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6일 부활 제5주일

Margaret K 2007. 5. 6. 21:04

 2007년 5월 6일 부활 제5주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1-33ㄱ.34-35)

  
 I give you a new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also should love one another.
This is how all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주님 사랑의 증거자가 된다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당신 제자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위’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특성은 어떠한 신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잘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세례성사를 통한 변화로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의 행위가 함께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너무나도 사랑하던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자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급기야 월남전까지 참전하게 되었지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험한 월남전에 보내놓고 무사하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고국에 돌아가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위험한 고비를 하나씩 넘기면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자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글쎄 폭탄의 파편을 맞아서 양팔을 절단해야만 했지요. 그리고 이 남자는 이러한 모습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자.’라는 마음을 먹고서 전사했다는 편지를 여자에게 보냈습니다.

양팔을 절단한 모습으로 남자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에 돌아왔고 혹시 여자의 눈에 띄일까봐 숨어 살았습니다. 얼마 후,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해진다는 것에 기뻤습니다.

몇 년이 흐른 뒤, 남자는 사랑하는 그녀가 너무나 그리워서, 멀리서나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려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지요. 그런데 이 남자는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는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사랑하던 남자를 생각하면서, 월남전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잃은 남자를 보살피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말들을 많이 하고, 또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한 조건을 많이 달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을 마치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 만족하는 하는 사랑이 아닌, 나의 만족만을 위한 사랑은 참된 사랑이 절대로 될 수 없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바로 나만의 만족을 위한 사랑도, 상대방의 만족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바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래를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서 손바닥을 편 채 가만히 있으면 흘러내리지 않지요. 하지만 꽉 잡으려고 손을 움켜쥐면 어떻게 될까요?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버리고 손바닥에는 조금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도 이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서로에게 조금의 여유를 주면 사랑은 오래 머뭅니다. 하지만 너무 강한 소유욕으로 서로를 꽉 움켜쥐면, 사랑은 어느새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꽉 움켜잡으려던 사랑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는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빠다킹신부

 


 

 예수님의 사랑 방식     

-김동하 신부-


 하루 동안 쓰는 낱말 가운데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말 하나가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기에(로마 13,8) 사랑을 늘 입에 담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고 듣기 좋은 말본새입니다.
신앙인이 사랑을 마음에 품고 입에 달고 사는 것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뜨거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사랑을 잘 나누고 사랑을 잘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다가오셔서 침묵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까지 기꺼이 내놓으시며 밥이 되십니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면서 몸까지 내놓으시는 사랑이기에
끝도 없고 한도 없습니다. 서로 나누는 사랑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침묵으로 말하고 몸으로 부서질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일으키고 입으로 세운 사랑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몸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옛날에 어머니 말을 무척이나 듣지 않는 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청개구리는 아들 때문에 너무도 상심하여 급기야 병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내가 죽고 나면 냇가에 묻어 다오." 하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늘 거꾸로만 하던 아들 청개구리라 그랬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들 청개구리는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이라 말씀대로 냇가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개굴개굴' 우는 것이랍니다. 너무도 잘 아는 '효'에 관한 우리나라의 설화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길어온 이야기 또 하나.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키울 수 없어서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고아원에서 서럽게 자란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수성가를 했답니다. 혼자 시골에서 근근이 생활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구박했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아버지를 창피해했습니다. 외롭게 살던 아버지가 위독하게 되어 동네 사람들이 아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습니다. "제발 화장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아들은 그 유언마저 뿌리치고 화장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잘해 준 것이 뭐 있다고 때마다 찾아와 벌초하는 수고를 하게 하느냐고.
아버지를 화장한 뒤 아들은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으면서 어릴 적 자신의 불장난으로 집에 불이 났고, 아버지가 자신을 껴안고 나오면서 화상을 입었다는 것, 아버지한테는 아내를 구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으며 화상을 입은 아버지가 자신을 키울 수 없어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통곡했습니다. 아버지를 평생 원망한 것도 모자라 유언도 듣지 않은 때 늦은 후회! 아버지는 뜨거운 것이 싫었습니다.
청개구리는 늦게라도 유언의 참뜻을 깨닫고 무덤을 옮길 수 있었지만 이 아들의 아버지는 이미 재가 되어 사라졌기에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압니다. 온 세상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이야기는 바로 오늘의 복음으로,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5)고 당부하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제대로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고 기뻐하던 아담은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고는 그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그 아들 카인은 동생을 죽이는, 사랑의 역사라기보다는 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대주제는 여전히 죄와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 위에, 그리고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배신만 하는 이스라엘을 두고도 하느님의 외침은 이러했습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호세 11,8) 인간에 대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사랑을 수없이 말하지만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떠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 그렇게 사랑하라고.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희로애락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돌보고 인내하고 가꾸셨는지를 살아 계실 때는 채 깨닫지 못했지만 돌아가신 뒤에 깨달았습니다. 스승님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라는 소명을….

