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Margaret K 2007. 6. 29. 05:07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6,15.16)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이에게 질문하신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를 대표하여 베드로 사도는 분명한 대답을 남겼다

 

☆☆☆

 

 기원후 64년 로마의 화재를 계기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집과 재산을 잃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속죄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난 민중이 원형 경기장에 모인 가운데 교우들이 죽어 갔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불을 지르고, 굶주린 사자 앞에 맨몸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우가 붙잡혀 희생되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크나큰 위기에 놓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래도 한 사람만은 살아남아 박해가 끝나면 교회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뇌하였습니다. 그 마지막 사람으로 베드로를 지목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고 황급히 로마를 떠나는데 그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놀란 베드로는 엎드리며 여쭈었습니다. “꿔 바디스 도미네?”(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떠난 로마에 다시 죽으러 간다.”
이 말에 깨달음을 얻은 베드로는 순교의 길로 되돌아옵니다.
그렇습니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 원칙을 증언한 이들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법칙일 따름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우리 성당에는 음악 피정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조금 겁이 났지요. 왜냐하면 피정이 시작되기 전, 비가 너무나 많이 왔거든요.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퍼 붓는 비가 그렇게 매정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음악피정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날씨부터 도와주지 않네요. 설상가상이라고 잠시 뒤, 연락이 왔습니다. 음악을 담당하는 친구들이 차가 막혀서 늦게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꼬이는 상황에서 피정은 시작되었고, 잠시 뒤 모든 문제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글쎄 하루 종일 온다던 비도 그치면서 날씨까지도 점점 좋아졌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피정을 받기 위해서 한두 분씩 성당으로 모이셨고, 결국 피정을 마치는 음악 미사 때에는 300여명이 넘는 분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잠들기 전에, 아무런 문제없이 잘 끝났음에 감사드리면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모든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신 텅 빈 성당 안에 서 있으니까 왜 이렇게 허탈한 느낌이 드는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영광을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빈자리를 보면서 허탈감에 빠져있던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생활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영광을 생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를 있게 해주시고, 나에게 이러한 재능을 주시고, 또한 나에게 이러한 힘을 주신 분이 주님이신데도,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다한 것인 양 생각하는 이기심을 간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맡기지 못했을 때, 우리들은 세상이 주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모두 처음에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지요.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했었고, 또 한 명은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둘 다 처음에는 자신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정 반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이들이 이제 주님 안에서만 행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변화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순교자의 길을 기쁘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영광만을 생각했던 내 자신을 다시금 반성하여 봅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만약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지향하여 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처럼…….



주님께 맡기세요. 걱정까지도…….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아드님     

-박영봉 신부-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고,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며’(요한 13,3),
‘하늘에서 내려오셨고’(요한 3,13),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움직여주시고 성부께서 이끌어주셔서,
우리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이 신앙 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라고 하시며,
이 칭호를 통해서 당신께서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분임을
확언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요한 3,18)을 믿도록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백인대장이 한 고백에 나타나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나의 고백

-엄재중(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오늘 복음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교황 수위권 교리의 근거로 제시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어떤 분명한 답변을 요구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이런저런 풍문을 전하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에 대해 시몬 베드로는 정답 중의 정답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공식 선언문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그 질문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오늘 복음이 중요한 것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정말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시몬을 베드로, 곧 반석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단지 땅 위에 있는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우리의 인격과 영혼에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 위에 교회는 존재한다. 또한 그것을 알려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된다. 우리는 세례 이후 하느님 백성이 되어 매일의 삶과 전례 안에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또한 이미 화석화된 답변이 아니라 순간마다 다가오는 사건 안에서 그분을 고백한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 계시기에 우리의 고백 역시 늘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박근범신부-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잘 알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월감과 열등감 때문입니다. 저마다 알게 모르게 상대와 비교하는 면이 있습니다. 결코 비교해서 행복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청취자 분들도 알고 계시는 고사성어 중에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곧잘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과 관심이 어디 한 곳에 쏠려 있거나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쳇말로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깨달아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하지 않았나? 여깁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대체 너희들이 나의 정체(正體) 혹은, 신원(身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한편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하느님은 성경(말씀) 안에, 성체(성사) 안에, 당신을 믿는 사람 안에, 그리고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느님의 존재와 현존에 대해 의식하며 지내고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스스로에 대한 ‘존재’의 물음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찾아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가?’ 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 주는 성숙된 인간의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명히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고통이 따를지라도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 힘을 내시고 희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코 10,52) 이제 선택은 각자 자유 의지에 달렸습니다.

