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마태오 9,13)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Go and learn the meaning of the word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마태오는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로마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다. 이제 마태오는 축복받은 사람의 대열에 당당히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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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따르면, 사라는 백이십칠 년을 살았습니다. 이 127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았다는 표현입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바라던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질병이나 전쟁으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죽어 갔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에게 전쟁은 필수적입니다. 우물을 뺏고 초원을 차지하려는 싸움은 늘 있어 왔습니다. 가축과 함께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물과 풀밭은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래 산 사라의 존재는 이후 이스라엘 여인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서둘러 이사악을 혼인시키려 듭니다. 사라 역할을 해야 할 며느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처녀 가운데서 구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자신의 심복에게 맡깁니다. 그는 집안의 재산을 맡아보던 늙은 하인이었는데, 그에게 맹세를 시키는 부분이 눈길을 끕니다. “네 손을 내 샅에 넣어라.”는 장면입니다. 샅은 남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는 성경의 표현입니다. 옛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정확한 행동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새벽을 열며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음식을 먹었지요. 그러나 형은 하나의 그릇에 먹고, 동생은 두 개의 그릇에 먹었습니다. 두 개의 그릇에 먹는 동생은 그의 음식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았어요. 한 그릇에는 쓴 음식, 다른 한 그릇에는 단 음식을. 반면 한 개의 그릇에 먹은 형은 단 음식과 쓴 음식을 섞어 먹어야 했지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생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반면에 형은 건강해졌습니다. 마침내 동생은 심각한 병을 앓았고, 죽음을 앞두게 되었어요. 동생은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형은 건강하고 나는 왜 이렇게 아픈거지?”
형이 말했습니다.
“너는 두 그릇으로 음식을 먹었지. 너는 오직 음식의 단맛을 제일로 여겼던 거야. 음식의 영양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 그러나 나는 맛보다도 영양가를 소중히 했던 거야. 내가 쓴 음식과 단 음식을 한곳에 섞어 먹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지. 어떤 맛의 음식이라도 나는 버리지 않았다. 나는 모든 음식을 영양가로서 섭취했던 거야. 그랬더니 그 음식들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동생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그릇에 담긴 쓴 음식과 단 음식을 한 그릇에 섞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동생은 잃었던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단 음식이 내 몸에도 좋을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골고루 섭취했을 때 더욱 더 몸에 좋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삶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은 좋은 사람들만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 있을까요? 때로는 나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며, 이런 이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과정 안에서 내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어가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합니다. 당시에는 부정한 죄인들과 함께 하는 사람 역시 부정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정한 죄인들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지은 죄를……. 나의 죄를 보고서 “너의 죄를 보니 나는 너와 도저히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주님께서 나를 내치신다면 어떨까요? 이 사실은 도저히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죄인인 저 사람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들……. 얼마나 이기적인가요?
이 세상은 죄인과 의인. 이렇게 둘로 정확히 나누어서 만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음식을 나누지 않고 섭취해야 건강해질 수 있는 것처럼, 죄인과 의인이 함께 하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사는 것이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건강하십니까?
편식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에는 늘 손님이 묵어가곤 했다. 그러나 가까운 친척이나 절친한 사람이 오면 안채에 들어와 함께 식사를 했다. 안채에서 같은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서로 허물이 없는 사이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세리들은 관세를 거둬들이느라 이방인들과 접촉을 하였으며 터무니없이 세금을 많이 받아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평판이 나쁜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기준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마태오는 세리였으므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고 율법에서 소외된 자였으며 그래서 외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뿐만 아니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식탁 공동체에 초대하셨다. 식탁 공동체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수용되었다는 의미이다. 유다인들에게 식사는 중요하게 생각되었으며 식탁은 성스러운 자리였다. 유다인들은 불결한 자와 함께 식사를 하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더러운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마태오와 죄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나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친밀한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마태오와 죄인들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신앙의 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마태오와 죄인들의 죄를 따져 묻지 않으신다. 이제 용서의 체험을 한 마태오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공동체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고 이들은 전존재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또 그 공동체를 위하여 투신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던 큰 회심의 체험이 언제 있었던가?
