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5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요한 21,17)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Peter was distressed that he had said to him a third time,
"Do you love me?" and he said to him,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o him, "Feed my sheep.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할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그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신다. 이제 베드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죽기까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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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지도자였던 간디는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변호사가 되어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1947년 7월 독립을 일구어 냅니다. 그러나 그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융화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힌두교도가 쏜 총탄에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생전에 그는 국가가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일곱 가지 조건을 이야기하며 염려하였습니다.
곧, 원칙 없는 정치, 윤리 없는 경제, 노동 없는 자본,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되풀이하여 물으신 다음에 당신 양들을 잘 돌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또한 그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베드로는 박해와 순교의 고통을 희생으로 받아들여야 함도 말씀하십니다.
간디가 이야기한 것처럼 ‘희생 없는 믿음’은 올바른 국가를 유지할 수 없는 조건이 될 뿐 아니라, 올바른 교회를 유지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희생을 회피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는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며, 우리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처럼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대성리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아마 아실꺼에요. 주로 M.T가는 장소이지요. 저 역시 신학생 때 많이 갔던 장소여서 익숙한 곳입니다. 아무튼 신학생 때 가보고서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저와 몇 분이 자전거를 탔습니다. 총 65Km의 북한강 주변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던 것입니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주변의 환경은 자전거 타는 것을 더욱 더 즐겁게 해주었지요. 그런데 사실 어제 아침, 출발을 하느냐 마느냐 갈등에 많이 쌓였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있는 간석4동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연락을 해보니, 대성리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과감하게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대성리에 도착하니, 비가 뭡니까? 오히려 해가 떠서 썬크림을 발라야 할 정도입니다. 아무튼 유쾌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탈 수가 있었습니다. 35Km를 넘어서 저희는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했지요.
“오늘 정말로 날씨가 좋네요. 비도 오지 않고, 날씨도 그렇게 햇볕으로 뜨겁지도 않고... 정말로 날짜를 잘 잡았어요.”
그런데 식사 후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비가 전혀 오지 않았던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리는 비로 우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딱 절반 정도 왔거든요. 즉,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나, 원래 가려고 했던 길로 가나 거리는 똑같았습니다. 문제는 이 비를 뚫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오랫동안 많은 비를 맞은 것 같습니다. 3시간 가까이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탔거든요. 그러나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기쁨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답니다. 만약 아주 좋은 날씨였다면, 아름다운 경관만을 바라보면서 자전거 타는 즐거움을 누렸겠지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니 사실 주변의 경관은 전혀 볼 수가 없었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을 뚫고 한명의 낙오자 없이 도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기쁨을 갖게 하더군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이러쿵저러쿵 말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의 조건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면서도 자전거를 타면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기쁨과 함께 다가오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차례 묻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말에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내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이웃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 사랑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그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다는 것이지요. 이런 체험이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행복 체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나에게 커다란 짐이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짐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내게 행복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또다른 예수님이니까요.
내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봅시다.
빠다킹신부
사랑을 영글게 하는
-김동하 신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예,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이르신 다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란 당신을 따르며 이웃과 어울리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따르는 길은 어울리는 일임을 알려주십니다. 따름은 진실한 응답에서 시작하여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퍼져가야 합니다. 응답이 진실하고 몸놀림이
부지런하기 위해서는 사랑이신 분께로(1요한 4,16) 눈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을 위하여 내놓고 이웃과 하나 되는 사랑을 십자가로
보여주십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죽기까지 몸부림치는 십자가야말로
진실한 응답과 부지런한 몸놀림이 솟게 하는 터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영글게 하는 믿는 이들의 텃밭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면서 이웃을 찾게 합니다.
따르면서 어울릴 수 있도록 내놓고 하나 되는 길을 비로소 열어줍니다.
