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29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07. 5. 29. 07:29

  2007년 5월 29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10,29-30)

 

 Jesus said, “Amen, I say to you,
there is no one who has given up house

or brothers or sisters
or mother or father or children or lands
for my sake and for the sake of the Gospel
who will not receive a hundred times more

now in this present age:
houses and brothers and sist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with persecutions, and eternal life in the age to come.

 

  

 예수님 때문에 버린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백배로 갚아 주실 것이다. 이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

 

 세계적인 한 언론사의 아들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신분을 숨긴 채 가난하고 범죄가 잦은 한 흑인 마을의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 는 조그마한 단칸방에 살면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결석하는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 학생들 대부분은 가식적이라고 비웃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많은 학생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불량한 아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사회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사비를 털어 학생들을 격려하는 가운데 교화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제자 중에 퇴학당한 한 아이가 마약 조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 아이를 자신의 방에 숨겨 보호하면서 암흑의 길에서 빠져나오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스승의 돈을 훔치려고 친구들과 함께 그를 죽이게 됩니다. 31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교사의 빈소에는 “우리는 선생님의 아들딸입니다.”라는 피켓을 든 학생들이 줄지어 자리를 지켰고,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제자들의 편지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위의 교사는 현세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이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봉헌한 사람은 다시 주님에게서 백배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아주 게으른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게으른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지금은 별로 볼품이 없지만 언젠가는 풀릴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근근이 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언제나 풀릴 것인지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인 그가 점쟁이를 찾아갈 수는 없고 해서,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서 막무가내로 자신의 삶이 언제 풀릴 것이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나는 점쟁이가 아니라서 형제님의 미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 줄 수가 없어요.”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사람은 “그래도 매일 기도하시는 분이라 다르겠지요. 튕기지 마시고 저의 앞날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라면서 억지를 부렸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우선 이 사람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난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지금 노력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운 삶은 당신의 나이가 마흔이 될 때까지만 계속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말에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제가 마흔 살이 넘으면 무슨 좋은 일이 생깁니까?”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특별히 좋은 일은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과 똑같다면 아마 견딜 만하겠지요. 마흔이 넘으면 당신은 그 생활에 익숙해 질 테니까요.”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습관이라고 합니다. 남들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들, 그리고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모습들은 결코 자신의 발전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특히 그 습관이 좋은 습관이 아니라, 나쁜 습관이라면 더욱 더 나의 상황은 나빠집니다.

에리히 케스트너라는 독일작가와 친구가 장거리 기차여행을 했습니다. 피곤해진 친구는 의자에 기대어 곤하게 잠을 자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수면제 먹는 것을 잊어버릴 뻔했구나!” 하면서 황급히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는 다시 자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습관이란 무섭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쁜 습관에 빠져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허송세월로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에 안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벗어나는 나쁜 습관이 아니라, 주님께로 나아가는 좋은 습관이 바로 우리들의 몸에 뱄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좋은 습관을 생각해 봅시다.

 빠다킹신부

 

 

 앞으로 받게 될 몫     

-김동하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따르는 사람이
앞으로 받게 될 몫을 밝히십니다. 현세에서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지금은 복음 때문에
박해도 받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릴 때에는 첫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을 전하러 오신 하느님이시며 기쁨이신
예수님께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과부, 이방인, 앓는 사람과 같은
낮고 비천한 사람들을 품으시면서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십니다.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시다 현세에서는 박해의 끝인 죽음을 축복으로
맞이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시어 으뜸이 되시면서
내세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생명의 길을 터놓으십니다. 현세와 내세에서
축복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명백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은 자신을 버리는 아픈 고통을 먹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크고 작은 고통을 힘겹지만
피하지 말고 받아먹어야 합니다. 더불어 크고 작은 고통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집착에서 포기할 때 성숙되는 믿음