-이정희 수녀(성심수녀회)-
“나를 따라라.”
<죄 중에 있을 때의 느낌>
후배 수사님들의 여름 세미나 겸 회의 차 바닷가에 위치한 캠프장에 다녀왔습니다. 어디 가나 염불은 뒷전이고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지요. 저 역시 틈틈이 ‘손맛’ 좀 보러 갯바위로 나갔었는데, 오랜만에 풍성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낚싯대 끝이 휘청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강력한 어신이 왔었는데, 겨우 끌어올려보니 족히 2kg는 나갈 정도의 시커먼 돌 우럭 한 마리가 걸려있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솥뚜껑만한 ‘눈먼’ 광어까지 4마리나 협조를 해줘서 정말 신바람이 났습니다.
열심히 낚시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넓은 바다로 힘차게 릴낚시를 던지는 그 활기찬 얼굴로, 그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큰 기대를 안고 주님께로,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번에도 돌아오면서 어김없이 이런 반성이 되더군요. 흥미진진한 빅 매치 축구시합이라면 꼭두새벽에라도 일어나면서, ‘손맛’ 좀 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주님과의 만남, 그분 현존 체험을 위해서는 얼마나 투자하는가, 하는 반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짜릿한 손맛, 갯바위 위에서 맛본 그 쫀득쫀득한 우럭 회 맛이 아직도 생생하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심각한 죄 중에 있을 때, 아무리 기를 써도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때, 그래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의 느낌은 어떠합니까?
맑고 따뜻한 온탕 속에 온 몸을 담그고 있는 포근한 느낌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투명하고 시원한 냉탕 속에 들어가 있는 서늘한 느낌도 아니겠지요. 아마도 시궁창 냄새가 나는 미지근한 구정물 속에 쳐 박혀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맞이하는 하루 역시 팍팍할 것입니다. 피곤할 것입니다. 짜증날 것입니다. 아무리 날씨가 청명해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발걸음도 무겁겠지요. 매일이 기쁨과 보람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매사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심각한 영혼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 마태오가 그랬습니다. 그가 택한 직업상 어쩔 수 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 전체, 그의 삶 자체가 죄였습니다. 그는 눈만 뜨면 하느님께, 동족들에게, 가족들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밥 먹듯이 습관처럼 죄를 지으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루 빨리 이런 죄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지만 마음뿐이었습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생각으로는 수백 번도 더 죄의 수렁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몸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런 마태오에게 한 줄기 강렬한 구원의 빛이 다가옵니다. 생명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오늘도 세관 앞에 하릴없이 앉아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마태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돌파구는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마태오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전달됩니다.
“나를 따라라.”
다행히 자신의 영적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있었던 마태오였습니다. 죄로 인해 비참해진 오늘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마태오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마태오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인해 마태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필설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비관적이었지만,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힘을 얻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죄의 사슬을 끊고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금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시다시피 너무도 연약하니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멀고도 험한 우리 각자의 성소여정, 다시금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길 청합니다.
-양승국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람을 대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은 순간 순간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완전하심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하느님이 당신을 닮은 완전한 사람만을 좋아하신다 생각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는 회개의 생활은 우리에게 분명 중요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닮도록 초대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우리는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사랑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처음 만나는 우리의 모습마저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하느님을 알기 전 사람들의 모습은 하느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온전하지 못함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사라질리가 없지만 하느님을 모른채 세상을 사는 사람은 세상의 법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회개로 돌아선 사람이 아닌 죄인 상태 그대로 머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마태오입니다. 세리였던 그가 세관 앞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삶을 정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주님 곁에 모여듭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누가 죄인인지 누가 의인인지 구분도 안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 속의 하느님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런 혼란함은 어찌보면 예수님의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생각에 우리를 동참시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불쌍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틀로 불평등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의 생각에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을 만나고 알게 되면서 우리가 그분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될 때 모든 죄를 우리의 회개보다 당신 사랑 안에서 씻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분을 만났고, 그 죄를 다 정리하기 전에 그 다짐만으로도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듯 모든 이가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세리가 세관 앞에 앉아 있습니다. 언젠가 그 세리가 바로 나였음을 잊지 맙시다. 그러니 이제 길에서 마주치는 세리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지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가 하느님 곁에 있을 때 우리의 입과 맘이 막히지 않게 말입니다.