 

 

 
깊은 믿음과 주님 체험으로 살아간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길리기아 지방의 다르소에서 태어났다(사도 22,3).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정통 히브리인이며 율법에 충실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필립 3,5-6).

그는 다르소의 시민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사도 22,25-28),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로부터 율법을 공부하였으며(사도 22,3), 천막 만드는 직업(사도 18,3)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부제 스테파노를 처형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했다(34-36년 사이). 이 주님 체험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아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내다가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갈라 1,17-18).

39년경에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바르나바의 도움을 받아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소속되었다(사도 9,27-29). 그 후 그는 다르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43년경에 바르나바의 초대를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1,25-26).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복음전파의 시초가 되었다.

45년경부터 바오로는 세 차례의 전교여행을 하였다. 45년부터 49년까지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에서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사울이란 이름을 ‘바울로’라고 바꾸었다.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갔으며,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 예루살렘회의에서 돌아온 그는 제2차 여행(49-52)을 시작하는데 이를 ‘12 사도들의 파견’이라고 표현한다(사도 15,36-18,22).

그는 제1차 전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유럽에 최초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립비, 테살로니카, 베레아에 교회를 세웠고, 아테네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뚜렷한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후 안티오키아로 귀향하여 다시 제 3차 전교여행을 계획하였지만(53-58년), 2년 동안 고린토 교회에서 사목하였고, 에페소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60-61년 사이에 몰타 연안을 따라 로마로 이송되었으며, 63년 무렵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로마의 클레멘스에 의하면, 그 후 에페소,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67년,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술가로서 신약성서의 서간 대부분이 그가 보낸 편지이다. 로마서(고린토에서 57-58년), 고린토 1서(에페소에서 54년), 고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디아서(에페소에서 54년), 골로사이서, 필립비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 1,2서(고린토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디모테오서와 디도서를 보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실한 바리사이파사람이며,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로는 주님을 깊이 체험하였다. 그 후 그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뿐이라는 점을 깊이 느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베푸시는 은총을 통해 구원된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

이 은총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을 선포하였다(1고린 1,22-2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이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된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주님 체험으로 일생을 살아간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다(필립 1,21). 그는 예수님처럼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는 삶을 살았다(갈라 2,20).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4-27)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였다(로마 8,35). 그는 복음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였으며,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고자 했다(1고린 9,23).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1고린 9,16).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았다.(12,10)

이처럼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다. 그가 그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모든 힘은 주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주님체험은 삶의 근원적인 힘이었다.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어 그의 힘이 되어주시고 생명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물론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유혹에 시달렸을 것이며, 주님과 주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1고린 13,12) 겪는 갈등도 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며 꿋꿋이 사도의 길을 걸어갔다. 신앙은 여러 가지 유혹과 갈등을 이겨내고 불현듯이 솟아나는 회의와 의혹을 이겨내는 하느님의 힘이며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사도 바울로와 같은 믿음을 주시기를 간구하자. 주님께 대한 깊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찬란한 기쁨의 시간, 인생의 오후 4시>


독일 남부 한 시골 성당에는 이런 기도문이 새겨져 있답니다.

“천주의 성모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18년 동안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저에게 많은 시련과 실망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입니다. 두 사람 역시 오랜 세월 거듭되는 시련과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던 주님의 사도였습니다.


