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31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Margaret K 2007. 5. 30. 08:52

 2007년 5월 31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45)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겸손한 자를 높이신 하느님께서는 이제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시어 그 자비가 후손 대대로 미치게 하신다

 

☆☆☆

 

 성모 마리아가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써 주심에 감사드리는 이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는 ‘마니피캇’(Magnifi╋at)이라고 불리는 기도로서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사무엘기 상권 2장 1-10절의 “한나의 노래”와 그 내용이 비슷하고, 시편을 비롯한 구약 성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노래는 단순히 성모 마리아의 개인적인 찬가라기보다는 구약의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찬미하는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교회는 일찍이 이 “마리아의 노래”를 성무일도의 저녁기도 안에서 매일 노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은 이 노래를 마리아의 노래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노래로 바꾸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비천한 존재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이들로서 모든 면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깨닫고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겸손하게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새벽을 열며

 

제가 요즘 걱정을 안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디 아프냐고요? 몸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걱정은 과연 오늘 있을 성모의 밤 행사를 잘 진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전에 했던 성모의 밤과 똑같이 한다면 이야 별 걱정꺼리가 없지요. 그런데 기존의 성모의 밤과 다른 형식으로, 음악 피정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한 달 전부터 준비한 이 성모의 밤에 사람들이 많이는 올까? 혹시 성당이 텅텅 비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준비했는데 교우들이 아무런 감응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인지 성모의 밤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과 불안을 어제 낮 미사를 봉헌하면서 모두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모의 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가 있었거든요.

성모의 밤이란 무엇인가요? 우리 가톨릭에서는 성모님을 뛰어난 신앙심을 가졌던 여인으로서 존경을 드리고 있지요. 그래서 성모님의 달이라고 하는 이 5월에 성모님의 삶을 기억하고 성모님처럼 살겠다는 결심으로 ‘성모의 밤’ 행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삶이 무엇일까요? 바로 의탁과 순명의 삶이셨습니다.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황,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평생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모님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행사를 준비한다면, 준비하는 사람도 이렇게 의탁의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결심이 있은 후에야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생각해보니 어떤 걱정을 가지고 있었을 때, 그 안에 주님이 계신 경우 그 걱정이 반으로 줄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 걱정 안에 주님이 안 계신 경우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걱정을 해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 그래서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자세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첫 번째 길인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는 오늘, 복음에서는 ‘마니피캇(Manificat)'이라고 불리는 성모님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이 노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바르게 전해줍니다. 성모님은 자신은 비천한 여종이라는 사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요.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위대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이 바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하찮은 일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찬미의 노래     

-김동하 신부-


 두 여인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손을 맞잡습니다. 앳되고 소박한 마리아가
한적한 고을을 찾아 늙은 나이에 임신한 친척 엘리사벳에게 문안드립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보자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을 굽어 살피신 주님을
기쁨에 넘쳐 찬미합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후손들에게
미칠 것이라 노래합니다. 두 여인이 성령 안에서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마주합니다. 거룩하신 분께서는 당신의 한도 끝도 없는
자비를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이십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를 통하여 거룩하신 분을 마주한 인간은 어찌 된 일이냐며
크게 놀랍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은 마리아를
찬미하면서 거룩하신 분께 화답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다가오시는
거룩하신 분을 체험한 두 여인이 찬미의 노래를 부르자며 우리를 초대합니다.
거룩하신 분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손을 잡아주십니다.
대대로 우리를 좋은 것들로 들어 높이시기 위해서입니다.

 

 

행복한 왕자와 제비 

-김민수 신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를 듣고 나서 마니피캇으로 응답을 한다. 마니피캇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구원자로서 신명나게 찬미하는 노래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노래를 끊임없이 불러왔다. 오늘날도 우리는 마니피캇을 노래하면서 하느님은 이 세상의 부와 권력으로 교만해진 사람들을 내치시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임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어쩔 수 없이 대물림하고, 생계형 자살이 늘어나며, 노숙자가 되어 거리로 내몰리는 형편에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더욱더 축적하는 반면에 이웃과의 나눔에 매우 인색하다. 가정 안에서조차 부자 아빠는 좋고 가난한 아빠는 싫어하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적 성공과 승리를 위해 점점 부와 권력을 좇아간다.
한국교회가 점차 중산층화되어 간다고 우려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발붙일 기회를 점점 박탈당하고 부자만이 대접받을 때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하는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참으로 교회와 신앙인들이 이 시대에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동화 '행복한 왕자'에 나오는 제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추운 겨울, 제비는 왕자가 가진 보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왕자와 가난한 사람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양쪽 모두 행복하게 만든다. 교회도 우리 자신도 제비와 같은 메신저가 될 때 마니피캇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될 것이다. ●


