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07. 5. 18. 02:27

2007년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Your hearts will rejoice,

and no one will take your joy away from you.

 

  

 그리스도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슬픈 일이겠으나 세상에는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새로 오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

 

 현대 의학은 산모들의 ‘해산은 고통스럽다.’는 고정관념이 해산의 고통을 크게 좌우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곧, 고통은 실제적인 육체의 자극에서 온다기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뇌의 기능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알아낸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고 고통을 생명의 과정 안에 있는 것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지면, 실제로 몸은 고통을 인지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심하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산모가 새 생명의 해산이라는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은 고통 중에 있지만 주님을 뵙게 될 때에는 그 모든 고통을 잊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주님께서 이러한 희망을 주셨으므로 사실 우리가 현재 체험하는 고통도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현재의 고통을 더 이상 고통으로 인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마련하신 기쁨과 희망의 날을 생각하면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결과를 약속해 주실 뿐 아니라 구원의 과정 안에서도 고통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날씨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따뜻한 햇볕, 그리고 거리도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는 기분 좋은 상쾌함까지도 느낄 수 있었지요. 왜 어제는 이러한 특별한 느낌을 받았을까요? 어제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날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그것은 그저께 날씨가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흐리고 비도 많이 온 그저께 날씨에 비해서, 어제의 날은 정반대로 맑고 깨끗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날씨였던 것이지요. 즉, 그저께에 비해서 정반대로 좋은 날씨였기에 더욱 더 좋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만약 계속 좋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어제의 날씨가 특별히 좋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비교되는 날씨가 있기 때문에, 어제의 날씨가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내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좋은 날들을 더욱 더 부각시킬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날씨만 계속되었을 때 그 날씨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고통과 시련이 없는 날의 연속에서 우리들은 주님께서 주신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을 즐깁니다. 42.195Km.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이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처음에는 별 다른 표정이 없지만 결승점에 다다라서는 너무나 힘든 표정들입니다. 그만큼 마라톤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욱 더 늡니다. 왜 그럴까요?

등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땀 뻘뻘 흘리면서 정말로 어렵게 정상에 올라갑니다. 힘들게 올라간 정상. 그러나 힘들게 올라간 그 거리를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끔찍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등산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갈까요?

맞습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고통을 참아내고 이겨낸 뒤에 얻는 성취감 때문입니다. 그냥 무작정 힘들기만 하고 아무런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면 사람들이 이러한 운동을 즐길까요? 하지만 고통을 모두 잊게 해 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통과 시련이 내게만은 절대로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유익할 수도 있는 고통과 시련이지만, 우리의 나약함으로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러한 말씀으로 희망을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산모가 새 생명의 해산으로 진통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잊고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햇빛만 계속 비추면 사막이 된다.’라는 격언을 기억하면서 주님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땀 흘릴 정도로 운동을 합시다.


 빠다킹신부

 

   기쁨을 누릴 때      

-김동하 신부-


 해산을 눈앞에 둔 여자는 몸과 마음으로 크나큰 근심을 겪어야 합니다.
몸으로는 비할 데 없는 진통을 견뎌야 하고 마음으로는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해합니다. 근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는 새로운 생명인
아이를 낳고서야 비할 데 없는 기쁨에 에워싸입니다.
근심을 거쳐야 맛볼 수 있는 달디 단 기쁨은 삶을 이끄는 힘입니다.
살아가면서 근심보다는 기쁨을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살림살이를 짓누르는 고통과 불안을 이겨내고자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프고 고된 근심투성이에 지나지 않지만 내일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기쁨을 맞이하고자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동안 넘치도록 고통과 불안이라는 근심을 겪었습니다. 고귀한 한 분께서
근심의 절정인 죽음을 바쳐서 완전한 삶이란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 죽음을 거치면서 오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만나게 된 새 생명 안에서 기쁨을 누릴 때입니다.

