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1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거듭 촉구하신다. 사랑의 실천만이 친구 관계를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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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음의 움직임을 느낍니까? 너무 자주 듣는 교과서적인 말씀 같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타성에서 벗어나는 데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계적인 기업가 빌 게이츠는 성공하려면 성공에 대한 자기 정의를 가지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면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성공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공은 객관적으로 달성되는 실체라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공에 대한 개념을 얼마나 확실히 체험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는 관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리고 신앙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앙과 구원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영성을 찾을 수 있고, 또한 신앙의 기쁨과 보람을 구원의 구체적인 순간에 이르러서가 아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 그 구원의 순간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신앙의 개념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늘 들어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이 더 이상 맹목적이고 구태의연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친구가 되어
-김동하 신부-
800여 년 전 가녀린 나뭇잎이나 듬직한 바위나 풀을 뜯는 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은 덕분에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린 것입니다. 겸손과 가난을 받든 덕분에
보이는 임들 안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입니다.
어떤 임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모습도 생각도 환경도 다르지만 임을 위하여 내려놓고 받아들이기에
대화할 수 있습니다. 격을 무너뜨린 친구끼리의 대화는
사랑을 만날 수 있기에 힘이 솟고 기쁨이 넘칩니다.??
하늘에 계신 임께서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내려놓으시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목숨을 팔아서 당신의 임인 인간을 품속으로 사들입니다.
친구로서 보여주시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임을 친구로 두었다는 것이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한량없이 기쁩니다.
서로 깊이 사랑받음을
-윤영수 수녀(예수성심전교수녀회)-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그 방법을 자세히 안내해 주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주님은 제가 순수한 이타적 사랑을 할 때 그분의 참 벗이 되는 거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의 일상을 돌아보면 그분의 친구로 살았던 시간보다 친구임을 빙자한 이기적 사랑을 했던 적이 더 많습니다.
오늘은 보건복지부에서 정한 제2회 '입양의 날'입니다. 친부모가 직접 키울 수 없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부모와 자녀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 입양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오늘 복음 말씀에 기인한 사랑의 방법으로 18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하여 지금은 2,080명이 넘는 아기들이 따스한 양부모의 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힘없고 나약한 아기에게 기꺼이 자신의 가정을 제공하여 평생 감싸주고 사랑을 피워내는 삶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배려하는 양부모 가정이야말로 제가 가장 가까이 주님 사랑을 배우는 장입니다. 정성껏 아기 돌보는 봉사를 하던 어느 봉사자께서 유난히 자신을 따르며 반겨주던 아기를 입양하고 몇 개월 후에 행복한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기를 위해 입양을 했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아기로 인해 저희 가족이 삶의 고귀함을 체험하고 하느님 사랑이 무언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답니다."
사랑은 삶 안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우리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이세형 신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오늘 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그 사랑의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또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그 사랑의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한 부부가 계시는데 결혼하신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장성했고 모두들 좋은 직장을 갖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끊임없이 상대 배우자를 밀쳐내고 있습니다. 상대가 너무나 꼴 보기 싫어 함께 있으면 항상 싸움이 일어납니다. 배우자가 미움이 지나쳐 싫어졌고 미사를 참례하고 기도를 해도 미움 때문에 항상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드디어 그 부부는 이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지옥과 같은 삶을 마감하리라 결심했습니다. 이제 합의 이혼만 남았는데, 잘 아는 신부님이 오셔서 자매님이 먼저 신부님에게 이혼하겠다고 말씀드렸고, 자매님의 하소연을 들은 신부님이 형제님의 하소연도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두 사람 모두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두 분이 이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ME(부부피정)를 다녀와서 그래도 이혼하겠다면 신부님이 직접 두 분을 교구법원으로 모셔가서 혼인무효소송의 증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부부는 신부님의 제안에 피정에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그들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상대방의 변화만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문제가 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항상 ‘너’배우자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또한 부부가 함께 살면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살아 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피정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기로 결심했고 기쁘게 집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미묘한 것이 사랑이라는 관계입니다. 인간의 범죄 가운데 거의 90%이상이 사랑의 결핍에서 발생합니다. 사랑의 충만은 가만히 있어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랑도 의지적인 노력이 꼭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직장동료도 우리가 사랑하기를 노력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분명 쇠퇴하고 마침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그냥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체적인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자를 배불리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사랑을 해야 할 이유
