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5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07. 7. 3. 08:56

 2007년 7월 5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마태오 9,2)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중풍은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병이다. 사람들은 손발이 뒤틀리는 중풍을 죄에 따른 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신다. 죄가 사해졌으니 그 결과인 중풍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과연 중풍 병자는 일어나 걸어 나갔다.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사람들의 감격이 참으로 대단했을 것이다

 

☆☆☆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적자로, 정실부인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그것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부인도 포기한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바치라고 하시다니…….
이에 대한 사라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나 아브라함은 어떤 식으로든지 부인에게 귀띔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펄쩍 뛰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사라가 잠든 사이에 이사악을 데리고 나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밤새 잠 못 이루며 고뇌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야속함이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바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분께서 주셨다가 그분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순간 제사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아들을 바치려 했습니다. 내 자식이기에 앞서 주님께서 주신 아들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만으로 모든 아픔과 유혹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우리 신앙인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본당에서 사도직을 할 때였다. 교우 한 분이 당신네 반에 환자 할아버지가 대세받기를 원하니 그 댁을 방문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방문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방에 누워 계시고 옆에 할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앉아 계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방안에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돌아누우시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세례받으실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붙이자 할아버지는 느닷없이 “나는 염치가 없는 사람이오. 내가 젊어서 많은 잘못을 하였는데 이제 다 죽게 되어 구원받자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염치가 없지요”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인즉 할아버지는 유학자셨는데 할머니를 버리고 다른 부인을 얻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병이 들어 본처인 할머니를 찾아온 지 이제 겨우 6개월이 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식들을 키우셨으며 신자가 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76세, 할머니는 74세셨다. 할머니 말씀이 “내가 하느님을 안 이상 어떻게 찾아온 사람을 버릴 수 있겠어요.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을 믿는데…”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동안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아름다운 마음에 할말을 잊었다. 할머니를 통해 만난 예수님은 늘 내 마음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의 편견과 판단 모두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집으로 오면서 주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일상 안에서 사람이나 사건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떠올려 주신다. 주님은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이심을.

-이정희 수녀(성심수녀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복음 속에서 기적을 목격합니다. 중풍병자가 병에서 낳음을 받는 장면이 우리 앞에 영화처럼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다른 병자들처럼 그리 쉽게 낳음을 받지 못합니다. 결과는 그가 일어나 그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저에게는 그 결과가 왠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기적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올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뉘인채로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십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눈에 중풍병자의 모습만 드러난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아픈 이와 그를 구하기 위해 함께 온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내내 가슴에 와 닿는 말씀으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복음의 내용에는 이 말씀에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과 그래서 그들과 입씨름을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어찌 사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하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서하는 것과 한 사람을 낳게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사람을 용서하는 권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중풍병자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의 침상을 들고 홀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중풍병자는 멋지게 자신에게 내려진 천형을 이겨내고 회복합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또 열광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기적도 사람들의 찬양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깊이 남겨집니다.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숨겨져 있는 참 기적을 느낍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중풍병자가 오는 순간 그를 데려온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의 기운입니다. 병에 걸린 이를 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그를 돕고자 하는 이들을 보시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던지신 것은 이미 그의 장애는 그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세상은 장애보다 죄인으로 내몰리고 버려지는 소외감이 더 큰 장벽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마저 버림을 받은 자로 내 몰리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들어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고맙고 행복한 장면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아픈 이들에게 다가가시며 나누신 손길과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그런 이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용기를 내라시며 이미 그가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중풍병자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받는다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함께 왔던 그가 사람들 사이에 홀로가는 모습이 그래서 저에겐 안쓰럽게만 보입니다. 기적이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엔 필요치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 기적의 내용은 모든 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 곧 정상이 되는 광경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풍병자의 치유의 신기함이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온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크게 보이십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시비를 걸던 그 순간, 하느님을 감동시킨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정성은 사람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들이 용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용기와 용서와 사랑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도 무너져 내림을 느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울리는 사랑을 합시다. 우리 서로 말입니다.