 

 

 기쁨을 잘 관리하는 노력

-윤영수 수녀(예수성심전교수녀회)-


 주님은 당신과의 이별에서 오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주십니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의 근심과 출산 후에 느끼는 기쁨에 비유하시며 참 기쁨을 확실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부활의 기쁨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것임을 확언해 주십니다.
살면서 간혹 벅찬 기쁨의 순간에 서면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기쁨은 진정한 나의 것이 아니고 곧 누구에게 빼앗길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진정한 기쁨의 순간을 놓치고 마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쁨의 절정에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 기쁨이 현실임을 확인하면 감격에 잠기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간직하게 된다는 보장을 주님이 해주십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은 지나가는 세상의 기쁨이 아닌 생명을 낳는 기쁨,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몇 년씩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교우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세례를 받고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해서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는데 세상일에 관심 두고 몇 번 빠지다 보니 게을러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해서 쉬게 된 것 같아요."라는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고 또 체험된 그 기쁨을 잘 관리하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화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아끼지 않고 투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신앙은 더욱 혼신을 다하는 정성이 들어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말씀에 힘입어 신앙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았을 때의 기쁨

-도정호 신부 -

오늘 복음에 ‘너희가 지금은 울며 애통해 하고 있고, 또 근심에 싸여 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제자들도 주님께서 당신 곁을 떠나실 거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스승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생활했던 지난날을 떠올렸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에게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행하셨다.”(사도 10, 38)는 기억도 있습니다.

우리 스승님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기억.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숨 쉬고 있는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기억과 사람을 사랑하셔서 가진 것마저도 내어 놓으셨고, 나누셨고, 아픈 사람 찾아가 함께 해 주시면서 위로와 힘을 주셨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모든 사람이 떠나갈 때 유일하게 당신만은 곁에 있으면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소외 받은 그와 함께 해 주시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사람들이 놀리고 모두가 포기하고 떠났지만 하느님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겁니다.

이런 스승님이셨기에 그만큼 예수님과의 이별은 울음이 나오고 떠나보내기에 너무나 애통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스승이 안 계신 빈자리가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별을 슬퍼하고, 애통해 하지만 당신을 증거하고, 증언하기 위해 어떤 사람으로 바뀔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인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점과 하느님을 알리고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투신할 것을 아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선하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듣도록 타인을 위해, 이웃에게 먼저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함께 살아가도록 생각을 바꾸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이 결코 어둡고 무의미한 것만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았을 때의 기쁨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사람과 함께 계시기에 제자들이 그 기쁨 때문에 살았고, 그 기쁨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고, 그 기쁨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듯이,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곳에 살면서 주님께서 주신 하루를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기쁘게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오늘 하루도 좋은 시간들이 되길 바랍니다............◆


 

 
<독서> :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격려를 통하여 고난을 이기는 바울로

-경규봉 신부-

바울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났다. 다마스쿠스(9,4)에서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개한 이후 트로아스(16,9)와 예루살렘(22,17) 등지에서 그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그는 이후에도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23,11; 27,23). 이처럼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바울로가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데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사실 바울로는 고린토에 도착했을 때 두려워서 몹시 떨었다(1고린 2,3). 고린토의 유대인들은 대단히 완고했고 바울로를 적대시했다. 더욱이 회당장 그리스보와 같은 지도자급 인사가 개종하였으니 바울로에 대해 박해가 얼마나 더 심해졌겠는가! 그래서 바울로는 두려움에 떨며 유대인들의 박해가 더 심해지기 전에 조용히 고린토를 떠나고자 했다(16,19-19; 17,13-14).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하신다. 이 도시에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1년 6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유대인들은 아카이아 지방의 총독으로 갈리오가 부임하자 바울로가 불법적인 종교를 전한다는 명목으로 바울로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총독은 이 사건이 민사나 형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교와 관련된 문제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고발을 기각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냈다.

이처럼 바울로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고 총독이 유대인들을 냉대하는 것을 보자 반유대적 감정을 품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책임자격인 회당장을 무고죄로 매질하였다. 바울로는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브리스킬라와 아킬라 부부와 함께 시리아로 떠났다. 바울로는 하느님께 정한 서원의 기간을 마치자 겐크레아(고린토와 가까운 곳으로 고린토의 외항이며 교통의 요충지)에서 머리를 깎았다(민수 6,2-21 참조).

