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3일 화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20,24-29)
“Unless I see the mark of the nail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into the nailmarks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러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외친다. 예수님께서 제 운명의 주인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토마스는 예수님께 감동하고 승복하였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의 마음에 들어오시어 그의 삶을 바꾸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어 주셨던 것이다
☆☆☆
토마스는 스승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지 않고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동료 제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기적의 음식을 먹으며 감격하던 그 토마스가 그분의 부활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스승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지녔던 스승이 그토록 허무하게 죽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동료 제자들이 말하는 부활 소식은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의심은 천성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꼬치꼬치 따져야만 직성이 풀렸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그러한 성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앞에 한 번 더 발현하셨습니다. 이 발현으로 토마스는 무너지고 맙니다. 의심 많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위하여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의 사랑에 감동하였던 것입니다.
단순히 스승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가 토마스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언제나 이론을 앞섭니다. 토마스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납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의 체험을 적은 책이었는데, 아마 소제목이 ‘새옹지우(塞翁之牛)’였던 것 같네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 병원 응급실에 어떤 할아버지가 소에 받쳐서 실려 왔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고통에 힘들어 하시면서도 계속해서 ‘이 놈의 소, 내가 낫기만 해봐라 당장 잡아 묵을기다.’ 말씀하시더랍니다. 자신이 애지중지하면서 길렀던 소한테 받친 것이 억울하셨던 것이지요.
아무튼 엑스레이를 찍으면서 각종 검사를 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진 것 외에 새로운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암. 이 위암이란 것은 말기가 되어서야 자각 증세가 있다고 하네요. 따라서 초기에 병원을 찾아와서 치료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께서는 소에 받쳐서 검사를 하던 중에 초기 단계의 위암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쉽게 치료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 이 의사 선생님께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 소 아직도 잡아 드실꺼에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데요.
“잡아먹긴. 나를 살렸는데... 내 자식 삼았어요.”
자신을 들이 박은 소로 인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이로 인해서 더 큰 병을 찾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목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닌 ‘새옹지우(塞翁之牛)’였던 것이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경우는 상당히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나쁜 상황만을 바라보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처럼 말이지요.
토마스 사도는 동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분명 기쁜 소식이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는 이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주님의 일은 완결이란 없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만, 부활이라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구세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은 바로 믿음으로써 내가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불행도 내 자신이 만들어 냅니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꿔보세요.
빠다킹신부
불신의 대명사
-남상근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 사도는 오해를 많이 받지요.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사도,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대명사. 그는 후세 신자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이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오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지 못했던 섭섭함이, 서운함이 있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보았는데 나만 쏙 빠졌을 때 그 박탈감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주님을 만난 후 고백합니다.
“저의 하느님!” 복음을 죄다 뒤져보십시오.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이는 토마스 사도 말고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많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이라고도,
다윗의 자손이라고도, 주님이라고도, 메시아라고도 불렀지만 오직
토마스 사도만이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만날 수 없었던 하느님을 발견했다는 이 고백은 의심을
벗어버린 이의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의심의 대명사’가 아니라
‘의심을 극복한 이의 대명사’인 토마스 사도는 그래서 (전승에 따르면) 멀리
인도의 마드라스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모양입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상처 안에서 나를 사랑하여 입으신 하느님의 상처를 발견한 까닭입니다.
행복한 사람
-김순중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바로 그 순간 토마스는 삶의 근본적인 결단을 내린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매한 생각 또는 결심이 아니다. 삶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나는 수도생활 20년 즈음 ‘과연 내가 믿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가?’라는 심각한 마음의 위기,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때 한 달 피정을 할 수 있는 행복한 기회가 주어졌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죽음을 무릅쓰고 기도에 임했다. 내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느 날 밤 기도 중에 내 몸이 마치 암벽을 기어 오르는 것 같았다. 진땀이 나고 숨이라도 크게 쉬면 그 한 번의 호흡 때문에 추락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내 호흡을 놓아버렸는지, 맡겨버렸는지 나는 산 위에 올라와 있었고 어제까지의 상황에서 아득해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에 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거기서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안아보라 하셔서 수도복을 크게 벌려 받아 안았던 기억이 새롭다.
피정 동안 성체 앞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드러내시는 주님과 함께 기쁨 속에 지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항상 부족하게 느끼는 것은 그때 내가 의심을 버리고 완전히 믿었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뜻을 더 잘 알아듣고 아버지의 나라에 더 가까이 도달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다. 그 어른은 보잘것없는 나를 항상 먼저 믿어주시고 내게 다가오는 분이신데 나는 그 어른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두 눈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주님은 오늘도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하신다.
