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4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23)
The glory that you have given me I have given them, so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one, I in them and you in me, that they may become completely one, so that the world may know that you have sent me and have loved them even as you have loved me….”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다음, 당신을 믿는 이들이 모두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께서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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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일치하여 계신 예수님만이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 동시에 당신께서는 하느님과 일치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도 그분과 일치하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아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생명과 연결된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혜는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잠언 3,18)가 된다고 하였고, “당신을 앎은 온전한 정의이고,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지혜 15,3)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없기에 망할 것이라 하고(호세 4,1.6 참조), 살고 싶으면 하느님을 찾으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고 있습니다(아모 5,4 참조).
오늘 복음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고 또한 우리와 일치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알려 주심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앎은 단순히 ‘하느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혜로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가져다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새벽을 열며
한 인디언 추장이 나이가 들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장은 부족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덕망이 높은 세 명의 용사를 불렀지요.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표적이 될 만한 것을 하나씩 가져오너라. 그러면 너희들 중 한 사람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겠다.”
용사들은 전력을 다해 정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중요한 물건들을 찾아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우선 첫 번째 용사는 아름다운 꽃을 추장에게 바쳤습니다. 두 번째 용사는 기암괴석을 표적으로 제시했지요. 그러나 추장은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용사는 빈손으로 내려와 추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추장님, 산꼭대기에 올라보니 건너편에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지금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추장은 세 번째 용사에게 추장직을 물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명예만 바라보며 산에 올랐으나 이 용사는 우리의 미래와 행복을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보다는 ‘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우리를 만들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각자의 우리이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는 상처와 아픔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는 그 해법을 바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에서의 탈출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렇게 기도하시지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십인십색’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마다 다 제 각각이어서 도무지 누구와 하나가 되어 산다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심지어 일심동체라고 말해지는 부부관계에서도 그렇고, 피와 살을 나눈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그렇지요. 물론 저마다 일치된 가운데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지만 살다 보면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는 하나 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높고,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재려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내가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도 여기에 한몫을 하지요.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저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줘야 합니다. 사람은 다 제 잘난 멋에 산다는 말도 있지요. 그 제 잘난 멋을 인정해주어야 그 사람도 마음이 열리고 다른 사람의 잘난 멋을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바쳤던 기도의 내용처럼 서로 하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몸을 이루는 지체들
-김동하 신부-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하여 줄기차게
하느님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빕니다. 나아가서 믿는 이들을 씨앗으로 삼아서 세상이 아버지를 믿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몸의 지체들은 모두 한 지체는 아니지만 더 요긴하고
덜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1코린 12,12-31).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몸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찾아 계발하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몫을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받은 몫을 다른 지체를 위하여 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방식대로 몸을 짜 맞추시면서
지체들이 분열하지 않고 서로 돌보기를 바라십니다.
배려하는 마음, 하나 되는 마음
-김민수 신부-
◆"신문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23초. 후배에게 커피 타주는 시간 27초. 버스 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 4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 1분이면 충분합니다."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최근 지상파를 통해 내보내는 공익광고 '타인에 대한 배려' 편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라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게 배려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살맛 나게 만든다.
어느 고등학교에는 학생들을 위해 매일 붕어빵을 굽는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면 배고프니 간식으로 붕어빵을 구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처지에 관심을 갖고 무언가 나누고 싶은 마음, 배려하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짱"임에 틀림없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배려다. 짐 든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는 아이, 초보 운전자에게 양보를 해주는 사람들, 독거노인에게 도움을 주는 자원봉사자들. 바로 이들이 베푸는 배려 때문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다.
“이 사람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신동원 신부 -
오늘은 불교신자들의 가장 큰 축제요, 기쁨의 날인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신앙 안에서 이날을 함께 축하드리며, 또한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그들이 본받아 세상 안에서 함께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길 저 또한 작음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제 사랑하는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것에 이어서 제자들의 활동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며,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일치의 공동체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한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진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며,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아 모시고, 그 사랑 안에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 안에 항상 머물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일치를 이룬다는 것.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때때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서 처럼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의 일치를 위해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 해 주시는 모습안에서 지금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하나된 사랑의 모습은, 죽음까지도 감히 갈라 놓을 수 없는 우리 신앙 공동체의 큰 힘이며, 본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의 사랑으로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모든이에게 당신 안에서 하느님과 당신이 이루신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는 그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 오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생을 바치셨다.
