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20일 주님 승천 대축일

Margaret K 2007. 5. 20. 00:20

   2007년 5월 20일 주님 승천 대축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46ㄴ-53)

  

Then he led them out as far as Bethany,
raised his hands, and blessed them.
As he blessed them he parted from them
and was taken up to heaven.
They did him homage
and then returned to Jerusalem with great joy,
and they were continually in the temple praising God.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하늘로 오르셨다. 이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날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

 

고통은 불행 자체가 아닐 뿐 아니라, 불운아가 되도록 만들지도 않습니다. 고통이란 오히려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제물일 것입니다. 만일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다면 그것은 곧 불행의 씨앗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지나치게 불행하다면 그것은 곧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자아를 불사를 용광로 속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으로 새롭게 빚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시며 하늘 나라에 오르신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부활의 영광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은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임을 말해 줍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우리는 자신의 삶의 고통을 영광의 그 순간을 위하여 기꺼이 받아들이는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새벽을 열며

 

 잘 차려입은 신사가 큰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지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운명은 너무 불공평해! 저 사람은 끼니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나는 도대체 뭐야?”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운명을 불공평하게 생각하니,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즉, 네가 원하는 만큼 황금을 채워 줄 테니 메고 있는 자루를 내려놓아라.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절대 황금을 땅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만약 황금이 땅에 떨어진다면 그 순간 돌로 변하여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참, 네 자루가 이미 상당히 낡았다는 점도 명심하여라. 그러니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담을 수 있을 만큼만 적당히 담아라.”

거지가 낡은 자루를 벌리자 황금이 마치 빗방울 떨어지듯 후드득 자루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자루는 순식간에 불룩해졌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만족하느냐?”

이 사람은 아직도 멀었다는 듯이 자루를 계속 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제가 이 자루를 몇 년 동안 가지고 다녔는데요. 저는 이 자루에 물건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평생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더 담을 수 있어요. 조금만 더 담을 수…….”

바로 그 순간, 거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루를 찢어지면서 황금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황금은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거지의 욕심이 어쩌면 우리들이 안고 있는 욕심과 똑같은 것은 아닐까요? ‘조금만 더’를 외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갖기를,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 욕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운을 놓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부활 후 40일 뒤에 일어난 사건, 모두가 크게 기뻐할 사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걱정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 나오듯이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바로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렇게 하늘만 쳐다볼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 세상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이라는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수난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즉, 자신의 낮춤이 있었기에 그러한 영광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는 허상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빈 하늘만 쳐다보는 것과 같은 세상의 욕심은 모두 내려놓읍시다.

 빠다킹신부


 

 가슴에 하늘을 담아

-배광하 신부-


 승천의 의미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희망입니다.

그분께서는 2천년 전이라는 시간과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공간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존재해 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의 승천은 이별에 대한 아픔이나 하늘만 쳐다보는 넋 나감이 아니라 기대에 찬 희망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부단한 노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떠나신 뒤, 다시 오실 때에는 그토록 사랑하셨던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그 같은 노력 가운데 맞이하는 주님 재림의 기쁨을 승천 교리는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이미 승천 때부터 꿈꾸며 오르신 주님께서 우리 내면 깊숙이 들어오실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

하늘로 오르신 주님께서는 영영 떠나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겁내거나 두렵지 않은 이유도 어버이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희망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송기득이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희망의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아픔의 실체인 악의 세력과 그 밖의 요인에 대해서 끝까지 싸우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아픔에서 벗어나고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싸움은 두려워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고,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큰 용기와 믿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하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땅으로 내려오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당신의 수도회 규칙서 ‘겸손’의 장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려오셨기에 오르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내려와야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함께 하여야 우리 또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대가 하늘이고 그대가 하늘로 간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이나 사막의 성자들, 수많은 수도자들은 모두 이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우리가 하늘이라는 소중한 믿음을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가 하늘이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다가 들려오는 위로와 믿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 11)

제자들은 이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뒤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거나 예전의 비겁과 공포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과거의 나약한 모습의 제자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주님을 자신들 마음에 모시고 강인한 투사가 되어 기도하며 교회 공동체를 다시금 재정비하고 오시게 될 성령강림을 준비합니다.

