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한 17,4) I glorified you on earth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이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다가왔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제자들 그리고 새로이 제자가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 오늘부터 봉독되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바치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증거하는 사람들
-김동하 신부-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청합니다. 한 가지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주시라는
새벽을 열며 어떤 농부가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행복을 여러분의 마음에 초대하십시오. 빠다킹신부
나와 이웃을 위한 기도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우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 그 다음에 우리 인간들도 하느님과 당신이 하나이듯이 서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은 왜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을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신데 무엇이 부족해서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일까? 이런 의문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풀릴 것이다.
부활 제7주간 화요일 - 홍경완 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 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복음입니다. 이 17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직접 ‘아버지’께 드리는 하나의 기도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태오 6장과 루카 11장에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로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당신 스스로 붙이시는 근엄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하느님과 제자들 사이에 처한 예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십니다. 이 구절을 달리 ‘일치를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 ‘하나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에 관하여 이제까지 말씀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여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신 말씀’과 그 ‘말씀의 내용’을 받아들이게 되고, 예수님께서 지니신 모든 것은 모두 다 그를 보내신 분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분으로부터 오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 그 거룩한 분은 하나라는 것을 믿은 것이지요. 이렇게 믿음이 생긴 제자들을 위해서 지금 헤어지는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이 기도는 고별사라고 해도 좋고,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기도입니다. 그 유언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여기 있는 이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제목을 ‘일치를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일치를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 전반부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매우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그 은밀한 부분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기도는 공동체적인 기도이기 보다 오히려 매우 개인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개인적인 기도 속에 이상하게도 ‘영광’이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 등장하는 이 ‘영광’은 우리에게 광휘가 번쩍거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축제에나 있을 법한, 그런 점에서 사실은 좀 낯선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반대로 예수님의 매우 개인적인 이 기도를 이끄는 모티브가 되는 중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 영광을 돌립니다. 아주 모범적이고 돈독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은 되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영광을 뜻하는 성경의 원어인 그리스 말 속에는 단순한 영광의 뜻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 또한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언제나 ‘존경’이 함께 해야만 제대로 된 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러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그러하며, 부부 사이에도 사랑을 담은 존경이 그 바닥에 있어야만 제대로 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존경이 뒷받침되어야 올바로 요구할 수 있게 되고, 그 요구가 힘이 있게 됩니다. 부모 역시 자식을 존경해야 합니다. 존경이 뒷받침 되어야만 자식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경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시는 기도를 보면, 그러한 존경이 구석구석에 스며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존경 안에서 아버지께 신뢰하고, 그 험난한 고난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갈 수 있었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존경이 바탕이 되어야만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아버지께 대한 존경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경 속에서 하루를 엮어나가시길 빕니다.
<독서> :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바울로
-경규봉 신부 -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최승일 신부 -
-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마지막 기도이다. 이것을 주님의 사제적 기도라고 한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들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며 죽음을 통한 부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 일생의 정점이며 이미 영광으로 요한복음은 드러내고 있다. 십자가와 높이 들리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영원한 생명"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정의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앎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깊은 깨우침이었습니다. 어느 스님이 명부전에 걸어 둘 명사도(冥司圖:지옥 그림)를 그려 달라 했더니 지옥 그림엔 온통 스님들뿐 이었다 합니다. 깜짝 놀란 스님에게 김명국 화가의 다음 해명입니다. 바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이는 짓이니, 지옥에 들어갈 자는 스님들이 아니고 누구겠소?” 모든 종교인들에 경각심을 주는 일화입니다. 본의 아니게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 맑스도 이런 종교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여 종교는 아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복음 선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평생 하느님을 공부해야 합니다.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가슴의 체험적 사랑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또 나를 알게 되니 바로 이게 겸손입니다. 우리 마음은 저절로 단순해지고 진실해지고 순수해집니다. 새삼 하느님 사랑과 나를 앎(self-knowledge)은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 마칠 때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아버지와 아드님이신 자신을 알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평생 맡겨진 일에 충실하므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라는 정다운 호칭이 무려 17번이나 나오니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하느님을 사랑하면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고 이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누구보다도 아버지와 아드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바오로 사도였음을 다음 두 구절이 증명합니다.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온갖 어려움 중에도 한결같은 겸손과 열정으로 평생 주님위해 목숨을 내놓고 살았던 바오로였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십니다. 아멘.
