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07. 6. 19. 03:40

  2007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사랑은 또한 용서다. 용서는 마음을 베푸는 행위다. 자기 마음을 움켜쥐고서는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만인에게 비를 내리신다. 선인이나 악인에게나 다 같이 햇빛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

 

 우리는 마음을 닫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너무 서운하거나 섭섭해서 마음을 닫는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 미움이 됩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어느 한쪽이 원하는 상황으로만 진전되지 않습니다.
오해는 상대의 마음을 모르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설령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오해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오해를 경험하며 마음 아파합니다. 그렇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열심히 일했는데도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거나 최선을 다하였는데도 시부모님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을 닫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닫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여는 행위가 용서의 첫 단계입니다. 용서를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이렇듯 작은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을 열고 미소를 띠고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은 미소와 함께 출발합니다. 섭섭함을 웃음으로 극복하는 이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새벽을 열며

 

 저희 성당 옆에는 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가 내년 6월에 송도신도시로 이전을 한다고 해서, 이 학교 건물을 간석4동 성당에서 매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매입을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신립 및 봉헌 그리고 물건 판매 등으로 노력하고 있지요. 아무튼 열심한 본당 신자들 덕분에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액수가 크기 때문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군요.

이제 날씨가 더워져서 지난주부터는 구역분과에서 미사 후 냉커피를 판다고 홍보를 잘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저는 미사 후 공지사항 시간에 이렇게 말했지요.

“여러분, 제가 커피 무지 많이 좋아하는 것 아시죠? 그런데 구역분과에서 우리 성당 부지 마련을 위해서 냉커피를 1,000원씩 판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 역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여러분이 저 커피 사주시는 데로 다 마실 테니 많이만 사주십시오.”

말실수했습니다. 정말로 많은 교우들이 커피를 사가지고 저한테 오는데요. 처음에 몇 잔은 마시겠는데, 5잔이 넘어가니까(냉커피니 양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속도 쓰리고 배도 부르고 해서 도저히 입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더군요. 결국 교우 몰래 신학생들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커피를 10잔 이상을 마시는데요. 아무리 좋아한다고 한들 한꺼번에 5잔 이상을 마시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즉,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한들 과하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해도 몸에 전혀 이상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래서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의 실천. 이것은 아무리 과한들 전혀 이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주저할 때가 많지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은 과할 정도로 가지려고 하면서, 반면에 아무리 과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적당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남들만큼’만을 주장하면서, ‘나는 그래도 많이 실천하는 것’이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곤 하지요. 이렇게 안일하고 이기적인 우리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안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아무리 실천을 해도 과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한 완전한 사랑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에서 있어서 주저하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원수 사랑     

-박영봉 신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로마 5,10)였던 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처럼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들을 완성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너그러우신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덕에 앞섭니다. 모든 덕의 실행은 사랑에서 활력을 얻고
사랑으로 고취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콜로 3,14)이고,
모든 덕의 바탕이며, 덕들을 연결하고 질서를 지어줍니다.
애덕은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며 귀결입니다.?
애덕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합니다.
애덕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함으로 들어 올립니다.

 

 

 원수 사랑이란?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1992년 세간을 놀라게 했던 여의도 차량질주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자신을 냉대한 사회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말했던 김용제씨는 그해 8월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던 어린아이들을 향해 훔친 차량으로 살인질주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시력이 나빠 어렵게 취직을 했지만 한 달도 안 돼 번번이 쫓겨나곤 했습니다. 형제와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하자 사회에 복수한 다음 자살할 마음으로 살인질주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선고공판이 열린 법정에서 재판부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재판은 십 분 만에 끝났습니다. 그때 방청석에는 재판 과정을 지켜본 서윤범 로사리아씨가 있었습니다. 로사리아씨는 이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윤신재 군의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담당 검사를 찾아가 피고인 김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갑과 포승으로 양손이 묶인 피고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진땀과 눈물을 쏟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해요.’를 반복했습니다. 신재의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두 손을 꼭 잡고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할머니는 손자를 숨지게 한 살인범이지만 ‘용서한다.’며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는 할머니의 용서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고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며느리가 자식을 잃은 고통으로 병을 얻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정정하던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이 연이어 세상을 뜨자 할머니는 요셉을 용서할 수 없었고 하느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손자 하나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부족해 연이어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요셉이라고 생각하자 원망과 미움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답니다. 결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면서 2년 만에 다시 그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해주었답니다. 더 나아가 할머니는 그 형제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많은 가족을 잃고 얻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할머니는 노력했지만 결국 그 형제는 1997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할머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고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로사리아 할머니의 삶이, 진정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서 구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독서> : 순수한 마음과 사랑으로 희사한 마케도니아 교우들
-
경규봉 신부-
바울로가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많은 희사를 했다. 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이들을 위하여 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희사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들은 동정심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희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희사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것도 필요한 경우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교우들의 신앙을 보고 사도들은 디도를 고린토 교우들에게 파견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기쁜 마음으로 희사함으로써 주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고린토 교우들도 기쁜 마음으로 희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파견한 것이다.