바울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많은 박해를 받았다. 갖은 욕설과 야유를 들었고,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적대자들의 돌에 맞아 혼절하기도 했다(사도 14,19). 그는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2고린 11,23-27)라고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를 줄곧 괴롭혔다(2고린 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께 대한 깊은 체험을 통해서 그 모든 박해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인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님으로부터 받는 사람이다.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음으로써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오늘 주님으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자.....◆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
-박상대 신부-

세상의 기쁨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는 데 있다. 세상의 기쁨은 곧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이요, 참혹함과 비통함이다.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으로 몰아 부친 세상이 승리에 취해 기뻐하는 가운데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고통과 좌절을 맛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세기의 대 역전극이 벌어질 것이다.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은 머지않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제자들이 기뻐하게 되면, 반대로 세상은 슬퍼하게 될 것이 빤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호자시며 진리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고,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9-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맞닥뜨리게 될 상황을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의 걱정과 고통에 비유하신다.(21절) 하느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는 것은 예언문학에도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호세 13,13; 이사 27,17-18; 예레 6,24 참조)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산모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듯이 제자들의 고통과 슬픔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의 때와 기쁨의 이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2절)
부활의 기쁨은 산모의 기쁨에 비유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모의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기쁨에 넘치게 할 것인즉, 부활은 새로운 생명에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이 생명과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때가 오면 더 이상 의문도 질문도 없을 것이다.(23절) 그러나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슬퍼하거나 울고 있는 자는 부활의 좋은 증인이 될 수 없다. 부활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자만이 참다운 부활의 증인이 된다.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고 기뻐했던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잘못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도 없을뿐더러 그 기쁨을 알 수도 없다.
결국 세상의 기쁨과 상대적인 제자들의 슬픔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잠시 동안이겠지만, 대 역전극이 벌어진 후에 맞이할 세상의 슬픔과 제자들의 기쁨은 영원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기쁨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쁨이란 인간의 기본 정서 중의 하나로서 슬픔과 대비되는 감정(感情)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가지거나, 어떤 분위기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나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쁨의 감정은 그와 반대되는 노여움, 슬픔, 두려움, 쾌감, 불쾌감 등과 같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표현은 외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내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 표현되거나 내적으로 머물게 되는 기쁨의 다음 단계가 더 중요하다. 기쁨은 마음의 현상이나 상태이기 때문에 필시 다음 단계의 동작을 유발시킨다. 즉, 기쁨을 맛보거나 누리는 주체(主體)는 일반적으로 자랑 또는 교만을 표하거나, 아니면 감사의 행동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대학진학을 원하는 고등학생에게 응시한 대학의 경쟁이 심할수록 합격했을 때의 기쁨이 커지는 것이다. 이 때 고등학생의 기쁨은 다음 단계로 자랑, 아니면 감사를 유발시킨다.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죽여 제거한 세상의 기쁨도 다음 단계로 자랑과 교만과 자만에 가득 차 우쭐댈 것이다. 이럴 때의 기쁨은 오히려 육체가 성취한 쾌락에 가깝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된 제자들의 기쁨은 다음 단계로 감사의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때의 기쁨은 정신적인 쾌감이다. 우리 자신도 늘 그렇다. 따라서 기쁨이 있을 때 자만과 교만에 빠지지 말고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기쁨은 분명히 그 이상으로 커질 것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과연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이수철신부

오늘 말씀 묵상

중 예전 언젠가 나눴던 강론 주제,

‘벽이 변하여 문으로’가 생각났습니다.

 

‘벽과 문’ 참 풍부한 영적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요즘 부활시기 계속되는 아침기도 독서 후 계응송 말씀처럼,

무덤의 벽을 뚫고 생명의 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답답할 때

본능적으로 하늘이나 창밖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벽을 대할 때면

누구나 답답함을 느끼지만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들판을 바라보면

한없는 자유를 느낍니다.


어제 마침 어느 성당의 노인 대학 노인들 80여명이

성지 순례 차 수도원에 들렸다 미사를 드렸는데,

이분들의 획일화된 붉은 유니폼의 옷들이

순간 벽처럼 느껴져 숨 막힐 듯 답답했습니다.

 

이래서 벽같이 느껴지는 단색의 옷들보다는

개성이 드러나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이었다면

자유로운 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창 지닌 방이 좋은 방이듯,

좋은 마음의 창문 지닌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창문을 통헤 하늘 풍경을 보듯이,

마음의 창을 통해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은 만날 때 마다

영감이나 깨달음을 주어

우리를 자유롭고 평화롭고 기쁘게 합니다.


과연 나는 닫힌 벽같은 사람입니까?

또는 열린 문 같은 사람입니까?


영적 세계에서는 벽과 문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미워하면 벽이지만 사랑하면 문입니다.


슬퍼하면 벽이지만 기뻐하면 문입니다.