예수님 승천이 제자들에게 실망과 고독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강한 확신과 희망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또한 주님을 모시고 다시 오실 희망의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아이들에게 하느님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수염이 긴 할아버지를 그리듯 예수님의 승천을 생각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천사들이 옹위한 가운데 흰 옷을 입고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할 것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1,6­11) 묘사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시체의 소생이 아니라고 했을 때 느끼는 것처럼 승천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고 하면 혼동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사화는 공관복음서 저자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고 약속하시면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고 싶은 `임마누엘`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요셉은 꿈을 통해 다시 듣습니다(1,23). 공생활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뒤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끈을 놓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더 짧게 묘사되는데 예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16,19-­20).
루카복음에는 손을 들고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이는 열왕기 하권 2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갑자기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이를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이 제자 엘리사에게 내립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경배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어떻게 하늘로 들어 올려지시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분을 그들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24,44-­53).
루카복음의 후편인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임에도 승천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승천하신 날이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후 40일 되던 날인 데 반해 루카복음에서는 부활날입니다. 승천하신 장소도 다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올리브 산(1,12)이고 루카복음에서는 베타니아 근처(24,50)라고 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갈릴래아에 있는 산(28,16)에서 일어납니다.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승천은 예수님이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17장 참조).
이렇게 같은 일을 복음서가 다르게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승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위해 다음 내용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한 전기와 같은 양식으로 기록되었지만 초기교회의 신앙 실천을 반영하는 문서입니다. 그 문서는 20세기에 사는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의 역사·문화적 여건 하에서 복음서 저자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신앙을 전달하려고 하는 대상을 고려하면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승천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공통된 본질 요소는 예수가 인간 개체의 역사적 개별성을 넘어서 하느님의 보편성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제 하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인간 예수의 실천을 하느님의 일로 알아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은 시간과 공간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승천은 또한 예수가 지도자로 이 세상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메시지를 발생시킨 사람이 군림하면 그 메시지의 내용은 왜곡되고 사람들은 복지부동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잃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신앙인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떠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부활 후에도 섬기는 분으로 남아 계시다는 뜻입니다."(서공석, 「예수-하느님-교회」 중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의혹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설명하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24,47­-48) 하시며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심으로써 여전히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못난 그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들 몸소 체험한 용서와 사랑을 그들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제자들의 마지막 주님 체험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시편 124,7)
마음의 해방을 맞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고 루카복음은 끝을 맺습니다. 기쁨으로 예배하고 찬미하는 삶은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배반·의혹·불신·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복음과 함께 기쁨 중에 생활하는 제자들의 이야기, 복음이 세상 곳곳으로 전파되는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계속됩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이사 52,13)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심

-조욱현신부-


제1독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지형학적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영광에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가까이 가있음(에페 3,12; 2,18)을 믿는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늘이 더 가까워지게 한 역사(役事)이다.


제2독서: 당신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신앙의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여주시기를(에페 1,17) 간청하였다. 이 깊은 인식은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때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능력을 초월해 계시는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심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23절) 교회의 주님이 되시게 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구원의 능력과 축복으로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성 레오 대 교황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의 고양(高揚)이기도 합니다. 머리의 영광이 앞서 이루어진 곳에 지체의 희망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합시다!”(S. Leone Magno, Sermo in Ascentionem). 예수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영광에 들어가심을 의미하며, 또한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항상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고양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신앙인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8절)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어 교회라는 새 ‘이스라엘 왕국’(6절 참조)을 세워주실 성령의 때의 시작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더 가까이 현존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은 제자들이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6절)라고 묻는다. 이 말은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계산에 몰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7-8절). 예수님의 승천이 바로 모든 제자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8절)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 앞에 구원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서서히 공중으로 사라져 가는 것같이 느끼고 슬픔과 향수에 젖어 그리스도의 모습을 쫓아 하늘을 응시한다. 이것은 마치 빈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루가 24,4)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마지막 심판관으로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다(마태 24,30; 1테살 4,16; 묵시 1,7; 14,14-16). 이렇게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요한 17,20)은 세상에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이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 속에 매일 매일 건설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새로운 세상의 예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승천은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정의가 깃들일’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의 빛이 이미 비치고 있는 구원의 장소로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복음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승천이 당신의 ‘영광’과 ‘권세’를 취하시게 한다. 그러면서 또한 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사건에 포함시킴으로서 더 깊이 일치하게 하신다. 둘째로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의 ‘전례적’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 모습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히브리 대사제의 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듯 하다(루가 24,50-51; 히브 4,14; 6,19-20; 9,1-14). 이제 사도들은 성전에서 전례를 거행하며 계속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린다. 전례거행 특히 성체성사의 거행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없이해 준다. 이 성사를 거행할 때에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게 되며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을 때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압바(Abba)!

