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27일 성령 강림 대축일

Margaret K 2007. 5. 26. 05:22

  2007년 5월 27일 성령 강림 대축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Jesus said to them again,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send you.”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기원하시며 성령을 내려 주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부여하신다

 

☆☆☆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두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시는, 곧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여러 은사들을 한마디로 대신한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바로 이 ‘일치성’입니다.
성령의 본질이 이러한 ‘일치성’에 있다는 것은 오늘 제1독서에서 들었던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하여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신 뒤, 제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려 모인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치의 성령에 힘입어 모두 각자의 언어로 설교를 듣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한 ‘분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일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는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성령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기양신부-

물으면 대부분 신자들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 정도입니다.

"성신이요."

많은 분들이 성령은 성령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 또 성령 세미나에 열중한 사람들은 성령을 마치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 세미나의 일부 과정에서 사람들이 성령에 도취하여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성령과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성령이 무서워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되었지요. 성령은 나와 상관없는 분이 아니고 성령 세미나를 하는 일부 신자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고, 나의 전 생애를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살아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은 비둘기 형상이나 바람, 또는 숨이나 불혀의 모습으로 내려오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성령은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형상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신약성경은 그 시작부터 성령의 역사임을 드러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임신 사실을 알리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응답합니다. 그 때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즉,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왔으며, 마귀를 물리치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다른 협조자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이렇게 약속해 주신 성령은 오순절이 되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사도 2,2-3)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서도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오늘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 문을 박차고 나와 유다인 앞에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라고 당당하게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성령의 지혜를 받은 제자들 언변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쩔쩔 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앉은뱅이를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등 권위 있는 말씀과 기적을 행해 보였고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사도 5,15) 바랄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힘을 갖습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성령에 가득 차서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렇듯 성령은 교회를 태동시킨 분이시고,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는 생명이시며, 우리 신자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힘,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르는 개인이나 단체 또 교회 공동체는 단지 인간 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칠성사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며 밀떡이 예수님의 성체로 변화할 때 사제는 그 위에 손을 얹으며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성 변화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만물을 거룩하게 하고 인간의 경지를 넘어 천상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은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배광하신부-

오랜 세월 동방전례의 전통에서 살아오신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말씀은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대의 교회에 성령에 대한 핵심적인 안내를 해 주리라 생각됩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성령을 입은 제자들이 배신과 비겁과 나약함을 떨쳐 일어나 복음 선포의 굳센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그 같은 힘을 주십사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안일했던 신앙, 배신적인 삶, 비겁했던 복음정신, 나약했던 믿음에 활활 타는 불꽃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송가’ 안에서 힘이신 성령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주님의 빛,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 주님,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행복의 빛’. 그리고 타오르는 힘이신 성령께 청원을 드립니다.

‘생기와 휴식,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 허물들은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시고, 굳은 마음 풀어 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꾸어 주시고, 성령 칠은 베푸시어 덕행의 공로 쌓아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복락 주옵소서.’

비록 우리가 세속에 얽매여 신앙의 참된 자유를 살지 못하고 주님의 크신 영광에 확신을 가지고 믿지 못하는 나약함을 지녔어도 사도 성 바오로의 다음 말씀에 위로를 삼으며 또다시 성령의 뜨거운 믿음을 청해 봅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 17~18)

힘이신 성령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의 여러 상징을 가르쳐 왔는데, 그중 가장 큰 상징으로 ‘바람’ ‘물’ ‘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쓰러진 영혼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신 성령을 바람과 물과 불로 상징한 이유는 그것들의 영원한 힘의 작용이 성령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구름을 사방으로 옮겨 지구 곳곳에 생명수를 뿌려 줍니다. 바다의 무서운 해일과 폭풍도 실은 생명의 바다가 썩지 않도록 뒤집어 주는 것 또한 바람의 역할입니다.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바람인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체인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창세 2, 7 참조) 바람은 또한 온갖 꽃들과 씨앗과 옮겨 모든 대지에 생명이 자라게 해줍니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이 바람은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쉬도록 만들어 줍니다.