절망하면 벽이지만 희망하면 문입니다.


화내면 벽이지만 웃으면 문입니다.


불신의 벽이요 믿음의 문입니다.


어둠의 벽이요 빛의 문입니다.


죽음의 벽이요 생명의 문입니다.


거짓의 벽이요 진리의 문입니다.


벽이 문이 되고, 문이 벽이 되고,...

무수히 반복하며 사는 우리 인생입니다.

 

어찌 보면 ‘벽과 문’은 우리 삶의 리듬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벽은 마음의 문으로 변합니다.


그대로 자유의 문, 기쁨의 문, 평화의 문이 되어 버립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에 미사입니다.

 

기도와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벽을 활짝 열린 문으로 바꿔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사라지면

곧장 우리는 답답한 벽이 되어 버립니다.

 

냉담으로 완고해진 이들이 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때

기쁨의 문으로 변하는 근심의 벽이요,

아무도 이 기쁨의 문을 닫지 못한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바오로가 사도행전에서

환시 중에 만난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그의 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셨기에

주님의 선교사로서 험하고 답답한 세상 속에서도

늘 자유로운 문이 되어 평화롭고 기쁘게 산 바오로였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벽 같은 우리를 문으로 바꿔주시어

당신 안에서 자유롭고 기쁘고 평화롭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뭉치면 산다 

-노성호 신부-

흩어져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하나로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더 효과적인지요.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온 국민들의
함성이 그랬고, 손에 촛불을 들고 마음을 모았던 촛불 시위대의 모습이 그랬으며,
불의에 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그랬습니다.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일이었고, 정말 미약한 사람들의 작은 손길 같았지만, 일치를 이루고 단합했을
때 그 잠재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결국 무언가 위대한 결실을 맺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면 결코 이룩할 수 없을
일이었으나 모두 하나로 일치를 이루어 신화를 창조해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왔다는 네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 ‘일치’, ‘친교’ 등의 의미가 중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것처럼 그분의 아들 딸들인 우리 모두도 하나이고, 하나인
우리들이 이루게 되는 교회 또한 하나라는 사실.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버림받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 한 형제로서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직해 나가야 할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치와 친교의 모범을 몸소
보여 주셨고, 그 삶 안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기도해 줄 수 있을 때 더욱더 하나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양승국신부-


<흘러넘치는 축복의 잔>


저희 살레시오회의 가장 우선적 사목대상자들인 ‘가난한 청소년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라는 주제의 소논문 하나를 준비하면서, 단순히 경제적 가난만이 가난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가난한 청소년’이란 보다 포괄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지만 튼튼한 가족구조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과,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거듭되는 부모의 불화로 인한 심각한 정서적,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청소년, 둘을 놓고 비교해볼 때 과연 누가 더 가난한 청소년일까요?


많은 청소년들이 물질적 가난뿐만 아니라 정신적 가난, 애정의 결핍, 영적 가난, 심리적 가난...등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한 가난한 청소년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보다 포괄적인 사목적 접근이 요청됩니다. 포괄적인 사목적 접근이란 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행하셨던 치료적 접근, 영적 접근, 전인적 접근입니다.


물질적 가난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우선 펀드를 찾아야 하겠지요. 이어서 정서적, 심리적 가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심리치료사, 의사와도 같은 전문가를 찾아야 합니다. 애정적 결핍을 보충해주기 위해서는 마음이 따뜻한 그 누군가를 찾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 차원에서의 지지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 유능한 의사선생님께서 심각한 간경화 증세로 고생하던 한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의 회복 불가능한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선생님은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에 임했습니다. 최고의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한 적절한 치료와 처방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드디어 환자는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분이 다시금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이유는 어느 정도 간 기능이 회복되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그분은 퇴원하는 즉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과음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대형 사고를 저질러서 응급실로 실려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의사 선생님은 병에 대한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셨답니다. 그분은 이제 전보다 훨씬 겸손한 자세로 환자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증상에 대한 치료도 중요하지만, 정서적, 애정적, 신앙적 치료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의사 선생님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도 진지하게 상의하게 되었고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답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들도 한 인간의 치유와 새 삶을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노력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우리 인간들도 다른 한 인간에게 기울이는 정성이 이토록 극진한데, 하물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배려는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걱정과 근심, 갖은 스트레스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초산인 산모가 산달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갖게 되는 걱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도 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갖은 근심 걱정들이 꼬리를 물것입니다. 아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만의 하나라도 기형은 아닌지, 얼마나 아플 것인지, 아이를 낳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산모는 아이가 무사히 탄생함과 더불어 그간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립니다. 자신을 꼭 빼어 닮은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충만한 행복만이 남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우리가 지니게 되는 근심걱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내게 뭐라고 하실까, 잘못한 것 엄청 많은데 혼나지 않을까, 불붙는 지옥 불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그 모든 걱정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몇 천배, 몇 만 배 더 자비로우시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우리의 인생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지난 세월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죄악, 슬픔과 눈물을 말끔히 거두어가시고 흘러넘치는 축복의 잔을 우리 손에 들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들고 있는 잔에 당신 사랑의 포도주를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힘겹고 위태로웠던 인생길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느님 저버리지 않고 잘 걸어왔다는데 대한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고통을 거쳐서 기쁨과 환희로