두 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약속에 성실하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수시로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늘 남보다 먼저 일어섰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희생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인내했습니다.


오랜 단련 끝에 온전히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 사업을 위해 고통 받는 것은 곧 은총입니다.”


두 분의 인생역정을 묵상할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그분들의 생애는 예수님으로 인해 참으로 큰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수님으로 인해 정녕 행복했던 생애였습니다.


두 분의 생애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물론 인생의 전반전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만 살아왔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팍팍했습니다. 그리도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두 분은 인생의 하프타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분과의 만남으로 인한 고통과 상흔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생의 전반전 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그 소중했던 삶의 기반들을 모조리 허물어트려야 했습니다. 출가를 위해 사랑했던 가족들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손가락질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이 출발하기까지는 반드시 영혼의 어둔 밤이 필수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이 캄캄해진 후에야 비로소 필요했던 새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에 있어 먹구름은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도 서볼 필요가 있습니다.


축구시합의 승리를 위해 전반전도 중요하지만 후반전은 더욱 중요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인간의 지혜를 던져버리고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나 혼자 외롭게 길을 걷는 시기가 아니라 아버지와 손잡고 걸어가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시는 기간입니다.


오후 4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엔 늦고 집에 들어가기는 이른 시간입니다. 인생의 오후 4시 마찬가지입니다. 막연하고 어정쩡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곡절 많고 쓸쓸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오후 역시 소중합니다. 한 칼럼니스트는 ‘인생의 오후’가 찬란한 기쁨의 시간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후는 아침이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일들을 안다’는 스웨덴 속담도 있습니다.


이 소중한 보너스 시간을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주님의 시간’으로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 한 인터넷 프로그램에 몇 가지 요구사항을 입력했습니다. 생년월일이나 질병유무, 흡연이나 음주 유무, 주중 운동 횟수... 그랬더니 남아있는 수명을 계산해주더군요. 그때는 ‘아직 많이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 가만히 따져보니 그리 많이 남지도 않았습니다.


계산해보니 대충 1/3정도가 남은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나간 첫 1/3때는 저밖에 몰랐습니다. 저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님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 맞이한 1/3, 때로 하느님을 위해 살기도 했습니다. 때로 이웃을 위해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극복하는데 사용된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 보니 답이 나오는군요. 앞으로 남은 1/3은 오직 주님만을 위한 날들이어야 한다는 답 말입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욱현신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오늘의 복음 말씀은 주님 생애의, 그리고 그분의 직무의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점이 되고 있다. 이 직무, 메시아적 사명은 성령의 세례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의 선포에 함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업적들에 따라오는 이 사명은 인간적으로 실수한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당신과 함께 선교사로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곧바로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외로운 상태에 계시다. 그리고 이제 국경 너머 팔레스티나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계시다. 벌써 그분에게는 오직 불확실한 열두 제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는 그들이 필요했다. 그들의 신앙이 필요했다.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즉 십자가 그리고 세상에 열매를, 즉 성령을 전해주시는 일을 이루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루가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그것은 힘이 없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참된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들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에게 주님은 누구였는가? 여기서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한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한 말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게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이름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사도들의 손들을 통하여 구원의 모든 권능을 주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제 아버지께서는 부활을 미리 체험케 하고 또한 십자가를 위해 아들을 확실하게 하여 그분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고, 영광의 구름, 전능하신 성령 하에서 제자들과 함께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커피 머신).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울로의 축일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하느님을 따랐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정 증거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하늘 나라의 열쇠>(마태16,13-19)

 -유광수신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열쇠란 무엇인가? 열쇠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기구이다.

열쇠가 없으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 다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고 들어 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살아날 수 있었는데 열쇠가 없었다.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아서 결국 안에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질식사를 하고 불에 타서 죽었다. 자동차 열쇠를 잃어 버리면 차가 있어도 차를 움직일 수 없다. 아파트 열쇠가 없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금고 열쇠가 없으면 돈을 꺼낼 수도 넣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열쇠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열쇠를 이용할 수 있는 용도가 다르다.