-김민수 신부-


정신병원에 수용된 어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다. 그분은 몹시 흥분했고,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달려들었으며, 의사가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려야 할 만큼 사람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분은 작은 동전 하나를 손에 쥐고 끝내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움켜쥔 손 하나를 펴는 데 두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그분은 마치 그 동전을 자신의 존재 자체인 양 여겼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한테서 마지막 소유물을 빼앗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두려움이었다.
할머니가 쥐고 있던 동전은 우리가 살아가며 집착하는 모든 것이다. 나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집 축성을 했을 때나 병자성사, 병자 영성체를 해주었을 때 수고했다고 건네주는 봉투를 마치 당연한 수고비처럼 받은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목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성과와 업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데 집착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실 모든 게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인데 내 소유물인 양 착각했으니….
그런데 돈·명예·권력·미모 등에 집착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것은 근심과 걱정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은 늘 고정되어 있거나 영원히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언가 얽매임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이 되려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예전에 꽃동네에 어떤 노부부가 평생 모은 100억대의 땅과 건물을 기증했다. 그분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아편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자신의 인생철학을 드러냈다. 인생을 풍성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 것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 장재봉 신부-

 

 여러분께 오늘도 성령의 가르침으로 살아가는 축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의 집회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며 은혜를 갚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 때문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버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회서의 가르침을 읽는 세상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보일 우리의 착한 행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떤 행실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꿰찔러 회개시킬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저 우리를 보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강론을 준비하면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방송을 듣는 모든 분들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들어서는 큰 계기가 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 극단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들이 겁먹을까 염려가 되는지, 오늘 집회서는 그분의 의도를 좀 더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우리는 세례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따르기 시작한 사람’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과 삼년을 함께 보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맹세만으로는 아직은 모든 것이 미지수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복된 약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쉼 없는 결단의 연속을 살고 틈 없는 긴장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쓰라”(1테살 5,8참조)고 권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된 만큼, 하느님의 자녀로써 갖춰야 할 품격과 품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의 갈등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모든 선택에 신중해야 하는 것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죄의 결과는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선한 일을 계획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여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인 때문에 변화되고, 그리스도인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적인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복음의 삶은 말이 아니라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 하느님은 창조적이시고 지극히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을 기억하고 행한 모든 사실을 눈 여겨 보시고 오늘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는 모든 일을 기뻐하시며 오늘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워낸 손길을 축복하시며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흠숭의 찬미를 바칠 때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계명에 충실 할 때에 베풀어지는 은총은 체험한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주인공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우리는 해 낼 수 있습니다.


 

 
<독서> : 일곱 배로 갚아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는 삶이 곧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는 삶이다.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것이 참된 제사이며, 악을 물리치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이다.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의인의 제물을 받아주시고 그를 기억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대로 수고의 첫 열매를 봉헌하고 수입의 1/10을 기쁜 마음으로 바쳐라.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잊지 않으시고 언제나 갚아주시되 일곱 배로 갚아주신다.

제사란 사람이 하느님을 섬기며 예배드림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의식이다. 카인과 아벨, 노아나 이스라엘의 성조(聖祖)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대대로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예배드렸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이사 1,11)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찐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아모 5,22)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당신 백성이 드리는 제물을 내치시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듣지 아니하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법을 싫다고 거역하였기 때문이다(예레 6,19). 마음은 거짓으로 차 있고, 생활은 비뚤어졌기 때문이다(이사 48,1).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몸을 씻어 정결케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며,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는 것이다.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하는 것이다(이사 1,16-17).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곧 사랑이다(호세 6,6).

하느님께서는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원하신다. 사람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 수고의 첫 열매를 바치기를 원하시고, 자신의 삶을 바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계명을 지키며 의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알며, 자선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당신을 닮게 만드신 사람, 참 좋게 만드신 사람,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만드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당신께 자신을 바침으로써 당신께서 몇 갑절 더 사랑을 베푸시길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것을 가져가시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이 베풀고자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 6,6)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를 원하시고,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기를 원하신다(에제 36,26).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에게 끝없이 베풀고자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끝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계명을 지키며 자선과 선행을 하는 의인이 되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일곱 배로 갚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자........◆


 

 

예수님을 따르는 정신

-손삼석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진 부분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전적인 포기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해 울상을 하고 떠나갔던 어떤 사람과는 달리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나서서 '저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함으로써 어제 복음의 어떤 사람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대해 예수께서는 전적인 포기의 구체적인 대상을 열거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 등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소유와 관계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지요. 예수께서는 현세의 포기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것이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심으로써 우리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어 놓으십니다.

