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다." (마태5,19)
Whoever obeys and teaches these commandments
will be called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구약의 계명을 완성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난히 율법에 얽매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그들에게 민족의 구심점은 신앙이었고, 그 신앙을 받쳐 주는 기둥이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큰일은 언제나 법으로 금지하거나 명했습니다. 더욱이 율법은 하느님 앞의 맹세였습니다. 따라서 법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 학자는 율법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임무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곧 불변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지를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라는 법보다 하지 말라는 법을 만들기 쉬운 탓이었는지, 당시에는 금지하는 법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금지 사항이 많은 법일수록 사람들은 거기에 더 얽매이게 됩니다. 율법은 차츰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어 율법 지상주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지 말라는 법을 하라는 법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 그분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하라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요즘 날씨가 무척이나 덥습니다. 그러다보니 불쾌지수도 꽤 높아져서 별 것 아닌 것에도 화를 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며칠 전, 이렇게 더운 날씨에 어떤 분과 어느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그런데 그분께서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늦게 오시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약속 시간 어기는 것을 상당히 싫어합니다. 아니 어쩌면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나쁜 성질 때문에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약속 시간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화가 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어떤 형제님께서 제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조용히 속삭이시더군요.
“지금 보니까 당신의 몸에서 맑은 기운이 흘러넘칩니다. 혹시 우주의 기원인 도에 대해서 아십니까?”
짜증이 났습니다. 만나려는 사람이 늦게 오니까, 별 이상한 사람이 다가오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정중하게 “관심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더군요. 그리고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러한 사람들을 주로 길 가다가 만났기에 그냥 “관심 없습니다.”라는 말 한마디 하고서 바쁘게 걸어가면 되었는데, 이 약속 장소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 저도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인상을 쓰면서 반말로 이렇게 쏘아 붙였지요(전에 강하게 말해야 쫓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됐다니까~~~”
이 말에 그 형제님께서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만, “네.”라는 짧은 말 한마디 남기시고는 그냥 가시더군요. 마치 그 모습이 어른에게 혼난 어린아이가 고개 숙이고 울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조금 짜증이 났었지만, 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마음이 좋지 않더군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었을 때, 기분 좋은 사람이 있을까요? 미움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기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록 사랑을 함으로 인해서 때로는 내 자신이 부족해 보이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편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었지요. 왜냐하면 자신들이 만든 율법의 세부 규칙들을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613개의 세부 규칙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소중한 것들을 어기는 편협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서, 아무리 작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철저히 지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하시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랑의 길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내 모습이 과연 큰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 반문하여 봅니다.
내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어떠한 상황에서도 철저히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이 새벽에 해봅니다.
짜증내지 맙시다. 나만 손해에요. 하늘나라에서 작은 사람이 되는 순간이니까요.
빠다킹신부
율법의 완성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첫 계약’ 때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 해석하시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율법이 더 이상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 새겨진 것으로 드러납니다(예레 31,33).
그 ‘종’은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기”(이사 42,3) 때문에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어,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받기까지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기”(히브 9,15) 때문입니다.
법(法)은?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올 2월, 독특한 재판을 한 문형배 판사 이야기는 훈훈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카드빚에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한 젊은 청년. 지난해 12월 한 숙박업소에 투숙한 뒤 라이터로 신문지에 불을 붙여 방화하려 했으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에 의해 진화돼 미수에 그친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그는 재판장의 엉뚱한 요구를 받습니다. “자살이란 말을 열 번만 말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자살을 열 번 되뇌자 문 판사는 “피고인이 ‘자살’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살자’라고 들린다.”고 하면서 “죽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로 새롭게 고쳐 생각해 살아가라.”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책을 건네주면서 “이 책을 통해 과거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라.”고 권하면서 “앞으로는 죽을 생각을 하지 말고 여태껏 하지 못한 일을 실천하면서 살기를 바란다.”며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답니다.
이 일화는 문 판사의 사람됨에 대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법이 지향하는 목적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사회법의 목적이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야 한다면, 하물며 하느님의 계명을 담은 율법은 당연히 인간을 위한 법이며 인간의 사랑을 담아내는 법이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이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 그 자체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향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그 목적과 내용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보다 더 율법에 대한 의로움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합당한 섬김을 우리의 삶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독서> :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사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
바울로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을 통해 일어난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었다(필립 4,13). 그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행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 계약은 옛 계약과 달리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이다. 문자, 즉 율법은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그런데 율법을 전달한 모세의 얼굴에는 찬란한 광채가 빛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출애 34,29-35).
