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요한 14,23-29)
“I have told you this while I am with you.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remind you of all that I told you.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it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or afraid.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시기로 약속하시며 이에 대한 희망으로 성령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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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오르시기 전 제자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과연 세상이 주는 평화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지난 1999년 세계적인 한 신문사에서 ‘20세기 최고의 인물 20인’을 선정하였는데 케인즈가 경제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 문제로 파리 회담이 열렸을 때 영국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각국 대표들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크나큰 보복 조치를 결의하였으나 유독 케인즈만은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패전국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주는 것은 복수심을 일으키는 것이고, 또 다른 전쟁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케인즈의 말은 무시되었고, 또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었습니다.
그제야 세계 여러 나라는 케인즈의 주장을 인정하고 패전국에 복수 조치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재건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른바 ‘마샬 플랜’을 만듭니다. 이는 패전국의 경제 부흥을 도와주는 계획으로서, 서로 용서하고 진정으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 상대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게 된다는 케인즈의 경제 이론을 반영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우리 자신이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과 용서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해주시는 스승
-김동하 신부-
배움은 어릴 적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집니다. 성인이 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계속합니다. 마침도 이룸도 없는 배움이지만
거듭하여 이르고자 하는 목표는 섬기고 봉사하는 인간입니다(마르 10,45 참조).??
배움에서 섬김과 봉사라는 거룩한 열매를 내기 위해서는
스승이 큰 몫을 차지합니다. 말로는 일러주고 행동으로는 실천하며
마음으로는 밀어주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죽는 법을 가르쳐서
사는 법을 깨닫게 하는 스승이어야야 합니다. 몸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늘 함께하면서 기도해주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완성이시고 마침이시면서도 자그만 몸으로 오신 분. 그분께서는 섬김과
봉사라는 배움의 열매를 말과 행동과 마음을 합하여 손수 맺어주신
스승이십니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려고 죽음을 걸으신 스승이십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의미는 당신의 보호자이시며 분신이신 분까지 보내셔서
뚜렷이 밝혀주시고자 하십니다. 기쁨으로 가득 찬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이끌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주십니다.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어느 해인가 8일 피정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묵상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게 됩니다.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지치고 배고픈 한낮, 제자들은 모두 시내로 먹을 것을 사러 가고 예수님 혼자서 우물가에 앉아 계셨지요. 이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지요. 여인은 유다인이 자기에게 말을 걸고 더구나 물까지 달라고 하여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다고 여겨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대화가 오고 갑니다. 시작은 마치 동문서답식 대화 같았는데 차츰차츰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화됩니다. 마침내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그분이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전했습니다(요한 4,142).
피정 마지막 무렵의 주제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부분이었습니다.
바닥이 환히 비치는 맑고 투명한 갈릴래아 호수. 물결이 햇살에 반짝이며 호숫가에 부드럽게 밀려왔다 밀려갔으며 두 사람이 해변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었고 그 옆에 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게 물을 줄 수 있겠니?" 나는 선뜻 "예, 주님!"이라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옥빛이 도는 맑은 물결을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물을 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을까?"라는 의문은 갖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예수께 물을 떠 드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내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이제 물을 줄 수 있는가?"라는 표현에서 그동안 무척 기다려 오셨다는 것과 강요하지 않는 정중함을 느꼈습니다. 비록 대답도 못하고 물도 드리지 못했지만 지금도 자꾸 떠오르는 성가가 있습니다. "날 먼저 사랑하신 주는 사랑받기 원이시라 / 내 가슴이 숨 쉬는 만큼 주님 사랑하리이다. 주님 사랑하리이다."(가톨릭성가 332번 2절)
"진짜?" 하고 묻듯이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고 하십니다. 도취하여 노래하는데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이 말입니다. 사실 말과 노래로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의 증거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표시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납니다. 내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행할 물동이도 두레박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을 사랑하였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는 그분이 사람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일을 보면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느님을 참 많이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이룬 일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일이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단지 거기 존재하는 겸손이지요. 그 일의 가치는 그 일을 고무시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온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 희생으로부터, 곧 아픔을 느낄 정도의 큰 희생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는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을 상기시켜 줍니다.
