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6. 18. 09:41

   2007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마태오 5,38-40)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But I say to you,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어찌 왼뺨마저 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어찌 겉옷까지 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한다. 은총은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어느 누가 왼뺨마저 대 줄 수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삶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또 무엇입니까? 그렇게 했다가는 정신 이상자로 몰릴 것입니다.
어디까지 참아야 하고 어디까지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얘기입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왼뺨마저 돌려 대 줄 정도로 참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겉옷까지 기꺼이 내줄 정도로 아낌없이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너그럽기까지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디까지 참아야 할지 그 한계를 지적하시고, 어디까지 베풀어야 할지 그 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와 자선의 최고봉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참으로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뱁새가 단번에 황새를 따라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산악인들이 산 정상에 오르려고 힘든 훈련을 거듭하듯이 우리 역시 각고의 노력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내와 자선의 최고봉에 오르는 시작입니다.

 

 

새벽을 열며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들에게 냉장고를 팔수가 있을까요? 사실 에스키모인 들은 아무데나 구덩이를 파면 그곳이 바로 천연 냉장고가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굳이 냉장고를 살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도 이 냉장고를 에스키모인 들에게 판 사람이 있다고 하네요. 대단하죠? 물론 냉장고로 팔지는 않았고, 대신 음식을 보관하는 아주 편리한 찬장으로 선전을 하면서 냉장고를 팔았다고 합니다.

또 대단한 세일즈맨이 있는데요. 그는 글쎄 사하라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 눈을 치우는 제설차를 수출했다고 합니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눈을 구경이나 해봤을까요? 이러한 그들에게 과연 제설차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 세일즈맨은 제설차를 모래 치우는 좋은 차로 선전을 해서 수출했다고 합니다. 즉, 바람에 의해서 쌓인 모래들을 이 제설차로 치우고 있다는 것이지요.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들에게 냉장고를 판다는 것,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 눈을 치우는 제설차를 판다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부정적인 말이 튀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용도를 조금만 바꾸면, 그것 역시 그 장소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서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중에서 불가능한 것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단정을 짓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전혀 할 수 없다고... 그렇기에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조차 방해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렇게 살았다가는 바보,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힐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현실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서 불가능하다면서 단정 짓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면 할 수도 있는 것을, 자신의 완고한 마음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안 되는 일이 있을까요? 특히 당신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사랑의 완성인데, 그 사랑의 완성이 이 세상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부정적인 마음들을 하나씩 지우고, 대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을 하나씩 채우는 순간 사랑의 하느님 나라도 완성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빠다킹신부

 

 

   분노와 증오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는 일까지 금지하시면서,
다른 뺨을 내밀 것과, 원수를 사랑할 것을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으며,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만일 분노로 해서 이웃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거나 이웃을 죽이기를
원하기까지 한다면 이는 사랑을 크게 어기는 것이므로, 죽을 죄에 해당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의도적인 증오도 사랑에 어긋납니다.?이웃에 대한 증오는 이웃이 잘못되기를
일부러 바랄 때 죄가 됩니다. 일부러 이웃이 심한 손해를 입기를 염원할 때,
이웃에 대한 증오는 중죄가 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믿음이란?

-곽용승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교)-


 미국 콜로라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콜로라도에 토네이도가 발생했습니다. 곧바로 온 도시에 토네이도 경고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토네이도가 닥쳤습니다. 하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 경고 사이렌을 믿고 안전한 곳으로 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고 사이렌을 믿고 조치를 취했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동태복수적 성향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요구입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의 방식입니다. 차라리 오른뺨으로만 끝나면 좋으련만 더 나아가 다른 뺨마저 내밀라니 그러다 다른 뺨마저 맞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 답답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십자가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죽음의 길이며,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분명 행복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힘있게 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심판에 대한 희망입니다. 분명 하느님 심판의 날은 올 것이며, 하느님의 심판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다고 보였던 행동과 마음을 옳다고 하시며 기쁨을 가득히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4장 17절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독서> :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고 살아간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


