉽게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 흉기가 될 수 있지요. 말에 대한 경고의 말은 인류 역사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되고 그 양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집회서 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중상꾼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고 네 혀로 올가미를 놓지 마라.?(집회5,14)

하지만 혀로 사람을 잡는 일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습니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반대로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쉽게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또, 집회서 2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28,17)

말로 입히는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불화는 물리적 폭력에서가 아니라 언어 폭력에서 비롯되지요. 형제지간에 갈등이 심화되어도 몸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험한 말로 심각하게 싸우지요. 생각만 해도 벌떡 일어나는 말들로 상처를 주고받고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당 공동체를 사목하면서 신자들을 해치고 상처를 주며, 그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갈등은 혓바닥에서 기인한다는 겁니다. 악의 뿌리인 혀가 결국 사람을 잡는 것이지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말한 본인은 곧 잊고 말지만 상대방의 가슴에는 그 말이 평생 남아서 미움의 감정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그 어리석음이 모두 ?말?을 통해 자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언어로써 드러나고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 일생을 ?배?라고 볼 때 내 일생을 조정하는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바로 ?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혀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음의 바다로 내몰기도 하고, 반대로 생명의 바다로 안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수없이 쏟아놓은 말들 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습니까? 죽이는 말이 더 많습니까? 혹시라도 내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죽음의 바다로까지 내몰린 이웃이 있다면 중앙 법정에 넘겨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특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하기를 바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 <말을 위한 기도>를 소개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내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짓는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해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도 닦는 마음으로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인은 ?말?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이 상처받은 마음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해주는 치유의 말, 또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 화해를 샘솟게 하는 말,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언어와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