-나궁렬신부-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신자들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상처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히 본당에서 신자들을 대표해서 봉사하는 분들이 상처를 주고받는 아픔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분들에게 아쉬운 점은 사회에서 봉사하는 것과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봉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당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봉사여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하느님은 작아지고, 자신을 감추면 감출수록 하느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생을 바치셨다. 예수님은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당신의 모든 행동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바로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분은 당신은 모두 감추시고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시려고 노력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분은 아버지가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로써 파악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일만 하신 것이다. 결국에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길을 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신 분이다. 당신을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나와 주님이 하나가 되면 나는 죽고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시게 된다. 이런 신앙인이 성당에서 봉사를 하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앙 공동체에 일치를 이루는 데 공헌을 하게 된다. 내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이 하시면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장현우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의 마지막 만찬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과 용서에 대해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만찬을 통해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그들의 벗이 되어주셨고, 또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종의 모습까지 보여주셨으며, 끝내는 그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기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 곁을 떠난다는 사실에 못내 아쉬워하면서, 지금껏 가르쳐 왔던 것들을 다시금 되새겨 주십니다. 또한 단 하나의 계명, 새로운 계명을 주시며, 당신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계명을 지켜, 모두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시고, 이제는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사실 제자들은 타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스승을 바라보며, 군중들과 함께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곧 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계시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 드러나게 될 스승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제자들보다 주님께서 오히려 더 많이 걱정하고 아파하시는 듯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현실적인 기대가 꺾이고, 희망이 사라져, 뿔뿔이 흩어졌을 때, 오늘의 이 모습을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당신과 아버지의 일치 안에 머물기를 바라시며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함께 있는 것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부활 시기를 마무리 하고 있는 교회가, 주님의 만찬 이야기를 다시금 들려주는 것은, 이 만찬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여 부활을 체험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뜻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는 이 만찬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도 희망을 잃었지만, 부활을 체험하면서 다시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기도하셨던 사실을 잊고 지냈지만,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전의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언제나 기쁘고 희망 찬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잊고 절망하기 보다는, 언제나 우리와 하나 되시고자 하시는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시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가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의지는 이미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바오로 사도께서도 밝히고 있는 것이다(에폐 1,4 참조)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것이 여기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 때 구체적으로 우리 각자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점이다. 그분은 이미 당신의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마음 든든한 일인가? 우리를 위해서까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모든 사람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피 흘리는 고통과 죽음으로써 사랑하시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그 기도가 결실을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때로는 마음 조리면서, 아프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1-22절)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최대의 소망이었다. 하나가 된다는것은 제도적인 일치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일치이다. 예수님께 나타난 아버지와의 일치는 사랑과 죽기까지의 순명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사랑안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관계가 성령이며, 성령 안에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나"와 아들인 "너" 사이의 완전한 사랑의 관계이다. 완전히 자신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로 하나이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각자는 모두 다르다. 모든 것에 있어 다른다. 이 다른 우리들이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살고있는 그 곳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순간순간을 살아 간다면,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으로 결국 나타나게 될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 안에 하나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되는 것이 일치가 아니라, 여러 모습을 통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삶이 되어,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은총을 구하자.
대사제의 기도 제3부 : 미래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간구함
-박상대신부-
대사제의 기도 제2부(17,9-19)는 남아있을 제자들을 위한 간구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남아 있는 제자들도 하나 되게 하시며, 그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그들도 진리를 통하여 거룩해지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늘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20절)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남아있는 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됨으로써, 이들의 복음선포와 증언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 즉 미래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대사제의 기도 제3부(20-26절)의 내용은 제자들의 파견을 통하여 얻게 될 미래의 제자들 역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본받아 하나가 되는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깨달아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비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도 제자들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다. 그들이 제자가 되면 자동적으로 대사제의 기도 제2부의 기도내용을 적용 받게 된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도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하나 되게 하시며, 이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이들을 진리를 통하여 거룩해지게 해 달라’는 대사제의 기도(제2부)를 그 날 만찬석상의 현장에서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효과를 얻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 또한 11제자와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파견되어 예수님을 증언할 것이며, 우리의 증언을 통하여 또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믿음 공동체’의 성장원칙이다. 이 원칙은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더욱 더 확실해진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세상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야 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아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24절)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자기 교회를 내다보시면서, 모든 세기를 통하여 당신께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모두가 하나 되길 청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서명(署名)하지 못할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상은 서로 상반된 체제와 이념으로 말미암아 소위 '동서의 장벽'으로 갈라져 있고, 빈부의 격차와 극단적인 가난과 낭비로 말미암아 소위 '남북의 장벽'으로 갈라져 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장벽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일치의 충만함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고 있다. 고위 성직자와 일반 성직자 간, 주교와 사제, 사제들 상호 간, 사제와 신자, 그리고 신자와 신자 사이의 불신과 분열의 양상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은 교회들 또한 저마다 각각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님이요 구세주로 믿는다는 그리스도 교회는 그 안팎으로 적지 않는 분열과 다툼, 시기와 질투, 긴장과 대립, 불만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평화와 일치를 갈망한다. 혹자는 일치(一致)를 부르짖고, 혹자는 다양성(多樣性)을 운운한다. 그러나 교회는 대사제의 아버지께 대한 애틋한 간구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의 일치는 주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일이며, 또 기도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며, 교회자체의 본성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교회 본성에 대한 커다란 위반이요 범죄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인류가족"
-이수철신부-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우리 수도원 정문에도 며칠 전부터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 쓴 현수막을 걸어 놓고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가
불자들에게 보낸 경축 메시지의 끝부분입니다.