㰡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㰡(14,`23)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다 마더 데레사처럼 살 수는 없겠지요. 각자가 받은 소명대로 살 것입니다. 㰡이제 내게 물을 줄 수 있겠니?㰡라고 청하신다면 아직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이제 어떻게 물을 드려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달아 갑니다.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 번번이 좌절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내 의지대로 잘 안 된다는 것, 내 안에 그런 에너지와 사랑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릇이 쓰이기 위해 비워져 있어야 하듯이 먼저 단단히 주먹 쥔 손을 펼치는 것, 하느님께 승복하고 그분의 어린이가 되는 것, 하느님께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희생하고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 자격이 있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거기서부터 샘솟는 사랑을 받고 있음에 대한 안도감, 자유로움, 그리고 그 아래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감사의 마음,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흘러나옴을 느낍니다. 작심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자연스러이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태 6,`3 참조).
억압과 자유와 평화
-배광하 신부-
어느 스님께서 가톨릭 교회의 방대한 법전을 보고 놀라며, 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신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교회가 자꾸 신자들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라의 법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법 없이도 사는 나라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악스러워져 자꾸만 법망을 피해가며 악을 저지르니 그것을 보완하는 또 다른 법들이 만들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그 같은 모습은 자주 발견 됩니다. 그들이 단순한 율법을 지키지 않고 미꾸라지 같이 피해가며 악을 저지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또 다른 율법이 만들어지고 법 조항은 늘어만 가게 되어 힘없는 백성을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신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율법의 얽매임이었습니다. 특별히 할례의 문제는 새로운 신앙에 들어서려는 이들에게 많은 두려움과 망설임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그 많은 억압적인 율법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싸우셨던 예수님의 정신을 그토록 빨리 잊어버리고 초대 교회는 또다시 백성을 율법에 옭아매려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거짓 율법에 당당히 맞섰던 바오로 사도는 드디어 초대 공의회인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이끌어 냅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이 신앙에 입문할 때 가장 큰 공포의 걸림돌이었던 할례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 28)
그런데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교회는 바리사이보다 더 지독한 율법주의화 되어 하느님 백성을 억압하게 됩니다. 구약의 강압적인 율법주의보다 더 큰 공포의 율법 교회로 변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득권을 얻은 다음,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수 많은 백성을 억압하고 죽인 것이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당신의 이 지상 파견의 목적이 자유와 해방이라고 선포하셨는데, 교회가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19)
이제 신약의 자유와 해방을 크신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지킬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살아갈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
신앙인들은 외부의 압력에 맞서 용감히 싸워야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 참된 자유를 살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세상 모든 물질적인 것, 권력, 명예, 재물, 지식, 가족, 인간적인 사랑의 얽매임에서 과감히 해방되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진정한 자유 참 평화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 27)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맛보았다면, 이제는 내 자신이 옭아매고 있는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도 평화와 자유를 맛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아 늘 송구스러움과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이웃과 가족을 용서해 그들이 두 손 활짝 펴고 자유와 평화를 맛볼 수 있게 하는 일, 내 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빚을 탕감해 주어 기쁨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일, 어려운 고민에 억눌려 있는 이들을 사랑의 관심으로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해 주어 자유와 평화를 얻게 해주는 일 등.
내 주변을 사랑으로 둘러보면, 바로 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게 될 일들이 실로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에 눈뜨게 됩니다. 그것이 부활을 사는 것이며, 부활을 사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
우리가 진정 자유와 평화를 세상 속에서 만들며 살때, 분명 우리는 영원한 평화의 도성,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등불(묵시 21, 23 참조)이 찬연히 빛나는 부활의 집으로 말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분 말씀 따라
-이기양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지는 못해도 미워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면서도 미운 사람이 생겨나면 몇 배로 보복하려 하고, 또 커진 미움으로 삶이 온통 흔들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따른 어두움의 감정을 털어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주 사이가 나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험담을 늘어놓기에 바빴으며, 동네에 나가면 서로의 흉을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참다못한 며느리가 어느 도사를 찾아가 울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도사님, 이러다가는 제가 죽겠습니다. 우리 시어머니를 빨리 돌아가시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미움으로 가득 차 독기가 서린 며느리를 유심히 쳐다보던 도사는 "내가 방법 하나를 알려줄 터인즉 그대로만 하면 당신 시어머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오.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오?"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며느리는 좋아라하며 얼른 대답했습니다.