‘물’은 생명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몸은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 생명의 시작도 어머니 뱃속에서 물인 ‘양수’로부터 자라납니다. 물은 또한 ‘정화’의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그릇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영혼을 씻는 것에 이르기까지 물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주며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때문에 세상 모든 종교의 거룩한 예식에서는 반드시 이 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불’이 없으면 또한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일정한 불인 체온을 유지해야 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생명체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인 태양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이 없으면 물은 얼어붙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며 구름의 이동 역시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오순절 그 나약했던 제자들에게 내리신 성령께서도 불과 같은 모습이셨습니다.(사도 2, 3 참조)

이제 우리는 또다시 성령께 성령의 상징인 물과 바람과 불의 엄청난 생명의 힘을 청해 다시 한 번 강인한 복음의 사도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넘치는 생명의 힘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적인 축제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 대한 것은 이미 부활 2주일에 들었으므로 지금은 성령에 대한 몇 가지 주제를 보기로 하겠다.

오늘 복음은 이 때의 “문학상 큰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즉 부활에서 성신강림, 부활절 저녁으로부터 성신강림절 아침까지 부활의 효과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한 성령의 은사이다. 항상 부활이며 항상 성신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 이제 하느님은 결정적으로 Immanuel,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되신다. 유일하신 하느님은 불가분리적이시며 위격들의 삼위 안에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존재하시는 곳에 필연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기에 이 선물은 삼위일체적 은사이다.

성령, 신적 희년1)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신적 친교이며 나누임 없는 생명의 통교로 하느님 안에 사랑과 모든 재물에 대한 나눔으로,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형제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 오랜 인고의 준비과정에서 보면, 창조 시에 주어진 성령은(창세 2,7), 하느님의 원수인 “육”으로 거만하게 된 인간을 버려야 했으나(창세 6,3), 하느님은 인간의 결정의 자유를 존중하셨다. 하여간 하느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사건에서는, 즉 출애굽기에서 이미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72 인의 백성의 원로들, 그리고 지성소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위해 하느님의 영을 받는다(민수 11,17; 신명 34,9; 출애 31,1-5; 36,1-2 참조). 그 뿐 아니라 모세는 백성 전체 위에 성령이 내리기를 원하고 있다(민수 11,29). 몇몇 판관들, 그리고 사울, 다윗, 예언자들이 성령을 받는다. 모두가 항상 그들의 사명을 행하는 때에 한시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약속은 영구적 은사를 위한 것으로, 귀양이 끝난 후, 거룩한 율법과 약속된 땅에서 떨어져 나온 후에(에제 36,16-18)2), 부활을 이루시는 참된 사건(에제 37,1-14)으로, 또 민족적 파국을 모면하게 해주시는 분으로(요엘 2,28-32), 당신의 백성을 위한 메시아적 왕에게(이사 30,33; 11,10; 32,15); “새로 태어나는”, 재창조되는, “마지막 때에” 새로운 생명에로 부활할 모든 백성들 위에 내리는 영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는 마지막 사건, 주어진 희년처럼 드러나고 있다: 이사 61,1-2; 루가 4,18-19, 절대적 신적 무상의 은총으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숨을 내쉼”(έμφυσάω)으로써 제자들은 새로이 창조되었다(창세 2,7 참조). 그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견진을 받았고, 사제적으로 축성되었고, 모든 신적 신비에 대한 처음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신적 은총의 희년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로 되었다는 것이고, 십자가의 열매를 전하는 사명과 함께 인류에 대한 성령의 운반자로서, 그리고 삼위일체의 거처인 하느님의 가족을 모으고, 희년의 성찬을 전하며, 죄인들과 흩어진 사람들을 부활하신 분이 그 머리이신 귀한 “몸”, 하느님의 백성, 성령의 궁전, 교회, 소집된 단체, 말씀의 정배, 성령, 지혜, 말씀이 거처하시는 곳,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신적 선성이 모두에게 우리에게 까지 이르게 될 교회를 이루는 자들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때의 사도들의 기억에, 우리 또한 오늘 여기서 말씀의 은총과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그리고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들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인 그리고 거기에서 은총의 옥좌를 향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크신 역사들을” 찬양하는 교회라는 존재의 은총으로써 모두 성령으로 충만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로서(Pneumatophoros) 교회를 위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원의식이 분명하고 이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 깨어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는가 긴장하며 사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를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안에 누리는 자유는 아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가 될 것이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이제 참으로 새로이 창조된 마음으로, 그런 기분으로 누리를 새롭게 보고 가꾸어 가는 자들이 되도록 노력하자. 항상 새로이 창조된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자.