-정호신부-
죄인들을 위해서, 죄인들 가운데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제 1독서 : 아모 8,4-6.9-12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복 음 : 마태 9,9-13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오늘 복음은 마치 법정에서 죄인을 놓고 벌이는 변호사와 검사의 한 판의 대결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범인은 세리 마태오를 말하는데 마태오를 사이에 두고, 그런 죄인은 영구히 추방하여 선한 사람들이 물들지 않도록 격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검사격인 율법 학자들과,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변론하는 예수님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요.
오늘 죄인으로 등장하는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세금을 거두는 사람으로 예수님 시대에 가장 부정한 사람의 대명사로 불렸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리를 아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게 여기고 손가락질을 하며 부정타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단지 세금을 걷기만 했다면 그렇게까지 미움을 받지는 않았을 터인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리는 식민 지배하의 로마의 앞잡이로서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거둘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물을 축재하기 위해서 훨씬 더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동족을 괴롭혔고, 협조하지 않으면 로마 군인들을 불러서 칼과 창으로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사회의 지탄의 대상자가 되어 오직 돈만을 믿으며 살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이 세리 중의 한 사람인 마태오라는 사람이 이제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졌는가 봅니다. 새로운 길을 가고 싶어하는 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부르시지요.
?’나를 따라라.?“(마태9,9)
세리 마태오는 얼른 따라나섭니다. 그 동안의 삶에서 얼마나 떠나고 싶었으면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겠습니까? 마태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마태9,10)
이렇게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거두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시지요.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어울리는 예수님을 율법 학자들은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이요 악인인 세리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따져 묻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
뒤에서 들으라는 듯이 제자들에게 따져 묻는 율법 학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이렇게 마태오를 변론해 주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위선적인 사회가 악인으로 몰아세우는 사람들을 거두고 희망을 주는데 있음을 드러내시지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약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선인과 악인으로 이웃을 나누는 사회 통념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지닌 사람은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에게 정이 더 가게 되어 있지요.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들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하느님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실지는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부모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어떤 부모에게 성한 자식과 장애가 있는 자식이 있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부모의 마음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부모에게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장애가 있는 자식에게로 기울 것입니다. 또 하는 대로 성공하는 자식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는 것마다 실망을 안겨주는 자식이 있다고 했을 때 부모의 마음이 어디로 더 가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지요.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역시 그런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렇게 생각합니다.