그분은 무지하고 말귀 못 알아듣는 그들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분은 성가시게 구는 군중들에게 친절하셨습니다.
그분은 더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은 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면서도 뽐내지 않았으며
보잘것없는 사람들한테도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의 배고픔을 채워주시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겟세마니에서 죽도록 힘들 때 함께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에게 성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았고,
철부지 어린이 같은 이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분은 간음한 여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당신의 죽음 앞에 도망갈 제자들을 믿고
그들이 당신의 길을 따르리라 바라며 유언을 남기고
모든 수난을 견디어 냈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장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은 이러했습니다. 유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하다가 나중에 통곡하는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양승국신부-


<눈물>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눈물 흘리는 이웃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봅니다. 솟구

치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흐느끼는 사람, 너무나 원통해서 대성통곡을 터트리

는 사람, 소리 없이 뚝뚝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는 사람...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사랑은 구름 잡는 식의 그 무엇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것이겠지요.

보다 실천적인 것이겠지요.


얼마나 슬펐던지 맥을 놓아버린 사람,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그저 말없이 그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사랑

이겠지요. 그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기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그와 함께 마주

앉아 울어주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예수님은 눈물과 관련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완고하기가 하늘을 찌르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그들에게 있어 눈물 흘리는 일은 엄청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약한 인간

의 표상이 눈물 흘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다르셨습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하셨습니다.

철저하게도 인간적이셨습니다. 감성이 풍부하셨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죽음 앞

에 펑펑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가련한 불치병자들 만나면 눈물

부터 글썽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전문가셨습니

다. 복음서 안에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들의 등을 두드려주시

면서 “울지 마라”고 속삭이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묵시록에서도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

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군요.


우리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서!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우리는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려보신 분들 잘 아시겠지만, 눈물 속에 진실이 담겨있고, 눈물 속에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울기는 쉬워도 남을 위하여 울기는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눈물은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닿아와 흘리는 눈물입니다 참다운

눈물은 같이 고통을 나누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진정한 눈물은 함께 마음 아파

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진정한 눈물은 함께 가슴을 나누는 눈물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내 눈물은 너에 대한 내 사랑의 표현이란다.”


 

 "하느님의 거처(居處)"

-이수철신부-

‘사이’에 대한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이가 좋다’

‘사이가 나쁘다’

‘사이가 멀다’

‘사이가 뜸하다’

‘사이가 가깝다.’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등

이미 사이에는 ‘나와 너’가 전제 되어 있음을 봅니다.

 

고립 단절된 나 혼자 라면 사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삼 네가 있어 나요, 내가 있어 너라는

철저히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대화의 철학자 부버는

인간을 사이존재(Zwischensein)로 정의합니다.


인간이 나와 너 ‘사이’의 열린 공간에서

이러한 ‘사이의 영역’ 자체로 존재하면서

서로 나누는 대화가

인간의 존재론적 근본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는 자유와 탐구의 공간입니다.


사이의 자유의 공간이 지켜져야

인간관계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 사이의 공간이 유린될 때

숱한 상처로 그 좋던 관계도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사이는 창조의 공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새 아기가 태어납니다.

친구 사이에서는 우정이 태어나고,

진리를 찾는 도반 사이에서는 숱한 깨달음이 태어납니다.


사이는 생명과 사랑의 공간입니다.


사이를 잘 가꾸고 보살펴줘야

너도 나도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합니다.


진정 너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나와 너의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 사이를,

생명과 사랑의 공간인 사이를 지켜줘야 합니다.


언젠가 쓴 시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사이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과연 여러분의 사이들은 어떤 상태입니까?


그러나 저절로

자유와 창조,

생명과 사랑의 사이 공간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사이에 하느님이 계실 때

비로소 자유와 창조, 생명과 사랑의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에 자리 잡으시면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인사하시며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또 미사 중에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선언으로

축복을 주시는 주님이

우리 사이 현존하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이 계시지도 않고,

저 멀리 밖에 계시지도 않습니다.