 -정호 신부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하고 명령하시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대에게

인생살이는 함께 가는 길입니다.
좋은 도반(道伴)이 있어 함께 인생길을 간다면 그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많이 배워 지식(知識)을 쌓고, 많이 벌어서 부(富)를 쌓고, 출세하여 권력(權力)을 누린다 해도 혼자라면 불행합니다. 지난해 12월 타계한 경북 봉화의 전우익(全遇翊)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만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향락을 누리고 즐긴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할 짓이지 사람이 할 짓은 아닙니다.
사람을 한자(漢字)로 人間이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사람 사이’라는 뜻이지요. 사람은 혼자서 주제파악을 하기는 어렵지만, 타인(他人)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를 파악합니다. 서로 위해 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인생길을 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이웃들이 있어서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이 하느님의 모독하는구나!’하며 욕하는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고통 받는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는 율법학자들입니다.

지금 당신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제 잘난 맛에 사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다면 당신은 불행합니다.
당신이 먼저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도 당신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게 됩니다.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마산교구

 

 


 

 † 나도 남의 죄를 사할 수 있다 †  

예수께서는 당신을 불신하고 떠나 달라고 청한 가다라 지방과 그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다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자기 동네로 오셨다. 곧바로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데려온다. 여섯 번째 기적이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중풍병자 치유기적사화(마르 2,1-12)를 옮겨 쓰면서 일체 부수적인 일화를 삭제하고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다.

요점은 곧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6절)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연과 마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인간의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으로 부각된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학자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이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현존(現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함께 베푸시는 예수를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로 여길 뿐이다.(3절)

구약성서에서는 아무도 이 땅에서의 죄 사함을 모른다. 죄 사함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에 속한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이다.”(예레 31,34) “네 죄악을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이 일을 나밖에 누가 하겠느냐?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이사 43,25) 이렇게 개인이든 단체든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새 계약의 종말론적 시기에 이루어질 또 다른 모양의 죄 사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만이 가지시는 죄 사함의 전권이 “야훼의 종”에로 이전(移轉)되는 것이다. 그것은 제2이사야에 잘 나타나 있다.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안다.”(53,11) 여기서 “나의 종”이란 “야훼의 종”을 말한다. 야훼의 종은 우선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는 속죄의 어린양으로서 신약의 예수를 지칭한다.(루가 1,77; 요한 1,30; 마태 1,21; 루가 2,29-32) 예수는 실제로 자신이 받은 온갖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죄악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한사람이 남의 죄를 대신 받으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받게 되는 법이다. 예수는 이러한 방법으로 종국에 맞이할 속죄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죄의 용서를 선취하여 이미 지상 공생활 중에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이 땅에서 죄 사함의 전권을 가진다. 이 전권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사랑이신 하느님 아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면서, 동시에 아들 스스로가 가지는 권한으로서 새 계약의 근본요소이자, 도래하는 하느님나라의 질서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제 이 땅위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제자들을 포함한 교회에 베풀어진다는 것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8-19)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한낱 인간인 우리 모두에게도 이웃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물론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내용에 따라 기도할 줄 알고, 이를 실천하는 자에게 한해서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가 11,2-4; 마태 6,7-15).........◆

-박상대 신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중풍병자에게서 보는 죄 중의 삶과 죄 사함의 삶 †

어느 칼럼에서 읽은 글입니다. 오늘복음의 '죄의 용서'와 관련하여 묵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려봅니다. 서울에 사는 어느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춤바람이 나서 가출을 했습니다. 나가서 몇날 몇밤을 정신없이 놀다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어느날 깨닫고서야 후회를 합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정말로 더 험한 꼴을 볼 것 같아, 남편은 모든 것을 이해와 용서로서 포용하고 아내를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 남편은 죄지은 아내를 가까운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교회에 가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당신도 하느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라는 의도에서였습니다. 물론 남편도 같이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 날이었습니다.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는데 마침 강론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 하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으니 죄짓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더 심한 충격과 함께 죄 지음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은 이제 무슨 벌을 받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다음 주일날도 교회에 나갔는데... 강론 내용은 달랐지만 요지는 같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달, 세 달을 교회에 나갔는데.... 이 신부님은 매 강론때마다 꼭 한 두 번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그런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 여인은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더랍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큰 죄인이 되어버렸을까?”그러면서 가만히 생각을 돌이켜 보니... 그때 카바레에서 자기를 꼬시던 제비족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의 다리가 너무 예쁘게 잘 빠졌네요!” 이 말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의 이 두 다리가 웬수입니다. 그 날부터 다리를 주먹으로 치면서 저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놈의 다리, 이 잘라버릴 다리, 이 못된 놈의 다리, 이 빌어먹을 다리...” 그러면서 자기 다리를 두드립니다.