-강영구신부-

초록 생명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오월의 아침입니다.
당신은 느티나무가 저토록 푸르고 늠름할 수 있는 까닭을 아십니까?
철쭉꽃들이 눈부신 진홍색과 백색을 자랑하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까닭을 아십니까?
거친 세월의 풍상(風霜)과 계절의 변화, 혹독한 겨울추위를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 나무들은 땔감이 되거나 뿌리 뽑혀 버림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苦痛)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고통은 기쁨과 환희, 생명과 부활의 바탕입니다.
고통 없는 기쁨과 환희, 시련 없는 행복, 죽음 없는 부활은 모두 거짓이며 허구입니다.
여인이 죽음 같은 산고(産苦)를 거치지 않으면 어머니가 될 수 없고 새 생명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부활의 영광을 얻어 그리스도가 됩니다.
고통 자체는 아프고 괴롭지만 고통을 회피하면 거듭남의 기쁨도,
건너감(過越-Pascha)환희도, 성공과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길을 걸은 사람만 하늘나라(天國)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듣던 감성(感性)의 시대를 마감하는 아픔을 겪은 후에야 믿음의 시대로 건너갑니다.
감성(感性)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고통은 여인의 산고(産苦)에 비유할 만큼 아픕니다. 철저한 자기부정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믿음의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시련과 유혹, 고통들을 하느님 자비의 손길로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은 건너감(過越)의 기쁨과 환희를 누릴 것입니다.(一明)


 

기쁨'

-유광수신부- 

 

용미리 납골당에 가면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곳이 있는데 그 내용을 묶어서 출판한 책이 "하늘 나라 우체국"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리라 생각 못했는데....
꼭 회복하시리라 생각했는데...
내 마음 불편할까봐 끝까지 음식을 먹어 주셨던 아버지. 겸손과 근면, 남에 대한 배려....

나는 아버지처럼 살기 힘들 것 같아요. 왜 그리 겸손하셨어요? 왜 그리 부지런하셨어요? 왜 그리 절약하셨나요? 왜 남에 대해 배려하셨나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병도 나지 않고 더 오래 사셨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시는 날도 우리를 배려해 일부러 맞춰 놓으신 것처럼 아이들 방학 때 돌아가신 아버지. 모두들 아버지처럼 산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아버지한테 자랑스런 자식도 못되어 드리고 아버지 마음도 잘 헤아리지도 못하고. 용서해 주세요. 꼭 용서받고 싶어요. 길을 가다가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우리 아버지인가 하고요. 아버지, 가시는 길 편안하게 가시고 좋은 곳에서 잘 계세요. 나중에 만나요.

 

우리 가족은 다섯 손가락이었다.
아빠가 계실 때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엄지 손가락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대단히 큰 아픔이었다.
모든 손가락을 받쳐 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그런 손가락이 없는 지금,
남은 우린 아픔 속에서, 불편함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빠 앞에 서 있으니까 아빠 손도 잡아 주고 싶고, 안아 보고 싶고 그렇다.
내 손이 차가워서 아빠가 잘 잡아 주고 그랬는데. 어디 다닐 때면 아빠 팔짱 끼고 다니구.
아빠가 나 머리 쓰다듬어 주면 잠이 솔솔 오고 그랬는데.
나, 아빠랑 해 본 게 많아서, 아직도 아빠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래서.... 그래서 너무 보고 싶어. 사랑하는 아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우리 아빠.

