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8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하고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마태오 10,19-20)
When they hand you over, do not worry about
how you are to speak or what you are to say.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신다. 주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라 하셨다. 고통과 시련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견디어 낸다면 그는 신심 깊은 사람으로서 예언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성령께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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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김제준 이냐시오였고, 어머니는 고 우르술라였습니다. 뛰어난 재주와 강인한 성격, 신실한 믿음을 지닌 소년 김대건은 16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가서 사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공부를 마친 그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인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김 신부는 곧바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10월 12일 충청도 나바위 인근 바닷가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는 숨어 다니며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듬해 6월 5일, 김대건 신부는 서해를 통한 뱃길을 알아보려고 백령도 부근으로 나갔다가 관헌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문초를 받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한강 백사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습니다.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79명의 순교자를 복자의 반열에 올렸고,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한국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1984년 5월 6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들게 하였습니다.
"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명과 함께 1925년 7월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한국 천주교회는 해방 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46년 김 신부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고, 그 축일을 그의 시복일인 7월5일로 정했다. 올해는 김대건 신부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된 지 60돌이 되는 해이다.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생애 중 '체포부터 순교까지'의 과정을 구성해 보았다.]
1846년 6월5일(음력 5월12일)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 등산나루. 밤새 대지를 탐한 해무가 채 증발하지도 않은 이른 아침. 대지의 나른함을 깨우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포구에 울려 퍼졌다. 나루 옆 주막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맨발로 뛰쳐나와 보니 말쑥한 양반 차림의 한 청년과 순라 포졸들이 때아닌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포졸들은 "조선 해안에서 어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중국 어선들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징발하겠다"며 위협했고, 청년은 "한양에서 순위도까지 몇차례 왕래했지만 이런 법은 없었다"며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황금어장인 백령도 인근에는 중국 어선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포졸들은 예상보다 선주의 저항이 거세자 호패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불심검문이다. 마침 호패를 차지 않았던 청년이 불응하자 포졸들은 "행색이 조선 사람이 아니라 중국놈 닮았다"며 청년과 뱃사람들을 포박해 등산 진영으로 끌고 갔다. 이 청년이 바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다.
김 신부가 서울에서 순위도 등산나루까지 배를 타고 온 이유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지시로 서양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해도'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5월12일 선주 임성룡의 배를 타고 마포에서 강화, 연평도, 장연 터진목을 거쳐 등산나루까지 오면서 해도를 그렸다. 또 마합, 목동 2곳에선 중국 배를 만나 선원들에게 상해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등산 첨사 정기호가 진영에 끌려온 김 신부 일행을 심문하는데 그의 행장에서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 소책자 1권이 나왔다. 등산 첨사는 이들이 천주교도임을 바로 알아채고 힐문하자, 청년은 "중국 광동성 오문현(지금의 마카오) 출신 '김대건'으로 25살이며 천주교를 봉양하고 있으며, 1844년(갑진년)11월에 압록강을 건너와 서울에 기거하다 올해 4월18일에 황해도 산천을 유람하려고 한강 마포에서 임성룡의 배를 타고 함께 이 곳에 왔다"고 진술했다.
김 신부 일행은 닷새 후 6월10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 신부 일행이 압송돼 오자 곧바로 의금부에 보고했고, 의금부는 다시 국왕에게 이를 알렸다.
당시 국왕인 헌종은 13일 이 보고를 받고 의금부에 '김대건'의 행적을 낱낱이 밝힐 것을 지시했고, 국방부격인 비변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도록 명했다.
