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8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07. 5. 8. 05:52

   2007년 5월 8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it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or afraid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로 약속하신다. 예수님의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화이다

 

☆☆☆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드러납니다. 부부간이나 부자간, 형제간, 더 나아가 계층 간이나 국가 간 등의 갈등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며,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평화이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인생 수업』이라는 책에서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관계 특히 부부간에 대하여 이렇게 조언합니다. “배우자를 바꾸거나 관계를 변화시키면 완벽해지고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상대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바꿀 수 없으며, 바꾸려 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이 절대로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또 그들이 변할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기를 원한다면, 그들도 진정한 그들로 있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이처럼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맞추어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일 것입니다. 바로 내일 우리가 듣게 되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의 말씀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어머니의 정성     

-김동하 신부 -


 아우구스티노(354-430) 성인이 교회 역사 안에서 빛나는 점은
학자로서 남긴 많은 업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위대한 업적보다도
더욱 눈여겨 볼 만한 점은 방탕과 방황의 젊은 시절입니다.
그는 한때 마니교를 따르며 문란한 생활을 합니다.
이교에 빠져 거친 길을 걷던 그는 마음을 돌려 세례를 받습니다.
그가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 성녀
덕분이었습니다. 한없이 죽음의 길로 치닫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어머니는
줄기차게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울며 밤새워 기도하고 단식하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어머니의 뜨거운 정성이 마침내 하느님을 움직여 아들을 살려냅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정성이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비롯하는 평화(히브 13,20 참조)는 어두운 마음을
비추시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따르게 하기 때문입니다(콜로 3,15 참조).

 

 

 하느님의 평화를 이웃과 먼저

-고진배 수사(마리아회)-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내적 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 수도회의 한 복자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울 법했지만 찹잡한 심정으로 고별사를 이렇게 남겼습니다. "오늘 저녁 7시에 내가 늘 사랑하던 주님께 갑니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주 행복합니다. 착하게 살고, 하늘나라에서 만나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으십시오. 나는 하늘나라에서 모두를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싸움 끝에 맞는 이날이 내 인생의 모든 날 중에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천국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우린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 마리아께서 나를 기다립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안부 전합니다. 모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나의 고향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1943년 8월 13일 순교한 날 1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야곱 갑 신부) 내적 평화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화를 함께 나눕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까? 평화의 인사 때 우리는 내가 주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서로에게 빌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 잠깐 얼굴 근육운동을 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고귀한 평화를 아무런 표정 없이 나눌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인사, 평화

-정필종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요한 14,27). 평화의 인사는 보통 작별인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도대체 왜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당신의 평화”는 다른 것입니까?

여전히 전쟁의 참상은 지구촌을 할퀴고 있으며, 힘센 나라는 주변의 약속 국가들을 그럴 듯한 외교적인 언사로써 요리하려 합니다. 한시도 이 지구상에 총성이 그친 적은 없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참혹합니다. 전쟁의 당사자들이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바로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이스라엘의 고도(古都)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말하며, 그들이 주고 받는 매일의 인사는 “샬롬” 곧,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 말로는 “안녕하십니까?”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얼마나 평화가 부재한 체험이 가득하면 평화를 그토록 아침저녁으로 외쳐야 했겠습니까?

평화가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만큼 절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이 단어만큼 그 의미가 퇴색하고 식상해버린 단어도 없다 싶습니다.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더 옳게 여겨집니다. 세상은 강자의 논리가 더 쉽게 적용되고 지배적인 듯이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이나 외쳐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게 그렇게 다르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분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들여다 볼 때 비로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굳게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요한 20,20)라고 인사하십니다.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두려움이라는 벽으로 둘러싸인 그들의 그 벽을 없애주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성서 본문은 “문들이 잠겨 있었다”(요한 20,26)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벽들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벽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편견과 독선, 완고함과 아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념과 가치가 상충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 벽은 너무도 견고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결코 밖을 향해 자신의 열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성채 안에서 마치 왕이라도 된 양 거리낌 없이 살아갑니다. 그 선과 벽은 숱한 오해와 비판, 단견이라는 자식을 낳고, 그 선과 벽을 더욱더 굳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 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벽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벽을 마치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벽, 친척들 간의 벽, 성당과 성당과의 벽, 교구와 교구 간의 벽, 종교와 종교 간의 벽, 지역과 지역 간의 벽 등등. 이런 것들을 너무도 당연시 하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벽이 없다 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 벽을 높여갑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벽이 없다면 너무도 사는 것이 두렵게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님만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용기가 없는 우리들을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일어나 여기서 떠나갑시다”(요한 14,31).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웅크린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는 용기를 상징합니다.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벽을 과거와의 단절로써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옛 것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독서> :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경규봉 신부-

바울로 일행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티오키아 유대인들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로 일행을 박해했다. 그들은 바울로를 돌로 쳤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내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신도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바울로와 일행은 1차 전교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데르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각 도시마다 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또한 각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세워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의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불림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며, 주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음으로써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수가 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고, 지금도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에 시달렸으며,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참 그리스도인에게 박해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요한 17,14-16) 세상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요한 15,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복음을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기쁨과 평화를 주님께서 주시며,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다(요한 20,19).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쁨에 충만하도록 하셨다(요한 20,22). 그들이 다락방에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셔서 용기와 힘이 넘치도록 하셨다(사도 2,1-4).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어려움과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러한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주님의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사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함으로써 세상의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는 신앙인이 되자..........