 

 주님과 함께,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

이 축일은 주님을 잉태하신 성모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방문하심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께서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이루어주신 큰일에 대해 감사와 찬양의 마음이 넘쳐흘렀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셨고 주님을 태 안에 모셨으니, 함께 계신 주님과 주님으로 인하여 얻은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성모님은 혼자서만 기쁨을 간직하지 않으신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성모님은 기쁨이 더 커지도록 이웃에게 나누어주시기를 원하셨다.

성모님은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누리는 기쁨을 가장 먼저 전하실 사람으로 엘리사벳을 선택하셨다. 그리하여 엘리사벳을 찾아 멀리 유다 산골까지 찾아가셨다. 성모님께서 주님과 함께 먼저 가셨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사랑이 너무 크시기에 기다리실 수 없다. 먼저 가신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게다가 늙었기 때문에 도저히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잉태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듯이 늙고 힘없는 엘리사벳을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로 선택하셨다. 그것은 엘리사벳이 그만큼 큰 신앙을 가진 신앙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성모님을 찬양하였다.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이루신 일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가 주님과 함께 오시는 성모님을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오랜 세월동안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던 그녀로서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방문하셨을 때, 기묘하게도 모태 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사벳보다 먼저 주님의 방문을 알고 뛰놀음으로써 주님을 환호한다. 요한은 태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깊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고, 주님의 길을 닦는 사명을 가진 세례자 요한은 이미 모태에서부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과 함께 어머니를 통하여 주님과 성모님을 맞이하는 환호성을 올렸던 것이다.

신앙인, 그는 성모님처럼 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기뻐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이다. 신앙인, 그는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얻은 기쁨을 혼자서만 간직하기보다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신앙인, 그를 통해서 주님과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이웃에게 넘쳐 흘러간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앙인은 하느님 은총의 중개자요 전달자이다. 또한 신앙인, 그는 엘리사벳처럼 주님의 오심을 알고 기뻐하는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으로 인하여 삶의 활기에 넘치며, 뛰노는 사람이다. 언제 어느 때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다.

오늘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축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그래서 성모님과 엘리사벳을 본받아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자. 요한처럼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얻자..........◆

  

 

 

한아이 한 아이가 다 꽃입니다

 -양승국신부-

 

 지난 주말, 저희 집에서는 작고 소박했지만 참으로 흥겹고 정겨웠던 ‘성모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수사님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지켜보면서 성모님께서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계시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예과 아이들은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자신들의 손으로 빚어 만든 초가 담긴 컵을 드렸습니다. 봉헌 예절 때, 저희 모두는 초심지에 정성과 마음의 불을 붙여 성모님께 드렸습니다.

봉헌예식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이었기에 봉헌예식은 혼란했습니다. 불을 붙인 초컵을 들고 나오다가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컵을 깨는 아이, 일단 앞으로 나오기는 나왔는데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아이, 축구하다가 인대를 다쳐 목발 짚고 나오는 아이, 장난을 너무 지나치게 치다가 발목이 삐어 기브스를 한 채 쩔룩거리며 나오는 아이...앞에 앉아서 보고 있노라니 웃겼습니다.

웃겼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슴 뭉클했습니다. 타오르는 초에 비춰진 아이들의 얼굴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 보였습니다. 한명 한명이 다 꽃처럼 보였습니다.

관구장 신부님께서 한 식탁에 앉은 한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아이는 얼마 전에 만기 귀가했다가 이곳을 애타게 그리워하다가 다시 들어온 말썽꾸러기 꼬마였습니다.

“집에 있지 않고 다시 이곳으로 왔니?”

관구장 신부님의 질문에 아이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 선생님 때문에요.”

“그 선생님이 어떤데?”

“저 선생님은 제 엄마예요.”

아이의 대답을 들은 우리는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감동을 먹었습니다.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친엄마 이상으로 보듬어주는 선생님의 마음에서 성모님의 마음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이 노년에 될 때 까지 자식이 없다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부터 마음씨 착한 마리아는 늘 이런 마음을 먹었겠지요.