-조욱현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열매를 통하여 당신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기 전에 이미 사랑하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잇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나누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야 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아직 벗이 되지도 않은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하신 분이 아니신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당신을 알기 전에, 즉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알고 계셨고, 즉 사랑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 당신을 바치셨다. 즉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과 사랑으로 우리을 부르시고,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먼저 누릴 수 있도록,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택함을 받았고 불림을 받은 것이다. 이 열쇠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을 실천하면서 가능하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셨고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이 계명을 실천하는것은 순간마다 우리의 선택하는 것에 달려있다. 우리의 선택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선택이 되어야 한다. 이 선택은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을 바라지만, 크나큰 책임이라고 하겠다. 주님의 뜻에 올바른 응답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닮고, 진정 그분의 벗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벗으로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협력자로 불림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 해 주셨고 이제 그들을 벗으로서의 협조를 바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견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가져다주신 새로운 삶과 새로운 생명을 모든 이가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전함으로써 모든 이가 썩지 않는 영원한 삶의 결실을 풍성히 누리도록 선포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을 올바로 선택하여 사랑 안에 남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독서> : 은총과 자유의 교회
-경규봉 신부-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의를 한 다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신도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유다와 실라를 대표로 뽑아 바울로 일행과 함께 안티오키아로 파견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에 의하여 최초로 설립된 교회이며, 대부분의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방인 신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격려하고 공의회의 공적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방인 신도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이 아니며 잘못된 주장이다. 바르나바와 바울로의 가르침이 올바른 가르침임을 공적으로 인정한다. 다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말 것이며,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이러한 결정을 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주체는 곧 성령과 사도들이다. 사도들은 이러한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에게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권면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 편지를 읽고 격려를 받았으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공의회의 공적인 결정에 따라 교회는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신도들은 모두가 유다인이었고, 같은 하느님을 믿으며, 같은 성경을 경전으로 삼았다. 다만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만이 교회와 유대교가 달랐을 따름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선포했으나 유대교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유대교와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공의회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유대교와 결별하였고,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공의회는 다만 몇 가지 점에 유의하도록 권면한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말라는 점이다. 이는 이방인 전교 과정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공의회는 이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바울로는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1고린 8,1-13; 10,27-28; 갈라 2,11-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식을 먹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지 않도록 하며,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을 먹지 말도록 한 것은 구약에서 금지한 것이다(창세 9,4; 레위 17,14; 신명 12,16.23).
목 졸라 죽인 짐승은 피가 몸속에 남아 있으므로 먹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었다(레위 17,11).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금했다. 이는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음란한 행동을 말한다. 음행은 자신의 몸에 죄를 짓는 것으로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에(1고린 6,17-20), 또한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출애 34,15-16; 레위 20,5) 이를 금했던 것이다.
이로서 교회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다만 신도들이 지켜야 했던 몇 가지 규정은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세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는 규정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은총과 자유의 종교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주어졌고, 인간은 자유를 누리며, 자유 속에서 그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된다.
오늘,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유를 폐부 깊숙이 숨 쉬며 느끼는 하루가 되자.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자.........◆
사랑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산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말씀(15,1-8)이 전체의 흐름을 주도한다. 복음의 주제는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가지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농부에 의해 잘려나가지 않고 계속 나무에 붙어있게 되며, 역으로 계속 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는 가지와 나무의 기쁨이요, 동시에 농부의 기쁨이며, 농부의 지속적인 손질을 유발한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동시에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1차 고별사의 대의(大意))였던 “서로 사랑하여라.”(13,34)는 새 계명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12절, 17절) 이는 후기편집자의 의도를 역력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이기보다 요한복음 공동체 안에 발생한 ‘서로의 불신과 반목’ 등을 경고하는 후기 편집자의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복되는 계명은 곧 ‘서로 간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12절) 사랑에도 등급(等級)이 있으며, 사랑도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며 잘라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사랑이 벗을 위한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주인이 종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여 얻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이루어지며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드러난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오늘 고별의 밤을 지낸 다음 날 실제로 보여주실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공유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신다.(15절)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된다.(14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시키신다. 가지가 나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무가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가지는 철저하게 나무에 종속된다. 즉 나무와 가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지가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다면 이 관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16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I love you!)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보다 조금 더 큰 사랑은 옷을 입고 육화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영어 문장의 스펠링으로 운을 띄워보자.