어느 유치원생의 그림 -노성호 신부- 유치원에서 원아들에게 그림 한 편씩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 줬습니다. 집으로
- 백성환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것인데, 이 영광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 생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일을 다 이루시고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최고의 정점이며, 예수께는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빛을 머금은 의미가 있는 삶을 대변해 줄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 삶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겠는가? 오늘 당장 내가 죽어 무덤에 묻힌다면 나는 비석에 무엇이라고 적을 것인가? 내가 쓴 그 비문을 읽으며 ‘그래도 내 인생은 참 좋았다’라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넬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살면서 스스로에게 늘 되돌아 질문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생애를 모두 담아낼 수 있습니다. 성녀 쟌다르크가 영국인에 의해서 마녀 또는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졌을 때, 그 군중 속에서 그녀를 처형하게 되면 자기도 불피울 나뭇단을 보태겠다고 맹세했던 영국군이 화형 장면에서 “저 여인의 영혼이 있는 곳에 나의 영혼도 있게 하소서”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밑에 있던 한 백부장이 “이는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가 위엄이 충만한 영광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에서 사목을 할 때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낯선 길로 접어들게 되었었습니다. 한참 길을 헤매다가 잠시 풍경이 좋은 곳에 멈추어 서서 한 숨 돌리다가 문득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되물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얽혀 있는 길속에서 지도 속에 그려져 있는 길을 따라서 목표점을 향해 그대로만 가면 되는 것일까. 길을 벗어난 덕분에 좋은 풍경과 좋은 길 하나를 알았다고 위로하면 될까.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일까’하고 말입니다. 엘리 위젤이라는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죽어 하늘에 가면 신은 ‘왜 너는 이런 저런 병의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왜 너는 온 세상을 구원해내지 못했느냐?’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그 고귀하고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받는 질문은 단 한 가지. ‘너는 왜 너 자신이 되지 못했느냐?’일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자신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이며, 왜 그 길을 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 잘 알고 계셨고, 당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셨기에 그 십자가의 죽음은 영광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종말이 아니라, 영광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낳은 하느님의 신비인 것 처럼 우리도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떠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이라면, 내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도록 보다 진지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나 자신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양승국신부- <손을 펴야 새 세상이>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떠날 순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파악하신 예수님의 비장한 각오가 엿보이는 말씀입니다. 그 ‘때’는 어떤 때입니까?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고통스런 때입니다. 당신 앞에 곧 펼쳐질 미래는 정녕 단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기 싫은 형극의 때입니다. 예견되는 고통이 너무도 끔찍하기에 떠나기 싫은 참혹한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떠나십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때가 왔으니 떠나십니다. 아버지께서 떠나라 하시니 떠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의도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명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위대하심은 바로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에 있었습니다. 처절한 단말마의 고통과 외로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었지만, 그 길조차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니 떠나셨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품안에 쉬기까지 나약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방황하고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아버지의 품을 그리며 늘 길 떠나는 일입니다. 어제의 부족한 나를 떠나는 일입니다. 어제의 부끄러운 나와 다시금 결별하는 일입니다. 토마토 모종을 가꾸면서 지니게 된 소중한 체험입니다. 저는 왕성하게 가지를 만들고 옆으로 퍼져가는 우리 모종들을 바라보며 기특해했습니다. 다른 밭의 모종들보다 훨씬 그럴듯해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토마토 수확을 위해서 원줄기 하나만 남겨놓고 다른 순들을 계속 솎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무성하기만 했지 별 도움 안 되는 가지들로 기형이 된 토마토 줄기들을 바라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탐스런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지나친 욕심과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합니다. 결국 아쉽지만 버리면 얻습니다. 떠나야 영원히 남게 됩니다. 장시간에 걸친 영적상담 끝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이렇게 다 털어놓으니 이제야 좀 숨을 쉴 것 같습니다.” 내려놓아야 참된 자유가 시작됩니다. 움켜쥐었던 손을 펴야 새 세상이 열립니다. 아쉽지만 떠나야 새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류구원이라는 최종적인 결실을 위해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떠나셨던 예수님, 보다 큰 강으로 나아가기 위해 작은 시냇물을 버리셨던 예수님의 최후를 오래도록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신원식 신부-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설사 그것이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그 밑바닥에는 '누군가를 위해서' 라는 목적의식이 잠재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학교에 오거나, 미사에 참석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이 모든 행위들이 '나 자신을 위하여'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은 '남을 위해서' 행동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남을 위하여'라는 겉으로 표방하는 목적과는 달리 실재로는 자신을 위한 행위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하여' 많은 것들을 자식에게 요구하지만 실재로는 그러한 행위들이 '자신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지만 또한 그러한 일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일에 지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 대사제의 기도 : 제1부 †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대사제의 인류를 위한 기도(1) †
by accomplishing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첫 번째 기도는 1절에서 8절까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인식하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9절에서 19절까지로, 당신 제자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기도는 20절에서 26절까지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미래의 신앙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 세 번째 기도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기도를 하셨는지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2).