같은 날, 해주 감영에선 황해 감사가 직접 김 신부 일행을 문초하고 추가로 임성룡의 아버지 임군집(요셉, 임치백이라고도 함)과 김중수를 체포했다. 이날 김 신부는 네 차례, 임성룡(23)과 사공 엄수(44)는 세 차례 문초를 받았다. 김 신부는 이 날 황해 감사에게 "자신은 '김대건'이 아니라 '우대건'"이라며 "우씨는 조선의 희성이고, 김씨는 흔해 김가로 속였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김 신부 일행은 포도청 군관 6명과 군사 4명의 특별 호위 속에 18일 해주에서 출발, 칼과 수갑을 찬 채 쉬지않고 걸어서 3일만에 서울에 당도, 포도청에 투옥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대건 일행이 압송되는 동안 김 신부가 중국 배에 부탁한 편지를 집요하게 찾아내 조정에 보냈다. 김 신부가 쓴 편지에는 여러 장의 조선 지도가 들어 있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김 신부에 대한 문초는 6월20일부터 7월19일까지 포도청에서 도합 6차례 진행됐고, 40회의 진술이 있었다. 김 신부는 심문 첫 날 여섯 번째 진술에서 비로소 자신이 중국인 우대건이 아니라 '용인 태생' 김대건이라고 밝혔다. 김 신부의 이 '용인 태생' 진술 때문에 김 신부의 고향이 '솔뫼'가 아니라 '용인'이라고 조심스레 주장하는 학자들이 최근 간간히 등장하고 있다.
김 신부와 함께 압송된 선주와 사공은 문초를 이기지 못하고 이의창(베난시오)ㆍ이재용(이재의 토마스)ㆍ이기원(이신규 마티아)ㆍ현석문(가롤로) 등을 밀고했다.
영의정 권돈인은 김 신부 신원이 모두 밝혀지자 9월15일 어전회의에서 헌종에게 김대건을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사형에 처할 것을 간청했다. 함께 있던 우의정 박회수, 예조 판서 조병현, 병조 판서 김좌근, 좌참찬 김흥근, 수원 유수 이약우, 지돈녕(왕족 재판관) 이헌구 등도 영의정을 동조했다. 이에 헌종은 "김대건의 군문효수형을 즉각 시행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복음 선교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신부는 옥중 죄인들뿐 아니라 좌포도청 포장 이응식에게까지 천주교 교리와 복음을 전했다.
1846년 9월16일 아침. 포도청 감옥에 갇혀있던 김 신부는 지금의 서울 인의동에 있는 어영청으로 압송됐다. 어영청은 1개 중대를 총으로 무장하게 하고, 나무채 2개로 만든 가마 위에 등 뒤로 손을 포박한 김대건 신부를 태워 10여리 떨어진 처형지 새남터로 갔다.
군인들은 새남터에 도착하자 하늘을 향해 일제 사격을 하고 나팔을 불었다. 시끌벅적하던 처형장에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원을 만든 후 그 안으로 김 신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관장이 일어서서 "죄인 김대건은 외국인과 교섭했기에 사형에 처한다"며 선고문을 재빨리 읽었다.
관장의 낭독이 끝나자 김 신부는 큰 소리로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라며 복음선포로 유언을 남겼다.
군사들은 김 신부의 속바지까지 벗기고 양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회가루를 뿌렸다. 그런 다음 군사 2명이 김 신부의 겨드랑에 몽둥이를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원 둘레로 3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군사들은 김 신부에게 갖은 희롱과 모욕을 주었다.
희롱이 끝나자 김 신부를 매고 돌았던 군사 2명은 그의 무릎을 꿇리고 두 귀에 화살을 뚫어 꽂았다. 그런 다음 김 신부의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모래사장에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김 신부는 이런 와중에도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하면 되었소? 마음대로 칠 수 있겠소?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소"라고 말했다.
군사 12명이 칼을 들고 서로 싸움을 하듯 김 신부 주위를 빙빙 돌며 검술시범을 보이더니 차례로 김 신부의 목을 쳤다. 김 신부의 머리는 8번째 칼을 맞고서야 떨어졌다. 군사 한명이 김 신부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관장에게 보여주니, 관장은 형집행을 조정에 보고하려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는 만 25살에 순교했다.
▶ 평화신문 2006.07.02 리길재 기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사상
김대건 신부님의 서간을 보면 하느님을 “임자”로 표현하며, 임자사상을 볼 수 있다.
-조욱현신부-
1. 임자사상
이것은 창조주를 임자라 하였고 이 임자에 대하여 孝愛(효애)를 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
“세상에 태어나 그 임자를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한 번 알아본 후 그를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
김대건 신부님은 孝愛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며, 끊임없이 하느님 임자에 대한 효애를 가르치셨다.