“연세도 많으신 분이 아이를 가져 얼마나 힘드실까? 주변의 눈도 만만치 않을텐데,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실까? 부족하지만 내가 찾아가서 위로도 해드리고 보살펴드려야지.”

그러나 그 동안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짬을 낸 마리아는 꽤 먼 거리에 있던 엘리사벳의 집을 찾아 길을 나선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한 평생은 오로지 타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시선은 자신에로가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에게로, 이웃에게로, 세상에로 쏠려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어떻게 하면 아들 예수님과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한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은 사랑에 굶주린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의 위로자인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의 마지막 의지처인 성모님이십니다. 부족한 우리들의 조력자인 성모님이십니다.

오늘도 성모님께서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부족한 우리 죄인들을 굽어보십니다. 죄와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잘 변호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십니다.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독하게도 외로운 순간,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순간, 세상살이가 너무 힘겨워 어찌할 바 모르는 순간, 다른 무엇에 앞서 모든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 앞에 그 사연을 털어놓은 우리, 성모님께 의지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위대한 사랑과 봉사

-조욱현신부-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말씀을 천사에게서 듣고 "걸음을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시는 모습이다. 당신이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주님의 종`으로 겸손하게 행동하시는 모습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걸음을 서둘러"(39절) 가는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시고, 하느니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영성가들은 말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그 사실이,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 복음을 받아들이 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인이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 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낳아 주셨다. 그 아들의 탄생은"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신"(요한 1,13) 분이시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이것이 동정잉태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루가 1,37).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것도 이와 같다. 우리도 바로 하느님에게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를 변화시키는 삶은 바로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사랑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정의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이 삶을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써 그리스도를 낳아주셨고, 이제 우리도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나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전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 하느님의 자녀들이 태어나게 하는 중간 역할을 우리가 할 수 있게될 것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기에"(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모두 지금 이 자리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해보자.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 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자.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 후 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자일 것이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자신을 작게 보고 모든 귀한 영예를 허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자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을 갖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성모님께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면서 지내왔다. 우리의 기도를 성모님께 우리의 마음의 선물로 봉헌했다. 오늘 5월의 마지막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리는 이 시간에는 우리 모두가 성모님을 본받아 이웃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으로 진정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려는 덕을 배우고 또 그렇게 하도록 결심하는 시간이되어야 하겠다. 우선 우리가 마리아와 같이 되는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성모님께 도
와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김경식 몬시뇰-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만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확인하게 되십니다. 이 확인으로 가슴 깊이 담겨져 있던 하느님께 대한 믿음, 바람, 사랑이 ‘성모송’(Magnificat)으로 표출되어 나왔습니다. 이 성모송은 하느님의 인류구원에 대한 의지가 변함없이 이어져 옴을 노래하고, 교만한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의 인류구원모습과, 장차 오실 구세주의 활동을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노래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신 성모님의 신앙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자신에게 미쳤음을 알게 된 기쁨은 주체할 수 없이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기도하는 노래로 표현되어 나왔습니다. 성모님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모님과 똑같은 심정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의 구원으로 얻은 희열을 이 찬미의 노래로 주님께 되돌려드립니다. 교회는 날마다 저녁기도에서 성모님의 심정으로 이 성모송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후세에서 받을 기쁨을 맛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굽이굽이 한발 한발 떼어놓으실 때마다 새로운 고통의 쓰라림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아드님께서 가시는 그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가셨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가혹한 희생을 인류구원에 보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의 온전한 이 봉헌을 받으시고 천상의 모후로 올리셨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소명이나 환난을 당했을 때,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결실을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시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정복례 수녀(성모영보수녀회)


 ◆성모성월 마지막 날, 교회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한다. 천사의 알림을 통하여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 그 늙은 나이 에도 아기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까지 힘든 여행을 떠난다. 마리아의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마리아를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다고 칭송한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칭송에 화답하며 ‘마니피캇’을 읊는데 이 노래는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마리아가 부른 이 노래는 그 당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구원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마니피캇, 마리아의 노래는 이미 나의 노래가 된 지 오래다. 이 노래 를 부를 때마다 내 영혼이 마리아의 영혼과 일치됨을 느낀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 구절을 노래할 때마다 나는 영적인 전율에 휩싸인다. 말 그대로 주님께서 비천한 나를 매순간 돌보아 주시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고, 또한 그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 신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고, 이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녀다운 순종으로부터 나온다.