바로 나와 너의 사이에

하느님이,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너 없는 나 혼자만의 하느님 체험,

참으로 위험하니 환상이거나 착각이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2독서 요한 묵시록의

하늘 옥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가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의 예표,

이 거룩한 천상잔치 미사를 통해

앞당겨 체험하는 현실이 아닙니까?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말씀은 얼마나 통쾌한 복음인지요,

평생 화두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와 너 사이가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우리 사이 계신 하느님의 사랑이, 생명이

우리를 끊임없이 새롭게 합니다.

 

하여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합니다.

 

하늘이, 땅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에

늘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사이에 계신 하느님이

우리 사이를 끊임없이 정화시켜 주시고 성화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죽음,

슬픔,

울부짖음,

괴로움이란 먹장구름들을

성령의 바람으로 말끔히 날려 버리십니다.


우리 사이에 하느님 거처하시기에

비로소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굳이 성지 찾아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지금 여기가 성지이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느끼면 충분합니다.

 

우리 사이에 하느님 계시기에

주님의 새 계명도 쉽사리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랑,

결코 기분 사랑,

감정 사랑,

말 사랑,

마음 사랑이 아닙니다.


의지적 노력과 몸으로의

희생적 실천이 동반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안 해도

묵묵히 사이에 계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의 사이를 존중하고 지켜주며, 섬기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사랑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 사이에 주님 계시지 않으면

너와 나와의 대화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너와 나와의 대화라지만

자칫하면

나만의 독백(monologue)의 대화가 될 수 있기에

주님을 사이에 두고 하는 삼자 대화(trilogue)여야

비로소 겸손히 귀 기울여 듣게 되므로

진정한 대화(dialogue)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이자 성령의 사람,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들,

누구보다 그들 사이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주님께

늘 깨어있었음을 봅니다.

 

두 사도들,

그들 사이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주님에 힘입어

선교지마다 제자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원로들을 임명한 후에는

곧장 그들을

그들 사이에 계신 주님께 의탁했다하지 않습니까?


선교 여행 후,

두 사도는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합니다.

 

선교 열매의 공을

늘 그들 사이 함께 계셨던 하느님께 돌리는

겸손한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저 멀리 하늘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가는 곳도 아니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28장 20절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도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같은 미사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우리 사이로 오시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명

-서울대교구 감지영 사무엘 신부-


 

198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장인 고(故) 마더 데레사 수녀를 영국의 방송기자가 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기자는 데레사 수녀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평생을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왔는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레사 수녀는 주름진 얼굴을 들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버림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다만 살아 있는 몇 시간만이라도 느끼게 해 주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지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란 말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노래하고 가장 많이 바라고 꿈꾸는 낱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마도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아닐까요?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참사랑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 보잘것없는 이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본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포기해도 하느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 사랑의 원리를 깊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사랑의 참모습을 보였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요한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바로 사도들을 통해 이어진 교회 공동체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정신을 계승한 교회가 사랑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며 부활의 신비를 가장 힘 있게 증거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정은 작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내 가정이 비록 가난하고 초라할지라도 그 곳이 사랑의 계명이 시작되는 곳이며 은총의 장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다니는 직장이 비록 고달프고 힘든 곳일지라도 그 곳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원리가 새롭게 적용되는 은혜로운 장소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눈

-배광하 신부-


 어느 날 탈주병이 적의 눈을 피해 작은 마을로 숨어들었습니다. 탈주병을 찾는 적들은 동트기 전에 탈주병을 내어 놓지 않으면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처형 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본당 주임 신부를 찾아가 의논을 합니다. 마침 사제관에 피해있던 탈주병을 놓고 주임 신부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다 성경에서 이 같은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 50).

주임 신부는 성경을 덮고 적들에게 가서 탈주병이 숨은 곳을 알려 줍니다.

그날 밤 천사가 나타나 주임 신부에게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였소?” 라고 묻습니다. 주임 신부는, “저는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당신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오?” 하자 주임 신부는, “제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항변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당신은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가련한 병사의 눈을 바라보았소? 그의 눈을 한 번이라도 사랑으로 응시했더라면 그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신학교 시절, 상담 심리학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누구를 만나던, 어떤 이야기를 하던, 늘 아픈 사연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우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의 눈을 바라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였습니다. 눈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어떤 해결 방법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도움을, 관심을 필요로 하는 상대방의 눈을 읽게 되면, 그 때에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 12).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주님의 눈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비노바 바베’는 인도가 독립을 얻자 2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며 지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라는 ‘토지헌납운동’을 시작해 스코틀랜드 만한 거대한 토지를 헌납 받아 사랑을 실천한 분이십니다.