신부님은 교회의 장 상들에게, 하느님을 대리하는 장상들에게 죽기까지 순명하셨고,
부모에게도 효성을 드렸다.
그래 서 주교님과 친구에게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하시고 순교의 길을 가셨다.
또한 나라에는 종교의 자유 를 허락할 것과 외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라고 촉구하심으로써
선각자의 구실도 하셨다.
임자사 상은 박해시대의 大君大父思想, 愛主萬有至上的 (대군대부사상, 애주만유지상적) 신심을
대표하며 孝愛 (효애)를 다하라고 강조하셨다.
2. 우리 자신의 임자를 제대로 알고 공경하자
1.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한 하느님의 속 성은 사랑이시며,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사랑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이제 사랑을 통해 서만이 자신의 새로운 모습, 즉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고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임자를 잘 알고 제대로 공경하는 것은 창조주의 뜻을 따라 새로운 창조 사업을 하는 것으로써
임자의 말씀을 잘 들으며, 그 말씀 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효도를 드린다는 것은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으나,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자식들이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2. 영원으로 부터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예비자 교리 때에 입교의 동기를 물어보면,
1) 종교를 갖는 것 이 갖지 않는 것보다 낳을 것 같고 무엇이나 하나는 믿어야 하겠기에;
2)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3) 집안에 우환이 많아서 이것 좀 고쳐보려고;
4) 신자들의 봉사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자신도 그 런 삶으로(상가 돌봄, 환자 방문,
어려운 사람 돌봄 등) 기쁨을 갖기 위하여;
5) 신앙을 갖고 착하 게 살며, 보람 있는 인생을 살려고 입교했다는 동기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동기는 이제 참된 신앙 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인간의 근본이 무엇이며,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신앙생활을 통해 알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의 응답만 남아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예정해 놓으시고 인간 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하며 하느님 당신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 가족에서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도록 항상 당신께 돌아오기를,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여러 가 지 모습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3. 임자께서는 외아들을 주셨다.
인간이 합당한 응 답을 드리지 못하여 당신의 뜻을 거스르고 범한 죄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 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신 분이시다.
여기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구원을 주신 분이시다.
여기에 당신의 외아 들을 제물로 봉헌토록 하신 분이시다.
성자를 통해 하느님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 모든 것이 사랑임을,
사랑으로 완성되어 나가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사랑의 극치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진리와 신앙을 위해 박해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 다.
열두 제자들의 파견(마태 10,11-16)에 이어 나오는 이 말씀은 당신을 증언하게 될 사람들이 받을
여러 가지 고통과 역경을 설명하신다.
그러나 그런 박해에 제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의 도움을 약속하신다.
제1독서의 즈가리야가 우상을 섬기는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느님께 로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하느님의 징벌을 이야기하여 죽임을 당했던 것과 같이, 김대건 신부님은 같은 동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젊음과 생명을 바친 분이시다.
이것은 바로 그분의 신앙이 었다.
이 신앙은 제2독서에서 보듯이 믿음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 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교자란 하늘의 가치, 진리를 위하여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을 던진 사람들을 말한다.
진실만이 참 평화를 가져온다.
예수님과 같이, 순교자들처럼 죽어가면서도 진실과 이웃을 위한 희생의 삶을 보여줄 때
비로소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 은 인간의 본 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 린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지혜를 구하도록 하자.
