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5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8)
"When the Counselor comes,
he will convince the world concerning sin
and righteousness"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슬퍼하지만, 이 이별은 성령께서 오시는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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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실 때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별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함께하는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가진 하느님으로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고자 성령의 형태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하느님으로서 온 인류와 더 가까이 계시고자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당신 제자로 여기시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려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을 품고 사는 사람
-김동하 신부-
스승께서 떠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떠나가서 제자들을 이롭게 할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분이라 하십니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밝혀주신다고 하십니다. 떠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가장 깊은 마음 안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고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려는 것은
깊은 곳에 계신 성령께서 이끄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바라며 온힘을 다해 생각하고 온힘을 다해 지금을
살아갑니다. 설령 지금의 어려움이 아무리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밝혀주시고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힘이란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밝혀주신 뜻으로 살아가는 힘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윤영수 수녀(예수성심전교수녀회)-
가끔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참으로 경건한 자세로 생활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저는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더욱 좋아지실 것 같은데 그럴 맘은 없으세요?"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지만 거의 공통된 것은 "신앙이 좋다는 건 아는데 충실하게 주님 뜻을 따르기에 부족하고 아직 그럴 자신이 없어서 좀더 살고 난 후에 생각해 보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을 생각만으로 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음으로 셈하지 않으면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간혹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 탓에 믿지 않는 이들이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는 상반된 세상의 그릇된 법칙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고 사는 삶이기에 믿지 않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를 아주 잘 아십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의존성과 눈앞에 보이는 것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무지함을 깨우치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대신,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마음 깊숙이 스며드실 수 있는 동반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섬세하게 배려하시며 보내주신 성령께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새로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을 귀한 사랑의 삶 안으로 기꺼이 초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십니까?
-윤정환 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제자들은 다시금 두려움에 휩싸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더니 또 어디를 가신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어쩌라구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독여 주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지 못하신다"(7). 예수님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때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이기도 한 오늘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196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내고 있지요. 국어사전에서는 "자기(스스로)를 가르쳐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합니다.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보여준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스승이 된다는 것, 스승 노릇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어버이는 하늘과 같다"고 했다지만, 요즘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거나 심지어 아예 밑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눈높이 교육'이 강조되고 학생이 원하는 데로 가르쳐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물론 그 책임까지도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역할도 그렇지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생각처럼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말고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들 말이지요. 숨 쉴 공기나 마실 물과 같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접어두더라도 예컨대, 건강이나 돈,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 아니면 평생을 투신할 직업, 자신이 믿는 종교나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 혹은 존경하는 선생님 등등 꼽아 보면 참 많은 것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가치들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님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쇠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사도 16,26). 그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목이지요.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그를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탈옥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여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세상의 가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사도 16,33).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것"(8)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상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가치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묻혀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스승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독서> : 고통 중에 드리는 기도와 찬미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
복음을 전하던 바울로는 점귀신이 붙은 어떤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낸다. 여종은 자신의 힘으로는 악령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악령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악령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악령이 나가기 전까지 여종은 얼마나 악령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이제 악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여종이 악령에 사로잡혀 점을 쳐줌으로써 돈을 벌었던 주인은 바울로가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냄으로써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피의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울로와 실라를 박해하고 고발한다.
오늘날에도 여종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악을 행하도록 하며, 그들을 통하여 돈을 벌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포주가 아닌가? 그처럼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을 박해한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박해 속에서 살아간다.
그처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0-12) 하고 말씀하시며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불행이 닥쳐올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라. 시련과 고통은 악에서 비롯되며,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행복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다.
바울로와 실라는 지하 감옥에 갇혔으며 차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차꼬까지 채워진 상태에서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다. 밤, 밤은 기도에 적절한 시간이요, 특히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시편 119,62 참조).