․I
․L
․O
․V
․E
․Y
․O
․U
바로 이런 구체적인 행동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이며, 결국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저는 최대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즐긴다는 게 맨 날 논다는 뜻이 아니라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즐겁게 하고, 되도록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하며, 언제든지 뒤돌아서면 후회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저를 만들어 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안 될 때도 있고 힘든 날도 있겠지만, 그 까짓것 때문에 피해가고 뒤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도 저의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죠. …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헤쳐 나갈 용기가 있습니다. …”
[이 글은 1974년 7월 13일 울산광역시 우정동에서 출생, 일본 유학 중이던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철길에 뛰어든 취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故) 이수현님의 생각이다. 고인(故人)은 부산 시립공원(금정구 두구동) 7묘원 39블록 1106호에 잠들어 있고, 추모기념비는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 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에 세워져있다.]
-이재현신부-
오늘 복음은 수요일부터 계속 되어서 봉독되고 있는 15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예수님은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고, 그리고 이제 우리들에게, 전해받은 그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전하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전해 받은 그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내리 사랑이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위해 우리는 다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돌아가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농부의 마음과 자세입니다. 농부는 포도나무를 가꿉니다. 농부는 포도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비료도 주고 물도 주고 온갖 정성을 다 줍니다. 그러기에 가지는 자신이 받는 사랑과 정성을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농부이신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무한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농부이신 그분께서 어느날 우리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셔서, 가지를 잘라버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리 원망조차 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냉정히 말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귀찮치만 성당에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려 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친히 믿음의 대상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없는 존재이시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고, 당신 아들까지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받은 사랑은 거저 받은 사랑입니다. 거저 받은 은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들에게 주님은 명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을 서로에게 주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주고, 거저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배푼다고 생각하는 희생, 자선과 사랑은 나의 것을, 내가 가진 것을 큰마음 먹고 이웃에게 배푸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공짜로 받은 것을, 공짜로 받았기에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의 벗으로 오신 그리고 무한한 사랑인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기현신부-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동물 사냥을 잘하는 사냥꾼이 한 명 살았습니다. 그는 하루에 사냥을 나가면 많은 짐승을 잡아서 그 짐승들을 장에 내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냥꾼은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날 따라 산에 안개가 잔뜩 끼고, 멀리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냥이 별로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산으로 계속 올라갔습니다. 아니라 다를까 정오가 되기까지 한 마리의 동물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두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물이 흐르는 폭포수 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내려가려고 했던 사냥꾼은 멀리 폭포수 있는 곳에 웬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물체를 바라보았습니다. 틀림없이 움직이는 동물이었습니다. 멀리 있고, 안개 때문에 사슴인지, 곰인지, 늑대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동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총을 짐승에게 겨냥하여 조심스럽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정확하게 명중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쓰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총을 쏘았습니다. 역시 그 동물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이상한 나머지 사냥꾼은 폭포수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사냥꾼은 기절하듯 놀랐습니다. 거기엔 어미 곰이 커다란 바위를 들고 있었고, 그 밑에 아기 곰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미 곰의 이마와 가슴에선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아기 곰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바위를 든 순간 총을 맞았으나 아기 곰들이 죽을 것을 염려한 어미 곰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바위를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미 곰은 아기 곰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 돌아 가시 전 못내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지세우시며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발표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첫째가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삶 속에서 따뜻하고 그윽한 눈길로 그들을 부르셨고, 공생활 중에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하는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을 그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내셨고,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더 나아가 죄 많은 인간들을 완전히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세상 안에서 드러났으며, 이것을 제자 공동체가 구현하도록 당부하고 계십니다. 비록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떠나셨지만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 공동체는 당신께서 보여주신 사랑 실천의 방법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서 전해주신 계시의 핵심을 알아듣도록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계명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는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존재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힘입어 제자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가꾸어 나갔고, 그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였듯이 우리 역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본당 공동체에서 나만, 내 가족만이 아닌 모든이와 함께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해 나아갈 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느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자연 모든 만물과 함께 하는 관계성 속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계명을 충실히 이행해 나아간다면 새로운 우리 자신들로 거듭 태어나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참 좋은 친구"
-이수철신부-
주님은 우리 모두의 참 좋은 친구입니다.
친구인 주님과 속내를 털어 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월 흐르면서 색깔 바래지듯,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때는 색깔 짙었던 관계들도
지금은 희미하게 자취만 남아있기도 할 것입니다.
다 퇴색해가더라도
주님과의 우정은 날로 짙어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이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깊게 합니다.
날로 색깔 바래져 가는 사랑이 아니라,
날로 짙어져가는 사랑입니다.
