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6일 부활 제 7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22)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에 관한 일들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에 대한 증언을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
새벽을 열며
어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유산의 대부분은 부모가 평생을 땀흘려 일구어 놓은 포도밭이었지요. 이 포도밭으로 인해 젊은이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먹고 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준 고마움의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젊은이는 물려받은 포도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발전을 시킬 것을 다짐했지요.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포도밭, 이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포도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타리에는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울타리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뒤, 이 포도밭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점점 망가져갔습니다. 울타리를 베어버리자 사람과 짐승들이 마음대로 포도밭에 들어와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포도가 열리진 않지만 포도밭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도 나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위의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울타리보다는 포도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포도나무가 없다면 포도밭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니까요. 그러나 울타리 없이는 포도밭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듦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도와준 가족, 친구,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고생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주셨으며, 선생님들은 정성껏 지도하여 훌륭한 인재로 길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인정과 우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었던지요? 그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는 당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 베드로는 마침 뒤따라오던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어떻게 될 것이냐고 여쭈어 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다른 제자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그런 문제에 관심 가지지 말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잘 따를 것인지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굳이 이러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른 제자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고마운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계심 그 자체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 섞인 말은 이제 그만~~
빠다킹신부
하늘의 시민
-김동하 신부-
다시 살아나신 스승님을 뵙고 제자들은 기뻐 뛰었습니다.
기뻐하던 제자들에게 스승님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
베드로가 스승님께 요한의 장래를 묻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고,
쟁기에 손을 대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루카 9,59-62)고
가르쳐주셨습니다.?가르침대로라면 제자는 하늘을 선포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하늘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필리 3,12-21).
하늘의 시민이란 뒤에 있는 땅을 마음 편히 놓고 앞에 있는 하늘을 향하여
내달리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상을 얻으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앞에 놓인 사랑을 향하여 내달리는 사람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시류 속에 확고한 믿음을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는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도를 받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고, 성전은 기록되지 않은 형태로 교회의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과 실천적 관행을 일컫는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복음서임을 밝히고 있다.
요즘 세간에 예수님에 관련된 책이나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 「다빈치 코드」·「유다복음」·「유다가 전하는 복음」, 다큐멘터리 '예수의 잃어버린 무덤',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강해' 등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다. 심지어 기존 그리스도교 신자들마저 신앙의 혼란에 빠지고 있다. 개신교는 이에 강력히 대처하고 있지만 가톨릭은 일부 성직자만이 비판적이다. 우리 사회가 다원주의화되다 보니 기존 종교의 근본마저 상대화하려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사실이 아닌 '픽션(fiction)'이 '팩션(faction)'이라는 기교로 '팩트(fact)'로 수용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교회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에 대해 교회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를 향한 외부의 도전은 때로는 교회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대중문화와 소통하려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과 기록을 분명히 하였고 그 모든 것이 참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다양한 가치관을 쏟아내는 대중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주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시류에 쉽게 흔들리는 짝퉁 신앙인이 될 것이다.
“너는 나를 따라라?”
-신동원신부-
5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요즘 저 개인으로서는 늘 둘째, 넷째 주말이 되면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왜냐면 초중고 학생들이 2, 4주 토요일은 수업이 없어 학교를 가지 않으니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시간도 좋겠지만 그래도 주일을 지키면서 가족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혼자서 걱정을 한답니다.
5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날들을 보내며 서로에게 기쁨과 감사, 그리고 사랑을 나눴던 이 시간도 벌써 다 지나가고 마지막 주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생명과 세상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시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참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부활의 시기도 이제 곧 다가 올 성령강림 대축일 맞이하며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시기는 이제 곧 마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삶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주어질 마지막 그날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베드로에게 들려 주신 말씀처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는 나를 따라라”하시며, 부활을 체험한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살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모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세상과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삶 전부를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삶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제자들처럼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 자신뿐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순간까지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각각 다른 모습과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삶안에서 예수님과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따를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받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될것이며, 그 사랑을 고백하고, 전하며, 나누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독서> :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를 소중히 사용하는 바울로
-경규봉 신부 -
로마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바울로는 드디어 로마에 들어갔다. 그는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2년 동안이나 유대 법정이나 이방 법정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이제 복음은 로마와 그리고 로마 교회로부터 ‘땅 끝까지’(1,8) 퍼져나갈 것이다.
복음 선포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당국자들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을 것이며,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배려 때문에도 방해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율법 엄수주의는 이방 선교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이방 선교를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해왔다. 이제 복음 선포는 이러한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바울로는 로마에 사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말하였다. 자신은 율법을 거스른 적이 없었으나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소망인 부활의 문제 때문에 갇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들어주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 그분은 온 이스라엘의 희망인 동시에 온 인류의 희망이다. 따라서 자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유대인의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온 인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복음 선포는 세계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졌고, 로마로부터 전 세계로 전파되어 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바울로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허락하셨다. 바울로는 감옥에 갇힌 것을 기회로 하여 복음 전파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겼다. 물론 그 자신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없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울로가 알 수 없게끔 작용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때때로 악을 허락하시는 까닭은 악을 통해서 더욱 큰일을 하시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악이며, 더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 악과 고통 속에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담겨져 있다. 때문에 신앙인은 악과 고통 속에서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신앙인은 악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바울로는 로마에서 경비병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셋집을 얻어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맞이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수많은 방해를 받고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록 거주의 제한을 받기는 했어도 아무런 방해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 곳에 머무름으로써 그는 기도에 잠심할 수 있었으며, 하느님과 더 깊이 만날 수 있었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신학을 키워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소중히 사용한다. 비록 주어진 여건과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할지라도 포기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이끌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주어진 여건과 상황을 나름대로 소중한 기회라고 믿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1-2)라는 말씀대로 꾸준히 하느님을 전한다.