그는 자주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셨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였는데, 부유했던 어린 시절 그의 집을 찾는 걸인들을 어머니는 한 번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비노바 바베의 집에 체격이 건장한 걸인이 찾아와 구걸해 가는 모습을 본 그는 어머니에게 적선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항변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어린 비노바 바베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하느님처럼 존중하고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

우리는 자주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돌려보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도 인간을 그같이 대하신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엄청난 희생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천만 번도 더 죄를 지었음에도,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불의와 배신에 빠졌어도 인간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이신 분이셨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편협한 판단의 눈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인 측은지심, 즉 주님의 눈길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특별히 잘하였기 때문이 아니어도 그저 가여운 마음이 드셨던 그분의 뜨거운 사랑의 눈길이 우리 인생살이의 고달픈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 3~4).

이 같은 사랑과 은총의 확답과 희망을 우리는 분명 거저 받았습니다. 그 놀라운 은총에 우리 역시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새 계명의 완성된 삶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기양신부-


 

인도의 대표적 인물, 마하트마 간디에게는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 탄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철로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어서 간디는 신발을 주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역시 간디는 따뜻한 사랑을 지닌 큰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기차가 떠난 후에도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남의 탓만을 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요?

평상시에는 큰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다가도 정작 실천이 요구되는 결정적 순간에는 아주 편협한 소인배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 일반적 모습이지요. 주저하지 않고 남은 신발 한 짝마저 떨어뜨리는 간디의 모습에서 우리는 몸에 밴 이웃 사랑의 깊이를 실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새롭게 들리지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며, 사랑 때문에 아파하며 사는 인간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난의 기나긴 밤이 시작되는 이때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하게 들려주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이 우리가 알고 바라는 사랑과는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는 우선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 때입니다. 나보다 잘생기거나 예뻐야 하고, 남부럽지 않은 배움에 재산도 제법 소유하여 무엇인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모든 중심이 나이지요.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이렇게 나 중심의 사랑이기에 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사랑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거나 사랑을 하다가도 미워하고 분노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랑하고 싶어하는 대상이고 우리들의 사랑 방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나 중심의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에 한한 사랑이 아니라 전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었으며, 버림받고 소외되어 무엇 하나 도움 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손해 보는 일 같지만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새 계명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그 방식대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예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흐름대로, 또 나의 욕망대로 살아간다면 사랑하기를 원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미워하며 원수 같은 관계로 끝나버리는 끝없이 공허한 관계만을 겪을 뿐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품고 실천하며 살아가면 그 풍요로움에 내가 놀라고 세상이 놀라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하신 예수님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욕망에 따른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먼저 헤아리는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이 우리 가슴에 심어져 자라고 열매 맺게 되는 때는 그 말씀을 실천할 때입니다. 그 때 우리들의 사랑도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계명

-조욱현신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즉 그리스도께서 이끄시어 완성시키시는 그 ‘새로움’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해방’을 기다리며 신음하는(로마 8,19 참조) 온 세상을 포용하고 있다.


제2독서: 묵시 21,1-5: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제2독서는 악의 완전한 패배를 묘사하고 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1절). 즉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며, 사탄의 생활의 근거지이고 악의 상징인 바다(욥기 7,12; 26,12; 40,25)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승리 앞에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의 새로움은 그러기에 사물의 ‘새로움’이 아니라 인간들의 ‘새로움’이다. 제1독서는 이 새로움을 천상 예루살렘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2절). 이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구원의 사랑을 영원히 거행하기 위해 세상 종말에 ‘어린양’의 주위에 모이게 될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암시한다.

이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온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천상 예루살렘은 ‘신랑을 맞기 위해 단장한 신부’(2절)라는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택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했던 혼인의 비유의 주제가 나타나고 그 예언적 사상이 실현되고 있다. 이 혼인관계는 죽음 앞에서조차 변치 않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당신의 동반자로 포용하시는 ‘혼인애’를 들어 높여주신다. 그러기에 나머지 대목에 나타나는 기쁨의 의미도 알 수 있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3-4절).