무사유(無思惟)는 위신적 신앙으로 인도한다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20세기의 위대한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제1,2차세계대전과 세계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악과 폭력을 사상적으로 분석하고 통렬히 비판한 인물이다. 그는 1960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치하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유다인 학살을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사람이다. 당시 법정에 선 아이히만한테서 사람들이 보려 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충격적인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문제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의 사람이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무사유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평범한 악'이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㰡’너는 나를 사랑하느냐?㰡“ 베드로는 슬펐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슬프게 했을까? 예수님이 당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예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30)라고 고백했지만 곧이어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했을 때 그분을 꼭 붙들며 반박했기 때문에 사탄이라고까지 비난받은 적이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삶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던 경험이 있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이 구체화되도록 세 번의 말미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삶 안에서 얼마나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 생각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사유의 신앙, 무사유의 사랑은 위선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신동원 신부 -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또한 사랑해야 할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삶의 의미를 가져다 주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어떤 어려움과 시련도 함께 잘 이겨낼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은 아랑곳없이 그를 위해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어떤 것일지라도 참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세 번째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특별히 시몬 베드로에게 사랑을 약속하시며 앞으로 주어질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알려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며 시몬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나서 시몬에게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아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처럼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사랑을 다짐받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아마도 바로 며칠 전 예수님의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세 번씩이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의를 저버렸던 베드로의 부끄럽고, 부족한 마음을 다시금 사랑의 다짐으로 회복해 주시며,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오히려 고백하며 위안을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제 앞으로 겪게 될 숱한 고난과 어려움에서 끝까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모습을 본받아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해 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린 양들을 시몬 베드로에게 맡겨 주시며 “나를 따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희망과 새 생명을 다시 얻은 우리에게도 오늘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딸들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래서 부끄럽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임에도 예수님의 물음에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예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응답하며,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장현우 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를 자주 성찰케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과연 그분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분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과연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나 자신과 주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자주 되물어 져야 하는 질문들인 것 같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며,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했던 베드로는, 오늘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에, 주님. 당신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로 향한 그의 열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랑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묻습니다. 두 번, 세 번,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면서도, 점점 그 의미는 약해지는 듯 합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이러한 주님의 질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주시는 듯한 주님의 모습에 베드로는 슬퍼집니다. 또한, 너무나 자신 있게 대답하고도,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과거를 생각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도, 두려움에 떨며 숨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보다 더 확고한 마음으로, 그리고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대답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움은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 부인하도록 했지만, 사랑은 세 번 고백하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이나 사랑을 고백하게 함으로써, 세 번의 배반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열정을 보시고, 그 사랑을 보시고, 당신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어부였고, 배반자였던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학식이나, 언변이나, 어떠한 능력을 보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나약함이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 순수한 열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에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냐? 네가 나를 진정 사랑하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이며 배반자라는 것과,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사랑하느냐?"
-나궁열신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장담을 하던 베드로였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베드로는 죄와 허물이 많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틈만 나면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첫마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그분은 베드로의 잘못을 책하지 않으셨다.