“주여, 당신 얼을 보내시고, 온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성령은 바람이며 영입니다.

-이재욱신부-


 오늘날 우리는 성령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총, 성령의 선물을 가득 안고, 가득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이며 영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시원한 오아시스의 향기를 날라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독한 광야에서 홀로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 세상만물에 숨겨놓으신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며 우리를 이끄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부드러운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굳건한 아버지이십니다. 성령에 취해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분노로 달아오르고 주체 못할 화 속에서 괴로워할 때 우리를 식혀주는 한줄기 바람이십니다. 내 마음이 북해의 빙하보다도 차갑고 어두운 외로움 속에서 웅크러들 때 내 마음을 무엇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사랑의 불길이십니다.

성령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신 그분을 알고 그리워하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성령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1독서에서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역이, 언어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서로를 배척합니다. 같은 민족, 같은 동네 사람들이라하더라도 성이 다르다고, 동문이 다르다고, 경제적 여건이 다르다고 ‘남’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 하느님은 우리의 이 부족한 모습을 다르게 이용하십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찬미를 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너무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는 못났지만 그분은 우리를 완전하도록 이끄시고 도와주시는 봉사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지식, 두려워함, 슬기, 의견, 굳셈, 통달, 효경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성령 하느님의 도우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대축제를 지내고 나면, 불같이 뜨거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시원한 바다의 바람을 불어주고, 얼음같이 차가운 외로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화톳불의 따스함을 전해주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그저 순종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입을 열어 말할 수 있 을까? 내가 손을 뻗어 도와줄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람이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

-김지영신부-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는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에서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내게 믿음이 생겼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었다. 나의 모든 생활이 급작스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나는 전에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고, 전에 원치 않았던 것을 원하게 되었다. 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그릇된 일이 되고, 과거에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이 옳은 일이 되었다. 나의 생활과 욕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선과 악은 서로 그 의미를 바꾸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만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래알 같은 시몬을 바위 같은 베드로로 변화시키셨고, 박해자 사울을 사도 바오로로 변화시켰으며, 방탕한 생활에 빠진 어거스틴을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로 회개시키셨습니다. 또한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됩니다. 바로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에 인간의 나약함과 그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진정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스승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이 이제는 목숨을 걸고 그 분은 진정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유다인들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포기요, 절망이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근원적인 힘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성령은 나약하고 부족한 사도들이었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 초대 교회를 태동하게 하는 힘이었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바탕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려 했던 제자들이, 꼭꼭 숨었던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그들을 박해하던 유다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당당하게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의 지혜이며 힘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힘을 못 쓰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음식이며 힘이며 우리의 활력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는 진정한 회개에서 오며, 감사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하나 되어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라는 화해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참된 평화는 이와 같이 성령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세상 곳곳에 복음을 !

-유영봉신부-


1.인간에겐 신(神)과 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합천 본당에서 첫 사목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교리 반에 잘 나오던 40대 부인이 2주 째 교리 반에 결석을 하였다. 사정을 알아본즉, 죽은 시어머니 귀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 신(神)기운이 돌면 완전히 죽은 시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신기(神氣)가 돌아서인지 목소리도 시어머니 목소리로 변했고, 촌수도 바뀌어서 시아버지를 보고 '여보!'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남편을 보고는 '야, 이놈아'하면서 어머니 행세를 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갑자기 "신(神)이 내렸다."며 무당이 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神) 내림 굿'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神)이 내려 무당이 되는 사람을 강신(降神)무당이라고 한다. 어쨌든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신(神)과 통할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잡신(雜神)이 내리면 무당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靈)인 성령이 내리면 그리스도의 영(靈)에 사로잡힌 참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제 1독서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전해주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쉬시며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성령강림 축일은 교회의 개교(開敎)기념일이다.

최후의 만찬을 했던 다락방에서 무서워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오순절 축일에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성령을 받아 가르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 위에 성령이 쏟아 부어짐으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워진 사도들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 이 지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도 또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를 통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고린12,3)고 하신다. 성령강림 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다. 이렇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백성,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3.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전파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을 받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9) 나자렛 사람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20,21)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그 기쁨과 평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의 공동체인 것이다. 제 2차 바디칸 공의회도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本性上)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 고 선언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고,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이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고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무덤에 가두어 놓는 사람이다."고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한 사람도 교회에 인도하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새 순(筍)이 돋아나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되고 냉담자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 사도들로 하여금 생명을 바쳐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그 성령의 활동이 더욱 아쉬운 때이다.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아 벌였던 '쉬는 교우 찾기'와 '새 교우 찾기' 실천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명령을 잊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살아있는 신자이다. 나는 살아있는 가지인가?