이렇게 두 주일간이나 다리를 저주하면서 두드렸더니.... 어느 날 새벽에 다리가 이상해졌습니다. 하반신 마비가 온 것입니다. 전혀 걸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마비된 다리를 고쳐보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데 전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약도, 어떤 병원도 그녀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이것은 영적인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니던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은 율법주의적인 강론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대해서 중점으로 하여 강론을 하셨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어떤 죄라도 다 용서하십니다!” 그런 강론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자꾸 들으면서 이 여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구나, 나 같은 사람도 다 용서하시는구나, 나도 용서받을 수 있구나!” 이런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주정도 다니는데... 이 여인의 하반신 마비가 풀렸습니다. 다리가 멀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 사함과 함께 육체의 질병도 다 치유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치유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비슷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중풍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 중풍병자의 죄가 무슨 죄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짐작은 해볼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업급하지 않고 있으나, 개역성경에서는 예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소자야!” 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오늘의 중풍병자는 젊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그지요, 우리같이 나이가 많이 들어 세상살이에서 찌든 때가 많이 묻어 죄를 지었다면 몰라도, 젊은이가 얼마를 살았다고 그린 험한 병을 앓는 죄를 지었는지...여하튼 그 젊은이가 어떤 죄를 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은 죄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2절 중간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이마 예수님 앞에서 이 중풍병자는 무척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죄의식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던 같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벌을 받으면 어쩌나....”“누가 알게 되면 어쩌나....” 그는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문제를 아시고, 그가 당한 괴로움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젊은 중풍환자를 보시자 마자.... 그의 상태를 알아볼 만큼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이 젊은 환자는 그동안 자신의 죄를 바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 죄를 계속 가지고 있었고, 죄책감과 두려움, 양심이 자기에게 호소하는 그 괴로움과 불안으로 인하여...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는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고생을 하다가 결국에는 죄에 관한 심리적 문제로 중풍병이란 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에 중풍병은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병의 상태가 상당히 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침상에 누운 체로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아주 심한 상태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마비가 온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마비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병자, 이런 죄인에게도 희망의 날은 왔습니다. 예수님이 희망인 것입니다. 그런 희망의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신 것입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믿음이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친구 중에 믿음의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기도해주고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신앙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모름지기 그리스도 신자는 친구를 사귀어도 믿음의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합니다. 화투하는 친구, 놀음하는 친구, 이상한 춤방에 가는 친구, 잡스럽게 연애질하는 친구... 이런 세상적인 친구들보다... 신앙이 좋고 믿음이 좋은 그런 친구들이 많아야 합니다.

다행이 이 젊은 병자에겐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그 병자 본인과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아 좋은 친구들!!!!
죄인인 젊은 병자는 믿음의 친구들에 의해 오랫동안 괴롭히던 죄 문제를 한순간에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깨닫을 수 있습니다.

1. 친구들의 믿음

이 친구들은 그 당시에는 못 고치는 중풍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데리고 오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을 것입니다. 가족들도 말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들보다 환자의 가족들이 먼저 이 사람을 데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환자의 가족들 마저 포기한 상태에서... 이들은 믿음을 가지고 친구를 데려온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2. 죄인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온 믿음

친구들이 병자를 데려올 때 이렇게 말하면서 데려왔지 않겠어요?
“너 예수님 만나야 산다”
“너 예수님 만나야 죄 용서 받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어!”
이 중풍을 앓는 친구가 “나는 가고 싶어도... 이제는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어찌할 수 없네” 그러면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침상 채 들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친구가 예수 믿겠다는데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느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수고한 것입니다. 역시 이런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의 친구들이 교회 안 갈려고 할 때.... 억지로라도 끌고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우리를 끌고 술집으로, 도박장으로, 노래방으로, 경기장으로, 고스톱 치자고 끌고 갈 수 있는 친구는 많지만... 나를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몇이나 있습니까?
믿는다고는 하지만 신앙의 체험도 없고, '너도 하느님을 만나야 산다'고 말 한마디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 좋은 친구들을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 특히 젊은 교우들은 신앙의 동지... 믿음의 친구들을 많이 두시기 바랍니다.