"인절미를 참 좋아하시지요."
"그렇다면 인절미를 아주 정성껏 준비해서 딱 100일 동안 대접해 드리시오. 그런데 대접해 드릴 때는 반드시 웃는 낯으로 상냥하게 해야 하고 어깨와 등도 함께 주물러 드려야 하오. 이렇게 하면 100일 후에 시어머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오."
묘책을 받은 며느리는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와 바로 맛있는 인절미를 만들어 시어머니께 갔습니다.
"어머니, 인절미가 맛있게 되었네요. 한 번 잡수어 보세요."
시어머니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합니다. 며느리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었지만 꾹 참고 시어머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합니다.
"아니, 무슨 일이냐, 네가?"
깜짝 놀란 시어머니는 어깨를 며느리에게 맡긴 채로 고개를 외면하고 도대체 며느리가 무슨 술수를 꾸미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시어머니는 동네에 나가면 며느리를 칭찬하게 되고 칭찬을 하다 보니 전에는 몰랐던 며느리의 장점이 점점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가 자기를 칭찬한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점차로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기특했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가 고맙고 정겨워졌습니다.
이제 100일이 하루 남은 99일째 되는 날에 며느리는 고민이 되어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도사님, 정말 인절미를 하루만 더 드시면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되나요?"
"확실히 돌아가시지요."
"아이고, 도사님. 우리 어머니를 살릴 방법은 없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며느리는 도사를 붙들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사가 말했습니다.
"인절미를 하루만 더 먹게 되면 미운 시어머니는 죽고 새로 사랑스러운 시어머니가 태어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칭찬에 반색하며 기분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남에 대한 칭찬에는 인색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데는 별 생각 없이 쉽게 행하는 경우가 많지요. 더 큰 사랑을 받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본인은 작은 사랑조차 나눌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의 큰 사랑을 입고 사는 신자들은 받은 사랑을 나눠야 할 의무가 있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할 때 화해의 기적이 일어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 말씀을 지키고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뛰어넘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임을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
-김지영신부-
유다인 지혜의 저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최초의 여자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만드셨다고 적혀 있다. 로마 황제가 한 랍비의 집을 방문하여 ‘하느님은 도둑이다. 어째서 남자가 잠들어 있을 때 허락도 없이 뼈를 떼어 갔는가?’라고 말했다. 이 때 옆에 있던 랍비의 딸이 말참견을 하였다. ‘황제의 부하 중 한 사람을 좀 빌려 주십시오. 좀 어려운 문제가 생겨 조사시켰으면 하는데요’ 라고 했다. 황제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딸은 ‘실은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금고를 훔쳐 갔는데 그 대신 도둑은 금그릇을 놓고 가버렸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조사하여 연유를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는 ‘그것 참 부러운 일이로군. 그런 도둑이라면 내 집도 털어 갔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의 딸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 일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갈비뼈 한 대를 훔쳐가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여자를 남겨 놓으셨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 계신 곳으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남겨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십자가상 죽음의 길로 떠나게 되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내려 주십니다. 평화는 전쟁이 멈춘 상태와 같은 평화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예수님 바로 자신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권력과 부귀를 통한 평화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를 통해 누리게 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결국,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예수님 바로 자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남기신 평화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인 것입니다.