바울로와 실라는 자신들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박해 중에 더욱더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기도와 찬미, 찬양을 들으시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그리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바울로와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감옥 안이나 밖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자 간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가 그를 찾아와 격려하자 틀림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14,11.15 참조). 그래서 간수는 자신이 신들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는 그에게 중요한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께서는 바울로와 실라가 감옥에 갇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이끌어주시고, 기도와 찬미,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며,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적인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아 주신 다음 이제 시간과 공간에 매어있는 범위을 넘어서,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여 계시는 한에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나, 그러나 영에는 제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더 가까이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에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행전 2, 37에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다시 이야기로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을 때 무거운 죄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에 우리들에게도 죄의식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앞에서 몸을 낮추게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에 어떤 마을에 한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수난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을 때, 십자가의 장면이 벽에 비추워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내려오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그곳에 달려야만 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셋째, 진정한 회개 이후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자신이 진 죄에 대한 죄의식 없이 구세주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나라에서 범죄자로 못 박힌 한사람의 모습이 어찌하여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닫고 일어나 해방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의 기쁨을 주시고자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일깨워 주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양승국신부-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제목이 있었지요. 무엇이든 한번 잡으면 끝까지 꽉 잡고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이나 대중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의 쇠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바입니다. 아직 잘 나갈 때, 그나마 인기가 남아있을 때, 사람들이 잘 한다 잘 한다 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퇴물’이란 소리 듣기 전에 스스로 내려오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언젠가 유럽 한 본당에 사목을 도와주러 갔었는데, 그쪽 교구 인사 시스템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본당에 발령을 받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은퇴할 때 까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좋은 측면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큰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간의 문제가 없으면 괜찮겠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목자, 혹은 신자들과 한 평생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 꽤 피곤한 일 같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정기적인 사제 인사 방식은 꽤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좌 신부님들은 1-2년, 주임 신부님들은 4-5년 만에 한번 씩 순환되니, 사목의 일관성, 지속성 면에서는 취약점이 생기겠지만, 다양성, 변화나 쇄신 측면에서는 아주 좋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사이동 때 마다 하게 되는 제 작은 체험입니다. 떠날 때 마다 남게 되는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인사이동이 발표되고 나서도 걱정이 큽니다. 내가 떠나면 저 불쌍한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내가 떠나고 나면 저 아이들이 입게 될 상처가 만만치 않을 텐데, 내가 떠나고 나면 기껏 안정시켜놓은 이 시스템은 어떻게 되나? 누가 후임자로 올 것인가? 그가 나보다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단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지나가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더 발전했으면 발전했지 특별히 잘 안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몇일 보고 싶어 하겠지만,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 잘 잊어먹는다는 것이 또 아이들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들어 저는 ‘인사이동’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한 3년 지나면, 즉시 직면하는 어려움이 강론 밑천이 바닥나는 것입니다. 매일 같은 소리 반복합니다. 또 모든 주변 상황에 익숙하다보니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변화나 쇄신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기보다는 작년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쇄신이나 발전,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좋은 처방약은 인사이동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떠나게 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요.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될 때 그 사람과 함께 새로운 바람이 유입됩니다. 공동체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운 바람이신 성령께서 오실 수 있도록 떠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생활에 대한 아쉬움으로 제때 떠나지 않으셨다면, 그간의 인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자꾸 공생활을 연기하셨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속 사업은 그만큼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성령의 도래, 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에 들어있던 기본 골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부모님들께서 두 분 다 멀리 여행을 떠나실 때, 걱정들이 대단하지요. 그러나 결과를 두고 보면 서로를 위해 훨씬 유익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개구쟁이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정작 부모님 부재 시에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잘 해야 되. 부모님 안 계시는 동안 우리끼리 똘똘 뭉쳐 잘 한번 해보자. 그분들 걱정 안하시게 열심히 하자!’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척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챙겨주실 때는 딴 짓 하고 정신 못 차리고 그랬었는데,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나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의 육적인 눈이 서서히 정화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고 나신 후에야 그분의 가르침이 하나하나 제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협조자 성령을 보내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불완전했던 믿음이 완전해졌습니다. 희미했던 예수님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알게 된 제자들은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성령께서 오시도록 다시금 길 떠나길 바랍니다. 협조자께서 오시도록 우리 자리를 내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보호자가 오시면'
-유광수 신부-
보호자가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죄와 정의와 심판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죄와 정의와 심판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인지를 알려면 보호자(성령)가 오셔야 알 수 있다.
보호자가 오시면 우리가 그 동안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죄로 드러날 것이고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어떤 것이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이 올바른 것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올바른 판단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오셔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보호자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복음을 통해서오신다. "보호자가 오시면"이라는 말은 나의 삶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면 무엇이 죄이고 정의이었는지를 심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묵상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짓고 있어도 죄를 지은 것인지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그런 잘못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을 묵상하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볼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도 복음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자기 죄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같은 죄인들은 죄를 짓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 고백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인들은 매일 매일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고해성사를 보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했던 "막가파"사건이 떠 올랐다. 막가파들을 취조하던 한 형사의 고백을 일간지 칼럼에서 읽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된다. 한 형사가 그들을 취조하던 중 설렁탕 집에 데리고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사주었다는 것이다. 그중 한 젊은 이가 설렁탕을 먹다가 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울먹이던 젊은 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서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다. 형사님이 사주는 설렁탕이 자기 생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 것을 받아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 그래도 자기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이 고마워서 운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몇 년전 그토록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고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그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저질렀던 젊은 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고마움에 설렁탕 앞에서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폭악한 살인마가 아니었다. 설렁탕 한 그릇에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이는 얼마나 순수하고 나약한 존재이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누군가가 사주었을 때 그 고마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나는 우리 사랑에 메말라 있는 이들에게 설렁탕 한 그릇의 사랑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를 살인마로 만든 사람은 바로 그 젊은 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이고 그 책임은 그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
우리가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 42-43)라는 말씀을 묵상하였다면, 사랑에 굶주려있는 이들을 그렇게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고 말씀했던 대로 우리 자신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빍혀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요, 말씀이시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그토록 사랑을 외쳐대면서 과연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무슨 사랑을 베풀었고 어떤 하느님의 모습을 증거하였단 말인가?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이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판단하고 의롭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심판한 것이 있는가? 정말 복음의 빛으로 나의 삶을 되돌아 본적이 있는가?