죽음을 가져온 율법의 심부름꾼이 그처럼 영광스러웠다면 사람을 살리는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그 영광은 엄청나게 크며,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옛 계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는 적대자들의 주장에 반하여 새로운 계약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는 새로운 계약을 행하는 성령의 심부름꾼으로서 새로운 계약이 옛 계약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큰 영광임을 선포한다.
옛 계약의 대상은 이스라엘(출애 19,5-6)로서 민족적 한계를 갖지만, 새 계약의 대상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으로서 민족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모든 사람들이다. 옛 계약은 하느님께 대해 순종을 약속하고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루어졌지만, 새 계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졌다. 옛 계약은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총으로 얻어진다(로마 10,9-10; 히브 10,39). 더욱이 옛 계약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새 계약은 생명을 준다.
이처럼 옛 계약과 새 계약은 단순히 시간적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새 계약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인 동시에 이 계약에 참여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영광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인한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며, 사도들은 그러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법아래 있게 된 것이다(히브 8,7-13). 사도 바울로는 이처럼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에게 율법을 고집하는 주장에 혹하지 말고 은총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도록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은 은총 안에 사는 사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은총을 받았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은총을 통하여 이미 구원되었고,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통해 구원되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며,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처럼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이다(1테살 5,16-18).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1테살 5,19-20)............◆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최재현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먼저 오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을 맞이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하느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안토니오 사제는 설교가이자 교회 학자로서 탁월한 성경 주석 능력이 있었기에 ‘복음적 박사’, 또는 ‘신약성경의 방주’라 불리며, 가난한 사람과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그는 1195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성 아우구스티노 재속 사제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가, 아프리카로 선교하기 위해 프란치스코회로 옮기신 분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는 가지 못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설교하며 이단자들을 다시 참 신앙에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당시 많은 이단자들을 회개시켜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수가 되어 교리와 강론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이름 높은 설교가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성인의 이름을 따서 19세기에는 ‘안토니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 단체가 설립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개발도상국의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름 높은 설교가로 유명한 그분의 강론 중에 일부분을 보면서 실천에 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 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우리를 저주하실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을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부분적으로 발췌한 내용이지만 안토니오 성인의 일생은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그분의 계명에 먼저 충실하였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실천하자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그와 더불어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도 예전에 들었습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라 합니다. 많이 듣고 보아서 알고 있는 것이어도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말씀처럼 가르치는 것을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즉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 됩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임을, 신앙인으로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인내하는 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귀한 계명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그 안에 어떤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먼저 ‘계명 -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는 것 - 그렇게 가르치는 것 - 작은 자’라는 것과, ‘계명 - 스스로 지키는 것 - 그렇게 가르치는 것 - 큰 사람’이라는 상관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동일한 순서를 따르는 이 두 가지 관계를 보면, 누군가를 가르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이 앞섭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낼 수 있습니다. 내가 잘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라면 그 말에 힘이 있고 그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말에 힘이 없고 주눅이 드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이지만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안토니오 성인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먼저 실천하는 모습을 잘 간직한다면 우리도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안토니오 성인의 축일을 축하드리며, 주님의 계명을 알고 실천하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뜻이 널리 전파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김효성 수녀 (성심수녀회, 통합사목연구소) -
명륜동 우리집 앞에 진숙이네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우리보다 마당이 훨씬 넓고 정원에 꽃도 많았다. 더구나 진숙이 어머니는 꽃꽂이를 가르치는 분이어서 꽃을 좋아하는 나는 늘 그분이 부러웠다. 내가 대학생이 되던 어느 여름날, 그 애 어머니가 나에게 꽃꽂이를 가르쳐 주겠다며 집에 오라고 하셨다. 반가웠다. 나는 해보라고 주시는 꽃을 몇 개 놓고 이리저리 모양을 내어 수반에 꽃아보았으나 영 아니었다. 한참을 고심하며 이리저리 꽂아보니 그런대로 모양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어색하여 찜찜해 있는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진숙이 어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러고는 뒤쪽에 꽂은 작은 가지 하나를 쑥 빼더니 앞쪽 한가운데로 자리를 바꾸어 꽂으셨다. ‘앗!’ 그 순간 내 꽃꽂이의 꽃들이 모두 살아나 활짝 웃는 듯했다. 난 그때 알아차렸다. 선생님께서 무엇을 완성하시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신다. 유다교에서 율법은 절대적 세계, 더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절대 영역이다. 그래서 바리사이파들은 이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유다의 독립까지 가져올 수 있다고 믿으며 절대화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미 절대적이 된 율법을 당신이 완성하러 오셨으며, 그래서 율법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 밝히신다. 또 제자들에게는 가장 작은 계명도 지키기를 요구하시며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보다 더 옳게 살아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하신다.