 

 

 현명한 선택

-김영수신부-


3년전 독일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게청년대회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청년들을 위해 마련하신 행사로 전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축제를 벌이고, 우애를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 프로그램 중 하나로 독일의 준비된 가정에서 그 가족들을 함께 지내는 홈스테이 과정이 3박4일 동안 있었습니다.

광주 교구에서 간 30명중에서 독일 말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영어는 단어를 띠엄띠엄 이어가면서 말을 하는 정도.. 사정은 독일의 그 마을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의 공소정도에 해당되는 시골 공동체이다 보니 영어를 할줄 아시는 분들이 드물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3박4일을 같이 지낼 수 있을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행복한 체험을 했습니다. 홈스테이 3일째 되는날 저녁 우리는 그 성당의 교육관에 모여서 그 동안의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의 인상 깊은 나눔 한마디 “나는 이곳에서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웠어요!!” 준비된 일정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 서로 아쉬워하며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독일의 어르신들과 우리 청년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서로 알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면 언어라는 장벽이 생각보다 큰 장애가 되지는 않는구나 ….” 말이 다른 것 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마음, 닫힌 태도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성령을 받은 이들이 어떠한 활동을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이 달라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말이 같아도 오해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평소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언어가 갈라지는 바벨탑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고,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에는 그러한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어 일치를 이루는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가운데 언제나 펼쳐지는 모습들입니다. 나의 아집과 교만으로 인해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순간 우리는 나의 언어와 그의 언어를 다르게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영원한 타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반면 서로를 이해하고자 원한다면 언어라는 커다란 장벽도 거침없이 뛰어넘어 하나되고 일치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바벨의 벌입니까? 성령의 은총입니까?

 

 

 -허영엽신부-


 오늘날 가톨릭에서 성령쇄신이라 부르는 신심운동은 1967년 2월, 미국의 듀케인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지도신부와 함께 사도행전을 주제로 한 주말 피정에서 성체조배를 할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의 성령쇄신 운동은 대학생들의 신앙쇄신 운동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본당과 수도회로 확산되면서 신자들의 신심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쇄신 운동은 모든 신앙인을 위한 신심운동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하거나, 신앙이 부족하여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성령 안에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하느님께서 모두 주십니다. 문제는 각자 다르게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잘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사를 공동체의 이익과 이웃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 중에서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평화’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의 마지막 목표도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유다인의 일반적인 인사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많이 누리고 소유하여 높이 올라가야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주는 평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오히려 고통과 불안 속에서 끄떡없는 영적이고 내적인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평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을 인간적인 힘으로는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잠시 잊을지는 몰라도 완전히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얼마나 복된 말씀이고 은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내 인생의 동반자 성령

-양승국신부-

 

 요즘 형제들과 밭을 빌려 농사를 조금 짓고 있습니다. 다들 '왕초보'라 문제가 많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기는 하는데 여간해서 싹이 안 올라옵니다. 이것저것 모종을 심기는 하지만 간격도 안 맞고, 또 뭔가 어색합니다. 보다 못한 '프로'들께서 한마디씩 거드십니다.