나는 40일의 피정을 한 적이 있다. 마지막에 그분을 감히 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데 내가 만난 그분은 나의 과거를 알고 계셨고 놀랍게도 40년 전 내가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나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누었던 사랑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세상의 부모들을 보라. 자녀들이 자라면서 잘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기껏해야 “네가 자랄 때 내 속을 좀 썩였느니라”가 아닐까?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마태오의 아들 요셉아,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느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고백을 하는 베드로가 무척 부럽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세 번씩이나 다짐을 받으신다. 이미 마태 26,33-34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한다. 그때에 예수님은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말씀을 하신다. 실제로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른 후 슬피 울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심으로써, 세 번이나 다시 사랑을 긍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잘못을 따지거나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그를 인정해 주시고 새로이 사랑을 요구하시는 모습을 복음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잘못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려고 노력하느냐를 보시지 우리의 죄를 먼저 생각한 분이 아님을 알려주시고 계시다.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안에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드로의 자세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모습과 지금의 대답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자신만만했던 어투가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고 겸손된 자세로 바뀐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을 하도록 사랑의 차원을 바꿔 주셨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흔히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 자기 마음대로 차지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혹은 상대방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의 자유는 없어지고 의존적인 사랑에는 자신의 자유가 없어진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사랑은 이런 구속이나 지배를 초월한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베드로가 선택을 받은 으뜸제자로서의 신분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위치임을 나타내고 있다. 최고 지도자의 위치는 바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주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질문 속에 답이 있다
-김귀웅신부-
어릴 때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를 잘 봐야 한다. 문제 속에 답이 들어 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문제를 들여다 봐도 문제 안에 답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을 잘 살펴보면 최소한 “~이 아닌 것은?”을 “~인 것은?”으로 잘못 봐서 아는 것을 틀리지는 않는데, 다 아는 것도 문제를 잘못 읽어 틀린 적이 참 많다. 그러나 정작 질문 안에 답이 들어있다는 것은 시험 문제가 아닌 인생의 문제들 앞에서 깨닫게 되었다. 점수 1점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닌,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해답은 언제나 질문 안에 들어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무엇이더냐? 도마야, 네 정체가 무엇이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가?” 나 자신의 모습과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을 하게 될 때에는 빗나가는 자신을 다시 올바로 세울 수가 있다. 인생에서는 틀림없이 질문 안에 답이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신앙 역시 질문 안에 답이 있음을.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다운 모습인가? 내가 과연 하느님의 자녀인가?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한다면 이미 신앙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그분은 당신의 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고, 또 나로 하여금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모든 좋은 것은 삼 세 번인가?
-박상대신부-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요한복음 17장이 보도하는 “대사제의 기도”를 미사전례의 복음으로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의 일치(一致)를 얼마나 원하시고 또 강조하고 계신가를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고별의 밤을 생애(生涯)의 어느 밤보다 길게 보내시면서, 그 밤의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셨다. 제자들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가운데, 곧 들이닥칠 수난과 죽음의 재난을 내다보시며 바치시는 기도이기에 이 기도는 더욱 더 간절함과 애절함을 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이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가 모든 일치의 원리며 원칙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일치에는 조건이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는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바램이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어떤 흠이 된다거나 ‘옥(玉)에 티’가 아니라 바로 위반이며 범죄이다.
긴 고별담화(요한 13-16장)와 고별기도(요한 17장)를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그대로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자신을 길을 가셨다. 예수님께서 대사제와 원로들의 손에 넘어가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수제자 베드로는 예언대로 세 번이나 스승을 배반하였다.(마태 26,69-70; 요한 18,15-18.25-27)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자 스승을 팔아넘긴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마태 27,3-5) 다른 모든 제자들도 스승을 버린 채 도망치고 흩어진 가운데(마태 26,56; 마르 14,50)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오직 한 제자의 눈앞에서(요한 19,25-27)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복음선포의 마지막 지상사명을 내리시고 승천하셨다.(마태 28,16-20; 루카 24,51)
이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파견과 강림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의 마지막 추가편집 부분인 21장의 내용 중 “베드로와 예수의 관계회복과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21,15-19)에 관한 내용을 듣는다. 죽음 직전에 공동체의 일치를 그렇게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21,14), 베드로 사도를 따로 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고, 그에게 주님의 양떼를 맡기심으로써 베드로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아울러 베드로의 남은 삶이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신다. 무대는 티베리아스 호숫가, 베드로가 제자로 불림을 받기 전에 본업(本業)으로 고기를 잡던 갈릴래아 호수다.(마태 4,18-20) 그런데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들이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을 때,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153마리의 고기를 한꺼번에 낚았다. 그리고 뭍에 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조반을 함께 나누었다.