 

어머니 손을 잡고 꼬불꼬불 논길 따라 눈 덮인 기찻길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따라다니던 그 시절 장사하던 때가 그리워요. 어머니는 주린 배를 조여 매면서도 아이들을 위하여 아랫목 이불 속에 보리밥 넣어 두었다가 싸 주시던 점심 도시락. 어머니 사랑이 크고 한이 없어 갚을 길 없네요. 생전에도 어머니 사랑 크시고, 돌아가신 후에도 크신 사랑 잊을 길 없어 오늘도 다녀가요.

 

한 자 쓰고 한 방울 !
두 자 쓰고, 두 방울!
일 천 개의 글자들이 눈물 색으로 변하여도, 울어 보아도 시원치 않습니다. 목이 터져라 불러 보아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봅니다.
엄마! 정말로 따뜻하게 마음속으로 불러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돌아볼 수가 있게 됐는데 꼭 떠나셔야만 했는지요?
누가 불렀기에 그토록 바쁘게 떠나셨어요?

사랑으로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건
어머님의 빈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제자들이 다시 보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죽었던 이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고 그것이 사실로 이루워졌을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이 나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자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말씀이겠지만 나와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낸 이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리고 만나서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워했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지 예수님을 다시 뵙는 것이 그들의 큰 기쁨은 아닐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 년동안  함께 생활했으니까 죽으셨던 분을 다시 보게 되면 기뻐하겠지만 한번도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해서 과연 기뻐하게 될까? 예수님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아무런 정도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정말 기뻐하게 되려면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이어야 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이에게는 엄마의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어야 하겠고, 아빠를 그리워하는 이에게는 아빠의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 우리의 사고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게 생각되겠지만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우리의 인식도 성장하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영적으로 우리가 성숙해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지고 따라서 기쁨과 평화를 느끼는 것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육적으로 느끼던 것과는 다른 영적인 맛이 있고 그것은 이 세상의 인연으로 얽메여 있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세상 그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그 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리라.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이라면 그것은 외부적인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어야 한다. 그것이 부활의 기쁨이 아닐까?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맛보는 기쁨이 아닐까? 그것이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가 아닐까?


이 기쁨은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말씀하셨던 대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날 때만이 가능한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요한 3,5-7)고 했던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기쁨이리라.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 소위 말하는 도통한 사람은 결코 이 세상 것에 얽메어 있지는 않는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은 새로운 태어남이다. 이 부활은 죽은 다음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부활해야 한다. 부활하면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제 1권 "다가오시는 예수"를 갖고 함께 묵상나누기를 하면서 어느 자매가 다음과 같은 자신의 묵상을 글로 표현하였다. 이 자매의 글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기쁨이리라. 그 기쁨은 아무도 그 자매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이리라.

 