오늘 악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을 꾸준히 선포하는 삶을 살자..............◆
호기심과 침묵
-이봉하수사-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침묵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선지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꼭 선지자가
아니라도 일상 안에서 자주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침묵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침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 무지에서 오는 것,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켜야 하는 것, 정의와 선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침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하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분위기 반전을 위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오히려 침묵을 승화시킨
경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호기심을
떠나 다른 제자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다른
제자들처럼 침묵을 지켰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인간의 나약성과 침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판단은 호기심에서 출발합니다. 반대로 침묵은 사랑 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도 있고, 이웃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 성심 성월 동안 깊이 묵상하였으면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승국신부-
<왠지 모를 안도감>
오늘 요한 복음사가가 지칭하고 있는 한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고 있는 그 제자는 누구일까요? 여러 정황을 고려해봤을 때, 요한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틀림없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언제나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앞 다투어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애를 썼는데, 때로 지나치다보니 그런 모습들이 복음서 여러 곳에서 감지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베드로는 사도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요한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지나친 관심과 견제에 약간 못마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하십니다.
“요한이 어떻게 되든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위 말씀은 베드로 너는 왜 그렇게 요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요한은 요한 나름대로 길이 있고, 베드로 너는 너 나름대로 길이 있으니, 서로 비교하지도 말고, 서로 미워하지도 말고 너는 너 생각만 해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요한과 베드로 사도의 경쟁을 바라보며 그들도 역시 인간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에 젖어듭니다.
오늘 요한 사도의 삶을 잠깐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 요한은 어부였습니다. 이웃이었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성격은 ‘천둥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로 과격하고 급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즉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요한은 그 동네를 불살라버리려고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심도 많았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오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독차지하려는 마음도 강해서 자주 다른 제자들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한 가지 떳떳하게 내세울 것이 있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 그의 마음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불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었던 요한이었기에 예수님의 수난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이 줄행랑을 놓았지만 끝까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용감하게도 대사제의 집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받으시는 광경을 지척에서 지켜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 요한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부활절 새벽, 빈 무덤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습니다. 이 모든 모습들은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불같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한때 과격한 성격,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 무척이도 소유 지향적이고도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요한이었지만, 스승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 요한 자신의 오랜 노력을 통해 요한은 서서히 전과는 전혀 새로운 참사도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요한의 급하고 과격하고 편협된 성격은 온화하고 관대하며 겸손한 성격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요한의 변화는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하나의 큰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편협 되며, 이해 타산적입니다. 죽어도 손해보고 싶지 않습니다. 늘 나와 남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내리누르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신앙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변화, 또 다른 새 출발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힘겹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부활시기의 에필로그(맺음말)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부활시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걸맞게 오늘 미사에는 요한복음의 끝 부분이 봉독된다.(21,20-25)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이 15-17장과 더불어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단독으로 내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았고, 그 사랑 위에 당신 양떼의 사목(司牧)을 맡기셨으며, 아울러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하셨다. "나를 따라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따라 나섰다. 그 뒤를 애제자(愛弟子)가 따르고 있었다.(20절) 자신의 미래를 계시 받은 베드로는 애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예수께 물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수제자(首弟子)와 애제자(愛弟子)가 차지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위상(位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앞서간 복음에서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은 베드로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제자의 위상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는 호기심뿐 아니라 경쟁심도 다소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따져 볼 때 이 호기심이 베드로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공동체를 포함한 후기 편집자의 호기심이다. 역사적 사실과 시간상의 간격을 따져 볼 때 원래의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점에 베드로는 이미 순교하였고(64-67년경), 요한은 아직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스승의 사랑을 받던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다.(23절) 그런데 애제자 요한도 결국은 100년경 도미씨아누스 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21장의 후기 편집자는 애제자가 뒤따르는 장면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호기심과 경쟁심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셨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예수께서는 애제자의 미래가 베드로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추종만을 요구하신다. 사실 제자들의 제각기 갈 길은 예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다. 제자는 오직 스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제자 됨의 본성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공동체의 일치를 바라셨고,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성원 모두의 강압적이거나 획일적인 추종은 원치 않으셨다. 즉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획일(劃一)은 예수님의 원의(願意)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서로의 비교(比較)나 경쟁(競爭) 등, 우열(優劣)가림을 통한 획일적인 시도의 발상이 적지 않게 있다. 자신의 신심(信心)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신심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믿음의 공동체가 각별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신부(神父)로서 이렇게 사는 데 저 신부는 왜 저렇게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남을 험담하면 그것은 일치를 깨는 일이며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고 그 안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는 일치를 도모하는 일이다. 어떤 모양으로 살던 삶은 자신의 몫이다. 그저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데 익숙해야 할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무릇 각자의 몫이겠지만, 천상(天上)의 삶은 공유(公有)하는 삶이다. 거기에는 차별(差別)도 열외(列外)도 없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이미 천상의 삶을 공유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오시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恩師)가 꼭 필요한 것이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불태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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