체면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못하는 경우 도 많다. 믿음과 열렬한 마음을 구하도록 하자. ♡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송봉모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기 직전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들려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인간적으로는 너무 어둡고 힘겹게 들립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위해서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인데 정작 세상은 그들을 거부하고 고문하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오늘 복음 바로 직전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16). 세상은 이리떼가 모여 있는 곳이며 세상은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듣게 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채택된 것은 김대건 성인께서 이 복음의 정신을 그대로 살아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다음 편지를 통해서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을 참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으로써 성교회가 세워졌고, 이 성교회도 십자가와 많은 고난 속에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박해는 천주께서 주시는 시련입니다. 세속과 마귀를 쳐 이기면 덕과 공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재앙에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서 물러나지 말고, 오로지 성인들의 자취를 밟아서 성교회의 영광을 늘이고, 주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다시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박해는 천주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하오니 마땅히 천주를 위하여 힘차게 참아 주십시오.”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성인께서 온전한 순교의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실제적인 질문을 해 보십시다. 요즘 세상에도 예수님의 제자라 해서 박해를 받는 일이 있을까요? 김대건 성인 시절에는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오늘날도 그러한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주님께 속한 자로서 행위한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말에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러 가는데 성당에 가기 위해서 그 모임에 빠진다면 우리는 즉시 답답하고 분위기 깨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모두 다 저울을 속이는데 우리만 주님의 제자답게 정직하게 장사하려한다면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이 세상의 행동양식이 아니라 주님의 행동양식으로 살려 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홍승모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경축할 때면,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순교의 얼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신앙 선조들의 순교의 얼, 그 깊은 내면에는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삶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의 순교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 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2역대 24,20-21).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질책할 수 있었던 힘은 하느님의 영을 체험한 데서 오며, 이는 영적인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힘이 하느님의 영을 체험한데서 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영으로 인해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올바로 깨닫고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령 체험은 어떤 곤경 속에서도 주님을 굳게 믿고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 주 진실하신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구원하시리이다”(시편 31,6). 주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이 시편의 구절을 되새기셨습니다.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는 인간적인 모든 안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은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고 느낄 때에도 희망의 빛을 밝혀 주십니다. 주님의 성령은 바로 이런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주님이 걸어가신 삶의 여정처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삶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의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어찌 보면 더불어 살기에 너무 힘겨운 세상에서, 인간적인 힘이나 역량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고통을 변화시켜 주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성령의 체험이 시련에 부딪힌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사랑의 불꽃을 피울 수 있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끄러움에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성령을 체험하는 여정에 매진하는 것이 현대의 순교가 아닐까 묵상해 봅시다.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영성
-양승국신부-
상호배려와 인내, 사랑으로 결혼생활을 해나가자는 주제로 강론을 하시던 신부님께서 신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기 계시는 형제자매님들 가운데서 혹시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를 내 사람으로 선택하겠다는 분, 계시면 손 한번 들어보세요!"
꽤 많은 신자들이 성당 안에 계셨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몇명은 손을 들겠지'하고 생각했던 신부님은 상당히 곤혹스러웠습니다.
신부님께서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셨는데 그 순간, 제일 앞줄에 앉아계시던 할머니 한분이 손을 번쩍 드셨습니다. 단 한분이라도 손을 드시니 다행이다 생각한 신부님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 할머니께 또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할머니,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십니다. 어떤 이유로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을 택하시려는 것입니까?"
할머니 대답에 신부님은 다시 한번 뒤로 넘어질 뻔 하셨답니다.
"훌륭하다고까지 할 것은 없고, 젊어서 사별하고 재혼을 했는데, 살아보니 특별한 것이 없어! 그 ○이 그 ○이더라구. 그렇다면 아무래도 낯선 ○보다는 익숙한 ○이 더 낫지 않겠수?"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한 사람을 만나 한 눈 팔지 않고 한 평생을 같이 걸어간다는 것,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고, 예수님 가르침을 따르는 진정 복음적 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과 꾸준히 평생을 같이 간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간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철저하게도 다른 두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30년, 40년을 같이 항해한다는 것은 진정 어렵다 못해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원하는 성가정(聖家庭), 잉꼬 부부, 원만한 결혼생활이란 거저 이뤄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지속적 자기 비움, 열렬한 기도생활, 영웅적 인내, 순교자적 자기 헌신, 다시 말해서 순교영성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를 기억하는 오늘, 신부님의 순교영성을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는 후손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큰 과제입니다. 때로 신부님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신 순교영성을 살고 실천한다는 것이 평범한 우리들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입니다. 너무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맙게도 교회는 백색 순교, 일상에서의 순교를 해답으로 건넵니다. 매일 삶 가운데 김대건 신부님께서 지니셨던 순교 정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알게 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부님 순교는 갑자기 다가온, 그래서 엉겁결에 맞이한 순교가 아니라 철저하게도 준비된 순교, 예견된 순교였다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매일 순교를 염원하셨습니다. 짧은 생애 내내 자신의 머릿속에 언젠가 맞이할 영광스런 순교의 때를 그리곤 하셨습니다.