이 주님과의 사랑이
허무를 딛고 초록빛 열정으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마지막 친구는 주님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친구’라는 호칭,
얼마나 영예롭고 고마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면
비로소 주님의 친구가 된다 합니다.
주님과의 우정의 깊이는
저절로 형제들 사랑으로 표출됨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와 주님과의 우정의 상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날로 바래져가는 상태입니까?
날로 짙어져가는 상태입니까?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던 숱한 성인들,
참으로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다음 두 사도들에 대한 묘사도 감동적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예루사렘 교회가 두 사도에게 붙여준 명예로운 칭호대로
두 사도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미 타계한 불교의 고승 성철 종정의 좌우명도 생각납니다.
종신불퇴(終身不退),
몸이 다하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몸 다 바쳐 진리를 수호하겠다는
수행자의 결연한 의지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인 바르나바와 바오로요,
역시 진리 수호를 위해
평생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진리의 참 좋은 친구, 성철 종정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친구로 택하셔서
우정을 깊게 하시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면서
우리를 주님의 참 좋은 친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비밀
-노성호 신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습니다. 좋은 일이어서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에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비밀도 있고, 별로 좋은 일이 아니기에 들춰내고 싶지 않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혼자서 삭히고 마는 비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비밀은 결코 없는 것인지, 언젠가는 누군가를 통해서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비밀이라는 것을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의 전 인격이 노출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입이 가볍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각인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바로 비밀을
말해 줄 수 있고, 말해 주고 싶은 좋은 사람, 그는 바로 친구입니다. 저는 학
생들을 만나면 늘 “오~ 내 친구들! 어서 와. 반가워” 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사제라면 어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 같은 벽을 허물고자 함입니다. 때로는 수많은
난관에 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과 하나 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비밀들을 알려 줍니다. 그 비밀은 작고 소박해 보이지만,
친구들이 맺게 될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소중한 비밀이기에 우리 모두를
‘친구’라고 불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살며시 알려주는 게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만
속삭여 주셨던 아름다운 비밀이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속삭여 줄 차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박아미 수녀(성바오로딸 수녀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제자인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유죄다.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지 않고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면 그분은 뱉어버리실 것이다(묵시 3,1516). 그러나 그분의 단호함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연약한 우리가 기댈 수 있도록 은근슬쩍 어깨를 빌려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에서 ‘∼처럼(kaqwv?’은 단순 비교가 아니라 제자들의 행동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라는 의미다. 곧 예수님께 사랑받은 체험이 서로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제자들은 스승이 떠난 후에도 이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서로 사랑했고, 목숨을 내놓았으며,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안데르센 동화에 ‘찻주전자의 행복’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자만심 강한 찻주전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양새를 뽐내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찻주전자는 그만 바닥에 떨어져 주둥이는 깨지고 손잡이도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한동안 구석진 곳에 쓸모없이 놓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망가진 찻주전자 속에 흙이 채워지게 된 것이다. 찻주전자는 이제 끓는 물과 차 대신에 흙을 품었고 거기에 작은 꽃씨 하나가 심어졌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몸 속에 심장이 고동치고 맥박이 뛰기 시작한 것이. 씨앗은 싹이 텄고 얼마 후 예쁜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곧 그 꽃을 좋은 화분에 옮기기 위해 찻주전자를 두 조각으로 깨어버렸다. 찻주전자는 지독히 아팠다. 그는 마당에 내던져진 채 부서진 낡은 조각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슬프지 않아. 내겐 잃어버릴 수 없는 사랑의 추억이 있거든.”
누구에게나 사랑의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사랑을 찾아 5월의 따스한 햇살을 벗삼아 여행을 떠나봄은 어떨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양승국신부-
<가뭄 끝 단비 같은 고마운 존재>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는군요. 모심기를 준비하시는 농부들에게 반가운 손님 같은 고마운 비입니다. 저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번 비로 단숨에 쑥쑥 키가 클 모종들 생각하니 흐뭇할 뿐입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가뭄 끝 단비’와 같은 반갑고도 고마운 존재여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시는데,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 기다리던 단비처럼 존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요?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스트레스의 원천이 아니라 행복의 원천, 기쁨의 원천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겠지요.
업무 차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니 꽤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버스가 끊어져 택시를 탔습니다. 게다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목적지를 대니 기사님의 얼굴에 조금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꽤 외진 곳이거든요. 게다가 강의록이랑 영적독서 책을 넣어 안주머니가 불룩한 새까만 잠바를 입었지요.