유학중에 나는 갑자기 심장수술을 받게 되었다. 1996년 6월 25일 오후, 기침이 심해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 양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손으로 등을 몇 번 두드려 보더니 폐는 이상이 없고 심장이 의심스럽다면서 당장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세 시간 정도 초음파 검사를 한 후 컴퓨터상의 사진을 10여 장 뽑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귤만한 크기의 스폰지 같은 혹이 좌심방의 문을 막아서 혈액순환이 안 돼 기침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입원하라는 통보였고, 나는 갑자기 응급환자가 되어 명령에 따랐다.

입원하던 날 하루 종일 검사를 받고 다음날 수술을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꿈이런 듯 아련했으며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전혀 두렵 거나 떨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포근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내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해오던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묵주의 9일기도이다. 가능한 한 끊임없이 연이어서 이 기도를 드려왔다. 그러는 사이에 성모님은 어느새 나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함께하시는 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 그분은 어머니다운 지혜와 사랑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언제 어디서나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신다. 반항하는 자녀 들은 그들의 반항을 순종으로 바꾸시는 사랑의 마술사이시며, 또한 순종하는 자녀들은 그들이 사랑의 단맛을 한껏 즐길 수 있는 기묘한 감각을 얻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어머니이시다. 오늘 마니피캇을 부르며, 어머니 당신을 꼬옥 껴안으며 나의 사랑을 속삭입니다. “사랑해요, 어머니!” ●

 

 

 여인 중에 복되시며

-강영구신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그대에게

가정의 달, 어린이의 달, 어버이의 달, 성모님의 달 오월이 떠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성모의 밤’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오월 한 달을 장미꽃다발과 함께 성모 마리아님께 바쳐드릴 작정입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십니다.’하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모님께 물어봅니다.
“성모님, 당신은 어떤 복을 받으셨기에 이토록 ‘복된 여인’이라 칭송 받습니까?”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출세한 남편, 잘나가는 아들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큰 집에서 호사스럽게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름을 날리며 무엇이든지 제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한다면 나는 가장 불행했던 여인이다.
나는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廣野) 같은 세상에서 큰 십자가를 지고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나는 한 순간도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잊은 적이 없다. 혼전임신으로 파혼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도, 베들므弔?동굴에서 아들 예수를 낳았을 때에도, 헤로데의 손길을 피해 멀고 먼 이집트로 피난살이를 떠났을 때에도, 열두 살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에도, 서른 살 장성한 아들 예수가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떠나 광야로 종적을 감추었을 때에도,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를 뒤 쫓아다닐 때에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며 아들 예수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할 때에도, 피투성이가 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를 때에도, 손가락처럼 굵은 대못이 예수의 손발을 꿰뚫을 때에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둘 때에도 나는 흔들린 적이 없다. 죽어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이 산 어미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때 나는 깨달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느님의 손길은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복이다.”

당신도 성모 마리아님처럼 복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두 여인의 노래에 담겨진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박상대 신부-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 벳 방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이 축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 중에 있는 친 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루가복음의 보도(1,39-56)에 근거한다.

엘리사 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그들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상봉(相逢)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의 문안으로 세례자 요한이 엄마의 뱃속에서 성화(聖化)된다.
이 상봉 을 보도하는 성서의 이야기는 많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고
이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려 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선 5 세기경 비잔틴 동방교회가 "성모님의 거룩한 옷" (블라쉐르느)을 안치 한 것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복음을 봉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동 방교회는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의 팔일축제 다음 날인 7월 2일을 축일로 지냈다.

서방교회에서는 1263년 보나벤투라(1221-1274) 성인이 성모님의 중재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 를 가지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이 축일을 도입하면서 파급되었다.
100년 후 우르바노 6세(1378-1389) 와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교황에 의해 축일이 공인되었고,
바젤 공의회(1431-1447)는 축일 고유미 사 기도문을 제정하여 더욱 장려하였고,
비오 5세(1566-1572) 교황을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공식 전례축 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7세기에 와서는 이 축일이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라는 정식 명칭 을 얻게 된다.
1969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은 이 축일을 시기적으로 합당한 "주님 탄생예고 대축일"(3월25 일)과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즉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5월 31일로 옮겨 놓았 다.