 

새벽을 열며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이상하게도 방구를 끼면 소리만 크게 날뿐 냄새 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자는 급히 병원으로 갔습니다.

"선생님 전 방구를 끼면 소리만 크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요. 제가 무슨 병이라도 있는건 아닌지 요."

"그럼 방구가 나올때까지 기다려 보죠"라고 의사선생님은 말씀하셨고, 같이 기다렸습니다. 시 간이 좀 흘렀습니다. 그러자 큰소리와 함께 방구가 나왔어요.

그리고 얼굴이 누렇게 변한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어요.

"급히 코수술부터 해야 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코가 막힌 것도 모르고서, 다른 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했던 것이지요. 정작 중요 한 원인을 찾지 못하는 이 사람의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들은 많은 말들을 하게 됩니다.

사실 세상은 내 뜻과는 정반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평화가 아닌가 싶습 니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고 있지요. 개인적이로든 국가적으로든 또는 세계적으로든 평화가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 다. 모두가 평화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평화를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는특히 그렇지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남겨둔 채 형 식적으로 하는 화해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평화를 이루었다면 마음이 편해야 할텐데 미움과 분노가 들끓 고 있는 마음이 편할 리 없지요.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 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형식적으로 하는 화해로 이루어지는 평화 역시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였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합니다. 그리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라면서 단순히 평화를 염원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따라는 신 앙인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즉,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내 주위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당신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서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 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 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 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 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빠다킹신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로 약속하신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이라고 하신다. 평화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질서가 조화를 이룰 때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 질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답답하여 안절 부절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를 우리 마음에 가질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마음 안에 올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종말론적인 구원개념으로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알고 희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진정한 평화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즉 도피적인 평화도 아니고, 영원을 바라보며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는 평화이다. 그래서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박해나 외적인 어떠한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 평화이다. 주님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삶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언제나 구원받은 자의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바로 이 길을 알려주신다. 하느님께로 가시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기뻐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그냥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임을 제자들은 알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신 길이 그러했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평화는 나 자신을 끝없이 넘어선 평화일 것이다. 내 십자가를 통한 평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평화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
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우리 마음의 모든 질서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하느님과의 진정한 화해일 것이다.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하느님과의 화해는 바로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불목한 점이 없는가를 살펴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을 털어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과의 화해는 우리 앞에 있는 보이는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질 때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에 모든 질서가 조화를 이루어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평화는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열매이다. 하느님 안에 계속 남아있으려 노력하는 가운데, 즉 그러기 위해 끝없이 자기를 이길 수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에 감싸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우리가 되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고 가실 유산 중에서 평화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당신의 행방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당신의 선물인 "평화"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평화는, 도피적인 평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주는 평화란, 우리를 어려운 문제들에서부터 도피시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란, 어려운 문제들을, 영원을 내다보며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는 데서 가질 수 있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는, 세상의 어떠한 그 무엇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거나 빼앗을 수 없는 성질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슬픔이나 박해나 외적인 어떠한 것에도 좌우되지 아니하는 평화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앞으로 가실 행방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자 말씀하십니다. 또한, 만일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시려고 하셨고, 당신의 영광으로 부활하시는 길을 빨리 걷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바램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 곁으로 갔을 때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슴을 찌르는 이별의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독을 가지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현세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하느님 곁에서 영광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앙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 

-노성호 신부-


‘황산벌’이라는 영화의 결말 부분을 보면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나가기 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핏덩이 같은 어린 자식들에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을 하면서 사약을 먹고 먼저 죽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고,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여.”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계백 장군이
명예라든지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가족을
몰살시키면서까지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테고, 만일 호랑이 가죽이 별로 귀한 물건이
아니라고 평가된다면, 호랑이는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계백이라는 인물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고, 호랑이의 가죽도
주가를 올리면서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은 계백과 같은 웅지를
꿈꾸고 있고, 호랑이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평화를 남기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보면 고난과 죽음도 피할 수
있었고, 남들이야 어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아도 될 법했는데, 그분은 친히 인류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타에 오르셨으니
말입니다. 인류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것도 모자라
당신의 생명과 평화까지도 내주셨으니 말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나중에 죽어서 무엇을 남기게 될까요? 아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게 될까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박아미 수녀(성바오로딸 수녀회)-