3. 일반적인 시각을 깨뜨림

당시 사회는 중한 병들은 하느님이 주신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병은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느님께 나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당시의 구약적(율법적) 고정관념이나 두려운 생각을 깨뜨려버렸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병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만나야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든지... 하느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혼자서 꿍꿍거리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4. 병자의 믿음

친구들이 아무리 병자에게 예수님 만나야 한다고 했어도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했거나 요청을 했습니다. 나를 예수님께 데려가 달라고.... 친구들의 믿음에는 이 병자의 믿음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5. 용서를 해주시는 주님

그런데 이렇게 나오자마자 예수님은 단번에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이렇게 용서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나왔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으로.... 주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복음에는 이 사람이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께 나오는 순간 이미 이 사람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이 병자를 보면서 물어보거나 따지지 아니하시고 단번에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할렐루야!....

6. 이유를 묻지 않으시는 주님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주셨습니다. 무조건 품어주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지요.... 사람들은 흔히 그럽니다. “어쩌다 그랬어?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어, 왜 그랬어?”... “그러게 빨리 회개하지 이렇게 미련하게 버티고 있어? 바보같이....”“이번에 용서해 주면 다음에는 안 하는 거야!, 약속하지?”...등 수없는 말로 다짐을 받습니다...맞지요, 그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냥 병든 몸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따지고 이유를 물으신다면 누가 그 앞에 서겠습니까? 누가 감히 예수님 앞에 두려워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용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묻지 않아도 이미 그 죄를 다 알고 계시고, 죄지은 사람의 두려움 마음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타지역에 가서 그 많은 재산을 허랑방탕으로 모두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그 많던 친구들도 다 떨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후회를 하면서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먹을 것이 많은가.... 차라리 나를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왜 재산을 탕진했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였을 때, 날마다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열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습니다(루가 15,20-22).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탕자는 바로 우리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넓은 사랑의 가슴으로 아들을 품에 안으며 반겨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것 하나만으로... 주님은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며 받아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조금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7절에 보면,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 젊은이는 그 말씀을 믿고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죄 용서를 받으니 그의 중풍병까지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병자가 먼저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하고... 그때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먼저 선언해 버렸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죄로 인한 고통, 중풍병으로 고생한 이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참을 수 없는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한참 꿈을 펼칠 나이에... 이 젊은이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서 빨리 고쳐줘서 새 삶을 살게 하고 싶은 주님의 마음이 보여집니다.

7. 무슨 문제든지 주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죄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민, 두려움, 질병으로 괴로워 할 때... 주님께서는 어서 빨리 우리를 치료해 주기 원하십니다. 어서 속히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은 더 갈급한 심정으로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빨리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한 유명한 정신과 진료실에 한 남자가 우울증을 호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동안... 같이 대화를 나눈 후 에 하나의 처방으로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아주 인기 있는 코메디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일에만 몰두하거나 일에 중독되지 마시고... 그리발디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는데 그런 재미있는 연극 속에서 한 번 빠져 보시면서 삶의 리듬을 좀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환자는 매우 무표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병원의 진료실을 빠져 내려가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독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그리발디가 바로 저입니다. 그 그리발디가 바로 나 자신인걸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하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에는 세상의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질병이 너무나 많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로 특별한 의사 한 분을 보내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 11,28절에서 주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숨어있는 죄인으로 남아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말해 죄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빠지는 죄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사람도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 받을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육신의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세계가 말할 수 없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
예수님은 오늘도 바로 이런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두십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 즉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고 해결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 9,12-13절에서 주님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오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만 나아오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1,28). 따라서 어떤 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오면 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일점일확도 틀림이 없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디 아상 죄중에서 고뇌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은 여러분에게 고백성사라는 하느님의 죄사함의 길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은총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아멘)............◆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