-김지영신부-


1960년대 소련의 우주 탐험가인 가가린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찾아보았지만 신은 우주 어디에도 없었다.” 그 후 미국의 우주인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을 탐험하고 돌아와 기자 회견 도중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달에 머무르는 동안 신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에서 체험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곳에 가서 같은 것을 보고 왔는데 한 사람은 하느님을 본 듯 이야기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이 없다는 확신을 더 강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었다면 다시 확인이라도 해서 누구 말이 옳은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진리는 증명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것이고 각 사람의 믿음 안에서만이 객관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신은 우리 가운데 머무를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가? 하느님이라는 우리말도 ‘하늘’에 ‘님’이 합쳐서 ‘하늘님’, ‘하느님’을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무한하심,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며, 우리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차원, 지상에 머무는 우리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실현시켜 주신 것입니다.

압바(Abba)란 ‘나의 아버지’란 뜻으로,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애정에 찬 아랍어 호칭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주님 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심으로써 우리도 하늘의 차원으로 승격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압바(Abba)께 오르심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의 영역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1독서에서 그 대답을 명쾌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일상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증언하고 복음(福音)을 전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들을 미움의 시간표를 빼곡히 채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며,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두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의 압바(Abba)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겸허한 신앙을 청해 봅니다.

 

 

 삶과 죽음의 완성, 승천

-이기양신부-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웰빙'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건강한 (Well- 만족한), 인생(Being)을 살자는 의미입니다. 물질적 가치나 명예보다는 건강한 신체와 정신적 행복을 척도로 삼자는 것이 '웰빙'의 시작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웰빙 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시작은 미국과 비슷한 60~70년대인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지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혀서… 푸른 동산 가꾸어 잘 살아보세."

이것이 웰빙 문화의 시작인 것이지요.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던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을 목표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독재 정권을 감수하고, 또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뛰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가난에서 벗어나면서 삶의 질도 조금씩 높아져간 것이 우리 나라에서의 웰빙의 시작이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사람과 더불어 너무 먹어서 탈이 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노력해서 절대적 빈곤의 대물림을 끝내고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즐기며 잘 살게 된 지금 국민들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본다면 그 답은 부정적입니다. 오히려 60~70년대보다도 더 불안하고 각박하며, 역사 이래 자살률이 최고 수치를 갱신하는 불행한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가난을 넘어서면 행복해 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유해진 지금이 더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이 과장이 아닌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플라톤이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행복 조건 다섯 가지를 이렇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겨뤄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치는 말솜씨

행복해지기 위한 이 다섯 가지 조건들의 공통점은 조금은 부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을 제시하고도 인간의 불행의 극한인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일생을 통해 이뤄 놓은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극단적 상실감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성과를 수포로 되돌려 놓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는 참다운 '웰빙'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웰빙'의 완성은 '행복한 죽음'(Well- Dying)입니다. 행복한 죽음을 맞지 않으면 행복한 삶 또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기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고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원한 나라를 희망하는 것, 이것이 확실하고도 완벽한 웰빙인 것입니다. 웰빙의 완성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을 사는 것이며 부활의 완성은 승천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완성인 승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사는 신자들이 바로 '웰빙족'인 것이지요.