오늘 짧은 복음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만 오늘 복음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고 중요하고, 첫째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또 하느님 나라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찮게 보이고, 꼴찌라고 여겨 소홀히 하는 것들이 저 세상에서는 오히려 중요하고 가치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KBS TV Special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일대기를 다룬 것을 감명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작가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 모든 삶을 바쳤습니다. 자기가 쓰는 소설의 문장 하나 하나, 글 하나 하나에, 심지어 쉼표, 마침표까지 아름답게 쓰기 위해 정성을 들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장해 보였습니다.

그 작가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고 떠나갔습니다만,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갔습니다: "정말 이 세상 잘 살고 갑니다." 그녀의 작품도 훌륭했습니다만 차라리 그녀의 삶은 더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도 단 한번 주어진 자신의 삶을 더 잘살기 위해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뛰고 노력하시는 여러분!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과연 무엇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잘 살도록 만들어 주겠습니까? 재물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습니까? 권세나 명예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순간적으로 여유있게 하고 편리하게 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삶을 잘 살게 하고 풍성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재물, 권세, 명예, 쾌락 등을 추구하면서 한 생을 살고서 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코 '정말 이 세상을 잘 살고 갑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우리보다 먼저 가신 위인들의 삶을 보면 어느 누구 하나 소유에만 매달리지 않고, 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에 충실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자주 '소유는 행복'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놓고 모든 것, 모든 노력과 시간과 삶을 그 등식에만 대입해서 살려고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니 자연히 이 세상과 사람들의 삶이 메마르고 각박해지는 것입니다.

'소유만이 행복이다'는 생각에 아무리 가지고 쌓아보아도 순간적인 만족이나 기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 무상함을 느끼고 그것이 참 행복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때로는 무집착, 무소유, 포기 등이 얼마나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더 갖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더라면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무엇을 나누고 버리고 포기하기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이라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비우고, 아집과 집착을 버리면 참으로 잘 사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또 우리가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만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또 '진정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지 않으시렵니까?...........◆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구원
을 얻기 위해서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계명을 충실히 지켰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시고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선을 베풀었느냐, 자기 능
력과 가진 것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데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준비할 줄을 모르고 재
물에다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
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면서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
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재산의 번영,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고 번영하면 사람들은 하
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
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
습니다(28절)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
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
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
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
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견디어
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이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
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여기 저
기 다니면서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이 쉴 수 있는 집들과 교우 형제 자매들
과 어머니 같은 여 교우들, 자녀들을 대신하여 대자 대녀들, 세례를 통하여 하느
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토지를 버린 사람은 교우들의 토지에서 필
요한 것을 얻었던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 라는 말
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 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맡게 사용하
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살게 해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
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고 있는 것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첫째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
이다.

 

 

 영적인 보화와 상급 - 참 신앙인의 선물

-이기정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과 축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추종과 보상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유한한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복음적 가치의 소중함을 깨달음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상급과 선물을 받아 누리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했을 때 주님 때문에 세상 것을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상급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세상 것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떠나고 멀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사라져 없어질 유한한 세상 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일 때 아무리
그 희생이 크고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허망하고 보상을 바랄길이 없는 무의미한 희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영원하신 하느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행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희생은 아무리 그 수고와 희생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희생이 헛되지 않는 의미 있는 희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여 지는 현재의 행복은 완전하고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영속적이고 시들지 않는 행복만이 참된 행복입니다.
영원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주인으로 섬길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확실합니다.
반면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실 때에 현재의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 미래의 보증이고 선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원망스러운 어렵고 힘든 상황과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나름대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가?"라는 원망이 나오는 시련 속에서의 삶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과 선물을 넘치도록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선물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좋은 것만을 많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헌신하고 목숨을 거는 삶입니까?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우리 삶을 바치고 있습니까?
주님만이 우리의 소중한 것을 버리고 포기해도 아깝지 않을 유일한 헌신의 대상임을 명심합시다.
매일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우리의 것을 희생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상급과 보화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 누리려는 결심을 새롭게 하면서 오늘도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영적보화와 상급을 선물로서 받아 누리는 신앙 안에서의 기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양승국신부-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언젠가 트럭을 몰고 뭔가 운반하다말고, 복장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본당에 미사를 도와드리러 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정각에 도착했기에 저는 뛰다시피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허겁지겁 제대 왼편에 있는 제의방 문을 확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은 제의방이 아니라 바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바람이 확 들어오면서 신자들의 눈길이 제게로 확 쏠리더군요. 당황한 저는 한동안 안절부절 하다가 겨우 제의방문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살았구나’ 하며 문을 여는 순간, 한 신사분이 제 팔을 꽉 잡으시더군요. 그리고 제 아래 위를 한번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경고를 주셨습니다.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거기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형제님’이란 호칭, 그때 들어보니 참으로 괜찮은 호칭이었습니다. ‘아저씨’, ‘어이’, ‘저기요’ ‘형씨’ 이런 칭호보다 얼마나 예의바르고 정감이 갑니까?