조반이 끝나자 예수님께서는 단독으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신다. 예수님의 의도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 그리고 이 마지막 발현에서 시몬 베드로를 따로 세워 아주 중요한 것을 맡기려 하심이 분명하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누구인가?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뵙고 형인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하자 둘이 함께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시몬을 알아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하시며 불렀던 이름이다.(요한 1,41-42) 이 이름을 오늘 다시 부르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가 부름을 받기 전의 이름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함으로써(요한 18,15-18.25-27) 제자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명(召命) 이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제자의 자격이란 한 번의 소명으로, 한 번의 축성으로 주어지고 또 그렇게 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있는 그 순간이 바로 “제자로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사랑을 다짐받는다. 이는 처절하리만큼 잔인한 과정을 통하여 얻어내는 다짐이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세 번씩이나 던지는 스승의 질문에 스승을 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베드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만다. 스승을 배반하고 흘렸던 그 때와 같은 눈물일까?(마태 26,75)
아니다. 이는 배반했기 때문에 흘리는 통한(痛恨)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환희(歡喜)와 간절함과 다짐의 눈물이다. 이제 베드로는 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주님의 양떼를 잘 “돌보는 것”임을, 이들을 “하나 되게 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19절)
"존재의 질(質)"
-이수철신부-
사도행전을 읽으며 깊이 묵상하는 순간
‘참 팔자가 센 바오로의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시 사전을 펼쳐 ‘팔자가 세다’라는 뜻을 찾아보니
‘기막힌 운명을 타고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람 눈에 기막힌 운명이지
믿음의 눈 있으면
기막힌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팔자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어떻게 충만히 존재하느냐는 존재의 질입니다.
찬가 중 두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당신 뜻에 의해 생겨났고 존재하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나라로 옮겨 주셨도다.”
두 구절 모두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물은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합리주의 철학의 시조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언명했고,
존재론의 철학자들은 이를 뒤집어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라고
옳게 말했습니다.
다음 유다인 랍비 여호수아 헤쉘은
다음과 같이 이를 바로 잡았습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위의 찬가 구절과 일치하고
우리의 성소에도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새삼 '존재는 관계'라는 진리를 실감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처럼
무명의 꽃이 이름을 불러 줌으로
비로소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내용과의 비교가 적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으므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삶의 질을, 존재의 질을 결정합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충만히 존재하는 삶이며
사랑이 얕아 질수록 빈약한 존재의 삶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존재의 질은 천차만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례로 불림 받지도 않거나,
수도자로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흑암의 권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고
무명(無名)의 사람들 되어 방황하지는 않을까요?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복음의 베드로의 삶,
인간적으로 보면 참 기구한 운명입니다.
주님을 만나 팔자 센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팔자가 센 사람들,
바로 수도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파란만장한
팔자 센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경이란 생각이 듭니다.
기막힌 운명 속에
하느님 은총의 발자취들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끈 꼭 붙잡아야 구원입니다.
이미 주님과 공동운명체가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삶에서
주님을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요?
완전히 무(無)요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단한 삶을 비추는 위로와 희망의 빛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음의 사람들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다음 시편의 고백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23,4).
주님과의 깊어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 중에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신 후
‘내 양들을 돌보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베드로의 삶의 길을, 삶의 의미를 확고히 잡아 주신 후,
부활하신 주님은 마지막으로
‘나를 따라라.’ 명령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잔치에 우리를 불러 주셔서
당신 말씀과 성체를 선사하시어
충만한 존재로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알아야 믿을 수 있고, 알아야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는 것
-이봉하수사-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위해서는 부모형제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내놓기도
합니다. 반면 인간사 안에서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삶이 무미건조할까요.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고는 하지만, 저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조건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누구이든간에 첫째 둘째도 셋째도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상대를 목숨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다 하더라도
껍데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뿐 아니라 마음속
생각까지도 낱낱이 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앞장서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많이 게을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핑계가 없어야 합니다.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없는 시간도 쪼개어
함께 있고 싶어하고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상대에 대해 다 알아야 속이 시원하듯,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 앞에서는
조건도 순서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조건을 따지는 순간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으로만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차라리 날 때려요>
아이들 사이에서 ‘이빨’ ‘말빨’이 세기로 정평이 난 수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이 수사님의 특징은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지칠 줄 모르는 입담에 있습니다. 이 수사님은 아무리 몰지각한 행동을 한 아이라 할지라도 폭력이나 욕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말로 해결하십니다.