불신의 대명사
-김만수 신부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8-29)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토마스 사도입니다. 토마스는 스승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열두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동료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지만, 그들의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아야 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교회 안에서 오해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사도,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그는 후대의 신앙인들인 우리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이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토마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지 못했던 섭섭함이나 서운함이 있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다 보았는데 나만 쏙 빠졌을 때 그 박탈감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주님을 만난 후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란 고백은 4복음서를 다 뒤져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토마스 사도 말고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많이 있었습니다. 스승님, 다윗의 자손, 주님, 메시아라고 불렀지만 오직 토마스 사도만이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만날 수 없었던 ‘하느님’을 발견했다는 이 고백은 의심을 벗어버린 이의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이제 토마스 사도는 ‘의심과 불신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벗고 ‘의심을 극복한 이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상처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여 입으신 하느님의 상처를 발견한 까닭입니다. 의심 많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위하여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의 사랑에 감동한 까닭입니다. 단순히 스승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변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가 토마스를 목숨 바쳐 순교할 수 있도록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토마스의 마음을 변화시킨 예수님의 사랑이 복음의 핵심임을 새롭게 알아듣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로 다가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독서> : 제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한 사도 토마스
-경규봉 신부-
사도 토마스는 베드로처럼 갈릴래아 출신으로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던 초기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항상 주님의 곁에서 봉사했다고 한다. 토마스에 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11장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 지방의 베타니아로 가시려고 할 때에 많은 제자들이 만류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때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스가 나서서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한다(요한 11,16).
예수님께 대한 토마스의 충정과 용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손해 볼 상황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더구나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자신이 마땅히 외쳐야할 상황에서도 침묵하고, 해야 할 일도 포기하곤 한다. 다른 제자들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잘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기 위하여 유다 지방에 가시려 하였다. 이때 토마스는 예수님과 함께 가서 생사를 같이 하자고 제자들에게 권유한다. 토마스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의 길도 같이 가겠다는 주님께 대한 충정과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토마스에게는 솔직함이 있었다.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행하시던 중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14,2)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린다.
인간으로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주님 앞에서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주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겸허하게 여쭙는 자세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닌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는”(마태 11,25) 하느님이 아니신가! 토마스는 그처럼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허하게 주님의 뜻을 여쭈었다.
토마스는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신앙을 고백한 사도이다. 토마스처럼 강한 신앙고백을 한 사도는 없다. 당시 상황을 볼 때 그는 의심에 차서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 하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 예수님처럼 유다인들에게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까봐 겁에 질려 있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지낸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과 주님을 떠나보낸 아쉬움 및 주님에 대한 그리움에 잠겨 있었다. 주님을 떠나보낸 그들은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사무쳐서 환상 중에 주님을 볼 수도 있다.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에 토마는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이는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며,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사람이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가! 사람은 수없이 바뀌고 변한다. 생각, 말, 행동 등 사람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런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직접 주님을 체험해야만 믿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주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신앙인의 간절한 열망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삶은 경험이요, 체험이 아닌가! 모든 지식도 경험의 축적이 아닌가! 하물며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하느님 체험처럼 신앙을 깊이 하는 것은 없다. 모세도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갔고, 사도 바울로도 주님을 체험한 후에서야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지 않았는가?
이러한 간절한 열망으로 인하여 토마스는 주님을 직접 체험한다. 주님을 직접 뵈옵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주님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강한 체험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주님께 대한 강한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하여 사도 토마스의 이 신앙고백을 우리는 매 미사 중 거양성체 때마다 함께 하고 있다.
이처럼 주님을 강하게 체험한 사도 토마는 다른 사도들보다 멀리 복음전파에 나섰다고 한다. 멀리 인도에 까지 복음을 전했고, 다른 사도들처럼 순교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오늘 토마스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도 주님께 대한 충정과 사랑으로 살아가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주님 앞에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주님께 대한 강한 신앙체험을 함으로써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기를 간구하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박병래 신부-
오늘은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은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기쁜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유다인으로 베드로 사도와 같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사도로 불린 열 두 사도 중 한 분입니다.