또한 나약하고 겁 많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협조자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늘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박해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오늘의 제1독서(사도 15,28)에서 전해 주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초대 교회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늘 주님이 남겨 주신 평화를 인사하고 나눕니다. 형식적인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가정과 이웃 안에서 용서의 마음과 진실이 담긴 ‘평화’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조욱현신부-
오늘도 지난 주일의 천상 예루살렘의 이야기(묵시 21,1-5)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21,2 참조). 찬란히 빛나는 열두 대문 위에 씌어진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이것은 모든 민족들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데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과 그 성벽을 받치고 있는 열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14절)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사이의 사상적 연속성이 있음을 뜻한다.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
그러나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22절).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세속도시’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성스러움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깊이 들어와 계시어 그들과 하나를 이루고 계심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정화에서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며 또한 만물이 하느님께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공통 사제직이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천상 예루살렘은 성전이 필요 없듯이 빛이 필요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이다(23절).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예수께서는 당신 빛으로 선택된 이들을 감싸시며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2고린 3,18). 그렇게 되면 구원된 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드러나 보이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 요한 14,23-29: 성령은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여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오늘의 교회 역시 되어야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 모두가 ‘종말론적 교회’를 예견할 수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다.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은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일어나도록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 거처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14,23-24).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예루살렘으로 기어오르지 않으면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갈라지고, 그리하여 참된 목적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대신하지 못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탓이다. 이제 또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23절). 즉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4,8.16 참조).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과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모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에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1고린 2,12 참조)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수께서 약속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25-26절). 즉 성령은 모든 선물의 ‘완성’과 같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보다 철저하게 들어가게 하신다. 반복적인 되새김만이 아니라 ‘깊이 있게’ 함으로써 구원적 체험을 항상 새롭게 하는 창조적 역할을 한다. 시대는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기에 충실해야 한다. 계속적인 ‘새로움’ 속에서의 ‘충실성’,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주시는 기적이다. 이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제1독서: 사도 15,1-2.22-29: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제1독서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교회에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성령께서 주인공으로 개입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사랑의 ‘충실성’과 ‘새로움’의 지침이 제시된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선교사명(마르 16,15)에 충실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하신다.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 될 것입니다”(28-29절).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지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께서 비추어주시고 굳게 일치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전주교구 김정현 신부-
2002년 3월 25일 일요일 고(故) 정주영 회장의 영결식이 서울 중앙 병원에서 있었습니다. 영결식이 거행되던 중 생전에 그분이 남긴 말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들 중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한 기자가 “몇 세까지 살고 싶으십니까?”라고 묻자, 고(故) 정주영 회장이 웃으면서 “백오십세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생(生)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몇 년 전 소 떼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던 고(故) 정주영 회장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저는 지팡이를 짚고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어가는 정주영 회장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하루하루 가는 것이 아까울까? 그 많은 재산과 권력을 뒤로한 채,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빠르고 아쉬울까’하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당시나, 또 돌아가시기 전이나 고(故) 정주영 회장의 심경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오십세 까지만 살았으면…”이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보아 모든 것이 아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으로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주고라도 ‘시간’을 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 쯤 가져보는 소망일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인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주기는 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소망들 중 하나는 평화일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늘 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고 간다. 그런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백오십세’ 아니 불로장생을 위해 몸에 좋은 것이라면 장소 불문하고 찾아 나서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녀들에게 몸에 좋은 보약, 좋은 학원, 고액의 과외는 시키지만, 학원 때문에 첫영성체를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시키지 못하는 부모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자녀들에게 현세적인 작으마한 행복은 줄수 있을지 모르지만(그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영원한 생명은 결코 자녀들에게 물려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주님께서만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리기 위해 우리의 눈을 주님께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남겨주신 그 평화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부산교구 윤정환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첫 번째 사도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방인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러자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해왔던 할례의 전통을 이방인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직도 유다인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방인들을 한 형제라 부르며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할례라는 의식을 거쳐 유다인으로 귀속됨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와 야고보 사도는 그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을 할례의 율법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상기시키며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누구나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임을 설명합니다. 결국 사도들은 이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한 분파가 아님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나 유다인에게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그 출신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자렛 출신이라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겉모양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풍토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신분이나 자격을 정하고 그것이 깨어지면 마치 사회가 혼란스러워져 평화가 깨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울타리를 만들고 경계를 그어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종교가 다르다느니, 지역이 다르다느니 해서 내 편, 네 편을 만듭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거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스스로 만든 장벽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담이 높아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담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며,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평화입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지만 하늘에 쌓은 재물은 도둑맞을 걱정도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책임지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성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시켰습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명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여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말씀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신앙인 안에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일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실천한다고 주장하셨기에 초기교회는 하느님이 그분 안에 살아 계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고 그것을 배워 자기들의 삶 안에 실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고, 그들이 기억해내어서 실천하는 예수님의 일은 성령이 그들 안에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교회는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인간 안에 또 인류 안에 일어나는 변화와 삶의 새로움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초기교회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도 성령이 하신 새로운 일이었고,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신 새로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교회가 발족한 것도 성령강림과 더불어 일어난 새로움이었습니다.