복음: 요한 13,31-33a.34-35: 새 계명을 주겠다



이 혼인의 계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양쪽에서 흘러나와 나누어져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32절).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을 기꺼이 받아주실 것을 의심치 않으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이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를 드러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의 징표를 일치를 통해서 반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어 당신의 현존을 확장시키도록 하신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제자들의 완전히 ‘새로워진’ 사랑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3-35절). 예수께서는 이 ‘새 계명’을 ‘계약’으로서 제자들에게 남기시려 한다. 예수님의 이 ‘계약’도 무상의 ‘선물’이다. “새 계명을 주겠다”(34절)의 주다라는 동사는 보통 ‘선물’을 뜻한다.

그러나 어떻게 ‘계명’이 ‘선물’이 될 수 있는가? 그 ‘계명’이 어떤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차원을 발견케 하고 또한 형제적 사랑을 나누게끔 되어있는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적인 내적 신비를 깊이 알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을 밝혀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제 단지 하느님의 뜻만을 알아보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형제적 사랑을 ‘새 계명’이라 하는가? 율법에서도 이웃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 마태 22,39)는 계명을 원수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시면서(마태 5,43-48) 당신의 계명으로 만드신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34절)고 이웃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바로 당신이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수난의 길에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그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형제들에게 발을 씻어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의미한다(요한 13,1-20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새 계명’이 법적인 계명의 의미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제2독서와 복음에서 내용이 ‘새로운’이라는 형용사에서 수렴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계명’ 등등. 그러나 이 ‘새로움’은 이 세상 마지막에 가서 그 빛을 발하게 되겠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즉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 그 사랑의 새로운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활성화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분을 닮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그 안에 세상을 포용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껍데기와 알맹이가 있습니다.

-김준영신부-


껍데기와 알맹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껍데기를 가졌어도, 농약과 방부제가 가득한 알맹이를 지닌 과일이 있는가 하면, 껍데기는 벌레 먹은 상처가 나고 못생겼어도 우리 건강에는 좋은 알맹이를 지닌 과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껍데기를 가졌어도 모형으로 만든 사과는 먹을 수가 없으니 사과라 할 수 없습니다. 알맹이가 진짜입니다.  

얼마 전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운전석 앞에 성모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참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택시 기사가 신자라는 사실에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기사가 신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기사는 저를 보고 꿈에도 신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덥수룩한 수염. 그저 지나는 외국인 승객의 하나라 생각했겠지요. 보여 지는 것은 달라도 내면의 믿고 있는 하느님이 같다는 생각에 더욱 동질감을 느낍니다. 생면부지의 중국인에게서 느껴지는 이 친근감의 정체. 껍데기의 유사함이었습니다. 그 알맹이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마지막 유언을 듣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알맹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내면에 무엇이 채워져야 하는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신앙을 가지면서 그 그릇 안에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하면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바로 옆에 있는 ‘이’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나와 무관한 ‘그’는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나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고, 나를 귀찮게 하는 구체적인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팔아넘긴, 구체적인 유다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옆에서 살 부비고 살아가는 ‘너’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성 아우구스티노



신자의 껍데기, 신부의 껍데기. 그 안의 알맹이는 어떻습니까? 공허한 사랑의 메아리가 아닌, 작지만 알찬 사랑으로 자라고 있는지요? 묵주반지와 로만칼라가 그 이름값을 할 수 있도록 알맹이는 잘 영글어가고 있는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택시에서 내리며 ‘착한 중국 사람을, 더군다나 그 중국 사람이 신자임을 확인했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유영구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채우기 위하여, 자유로이 자기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그분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표지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제자들은, 이러한 스승의 모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스승이신 그분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그 만큼, 또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 진정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최후의 만찬과 연결되어 하신 말씀이고 보면,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미사성제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 뿐 아니라, 우리 서로 서로가 사랑하고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성체성사에 그 기반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눈물이 있고 울부짖음이 있고 슬픔이 있다면, 아직 새 세상이 된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사랑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 - 밖에 없을 것이다.
  
포기와 실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무조건 부정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믿는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 에서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고, 또 실생활에서도 시시각각으로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당신 자녀인 우리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끝으로 요한 1서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참된 사랑, 우리 인생의 숙제

-유영봉신부-


묵상길잡이 :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있다. 배가 불러도 가슴이 고프면 살지 못한다. 가슴은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다. 참 사랑을 체험하고 구원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숙제이다.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이 껍데기이다.