바울로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고린토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영과 육을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거짓 교사들이 전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도록 당부한다.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이 왔는데, 구원은 바울로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5,18-21)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따라서 바울로가 복음을 선포하는 순간이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이다.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복음을 거부하고 경멸한다면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라고 말한 사도 바울로는 오직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만 충실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봉헌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복음을 전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 모든 고통을 참고 견뎠다. 환난으로 인하여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았으며(1,4-11), 궁핍함으로 인한 고통과 역경을 견뎌냈다(1,7-8; 4,8). 매질과 투옥, 폭동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했지만 그 모든 것을 참고 이겨냈다(사도 13,50; 16,19-24).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때로는 심한 노동을 해야 했고(사도 18,3; 1테살 2,9),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굶주려야만 했다(11,27).

이러한 바울로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영광과 고린토 교우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렇게 했다(5,13). 뿐만 아니라 그는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없이 살아감으로써 내적으로 순결함을 지켰고(1테살 2,10), 주님을 통한 구원에 대한 지식으로(5,20)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순수한 사랑을 행했으며(12,15; 1고린 8,1),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았다(로마 5,19; 1고린 1,18; 2,4-5). 그리스도의 의로 무장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았다. 그는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사람들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였다(5,18).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느님께서 진노하시는 표시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깨달았고, 깊이 체험하였다(1,9; 4,11; 1고린 11,32). 때문에 그는 항상 기뻐했으며(2,3; 7,4; 1고린 16,17),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가르쳤다(로마 12,12; 필립 2,4; 4,4; 1테살 5,5).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람을 풍요하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주님만이 사람을 풍요하게 함을 잘 알고 있었다(필립 3,8).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에 오직 주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을 믿고 살았다. 그는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고 주님께만 충실한 하느님의 일꾼이었다.

사도 바울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립 3,8)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만으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신앙인,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오늘 사도 바울로의 삶을 본받으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고, 그리스도만을 붙잡는 신앙인이 되자.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리자............◆


 

 
 예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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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안 신부 -


오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가운데 예수께서 산상에서 가르치신 설교의 가르침에서 나옵니다. 산상설교 5장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더 옳게’ 사는 방법에 대해 6개의 명제를 대비해 가면서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십니다.

이를 6개의 대당명제라고 하는데, 첫째,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둘째,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 셋째,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말라(31-32절). 넷째,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다섯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여섯째,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입니다.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 하지 마라’는 반명제를 제시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가해자에게 피해와 똑같은 모양의 형벌로 갚아주는 동태복수법을 의미하는데, 바빌론 왕이었던 함무라비의 법전에 명기된 법조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이를 따르고 있는데 모세 오경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3-25)

동태복수법은 언뜻 보기에 당연하고 이성적이고 정의롭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악을 선으로 되갚으라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 보다는 선을, 법 보다는 사랑을, 강함 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성인이 길을 가는데 동네 건달이 욕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미소를 지을 뿐 노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묻기를, “스승님, 그런 욕을 듣고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이보게, 자네가 내게 금덩어리를 준다고 하세. 그것을 받으면 내 것이 되지만 안 받으면 누구 것이 되겠나?”
“원래 임자의 것이 되지요.”
“바로 그걸세. 상대방이 내게 욕을 했으나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 욕은 원래 말한 자에게 돌아간 것일세.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 밖에….”

구약성서 잠언서에 보면
손수 앙갚음할 생각 말고 야훼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다려라.(잠언 20,22)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그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워 주는 셈이니, 야훼께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언25,21-22)

저는 되도록이면 앙갚음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앙갚음은 언제나 또 다른 앙갚음을 낳게 되고 그 앙갚음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갚음은 자기 스스로 짊어지게 되어 있고, 그것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것이지 않겠습니까? 악을 선으로 갚을 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있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기정만신부-