토마스 사도에 관한 내용은 주로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들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리에 없었던 그에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함으로써 토마스 사도의 확실한 성격과 약한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못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만 믿으려고 하는 현대인과 비슷해 보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사도는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고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큰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더욱 명백히 지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처럼 약하고 신앙이 깊지 못함을 입증해 보였지만, 부활한 주님께서는 토마 사도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전교하다가 우상 숭배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창에 찔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도 어떤 때는 의심의 순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신앙을 고백한 토마 사도를 떠올리며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하셨으니 지금 믿고 있는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상일신부-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서 가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그 뜻과 상관없이 사람은 답을 알고 살고자 하는 속성이 강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답이 정확히 안보이면 의심도 하고 그 길을 가기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합리성과 의문들을 통한 명확성의 추구는 세상을 발전 시켰고 이 시대의 삶의 필요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도 합니다. 그 이유는 신앙생활이 합리성과 명확성아래에서만 성장되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은 사람 기준의 합리성과 명확성안에 다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우리 인간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던지기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투신할 것을 요구합니다. 콩나물 뿌리는 물이 부족할 때 더욱 깊이 내리고 비온 뒤의 하늘이 더욱 맑아지듯이 마찬가지로 인간이 답을 찾을 수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더욱 하느님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고 신앙인으로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느낄 수 없는 어둠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려는 자신의 투신을 통해서 하느님이 미리 마련해두신 신앙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못믿겠다고한 토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우리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의문을 던지게됩니다. 예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실까? 예수님이 정말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이 세상의 어둠과 고통이 왜 이렇게 많은가?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토마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의 그 신비를 나의 삶 속에서 더욱 깊이 체험하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느끼기에 늘 희망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활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한가운데 오셔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문을 닫아걸고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를 우리에게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와 있듯이 모퉁잇돌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이루는 우리가 제대로 잘 서있도록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거룩한 성전을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는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믿고 부활을 향하여 잘 서있어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가 소중하듯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집을 이루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님이 안계실 때 일수록 자녀들은 조금은 불안하지만 더욱 잘 지내야 하듯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잘 느껴지는 않는 고통과 불안한 상태에서도 더욱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불안에 떨던 제자들처럼 마음에 문을 닫아걸고 있었던 순간이 어떤 때 였는지 돌아보면서 우리 한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정희 수녀(성심수녀회)-
◆우리 공동체에는 열 명이 산다. 각기 다른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저녁식사 시간은 자연스럽게 하루의 삶을 나누게 되는 귀한 시간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때, 우리 공동체에서는 텔레비전에서 교황님 장례미사를 녹화 방영한다고 하니 이른 저녁을 먹고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홉 명에게는 연락이 되었는데 한 사람만 연락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저녁식사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오면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우리는 일찍 저녁을 먹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그 수녀님이 들어왔다. 학생과 면담을 하느라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온 것이다. 모두들 텔레비전을 보느라 식사 당번만 늦게 온 수녀님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었지만 그 수녀님은 섭섭한 마음에 밥만 먹고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는 “수녀님을 찾았는데 연락이 안 되었다”고 말하였지만 그 수녀님은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여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함께하지 못한 소외감이 대단히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무엇을 ‘함께 체험한다는 것’은 서로 깊은 연대를 이루는 핵심 요소가 된다.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려면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공간을 함께 나누고, 생각을 함께해야 한다고 한다.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하자 그는 즉시 ‘함께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토마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는 말에 부러운 마음이 앞서 즉시 보인 반응일 것이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을 때 예수께서 토마스에게 다가가 말씀을 건네시자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토마스의 속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예수님 앞에서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다.
가끔 어떤 상황이나 일을 결정하게 될 때 ‘함께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을 닫아걸고 서운해하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때가 있다. 이런 서운한 마음과 스스로의 소외가 불신을 낳는다. 일상에서 내가 ‘함께하지 못함’이 주님을 만나는 데 높은 벽이 되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겠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회진신부-
저에게는 됫박 하나가 있습니다.
이 한 되짜리 됫박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삼형제가 모여
많지 않은 유산을 나누는 자리에서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면 어머님의 생전 모습에 대해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나 어머님이 저희 형제들을 기르시던 오랜 역사를 숨 쉬게 됩니다.
이 작은 됫박은 다른 이들에게 옛날 물건 하나로 인식될지는 몰라도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됫박이자
돌아가신 어머니와 저를 연결시켜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죠.
그렇게 모든 것은 어떤 관계 하에 놓여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 혹은 맺고 있는 방식에 따라
각 사물들과 생명들은 각기 서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맺고 있는 관계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한 토마에게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님”이었고,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며, “뭔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분”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었고, 그래서 그에게 예수님은
지난 시간 그에게 위대한 사랑과 훌륭한 가르침을 준분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토마의 신앙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신앙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사랑하고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일상생활 안에서 여전히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들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과 재화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들입니다.