이처럼 주님께서 바치신 기도의 핵심은 바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분열되고 갈라서면 이는 하느님과 예수님 안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의 일치를 저해하는 그 어떤 요소도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도록 합시다.
청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아버지의 사람들을 지켜주시라는 청입니다.
이 두 가지 청은 예수님께서 땅에서 이루고자 하신 사명의 전부이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광이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아버지 옆에서 누리던 것으로 죽음을 이긴 부활을 말합니다. 죽음을 맞으시면서 땅에서 펼치신 사명을 마치시고 부활하시어 땅의 사명을 하늘에서 완성하십니다.
부활은 땅을 하늘로 끌어올려서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어 영원한 생명을
나누게 한 단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람들이란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뽑힌 사람들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비롯하고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하여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키면서 아버지와 아들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 그분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응답하여 그분의 제자로 뽑혔습니다.
그분께서는 영광스런 자리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몫은 그분의 기도에 응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가 죽었으니 이제 어떻게 농사를 짓는단 말입니까?”
바로 이 울부짖음을 들은 하느님께서는 농부에게 건강한 소 한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정말로 기뻐했지요.
그리고 얼마 뒤, 또 한 남자가 매우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사기를 당해 돈을 다 날려버리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차비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한 시인을 만났는데 그는 젊고 잘생긴 데다 능력도 많고 아주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인이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물었지요. “너는 왜 즐거워 보이지 않지?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없니?”
“저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단 한 가지 갖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에게 그것을 주실 수 있나요?”
“당연히 줄 수 있지.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너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기꺼이 주마.”
그러자 시인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이 말에 하느님께서는 잠시 생각을 하신 뒤, 곧바로 시인의 모든 재능을 빼앗고 그의 얼굴을 가장 추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의 재산도 모두 앗아버렸지요. 그리고는 그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한 달 후 하느님께서 다시 시인을 찾아갔을 때, 그는 헐벗은 채로 굶주림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보름 후 하느님께서 다시 그를 찾았을 때, 시인은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비로소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놓이면 라면 한 그릇에도 행복을 느끼겠지요.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을 때는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눈이 퉁퉁 부울 정도로 울고 있을 때 누군가 건네준 손수건 앞에서도 행복을 느낍니다.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행복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이란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봉헌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서 참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또 하나의 욕심을 키워내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고 그 안에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행복과 근심은 동시에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주인이 누구를 초대하느냐에 따라 함께할 대상이 달라진다고 하네요. 누구를 초대하시겠습니까?
외환 위기 이후 거리에서 노숙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높은 실업률과 생계 유지가 어려워진 탓이다. 그런데 이런 노숙자들을 위해 철학을 가르치는 단체가 있다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철학이 노숙자를 배불려 주거나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철학을 가르친다고 할까? 그 단체 관계자의 설명은 그들에게 자존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란다. 노숙자들이 철학 공부하면서 나타나는 반응은 첫째, 거리에서 밥을 얻어먹지 않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성찰하기 때문에 우울해진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취직을 한다는 것이다. 자존감은 이래서 중요하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생계형 자살자가 많지만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여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자존감을 높일 기회가 많은 삶일수록 행복하다고.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실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실 수 있었다.
밀레도스 항구에 도착한 바울로는 에페소에 교회 원로들을 불렀다. 그만큼 에페소 교회에 대한 바울로의 관심과 사랑이 컸다. 원로들은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들(14,23)로서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사목까지 담당한 이들이다(야고 5,14; 1베드 5,1-4). 바울로는 에페소 원로들이 알다시피 얼마나 주님께 충실한 삶을 살며 복음을 전했는가를 말하며 호소한다.
바울로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하여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만(13,45; 14,2; 17,5)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자세로 온갖 굴욕을 참고 겸손하게 견뎠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18,19; 19,8)이나 교우의 집을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며,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이다.