성령은 인간 안에 또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사회가 외면하던 병자들을 예수님은 고쳐주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병고(病苦)는 죄에 대한 대가라고 믿던 유대교사회였습니다. 반신불수와 나병환자를 포함한 모든 장애인은 자기 죄 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절망하던 그들을 고쳐주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단죄하고 벌주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교 사회에서는 가난도 죄의 결과이고 하느님이 주신 벌이기에 감수해야 하는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런 일들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가 인류 안에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교회는 그 새로움들 안에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움이었습니다. 통치자의 땅에 사는 사람은 통치자의 법을 지켜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땅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도록 초대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와 같이 맹종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인식도 새로움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유대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회중 앞에 세워 놓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마르 3,4). 회당의 회중은 침묵만 지킵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금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일도 노동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선한 일,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난한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버린 이들이라 그들도 버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죄인이라 부르고, 간음한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와 그들의 권위가 우선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희생당하셨습니다. 오늘도 자기 권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교회법으로 사람을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대죄니 조당이니 말할 때,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깨달은 제자들은 그분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실천합니다. 초기 교회는 이 새로움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율법과 제도로 경직된 유대교를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이 살아 숨 쉬시는 유연한 성령의 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법과 제도는 그 시대에 필요하여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이 살아 계시게 그런 것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넘어 예수님에게 부활의 미래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신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십니다.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은 희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우리를 새롭게 가르치고, 예수님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시대에 따라 새롭게 표현하고, 새롭게 실천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성령은 과거의 법과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하는 일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법과 제도에 얽매인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그런 것을 절대적이라 강요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을 절대화하면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숨결은 사람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섬김이 실천으로 기억되는 곳에 살아 계십니다.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심흥보신부-
언젠가 그런 묵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다. 나 혼자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면 삶이 아주 피곤하고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자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 삶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 앞에서 거듭 긴장과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며 삶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만나고 싶고 좋아서 함께하고 싶어진다면 내 삶은 기쁘지 않겠는가?
우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정 사심 없이 나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주고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니 내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오히려 내 욕심으로 취급하고 나를 피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듯이 다른 사람들도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위해 희생해주기를 바란다면 세상은 오히려 각박해지기만 할 것이다. 좋은 사람을 찾고자하는 마음과 뜻은 고귀할지언정 그 현실이 다른 이에게 희생과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을 찾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희생하는 편이 내겐 더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남에게 잘해 준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잘 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심 없이 남에게 잘해주면 적어도 나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만일 그 사람이 나의 좋은 점을 반기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바치셨기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희생하라고 요구하며 또 그렇게 희생하면 감사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기가 더 예수님의 말씀을 살려고 하기보다, 그 말씀을 더욱 더 남에게 지키도록 요구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에게 죄책감과 좌절을 안겨 줘 힘겹게 살게 만들 위험마저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겸손 되이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죄악만 생겨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사심 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당에 나오는 사람은 기쁨을 얻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나 남에게 부담과 분란만을 안겨줄 뿐이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삶의 위안과 희망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2, 24)
우리는 나 너 할 것 없이 누구를 예수님의 말씀에 빗대어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그렇게 지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야 할 것이다.
겉으로 어떤 직책을 얻고 남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힘겨운 삶인가.