그럭저럭 집 가까이 도착했는데, 비도 많이 오고해서 수련관 건물까지 100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되니 조금 더 올라가자고 부탁드렸습니다.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긴장된 얼굴로.
그 순간 약간 기분이 묘했지만, 기사님의 입장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아무소리 않고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는 한밤, 만만치 않게 생긴 사람이 불빛도 없는 으슥한 곳으로 올라가자니 얼마나 겁이 나셨겠습니까? 요금을 받자마자 총알처럼 달려 내려가시더군요.
비를 맞고 수도원으로 걸어 올라오면서 혼자 킥킥 웃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생각하면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분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는 외치는 사랑이란 것, 특별한 것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 상대방 입장에서 서보는 것, 나 자신을 비우는 것, 나란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육체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결코 다가 아니기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딱딱하기 그지없는 나란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오랜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일, 그래서 결국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는 일, 결국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 사물, 상황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일이 사랑이 아닐까요?
결국 사랑은 부드러움, 강요하지 않음, 겸손, 떠남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꽃이 저리 아름다운 것은 자기 자태를 뽐내지 않기 때문이고,
무지개가 저리 고운 것은 잠시 머물다 가기 때문입니다.
겸손, 떠남, 그것은 사랑, 아름다움의 가장 큰 배경입니다.
흐르는 사랑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강영구신부-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어버이의 하늘같은 사랑을 받고 생명을 이어온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되갚지 못하고 자식을 낳아서 자식 사랑으로 대신합니다.
자식들도 같은 일을 되풀이 하면서 ‘내리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물 흐르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사랑이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지요.
‘치사랑’도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을 하면서 ‘치사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15,9)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내리사랑’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우리가 ‘내리사랑’을 할 차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은 생명을 살리고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습니다.
사랑 받기만 하고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이미 병든 사람입니다.
당신 가슴에 가득한 하느님 사랑이 물처럼 흐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세상에서 뽑다>(요한 15,18-21)
-유광수신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께 뽑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러나"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또한 큰 책임감을 느끼는 말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목적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 특별히 어떤 사명감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고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형태를 취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내 뜻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들의 삶에 어려움이 시작된다. 분명히 우리들은 우리의 뜻이 있고 우리들이 살아가고 싶은 삶의 형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뜻과 나를 뽑으신 분의 뜻이 일치되기 전까지에는 계속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나의 뜻이 나를 뽑은 그분의 뜻에 일치될 때만이 우리들은 그분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분이 우리를 뽑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수요일과 목교일에 한국 수도자 장상 연합회가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있었다. 폐막 미사를 집전하신 이한택 주교님께서 수도자는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고 강조하셨다. 세상에서 우리 신자들의 역할은 빛, 누룩, 소금의 역할인데 그 중에서 교구 신부님들은 빛의 역할이라면 수도자는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빛은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지만 누룩은 드러나지 않게 있으면서 부풀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자는 남 앞에서 드러내는 역할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부풀리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수도자뿐만 아니라 축성봉헌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뽑은 이유이고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도 안되고 세상 사람처럼 세상의 것으로 또는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살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타락하고 어지러운 것은 세상 한 가운데에서 누룩의 역할을 하라고 뽑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세상 곳곳에 얼마나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있는가?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빛 또는 누룩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다시 한번 세속에 사는 평신도의 사명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 생활 조건들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바람과 사랑에 빛나는 실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세의 사물들을 비추어 주고 관리함으로써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자라서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찬미가 되도록 하는 그것이다.]
(교의헌장 31항)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 주셨다는 것은 단지 어떤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만 생각한다면 너무나 무겁고 짓눌리고 주눅부터 들기 쉽다. 세상을 성화시키라는 사명도 주어졌지만 실상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야고보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느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야고 4, 4)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주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세상을 성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무겁게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를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길에서 우리를 구해주셨다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의 사명에 충실한다면 기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받게 되는 박해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사람들, 세상의 성화를 위해 누룩의 역할을 해야할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주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사도 15,22-31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복 음 : 요한 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인류가 살아온 역사나 시대를 살펴보면 태평성대가 있었는가 하면 아주 고난의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태평성대가 되기도 하고 고난의 시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조직이 있지만 그것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극히 몇 몇의 사람들입니다. 특히 지도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지요.