1. 멍 뚫린 내 가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청년실업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들의 실직이 한꺼번에 늘어나고 그 때문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남편의 실직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떠나는 아내들이 많아진다는 보도도 있고, 가난을 비관하여 가족이 동반자살을 한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 국민소득이 3-5만 불이 넘는 소위 말하는 최첨단 복지국가는 실업수당만 해도 생계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이고, 모든 복지시설이나 제도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복지국가의 자살율이 우리보다 더 높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은 "그놈들 호강에 받쳐서 제정신이 아니겠지 뭐!"하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설명되는 일이 아니다. 물질적인 궁핍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려 굳이 병명을 붙이자면 「의미상실증」, 또는 「실존 공허증」 이라고나 할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가져보고 누려보았지만 남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의미를 느낄 수 없는 '멍 뚫린 내 가슴' 뿐이라는 말이다.

2. 멍 뚫린 가슴은 무엇으로 채우나?



아마도 우리나라는 단군이래 최대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놓고 밤에 나다니기가 겁이 나고, 학생들이 마음놓고 학교에 가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유괴 살인 등 강력 사건과 청소년 자살도 급증하고 이혼도 급증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인간화 된 것이고, 우리의 가슴이 허(虛)해진 것이 사실이다. 정치판과 관료사회 뿐 아니라, 금융계, 대학, 병원, 법조계 등 구석구석이 참으로 골고루 썩어 총체적 부패상을 노출하고 있다. 공사판에서부터 법조계에 이르기까지 임기응변과 눈가림 아닌 것이 없다. 종교계라고 크게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런 사회상은 우리 모두에게 삶의 허탈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각계각층에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를 위한 봉사라는 의식은 아직도 희박하다. 집을 짓는 사람도, 옷을 만드는 사람도,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모두가 누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일 안에서 참된 보람을 얻을 수 없다. 누군가를 참으로 위하는 삶이 없을 때,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공허(空虛)를 채우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비록 일 자체가 성직(聖職)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자세가 없을 때, 그는 품꾼에 불과하게 된다. 가족을 위하는 깊은 사랑이 없을 때 가사 일도 무겁고 힘든 멍에가 될 수 있다. 이기적인 껍질을 벗고 남을 위하는 사랑의 삶을 살 때만이 의미상실증 과 실존 공허(空虛)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3.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遺訓)처럼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사랑을 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픈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하려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내 기준을 절대시하고 그 기준으로 주변의 모든 '너'를 판단하고 재단하려고 한다. 내 방식대로, 내 기준대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가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은 우리를 위한 제물로 자신을 완전히 내 놓는 그런 사랑이었다.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간에도 상대방이 완전히 나와 같아지기를, 나에게 맞춰주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려고 하면, 참된 사랑은 이미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큰 관심으로 지켜보며 상대가 자기다움을 지니며 살도록 배려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주변의 모든 '너'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 사랑의 출발이다.  
이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더불어 살면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에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길이 있음을 깨닫자.

일생을 살면서 내 모든 것을 내던져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해보는 체험이 없다면 그것은 불쌍한 삶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야한다.  참으로 '서로 사랑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길이며, 구원의 길이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숙제임을 명심하자. 이 숙제를 풀지 못할 때, 부(富)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빈 껍데기이며, 깡그리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

-이준한신부-


사랑한다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를 알고
그를 존중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 서서 잘 이해해주고
책임을 져주고
그리고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에리히 프럼이라는 학자의 말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필요한 태도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교회에 주신 새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새 명령을 잘 수행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삶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분의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께 깊은 사랑을 받으셨고 당신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당신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깊은 관계 곧 성령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할 제자 유다를 그가 저지를 흉악한 범죄에서 구하려고 애쓰셨지만 제자의 배신으로 고통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했고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것은 배신의 고통보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세상과 제자들을 뒤로 남겨두시고 그 길을 혼자서 가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를 이루신 것 때문입니다. 그 일치는 자기를 챙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이렇게 들립니다. “내가 나를 잊고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너희 자신을 잊고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인간은 사랑함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얻고, 외로움과 공허감을 잊으려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울게 됩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우리 인간의 이러한 사랑을 한 단계 끌어 올리십니다. 제자들의 모든 약점을 잘 아시면서도 끝까지 자기를 비워 사랑하신 예수님은 우리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의 최악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된 대로, 그리고 우리의 향상을 바라고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실패한 제자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해야할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고 존중하고 이해해주고 책임져주고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할 사랑 곧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