그것들은 손을 만져볼 수 있고, 피부로 느껴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이 여전히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
하느님의 구원과 다가오심이 여전히 성당 십자가 위에 걸려 있을 때,
우리는 마음 한 구석으로 여전히 “난 내 손으로 그분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을 것”이라고 외칠지 모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읽고 아는 것 혹은 기억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이 아니라,
손으로 그분을 만지고 싶어 하고 피부로 그분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내 모든 것을 다 봉헌하며
살 준비가 되어 있다.”며 마음 한구석으로는 커다란 봉헌의 갈망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 대해, 또한 토마 사도의 모습에 대해
요한복음은 “문이 다 잠겨 있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기억과 갈망과 욕심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과 영혼의 문을 모두 다 닫아 놓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훌륭한 말과 하느님에게서 받은 보상 혹은 은총을 사랑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훌륭한 말(결국엔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말)과
받는 사랑으로만 하느님을 평가하고자, 수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상처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에 찔린 상처는
우리 자신의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에 우리의 손을 가져다 대어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는 바로 상처 입은 나의 아픔이고 동시에 당신의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에 난 고통을 당신이 같이 느끼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때에 예수님은 지극히 “나의 주님”이시고, 지극히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내 상처 안에서 아파하시고, 함께하시며 또한 치유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토마 사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며,
우리에게도 그런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이 작은 됫박이 저에게 의미가 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어머님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토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관계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외형적으로 설정한 관계가 아니라
보다 내면적인 관계, 다시 말해 서로에게 열려있는 관계 안에서의 만남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나아가 보지 않고도 믿는 또 다른 차원의 만남에로 초대하시죠.
마치 “어머니”라는 말이 언제나 제 가슴에 “나의 어머니”라고 울리듯이 말입니다.
마치 “주님”이라는 말이 언제나 우리 가슴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울리듯이 말입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사랑이십니다. 아멘.”
토마스의 고백
-류해욱신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가 듣는 복음의 내용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던 토마스의 불신과 주님을 뵙고 나서 이어지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는 고백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해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이층 다락방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줄행랑을 친 이후 이층 다락방에 모여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이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지요. 문이 잠겨 있지만 거침없이 그 방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여러분도 제자들과 그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평화’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평화의 은총이 가슴에 흘러넘치도록 청하십시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온화한 미소로 못 박힌 자리와 창으로 찔린 자리를 보여주시며 당신이 그들의 스승임을 확인시켜주시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을 함께 느끼십시오.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것에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외치는 토마스를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이 옵니까?
토마스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자로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가자.” 고 하셨을 때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스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를 잠시 헤아려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처형을 당하자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지요. 한때 “죽으러 갑시다”라고 큰소리 쳤었던 일을 생각하면 동료들에게 면목도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커다한 슬픔에 빠져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요. 하지만 종내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동료들에게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주님을 뵌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 감동 안에 머물면서 토마스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느낌들을 바라보십시오. 토마스는 열정적인 만큼 회의론자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회의하고 의심하면서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의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우리의 참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도 토마스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십시오. 또한 토마스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다음에는 철저하게 주님께 투신합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온 마음으로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는 토마스의 투신에 오래 머물러보십시오. 여러분도 토마스처럼 그렇게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가 생겨나면 그 원의를 고백하십시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숱한 의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은총을 체험할 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기로 해요.
토마스의 기도
-강영구신부-
그리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셨다. 토마스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7-29)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
저는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 후에야 비로소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령 헤로데 안티파스나 나치의 히틀러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것을 부활이라고 해야 할까요? 부활이 아니라 차라리 악몽이겠지요.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려면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부활도 있습니다. 죽음은 부활의 바탕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다 부활의 바탕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사랑하기 때문에 한 알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바치는 죽음은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이 됩니다.
호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아들을 보고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물에 뛰어듭니다. 아들을 구해냈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죽고 맙니다.
사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아들의 삶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들은 영원토록 생생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살게 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生과 死를 뛰어넘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사랑입니다. 당신은 죽음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같은 이 세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당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죽음의 바다에 빠진 우리들을 구해냅니다. 저는 당신의 그 비참하고 처절한 십자가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에 사랑은 죽음을 이긴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도 당신을 닮아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가 되겠습니다.(一明)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
-양승국신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찐한 하느님 체험"일 것입니다.