◆평화! 평화! 평화! 인류 역사상 평화를 갈구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었던가. 그러나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클수록 평화롭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오늘 말씀처럼 주님이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가 같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주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무엇이 다른가? 어디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라는 소우주 안에서 두 평화 사이의 차이를 예리하게 식별할 수 있는 특별한 때는 연피정을 할 때다. 내외적 분주함을 일단 내려놓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 주님 현존에 잠기다 보면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위안을 잔잔하게 맛보게 된다. 거기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이유나 동기가 자리하지 않는, 순전히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것에서 오는 참 기쁨이 있다. 그 기쁨, 그 평화는 나의 모든 일과 행동을 분별하는 잣대가 되어준다. 반면 세상이 주는 평화는 시장법칙이나 중력의 법칙처럼 계산하고 움켜쥐려는 속성이 있어 여일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기도 시간, 성찰 시간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거짓 평화 놀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 쉽다. 연피정처럼 긴 기간은 아니더라도 일상의 산만함을 잠시 접고 주님의 빛 안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말이다.
밑줄 친 본문의 병행구절 중 하나인 에페 2,14­-18을 보면 주님 평화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으며…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고…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이들이나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셨다. 몸소 당신 몸을 내던져 이루신 평화! 배반의 잔을 내밀었던 세상마저 껴안는 평화의 주님! 오늘 하루도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의 파수꾼이 될 수 있기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양승국-


<유언>


부모님을 여읜 분들, 부모님들께서 떠나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유언으로 보통 어떤 말씀을 남기십니까?

    

물론 후손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재산상속과 관련된 유언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런 류의 유언보다 훨씬 소중하고 의미 있는 유언이 있습니다.

    

떠나가시는 분들, 주로 평생을 통해 온 몸으로 체득한 인생의 진리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기십니다.

    

저희 할머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단 가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오락가락하시는 와중에도 똑똑한 목소리로 천주교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또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가족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한분은 당신의 시신을 반드시 후학들의 교재로 기증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또 다른 교수님 한분은 임종 직전 제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더군요. 천국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 몸은 이제 떠나지만 마음은 늘 제자들과 함께 하겠으니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를 문자로 보내셨더군요.

    

주류를 이루는 부모님들의 유언은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주로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위주로 한 유언이었습니다. 안쓰러움 끝에 나온 유언, 오직 자식들 잘 되기만을 바라는 유언이었습니다. 마음 한번 크게 비우고 대범하게 살아라, 형제들끼리 화목해라, 늘 서로 용서하며 살아라, 서로 베풀고 살아라...

    

오늘 복음내용은 그 성격상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뜻밖에도 평화를 빌어주는 유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유다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이 ‘샬롬’입니다. 평화를 빈다는 인사말입니다.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이셨습니다. 스승이 옆에 꼭 붙어있어도 저 모양인데,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정작 당신이 떠나가고 나면 갈팡질팡, 우왕좌왕할 제자들의 미래가 눈에 선하셨을 것입니다.

    

스승의 부재로 인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불안해할 제자들의 안쓰러운 모습이 예상되셨던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바로 자상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을 끔찍이도 챙기는 인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떠나 가시면서도 계속 자식들 걱정 때문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바라볼 때 언제나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주어진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계시기에 마음 크게 잡수셔야 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 존재로 인해 희망해야 합니다. 매일을 승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승리자이자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암담한 현실 앞에서 돌파구를 한번 찾아보고 싶어서 점집을 다니시는 분들 참 많습니다. 용하다는 곳 대문 앞에는 줄을 섭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 역시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점집을 애용하신답니다.


5만원씩, 10만원씩, 100만원씩 제발 엉뚱한 곳에 허비하지 마십시오. 그까지 가느라 고생하시고, 기다리느라 고생하시고...제발 그런 고생 이제 그만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식 하기에 적절한 길일이 도대체 어떤 날입니까? 제가 생각할 때 모든 날이 길일입니다. 아직 우리가 세상 떠나지 않고, 아침에 활짝 눈을 뜬 그날이 바로 길일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만사가 잘 풀리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기쁜 일이 있으면 활짝 웃으십시오. 행복할 때는 찬양하십시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하느님을 향해 투정도 하십시오. 괴로우실 때는 탄원도 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

 

 