예전에 얼마 동안 로마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거리를 지나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누군가와 대화를 하든지 간에 그들에겐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두 가지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감사합니다’이고, 다른 하나는 ‘미안합니다’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좀처럼 핑계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습관처럼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말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데…’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언어 습관은 요즘 들어 더욱 많아진 듯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그리고 상대방에게 관용과 용서와 아량을 보이기보다는 이기려는 데서 이런 언어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나오는 듯합니다. 청년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도, 어린이들과 이야기하는 중에도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 사람의 모습이라 가르치시며, 당신 스스로도 아버지의 모든 뜻에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도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만’에서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심원택신부-


주님께서 들려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자니 난감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고 하시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똑같은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출애굽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싸우다가 …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동태복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은 우리 삶의 윤리로써 자리 잡고 있으며, 은연중에 이러한 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태복수법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무자비한 율법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에게 사사로이 복수할 권리를 주는 법률이 아니라, 법정에서 재판관이 벌을 주되 그 형량이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재판관을 위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의 배경에는 ‘복수의 한계가 거기까지다’라고 하면서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복수를 신중하게 제한한 것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법이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에 손을 드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경우 제한적으로나마 그 댓가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 법을 들어 말씀하시면서,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 만큼만 복수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제한된 복수까지도 금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시면서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손등으로 뺨을 맞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손바닥으로 뺨을 맞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손등으로 뺨을 맞을 땐 그 배 이상의 멸시와 모욕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까지도 참아내면서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라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아날 뺨이나 겉옷이 어디 있겠으며, 두 다리가 성할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겁나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왼뺨’, ‘겉옷’, ‘십리’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평화의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온유함을 닮음으로써 참된 평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시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손해를 손해로 되갚지 않는 의인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받은 만큼 갚아주면 속이 풀릴 것 같지만 오히려 앙갚음은 내 마음을 더욱 망가뜨리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없는 말을 하고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오히려 희생하고 손해 보며 그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의 의로움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의 이 귀절은 바로 크리스찬 생활의 윤리적 특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라는 법은 인류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원전 2285-242)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것으로, 탈리오법이라 하는 "동일한 대가의 복수법"입니다. 이 법에 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눈을 실명케 했다면, 그의 눈 하나도 실명 되어야 하며, 사지 중에 하나를 부러 뜨렸으면, 그의 사지 중에 하나를 부러뜨려야 할찌니라 ..." 즉, 이 원칙은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똑같은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이 구약성서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출애 21 : 22-25 "사람들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밀쳐서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사고만 없으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배상액을 재판관의 조정하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이러한 율법들은 종종 구약 율법 중에서도 잔인하고도 야만적으로 무자비한 율법처럼 인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을 그대로 비평하기 전에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동일한 대가로 보복하는 이 법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율법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실 이 법의 원래 목적은 "복수의 한계가 거기까지이다."라는 한계를 분명히 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복수를 신중하게 제한하는 것으로서, 상해를 입힌자 만이 벌을 받아야 하되, 그 벌은 그가 입힌 상해와 손상 이상을 하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 이 법은 결코 사사로이 개인이 복수할 권리를 주는 법률이 아닙니다. 이 법은 개인이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법정으로 넘겨지고, 법정에서 재판관이 벌을 주되, 그 형량이 그 이상은 넘을 수는 없다는 재판관을 위한 지침법이었던 것입니다.

3) 그러나 이 법은 어떤 사회에서도 초기문명 사회에서까지 문자 그대로는 실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유대 율법가들은 이렇게 실행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나 노동으로 그 처벌이 바뀌어 부과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곳에 자비를 베풀라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잠언 25:21 ;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음식물을 먹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과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잠언 24:29). 그러므로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며,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며, 여기에는 자비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법을 들어 말씀 하시는 것은 : ...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 만큼 복수하는 것 뿐 아니라 제한된 복수까지도 금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바른손으로 하나로 상대방의 뺨을 때릴 때 한쪽은 손바닥으로 때리게 되고, 또 한쪽은 손등으로 때리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풍속에서는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그 배이상의 멸시와 모욕을 주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이와같이 맞는 행위 뿐 아니라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앙가픔을 하지 말며, 분개하지도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당시에 그 동족들에게 ... 먹기를 좋아 하는 자, 술을 즐기는 자라고 말을 들었고, 창녀들과 세리들과 한 부류, 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으며,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영할 때 식인종이라는 말과, 방화범이라는 모욕적인 말들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예수님을 본받아, 모욕 당했다고 생각치 않는 사람, 어떠한 모욕을 받아도 결코 분개하지 않는 사람, 복수할 생각을 추호도 아니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입니다.