그런데 때로 그 ‘말’이란 것이 더 무섭습니다. 아이가 완전히 항복할 때 까지 몇 시간이 흘러도 상관없습니다. 조근 조근, 차근차근 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왜 그게 잘못되었는지, 당신의 풍부한 인생경험과 나름대로의 철학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설명하십니다.
큰 문제를 일으킨 한 아이가 있었는데, 수사님에게 대들고, 따지고, 협박하고 난리였습니다. 그래도 수사님은 개의치 않습니다. 조근 조근, 친절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렇게 이야기하고, 했던 이야기 반복해서 다시 또 하고 하다 보니 어언 새벽 2시가 넘었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아이가 급기야 수사님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수사님, 차라리 날 때려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는군요. 지금 시계가 몇 신지 아세요. 차라리 맞는 게 백번 낫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해서 던지십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배신에 대한 질책성 질문이 분명했기에 죄송스런 마음에 베드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제 됐겠지,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십니다. 두 번, 세 번. 그 순간 베드로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거듭되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배신을 때린 죄 값으로 차라리 심한 욕설을 던지시든지, 벌을 주시던지, 매를 맞던지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질문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거듭된 질문을 통해 당신의 수난 때 수제자 베드로가 보여준 세 번에 걸친 예수님 부인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창피하게 혼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에 걸친 배신으로 인해 무너졌던 스승과 수제자 사이의 관계를 세 번에 걸친 질문을 통해 다시금 복원하십니다. 3번에 걸친 배신으로 인해 형편없이 실추된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회복시켜주십니다.
관계의 복원, 수제자 권위의 회복,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거듭된 배신에도 불구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아침 우리들을 향해 거듭 질문을 던지십니다.
“아들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답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정말 제가 형편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바로 당신입니다. 주님, 부족한 제 사랑을 받아주십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제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베드로의 응답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사도 25,13ㄴ- 21 (이미 죽은 예수를,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복 음 : 요한 21,15-19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세계사에 있어서의 ?배반?을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부르투스, 너 마저도…? 하며 죽어갔던 시저를 떠올리실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국노 누구누구를 생각할 수 있고,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배반으로는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사람에게 제일 힘든 것이 이 측근의 배반일 것입니다. 누구보다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처이지요. 이러한 배반은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고 일어서기 힘든 치명적인 아픔으로 일생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사에는 위에서 말한 배반자 못지 않은 배반자가 한 사람 있지요.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믿었고 또 당신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수제자로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지도했던 사람, 바로 베드로 사도입니다. 주님인 예수님께서 어려움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을 때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나 말 그대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천벌을 받아도 그 분을 모른다고 잡아뗐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의 배반은 역사에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배반자로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의 삶이 과거의 배반을 기워 갚고도 남을 만큼 성실하고 깊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도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물으시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그 날 아침상이 베드로에게는 얼마나 힘든 자리였겠습니까? 차마 얼굴을 들고 주님을 뵈올 수 없었던 베드로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21,15)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21,15)
예수님께서는 다시 수제자로서의 직위를 베드로에게 회복시켜 주시지요. 곧 이어 두 번째로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6)
베드로가 고백하지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21,16)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세 번째로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7)하고 물으시자 마음이 슬퍼진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주눅들고 자신 없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힌21,17)
교회를 맡기시며 수제자의 길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주님은 그 외에 다른 것은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지요. 다시는 안 볼 사람같이 야단치시고 큰 벌이라도 내리셔야 옳을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씻어주실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좌절에 빠져서 감히 주님을 쳐다보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수제자의 자리를 회복시켜주시고 용서하시며 ?나를 따라라.?(요한21,19)고 말씀하시지요. 베드로의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몇 번 묵상한 바 있으므로 그 부분은 접어두고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은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
예수님께서는 벌써 두 번째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처음 이 말씀을 하신 곳은 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고기잡이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시고 부르셨지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4,19)
그 후 3년을 함께 지내시고 지금 감히 스승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베드로의 깊은 상처를 사랑으로 싸안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
두 번째 부르심이지요. 그런데 이 두 번째 부르심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자기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룩한 제자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었던 베드로가 왜 첫 번째 부르심에서는 낙오자가 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함께 살피고 묵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믿음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4,19)고 청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정말 놀라운 결단이었지요. ?따르라?는 그 한 마디에 베드로는 평생 호구지책이었던 배도 그물도 모두 버렸습니다. 장모가 있는 것으로 봐서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그는 가정도 가족도 버리고 스승을 쫓아가 3년 간을 동고동락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결단도 완전한 투신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나오지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19,20)
부자 청년은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재물이 아까워서 그 길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카리옷 사람도 돈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고, 베드로는 목숨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던 이들은 왜 이렇게 좌절해야 했을까요?