 

나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가? 어떤 열쇠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인가? 하늘 나라의 열쇠는 내가 만들 수는 없다. 하늘 나라의 주인만이 만들어서 나에게 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하느님이 만들어서 준 열쇠인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늘 나라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즉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내가 하는 일이지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지 하느님께 달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하늘 나라의 열쇠인가?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어떤 것인가? 내가 아무리 하늘 나라의 열쇠라고 생각하더라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열쇠가 아니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늘 나라의 열쇠란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예수님을 알아 본 그 믿음이 바로 하늘 나라의 열쇠이다.

"요한 세례자""엘리야", "다른 예언자"라는 열쇠를 가지고는 하늘 나라의 문을 도저히 열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가 아무리 좋은 열쇠라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의 문에 맞지 않는 열쇠인데 어떻게 열 수가 있는가?

 

어느 열쇠이든 열쇠는 반드시 맞는 열쇠가 있는 법이다. 또 열쇠가 모조품도 많고 불량품도 많다. 열쇠란 비슷하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틀려도 열리지 않는다. 열쇠는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든 반드시 구멍에 맞아야 한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조품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정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직접 매고 풀 수 있어야 한다.

 

매고 푼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즉 구세주라고 고백했다면 그분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풀고 맺어야 한다. 내가 풀려고 하지 말고 또 돈이나 권력으로 풀고 맺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고 풀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어디 계시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통해서 맺고 푸는 것인가? 그것은 복음을 통해서 맺고 푸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결정하든지 또 무엇을 생각하든지 모두 다 복음으로 맺고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으로 생각하고 복음의 가치로 보고 판단하고 복음의 잣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복음 따로 나 따로 생활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존재를 복음으로 맺고 풀어야 한다. 즉 복음에서 답을 찾고 복음에서 길을 찾고 복음에서 기쁨을 얻고 복음에서 힘을 얻고 복음에서 희망을 보고 복음에서 위로를 받고 복음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맺고 푸는 것이다.

 

그럼 하늘 나라의 열쇠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모양은 말씀해주셨다. 즉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미래 동사를 사용하셨다. 따라서 그 다음 말씀을 보면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하늘 나라의 열쇠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고난과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왜 베드로보고 반석이라고 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니, 엘리야니,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으나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대답한 베드로의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를 세워도 열쇠가 없어서 또는 맞지 않아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는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베드로가 고백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열쇠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반석은 가장 밑받침이 되는 주춧돌이다. 반석이 약하면 또 반석이 본래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 위에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짓는다 하더라도 무너지고 만다.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앙의 주춧돌이 되기도 하고 또 나의 신앙으로 영향을 받는 다른 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즉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가에 따라서 그 위에 세워진 교회는 안식교도 될 수 있고 개신교도 될 수 있고 가톨릭 교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신앙에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자녀들에게도 이웃에게도 친척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과연 지금 내가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늘 나라의 열쇠는 어떤 모습의 열쇠인가? 나는 어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느 반석 위에 나의 신앙을 키웠는가? 즉 나의 신앙을 받쳐주고 있는 반석은 어떤 반석인가?

 

열쇠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다.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복은 본래 받아들이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할 때 하느님이 그곳에 당신 은총을 채워 주시는 것이지 내가 복음 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만 만들고 그 그릇에 복을 담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 담아주시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류해욱신부-

  오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보내며 우리가 두 사도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두 사도는 어떤 인물입니까?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참 서로 다른 사람이지요. 간략히 두 사람을 살펴볼까요?