저 역시 수도자로 살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 한가지는 제 신분 상 언제나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야될텐데,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야될텐데, 그래서 하루 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이렇다할 체험이 없이, "이거다" 하는 확신도 없이 살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끔 신자들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할 때면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한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되는 프레미엄이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직자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처럼 지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갈증 가운데 가장 큰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그분 얼굴을 뚜렷하게 뵈올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텐데...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강렬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잘 살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불신에 가득 찬 우리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죽어도 못 믿겠다"는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의 외침입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다 각별한 하느님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는 따로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우리를 보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기양신부-
㰡의심 많은 토마스㰡‘로 유명한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순교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의 사도, 건축가의 수호 성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토마스 사도는 열두 제자 중에 한 분으로서 성 베드로 사도와 같이 갈릴래아 출신으로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예수님의 전교 초기에 제자로 뽑혀 주님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바친 순교 성인입니다. 성경에 토마스 사도에 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지만 요한복음 사가는 토마스 사도에 관한 언급을 몇 번하고 있습니다.
㰡’그러자 㰡쌍둥이㰡‘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㰡’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㰡“ 하고 말하였다.㰡“(요한11,16)
토마스 사도는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을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겠다는 용맹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 1-7절에서는 최후만찬의 비통함 속에 예수님께서 㰡’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㰡“(요한14,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㰡’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㰡“(요한14,5)라고 용감하게 질문함으로써 㰡’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㰡“(요한14,6)는 말씀을 이끌어냈던 장본인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에 제자들의 증언에 대하여 㰡’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㰡“(요한20,25)하고 당돌하게 의심을 드러냅니다. 토마스는 㰡’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㰡“(요한20,27)는 질책성에 가까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㰡’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㰡“(요한20,28)하고 확신에 찬 사도로 변신합니다.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은 확신에 차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토마스는 멀리 동양지방 쪽을 향했으며 처음에는 파르시아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후 행적이 분명치 않지만 인도로 가서 마드라스의 교회 밀라포르에서 전교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토마스는 열성적인 전교 때문에 이교도들의 증오를 사게 되어 창에 맞아 다른 사도들처럼 순교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유해는 394년 에데사로 옮겨졌다가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아브루치의 오르토나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토마스 사도가 건축가의 수호성인으로 불리게 된 배경은 목수로 인도로 가게 된 토마스 사도가 군다포루스왕이 준 왕궁 건축기금을 불쌍한 이들을 위해 모두 써 버리고 하늘에 왕궁이 세워져 있다고 선포한 끝에 순교하였다는 전설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 우리는 토마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을 꼽으라면 저는 㰡믿음㰡‘을 꼽겠습니다. 㰡믿는다는 것㰡‘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보물입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는 바탕에서 사랑도 꽃이 피고 결실도 맺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지요.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난도 아니고 가족 간의 역경도 아니고 서로서로 믿지 못하는 것, 불신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불신이 심해지면 병이 되는데 이것을 의부증, 의처증이라고 하지요.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심합니다. 묻고 추종하고 오해하고 나중에는 문 밖에도 못나가게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상대방을 감시하는가 하면 혼자 끊임없이 잘못된 환상을 만들어내지요. 그리고는 구타하고 핍박하고 그 사람의 나쁜 점만 찾아내서 확대해서 괴롭힙니다. 말 그대로 쓰레기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감옥에서 보다 더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주위 식구들과 이웃의 고통은 또 어떻겠습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이렇게 큰 불행입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만큼 신뢰하는 가에 따라서 행복 지수가 함께 올라가지요. 믿는 만큼 사랑의 결실과 행복의 척도가 비례해서 함께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모든 결실의 바탕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좋은 결실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좋아하시는 것도 역시 이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때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태오복음, 마르코복음(2회), 루카복음(5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요.
㰡’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㰡“
믿음이 바로 최고의 약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자체가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돌아오자 함께 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㰡’우리는 주님을 뵈었소㰡“(요한20,25)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㰡’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㰡“(요한20,25)
토마스는 공동체의 증거를 믿지 못했지요. 여드레 뒤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토마스 사도를 위하여 다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㰡’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㰡“(요한20,27)
토마스 사도는 바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㰡’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㰡“(요한20,28)
너무나도 죄송하고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낮추고 용서를 청하며 한없는 신뢰를 보내지요. 참으로 행복한 사도입니다. 이제 토마스 사도에게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축복이고 은총이며 행복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에게 의심보다는 믿음과 확신의 삶을 살아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㰡믿음 행복, 불신 지옥㰡‘은 결코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보다 깊은 믿음의 삶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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