“참 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일깨우게 될 것입니다.
이는 분열된 인류를 위해 봉사하도록 이끕니다.
우리가 계속하여함께
우리 사회와 세상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
이바지하기를 바랍니다.
저희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이 거행하는 이 축제에
진심어린 축하의 인사로 동참합니다.
다시 한 번 기쁜 부처님 오신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 오늘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와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렇습니다.
공존공생이 살길이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요,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가
생명과 자유의 인류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할 때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온 인류가 같은 기원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지상 순례의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땅위의 모든 살아있는 초목들이
하늘 안에서 하늘을 향해 있듯이
땅위의 모든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잔디밭이 잡초 밭으로 변한 걸 보고
며칠 전 써놓은 ‘저렇게 사는 거다.’라는 글입니다.
저렇게 사는 거다
함께 어울려
인위(人爲)와 무위(無爲)
자연과 문명의 조화는 어디쯤 일까?
뽑고 뽑아도
줄기차게 솟아나는 잡초들
더불어 살도록 내버려 두니
잔디밭이 잡초 밭이 되었다.
저렇게 사는 거다.
자연이 좋다.
제 각기 제 모습 제 색깔로
함께 어울려 사는 거다
잔디밭이 어디 따로 있나?
잡초가 어디 있나?
다 고유의 이런 저런 모습으로
폈다 지는 풀꽃들이 아닌가?
볼수록 평화롭고 새롭기가 무궁무진이다.
저렇게 사는 거다
그렇습니다.
한 풀밭 안에서 공존공생하는 다양한 초목들처럼,
우리의 일치 역시 하느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 역시
공존공생, 다양성의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몰라서 그렇지 깨닫고 보면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 살고 있는 인류가족임을 압니다.
제가 늘 강조하다 시피
성격이나 취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는 공동체요,
이런 공동체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를 격려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에 우리를 격려하며 당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네 삶의 현장에서 나를 위해 증언해야 한다.”
주님을 증언하는 자비의 삶일 때
주님은 우리에게
공존공생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선사하실 것입니다.
아멘.
사랑을 고백한 첫 마음으로
-이봉하수사-
2004년 영화배우 멜 깁슨이 제작을 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화에 대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영화 도입 부분의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었고 저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은, 영화 전체가 주는 강한 메시지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이 영화를 DVD로 몇 번을 보면서 수도생활 안에서 내 영성생활과
공동생활을 통해 느끼는 고통뿐 아니라, 현재 교회가 겪는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도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저는 이스라엘 구석구석을 순례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성지를 순례하며 은총도 많이 받았지만 특히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와 예수님의 무덤에서 오늘의 복음을 읽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의 첫날, 복음은 예수님의
마음뿐 아니라 교회의 마음을 깊이 깨닫게 해주며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늘 한결같다’라는 것,
그리고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일치의 기쁨>
대부분의 기업이나 조직이 그러하듯이 수도공동체에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면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 사목전반에 대한 책임자인 원장, 사목의 재정분야 및 살림을 담당하는 재정담당자, 그리고 사목의 직접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가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저는 이 직무를 골고루 경험해보았습니다. 때로 이빨이 잘 맞아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잘 수행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때 공동체는 한 송이 향기로운 꽃처럼 활짝 꽃피어나면서 그 향기를 주변으로 퍼트리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즉시 갈등이나 오해, 충돌이 발생하더군요. 서로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즉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적절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분위기가 사라질 때 즉시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을 여러 번 봐왔습니다. 그 결과 결국 피해를 보는 사람은 공동체 구성원들이요 아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 ‘일치하기가 정말 힘들구나, 어쩌면 이렇게 사사건건 충돌할까, 정말 함께 일하기 힘들구나, 방법이 없겠는가’ 고민하던 끝에 결국 가장 좋은 해법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참된 일치가 무엇인지 가장 좋은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삼위께서는 언제나 서로 굳게 결속되어 계십니다. 늘 긴밀한 의사소통 안에 현존하십니다. 상호간의 완벽한 일치 속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성부께서는 성자께 대한 극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철저한 순명을 계속하십니다. 협조자 성령께서는 미풍처럼 감미로운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원사업을 계속해나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언제나 방황하고 늘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삼위께서는 각자의 역할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관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때로 감미로운 바람처럼, 때로 장엄한 석양처럼, 때로 향기로운 꽃처럼 그렇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늘 체험하는 바입니다만, 나와는 철저히 다른 남들과 일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살아온 성장환경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 이웃들과 일치하려니 얼마나 피곤한 일이겠습니까? 달라도 철저하게 다른 남과 내가 일치에 도달하기까지 주고받는 상처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상처로 인한 통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때로 일치하자는 말만 들어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립니다. 차라리 포기하자는 유혹도 큽니다.