고린토 교우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1고린 12,9; 13,2.13), 언변이나 지식이 풍부했으며(1고린 1,5), 사도들을 지극히 사랑했다(7,7).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다.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그

러므로 바울로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희사하도록 요청한 것은 그들에게 짐을 지워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을 더 풍성하게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로는 교우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10,8; 13,10), 결코 명령하지 않고 호소하였다. 이는 그들이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자발적으로 희사한 헌금만이 하느님 앞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필립 2,6), 비천한 인간이 되시어 희생적인 삶을 사시며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부요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가난한 모습을 취하신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은총을 주신 것은 은총을 받은 사람도 그분을 본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은 고린토 교우들은 마땅히 부요함을 포기하고,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희사에 동참해야만 한다.

마케도니아 교우들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궤에 봉헌한 것처럼(루가 21,2)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자원하여 많은 희사를 했다. 이는 참으로 놀랍도록 헌신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희사와 자선은 이처럼 순수한 마음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희사해야 한다. 마음 없이 봉헌하는 희사는 위선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희사를 즐겨 받지 않으신다.

또한 가난하다고 하여 희사와 봉헌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때문에 가난할수록 형제애로 굳게 뭉쳐 서로 도와야 한다. 다른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신앙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져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자. 가난하고 고통당할수록 더욱 더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그럼으로써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고, 그들을 위해 희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순수한 마음과 사랑으로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는 신앙인이 되자............◆


 

 
아가페적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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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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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셨는지요? 오늘은 어제 복음의 연장선에서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하여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은연중에 그 사랑과 연관된 어떤 대상을 함께 생각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녀 간의 사랑도, 서로 친한 사람들 간에 오가는 사랑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오간데 없고 치미는 분노와 함께 원수에 대한 악한 감정만이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옛말에 “아버지의 원수는 더불어 함께 하늘을 이지 않고, 형제의 원수는 병기를 돌이키지 않고,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원수 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제와 친구의 원수를 만나거든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을 거슬러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사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에 거슬러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경우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특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침묵하거나 화제를 바꾸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소신을 서슴지 않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으로 그친 것뿐 아니라, 몸소 당신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또 사랑하심으로써 당신이 하신 말씀에 힘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맘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정에 이끌리는 행위이지만,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 문제를 넘어선 의지의 문제이며, 자기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실천코자 하는 결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신적 사랑으로서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인간적 사랑을 넘어선 신적 사랑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우리 중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곧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분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도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먼저 그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마음 가득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고 있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어느새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일게 될 것이며, 점차적으로 그 연민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어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단순히 정에 이끌리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기인함을 잊지 마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은 사랑도 받지만 아픔과 상처도 받습니다. 그 반대도

-기정만신부-


우리가 서로 어우러져 기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러나 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루를 살며 사랑도 받지만 아픔과 상처도 받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아픔과 상처에 대한 반응이 미움과 분노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고 힘없어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이 준 상처에 대해 미움과 분노로 표현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처를 받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 역시 사랑으로 창조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픔과 상처 그리고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버지는 보복과 벌이 아닌 더 큰 사랑으로 배은망덕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외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이 바로 그 받아들임의 극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상처와 아픔에 대해 인간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에 대해 미움과 분노가 아닌 그 상처와 아픔을 아버지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을 하느님 사랑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상대방뿐 아니라 특별히 자신에게 또 하나의 멍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은 서로에게 생긴 멍자국을 씻어내는 것이며 세례성사의 갱신입니다.

 

 