아무리 태평성대를 누리던 나라도 지도자가 판단력이 부족하면 한 순간에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세대에서 아무리 탄탄하게 잘 가꾸어 놓았어도 자식 대에 판단력이 흐려지면 부도가 나고 파산을 당하게 되지요. 이것은 나라나 기업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운동에서조차도 리더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은 특히 유럽 교회가 어려웠던 시기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신 교황님으로 아마도 세계 역사에 큰 인물로 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안에서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신 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을 때 우리 축구가 4강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축구가 4강에 오른 주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의 사람을 뽑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그리고 그 사람들을 활용할 줄 아는 인간 경영 능력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성당에서도 똑같습니다. 강론과 고백성사만 없으면 신부 할 만 하겠다는 얘기를 더러 듣습니다. 강론과 고백성사를 안 하면 사제로서의 존재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강론과 고백성사 못지않게 사제로서 중요한 일은 복음적인 사람들을 교회의 봉사자로 뽑아서 쓰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목위원들, 반장, 구역장, 단체장들을 임명하고 직원들과 심지어는 수도자까지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 사목자의 큰 일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본당의 봉사자들이 참으로 복음적인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본당의 분위기는 큰 차이가 납니다. 본당 신부가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면서 복음적이며 하느님의 사람인 인물을 봉사자로 뽑아서 바른 지향으로 함께 할 때 그 공동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로 거듭 성장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하지요. 사회에서는 지도자들이 자기의 판단과 능력과 경험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뽑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개인의 능력으로 뽑고 뽑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면서 바른 지향으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올바른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교회의 봉사자를 뽑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할례나 음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에 따른 세례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결정하고 그것을 안티오키아 교회에 알리기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갈 사람을 뽑았던 것입니다. 뽑힌 사람들은 교우들 가운데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바르사빠스라는 유다와 실라스였지요. 이렇게 교회에는 항상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ꡒ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ꡓ(요한15,16)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반장, 구역장, 단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직분을 이행하면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는 식의 태도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소명에 감사 드리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요. 아직 나는 하느님께서 뽑아주셨다는 체험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신앙이 무르익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을, 초대교회 때는 사도들을,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는 사목자를 통해서 교회의 일꾼을 부르십니다. 본당 신부의 요청 자체가 하느님의 제안이요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요청에 겸손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이 봉사자로서의 모습이지요.
한편 뽑힌 사람들은 그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뽑혔다고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12제자를 뽑으셨지만 모두가 다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그 중에 대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입니다. 실패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욕망을 따랐던 것이지요. 하느님께 뽑힌 사람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지나 욕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나를 뽑아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거기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뽑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로 하느님께 뽑힌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의지대로 행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또 편가르기를 하게 되지요. 내 뜻과 다르면 공격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볼 줄 알고 함께 가는 것이지요.
또 하느님께서 택하여 뽑아 주신 사람에 대해서 그 공동체 구성원은 함께 응답해야 합니다. 자칫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뽑힌 봉사자들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봉사자로 뽑혀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옆에 있는 신자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반장이 되어 이웃집을 방문했는데 잡상인 취급을 받는다면 상처가 되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잡상인 취급을 할 수가 있습니까? 격려하고 함께 하며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ꡒ어서 오세요. 힘드시지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ꡓ 이러한 격려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뽑힌 사람이 더욱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뽑힌 사람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서 함께 가는 것, 이것은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 뽑힌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도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열심히 하고 상처받는 경우가 있지요. 결과까지도 자기가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맞고 환난과 시련을 계속 겪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사도들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실을 맺어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까지도 자기들이 맺으려고 생각했다면 감옥에 갇혔을 때 크게 실망하여 좌절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다는 믿음으로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담담할 수가 있었지요.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사도들의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세 번째, 봉사자로 뽑힌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드러내야지요. 자기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하느님은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 뽑힌 봉사자들은 하느님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끝없는 죽을 고비 속에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주님만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지요. 오히려 그 모든 시련을 특권으로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면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도 물러날 줄 모르고 물러나고도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지요.
오늘도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봉사자들이 뽑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ꡒ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ꡓ(요한15,16)
예수님의 말씀에 최선의 응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공동체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본당은 복음적인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조건들을 갖추고 열심히 활동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로 거듭거듭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당 신부를 통해서 부르셨을 때 ꡒ예ꡓ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느님의 사람으로 뽑혀서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함께 동참하여 격려하고 감싸면서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바꾸고 기업을 바꾸고 또 성당과 모든 단체를 변화시키는 바탕은 좋은 건물이나 좋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일 때 그 공동체는 더욱 성장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 뽑은 사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더 좋은 사람이 뽑힐 수 있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서 부르셨을 때 ꡒ예ꡓ하고 응답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가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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