순교에 대한 준비, 일상에서의 순교가 신부님 삶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었기에 순교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 신부님 태도를 보십시오. 너무나 의연하셨습니다. 당당하셨습니다.
이승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보다 본격적 삶에로 건너가기 위한 일종의 사다리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이 지상에서 삶이 천상에서 누릴 영원한 삶에 비교한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미 잘 알고 계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결과 그분의 눈은 영원한 삶, 불멸의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상에서 순교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결혼생활을 하시는 형제자매님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배우자 간에 진정 바라는 바는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천지개벽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제와는 완전히 딴판인 새로운 인간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꿈같은 변화, 동화 같은 반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나쁜 습관 좀 고치는 것, 내가 싫어하는 일 하지 않는 것, 아침부터 인상 구기지 않는 것, 가슴에 못 박는 말 하지 않는 것 등 이런 것들을 바라십니다.
가까운 사람을 위해 작은 희생 한번 하기 두려워하는 사람, 죽었다 깨어나도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작은 친절 한번 행하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큰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작은 고통 한번 제대로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순교의 영광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피로써 가꾼 씨앗
-나기정신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사제요, 순교자였던 안드레아 김대건 성인이 치명한 시대적 배경의 요인 중의 하나는 당대 정치적 영향이 컸었다. 조선조 말기는 밖으로 서구 열강의 세력이 뻗어 오고, 안으로는 聆玟極?정치 사회의 기반을 둔 조선왕조가 정치적 붕당으로 허덕이며 쇄국의 빗장을 걸 기에 안간힘을 쓰던 무렵이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세라의 목상과 돌 우상을 섬기는 죄를 저지른 왕 요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 예언자이자 사제였던 자카리아의 운명도 마찬가지다(2 역대 24장). 그 역시 정치적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정치의 규제 수단은 법에 있다. 그러나 법은 최저의 인간 행위를 통제할 따름이지 무소불위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마태 10장)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운명을 이미 예고한 바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도 사형을 당한 이유가 매우 정치적이다. 사형 판결문의 내용이 그렇다.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라는 예수 자신의 정치적 죄명과 다를 바 없다.
오늘날 법의 이름과 잣대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정치적 처신 때문에 교회는 심각한 도전과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 5장)라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고초와 박해라도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은 교회의 성장의 씨앗이 되고 보탬이 된다. 교회 역사가 그것을 입증한다. 하느님에 대한 성인의 성덕과 지혜와 열정은 교회 신앙의 씨앗이 되어, 그 모든 고초와 죽음까지도 다 겪어 냈고 교회는 오늘의 성장에 이르렀다. 이렇게 우리가 받은 신앙은 선조들의 고난과 시련의 결실로 일구어낸 신앙이다. 그만큼 소중하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나의 신앙을 얼마나 귀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지 반성해보아야 하겠다.
또한 오늘은 교황주일이다. 교회의 가장 귀한 보물인 신앙을 수호하고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시는 교회의 으뜸이신 교황님을 비롯하여 교회의 여러 봉사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순교는 사랑의 증거이다.
-유영봉신부-
묵상 길잡이 :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신부님의 말씀이다. '순교'의 본 의미는 '증거'이다. 성인은 하느님을 우리의 임자로, 주님으로 믿었기에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생명을 바쳐 증거하셨다.
1. 순교, 바보들의 행진인가?
어떤 본당에서 순교자 성월을 맞아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순교 성인들에 대한 특별 강론이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김대건 성인의 생애를 설명해 갔다.
▶1821.8.21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솔뫼)리에서 출생,
▶1836 16세의 어린 나이로 마카오로 유학,
▶1845.8.17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 선교사 입국의 길을 트려다
▶1946.6.5 '순위도'에서 체포,
▶서양학문을 익힌 최초의 한국인, 외국어(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 조정에서는 그 재주와 인품이 아까워 죽이지 않으려고 회유도 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킴,
▶1846.9.16 서품 된지 1년 1개월만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칼 아래 순교.
강론은 차츰 열기를 더해갔다.