  베드로는 원래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부였지요. 요한복음 2장에 의하면, 요한의 제자였다가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고 외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두 사람 중의 하나인 동생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함께 하루 밤을 보냅니다. 그 후 형인 시몬에게 가서 자기들이 메시아를 만났다며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루가 복음 5장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먼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배를 저어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게 합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는 한 마디 말씀에 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히자, 시몬은 그만 겁을 먹고 “저는 죄인입니다.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베드로는 제자가 되었고, 늘 제자들의 맏형이며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요. 풍랑 속을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달려가다가 거센 물결을 보고 겁을 먹고 물에 빠지기도 하고, 결코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 치다가 그만 죽음 앞에 두려움으로 세 번이나 배반을 하는 등의 늘 덤벙대고 약함을 보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듣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나서서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바위라는 뜻인 베드로가 된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가므리엘 선생이라는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던 학자의 제자로 뛰어난 언변과 학식을 지닌 인물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이던 골수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지요.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올 권한을 받아가지고 다마스코스로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다마스코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춥니다. 놀란 그는 엉겁결에 땅에 엎드리지요. 그때 부드럽게 타이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묻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분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 사울이 박해한 사람이 예수님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이 온전히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러줍니다.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울에서 새롭게 변모된 인물 사울이 되기 위해 다마스코스 시내로 들어가서 아니니아를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신비롭게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시어 사울을 이끌어주도록 안배하십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에 의해 멀었던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을 뜨게 되는 체험은 실제 사건이지기도 하지만 깊은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었지요. 이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돕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쇠사슬이 떨어져 나가면서 자유롭게 되었듯이 사울에게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영적으로 눈뜨게 되고 내적으로 자유롭게 되고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오로가 됩니다.

  간략히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두 인물을 살펴보았는데 참 서로 다른 인물이지요. 소위, 출신 성분이나 자란 환경이나 학식이나 성격 등에서 전혀 다른 두 인물을 주님께서는 놀랍게 조화시키시며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데 주춧돌과 대들보로 사용하십니다. 두 사람 다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나무들인데 이들이 지닌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들이 지닌 공통점 안에서 우리가 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포인트를 찾고 싶습니다.
  첫째는 두 사람 모두 ‘회심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간 인물이지요. 베드로는 평생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하였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픔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지요. 그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어느 정도 상처가 치유되었겠지만 평생 그 아픔을 잊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베드로에게 그 아픔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더구나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오로가 세 번이나 없애달라고 간청했지만 계속되었다는 마치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나 바오로처럼 주님을 배반하거나 박해하는 것과 같은 아픔이나 죄의 상처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늘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깊여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회심의 인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회심은 한번 일어나고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지요. 평생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계속해서 그분께 의탁을 드릴 때 그분이 약함을 강함으로 서서히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가 고백하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십니다.
  두 번 째로 두 사람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믿음을 지니게 되었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의 영예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오로는 세 번이나 목이 튀는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지켜갈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이들이 지닌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은 바로 ‘사랑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교회의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세 번 째로 저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두 사람에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헌정하고 싶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다시 한 번 약함을 드러내며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지요.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네가 떠나는 로마로 간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울며 로마로 돌아간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약하지만 끊임없이 주님께 의탁하며 풀잎처럼 약한 마음을 바위로 바꾸어 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돌 세례를 받고, 몰매를 맞고, 태형을 당하고,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불굴의 의지로 신자들을 격려하는 놀랍도록 수려한 편지를 썼던 바오로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의 초석이요, 기둥이 된 큰 인물이요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만 아름다운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두 기둥만으로 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교회는 베드로나 바오로 같은 큰 나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나무나 바위가 아닐지라도 작은 나무이거나 모래알 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합니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모두가 바오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때로 죄를 짓는 약함에 빠지지만 그저 소박한 믿음을 지니고 하루하루 주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베드로나 바오로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서 배우야 할 점이지요. 그렇게 할 때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선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를 들려 드립니다.

아름다운 사람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여러분, 우리 모두 작은 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해요.