그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모두에게 회개하고 주님을 믿을 것을 요구했다(2,38; 3,19).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회개하고, 그 다음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죄를 대신 갚으셨고, 당신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길을 여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믿음이 꼭 필요하다. 하느님을 향한 회개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믿음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구원은 회개한 다음 주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바울로는 장차 당할 고난을 확실히 예견하고 있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로에게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상황들 - 투옥과 극심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그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을 굳은 믿음과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울로는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과 마지막 작별하는 날에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책무를 남김없이 수행했음을 밝히며, 그들이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바울로는 오로지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옥과 극심한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에 전혀 애착을 갖지 않았다.
목숨이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지만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이 더 소중함을 체험했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라고 고백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었다(필립 1,20-21).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전교여행에 앞서 에페소의 원로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그들에게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삶은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며 근원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것은 더욱 소중하고 귀하다. 사도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께 충실하기 위하여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쳤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아 세속적 생에 대한 애착을 끊고 오직 주님을 향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므로”(1고린 9,25)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디모 4,7)라고 말하는 신앙인이 되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바깥에서는 내일 투표하는 일로 무척 소란스럽더군요. 서로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도 하고요. 여러분도 기권 없이 다 투표에 참여하시겠지요? 방송국에 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 사람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정을 다 쏟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요...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자신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4 - 5)
그렇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에서처럼 예수님의 삶은 곧 바로 당신이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바로 그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있는 기도 내용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뒤에도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계속해 줄 수 있도록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17, 6 - 11)
이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기도입니까?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람들,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남아 시련과 박해를 겪어야 하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대로 제자들은 과연 스승이시요 주님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즉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20, 22 - 24) 나는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습니다.”(사도 20, 26 - 27)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은 삶이었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자신이 잘났고, 자신을 더 드러내고, 자신이 더 높아만 지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오로 사도나 다른 사도들처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갑시다. 아멘.........◆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살아있을 때 적들이 많이 있었다. 링컨에 대해서 평소에 욕을 하는 육군 장성이었던 스탠튼은 링컨이 암살 자에 의해 쓰러지자 눈물을 흘리며 여기에 누운 사람은 이 때까지 이 세상이 만난 자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이다 라고 하였고, 잔다르크의 경우에도 그녀는 영국인에 의해 마녀 또는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하였는데 군중 속에서 전에 그녀를 처형하게 되면 자기도 불피울 나뭇단을 보태겠다고 맹세했던 한 군인이 화형 장면을 보고는 저 여성의 영혼이 있는 곳에 나의 영혼도 있게 하소서! 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돌아가실 때에도 백인 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라고 승복하였다. 십자가 위에서 에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유명한 그림이 있다. 매우 중요한 정보를 통화하기 위해 야전 전화선을 이제 막 연결한 순간에 그것을 연결한 사람이 저격을 받아 죽는 장면인데 그림 밑에는 개통이라고 쓰여있다. 그는 죽었다. 그는 생명을 바쳤다. 정보를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가져다주시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그것을 이루게 하였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 종말이 아니라 영광이 되고 부활의 기쁨이 시작이 되었다는 신비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며 죽음을 맞이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참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이루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활 속에 깊이 본받고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또한 당신의 제자들을 계속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하셨다.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나게 해 달라고 청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참 생명, 즉 구원을 주십사고 청하시는 것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영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자.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이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하느님을 알 때 비로소 참 나를 알게 되어
어제 읽은 조선 인조 임금시대 김명국 화가에 대한 일화가
“스님들이 일생동안 저지른 악업이
비단 스님들뿐 아니라
깨어있지 않으면
새삼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비단 예수님의 고백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친밀했는지요!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얼마나 깊고 깊었는지요!