 뿌리 깊은 나무처럼

-강영구신부-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처럼 늠름합니까? 저 느티나무처럼 푸른 잎 무성합니까?
저 느티나무는 대지(大地)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나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닥쳐도, 심한 가뭄 속에서도 저 느티나무는 한결 같습니다. 그 무엇도 저 느티나무의 평화를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늠름하지도, 푸른 잎 무성하지도, 평화롭지도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당신은 인생의 뿌리를 당신의 욕망(慾望) 위에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돈과 권력, 지위와 향락이라는 대지(大地)에 뿌리 내리고 거기서 인생의 성공과 평안(平安)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영원히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인생의 뿌리를 깊이 내린 ‘예수’라는 느티나무를 바라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그분의 큰 그늘 아래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분은 온갖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마태 4,1-11)
그분은 풍랑 치는 바다 위에서도 태평스레 잠을 잘 수 있습니다(마태8,23-27).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도 그분을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예수는 태풍이 불어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계절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느티나무입니다.

당신도 하느님께 귀의하십시오. 예수처럼 하느님 안에 삶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것이 스승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당신도 큰 느티나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내가 주는 것> (요한 14, 27-31)

-유광수 신부 -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오늘 복음을 보면 두 가지 음식이 있다. 세상이 주는 것과 예수님이 주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다. 세상이 이끌어 가는 힘이 있고 예수님이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영위되어 가는 세계가 있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이루워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

 

육과 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이 두 가지 세력 속에서 힘겹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육이 영이 될 수 없고 영이 육이 될 수 없다. 영과 육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고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것이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것을 더 얻기 위해 세상 일에 관심을 갖겠지만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 예수님이 주는 것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먹는 음식이 다르고 관심을 쏟는 대상이 다르고 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다르고 이르는 목적지가 다르다. 따라서 둘은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보는 것이 다르고, 듣는 것이 다르고, 입는 것이 다르다. 처음에는 잘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세월이 흐를 수록 둘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

 

즉 세상 것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 점 더 세상 사람이 될 것이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닮아갈 것이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라는 것이 더욱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 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둘을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바오로 사도도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 5-8. 13-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말처럼 육체를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 우리가 자주 넘어지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바오로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라고 동감하게 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로마 7, 15-18. 21-23. 25)라는 바오로의 고백은 우리가 구구절절 동감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우리의 고민이요, 하소연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여기에 영적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의 삶도 투쟁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우리의 영적 생활도 투쟁해야 한다. 투쟁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 힘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쉽게 이루워지는 것이라면 굳이 신앙생활도 수도생활도 복음 삼덕의 서원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 48)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게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참피온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눈물나는 훈련을 해야하는가? 정상에 오르는 일은 항상 땀방울을 필요로 한다. 이런 삶의 목표가 없는 삶은 불행한 사람이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무엇인가 도달해야할 목표가 있는 삶은 의미 있는 삶이고 아름다운 삶이고 행복한 삶이며 살아야할 가치를 발견하게 해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는 거대하다. 이 세상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영적 투쟁을 하면서 사는 것이 수도자의 아름다움이요, 신앙인의 아름다움이다. 어느 정도 도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닦아야할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도 있고 예수님이 주는 것도 있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세상이 주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주는 것에 우선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 한가운데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불리움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부르심 앞에서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살겠다고 자원해서 하느님께 약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지 말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맛보리라. 평화란 성령의 열매이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맺어지는 열매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때에는 한번도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영적 생활이요, 영적 투쟁이다. 영적 투쟁을 하려면 거기에 알 맞는 무장을 해야 한다. 어떤 무장을 해야하는가?

 

바오로의 말씀이 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모든 경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늘 깨어서 꾸준히 기도하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에페 6,12-18)

세상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너무나 많은 데 아니 매일 매일 우리가 접하는 것은 세상 것이요,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일이요, 불가능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겠노라고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 스스로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가겠다고 좁은 문을 택한 사람들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14)는 것을 알면서도 넓은 문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자.


세상이 주는 것은 무엇이고 예수님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식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주는 것을 먹고 입음으로서 맛보게 될 평화를 누리며 사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의 원천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최후만찬 석상에서의 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으로 끝난다. 오늘 복음이 바로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미사전례의 복음으로는 봉독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b절)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몇 시간을 향하여,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받는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또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평화(平和)란 평온하고 화목한 것으로 전쟁(戰爭)이나 분쟁(紛爭)의 상대적 개념이다. 평화의 내용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왔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정적·내향적·비정치적인 데 비해 서양문화권에서는 동적·외향적·정치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근대에 들어 세계평화는 앞의 전자(前者)에 해당되는 듯한 반전주의나 이상주의의 한 기둥과, 후자(後者)에 해당되는 듯한 국제주의나 현실주의의 다른 기둥으로 도모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반전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은 UN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으나, 그 입장은 서양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중세기 십자군원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제국 내에서는 통일과 질서를 구현하면서도 제국 밖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재림(再臨)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재림지체(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불신(不信)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우세(優勢)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에서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