그러면 율법을 그토록 열성적으로 준수하던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에게 무엇이 모자랐던가?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데 그들에게 모자란 점은 무엇이었나? 나는 다시 진숙이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분은 꽃을 사랑하셨다. 정원에 핀 꽃도, 작은 수반에 꽂는 꽃도 그 꽃들이 각각 어디에 있어야 가장 아름다운지를 아셨다. 아니, 그 꽃들 하나하나가 어디에 있고 싶어하는지도 알고 계신다고나 할까? 아마도 꽃들과 대화를 하셨던 듯하다. 그래서 진숙이 어머니가 꽂으면 꽃들이 막 살아 웃었다. 심지어는 꽃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들려주신다고 했다. 기술보다는 사랑으로 꽃들을 대하시니까…. 꽃꽂이에도, 율법에도 사랑이 완성을 이루는 것 같다.
율법의 완성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보면 예수님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손씻는 규정라든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 주는 것 등, 사실상 율법의 파손자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서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일 획, 일 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폐하려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려는 율법은 무엇이고, 예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그토록 책망하시었기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율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똑같은 한 종류의 율법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말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십계명을 율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함. 2) 구약성서의 첫번째 5권, 즉 모세 5경의 말씀들을 말함. 3) "모든 성서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율법과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함. 4) 구전 율법이라고 해서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의미하기도 함.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성서 그 자체라든가, 십계명 그 자체에는 규례와 규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으며, 크고 넓은 원칙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매사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수천 개의 규정과 규칙을 만들어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사소한 규정과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삶과 죽음이 달려 있는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라고 간주했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그들의 말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이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 전체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교훈 전반에서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율법을 심화하시거나 폐기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유다교의 613가지에 이르는 계율들을 :
- 원수 사랑 (마태, 5, 43-48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주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과
- 황금률 (마태 7, 12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 22, 37-40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것이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이렇게 환원시키어 단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풀이하신 율법(계율)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질 것입니다. 아멘.
법(法)은?
-곽용승 신부-
올 2월, 독특한 재판을 한 문형배 판사 이야기는 훈훈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카드빚에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한 젊은 청년. 지난해 12월 한 숙박업소에 투숙한 뒤 라이터로 신문지에 불을 붙여 방화하려 했으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에 의해 진화돼 미수에 그친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그는 재판장의 엉뚱한 요구를 받습니다. “자살이란 말을 열 번만 말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자살을 열 번 되뇌자 문 판사는 “피고인이 ‘자살’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살자’라고 들린다.”고 하면서 “죽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로 새롭게 고쳐 생각해 살아가라.”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책을 건네주면서 “이 책을 통해 과거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라.”고 권하면서 “앞으로는 죽을 생각을 하지 말고 여태껏 하지 못한 일을 실천하면서 살기를 바란다.”며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답니다.
이 일화는 문 판사의 사람됨에 대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법이 지향하는 목적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사회법의 목적이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야 한다면, 하물며 하느님의 계명을 담은 율법은 당연히 인간을 위한 법이며 인간의 사랑을 담아내는 법이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이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 그 자체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향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그 목적과 내용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보다 더 율법에 대한 의로움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합당한 섬김을 우리의 삶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김지영 신부-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보지만 정작 보아야 할 자신의 허물에는 어둡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글이다.
그리스 속담에는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자루를 달고 다닌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워담는다.’ 뒤에 있는 자신의 허물을 담는 자루는 자기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로 남들 눈에는 잘 보인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을 꾸짖을 때는 허물있는 중에서 허물없음을 찾아내고, 자기를 꾸짖을 때는 허물없는 중에서 허물있음을 찾아내라’는 옛말이 있듯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비판받은 이유는 수많은 율법조항에 많은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고 자신들은 그 기반 위에서 허세와 권위를 누리는 행위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당신 사랑의 권위를 통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는 새로운 사랑의 율법을 가르쳐 주신다. 613개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지켜야 하는 근본 정신이 바로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법의 형식보다는 법의 내면의 정신이 더 중요함을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말과 행동의 일치에서 온다. 그 권위는 사랑의 권위, 봉사의 권위, 겸손의 권위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막강한 힘과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고 쫓아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권위를 배우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요약하니 결국 사랑
--양승국 신부--
신자들을 향해 활짝 열린 마음을 지닌 한 사목자의 글을 읽고 머릿속에 환해졌습니다.