 

-윤용선신부-

 

 우리는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자에게 어떠한 반대적 반응도 보이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더 잘 대해 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 밀어 주며 더 맞으라'고 하시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한 대만 맞아도 아프고 화가 날 지경인데 얼굴을 내밀며 더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다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나를 학대하고 경멸하며 혹사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장사꾼들은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하나 이윤을 따지고 돈을 벌지 않으면 비정한 경쟁의 삶의 자리에서 지고 말 것입니다. 군인들이나 경찰관들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다간 군대의 규율은 무너져 버리고 정복하거나 방어하려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며, 질서와 공안을 위한 경찰관들의 체제 또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시다니, 이래서는 정의로운 판결이 불가능할 것이며 감옥은 개방해야 하고 소송제도는 폐지해 버려야 할 것이며 판사나 변호사들이 해야 할 일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이 달라는 대로 다 내어 주고, 꾸려고 하는 자의 청도 다 들어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한 사람들의 끝없는 요청에 계속 시달릴 것이며 끝내 빈 털털이가 되어 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자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정의롭지 못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그릇된 악으로 우리를 내몰아 버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말씀은 세상 살기 참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태오 복음의 오늘 복음과 같은 장인 5장의 앞부분이 말하고 있는 바, 즉 '참된 행복의 선언'이라 표현되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 먼저 언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늘나라와 연결되는 삶 안에서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늘 나라, 즉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이 지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성서의 다른 구절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지상의 삶'의 눈으로만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오늘의 복음말씀은 바로 '하늘나라의 삶'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한 없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慕?'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바로 '미움은 미움을 계속 낳지만, 사랑은 사랑을 계속 낳는다'는 참으로 확실한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자세를 통해 하늘 나라가 바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우리 함께 희망해 봅시다. 남에게 먼저 그렇게 살으라고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내가 먼저 그렇게 한번 살아 보도록 합시다. 제한 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할 때, 오늘의 복음말씀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실감하며 참된 행복을 이 지상에서부터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상화신부-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오바하시네. 그냥 오른뺨 치거든 참아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속옷만 주면되지아. 원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뺨은 왜 돌려대며, 멀쩡한 겉옷은 왜 주라는 건지?’ 참 이해가 안가는 말씀이더군요. 세상에서 알아주는 성인군자도 뺨을 맞았을 때, 솟옷을 빼앗기게 됐을 때 참아 주었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러나 다른 뺨을 돌려대거나 겉옷까지 일부러 주는 경우는 잘 못 들어 봤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굳이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신 걸까요?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우리가 뺨을 맞았다 칩시다. 그런데 우리가 뺨을 맞고 단지 참아준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내 영성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참으면서 내 인내심도 시험할 수 있고 좋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만을 생각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를 때린 사람도 배려하는 그런 깊은 사랑을 하기 바라십니다. 남이 내 뺨을 때렸을 때 내가 단지 참아만 준다면 때린 사람은 그 일을 격으면서 자기가 힘이 세다는 것만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자기를 때릴 때까지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뺨을 때린 사람에게 다른 뺨까지 때려보라고 내어준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낄 겁니다. ‘얘가 왜 이러지?’

그 사람은 우리를 보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단지 참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고백하도록 이끌어 주는 그런 깊은 사랑을 주님은 바라십니다. 그런 깊은 사랑 우리 할 수 있겠죠!