두 여인의 만남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은 두 곡(曲)의 아름다운 노래 를 담고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문안을 기뻐한 엘리사벳이 성령을 가득히 받고
마리아를 칭송하는 노래와
이에 응답하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Magnificat)
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42-45절)

이 노래는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던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1,28)과 함께 후에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성모송"의 첫 부분으로 자 리를 잡게 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 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엘리사벳의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구약성서에도 같은 유형으로 발견된다.(신명 28,4; 판관 5,24;
유딧 13,18 참조)






Annunciation and Visitation - UNKNOWN MASTER, Flemish
c. 1525 Oil on oak panel, 99 x 33cm(each) Groeninge Museum, Bruges



"마리아의 노래" (막니피캇, Magnificat)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다.
신약성서 학계의 통설은 "마리아의 노래"가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라기보다는
루가복음이 집필되던 시기 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것이며, 내용상 많은 구절이
구약성서를 본 딴 것이라고 한다.

마리 아의 노래(Magnificat)의 전체적인 구조는
한나가 사무엘을 야훼께 바친 후 불렀던
감사찬양 노래
와 흡사하다. 그때에 한나가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 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야 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당신밖에는 없으십니다.
우리 하느님 같은 바위는 없으십니다.
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아라.
야훼는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힘있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비틀거리던 군인 은 허리를 묶고 일어나게 되리라.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 시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야훼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야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 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야훼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신 을 따르면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 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는 법, 야훼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지존하신 이께서 하늘에서 천둥소 리로 우렁차게 호령하신다.
야훼는 땅 끝까지 심판하신 분, 당신께서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의 이름을 떨치게 하신다."
(1사무 2,1-10)


이 와 같이 "마리아의 노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한나의 노래"를 그 기 본구조로 하고 있다.
나아가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이 처한 시대적 위기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과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에 의한 도덕적(51절), 사회적(52절),
경제적(53절) 혁명을 신앙(信仰)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가난한 이들"(아나윔)의
구원을 희망(希望)하 는 노래라고 볼 수 있겠다.

"마리아의 노래"는 내용상 전편(46-50절)과 후편(51-55절)으로 구분되 는데,
전편은 개인(個人) 차원에서의 감사찬양이며, 후편은 집단(集團) 차원에서의 감사찬양이 다.

루가복음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신앙과 희망을 "엘리사벳 -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마리아-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내다보며 마리아의 입에 담아
노래로 불렀던 것이 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56절) 이미 만삭이 된 엘리사벳에게
봉 사하였을 것이다.
만삭이 된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그것도 한 번의 출산 경험이 없는 엘리사벳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정녀인 마리아가 무슨 경험 이 많아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상봉은 인류의 역사 안에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마리아의 엘리사벳에 대한 봉사는 그녀의 뱃속에 있는 요한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를 잉태하심으로써 하 느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인간이 되실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봉사
이기 도 하다.
얼마 있지 않아 요한은 하느님이신 예수께 빚진 은혜를 되 갚을 것이다.

결국 찬미 의 노래로 엮어진
두 여인의 만남은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죽음과 생명의 만남, 파 멸과 구원의 만남, 절망과 희망의 만남
을 의미하며,
이 만남은 세상의 구원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
◆ 2004년 ◆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장면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또 매우 흥분된 분위기가 감돈다. 마리아는 "걸음을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그랬더니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으며"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치며 마리아께 감사를 표시한다. 이 방문은 단순한 방문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메시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엘리사벳을 통하여 드러났기 때문이다. 루가 복음서에서는 맨 처음으로 "주님"이란 칭호가 사용된다.

1. 하느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요한과 예수의 탄생이 서로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표현한, 이 방문 기사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효력을 증명하는 첫번째 무대인 셈이다. 마리아에게처럼, 즈가리야에게 대한 통보는 엘리사벳에게 모성을 확립시켰고, 이 모성이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주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즐거이 맞아들이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되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근본적인 축복을 선언할 때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하고서 분명히 말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1,45). 또 이 말씀은 요한을 두고 즈카리야에게 하신 말씀의 성취도 암시한다(1,15).

2. 요한의 예언적인 축성
구약을 보면, 아직 당신 모친의 태중에서 있을 때 예레미야가 예언적인 축성을 받는다(예레1,5). 이와 비슷한 축복이 있었던 요한은, 마리아가 인사하는 순간에, 그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날뛰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런 반응이 방문 기사의 첫 부분을 구성하는데, 바로 이 반응은 메시아 시대에 가장 적절한 반응이자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서두로 나타난다(참조. 요한8,56 묵시19,7). 또한 이 반응은 요한과 예수의 특별한 유대를 표현한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요한3,29).
예레미야처럼, 요한은 예언자의 정신으로 가득해진다. "성령의 가득히 받았던"(1,41) 그의 모친의 말씀을 통하여, 그는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게 되리니..."(1,76).