오늘 복음에
그렇습니다.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을 사랑하여 알았기에
돌아간 아이들, 그림을 그리고 다음날 다시 유치원에 모여 각자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좀 이상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유독 그 아이만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여러 장의 스케치북을 들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그 아이는 자신의 그림을 한 장 한 장 교실 바닥에
펴 놓고서 한 그림을 완성시킨 다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래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고래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이기 때문에 스케치북 한 장에
그릴 수 없어서 이렇게 여러 장에 나눠서 그렸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저는
고래를 구성하는 스케치북 한 장 한 장이 우리 각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이는 똑같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거기에 고래의 각 부분을 나눠
그리면서 나중에 한 마리의 고래를 완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각 스케치북에
표현된 색깔이나 모양, 배경 등이 모두 다르게 표현되었겠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똑같이 받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각자 성격이나 취향, 생김새 등 모두 다르지요. 허나 그 모든 스케치북이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자리를 채워야만 고래를 완성할 수 있었듯이 우리 모두도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 지낼 수 있을 때 하느님의 한 가족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림들이 그 아이의 것이었듯이
우리 모두도 하느님의 소중한 작품이고,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봅시다. "나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체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고자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모든 행위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삶을 구성하는 모든 행위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밥을 먹든, 잠을 자든,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든, 그것이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깨어있는 의식이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과 닮게 하고,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의 서두가 말하는 '이 말씀'이란 지금까지의 아주 긴 고별사를 의미한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마련된 만찬의 식탁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기에 이 만찬이 마치 예수의 생애에 마지막 만찬인 듯 그들에게 길고도 긴 고별의 담화를 들려주셨다. 실제로 그랬다. 이 만찬이 예수님 생애 마지막 만찬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끝없는 사랑을 보이셨고, 마지막 시간에 흩어질 제자들을 내다보시면서 유다뿐 아니라 베드로의 배반도 예고하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도 주셨다.(13장)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심으로써 아버지께 가기 위해 당신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길도 없음을, 당신 외에는 어떤 진리도 없음을, 당신께 대한 믿음 없이는 어떤 생명도 없음을 밝혀주셨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철저하게 일치하여 계시는 원리 때문이며, 또한 실제로 이를 가르치고 도와 줄 성령의 파견을 약속하셨다.(14장)
이렇게 소위 1차 고별담화는 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 ② 아들의 자기계시와 정체,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公開)로 요약된다. 추가로 편집된 2차 고별담화에서 예수께서는 1차의 내용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새계명 준수를 통하여 떠나가실 당신과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의 관계를 쉽게 설명해 주셨고,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제자들의 준비와 역할을 강조하셨으며, 파견될 성령의 더욱 구체적인 신원을 밝혀 주셨다.(15-16장) 우리는 지난 부활 제4주간 목요일부터 어제 부활 제7주간 월요일까지 고별담화의 세부적인 내용을 하나씩 묵상해왔다.
이제 긴 고별담화가 끝나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고별기도가 시작된다. 예수님의 기도(17장)는 그 형식의 장엄함 때문에 '대사제의 기도'(히브 7,28 참조)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의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아들의 영광을 간구함: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활동보고로서 자신의 영광을 간구하는 기도와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시는 기도이다.(1-8절)
② 남아 있을 제자들을 위해 간구함: 제자들의 보호와 성화를 간구하며,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바라는 기도이다.(9-19절)
③ 미래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간구함: 현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될 미래의 제자들이 일치하기를 간구하며, 미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20-26절)
대사제의 기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프롤로그(1,1-18)를 다시금 묵상해볼 필요도 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기도와 두 번째 기도의 첫 부분에 해당되는 대목이다.
고별담화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봄'으로 기도의 자세를 갖추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봄"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초월적 공간(空間)을 향하여 모든 것을 들어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곧 천지창조의 둘째 날에 창조된 공간이다.
"때가 왔다"는 말은 예수의 삶이 이제 충만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아버지께서 주실 영광을 통하여 예수의 삶은 온전한 충만을 누리게 될 것이다. '때'는 천지창조 첫째 날에 창조된 시간(時間)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어느 무엇도 시간과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창조된 모든 것이 대사제 예수님의 "하늘을 우러러 봄"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이다.(마태 14,19; 마르 6,41; 루가 9,16; 요한 11,41) 이렇게 대사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봄"으로 시작하시는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단순하게 무엇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다. 있는 것을 더 채워 달라거나 없는 것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기도가 그렇듯이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의 영광"이다.(루가 11,2) 예수님의 고별기도에도 그 기도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핵심이 아버지께 대한 감사와 영광, 그리고 말씀이신 성자(聖子)를 통한 하느님 성부(聖父)의 자기계시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들의 영광은 곧 아버지의 영광이다. 고별의 기도가 기록된 요한복음 17장에서만 "아버지"(아빠)라는 단어가 무려 52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고 하겠다. 아버지가 누구인가?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존재이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이제 우리에게도 똑같은 비중의 아버지이시다.........◆
주님승천 주일(부활 제7주간)을 지내면서,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을 어제 묵상했었습니다. 무척 허탈해 했을 것 같기도 하고, 불안과 두려움도 여전했을 것 같고, 한편으론 기다림의 희망도 컸으리라고 묵상 중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세상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인가 봅니다. 주부는 남편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생들은 시험날을 기다리고, 임산부는 출산일을 기다리고, 로또 복권구매자는 당첨일을 기다리고, 님을 떠나 보낸 자는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등등 인생은 기다림 속에 또 다른 삶의 가능성,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가 봅니다. 한편으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도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의 신앙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 자체가 오천 년 기다림의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신비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기다림이란 곧 우리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은 조금의 시간도 인내하지 못하고 '빨리, 빨리, 또는 바쁘다, 바뻐'라는 서두름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테크 시대에 빠름의 문화를 쫓아가는 것도 필겠지만, 때로는 느림의 문화, 기다림의 생태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할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시간(세월)은 하느님께서 주신 케노시스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라고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요한17,1) 일생을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후에 때가 되었음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때"에 다른 것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때"에 하는 것입니다. 