 
평화의 샘은 마르지 않는 것 

- 이봉하수사-


세계 역사 가운데 중동 지역만큼 분쟁이 많고 시끄러운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민족간의 갈등, 종교간의 갈등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와 보복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무장 단체의 테러로 인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보복은 또 다른 분쟁과 테러를 낳습니다. 테러가 있으면
반드시 보복이 뒤따르기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메아리는 아주 멀리 오래갑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평화의 싹이 자라게 됩니다.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안에서 분쟁과 보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용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심리학 안에는 여러 분야가 세분화되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용서하기’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직 보편화가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머지않아 인류는 테러와
보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용서는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서지 않겠다는 마음, 한 발 양보하겠다는 마음,
‘안 돼’라는 마음을 ‘된다’라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미움을 통해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평화가 아니라 바로
오늘과 내일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김지영 신부


◆누가 오른뺨을 칠 때 왼뺨마저 돌려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까지, 곧 바래다 주었다가 되돌아오는 사람이 그리 흔할까? 한번 생각해 보자. 복음에서 왼뺨이 아니라 오른뺨을 칠 때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린 셈이다. 사실 손등으로 맞는다는 것은 큰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다른 뺨마저 대주라고 한다. 또한 가진 것이라고는 겉옷과 속옷 한 벌밖에 없는 처지인데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당장 벗어주고 거기다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실천이 인간 사회에서 가능한 것일까? 예수께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을 말하신 것이 아닌가? 차라리 구약의 율법이 현실에 더 맞는 것처럼 여겨진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산상설교를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규범으로 인식하였으며 그것이 공동생활에서 가장 이상적인 질서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항의로 은둔자의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써 노력하는 자세를 보신다. 상처를 상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 말고 마음으로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이 산상설교의 핵심이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

-양승국신부-


작년 이맘때쯤 개봉된 영화 ‘맨발의 기봉이’ 기억나시나요?

호수처럼 잔잔한 남쪽바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기봉이란 노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실제 나이는 마흔이지만, 어려서 얻은 열병으로 인해 정신연령은 8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기봉이는 효심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기봉이는 이집 저집 불려 다니면서 동네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일당으로 양식거리를 받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던 기봉이었기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맨발의 기봉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운 생활 형편이었지만 기봉이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면서 사는 기봉이의 얼굴은 항상 밝고 환합니다. 동네사람들이 굳은 일을 시켜도 늘 싱글벙글합니다. 일한 대가가 소홀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런 기봉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한편으로 속이 무척 상합니다.

어느 저녁, 뭐가 그리도 좋은지 뭔가를 만들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기봉이를 향해 어머니가 묻습니다.

“아그야, 너는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냐?”

그 순간 기봉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크게 대답합니다. 환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응, 행복해. 엄마!”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행복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기봉이었는데, 지체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할까 생각해봤습니다. 하루 온 종일.

결론은 이랬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했던 이유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 이웃에 대한 기대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너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대방 위에 놓기보다 상대방 밑으로 두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가질 것 안 가질 것 다 가진 우리들이건만 이토록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기봉이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큰 것만 바랐기 때문에, 삶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웃들과 너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워왔기 때문에, 남과 싸워 늘 이기려고만 했기에 그토록 불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행복해지는 비결은 내려가는 데 있습니다. 비우는데 있습니다. 지는 데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바보가 되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바보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보십시오. 바보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결국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산다는 것, 엄청 억울하고, 엄청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시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바보 중의 바보’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 폐기되는 '탈리오' 법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23-25;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치는 소위 동해형법(同害刑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모든 종류의 형법(刑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의 장치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다.(신명 32,39-43; 집회 28,1; 이사 35,4; 예레 46,10; 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탈리오(talio)"는 "이러한,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의 법전에서 발견된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앗시리아와 그리스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문화권에서는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되고 국가에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응보(應報)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리오법은 언뜻 보기에 적용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악(惡)을 선(善)으로 되 갚으라고 하신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것이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악(惡)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이 예수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악은 분명히 악이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이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