그런데 갑자기 고1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는, "신부님, 저는 솔직히 김대건 신부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속이 답답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사제가 되어 가지고, 사목자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신부 된지 1년 만에 꼭 그렇게 순교를 해야 했는지? 배교(背敎)하는척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였다. 이러다 보니 "순교자 현양"이 아니라, "순교자 규탄대회"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X(신)세대다운 약삭빠르고 영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에 대한 생각이 이 학생들의 태도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배우자감은, '돈 많고 명(命) 짧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철저하게 이해 타산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에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무리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2.김 대건 신부님은 참 믿음의 소유자였다.
신부님은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그를 알아보았으되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하셨다. '임자'라는 신부님의 표현은,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라고 불렀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임자'란 '주님'과 같은 뜻으로,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임자요, 주인"임을 알았다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 김대건 신부님의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바로 25세의 젊은 사제 김대건을 순교의 길로 용감히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3.김대건 신부님은 참 희망과 사랑의 소유자였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년6월5일 체포된 후 6월 21일 서울 포청에 갇힌 후, 7월 19일까지 40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참수되기(9.16) 전, 8월 29일 페레올 주교와 신자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死後)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인이 되십시오. 이 마지막 편지를 보면 김신부님은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을 지닌 분이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가리아는 죽으면서 "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4,22)고 외친다. 김신부님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에서 '임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한 모든 고통을 갚아주실 것을 확신하셨고,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꽉 차 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과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신부님의 '임자'께 대한 믿음은 신자들에게 대한 완전한 헌신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기 전 조선 입국의 길을 뚫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고 장백산을 넘으면서 2천리가 넘는 길을 혹한 속에서 헤매야했다. 그리고 1845년 항해(航海)경험이 전혀 없는 11명의 신자와 함께 손수 만든 작은 배를 타고, 신부와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기까지 죽음과 맞선 항해를 하셨다. 김신부님은 참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다. 16세에 부모를 떠나 10년 만에 사제가 되셨고, 1년 남짓 사제로 사시다가 25세의 젊은 생명을 산 제물로 바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꽃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대구 신학교 제대에는 김신부님의 척추 유해가 모셔져 있다. 미사를 하기 위해 그 제대 앞에 설 때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작은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한국의 모든 사제들의 주보인 김 신부님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사제들을 끊임없이 회개에로 부르시는 은총의 샘이라 할 수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한국 교회와 특별히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이기양신부-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7월 5일인데 주일로 옮겨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경축하고 있습니다. 7월 5일이 축일이 된 이유는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이 되기 전 과정인 복자품에 오른 날이 바로 이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오늘 축일을 지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입니다.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한국 천주 교회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은 즉시 의문이 생길 겁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왜 신부님이 돌아가셨는지, 그것도 대역죄인이 되어 국문효수(國文梟首)까지 당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신부님은 새남터 한강 백사장에서 목이 잘려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으로부터 약 220여 년 전입니다. 개신교 보다 한 100년 일찍 들어왔지요. 천주교가 들어온 당시 우리나라는 유교 사회였습니다. 유교 사회는 양반과 평민, 쌍놈이 크게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 사회입니다. 또 유교 사회의 큰 특징은 조상에 대한 깍듯한 예절이었습니다. 조상제사에 대한 사회적인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이 시절에 천주교 교리는 이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이 모두 다 크게 달랐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천주교의 기본교리입니다. 양반과 쌍놈의 구분이 없고 남녀의 구분이 없다고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는 당시 조선 사회에 놀라운 파장을 던지고도 남았습니다. 당연히 천주교는 사회의 관습을 혼란시키고 나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천주교에서는 조상 제사를 모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그 자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죄악이었고, 소문만으로도 파문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자는 대역무도한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교리를 놓고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㰡나는 천주교보다는 조상의 제사를 따르겠다.㰡고 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들은 과감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 땅에서 윤지충과 권상현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일이 생기고 이 때부터 조선에서는 대대적으로 천주교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784년 천주교가 들어오고 나서 1886년 한불통상조약이 맺어지기까지 100년 동안 한국 천주 교회에는 엄청난 순교의 행렬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 때는 천주교를 믿으면 죽고 믿지 않으면 살았습니다. 간단했습니다. 조사며 취조가 다 필요 없이 천주교 신자로 발각되어 잡혀가면 관원들이 물어봅니다.