??열심히 미사에 잘 나오고, 신앙 생활 잘 하고, 나쁜 짓 안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준비된 나?‘에서 ??실천하는 나?‘로 결단을 내릴 것을 예수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실천을 통해서 신앙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회개하는 사람의 잘못을 감싸주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기회와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길을 제시했던 세리 마태오는 후에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되지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용서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탕한 삶에 젖어 살던 한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방탕한 삶을 청산했습니다. 청년은 가로등불을 켜고 끄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됐지요. 하루는 주정뱅이 친구들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예수 믿는 재미가 어떤가??“
청년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가로등불을 끌 때마다 뒤를 돌아본다네. 그것은 내 과거의 어둠이었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등불의 긴 행렬을 보며 위안을 받지. 그것은 내 미래의 모습일세.?“
주정뱅이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이 멍청한 친구야. 그러면 마지막 등불이 꺼지고 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
청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마지막 등불이 꺼지면 새벽이 온다네. 아침이 오면 등불은 필요 없다네.?“
그렇지요. 우리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신자라면 끊임없이 자기의 잘못을 정화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은 세리 마태오를 끝없이 단죄하고 죄인으로 몰아 부치며 그를 감싸는 예수님까지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뉘우치는 마태오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시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지요.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산 제물이요,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잡아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 그리고 이웃과 희망을 나누는 것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솔한 언행으로 자칫 오늘 율법학자들처럼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지요.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불우한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큰 제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
“Mens sana in corpore sano!”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병든 자의 아픔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라틴어 속담이다. 육체가 약해지면 영혼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 시대에 한센병(나병) 등 모든 종류의 피부병 환자들을 물론이고 갖가지 육체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사제의 선언에 의해 스스로 ‘부정(不淨)한 사람’이라고 외쳐야 하며, 병이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진지 밖에 자리를 잡고 따로 살아야 하기는 했다.(레위 13,46)
그러나 율법이 그를 죄인(罪人)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병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격리시키고 소외시켰는가? 바로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스스로의 죄를 씻기 위해 하느님께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던 사제들이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물론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람이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죄인은 스스로에 의해 고백되거나 하느님에 의해서만 선언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보다 가급적 죄를 묻지 않으시며, 묻더라도 용서하기 위해 물으시는 분이시다. 어제 복음에서 중풍병자의 육체적인 병보다 정신적인 병을 더 걱정하신 예수께서 그의 병을 치유하기에 앞서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신 점만 보아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사고(思考)를 바로잡아 주신다.
오늘 복음을 보자. 전직이 세리였던 마태오가 제자로 불림을 받는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그룹에 넣고 있다. 그러면서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목한 것이다.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 안에서 이러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피력한다. 오늘 복음도 마르코가 전하는 세리의 소명사화(마르 2,14-17)를 옮겨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마태오는 자신의 편집의도에 집중한다.
마태오의 편집 의도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다. 그래서 세관원의 소명사화에서 마르코가 말하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결국 마태오는 소명사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마르코가 정작 예수의 제자로 불림 받은 알패오의 아들 세관원 레위의 이름을(마르 2,14) 12제자의 명단에는 마태오(마르 3,18)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감안하여 합리적으로 고쳤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그냥 따라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제자로 삼은(마태 4,19) 뒤에 베드로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자 일어나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는 일(마태 8,14-15)을 보더라도 추종은 곧 친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나선 마태오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동료 세리들과 많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공동체를 주관하시면서 친교(親交)를 선물로 주신다.(10절)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보고 못마땅해 한다.(11절)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네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흑백(黑白) 친교 불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흑백의 논리를 ‘의사와 병자’(12절), ‘제사와 자선’(호세 6,6 참조), ‘죄인과 구원’(13절)의 원리로 보시면서 이 둘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상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박상대 마르코 신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다 †
우리는 산상수훈 이후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에게 무한한 용서와 자선을 주시는 내용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제복음의 중풍병자에 대한 용서와 자비에 이어 오늘복음에서도 용서와 자선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우리 인류 모두가 용서와 자선의 대상입니다. 다시말하면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열손가락 모두가 다 소중하고 유용하고 이쁘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 민담에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동물학교에서 소풍가는 날, 엄마 토끼는 자기 아이가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알고 부리나케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로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거의 학교에 다 왔는데 뒤에서 다람쥐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토끼에게 말합니다. "부탁이 있는데요 제 자식이 오늘 도시락을 잊고 갔지 뭐예요, 제 아이의 도시락도 좀 갖다 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댁의 아이를 어떻게 찾지요. 내가 얼굴을 모르는데" 그러나 다람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학교에서 제일 잘 생긴 아이를 찾으면 되니까요. 부탁합니다."