3. 예수에 관한 새로운 계시
루가의 이 모든 기사는 전적으로 예수의 신비에 집중되어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았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구약의 이 표현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참조. 1역대 16,4 5,12).
또 그녀는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데, 이 칭호는 부활하신 천주 성자의 놀라운 "칭호"이다(사도2,36 요한20,13 필립3,8). 그녀는 이중의 축복을 말한다: 1)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1,42) 이 말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성성을 반영하며,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을 반향한다. 2)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1,32. 35).

4.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축복받은 이유와 마리아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리아의 신비는 전적으로 "태중의 아기"와 일치한 당신 모성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인사한 원래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태중의 아드님이 복되시기 때문에 당신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고쳐보면 알 수 잇다. 아들의 복되심과 거룩함이 어머니 안에 반영되었다. 말하자면, 아들이 그 어머니의 거룩함의 제일 원인이다. 복음사가들과 초대 신자들의 생각에는 "예수의 어머니"(참조. 요한2,1) "주님의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마리아 칭호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성은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엘리사벳의 찬사가 이를 보증한다. 즈가리야가 의혹을 가졌던 반면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하고 대답했던 가장 뛰어난 믿음의 여인이었다. 루가는 결국 마리아의 모성과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보는 셈이다.

5. 마리아의 감사
방문 장면은 곧이어 마리아의 놀라운 감사가로 이어진다. 마리아는 구세주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에 대하여 찬미 노래로 화답한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1,49).
그러나 마리아의 시각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로 옮겨간다. 그리고 마리아의 감사도 이스라엘 전체의 사건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위업을 노래한다. 과연 이 여인은 "여인 중의 여인"(참조,유딧13,18)이다.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에 대한 '마리아회'의 연구자료 중에서>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 성녀 †

일년 중 '가장 좋은 시절'인 5월은 성모님의 달이고, 해마다 5월 31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다. 묵주기도의 해를 살고 있는 올해,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면서 환희의 신비 2단의 깊고도 오묘한 뜻을 헤아리게 된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이는 곧 '이웃사랑'을 의미한다. 이웃과 하나가 되어 줌으로써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 '묵주 기도의 해'를 선포하면서 발표한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과 만나시는 장면도 환희의 신비입니다. 성모님의 목소리와 그분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존재는 요한을 '기뻐 뛰놀게' 했습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천사들이 노래하며 목자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광경도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제20항)라고 설명하고 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마을, 어느 작은 집에 사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소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며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 사건을 우리는 환희의 신비 1단에서 묵상한다. 그로부터 석 달째에 접어들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축일'을 맞게 되는데, 환희의 신비 2단의 묵상이다.
마리아가 사촌 언니 엘리사벳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언니를 찾아가 보기 위해 짐을 챙겨 유다 산골을 찾아간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 마리아가 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바로 이 순간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반겨 기뻐서 뛰노는 장면은 루가 복음(1,39-56.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 기록된 대로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 받았으며 당신 태중의 아기 또한 축복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기가 내 태내에서 신명이 나 뛰놀았습니다."라고 한 다음, "복되어라, 믿으신 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리니." 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준 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네"라고 응답한 데에 따른 찬미인 것이다.

그러자 마리아도 감격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저 유명한 '마니피캇(Magnificat)', 즉 '마리아의 노래'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노래, 마니피캇

그 중에서도 다음 구절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절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분이 당신 팔로 힘을 행사하시어 / 그 심사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부리는 자들을 권좌에서 내치시고 / 비천한 이들을 들어올리셨으며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

이 세상은 권력과 무력과 금력으로 다스려지는 곳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 '찬미의 노래'를 통해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시는 것이다. 신앙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라고 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억압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나 전쟁은 가당치 않다.
불의로 재산을 축적하거나 남의 재물을 탐내는 일도,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다.

마니피캇, 이 노래를 일부에서는 '엘리사벳의 노래'로 간주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의 노래'로 보고 있다. 5월 31일을 엘리사벳 성녀의 축일로 기리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11월 5일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가리야의 축일을 지내고 있다.