-윤용선 신부-


 우리는 오늘 '참된 행복의 선언'으로 시작한 마태오 복음 5장의 마지막 부분을 듣게 됩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꾸며진 5장의 말씀은 오늘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교훈이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악인과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 해를 비추지 마시고, 비도 내리지 마셔야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들을 이용해 덕 볼 것 다 본 사람들 아닙니까!' 이렇게 불평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와 분노로 내 마음조차 가누지 못하는데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시다니...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만도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갇히지 않는, 막히지 않는 사랑을, 그러한 완전한 사랑을 나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 주변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성격이 고상하고 정직한 사람은 원수에게도 인간적인 이해심을 가지면서 부드럽게 관용을 베풀고 신사답게 불화를 씻을 줄도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도량이 매우 큰 자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기도 실상 대단히 힘이 들텐데, 오늘의 복음말씀은 더욱 철저하고 무제한적인 마음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것, 즉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외의 것은 '이방인들도' 행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감상적인 감동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진지한 박애정신에서 비롯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지극한 사랑을 먼저 자신의 지상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받는 극심한 반대를 받으셨고 갖은 수단과 온갖 잔인한 파괴 방법을 다 이용하는 적의와 증오에 찬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의 행위를 통해 원수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악이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증오의 힘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스승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볼 때만 얻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옳고 그름이 일방적인 편견을 떠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투쟁의 대상이 되던 중대한 사물들이 이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정신은 나 인간의 정신과는 격차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 하느님의 정신으로 나의 정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신 안에서 우리가 자라고,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함으로 나아가며,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심에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 바로 나의 원수를 내가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현실로 실현될 것입니다.

 

 

-김웅태 신부-


 우리는 성질이 까다롭고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이는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부르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누구나 대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사랑" 하면 : 상대가 누구냐?를 생각하게 되는데, 1) 부모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 2) 남녀간의 사랑도 3) 혈연 관계를 떠나 서로가 친한 사이에 온후하고 부드러운 애정이 깃든 사랑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러나 오늘 복음이 가르키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가페적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 자신의 희생이 깃든,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심이 깃든, 착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하다 보면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고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정에서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정의 문제를 넘어서 의지에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자 결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기 희생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우리 중에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 믿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 26의 말씀대로 : ..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 함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용서하시며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을 계속 미워하면서 기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김귀웅 신부-


독일 나치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라벤스부룩이라는 수용소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답니다.

“오 주님, 선한 의지의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의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고통의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자들이 주님 앞에 심판 받게 될 때,
우리가 맺은 이러한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중노동에 배고픔을 참아내야 했고, 그런 가운데서도 바로 옆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죽음의 공포에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그 사람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었을까요?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 사람이 박해자들에 대해 “우리가 맺은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마음의 평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이상화 신부-


전에 신학생 때 공부를 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공부를 잘하고, 완전히 이해한 사람일까’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분께 물어봤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이죠?’
전 그 물음을 던지면서 속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다방면으로 책을 읽고 이해한 사람일 거야’
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진짜 공부를 잘하고 진짜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지금 무엇은 알고 있고, 무엇은 확실히 모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야’
처음에 그 대답을 듣고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 답이 정답이었습니다.
정말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뭘 모르는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질문을 하고 배우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완전한 사람이 돼야지, 원수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만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한때고 시간이 지나면 난 또 그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입니다. 상처받은 나만 생각하고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그런다고 사랑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랑해야할 그 원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서 나를 미워하는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전혀 모르고 있다면 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 완전히 원수에 대해서 알아보고 내가 원수에 대해서 과연 무엇은 알고 무엇은 모르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주님 뜻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노력해 봅시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양승국신부-

 

주일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등산을 갔습니다. 날씨도 더운데, 등산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등산이냐는 아이들을 겨우겨우 꼬셔서 부지런히 올라갔습니다.

부지런히 능선까지 올랐습니다.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준비해간 시원한 음료수를 돌리니 아이들도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애들아, 올라오길 잘했지?”라는 제 물음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 주에도 또 와요!”라고 외쳤습니다.

같이 간 아이들 중에 산을 유난히 잘 타는 아이가 있길래, “아빠하고 등산 많이 다녔구나?” 그랬더니, 솔직한 아이는 전말을 털어놓더군요.

학교 다닐 때 좀 놀았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유명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사고 칠 때마다 특별한 벌을 주셨답니다. 그런데 그 벌은 다름 아닌 주말에 담임선생님과 함께 등산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일치기로도 다녀오고, 1박2일로도 다녀오고, 선생님과 꽤 많은 산을 다녔다고 실토했습니다.

사고뭉치 아이에게 벌로 회초리를 들거나, 생활기록부에 체크하거나, 청소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등산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을 접하게 하신 선생님, 아이의 마음을 잡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시는 선생님,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아들을 내치기보다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언젠가 존경하는 주교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에 함께 했었는데, 강론 중에 주교님께서는 이런 자신의 체험담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당신이 교장으로 사목하고 계실 때, 한 유명한 ‘땡땡이 전문가’ ‘사고뭉치’ 아이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답니다. 그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날이면 날마다 괴로웠습니다. 그 아이로 인해 뚝뚝 떨어지는 학급 출석률, 시험만 봤다 하면 그 아이로 인해 늘 꼴찌였으니, 또 그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받을 악영향이 만만치 않으니 담임선생님이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담임선생님은 당시 교장이셨던 주교님께 아이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퇴학시켰으면 하는 건의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습니다.