토끼는 다람쥐의 도시락을 받아 학교에 가서, 자기 아이 도시락을 전해주고 다음 다람쥐 아이를 찾아보았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람쥐에게 도시락을 되돌려 주면서 말하길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댁의 아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아이보다 더 잘생긴 아이는 그 학교에 없었거든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인 세리도 세상에서는 미운털같은 왕따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세리라는 직업이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침략자인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리는 용서받기 어려운 미운 털이 박힌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 비친 그 세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리를 제3자적인 이웃으로 보지 않고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모의 마음으로 죄인이었던 세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며칠전 전방부대에서 젊은 군인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많은 동료군인들을 사살했습니다. 세상은 그 청년을 죄인으로 볼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청년과 그 가족들은 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 군인의 부모는 비록 죄인이지만 자기 자식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남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부모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마음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살인자의 부모는 지금 그 자식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등장인물인 세리도 당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미움의 대상인지는 모르지만, 부모의 마음에서 보는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자비와 사랑으로 마음으로 거두어 들이십니다. 즉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 인류에게 전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보고 감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복음에서 혼자만 감동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허물 많은 죄인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불러주시는 주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용기를 내어 주님의 자선을 본 받아 실천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돈몇푼 들고와서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봉헌한다고 올바른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용서와 자비의 마음으로 이웃에 가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신자라고......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일들 중의 하나는 제자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마태 9,9-13은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를 뽑은 뒤에 그의 집에서 식사를 나눈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따온 마르 2,14-17과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점이 눈에 띕니다. 우선 세리의 이름(마태오)을 밝혀놓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13절)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마르코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일을 대신 해 주는 자들이었으니 비록 같은 민족이라 해도 다른 유다인들의 미움을 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법칙에 따르면, 점잖은 유다인이라면 그들과 식사는 커녕 대면도 안 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의 집에 들러 밥상을 받았음은 물론,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까지 몰려들어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11절) 어떤 연유로 바리사이들이 세리의 집에까지 왔는지는 모르나, 그들의 지적은 바리사이의 기준으로 볼 때 정확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름지기 종교 지도자였으니 의인임이 분명했고, 세리는 죄인이었으니 한 상에 둘러앉을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는 '의사는 건장한 자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위와 같이 '상황'으로 시작해 '말씀'으로 끝나는 이야기 구조를 두고 '상황어'라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의 문학양식으로, 어떤 말씀이 갖는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상황과 묶어 주는 방법입니다. 만일 앞 뒤 상황 없이 예수님이 그저 '의사는 건장한 자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라고 했다면, 독자는 틀림없이 이 말씀의 뜻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과 식사 - 바리사이의 도전'이라는 상황을 정확히 지정해 줌으로써 말씀의 뜻이 훨씬 좁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호세 6,3-6은 야훼가 제사보다는 정의를 바라는 분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되면서 제사는 보다 화려해지고 규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만 그럴 듯할 뿐 하느님의 진정한 뜻인 사랑은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6절). 로마 4,18-25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이어받아,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장차 구원을 받으리라는 바오로의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구원을 받지, 결코 유다인이라는 민족적인 기준이 하느님의 구원을 좌지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언행에서 우리는 언제나 혁명적인 측면을 발견합니다. 으례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던 일들을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창조했으며, 죄인으로 분류되어 지레 겁먹고 있는 이들에게도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차이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천대받고 멸시받는 죄인들의 권리를 찾아 주는 일이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의사는 병자에게 특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복음의 마태오를 변화시킨 성찬과 같은 것을 매일 주님께서 마련하신 거룩한 집에서 미사를 동해서 성찬에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찬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몇십만원짜리 식사를 하는 것은 흡족한 성찬이라고 생각하면서 흥분해 이웃에게 자랑하려고 부산을 떨지만, 그보다 더 가치있는 예수님의 몸을 먹은(영한) 성찬 식사는 이웃에게 자랑하지도 못합니다. 아니 아예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세속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목말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인정받는 가치를 과소 평가함으로써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서 마태오를 비롯한 죄인들은 예수님과의 성찬 한번에 모두 감동하고 완전히 변화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께 인정받고 사는 삶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때 우리의 삶도 마태오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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