 "자네들, 무슨 모종 장사할 일 있어? 고추모종을 왜 그렇게 빽빽하게 심었어? 그리고 저기, 호박모종을 이랑 한 가운데다 줄줄이 심어놓으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뭔 야채 박람회야? 상추, 케일, 토마토, 가지, 오이, 쑥갓… 없는 게 없구먼,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자주 야단을 맞다보니 저는 가급적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제일 먼 쪽에 앉아 일하지요. 요즘은 꽤 키가 커진 고추모종에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 고추모종들을 하나하나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또 갈증을 해소시켜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 손길이 아마 이러했겠지요. 제대로 걸어 다닐 힘조차 없어 비틀거리던 나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지척에서 따라다니시던 분, 혹시라도 넘어지면 비호처럼 달려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던 분,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던 분… 돌이켜보니 많은 경우 그런 하느님 손길은 마치 미풍처럼 불어오는 성령을 통해서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성령께서 내 안에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란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점점 진지해지더니 나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다들 걸어가는 넓은 길을 굳이 마다하고, 이 좁디 좁은 길을 택해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후배들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름대로 꽤 많은 영적진보를 이뤄냈다는 마음에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한 형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신앙, 하느님과 관계를 총정리 하는 '영적자서전'을 써나가면서 평소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성령의 이끄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굽이굽이, 곳곳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음에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이 너무도 막막해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아서,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심각한 성소의 위기 상황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는 형제들로 변장하고 나타나셔서 자신을 위로해주시고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죄로 기울어져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오랜 방황 속에 허덕일 때,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조금 빠져나와서 바라다보니 손을 내밀어주시던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늦게나마 성령의 손길, 성령의 자취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둔감해서, 우리가 너무 육적으로 살아서 잘 감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손 내밀면 언제라도 잡아줄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오신 분이 성령이심을 인정합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감각이 온통 육적인 것에 몰두해 있기에, 우리 안테나가 온통 세속을 향해 있기에, 우리 시선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분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 체험하게 될 은총은 놀라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 자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던 현실이 '살아볼만한, 견뎌볼만한 현실로 변화할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인간들이 그저 안쓰러운 인간, 측은한 인간, 감싸주어야 할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적의 원동력, 우리 신앙을 한단계 성장시켜줄 활력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서공석신부-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집니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떠난 사람이 사람들 안에 남겨 놓은 기억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역사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당신 안에 일하시던 성령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과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과 더불어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서 종말을 고한 당신의 삶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마태 1,20)이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이 당신 위에 내려오시면서(마르 1,10)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같은 성령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성령을 받아 시작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고 예수님은 그 숨결로 사셨습니다. 창세기(2,7)는 흙으로 된 인간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숨결을 받아 산다는 뜻으로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유대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 죄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해 하느님이 벌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미운 사람이 불행할 것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세상과 그런 마음은 하느님도 사람을 미워하고 불행을 주는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악한 마음은 악한 하느님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하여 만든 하느님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합니다. 악한 인간이라도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대신”(루가 11,11) 주지는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6,36) 스스로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고 실천하셨습니다. 어느 날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신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우리는 오늘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활동을 서술하기 전에 두 폭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이고 또 하나는 오늘 우리가 들은 성령강림의 그림입니다. 이 두 폭의 그림은 사도행전의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도들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떠나셨고, 성령이 오신 다음 시작된 사도들의 활동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의 서문에 해당하는 성령강림의 화폭에 성령이 강림하신 장소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루살렘입니다. 시기는 유대인들의 해방절 다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드는 오순절을 택하였습니다. 오순절은 해방절이 지나고 50일째의 축일입니다. 보리와 밀의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제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13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이 날 예루살렘 성전에 의무적으로 순례해야 합니다.

성령강림 장면에 나타나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20,18)가 묘사하는 하느님 발현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졌다’는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에 의해서 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기원이 있는 말씀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불길 같이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모여든 군중은 각기 자기네 지방말로 알아듣습니다. 복음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예수님 한 분 안에서 발생한 복음이지만, 이제부터는 인류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을 움직였던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그 성령은 인간의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 일하십니다. 인간은 작은 구실만 있어도,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고 장벽을 쌓습니다. 민족과 문화의 다양함을 비롯하여 출신과 직업의 다양함은 인류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을 차별과 불화의 동기로 만듭니다. 성령의 이름으로도 우리는 많은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여러 역할을 함으로써 교회는 창의적이고 풍요로운 것이지만, 일부 역할을 성령이 주어져서 발생한 신분이라고 과대 포장하여 신앙인들 사이에 장벽과 차별을 만들었습니다. 성령의 이름을 붙인 신심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만들어 갈라놓고 교회 안에 새로운 장벽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하신 일도 없고 그런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벌주는 악한 하느님을 상상하여 만들었듯이,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차별하는 성령을 만듭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일하셨던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 안에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숨결입니다. 차별 만들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우월감에 빠져 살고 싶은 우리를 그런 욕구에서 해방시켜,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은 용서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욕심, 허영, 질투, 미움 등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의 해방은 이 용서로 시작합니다. 성령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그 숨결은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 우리를 용서하여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