‘형제님’, ‘자매님’ 아마도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호칭일 것입니다.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인지도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형님이면 형님, 아우님이면 아우님이지 형제님이 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주 사용하다보니 이젠 일반화되었고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왜 서로를 향해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를까요?


이유가 있더군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으로 편입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식탁에 앉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례 받은 사람들은 영적인 형제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말로만, 또 호칭으로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로서의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바는 모든 장벽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벽, 인종과 인종 사이의 장벽,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 그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녀들처럼 화목하게, 아기자기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는 간구는 바로 이런 배경을 바탕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수도생활을 계속할수록 ‘백배의 갚음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종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가족과의 유대도 훨씬 강하게 엮어주셨는가 하면 더 많은 영적가족들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종신서원도 했겠다, 서품도 받았겠다, 이젠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한번 품에 안아보는 것은 물 건너 갔구나’ 생각했었는데, 수백 수 천 명의 또 다른 아들들이 생겨났습니다. 부모님을, 그리고 형제를 떠나오게 되었으니, 이젠 정말 허전하겠구나, 쓸쓸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따뜻하고 인정 많은 형제들이 다가왔습니다. 훌륭하고 덕망 높은 영적 스승님들, 영적 부모님들이 저희를 보살펴주시더군요.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도 많지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포기에 따른 상실감, 인간적인 아픔도 많겠지만, 그로인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은 그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노력이나 투자는 티끌보다 미미하지만 하느님의 보상은 태산보다 더 클 것입니다.


 

 

 보시다시피(마르10, 28-31)

 -유 광수신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출세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급해졌고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물으면서 스승님의 의도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말은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말해준 훌륭한 말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이다. 그러나 내용이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버린 그 동기가 무엇인가? 가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자기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버린 것이지 정말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버리다"라는 단어를 베드로도 사용하였고 예수님도 사용하셨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베드로는"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 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버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버린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앞에서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로 예고하셨을 때에 바로 그 뒤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한 것에서도 드러났고 또 세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버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버려야 할 것들은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바로 예수님이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더 많이 갖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니 그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기가 더 잘 되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과 그분의 것을 위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없으면 당장 내가 불편하고 살아가기 힘든데 그 모든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신 이상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생각이고, 계산이고, 이해 타산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순한 지향으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든 신앙생활을 하든 처음의 동기는 누구나 베드로처럼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시작하게 된다.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앙생활이나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이러 저러한 면에서 더 좋아질 것이다 라는 의도로 신앙을 갖는 것이고 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이나 신학교에 들어가는 이들도 나름대로 자기를 위해서 시작하게 된다. 즉 수도자 또는 신부가 되면 "이러저러한 면에서 자기에게 더  좋을 것이다." 라는 계산이 서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고자하는 聖人은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 또는 욕망에서 시작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작은 베드로처럼 자기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 동기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순수해져야 한다, 정말로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정말로 버린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과 사람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또 복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 즉 무엇을 버리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발견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손해보면서 버리는 사람은 바보이다. 아니 예수님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럴려면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복음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 안에서 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그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복음의 큰 가치는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 사람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맛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만이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진정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바오로 사도가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3,8-10)라는 말을 알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예수님과 복음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 감으로써 예수님과 복음 이외의 모든 것들을 조금씩 버리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요, 발전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 동안 자기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사람들을 버리는데 박해를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한테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박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림이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기쁘게 박해를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버림"의 가치와 의미를 숙고하는 하루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