베드로의 삶의 과정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제자들은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지요. 그 때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다 물결은 사나와졌는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유령인줄 알고 겁에 질린 제자들을 예수님은 안심시키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지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14,28)
?오너라.?(마태14,2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곧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고 말지요. 주님을 보지 않고 풍랑을 봤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맞추어져 있어야 되는데 인간적인 걱정에 관심이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3년 후에도 베드로는 물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겠다고 장담을 하고 가다가 곁눈질을 하게 되지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목숨 때문에 산산이 흩어진 것이지요. 유다와 부자 청년도 예수님을 따른다고 가다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한 순간 무너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랐는데 주님을 바짝 따라간 것이 아니라 멀찍이 서서 따라갑니다.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줄행랑 칠 준비를 하고 따랐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마르14,54)
거리를 두면 유혹이 끼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실패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경우는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못 믿을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적당히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바짝 다가들어서 서로의 믿음을 확인해야지요. 더군다나 신앙 생활에서 적당한 거리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도, 제자들도 하느님과 거리를 두면 둘수록 유혹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신부님, 제 남편이 성당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적당히 다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처구니없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신자가 비신자의 말을 듣고 믿음 생활을 하려드는 꼴이지요. 그러면 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 아닌 남편을 하느님께로 다가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되는데 오히려 비신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곁눈질할 새 없이 주님께 바짝 따라 붙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 순간부터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는 숱하게 많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부가 되기 위해 소신학교에 입학했는데 편입생과 입학생을 합하여 약 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생은 34명밖에 되지 않았지요. 대부분 세상의 것을 곁눈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방학 때 예쁜 여학생을 보고 와서는 갈등을 겪고 짐을 싸서 나가고 하는 식이지요. 더구나 방학이면 술도 마시고 밤에 늦게도 다닐 수 있는 신학대학생 때는 더 많은 유혹에 휘둘리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어두운 밤을 마귀들이 활동하는 시간으로 보았지요. 밤에 이루어진 일 중에 거룩한 일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제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하느님께 바짝 달라붙지 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다보면 유혹이 찾아오지요. 그래서 상처받는 사람도 많고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부르심에 실패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요한21,19)하고 말씀하시지요. 베드로는 적당히 따르지 않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온전히 바짝 붙어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소명을 수제자로서 거룩하게 완성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초대교회 교황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범한 실수를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과거의 아픈 상처를 사랑으로 씻어주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베드로는 단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한 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믿음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님을 함께 믿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이것이 부활을 증거 하는 삶이지요. 모든 것에 앞서, 곧 생명과 재물과 자식보다도 주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강영구신부-
사도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한 4,16)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 즉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다짐하듯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고 싶어서 세 번 씩이나 묻습니다.
그가 비록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물처럼 흐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그릇이 되면 그 사랑이 흘러넘쳐 양들에게 미칩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지금 저와 당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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