 

† 베드로와 바오로 : 신앙의 두 기둥 †  

삶이란 길을 가는 것과도 같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길 가운데 오직 하나의 길만을 가야한다. 아무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다. 인생의 길은 이렇게 수없이 많은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여 가야하는 것이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기 전에 망설이고 갈등하며, 선택한 길을 가면서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며, 저만치 가고 난 뒤에는 결과를 놓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갔던 길을 돌아올 수는 없다.

그래서 인생은 갈등과 고뇌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통감한다. 인간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에게 인생의 길을 미리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참된 인생의 길을 알려주신 분이 계시다.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한 14,6)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길이신 예수를 밟고 걸어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삶은 우리 인생의 길에 좋은 본보기가 된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교를 바치고 있는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를 공경하는 대축일이다. 오늘 대축일의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설명은 미사의 고유 감사송에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 후손들 가운데에 초대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만백성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음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감사송)

그렇다고 해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신앙고백만 하고(16절), 사도 바오로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을 밝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릇 신앙(fides)이란 신앙의 행위(fides qua)와 신앙의 내용(fides quae)을 다 포함한다. 따라서 신앙이란 행위(行爲)는 내가하고 내용(內容)은 네가 밝히는 것일 수 없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바오로는 바오로대로 각자의 삶을 통하여 소명(召命)->추종(追從)->선교(宣敎)->순교(殉敎)의 온전한 신앙을 살았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체, 즉 신앙 전체를 떠받드는 두 기둥으로서 사도 베드로는 신앙행위(고백)의 모범이 되고, 사도 바오로는 신앙내용(신학)의 모범이 된 성인(聖人)으로 존경하며, 같은 월계관을 받아 쓴 분들로 알아모시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오로에 관한 중세기의 성화(icon, 聖畵)에는 베드로의 손에는 열쇠가, 바오로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베드로의 손에 있는 열쇠는 그가 예수께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제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18절)라고 하시면서 직접 건네 준 것이다.(19절) 물론 쇠로 만든 열쇠를 실제로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열쇠는 사도들 가운데 수위적(首位的) 역할과 직무를 의미한다. 베드로는 이 직무를 깨닫는데 생애 전부와 마지막 목숨을 그 값으로 지불하였다. 그 직무는 권위(權威)가 아니라 봉사(奉仕)였다.

바오로가 손에 든 칼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로마제국의 시민이었던 바오로는 복음 때문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斬首刑)을 받았다. 바오로는 그가 믿었고 전파하였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증언한 것이다. 바오로의 칼은 엄격함을 의미한다. 불이 열광과 열정을 뜻한다면, 칼은 엄격함과 단호함을 뜻한다. 바오로는 사울이었을 때 유다교를 신봉하고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갈라 1,14), 개종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열정적이었다.(2고린 11,23) 그렇다고 바오로가 열광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단호한 엄격주의자이다. 그래서 그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원래 어부였다.(마태 4,18) 어부란 직업에 많은 생각이나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숙련된 감각이 요구된다. 어부의 도구는 그물이다. 매일같이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로 나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던 베드로가 이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
바오로는 원래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사도 18,3) 그는 칼로 천의 필요한 부분을 잘라 바늘로 기워 천막을 만들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이제 복음과 신학의 칼을 손에 쥐고 있다.

베드로와 바오로,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의 기로에서 "길" 자체이신 예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에 자신을 맡겼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길을 걸어간 것이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길이 우리 자신의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길을 인도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열쇠와 바오로의 칼이 가지는 상징적 신앙의 태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여한다. 열쇠는 열고 잠그는 데 필요하고, 칼은 자르고 가르는 데 필요함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열쇠를 가졌다면 그 열쇠를 잠그는 데 쓰지 말고 여는 데만 쓰면 어떨까. 그리고 누가 칼을 가졌다면 그 칼을 가지고 남을 자르고 가르는 데 쓰지 말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경고와 단호함의 도구로 쓰면 어떨까...........◆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