때는 시(시)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교통을 해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하고, 하느님께 감사함을 드려야 할 모든 일의 때에, 항상 기도를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의 주님의 아버지께 대한 기도 방법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의 표준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일명 '대사제의 기도 1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버지, 어머니, 사랑...등일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말을 자주 등장시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전통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우리말로는 단순히 ‘아버지’로 이해하면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다는 말은 곧 ‘아버지’를 그들에게 알게 하였다는 말인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ha shem(그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생활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아마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서 비롯된 관습인 것 같습니다.
오늘복음은 제자들과의 고별, 이 새상과의 고별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대사제로서 이버지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묵상하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 후에 그들과 함께 공적으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여기서 공적 기도라는 의미는 대사제 직분으로서의 기도로 보면 됩니다. 공동체의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기도와 같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기드온 골짜기로 내려가셔서, 거기에 있는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개인적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시기 직전의 일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항해 기도드리는 첫번째 내용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주십시오.”
이상 기록한 기도의 첫 부분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소상하게 말씀하실 기도 내용의 전체를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당신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고 또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드러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고 또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으시라고 말씀드린 기도 내용입니다.
아들이 받은 첫째 영광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실 자체입니다. 다음으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에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신 말씀은 먼저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심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셨고 다음에 십자가의 고난으로 인류를 구원하심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에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당신께 능력을 주시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고,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또 그분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희랍어 사본에서 ‘안다’는 말로 ginosko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안다’는 뜻을 가진 또 하나의 희랍어 oida라는 말에 비하여 ‘깊이 안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며,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면 ‘영원한 생명’까지도 받게 된다. 곧 구원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에야 이루어질 일임을 예수님께서도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에 당신께서 땅에서 하실 일을 모두 다 마치셨다고 말씀드리면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에게 앞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어 세상이 있기 전에 당신께서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을 그들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라고 다음과 같이 청하신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1-5절에서 기도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그 내용을 되풀이하여 더 자세하게 풀어서 기도를 드리신다. 이 과정에서 6절부터 23절까지에는 그들의 구원, 그리고 그후에 그들이 성장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일과 또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 등 제자들이 지상에 남아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기도하시고 나머지 부분인 24절부터 26절까지에는 그들의 구원의 결과에 대하여 기도하셨습니다.
1. 믿는 사람들의 구원, 성장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하신 말씀 중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신 부분을 부연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6-10절에 먼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는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저에게 맡기신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증거하여 알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원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이들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간직하고 지켰습니다. 이들은 이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저는 이들에게 주었고 이들은 그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으며 또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저는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모두 저의 것이며 또 저는 이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증거하여 알게 하는 일이며 또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당신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믿게 하는 일이며, 그리고 또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믿고 지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또 당신께 맡기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로 말미암아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앞으로 당신께서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으신 후에 그들이 성령을 받아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구원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다음의 대사제적 기도 내용 묵상은 내일 복음에서 하겠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의 고별 끝부분에서“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요한17,1) 일생을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후에 때가 되었음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다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7,4-5) 이 말씀은 같이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닐런지요. 살고 목격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자신에 찬 말씀이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9절)라고 하시고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9절)라고 하시며 온전히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내용이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이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완벽한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사신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쫓아 그대로 살고 싶고, 또 복음전파를 하려 다니지만, 물질문명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있는 사람들의 생활 행태로 인해, 그리 쉽지만은 않기에 주님의 성령께 의탁하고 외쳐봅니다.
주여! 용기를 주십시오!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들의 마음을 열어주시어
이들이 주님을 온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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