참된 행복은 유기농 식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전하는 삶에서 오는 것이며 열심한 신자인 여러분들이 멋진 웰빙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승천

-이재민신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 하늘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심으로써 우리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하셨고 하늘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당신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늘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하느님 곁에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복잡다단한 일상에 쫓기며 제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잃고 살아갈 때가 많다.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급급하여 하늘을 통하여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고통을 당하면 고통만 볼 뿐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남에게 상처를 받으면 상처를 준 남만 생각할 뿐 상처를 통하여 내게 전해오는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에 잠기고 그렇게 우리는 실망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고통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내게 올 구원만을 생각할 뿐 그 고통과 십자가 그리고 그 죽음이 내게 던지는 영생의 메시지는 읽지 못한다.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통으로부터, 십자가로부터 멀리 달아나려고 기를 쓰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신다. 하늘을 통하여 당신의 십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신다. 스테파노는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봄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아, 하늘이 열려있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인다.”(사도7,56) 주님께서는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심으로써 고통에서 고통만을 보던 우리의 눈을, 죽음에서 죽음만 바라보던 우리의 눈을 열어 영생을 바라보게 하신다. 제자들은 여태까지 한 번도 올려다보지 못했던 하늘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주님의 일생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주님이 오르신 그 하늘은 땅을 등지고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수평이 아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당신께서 지상에서 겪으신 모든 고통을 등진 곳이 아니라 고통의 영원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며, 지금도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곳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그분의 삶은 우리가 멀리서 감상할 수 있는 하늘의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르신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시선을 다시 땅으로 향하게 하신다. “왜 너희는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사도 1,11)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눈으로 당신께서 살던 곳, 당신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이리하여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에페 4,9-10 참조). 사실 땅 속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분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예수의 승천은 하늘과 땅을 통하여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것은 곧 부활이 주는 인생의 의미이다. 부활은 죽음이 죽음이 아님을 선언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눈으로 땅을 내려다보는 사람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승천은 새로운 강림

-강길웅신부-

 

제1독서 :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 에페 1,17~23 (그리스도를 하늘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복 음 : 루카 24,46~53 (예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확신과 희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 다음 우리에게 돌아올 영광의 예표요 보증인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 7,13).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떠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말한 작가는 루가뿐입니다. 루가는 사도행전과 루가복음 두 권의 책을 썼는데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사실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예수님의 승천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은 먼 나라에 계셔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이별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더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의 슬픈 장면이 아니며 새롭게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만나는 기쁨과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신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오셔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떠나심과 동시에 새롭게 찾아 주신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자녀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떤 자매님이 찾아와서는 이야기 끝에 주님은 자기를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았고 너무도 서운함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어느 한 시기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옥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는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거나 어려운 때, 그리고 슬프거나 외로울 때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 대축일에 산이나 들에서 야외 미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이지 산이나 들만이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은 또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또 그 분이 우리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어떤 장소와 시간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원하는 시간마다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시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을 때 신부님께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그러셨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사셨으면서도 하느님을 못 보았다고 하십니까? 자, 여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하며 성체를 영해 주시는데 형제는 그때 비로소 주님의 현존을 체험했다면서 지나온 생에 대한 감사와 회개를 눈물로써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옛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 좀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사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존재 방법으로 우리 앞에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승천의 믿음을 활짝 엽시다.


 

 '주님의 산 증인'

-심흥보신부-

 

 사람들이 가끔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러나 저는 신부 돼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동생이 모시게 되어 늘 가슴속에 부담이 되었는데 정작 돌아가시고 나니까, 이제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내가 생각할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기억할 수 있으니, 가슴에 묻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승천 축일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 머물러 계시면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그곳에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본래의 모습대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우리가 청할 때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면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7)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나마 '이젠 살았구나.' '이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겠구나.'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신다고 하시니 그리고 이젠 영영 다시 안 돌아오실 것처럼 이야기하시니 정말 슬프고 전보다 절망스럽다. 한 번 가셨으면 아예 돌아오시지 말지 살짝 오셔서는 이제 완전히 가버리신다니 너무나 허망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요한 14, 18)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 16-17) 그리고 우리가 성령께서 오시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 17) 왜냐하면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 2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께 충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약하고 부족하기까지 한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 26-27)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희망을 안겨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가 8, 28)

그리고 또 오늘 에페소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 22-23)라고 말씀하신다.