차마 길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을 외면할 수 없으셨던 주교님께서는 그 아이를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셨답니다. 아이를 데리고 이 산, 저 산 등산을 다니시면서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마음을 한번 잡아보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답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당장 나타나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문제아였던 그 아이는 끝까지 내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인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셨던 주교님의 노력에 힘입어 이제는 제 갈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꼴통인 아이, 남들이 다 제쳐놓은 아이,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 반평균 점수를 사정없이 깎아먹는 아이도 소중한 당신의 양떼로 여기시고 끝까지 노력하신 주교님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참 사랑은 남들이 다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이만큼 노력했으면 됐겠지, 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조금 더 노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순종적인 아이, 제 갈 길을 제대로 잘 걸어가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그런 아이들과 잘 지내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내가 사랑한 만큼 응분의 답례도, 보상도 충분히 받습니다. 보람도 느낍니다. 마음도 뿌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 세리들도 그만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참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남들이 다 포기한 아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지독한 아이, 잘 씻지도 않는 아이, 반항기로 똘똘 뭉친 아이,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아이, 이런 아이들이야말로 주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얼마나 상처받고, 따돌림 당하고, 내팽개쳐졌으면 저럴까, 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더욱 따뜻하게 감싸 안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완전한 사람,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부모와 교육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장 값진 보물을 매일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더 높은 곳(완전함)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또 다시 길 떠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두 기둥인 기도와 미사

-이봉하수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대초원에서 사는 동물들을 다룬 내용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우리와 또 다른 동물들의 세계를 통해서 지구는 결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동물들의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면, 그들 안에도 낮은 단계의
공동체가 있고 사랑도 슬픔도 있는가 하면 ‘왕따’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사람만이 가지는 고차원적인 감정과 지각이 없기에 창조 이래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만약 유전자의 변형으로 네 발로 기는 동물에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지각, 언어 등이 주어진다면 동물과 사람 간에 서로
우위와 지배를 위해 싸우며 지구촌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느님께서는 아직까지 사람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람과 같은 은총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이나 원수를 두고 ‘금수보다 못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사실 금수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 있을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일상 안에서 회개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김지영신부-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한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만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 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간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한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는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에서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라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도 포용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에게 원수는 누구이며, 이방인은 누구인가?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인데 어리석게도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에 내 힘을 전부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김지영 신부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기양신부-

제1독서 : 1열왕 21,17-29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복 음 :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말씀이지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이유는 단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자 비신자나 할 것 없이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43)하시면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어서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47)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자기와 친한 사람과는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신자로서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여기에 머무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고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지요.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율법 해석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요. 미움은 모래에 새겨서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고 은혜는 돌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다치고 힘겨워지는 사람은 미움을 새겨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프란시스 베인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위에 서 있다.?
더 큰 사람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며 결국 악순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우리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며,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인사하고 받아들이며 친교를 맺고 미움은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유광수 신부-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면, 너희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차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구나 다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는 것일 것이요, 운동 선수는 세계 챔피온이 되는 것이요, 기업인은 세계 일류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수도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사제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러나 얼른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은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을 한참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해답이 무엇일까?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내 삶의 목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나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요,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의 목표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을 "완덕(完德)"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 "완덕의 생활"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의회 이후부터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왜 그랬는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는 말이다.

 

왜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가? 하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레위 11,44-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바오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데살 전 4, 3. 7)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성덕(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 "성화 되는 길"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목표는 또 모든 신앙인의 목표는 聖人이 되는 것이다. 나라 대통령도 아니요, 재벌가도 아닌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의 성소(聖召)이다. 이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이 부분에 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인용하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성직계에 속하는 사람이나 성직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다 성화(聖化)의 성소를 받는 것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이 신도들 안에서 맺어주시는 은총의 열매로써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며 또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 48)하시었다....

 

 따라서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이 성덕은 현세 사회에 있어서도 보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의 뜻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성덕은 교회사에 있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활이 빛나는 증거를 보여 준 것처럼 풍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계시 헌장 5장 39.40항 참조)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신다.(요한1,4,16)"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첫째 은혜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써 우리는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영혼 안에서 좋은 씨같이 자라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각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느님의 듯을 행동으로 채워 드릴 것이며,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거룩한 전례 행위에 자주 참여할 것이며, 기도와 자아 포기와 행동으로서의 형제적 봉사와 모든 덕행 실천에 항구할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모든 성화 수단을 지배하고 힘있게 하며 목적을 달성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성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상(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조석(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선인(善人)에게 바로 상(償)을 주지 않으시고, 악인(惡人)에게 바로 벌(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