그럴 때 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돌아갈 곳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성삼위께서 지니고 계신 굳센 상호결속력, 상호인내, 상호헌신, 상호배려, 상호대화의 모습을 어렵지만 다시 한 번 일치의 모델로 끌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요한 17, 20-26)
-유광수 신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이번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평화방송을 통해 오늘의 말씀에 대한 강론이 방영되고 있다.어제 어떤 개신교 자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부님 말씀이 너무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나보고 "친구 좀 되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친구들은 많이 있지만 자기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진실한 친구가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친구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신부님 같으면 자기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친구가 되어주시면 좋겠는데 너무 바쁘셔서 어려우시겠죠? 더군다나 메스컴을 탔으니 얼마나 더 바쁘시겠느냐고 어려운 내 사정까지 말해주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디 이 자매뿐인가?
예수님은 오늘 "아버지, 그들이 모두 하나게 되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신다. 나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공동체 생활이다. 공동체 생활만 하지 않으면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잘 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해보면 어쩌면 모두 다 그렇게 제 각각인지 참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 창조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주님은 이렇듯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한 공동체에서 살라고 불러주셨으니 그것 또한 신비이다. 몸을 섞는 부부도 살다보면 서로 맞지 않는다고 이혼하는 세상인데 다 나름대로 한 가닥 하겠다는 남자들이 모여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가족간에도 하나되기가 어려우며 같은 직장인끼리도 하나되기가 어렵다. 사랑의 공동체라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도 하나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본당신부님과 신자들간에 하나 되지를 못하며 같은 단체 안에서도 하나 되지를 못하고 끼리끼리 지내기를 좋아한다.
왜 이렇게 하나되기가 어려운가?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꽃을 보면서도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 즉 우리는 저마다 자기 생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고들 한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외롭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그 영광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이란 하느님의 빛나는 광채이다. 즉 하느님의 속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가만히 계시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모른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가만히 있으면 그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치는지 모른다. 그가 유명한 피아니스트인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서 그의 실력이 밖으로 표출될 때야 비로서 그가 유명한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아무리 그분이 전능하시고 사랑이시고 선하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지 않고 말로만 들어서는 하느님이 얼마나 사랑이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신 지를 알 수 없다. 하느님의 속성이 밖으로 표현될 때 비로서 사랑이신 지를 알 수 있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를 알 수 있고, 선한 목자이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의 이런 속성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신 가를 그리고 아버지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 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밖으로 표출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비결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가 실천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의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가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 안에 사는 것이고 그래서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면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신 내용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아듣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살 때 창조 이전부터 예수님께 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내가 하나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과 하나되기 위해서 내가 드러내야할 아버지의 영광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너무 갈라져 있다. 하나되기 위해서 모이지만 또 다시 갈라지고 있다. 지역별로 갈라지고, 성격대로 갈라지고, 이념 때문에 갈라지고 있다. 부부간이 쉽게 갈라서고, 그로 인해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있다. 재산 때문에 형제간이 갈라지고 뜻이 맞지 않는다고 본당신부와 신자들이 갈라진다. 어디를 보나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모래알 처럼 흩어지고 있다.
이렇게 가정이, 사회가, 교회가 공동체가 하나되지 못하고 갈라지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주신 예수님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면 하느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만이 가능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하나되게 하는 은혜로운 날이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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