“본당현실분석 프로그램에서는 제일 먼저 사목자가 수집해야 하는 것은 본당의 불만 사항이라고 한다. 불만은 어떤 열망을 갖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에 불만을 수집하면 그 바람의 정체와 목표를 알게 된다.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여 진단 자료를 주듯, 불만은 본당 진단의 중요 자료이다.
불만은 다양성의 표현이기도 하고, 완전을 향한 부르짖음이기도 하다. 불만은 하느님을 향한 세상의 소리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는 시대의 징표일 수도 있다. 사목자가 불만의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갖게 된다. 불만을 불편 없이 받아들여 논의할 수 있다면 사목자는 넓은 영성의 길에 서 있는 셈이다. 불만이 없기를 바라기보다 불만을 먼저 찾아 들어주려는 사목자는 한결 자유인이 되며 세상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제일 것이다”(신현만 신부, ‘사목자로서의 영성 여정’, 사목329호 참조).
참으로 열린 마음이며, 정녕 예수님의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 공동체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며, 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려는 노력은 교회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다양성을 통합해나가는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든 다양한 욕구의 결집, 다양성이 도달해야할 종착지에는 하느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의 요약인 사랑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수많은 율법조항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율법조항들이 필요했었는가,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그만큼 다양한 욕구들, 다양한 견해들,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중요한 작업이 있었는데, 그 끔찍할 정도로 많은 율법에 대한 가지치기 및 요약, 완성 작업이었습니다. 비본질적인 요소들, 지극히 부차적인 부분들,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조항들, 절대 지킬 수 없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조문들, 도무지 의미가 없는 항목들에 대한 정리 작업을 마치시니 딱 한 단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잡한 것 싫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위선적인 것, 이중적인 것은 철저하게 배척하셨습니다. 말씀을 하셔도 핵심만을, 쉽게, 간단명료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철저하게도 단순한 분이셨습니다.
단순하다는 말의 의미는 개념 없다는 것, 철없다는 것, 한 가지만 생각한다는 것,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선과 악의 기로 앞에서 단호하게 선으로만 향하는 단순함입니다. 진실과 거짓 앞에서 신속하게 진실 편에 서는 단순함입니다. 언제나 거룩함만을, 항상 사랑의 하느님만을 앞뒤 따지지 않고 선택하는 단순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사랑의 계명은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데 있어서 가장 작은 것이라도 어겨서는 안 됩니다.
만년에 도달한 사도 성 요한께서 설교하실 때의 일이랍니다. 아흔이 훨씬 넘은 나이였기에 건강도 악화되었으며, 목소리도 작아졌습니다. 오래 말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리 좋았던 말주변도 많이 어눌해져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론할 때 늘 빼먹지 않고 말씀하시던 단 한 가지는 언제나 명료했고, 사람들이 잘 알아들었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도 요한 일생의 주제였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부디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며, 노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계명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열왕 18,20-39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복 음 : 마태 5,17-19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사람이 앞뒤가 다르다.?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사람들은 앞뒤가 다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누구나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평소의 말씀과 앞뒤가 좀 다른 것 같은 의구심이 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5,17-18)
오늘 예수님께서는 굉장한 율법주의자처럼 말씀하고 계시지요. 예수님의 평상시 언행과 비교하면 좀 혼란스럽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아주 엄하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 부치며 비난했지요. 예를 들어서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율법이 있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7,1-5)
또 병을 고쳐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환자들을 치유하여 율법 학자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키셨던 분이 예수님이시지요.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6,6-7)
이러한 감정의 앙금이 계속 증폭되어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몰아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신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율법 파괴에 있었던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율법을 건너뛰신 분으로 여겨왔는데 오늘은 의외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5,18)라고 하시며 아주 엄격하게 율법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율법에 대해서 율법 학자들보다도 더 큰 애착을 갖고 계시는 듯한 모습입니다. 어떤 때는 율법의 파괴자로, 어떤 때는 율법의 옹호자로 비춰지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율법에 대한 지식과 율법이 만들어진 배경 등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의 근간이 되는 다음 네 가지 기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이고, 둘째로는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은 ?모세오경?이 있었으며, 셋째는 ?예언서들?, 마지막 네 번째로 ?구전율법서?가 있었으니 흔히 알려진 탈무드 같은 내용이 이에 해당이 됩니다. 율법을 실제 생활에 맞게 풀이해 놓은 것이 네 번째 ?구전율법서?인데 이 네 가지를 다 유다인들은 율법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 네 가지 중에 십계명, 모세오경, 예언서들은 율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네 번째 구전율법서는 율법 학자들이 율법을 생활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세분화시키고 구체화시킨 것으로 수천 개의 규칙과 세부 사항들이 꼼꼼하게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무시하셨던 율법은 바로 이 네 번째 구전율법서의 내용들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해석하고 만들어 놓은 부분으로 율법 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신자들의 삶을 좀 더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율법서였지요.