나는 소그룹 복음 묵상을 몇 그룹 지도하고 있다. 매주 복음 묵상을 나눌 때마다 울음바다가 된다. 복음을 북상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와 심판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어느 자매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을 고백하였다. 정신적으로 약간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4살 되었을 때 너무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손으로 떼리고 그것도 안되어 빗자루가 다 망가지도록 떼렸다는 것이다. 그 때 심정같아서는 아들을 죽이도록 미워했고 죽여서도 자기 속이 풀리지 않을만큼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엄마 엄마하고 울고있었는데도 그냥 떼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어느 날 피정을 갔었는데 옆 사람을 꼭 안아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옆 사람을 안아주면서 아들 생각이 나서 한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즉시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꼭 안아주면서 얼마나 귀한 아들이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아들은 하느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울었고 묵상 나누기하던 자매들은 그 자매의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울었다. 어쩌면 자기들의 잘못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죄를 보게 되기 때문이리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히브 4, 12-1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속 마음을 보게 해주신다.
우리는 말씀에 빛을 받지 않으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죄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보게 된다.
우리가 게으름, 이기주의, 무관심, 불성실함, 미움, 판단, 탐욕 등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와 정의와 심판을 말씀해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이다.
자기가 잘못된 생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의 떠남으로 오시는 성령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의 역점은 예수께서 떠나야 하심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즉, 떠남이 없이는 성령의 오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시면서, 오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업무(業務)를 밝히신다. 아울러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5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머물러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신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사실 모두에게 중요하다. 예수께서 ’가신다’는 암시는 공생활 중에도 여러 번 하신 바 있다. 초막절을 맞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경하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내가 아직 얼마동안은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7,33)고 가르치셨다. 또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고 난 뒤 "나는 간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찾을 것이며, 내가 가는 곳에 당신들은 올 수 없다"(8,21)고 하셨다. 이 두 경우는 예수께서 곧 가시게 됨으로써 세상에 남아 있는 시간의 절박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로서 예수께서 아직 머무는 동안 세상의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사(13-17장)에서도 ’나는 간다’는 말씀은 여러 번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13,1) 최후의 만찬을 마련하셔서 고별사를 시작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도 예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고 하셨다. 공생활 중에 언급한 말씀들이(7,33; 8,21)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면, 여기서는 목전에 다가와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데(16,5), 사실은 제자들이 두 번이나 질문을 했었다. 가신다는 말씀과 함께 사랑의 새계명이 선포되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13,36) 라고 질문을 했으며,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셨을 때 토마스도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일까?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의 2차 고별사(15-17장)를 추가로 편집할 때 앞서간 1차 고별사(13-14장)의 내용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결국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가시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주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가심’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심’은 제자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조장하지만, 동시에 유익한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조건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실 것이다.(8절) 성령은 바로 이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해 주실 ’협조자’이시다. 예수께서 오시는 성령을 협조자로 계시하심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협조자로서의 성령계시는 오시게 될 성령이 제자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단순히 제거해 주실 것임을 알아들으라는 학습(學習)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하여 기쁨과 신뢰심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실제(實際)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는 곧 현장감(現場感)을 의미한다. 따라서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실제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실 것이고, 동시에 진리의 성령으로서 세상의 죄와 정의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선언하실 것이며(9절), 예수께 대한 불신(不信)을 유죄(有罪)로 판결하실 것이고(10절), 세상의 권력자, 즉 예수님을 팔아 넘긴 자와 죽인 자들을 오히려 죄인으로 판결하심으로써(11절), 예수님의 부당한 재판을 다시 세워 그분의 의로움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렇다고 오시게 될 성령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처럼 이런 업무들을 수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업무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수행된다. 제자들과 교회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한 검증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풀밭에서 시계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시계는 보이지 않고 풀만 보이다가, 간절한 기도를 올린 후 다시 찾아보니 풀은 보이지 않고 시계만 보이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5.18 민주화항쟁으로 세상을 떠난 연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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