승천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보이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신비들을 다가오시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도록 청하며,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사도 1, 11)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산 증인'(루가 24, 18)으로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따라 세상에 주님에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신부-


부활 대축일이 지나고 40일이 지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승천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16,19)고만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를 옮겨 적으면서도 이 부분을 삭제하고 승천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베타니아 근처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더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자주 나타나셔서 사도들을 격려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이 집필하였습니다. 저자는 루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저자의 기록인데도 두 문서가 전하는 승천 이야기는 서로 다릅니다.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당일에 승천하셨고, 그 장소는 베타니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성전으로 가서 날마다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는 구름에 싸여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들 안에 없는 것은 부활과 승천이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을 굳이 분리하여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사실로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고, 승천은 땅에서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의 기간을 둔 것은 제자들이 부활을 믿고 복음 선포에 나서기까지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는데, 두 문서에 승천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은 승천에 대한 사실보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시고, 당신의 초능력으로 제자들의 활동을 돕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떠나가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당신에 대한 기억이고, 성령이 곧 오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이 경이로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성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는 그리스도인인 것은 예수님의 초능력을 배워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일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능력을 과시하면 사람들은 그 초능력에 매료되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굴종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자유로운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마르 8,11)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표징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신 나머지 악의에 찬 유대인들의 자유 행사에 압도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를 압도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 주고, 그 사랑에 호응할 것을 호소하고 기다립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처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떠나가셨다는 오늘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에는 어느 누구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당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남기고 당신은 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이 일하셔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정체성은 섬김입니다. 성령이 살아계시는 신앙인의 모습에는 섬김이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늘이 있는 곳 어디에나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보이는 곳 어디에나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기의 실수와 실패의 죽음을 넘어 하늘을 우러러는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 승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 안에만, 혹은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넓은 세상 어디에나 그분이 가르치신 섬김을 실천하고 그 섬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계십니다. 억울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이웃을 섬기는 데에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 갈릴레아 혹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나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희생적인 섬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으로 살아 계십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승천하신 주님"

-이수철신부-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참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저절로 흰 구름 되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입니다.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

참 기분 좋은 날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쪽에 앉히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성모성월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입니다.

 
마침내 주님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니

우리의 하늘 길이, 하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미래에 있을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영광의 날을

앞당겨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났을 때 쓰는 ‘하늘이 불러갔다.’ 라는

소천(召天)이란 말과,

‘하늘로 돌아갔다.’라는

귀천(歸天)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하늘에 올라갔다.’라는 승천(昇天)이란 말과 더불어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말들입니다.


본능적으로 ‘하늘’ 향한

초월적 욕구를 지닌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향한 우리의 갈망을, 초월적 욕구를 채워주며

우리 마음에 희망과 기쁨을 가득 안겨주는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하늘을 바라보실 때 마다

승천하시는 주님과

승천할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면

큰 위로와 평화를 얻으실 것입니다.

 
저는 베네딕도회 영성을 즐겨 목운동에 비유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베네딕도회의 모토에서 착안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목운동을 자주해야 합니다.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목운동의 영성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자주 위아래로 목운동을 해야

  온전한 균형 잡힌 영성입니다.

  세상일에 너무 몰두하여 땅만 보고 살아도 안 되고,

  영적 일에 몰두하여 하늘만 보고 살아도 안 됩니다.

  네발 달린 동물들은

  땅에 붙어살면서 먹는 일이 전부이지만,

  사람들은 두발로 서서 하늘도 보고 땅도 보며

  일하며 살라고 직립으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늘 보고 기도하고 땅에서 일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손이요, 일하는 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승천하는 주님을

넋 놓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한

천사들의 충고가 재미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늘을 그만 바라보고

네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일상의 삶에 충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면서

약속하신대로 당신의 마지막 재림에 앞서

보호자 성령을, 교회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성령 덕분에

하느님 곁에 계신 초월의 주님께서

우리 곁에 내재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시어

아버지를 알게 하셨고,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우리가 지닌 희망에 대해

그리고 그분 상속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깨달음의 은총들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 덕분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의 기쁨과 희망의 샘입니다.


승천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며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주님 승천 미사 분위기와도 흡사합니다.

 

우리 모두 큰 기쁨으로

승천하신 주 예수님을 경배하며

하느님 찬미의 미사를 봉헌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부활 승천이 없으면 성령도, 교회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발아래 만물을 굴복시키시고,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우주만물을 가슴에 품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교회를 통해,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온 누리에 퍼져갑니다.

 

교회가 거행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지탱되는 온 세상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모두를 한 말씀으로 요약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교회는 물론 온 우주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라는 놀랍고도 장엄한 고백입니다.

 

오늘도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 충만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하늘의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