그런데 구전율법서는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은 분명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구전율법서에 의하면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내야 하고,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죽어 가는 사람을 고치는 행위도 일에 해당되므로 하면 안 된다고 구체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룩히 모시기 위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해야 하는 심각한 모순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러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시는 것을 보고 왜 거룩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여 하느님을 욕보이느냐고 분개하고 공박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안타까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참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있음을 수시로 지적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야단도 많이 치셨지요.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지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30-31)
참된 율법의 골자를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신 대목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세부 조항에 스스로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 말라는 율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온 몸으로 반문하셨지요.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평소 하시던 당신의 언행과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의 말씀이 아니라 참된 율법의 정신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고 있는 세부 조항들이 잘못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4,20)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점만 보입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은 나쁜 점만 보이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 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모두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두 분이 꽤 친하게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찾아가 이렇게 제안을 하였지요.
?대사님, 우리 한 번 허심탄회하게 농담을 하십시다.?
무학대사가 웃으면서 동의를 하였습니다. 이성계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무학대사가 돼지로 보입니다, 그려.?
무학대사가 응답하였습니다.
?제 눈에는 대왕께서 부처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성계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농담을 하자니까요.?
무학대사가 대답했지요.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중 눈에는 부처만 보인답니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이웃의 좋은 점을 보고 감싸주고 칭찬해 주는 마음이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지요. 남을 험담하고 또 나쁜 것만 찾아내는 사람은 하느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 또 미워했던 사람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했던 사람은 좋은 것만 떠오르지요. 말 그대로 곰보도 보조개로 보입니다. 미워했던 사람은 나쁜 것만 기억되지요. 아무리 잘해도 나쁘게만 보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의 완성, 또 우리 신자의 완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옆 사람을 한 번 쳐다보십시오.
어떻게 보이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완성하러왔다 : 마태5,17-20
-유광수 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페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와 복음과의 차이점이다.
즉 율법과 예언서가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완성시키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만으로는 항상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것을 예수님이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즉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시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무슨 말인가?
율법과 예언서에서 말하는 것은 "... 하지 말라. 죄를 짖지 말라. ... 하라. 안식일을 지켜라. ..계명을 지켜라."등 율법을 제시해주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자세한 방법과 가르침이 없다. 다만 규정만을 제시해줄 뿐이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예언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예언만 하는 것이지 그 예언을 실제로 이루는 것은 아니다. ".. 할 것이다. 동정녀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말을 할 것이다. ... 올 것이다.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게 될 것이다. 해방 시켜 줄 것이다."등 예언만 하는 것이지 그 예언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예언을 완성시키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따라서 모든 구약은 예수님을 위해 있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완성시키시는가?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게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을 읽으신 후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18-21)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읽으셨던 이사야 예언서의 내용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들이었다. 즉 예언이었지 그것을 실제로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예언을 읽으시고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그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와 예수님과의 차이점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의 모든 내용을 이루시고 완성시키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율법과 예언서는 하나의 설계도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 설계도대로 건물을 지어 완성시키신 분이시다. 설계도만 있으면 장차 건물이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알 수는 있지만 그 건물을 짓지 않으면 하나의 꿈이고 바램이지 실제적으로 완성된 건물 안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 설계도도 중요하지만 그 설계도 대로 건물을 완성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완성시키신다. 결국 모든 율법과 예언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완성시키시는가?