성모께서 자신을 도구로 해서 이룬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과 인류 구원 역사에 감사하며 부른 마리아의 이 노래는, 라틴어 '찬미하다'의 뜻을 지닌 '마니피캇'으로 시작되는 까닭에 그냥 '마니피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톨릭을 뛰쳐나간 마르틴 루터 같은 이도 <마니피캇 주석>에서 마리아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하느님 경외심의 표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웃사랑의 진정한 모범

마리아는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을 도와서 부엌일과 바느질, 집안 치우기 등 바쁘게 일을 하고, 함께 기도하며 장차 태어날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자, 마리아는 다시 지루하고 먼길을 걸어 나자렛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웃사랑의 전범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스승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확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성호를 긋고 '아멘'이라 응답하며 '알렐루야'를 부르고, 모두 세례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고 대성당을 지었다 할지라도, 단지 사랑만이 하느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구별 지어 준다.

다시 말해 사랑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사랑이 없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지녔다 해도 단 한 가지, 이것이 부족하다면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만일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가 내 이웃이고, 함께 생활하거나 전화로, 인터넷으로 이야기하는 상대가 내 이웃이다. 멀리 이라크에서 목말라 신음하고 있는 이들도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어떻게,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랑해야 한다....◆


[두올묵상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루가 1,39-56)

 -유 광수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누구와 만나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어떤 특별한 주제를 정해 놓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주로 일상적으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과연 우리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가?

우리들이 만나서 주로 나누는 이야기의 화제는 무엇인가?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나눈 이야기를 보면 세속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라고 했고,

마리아는 이를 받아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등 모두가 주님에 관한 이야기,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것을 영적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런 영적인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신자들이고, 수도자들이고, 성직자들이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터 놓고 자기의 영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 자신들이 영적 이야기를 나눌 소재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영적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영적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나눌 내용이 없다. 어쩌면 그마만큼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것들이 멀리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 영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이야기란 무엇인가?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주님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적인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깨닫게 된 것들을 나누는 것이다. 즉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일들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고, 주님의 은총으로 내 삶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무엇을 새롭게 깨달았으며, 어떤 일들이 내 안에서 이루워졌고 또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워지고 있는지를 나누는 것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나눈 이야기들은 전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나열한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깟"이라고 한다. 마니피깟이란 "위대하다, 장엄하다, 참으로 놀랍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니피깟이란 "주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에 관한 노래"라는 뜻이다.

 

그럼 주님께서 마리아에게만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는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다. 다만 내가 그 일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보지 못하는가?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주님의 말씀을 보고 듣지 않으니까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주님께서 매순간 우리 각자에게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영적인 의식이 없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의식에만 깨어있고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도 마리아처럼 나의 마니피깟을 부를 수 있을 때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마니피깟이어야 한다. 한 순간도 주님께서 내 안에서 위대한 일들을 하지 않으시는 순간이 없고, 또 내 주위에 펼쳐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위대한 일들을 찬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신비가이고, 인생은 살아야 할 신비이지 풀어야할 과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신비를 감상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흘러 가는 구름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오늘 살아있음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오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음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함께 사는 가족이 있음을 보고 주님께 찬미하라.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을 주님을 찬미하라. 등등 끊임없는 찬미가 즉 마니피깟을 불러라.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6)

 

성바오로가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으로 사는 사람 즉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에서 모든 곳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어떠한 막힘도 없이 자유롭게 주님을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이 되고, 작곡가가 되고, 화가가 된다.

 

한 마디로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 그것도 지칠 줄 모르는 창의성이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라고 시인 랭보의 기상천외한 시상이 나타나듯이, 또 다윗 왕이 왕이면서도 너무 즐거워 주님 앞에서 발거벗고 춤을 추었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새로운 노래 새로운 춤을 추게된다.


얼굴에 주름살을 펴고싶은가? 얼굴이 아름다워지고 싶은가? 춤을 추고 싶은가? 찡그린 얼굴을 활짝펴고 싶은가? 마음에 늘 기쁨으로 울렁거리는 삶을 살고 싶은가? 나의 영혼이 주님을찬양드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 안에서 어떤 위대한 일들을 하셨는지를 들여다 보라. 그것을 보기 시작할 때 당신의 모습은 아름답게 변화되기 시작하리라.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 얼마나 신명나는 삶인가!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 오늘 우리도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치고 그러고는 춤을 추는 하루가 되자. 마니피깟을 부르는 멋진 하루가 되자.   마리아 본명을 가지신 모든 분들에게 영명일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