㰡배교 하겠는가?㰡
배교하면 살려주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겠다고 신앙을 고집하면 무조건 목을 쳐죽였습니다. 그렇게 수 만 명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묵묵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며 목이 잘려 숨져갔습니다. 쇄국 정책을 폈던 흥선 대원군 시절만 해도 대원군에 의해 죽은 사람이 무려 8,000명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순례하는 절두산 성지의 원래 이름은 잠두봉, 양화진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한강으로 던져진 이후 이곳 이름이 절두산으로 바뀌기까지 한 것입니다.
절두산, 새남터, 명동, 솔뫼, 배론 등 전국 각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죽어갔고 이렇게 1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 단 한 명으로 시작된 천주교는 100년의 박해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만 명, 비공식적으로 수 만 명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수 만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도 지켰던 신앙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고백하는 천주교 신앙입니다. 놀라운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목숨을 잃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줄을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그 자체가 죽음이라고 했을 때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없이 순교자는 늘어나기만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순교자들의 놀라운 신앙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곧 목이 잘리는 그 순간에 두려움에 떨며 살려 달라고 애걸해야 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그리면서 하느님과 함께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을 보일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좌절하고 불평 불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치는 휘광이와 관원들을 위로하고 찬미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보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신자들의 신앙이 목을 자르는 극형이 셀 수 없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신자들을 탄생시키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순교의 현장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한국 천주교를 이끌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로부터 선교사들이 끝없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프랑스는 지금도 비행기로 14시간을 가야하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쪽배를 타고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오로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낯선 땅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어갔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목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 생김새 등이 우리 조선인과 너무나 달랐기에 조선인 신부가 있어야 한다는 절대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신학생으로 뽑힌 분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최양업 토마스 성인이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15세의 젊은 나이로 이렇게 신학생으로 뽑혀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로질러 중국 대륙을 지나서 남방 마카오 섬까지 수 만리를 걸어가는 고행의 유학 길이었습니다. 갖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10년 만에 사제로 수품됩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서 성무를 집행하고 신자들을 사목 하시게 되었는데 사목을 하다보니 많은 신자들이 간절히 갈구하는 하느님에 대한 갈증을 혼자서는 채워주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선교사를 청하러 다시 가시다가 그만 관원에 의해 체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부님은 1846년 10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십니다. 그 때 목이 잘려 대나무에 걸어 놓은 신부님의 시신을 수습해서 150리 길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메고 간 신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이민식 빈첸시오는 신부님의 유해를 모시고 밤에만 산 길을 걸어 일 주일 만에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부님은 미리내에 안장되었습니다. 놀라운 신자들의 신심이고 놀라운 김대건 신부님의 모습입니다.
한편 김 신부님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만 해도 사형을 받던 그 험난한 박해 시절에 오로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은 김대건 신부님 한 분뿐이었고 10년 간을 사제가 되기 위해서 어렵게 기도하고 준비하고 노력했는데 사제로 탄생된 지 단 1년 만에 잡혀서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켜본 신자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㰡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㰡하고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회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바램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 체험합니다. 당시의 그 시련이 한국 교회에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결실의 은총이었음을 후손인 우리들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죽음은 그 당시는 한갓 대역무도한 한 인간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분이 태어나신 솔뫼, 그 분이 돌아가신 새남터, 그 분이 묻히신 미리내는 모두 거룩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지이고, 하느님 승리의 장소이고,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전혀 다르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값진 신앙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이렇게 다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러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신앙을 소흘이 하기도 합니다. 내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쳐오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자녀에게 사고가 생기고, 부모에게, 또는 사업을 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는 좌절하고 감당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를 뛰어넘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나의 작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에 갈등이 생길 때,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길이 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을 오늘 명확히 깨닫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갈 때 이익이 되고 잘 살아 남을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더 큰 은총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오늘 하느님의 또 다른 계획과 섭리하심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시련기가 있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쓰러져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욕망과 세상의 일 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국 교회와 우리들을 위해 간구 하여 주실 것을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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