구약에서는 가르치기만 했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 걸어가게 해주셨다. 눈 먼 이에게 "눈을 뜨라!"하면 말로만 눈을 뜨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해주셨다. 즉 완성시키셨다.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펴라"하였으면 오그라든 손이 펴지게 해주셨다. 죄인에게 "너의 죄를 용서한다." 하였으면 죄가 용서되었다.
즉 예수님은 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말만 하시고 실제로 이루시지 않는다면 율법과 예언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만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언이 아니라 "오늘 이루어졌다"라고 오늘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완성되려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
오늘 우리를 완성시키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완성되려면 복음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
완성시켜야할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를 닮아 가는 모습이 나를 완성시켜 나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면에 있어서 부족하다. 병들고 망가져 있다. 어디에서 어떻게 손을 써야 다시 회복되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또 그런 능력도 없다. 그런 가능성도 없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 앉아버려야 하는가?
예수님은 나를 다시 완성시켜 주러 오셨다. 망가진 나를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시켜 주러 오셨다. 병든 나를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게 해주시도록 오셨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서 완성시켜 주러 오셨다. 따라서 나를 완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오늘 나를 완성시켜주기 위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신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한 점 한 획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정성껏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면 분명히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를 완성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은 나를 완성시켜 나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망가진 나의 모습을 다시 되찾고 병든 나를 회복시키고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되찾아 허전하고 외롭던 나를 하나하나 채워나가서 완성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나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를 완성시켜나가는 일은 복음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일이다. 아무리 복음을 많이 알고 읽는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완성시킬 수 없을 것이다.
† 진정한 율법완성의 길
-박상대 신부-
율법은 무엇이며, 예언서는 무엇인가? 구약(舊約)의 백성들과 그들의 역사에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율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이며,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예수께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 의지의 일관된 표현이며, 예수의 도래로 말미암은 신약(新約)의 시대에도 구약에서와 똑같은 효력을 지닐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율법과 예언서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시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의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은 두 말할 필요 없이 그 계명이 사람에 의해 준수되어야 하고 나아가 사람들이 이를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계명은 진정 성취된다.
마태오복음서에서 서술상 아직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기에 분명히 유대교의 율법과 규정을 어기신다. 몇 번은 예수의 제자들이 어기기도 했지만 이 잘못 또한 당연히 스승인 예수께 돌아가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죽을 위험에 처하지 않은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는 등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을 자주 하셨고, 정결규정도 가볍게 여기셨다.(마태 12,1-8.10-14; 15,1-2) 또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하느님만이 가지시는 죄사함의 권한을 침해하셨다.(마태 9,2-6)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율법체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으며, 천지가 사라져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선 예수의 율법과 율법학자들의 율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오경"과 그 안에 세워진 "십계명"을 가장 중요한 율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율법을 구체적으로 준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구전(口傳) 율법"도 율법의 범주에 포함시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구전율법은 율법과 전통에 관한 율사들의 구전해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런 해설을 집대성한 "탈무드"의 "미슈나"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미슈나 샤바트"(안식일법 규정)에는 39개의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목록이 적혀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율사들은 365개의 금령(禁令)과 248개의 행령(行令) 등 613개의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하였다. 이들 중 하나라도 어기면 곧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이렇게 율법학자들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을 구체적으로 해설한 규정과 세칙의 준수를 율법의 완성으로 보았다.
반면에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율법은 율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율사들은 가장 중요한 십계명을 자기들 고유의 정신으로 해석하여 하향적(下向的)으로 세칙을 정하고, 이 세칙의 준수를 율법의 완성으로 보았다면,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세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신을 상향적(上向的)으로 조명하여 원초적인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율법의 완성으로 보신 것이다. 이렇게 율법에 대한 예수와 율사의 관점은 정반대로 향한다고 하겠다.
이로써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확실하다. 그분은 율법 하나 하나와 그 일 점 일 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밝혀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하나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는 길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 점이나 일 획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심화시키시고, 때로는 과감하게 이를 폐기시키기도 하실 것이다.
산상설교의 권두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5,3-12), 제자들더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건실히 유지하고 밝히는 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5,13-16) 예수께서 오늘은 진정한 율법완성의 길을 보여 주셨다. 이제 이 방법으로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새로운 대명제를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살게 될 시민이 가져야 할 자격으로 선포하실 것이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0) | 2007.06.15 |
---|---|
2007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0) | 2007.06.14 |
2007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0) | 2007.06.12 |
2007년 6월 11일 월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0) | 2007.06.11 |
2007년 6월 10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0) | 2007.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