그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고,
자기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 중에 되새기고 힘을 얻어서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영광 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14, 27)
사랑이라는 평화
-강길웅신부-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하나의 종교로서 출발하는 데에는 몇 가지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희랍의 발달된 거센 문화였으며, 둘째는 로마라는 강력한 이방인 세력이었고, 셋째는 율법을 고집하는 유다이즘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율법을 고집하는 유다교 계통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이 율법에서 오느냐? 아니면 믿음에서 오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회의를 소집했고 거기서 결정한 사항은, 새롭게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이들에겐 율법의 멍에를 더 이상 지우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한 매듭이 정립이 되며 말썽이 많던 요지를 해결해 버립니다. 구원이 율법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결정을 하면서 '성령의 결정'이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공의회며 사도들의 후계인 주교들의 결정은 '성령의 결정'으로서 오늘날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보여 줍니다. 그 도성에는 아름다운 치장이 있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천상의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을 영접하면 성전에 들어간 것이며 이분을 믿으면 성전을 이미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이미 성전은 우리 안에 건설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율법으로만 구원될 수 없듯이, 우리도 세례만 받았다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에 의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활짝 개방이 되었지만, 우리가 직접 올라가지 않으면 그분의 나라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층계도 없고 사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가느냐?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제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천상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잘 지킬 것이며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인생과, 사랑하는 가정 안에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찾아가시어 거기에 머무십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거기 머무르시면 평화는 저절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주님이 거기 계시면 천국의 평화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먹고 잘산다 해도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면 평화는 없게 됩니다.
저도 성격적으로 화를 자주 냅니다. 급한 성질 때문에 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제가 사랑을 거스르면 바로 그 순간부터 마음은 지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떠나시기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썩은 오물만이 저를 괴롭힐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고집에 있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어떤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시어머니의 심성이 고약한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며느리의 근본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믿는 집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정이 지옥이요 사는 게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며느리가 시장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중태에 빠집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빠른 수혈을 해 줘서 며느리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에 큰 감명을 받았고 시어머니 또한 며느리의 아픔을 통해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평화를 만날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만나는 최고의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합시다. 이것이 주님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것이 또 평화를 얻는 최고의 길입니다.
두 부류의 삶
-강영구신부-
오늘은 부활 제6 주일입니다. 방금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들은 예수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원(身元) 혹은 정체(正體), 영어로는 Identity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며, 어떤 능력으로 살며, 무엇을 누리면서 사는가 하는 점을 명쾌하게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 땅 위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의 지표를 밝혀 주신 대목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세속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부류가 겉모습으로는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지만, 삶의 질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예수를 사랑하기에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이미 지난 주일에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이웃을 섬기는 것, 누구에게 자신이 바라고 싶은 것을 자기 자신이 먼저 해주는 것, 그리고 사심 없이 용서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면 독단과 독선을 버려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언제나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참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스승이신 예수를 닳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에 바보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키우고 계시지만, 부모인 여러분의 말을 잘 듣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성령 곧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받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여서, 하느님의 영의 인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그 어리석음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겨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의 원칙은 적자 생존의 원칙, 약육강식의 원칙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머리 숙여 조아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무자비하게 짓밟고,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며, 항상 손해보다는 득을 보아야하며, 당한 일은 언제나 복수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악하고 꾀스럽고 약삭빠릅니까? 이러해야만 이 악한 세대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더욱 살벌해지고 다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짐승이기를 거부하면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원칙을 따르면서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참으로 살벌한 세상, 난장판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 세상의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우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원수 갚고자 하며, 이웃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선 보기에 그들이 힘있어 보이고, 득세하여 잘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혼란과 멸망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 번째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에서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누리는 평화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며,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확고한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바탕으로 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믿고 신뢰하는 어린 아기는 어머니 품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평화롭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 안에서 그 무엇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의 근본적인 삶의 차이입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더구나 내일 우리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를 염려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비록 어제의 시간이 죄로 얼룩진 시간이라 하더라도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평화를 누리며 오늘에 성실한 사람들, 지금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은 이미 주님이신 예수의 부활로 극복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과거에 죽고, 주님 안에서 새 삶을 누리는 신앙인들은 그래서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시고 길가의 하찮은 꽃들도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실한 삶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되리라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누리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신앙인들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매사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라지고야 말 돈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향락 안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돈과 재물을 쌓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힘과 무력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과 권력과 힘을 바탕으로 한 세상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거짓 평화에 매달려서 그 평화를 잃게 될까 불안해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신앙인인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겉모습으로 보기에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는 않지만, 삶의 질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믿기에 공짜로 주어진 은총이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은총 속에 머물도록 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평화를 누리는 나날의 삶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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