감사합니다. 주님 !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수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같이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했는데도....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시거나 노여워 하시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시며
나는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죄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이 누워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하고 나를 일으켜 주시는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주신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의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기쁨의 삶 †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신자들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의 기쁨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중에 하나로서, 이 기쁨이라는 희망 때문에 신자들은 세상의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자연스런 표현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바라는 일이 성취됐을 때, 혹은 자신의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그 기쁨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이 원하는 대학에 무난히 합격하던가, 취직시험에 합격하던가, 또 가족들의 생일, 환갑, 결혼식 등의 행사에서는 모두 기뻐하고 그런 날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슬픈 일들 무엇이든지간에 우리 또는 주변에서 없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죽음, 질병, 이별 등을 자주보면서도 나하고는 무관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아픔과 슬픔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근심에 쌓일 것이며,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을 겪어야 한다고.... 분명히 예수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통도 따를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르침이신, 낮아지고 버리고 무시당하고 또 희생하는 삶을 걸어가야 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우리의 삶이 실패한 듯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그 다음 말씀은 슬픔과 고통 뒤에 오는 희망의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막상 떠나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심정은 근심이 생기고 고통도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잠시간일 뿐이고, 그 시간만 인내하면 이 모두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며 또한 이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이란 하느님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기쁨을 뜻합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축제 때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또는 왕이 즉위할 때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기쁨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 자체가 기쁨이며,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 주신것도 또한 복음 기쁜 소식이었읍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도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례에서는 그 부활의 기쁨을 50일간이나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쁨은 최종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기쁜 것입니다. 자녀가 성당에 잘 다니면 부모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남편이 피정을 다녀오면 아내가 기뻐하십니다. 바로 그것은 성령의 협조를 받아, 하느님을 체험,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안에서 함께 휴식을 취할 때 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기쁨이 그대들 안에 있고 그대들의 기쁨이 가득 차기를” 기원하십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끔찍한 죽음을 앞두고 기쁨에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면서 정말 사랑 그자체이신 성부의 모습, 성자의 모습, 그리고 거룩하고 위대한 활동을 하시는 성령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누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그분의 기쁨이 십자가의 길과 연관된다면, 본능적으로 고통을 싫어하는 우리에게 굳이 기쁨을 간직하라고 당부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서 기쁨을 누리시는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받으신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존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십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아들이 지녀야 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순종의 실천이 제도적으로 강요되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인 자유의지, 양심에 의해서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표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바지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자유의지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자유로운 것이기에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한 것은 가장 숭고한 자유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강요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순종도 강제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사랑 그 자체를 향한 순수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그만큼 많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열기는 ‘주님의 열기’이기에 큰 물도 사랑의 열기를 끌 수 없고 강물도 그것을 휩쓸어 가지 못합니다(아가 8,6-7 참조). 이처럼 그분의 강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기워 갚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아버지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 가운데서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을 환대하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은 하느님 사랑에 경계가 없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이에게 쏟아진다면, 우리 역시 모든 이에게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영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부어 주신 성령은 사랑할 능력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 의식을 비추십니다. 아버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느끼는 순간 형제를 사랑할 힘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그 때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엎드려 절하기를 바라지 않고, 나 역시 아버지의 자녀임을 겸손되이 받아들여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모든 인생고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기쁨을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삶의 기쁨은 사랑의 결과이지 사랑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할 제6주간 금요일 어떤 수사님의 묵상글입니다.

오늘 수도원 옆에 있던 낡은 집한채가 포크레인으로 폭삭 내려앉았다.
몰론 사람이 모두다 이사가고 난 뒤의 일이다.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인데도 웬지 시원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속으로는 '저 포크레인 기사는 스트레스가 쏵 풀리겠다'고 생각하었다.
그리고는 모처럼 여유를 부리며 수도원 뒷동산을 돌아가며 산책을 해보았다.
평소에는 지나쳐버렸던 풀꽃들이 왜그렇게도 많은지 미처 몰랐다.
오늘따라 또 왜그렇게도 예쁘게만 보이던지...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계속 보이거나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나에게 물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고 불만스러운 것도 많고,
해결된 것보다 해결되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
오해하는 것도 많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왜 같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하도 많고, 맨 정신으로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 하도 많아서
그냥 정신이 빙빙 돌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긴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나의 것이 아니니까, 그럴만도 하다고 여겨진다.
만일에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내가 나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어야만 나는 매일 빠져드는 분노와 격정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격정, 욕심, 이기심 등으로 인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날이 왔을 때,
그분은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다.
이 해방의 그날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볼 수 없다.
해방의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분을 만나더라도 성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희미하게 그분을 볼 수 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그날까지
우리의 방황은 아마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방황하더라도 그분을 향하면서 방황해야 할 것이다.
그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자.

이세상에서는 그 어떠한 것에서도,
그 어떠한 누구에게서도
나의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이 없고, 희망할 것이 없다.
그분의 품안에 머물때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참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과 평화는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근심을 덜어놓고 다함께 차차차...입니다.
해산할 여인이 신발을 바르게 놓고 죽음을 예비하는 네가브티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식을 순산하여 첫 미팅을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포지티브 사고방식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렇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삶의 완전한 모범이신 주님으로부터 다양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겸손해지는 것, 낮아 지는 것, 져주는 것, 모욕을 당하는 것, 결국에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이 결국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걸어가야 할 길, 진리요, 생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든 더 잘해야 하며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을 이겨야한다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근본 가치관은 남보다 앞서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며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서야지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교육을 받아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세상 속 논리에서 눈이 시뻘겋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낮아지고 버리라 하는데 우리는 그 행복을 위해 높아지고 더 가져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았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배우고 알고 또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우리 마음 안에서 종종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만약 이런 갈등과 근심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진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혹은 모르고 있다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 때문에 고민해 보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주님으로 인해 이미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제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 때문에 고민도 하고 실천도 하고 있으며 또 진통을 겪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제 조금만 참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테니 말입니다. 아멘. ..........◆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